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영암(백룡)지맥(終)

영암(백룡)지맥 제3구간 - 태봉산에서 영암천/영산강 합수점까지

by 범여(梵如) 2026. 1. 30.

 

☞ 산행일시: 2026년 01월 25일

☞ 산행날씨: 맑은날씨에 심한 미세먼지

☞ 산행거리: 도상거리 12.2km + 들머리 3.5km +날머리 1.4km / 4시간 0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시종 버스터미널- 시종중학교- 내동리2구- 태간리삼거리- 월송리 삼거리

                    잿리마을 입구- 송산마을- 갈림길- 탐진최공&나주나씨 묘- 태봉산

                    밀성박씨&광산노씨묘- 묘지- 안부- 자라봉길- 송죽정 마을회관- 남암정

                    봉호제 삼거리- 제주양씨 봉안당- 현풍곽씨 제단- 쉼터- 원목교회- 원목삼거리

                    향동마을 입구- 향동마을 버스정류장- 안동권씨합동제단- 신항마을 삼거리

                    신항마을 버스정류장- 신학보건진료소- 신학교회- 글램핑장- 해오름무인항공

                    반학마을 버스정류장- 정동(샘물마을) 입구- 학림사거리- 신학5구 버스정류장

                    이동통신탑- 연화정 갈림길- 학림마을 입구- 학림마을- 하동정씨세장산비

                    19.5m봉- 돈계재- 갈림길- 주안농장- 구산배수장- 구산 양수장-갈림길

                    영산강제방- 영암천/영산강 합수점-다시 영산강제방-다시 구산배수장

☞ 소  재 지: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시종면 

 

남도지방의 지맥길...잡목의 저항이 워낙 심한 곳이라 봄이 오기전에 끝내려고

용을 써보건만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가 있으랴...지난주 서울의 겨울은 추워도

너무 추워서 참으로 힘들었는데 이번주에 삼포(옥룡)지맥을 끝내려 생각했는데

주중에 나주는 계속해서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뜬다...원래 산꾼들은 기상청의

예보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올 겨울에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니...

 

토요일에도 나주지역에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떴지만 일요일에는 맑음이라는

예보가 떠기에 삼포(신산경표상:옥룡)지맥을 마무리하려고, 자정경에

집에서 호남터미널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를 타러가는데 요즘 서울의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춥다...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리며 1시간을 넘게 

멍때리기를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광주행 버스표

새벽1시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하는데 평소처럼 잠에 빠졌다가

얼마나 잤을까, 버스가 갑자기 속도를 멈추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보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조차 안되고, 주변은 눈으로 햐얗게 덮혀있고 도로가 결빙

되었는지 버스가 버벅거리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불안해진다.

도로 결빙 때문인지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광주에 도착한다

광주 유스케어 터미널(04:55)

터미널에 도착하여 평소에 가끔 들리던 설렁탑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식당안에서

미적거리다가 05시 50분 영산포로 가는 버스에 올라 창밖을 보니 온 사방이

눈이 내려 세상은 은백색으로 변해버렸다...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든다...오늘 걸어야 할

길도 만만찮고, 더군더나 나홀로 산행이라 버스안에서 생각이 많다.

 

고민끝에 영산포에서 하차하는 걸 포기하고, 요금을 더 지불한 후 신북터미널로 향한다.

신북터미널(06:58)

서울에서 밤새 내려와서 산행을 포기하고 귀경하기는 너무 억울하다.

결론끝에 내린 결정은 영암(신산경표상:백룡)지맥의 합수점으로

향하는 길이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이 다르기에 지난번에는

신산경표상의 마루금을 걸었는데, 오늘은 삼포(신산경표상:옥룡)지맥

걷는 걸 포기하고 영암지맥을 걸어보기가로 한다.

신북터미널 버스시간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태봉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종면소재지까지

가야 하는데, 터미널에서 시간표를 보고 있는데 시종으로 가는

버스가 들어오는구나...이곳 영암군에서 운영하는 모든 버스는 남도지방의

다른곳과는 달리 전부 공짜란다...타는 사람들이야 우선은 좋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듯이 내가 공짜로 타고가는 이 비용은 나중에

내 새끼들의 빚으로 돌아오는 걸 생각하니 맘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신북터미널에서 꼬마버스를 탔는데 종점까지 나혼자라

버스기사에 미안하다...버스를 전세낸 기분이랄까...나는

미안해 하는데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혼자서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공짜 손님이라 그런지

아예 관심조차 두지않고, 미끄러운 눈길을 버벅거리며 간다

시종터미널(07:35)

영암군의 북쪽에 속해있는 시종면(始終面)은 동쪽으로 영암군 도포면과 나주시 반남면,

남쪽은 영암군 덕진면과 영암천을 사이에 두고 영암군 군서면·서호면, 서쪽은 영산강을

통해 나주시 동강면과 무안군 일로읍, 북쪽은 나주시 반남면·공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암군의 북쪽 첫머리가 된다고 하여 북이시면이라 하였으며, 1914년 나주군

종남면의 25개 마을과 진도군 명산면의 14개 마을을 합할 때, 북이시면의 시(始) 자와 종남면의

종(終) 자를 따서 시종면이라 하였다... 시종면 전체가 해발 고도 30m 이하의 구릉과 저지대이며,

북부의 삼포강 유역은 저습지이다...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크고 작은 저수지

20여 개가 있으며, 해안의 갯벌을 간척하여 농토를 넓혔다... 과거에는 해안과 접하여 주 산업이

농업과 어업이었으나, 영산강 유역 농업 종합 개발 사업에 따라 해수면이 없어지고 많은 농토가

늘어나면서 전형적인 농촌으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7:45)

오늘의 맥길은 거의 대부분이 도로이다...시간적 여유도 있을 것

같아서 태봉산까지 접근하는데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가로 한다.

