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학자이자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 그는 누구인가
우리 지역 전북 순창읍 남계리에 가면 신말주후손세거지가 있다.
이 곳은 조선후기에 우리 지리의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한 여암 신경준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여암 신경준 선생은 신말주 선생의 11대 후손이다.
신경준 선생은 조선의 지리체계를 바로 잡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는 실학자이면서도 국어에 더 능통했다고 한다.
늦은 가을,
산경표의 위대함과 여암 신경준 선생의 지리에 대한 사랑과 숨결을 느껴보고자 한다.
여암 신경준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의 산줄기는 어떻게 알려졌고 또 어떤 방법으로 산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그는 조선의 지리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금자탑을 세운 인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 신말주후손세거지(기념물 제86호)
소재지 :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534
신씨(申氏, 本貫-高靈)가 이곳 순창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조선(朝鮮) 단종(端宗)때의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선생 때부터이다. 신말주(申末舟) 선생은 세종(世宗)때부터 성종(成宗)때가지 활동한 학자요 정치인인 신숙주 (申叔舟, 1417∼1475)의 동생으로 1429년(世宗 11년)에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자즙(子楫), 호(號)를 귀래정(歸來亭)이라한 신말주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고 학문을 즐겨 145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54년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면서 관로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 무렵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상심하고 벼슬을 버리고 그의 부인(夫人) 설씨(薛氏, 本貫-淳昌, 薛伯民의 딸)의 고향인 이곳 순창으로 내려와 귀래정(歸來亭)을 지어놓고 시문을 벗삼아 지냈다고 한다.그 후 신말주 선생은 조정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기도 했지만, 노년에 이르러서는 다 시 이곳으로 돌아와 보내면서 70이 넘어서는 지기상합한 노인 10명과 계회(契會)를 맺어 십노개(十老契)라 이름하고 계의 연유와 목적, 성격 등을 적은 서문을 쓰고, 여기에 10인 노인들을 인물도를 그리고, 거기에 경구시를 첨부한 십계노첩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그의 부인 설씨(薛氏)는 순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자질이 총명하고 여성으로서의 문장과 필재가 탁월한 바 잘 알려진 권선문첩(勸善文帖)을 남기기도 하였다.이후 신씨는 이곳 순창(남산대)에 터를 잡고 대대로 세를 이루어 이 고장의 명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신말주 선생의 11대손인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호는 여암(旅庵)이며, 영조(英祖)대의 학자로 17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계(江界), 순천(順天), 부사(府使), 제주목사(濟 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그가 그린 고지도(古地圖) 3점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 후손(後孫) 세거지(世居地)는 신말주(申末舟) 선생 과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를 비롯하여 신경준(申景濬) 선생 등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으로, 1996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세거지 좌측에는 보물(薛氏-勸善文帖)을 비롯한 여러점의 문화재 보호각이 위치하고 있으며 보호각 뒤쪽에는 귀래정(歸來亭)과 수백년 된 노송들이 서 있다.
전라북도에서는 본 세거지를 지난 1994년 8월 10일 기념물 제86호로 지정한 바 있다.
▲ 신경준 [申景濬, 1712∼1781]은
본관 고령(高靈),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庵),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휘릉별검(徽陵別檢), 전적(典籍), 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내고 1762년 서산(瑞山)군수로 나갔다.
이어 장연(長淵)현감, 헌납(獻納), 사간(司諫),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1770년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찬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아 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1771년 북청(北靑)부사, 17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17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이 있다.
☞ 신경준고지도 (유형문화재 제89호)
조선조의 영조(英祖)와 정조(正租)때의 유명한 실학자(實學者)인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이 군사도의 형식으로 작성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오고 있는 옛날 지도 3매가 있다. 지도에는 명칭이 없으나 편의상 북방강역도(北方彊域圖)와 강화도 이북의 해역도(江 華島 以北의 海域圖)로 이름을 붙이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방강역도(北方彊域圖)는 지질이 두꺼운 순수한 한지, 가로 73.5㎝, 세로 111㎝의 크기에 그린 지도로 지도의 아랫부분에는 황해도(黃海道)로부터 위는 백두산(白頭山)에서 분류 (分類)하는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는 산천(山川) 성책(城柵) 도서(島嶼) 지명 (地名) 비(碑) 거리(距離) 등을 자세하게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백두산에서 압록강 하구에 이르기까지는 지명과 마을이름, 거리 등을 더욱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어 군사용 지도로 더욱 중요시된다.강화도(江華島) 이북의 해역도(海域圖)」는 앞의 북방강역도보다 3배 이상 크다. 북방 강역도의 종이보다는 훨씬 얇은 종이를 썼으며 워낙 길기 때문에 가로 세로3폭의 종이를 붙였으며 세로의 아랫부분에도 210㎝가량의 종이를 2폭 더 붙였다. 그래서 가로가 272㎝, 세로가 83㎝인데 우측에는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좌측에는 압록강 하구, 대하도(大蝦島) 소하도(小蝦島) 신도(薪島)에 이르기까지의 대소로서를 그리고 거리를 표시하였으며, 해초(海草), 암초(岩礁)까지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우측으로부터 상면 주위에는 한양(漢陽)으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의 서해 연안의 굴곡 산천 거리등을 자세히 그린 것이다.
