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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世上事

중요한 곳 들이 다 흔들린다.

by 범여(梵如) 2010. 5. 14.

중요한 곳 들이 다 흔들린다.

 

조선일보
권대열 논설위원

나라가 나라로서 유지되려면 최소한의 기능 몇 가지는 국민이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경찰·군(軍)·행정·교육·법 등일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이런 '기본 중의 기본'들이 불안하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것도 최근 한두 달 사이에 한꺼번에 깨지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사회 정의(正義)를 세워야 할 검사들은 정권마다 '정치 검찰' 소리 듣는 것도 모자라

 '스폰서'의 투서(投書) 한 방에 조직의 뿌리까지 흔들거리고 있다. 피의자에게

"너나 잘하라"는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게 됐다. 정의 수호의 다른 한 축인 법원은

 '운동권 판사' '하나회 판사'로 나뉘고 어떤 판사가 배정되느냐에 따라 판결이

180도 달라지는 통에 '로또 재판'이란 말을 듣고 있다.

민생 안전을 책임져야 할 경찰은 관할 불법업소에 단속 정보 흘려주고 그 대가로

돈 받다 무더기로 걸렸다. 김길태 사건 뒤로는 "납치·성폭행범을 신고해도 못 잡는

경찰"로 대접받고 있다.

그뿐 아니다. 국민의 혈세(血稅)를 집행하고 감시해야 할 지방자치단체의 장(長)과

 의원들은 절반이 유치장을 들락거렸다. 올림픽에 내보낼 국가대표를 뽑는 스포츠

지도자들이 승부를 조작하고 어린 선수들을 협박해 입막음을 시킨 일도 드러났다.

수도계량기를 조작해서 6년간 1억5000만원을 걷은 시청 공무원, 건설사 특혜 주고

수천만원 챙긴 공단(公團)·공기업 직원, 재건축 준공검사 눈감아주고 3500만원 받은

소방관 등 끝이 없다.

현재(現在)가 이러면 미래(未來)라도 보여야 할 텐데 아이들 교육을 책임진 교육감이

부하들 승진 대가로 수억원을 챙겼다 구속되고 세상의 바른 교육은 혼자 다하는 것처럼

떠들던 교사 노조는 자기 이름 내놓고 활동하라니까 감추기에 바쁘다. "학교보다

학원이 더 낫다"는 말을 들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군함이 침몰해도 우왕좌왕하던 군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책임론이 불거지니까

이번에는 야전·참모·정보·기무부대끼리 떠넘기기에 바쁘다고 한다.

모두가 몇달 사이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인터넷을 1시간만 검색해도 숱하게 뜬다.

 군·경찰·법원·검찰·학교·시청·구청·소방서·공기업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모두 나라의 기본에 해당되는 분야들인데 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누구한테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어볼 데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세속(世俗)과는 달라야 할 종교까지

좌파·우파로 나뉘어 다른 정파(政派) 때리기를 하고 있다. 요즘 보면 정치인 하는 것 뺨친다.

철 지난 '민주화 투쟁' '구국 투쟁'이 요란하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선 재벌그룹 총수들의

돈벌이 철학 말고는 철학조차 사라져버렸다'는 자조(自嘲)까지 나온다.

공자(孔子)는 "나라 운영에는 '군대' '먹을 것' '믿음'이 필요하며, 그 중 하나만 꼽는다면

믿음이 제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엔 믿음도 없고 믿을 만한 곳도 사라져버렸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공자의 이 가르침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지금 '존립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율곡 선생이 임진왜란 직전의 한심한 나라 꼴을 보고 주창했던

 '경장(更張)'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런 걱정을 '기우(杞憂)'

라고 한다면, 차라리 위안이라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