시종중학교(07:53)

시종중학교을 지나면서 남쪽으로는 영암의 진산인 월출산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데, 오늘도 미세먼지의 횡포가 시작될

모양이다.

내동리2구(07:56)

잘있나요 내인생 / 김정한

 

 

싫다고 떠나는 것 애써 잡으려 하지 말자
싫다고 떠나는 것,
멀리 있는 것을
애써 잡으려 하지 말자.

스쳐 지나간 그리운 것에
목숨 걸지도 말자.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욕망이든, 물질이든
흐르는 시간속에 묻어두자.

지금 내 앞에 멈춘 것들을
죽도록 사랑하며 살자.

오랜 시간이 흘러 나를 찾았을 때
그때도 그들이 못 견디게
그리우면 그때 열어보자.

아마도 떠난 것들,

그리운 것들이 순서대로
서서 나를 반겨주리니.

그때까지 미치도록
그리워도 시간속에 묻어두고
지금 내 앞에 멈춘 것들에
몰입하며 죽도록 사랑하며 살자.

태간리삼거리(08:01)

좌측으로는 태간리로 향하는 821번도로(도로명주소:마한로)이고

태산으로 가는 길은 801번 지방도(도로명 주소:신학로)이다.

 

시종면에 속해있는 태간리(泰澗里)의 북쪽은 시종면 만수리, 남쪽은 도포면

봉호리, 서쪽은 시종면 월송리, 동쪽은 도포면 구학리에 접해 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태산리(泰山里)의 태(泰) 자와 송간리(松澗里)의 간(澗) 자를

따서 태간리가 되었다.

 

태간리 명산마을은 조선시대에 진도군 명산면 지역으로 고종 32년(1895) 영암군에

편입되었으며 그 지명을 따라 명산(命山)이라 하였으며, 송간 마을은 구송마을과

신송마을로 나뉘며, 구송마을은  태간제 저수지의 북쪽에 있으며, 송간마을의 옛

마을이라는 뜻이다.

 

신송마을은 구송마을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송림이 울창하여 그 속에서 나오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였으므로 마을 이름을 송간(松澗)이라고 했다는 구전이

전하고 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송간리, 금성리, 상명리, 입석리와 구송리·

중명리의 일부와 북이시면의 유곡리, 명축리, 회덕리, 태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태간리라

하고, 시종면에 편입되었으며 태간리는 대부분이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에 태간제가 있고 지방도 821호선이 지나간다.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태봉산이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월송리 삼거리(08:04)

영암군 시종면에 속해있는 월송리(月松里) 조선 시대 영암군 북이시면의

지역으로, 동쪽은 태간리, 서쪽은 구산리, 남쪽은 봉소리, 북쪽은 내동리에 접하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명목리, 치리, 신당, 송산, 회덕리 일부와 진도군 명산면의

망월리를 병합하면서 망월리의 월(月) 자와 송산의 송(松) 자를 따서 월송리가 되었다.

 

월송리는 대부분 30m 이하의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월송리 앞에

태산봉(태봉산)과 남산봉이 있으며, 시종저수지와 밭갱이저수지가 있고, 치리 마을·

송산 마을·신소정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송산 마을은 월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치리 마을과 진봉이라는 낮은 산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형성되어 있으며, 송산 마을에 월송리 송산 고인돌 떼가, 신소정 마을에

월송리 신소정 고인돌 떼가 있다...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수박,

총각무, 고추 등도 재배하며 월송리 북쪽 월송리 삼거리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지방도

801호선이, 북동쪽으로 지방도 821호선이 지나간다.

잿리마을 입구(08:06)

시종면 월송리에 속해있는잿리마을은 연접한 내동리, 구산리,

봉소리 어느 쪽이든 재(치:峙)를 넘어야 한다고 해서 '잿리'라

유래된 지명으로 김해 김씨(金海金氏) 집성촌이다

도로가 결빙되어 있어서 상당히 미끄럽다.

하는 수 없이 이이젠을 착용하고 걷는다

송산마을회관을 지나 송산마을에 도착한다

송산마을(08:10)

영암군 시종면 월송리 송산마을은 고인돌로 알려진 마을로

송산 마을에 월송리 송산 고인돌 떼가, 신소정 마을에

월송리 신소정 고인돌 떼가 있다.

갈림길(08:13)

저 고개가 송산고개로 신산경표상의 백룡지맥이 지나는 고개인데

지난해 12월6일 백룡지맥길을 걸었때 지났던 고개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반갑구나...오늘은 고개 직전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서 태봉산으로 가야하기에 이곳에서 좌측으로 향한다

농로로 들어서면서 바라본 태봉산 정상의 모습

탐진최공&나주나씨 묘(08:16)

탐진최공 부부묘를 지나서 전봇대 방향의 우측 능선으로 향한다

마루금에 복귀하다(08:20)

백룡지맥길은 참으로 착하구나...

미끄러운 등로로 올라서니 아침햇살을 받은

태산정이 2여개월만에 다시온 범여를 격하게

환영을 하는구나...나도 방가 방가...

시종면소재지에서 도로를 따라 3.1km를 걸어서 태봉산에 도착한다.

태봉산(太峰山:84.2m:08:26~30)

영암군 시종면 월송리와 봉소리, 도포면 봉호리의 경계에 있는 구릉지 위에

우뚝 솟은 뫼로 큰 산을 뜻하여 태(太)뫼라고 하였는, 한자로 표기하며

태산이 되었고, 봉우리가 첩어로 뒤에 붙으면서 태산봉이 되었고 남동쪽

기슭에 태산마을이 있으며, 영진 5만지도에서는 태산봉(泰山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룡산(420.8m)에서 북쪽으로 내려선 호산(155.6m) 능선이 서쪽으로 흐르다

솟아오른 봉우리로 야트막한 야산 봉우리는 사방이 잘 조망되며, 백룡지맥의

출발지 활성산이 보이고 특히 서편 영산강 쪽이 훤히 보인다고 했는데 실제로

와보니 나무에 둘러쌓여 그렇지는 않으며, 풍수지리에서는 태산봉이 사자의

꼬리 에 해당된다고 한다. 

 

오늘 내가 대한산경표 개념의 영암지맥을 걸어가야 할 서편 영산강 쪽 방향은

바다와 이어지는 이곳 일대는 소금이 나오고 연안에 가득 널려 있는 갯벌에서는

각종 수산물이 풍부했던 곳으로 이러한 풍요로은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철기시대

마한(馬韓) 세력은 이곳에서 수백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마한(馬韓)은 진한(辰韓), 변한(弁韓)과 함께 삼한(三韓)으로 불리웠으며

  기원전부터 AD 4세기 무렵까지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분포했던

  여러 정치집단을 통칭하는 말인데,  3세기 후반의 중국측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에는 54개의 소국들이 분립하고 있었다.

 

* 마한이라고 부르는 정치세력들의 등장시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충청남도

 지역의 경우 BC 3세기 이전부터 상당히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영위한 세력들이

 존재했음을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 BC 2세기초

 한반도 서북부의 주민집단 일부가 고조선 내부의 세력교체와 관련해 남하해온 것이

 이 지역 토착사회의 성장에 일정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북방으로부터 많은 유이민이 파상적으로 남하해 토착세력과 투쟁·

연합하는 과정에서 여러 정치집단들간의 정치·경제적 결합이 촉진되었는데 그중

자체적인 물적 기반의 확대와 중국 군현과의 교역주도권 확보 등을 통해 세력이

우월해진 집단을 중심으로 느슨하게나마 연맹체적 결속이 이루어졌다.

 

3세기 전반 당시 연맹체의 주도세력은 목지국(目支國: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 )이었다...그러나 3세기 후반 경기도·충청남도 일원 연맹체의 주도권은

한강유역에서 발흥한 백제국으로 넘어갔고,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전라남도 해안

일대의 소국들마저 백제에 의해 군사적으로 복속당함으로써 마한연맹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정상에는 2004년 총 공사비 1억 4000만원을 투입하여 철근 콘크리트

팔각 2층 한식 지붕으로 지은 태산정(泰山亭)이 있으며, 정상은 넓은

잔디밭 안부로 체육시설이 있고 조망은 키큰 나무들로 인해서 별로이다

태봉산 2등삼각점(영암 24 / 1990 재설)

다른 길을 걷다

이곳 태봉산에서 우측인 북서쪽으로 가면 구산리를 거쳐 삼포천 합수점으로 가고

서쪽인 좌측으로 내려가면 신학리를 거쳐 영암천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신산경표상 백룡지맥의 끝은 시종면 구산리 여시머리 남쪽 들판은 간척사업으로

매립지역이라 예전에는 강이었을 터이니 옛지형으로 따져 태산봉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신학리 학림마을앞 딴섬쪽으로 가야한다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양식있는 맥꾼들과 산악회에서는 여시머리길이 아닌 신학리쪽이

맥길의 합수점이라 생각하고, 그쪽으로 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대표적인

곳이 무한도전과 좋은사람들 산악회이며, 일부 독립군(나홀로 산행)들로 그쪽으로

향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길을 걷는 산꾼의 지론과 판단이지

어느것이 맞고, 어느것이 틀린다고 결정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각자 다름을 

인정하며 될 듯하다...범여 역시 영암천이 흐르는 신학리쪽이 맞다는 생각을

하는 산꾼중에 하나이며, 더군더나 水界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를

추종하는 者이기 때문에 이 길을 걸어보련다

이곳은 트랙이 없으니 당연히 지도도 없다...그리만치 않은

길을 걸은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면서 봉사문고리 잡듯 내려간다

태봉산으로 올라오는 뚜렸한 길을 따라서 내려간다

우측의 묘지로 이어지는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직진길로 내려간다

주중에 이 지방에 내린 눈을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내려왔가 겪은 혼란스러움...

70넘은 나이에 환자티를 벗지 못하고 홀로 느림보 산행을 하다보니

나 자신이 자꾸만 겁쟁이가 되어가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보이는구나

예전의 그 결기와 똥배짱은 엿몇가락받고 엿장수에게 줘버렸는나?...

밀성박씨&광산노씨묘(08:34)

이 정도 눈이라면 삼포지맥을 가야 했었는데 하는 후회가 들지만

기왕 엎지르진 물...후회한 들 무엇하랴, 지금 맥길에 충실하자

묘지(08:36)

묘지에서 안부로 내려서니 찔레와 아카시아의 잡목의

저항이 상당히 심하다...오늘 길은 트랙이 없기에

선답자의 산행기를 기준으로 조심스레 맥길을 이어간다.

안부(08:38)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빽빽한 대밭이 나오고 그 끝머리에

民家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빠져나갈 틈이 안보인다...2보전진을 위한

1보 후퇴하는 기분으로 대밭앞에서 되돌아 나온다

내려와서 뒤돌아 온 태봉산에서 이어지는 맥길

좌측으로는 태봉산에서 내려와서 전봇대 뒷쪽의

안부 능선에서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편한 길로 내려왔다

자라봉길(08:50)

안부능선에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내려서니 눈덮힌 2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도로명 주소가 자라봉로이고 행정구역은

영암군 도포면 봉오리이다

이곳부터는 지맥길이 마루금이고, 간간이 보이는

봉우리의 해발이 평균 30여m가 안되는 지역이다

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집안의 개쉬키 한마리가

쥔장에게 밥값을 하려는 듯, 이방인을 보고

지랄발광하며 짖어댄다

송죽정 마을회관(08:53)

송호정 마을 유래석

봉오리는 본해 영암군 북일종면의 지역으로서 둠벙이 있어 둠벙개, 봉개, 붕개 또는 봉호정,

봉호정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죽정, 태산리, 망교리, 신호정, 신흥리,

기동리, 원목리와 북이시면 태산리, 중명리의 각 일부와 종남면, 신리기, 가척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호리라 불렀으며, 고려말 공민왕 때의 문하시랑 양석재가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에 불복하여 살았는데 석재의 3손 양홍효가 나주군 다시면 사랑굴에서 1450년 경

봉호정에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며 그 후 양흥효의 후손이 송죽정, 태산으로 이거하여

약 20대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도로를 따라서 걷는데 비닐하우스 너머로 영암의 진산인 월출산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사자봉(667.7m)  우측으로는 구정봉(710.9m), 향로봉(743.9m)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모습이 도로를 걸어가는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남암정(南巖亭:08:53)

송죽정마을회관을 지나니 우측으로 南巖亭이란 정자가 보이는데

이곳 출신 양달사(梁達泗:1518~1555)장군을 모신 정자인데

주변에 농기계들이 있어서 멋진 정자의 모습은 反感되는 느낌이다.

 

을묘왜변(달랑진왜변) 당시 이곳 출신인 의병장 양달사(梁達泗)장군은

모친상을 당해 거상 중에 있었으나 긴박한 사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분개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임금과 어버이는 일체인데 어찌 예제에 얽매여

국난을 외면하고 있으랴”고 했다... 그가 상복을 입은 채로 군사를 모아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니 영암군민들과 형제들이 앞 다투어 뒤를 따랐다.

의병장 양달사 장군은 적을 현혹시키기 위해 오색 비단옷을 입고 고깔을 쓴 광대를

동원해 적 앞에서 광대놀이를 하도록 했다... 한편으로 용감한 병졸 수백명을

인솔해 역 고개를 넘어 일제히 적을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광대들도 일제히 적을 협공했다.

또 성안의 노인과 젊은이들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의병장 양달사 장군을 뒤따라

쳐들어가 적을 요격하는 성과를 거뒀다.

영암군이 을묘왜변 당시 적의 함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의병장 양달사

장군의 적극적인 수성전과 외곽 전투에서 왜구를 격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왜구는 영암전투 패배로 서울로 진격을 포기하고 물러가게 됐다고 보았다.

 

의병장 양달사 장군은 을묘왜변이 평정된 후 집으로 돌아와 모친의 상제를 지켰다.

그러던중 적에게 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으며, 이에 참판 이기경이 전기를 짓고

유선 윤득부가 묘지를 지었으며 목사 임육이 행장을 지었다.

영암군민들은 도포면 봉호리에 양달사의 순국비를 세웠고, 영암읍 장독거리에

공적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선양하고 있다.

 

* 을묘왜변(乙卯倭變)은 조선 명종 10년, 왜구가 침입하여 1555년 6월 9일

  (음력 5월 11일)부터 7월 25일(음력 6월 27일)까지 현 전라남도에 있었던

여러  군현들을 유린하고 제주도를 약탈거점으로 삼고자 공격한 사건이다.

왜선 70척에 5~7천명 규모로, 당시 조선이 건국된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왜구의 침입이었으며, 을묘왜변과 니탕개의 난(1583년)은 각각 당시에는 건국

이래 최대의 외침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전훈은 37년 뒤 더욱 큰 규모로

발발한 임진왜란 초기의 열세에도 조선군을 지탱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눈 위에 표시되는 내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은
내가 지나온 시간들의 고백처럼 뇌리를 스친다
지우고 싶던 날도 있었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도
모두다 흰 눈길 위에서 순하게 녹아 흘러들고 있구나

봉호제 삼거리(09:00)

물탱크가 삼거리에서 좌측으로는 봉호제(鳳湖堤)라는 꽤나

큰 저수지가 있고, 마루금은 우측이 도로로 향하는데  편하게

계속 길을 걷지만 마루금이라는 확신이 서질 않는구나.

왜냐하면 이쪽은 트랙도 없고 이 길을 걷는 산꾼들도 별로 없으니...

도로를 따라서 영암천으로 향하는 지맥길

가던 길을 뒤돌아 보니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태봉산이

범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구나...80m 조금 넘는 산이

꽤나 높게 보인다

제주양씨 봉안당(09:07)

화려하게 조성된 제주양씨 봉안당을 만난다.

오늘은 산길이 아닌 도로투어에다 묘지투어를

겸하는 느낌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늘 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니 작다고 이름할 수 있고, 온갖것이 그에게

돌아가지만 주인노릇 하려들지 않으니 크다고 이름할 수 있다.”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길은 무엇을

하고자 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을 차지하려 하지도 아니하고, 심지어는

존재하고자 하지도 아니한다. 그것은 ‘없음’(無)이다, 그럼에도 어떤 작용이 있다.

현풍곽씨 제단(09:10)

활처럼 휘어지는 2차선 도로(도로명 주소:원목길)를 따라서 가는데

이곳부터 행정구역이 영암군 도포면 봉호리에서 원항리로 바뀐다.

 

원항리(元項里)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원목점·항동·원목리 일부와

나주군 종남면 가척리 일부가 병합되어 북일종면 ‘원항리’가 되었으며, 

1932년 북일종면이 도포면으로 바뀌며 ‘도포면 원항리’가 되었는데,

‘원목(元木)’의 ‘원(元)’과 ‘항동(項洞)’의 ‘항(項)’을 따서 붙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쉼터(09:13)

이곳은 예전에 도포초교 원호분교장이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쉼터와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고, 학교는 흔적조차 안 보인다

원목교회(09:16)

토말로라는 이정표를 바라보면서 미끄러운 눈길을 걷는다

원목삼거리(09:20)

원목 마을 삼거리에서 마루금은 우측으로 꺽어지고 좌측은 원목마을이다

도포면 원항리 원목마을은 마을 길가의 ‘원목점’ 이란 주막이 있어서

원목점으로 불렸다가 행정 개편 후 ‘원목 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원막교회 간판을 끼고 우측으로 향한다

향동마을 입구(09:28)

영암군 도포면 원항리에 속해있는 항동 마을은 남쪽의 구부정한 ‘구개(狗項)’

지형 때문에 ‘구항(狗項)’이라 불렸다가 개편 후 ‘항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혼자놀기

향동마을 버스정류장(09:29)

이곳에서 시종으로 가는 버스는 없고, 전부 영암읍내로 가는 모양이다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티 없이 살라하네)라는 詩로 유명한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께서 설한 자경문(自警文)중에서...

 

歸家不是路(귀가불시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이 아니며

眞人無名相(진인무명상)

참된 사람은 이름과 형상이 없네

 

欲求眞人身(욕구진인신)

참된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거든

莫向心頭取(막향심두취)

마음속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

안동권씨합동제단(09:34)

마루금으로 이어지는 도로주변에는 화려한 묘지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마치 가문들의 勢대결로 비치는 듯 하다...기독교의 교세가 유난히

강한 남도지방에서 유교로 대표되는 호화묘지가 많이 보이는 건

아이러니 하다...특히 영암과 나주지방이 유난히 심한 듯 하다

신학보건진료소를 바라면서 신항마을 삼거리에 도착한다

신항마을 삼거리(09:37)

아침에 태봉산에서 시작한 산행은 북측은 영암군 시종면이고 남쪽은

도포면의 面경계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왔는데 이곳 신항마을 삼거리부터는

도포면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완전히 시종면 신학리로 들어선다

신항마을 버스정류장(09:38)

시종면에 속해있는 신학리(新鶴里)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당시 자연 마을 중

신항(新項)의 신(新) 자와 학림(鶴林)의 학(鶴) 자를 따서 신학리(新鶴里)라고 이름을 지었다.

 

신항 마을은 도포면 원항리 마을에 식수가 모자라 잔등 너머에 새 터를 잡아 마을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항(新項)이라 하였다는 지명 유래가 내려오고 있으며, 학림 마을은

마을 야산의 소나무 숲[松林]에 두루미가 내려 앉아 새 학(鶴) 자와 수풀 림(林) 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학림이라 했다고 한다.

입향은 약 350년 전 평산 신씨(平山申氏) 신계가 현 거주지인 신항의 이웃인 도포면

원항리 항동에 거주하고 지냈는데 풍수지리에 밝은 어떤 사람이 현 위치인 한골

[당시의 야산터]이 매우 길하고 풍요히 지낼 터라고 일러주자 정초일에 마을 천재를

모시고 자리 잡기 시작하여 오늘의 신항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신학리는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에 영산강이 흐르며,

남쪽에 영암천이 흐르고 쥐섬이 있으며, 북쪽에 저수지인 동방제가 있다

신학보건진료소(09:40)

신학교회(09:41)

보건진료소를 지나니 시종초등학교 신학분교 자리에 학교는

폐교되고 지금은 글램핑장으로 바뀐 건물의 휀스가 보인다

글램핑장(09:45)

우리네 농촌의 현실...길을 바라보는 민가의 절반은

사람이 없어서 폐가로 변해버린 안타까운 현실이다

해오름무인항공(09:47)

드론과 관련된 업체인 모양이다

반학마을 버스정류장(09:48)

시종면 신학리의 ‘반학마을(반학리/반학동)’은 ‘반학리(伴鶴里)’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학리는 1914년 통폐합 과정에서 여러 자연마을을

합쳐 개설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학리(伴鶴里)가 신학리의 자연마을로

포함되어 ‘반학리의 ‘반(伴)’과 ‘학(鶴)’ 자를 따서 ‘반학리’로 불렀다.

정동(샘물)마을 입구(09:51)

시종면 신학리에 속해있는 정동(샘물)마을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정월대보름에 우물제라 불리우는 마을제의를 진행하는데

한 해 동안 마을의 풍년과 풍어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한 의례를 행한다.

특이한 것은 정동마을은 본래부터 샘물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동마을의 정호제의 핵심적인 내용은 당산을 찾아 굿을 한 다음 마을의 샘에서

샘굿을 하는 것인데, 정호제에 쓰이는 제물은 흰설기떡을 비롯해 술, 과일, 포 등이다.

전체적인 제의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정호제가 샘과 관련되어 있는 관계로 이 물을

마시는 마을주민들 모두가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한다.

 

『영암전설집』에는 유래담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유래담의 주요 골자는 마을이 워낙 물이 긴한 곳인 연유로 주민들이 물을

얻기 위해 샘을 팠는데 좀처럼 물줄기가 나오지 않았다...깊숙이 파도 보이지

않아 주민들은 포기를 할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시주를 목적으로 마을을

찾았던 스님이 찾았다... 스님은 주민들에게 좀 더 팔 것을 주문했고 주민들은

반신반의하면서 팠는데 스님의 말대로 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샘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801번 도로가 보이고 마루금은 학림마을로 향하는 직진길이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 교통흐름이 뜸한 801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학림사거리를 무단횡단한다

학림사거리(09:54)

낮이라 기온이 많이 올라간 탓인지 도로에는 눈이 녹기 시작한다

신학5구 버스정류장(10:02)

신학5구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도로를 따라가는 마루금은

활처럼 휘어가고 들녘 너머로 합수점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앞에 보이는 넓은 들은 예전에 영산강 하구둑을 막아서

만든 간척지란다

우측의 밭가운데로 水路가 통과하고 그 뒤로 정자인지 아니면

어느 가문의 사당인지는 모르겠는데 멋진 기와집이 보인다

이동통신탑(10:10)

연화정 갈림길(10:11)

이동통신탑을 지나 우측 도로 아랫쪽에는 시종면 신학리 연화정 마을이 보이고

논밭 너머로는 신산경표상의 백룡지맥 마지막 구간인 원구산과 합수점이라

부르는 여시머리가 들 가운데 우뚝선 채 범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종면 신학리에 속해있는 연화정 마을은 연화리(蓮花里)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과정에서 (연화리·연화정 포함)

 ‘연화’ 계열 지명의 형성유래는 알 길이 없다

학림마을 입구(10:13)

좌측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버리고 학림마을 안으로 향한다

학림마을(10:17)

시종면 신학리의 학림마을(학림리) 유래는 1914년 행정 개편으로

통폐합 당시 여러 자연 마을이 합쳐져 개설되었고, 그 과정에서 

학림리(鶴林里)가 신학리로 병합되었으며, 학림마을의 지명유래는 

야산의 소나무 숲(松林)에 두루미(鶴)가 내려앉아 ‘학(鶴)·림(林)’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동정씨세장산비(10:19)

학림마을을 벗어나니 하동정씨세장산비가 산꾼을 반긴다

학림마을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바라보니 예전에 영산강을 간척하여

들로 만들어 버린 제방을 끼고 흐르는 영암천과 모제산(197.3m)이

얼굴을 내미는데 모제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구나

 

모제산을 품고있는 영암군 서호면 금강리의 명칭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금계(金鷄)라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의

등성이와 뒤편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금강(錦江) 마을이라 칭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영산강 물이 비단처럼 맑고 깨끗해 금강(錦江)이라 칭했다는 설이다.

모재산 줄기의 산지로, 동쪽과 북쪽은 영암천과 학산천으로 둘러싸여 있으려,

이로 인해 금강리는 금계포란의 형국이라 하여 금곗등이라 불리기도 한다.
2011년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에서 서호면 금강리를 잇는 길이 3.9㎞의 신금 대교가

준공되어, 광주광역시와 영암군, 목포시를 잇는 관문이 되었다

동남쪽으로는 미세먼지에 갇혀버린 월출산이 오늘은 범여를 끝까지

외호하는 느낌이다...월출산 아래에 있는 도갑사 근처에는 풍수지리의

大家로 알려진 도선국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고 정상 반대편 남쪽에는

범여가 가장 좋아하는 남도 절집중에 하나인 강진 무위사가 있다.

저 곳만큼은 162지맥을 끝내고 꼭한번 다시 가보리라 다짐을 해본다.

 

*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 께서는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에 대한 자료는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10조>와

  1150년(의종 4) 최유청이 편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 등

  10여 편이 있는데, 최유청의 자료인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그 내용만이

  <동문선>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841년(문성왕 3) 15세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불경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대의를 통달하고 법문을 깊이 깨달았으며, 846년 화엄종의 관념적·현학적

  성격의 한계를 인식하고 선종으로 개종했다.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도선이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왕건은 <훈요10조>의 제2조와 5조, 8조에  풍수지리설을 반영한 당부를

  남겼으며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이 있다. 

서북쪽 영산강 너머로는 하은적산(304.2m:영암군 서호면 소재))이 보이고

북쪽으로 다리가 개설중인 뒷쪽으로는 무안군 일로읍의 산들이 보인다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와 학산면 신덕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상은적산과 하은적산은

조선시대까지는 은적산으로 불렀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상은적산과 하은적산으로

분리하여 불렀다고 하며 장정산은 장육정(莊六亭)이 장정이와 장쟁이로 변경되었다가

장쟁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장정산(莊丁山)이 되었다 한다.

 

이 산은 물이 좋아 장정과 덕수정이란 약수가 있으며, <한국 지명 총람>에는 산 밑에

명반천(明礬泉)인 약물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명반석,

옥석, 백분 등의 화장품 원료를 캐내는 광산이 개발되어 2천여 명의 광부가 있었다 한다.

학림마을 지나 농로를 따라서 가다가 들머리인 태봉산을 지나

유일하게 만나는 봉우리가 있으니 19.5m봉이다...이 봉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농로를 버리고 우측의 숲으로 향한다

정글같은 숲을 헤치고 올라서니...

반가운 高手들의 시그널이 보인다...무한도전, 독도는 우리땅이라

외치시는 이경일의 흔적들이 범여를 반긴다...나야 이 분들에

범접조차 어려운 워낙 고수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반갑다.

트랙상에는 이곳에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라 하여 한참을 수색(?)

했건만 찾지 못하고, 아쉬운 맘으로 되돌아 간다

19.5m봉(10:25)

영암천과 영산강의 합수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돈계재(10:30)

시종면 신학리에 있는 고개로 어느가문의 사당인지, 아니면 정자인지

모를 멋진 솟을 삼문으로 대문을 치장되어 있는데 궁금하여 안으로

들어가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구나

그리고 돈계재(돈계재의 유래, 의미, 역사적 배경, 신학리와의 연결 고리

대한 자료)가 없어 이곳을 왜 돈계재라 부르는 이유도 알 길이 없다

담장밖에서 바라본 사당 내부의 모습

한옥에서 솟을문은 보통 세 칸짜리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가운데 칸의

지붕이 유난히 높게 솟아 있는 게 특징으로 솟을문이라고 부르며, 대부분

세 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솟을삼문​이라 부른다.

솟을문에서 가운데 칸은 출입을 위한 문이고, 양쪽 칸은 꼭 문일 필요는 없으며,

한쪽은 창고로 쓰고, 다른 한쪽은 노비의 방이나 다른 용도로 쓰는 경우도 있다.

즉, 실용적인 공간 구성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며, 구조는 같아도 집안의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내부 기능은 다르게 설정하는 셈이다

한옥 솟을대문 또는 솟을문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부잣집, 양반집, 권세 있는

집의 상징이라고 여기며, 담벼락보다 문이 더 높이 솟아 있으니 위엄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솟을대문이 처음부터 그런 의미를 갖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원래 솟을대문은 말을 타고 드나들기 편하도록 만든 기능적인 구조물이었다.

옛날에는 양반이나 관리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말을 타고 이동했다.

일반적인 대문으로는 말이나 가마를 탄 채로 드나들기 어렵기 때문에, 담보다

더 높고 넓은 문을 따로 만들었던 것이다.

논두렁을 따라서 영암지맥길의 마지막 봉우리로 향한다

농로로 올라선 다음에 합수점으로 향하는 길을 가는데 엄격히 말하면

합수점은 이 정도에서 끝내는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종면은  전체가 해발고도 30m 이하의 구릉과 저지이고 북부의 삼포강(三浦江)

유역은 저습지이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저수지 20여 개가 있고,

영산강 하구둑의 영향으로 해안의 갯벌을 간척하여 농토를 넓힌 간척지가 아닌가

영암지맥의 마지막 봉우리를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논 사이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서 걷고 또 걷는다

들 가운데 축사들이 보이고 민가들도 듬성듬성 눈에 띄는데

지도상에는 이곳을 달동네라고 표기를 해놨다...서울에서는

달동네를 철거민촌이나 못사는 동네를 주로 말하는데 이곳의

달동네 의미는 모르겠다

갈림길(10:44)

갈림길 앞에 보이는 들녘은 옛날 창진포(倉津浦)나루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너른 들판으로 변해버렸고, 그 뒷쪽으로 보이는  신금대교가

창진포를 대신하는 느낌이다.

 

영암군 창진포는 시종면 신학리 창진 마을과 서호면 금강리 지네 머리를 왕래할 때

이용하였던 나루이자, 어선이 정박하거나 목포를 왕래하는 객선이 기착하던 포구였다.

현재 영암천의 하류가 영산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으며 2012년 완공된

신금 대교가 창진 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한국 지명 총람』에 의하면 창진포는 조선 시대에 영암군 북이시면에 속하였던 지역이었다.

세미를 거두어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창진(倉津)이라 했다고 하나, 조선 시대의 각종 지리지에서

확인되지 않고, 아울러 창진포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에 영암군 소지포가 언급되었는데, 이를 한글음으로 하면 작지포가 된다. 

 

창진포와 쥐섬 사이에 있는 갯고랑을 따라 목포행 객선 뱃길이 1970년대까지 형성되었다.

당시 목포를 오가는 교통편은 오로지 배편밖에 없었으며, 여객선은 영암호, 진풍호, 인진호가

운항하였고 1961년 10월 18일[음력] 무렵 썰물로 인하여 영암호의 창진포에 진입하기 어렵게 되자

종선(從船)이 접근했는데, 종선이 전복되어 13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영암호는 운행을 멈추었고, 몇 달 후 진풍호와 인진호 두 대가 운항되었다고 한다. 

농로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향하면서 합수점으로 향하는데

남쪽으로는 영암천 너머로 모제산(197.3m)이 계속 따라온다

커다란 농장이 나오는데 지도상에는 이곳을 딴섬이라고 한다.

그러니 예전에 이곳이 육지가 아니고 영산강 하구언인 듯 하다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라 그렇게 불렀나?...

주안농장(10:47)

구산배수장(10:49)

주안농장을 지나자마자 구산배수지가 나오고...

구산배수장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합수점으로 향하는데

강가에다 허허벌판이라 그런지 날씨는 그리 춥지않으나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추워도 너무 춥다...손가락이 빠져

나갈 정도로 손이 시리다...

구산 양수장(10:50)

갈림길(10:55)

영암천 제방을 끼고 들 가운데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서 합수점으로 향한다

걷고 또 걷는다...그러다 보면 끝이 나오겠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아! 이 몸은 無에서 나와

無로 다시 돌아가는가

 

영혼이  일단 몸에서 떠나면

백골만이 땅 위에 버려지고

 

그나마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영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대가 살았을 때

남긴 삶의 흔적이다

 

聖賢의 말씀 중에서

영산강제방(11:12)

합수점으로 가는 길은 다행 억새들의 키가 작아서 걸을만하다.

합수점에 바라본 영암천(靈巖川)의 모습

영암천은 영암군 영암읍에서 발원하여 시종면을 거쳐 서호면에서 영산강에 합류하는

지방 2급 하천으로 군명인 영암(靈岩)에서 비롯되었으며, 옛날에는 덕진천(德津川)이라 하였다.

 

『여지고(輿地考)』[영암]에 “덕진포(德津浦)는 북쪽 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해동여지도

(海東輿地圖)』 군현 지도 중 「영암군 지도」에 덕진교(德津橋)가 보이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에도 덕진포가 표기되어 있다.

 

영암천은 영암읍 동무리·역리·서남리 동쪽 큰들을 지나면서 동쪽 선황 저수지·율산 저수지·농덕 저수지

물을 받으며, 영암읍 대신리 대내 마을 남쪽에 이르러 동쪽 장암 저수지·신석 저수지 물과 합류한다.

덕진 다리가 있는 교번에서는 동쪽 덕진면 노송리 마산 저수지와 노송 저수지 물과 북동쪽 영보역

(永保驛)촌이었던 영보리 냉천 저수지·대천 저수지, 북쪽 백계 저수지·운암 저수지 물을 모아

서쪽으로 흐르며 연정봉 앞에 이르러서는 북쪽 남성촌 입비 저수지, 장산리 장산 저수지, 용강리 용

강 저수지·청림 저수지 물이 덕진면 금강리 당암 마을과 강정 마을 사이를 타고 합류한다.

영암읍 망호리 배날리 서쪽에 이르러는 망호천과 북쪽 금성천, 남쪽 회문천을 합해 해창만으로 나간다.

지금은 간척지로 변해 옛날 갯골이 유로가 되어 북쪽에서 내린 도포천과 합류하고, 옛 영암만으로

나가서는 남동쪽에서 온 호동천과 학산천을 합해 서호면 금강리 지내머리와 시종면 신학리 창진개

서편에 이르러 영산강[영산호]으로 유입하며 옛 영암의 외항(外港)이던 군서면 해창포에서 금강리

성재포까지 새로 생긴 유로는 7.3㎞쯤 된다.

합수점에 바라본 영산강의 모습

영산강(榮山江)은 전라남도 담양군 병풍산에서 발원하여 전라남도 중서부 지역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우리나라 4대강이며 국가 하천인 영산강은 황룡강, 극락강,

지석천, 고막원천 등을 포괄하는 강 이름으로 북동-남서 방향으로 광주, 장성, 나주, 목포,

함평, 무안, 영암을 거쳐 서해로 유입되는 전라남도의 최대 강이다... 본류의 총 길이는

약 150㎞로 짧지만 유역 면적은 3551㎢로 전라남도의 약 29%를 차지하는 강으로

하굿둑 이전은 감조 하천이고 4대강 사업으로 승천보, 죽산보가 있다.

영암천/영산강 합수점(11:25)

영암천(좌)과 영산강(우)이 만나는 합수점에 도착했다.

억새밭 아랫쪽의 물가로 가려했지만 더 이상 갈 수가 없구나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고 베낭으로 인증삿을

남기면서 영암지맥을 종료한다...늘 고생한 두 다리(足)에

감사함을 표하면서...

꿩대신 닭이라고 했던가...오늘 목적지로 삼았던 삼포(신산경표상:옥룡)지맥을

마무리하지 못한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늘 가슴속 한구석에 응어리진 영암지맥을

마무리하니 속은 시원하다...억새밭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어서 이곳에서

영암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인증삿을 남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겨울 강에서 / 정 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합수점에 잠깐 머물렀다가 터벅터벅 영산강 제방으로 되돌아 간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스스로 위로를 한다...70이 넘었어도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어서 좋다고...

다시 영산강제방(11:40)

제방에서 내려와 들길을 걸어가는데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이 차갑다.

그래도 지맥길을 마치고 되돌아 가는 이 맛은 지맥꾼만이 알리라...

되돌아 가는 길에 영암의 진산인 월출산과 좌측의 활성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2014년 10월에 월출산 능선을 호젓하게 혼자서 걸어갈 때가

참으로 좋았었는데 아!...세월이 왜 이리도 빠르게 가노...

다시 구산배수장(11:50~12:25)

합수점을 찍고 구산배수지로 되돌아 오는길에 강한 바람탓에

너무 추위에 떨면서 구산배수지로 되돌아 와서 배수지를

방패막이 삼아서 휴식을 취하면서 버스가 들어오는 학림마을까지

걸어가서 시종가는 버스를 탈 것인가, 아니면 택시를 부를 것인가

고민을 하면서 가지고 온 간식으로 베낭털이를 하면서 원기를 보충한다.

 

결론은 택시를 부르기로 하고 시종면 택시차부로 전화하여 신학리

구산배수장으로 와 달라고 하니, 거긴 모른다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이 기사양반은 배에 기름끼가 많이 낀 모양이다.

 

다른 택시를 호출하면서 구산배수장 도로명 주소를 찍어서 보내주니

20여분만에 택시가 와서 시종 터미널로 향한다

신북터미널(12:55)

시종터미널로 와서 신북가는 공짜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니

시간이 애매하여 다시 택시를 타고 신북터미널로 향한다

신북발 → 광주행 버스표

신북터미널에 도착하니 12시 40분에 광주로 가는 출발해 버렸고,

다음 차가 14시 10분 차란다...시간적 여유도 많겠다...화장실에

가서 느긋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근처 중국집에 가서

해물짬뽕에다 소주한병으로 지맥길 졸업을 홀로 자축하며 식사를 

끝내고 다시 신북터미널로 향한다

광주 유스케어 터미널(15:15)

신북터미널로 되돌아와서 30여분간 대합실에서 멍때리기를 한 다음에

광주행 버스에 오르니 버스안이 따뜻해서 그런지 금방 잠이 들었다가

버스가 광주시내로 들어오면서 신호등 때문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고, 잠시후에 터미널에 도착한다

광주발 → 서울행 버스표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서울가는 버스의 빈자리가 있어서

곧바로 버스표를 예매한 후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