이 지도의 작자인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의 후손으로 해박한 지식과 학덕을 겸비한 사람이다. 그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성음(聲音), 율품(律品), 의학(醫學), 복서(卜書), 역대의 헌장(憲 章), 해외의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한다.특히 그는 조선팔도(朝鮮八道)의 산천 지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명으로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와 팔도지도(八道地圖) 등을 감수하였다.
그리고 저서로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1750),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등 음운학적(音韻學的)인 것으로 유명하고강계지(疆界誌),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등의 지리서(地理書)와 여암집(旅庵集) 등이 있다.앞에 소개한 고지도(古地圖)는 오랜 시일을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약간 훼손 된 부분이 있으나 잘 보관되어 온 편이며 현재는 설씨부인(薛氏婦人)의 권선문첩(勸善文帖, 보물 제728호)과 함께 고령 신씨(高靈 申氏) 종손(宗孫)인 신남두(申南逗)의 본가에 세워진 보호각(保護閣, 1990년 신축)에 보관 관리되어 있다
☞ 산경표
山經表는 그 글자의 뜻을 풀어 보면 산줄기의 흐름을 나타낸 표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옛 문헌에 언급되고 지도상에 이미 표시되어 왔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던 산의 계보를 도표로 정리하고 산줄기 이름을 붙였다
표의 기재 양식은 그림과 같이 상단에 대간·정맥을 표기하고 아래에 산·봉·영·치 등의 위치와 분기관계를 기록해 놓았고, 난외 상단에는 주기(註記)로 소속 군현이 적혀 있다.『산경표』의 구성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와 똑같은 방식으로 적어 놓아 우리 나라 산에 관한 족보라고 보면 된다.
족보에 시조 할아버지가 있듯이 백두산이 시조 할아버지로서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족보에 종손의 계보가 있듯이 이 땅 산줄기의 종손은 백두대간이 된다. 그리고 종손의 계보에서 갈라져 나간 차남격의 계열이 열넷이 있는데 그것이 장백정간, 낙남정맥......이런 식으로 갈라져 나가 1정간 13정맥이 된다.
그렇게 갈라져 나가는 나눔의 기준은 강이나 하천 등 물(수계)이 된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산 어디에든 올라 산마루(능선)만 따라서 가면 결국 시조 할아버지인 백두산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산경표』는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대해 가져왔던 지리적인 인식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 산경표의 발굴은 이 땅의 산줄기들이 제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동여지도를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었던 열쇠도 바로 산경표이었다.
한마디로 산경표는 이 땅을 이해하는 관문이며, 산경표가 유명해진 것은 그 책에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들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것 외에 특별할 까닭은 없다.
지리이론서도 아니고 더더구나 누가 편찬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기 때문이지만 산경표에 실린 백두대간으로 인해 막연하게 추측해오던 이 땅의 산줄기가 명확한 이름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편찬자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따라 여암 신경준이 1770년경에 편찬했다는 설과 여암 신경준이 지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와 산수고를 토대로 하여 누군가가 1800년대 초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다.
초기에는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설이 널리 퍼졌으나 현재는 1800년대 초라는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이 책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암 신경준은 이 책이 있게 한 첫 번째 인물이다.
두 번째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의 저술을 토대로 산경표를 만든 사람이다.
최남선의 조선광문회는 그 세 번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조선광문회가 출간한 산경표가 없었다면 아마 백두대간은 영원히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의 연구를 통해 백두대간을 부활시킨 이우형은 그 네번째 인물이다.
이우형은 백두대간을 시각적으로 인식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산경도를 만들기도 했다.
다섯번째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영인 출판하고 해설을 붙인 박용수다.
여섯번째는 백두대간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조석필이며 마지막으로 산경표를 한글화하여 미래를 열어놓은 현진상이다.
이 분들의 노고는 오늘날 산경표가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 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양보경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18세기의 지리학과 신경준
학문의 내용과 수준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의 구조와 지식의 축적 속에서 형성된다.
조선시대의 자연과 공간, 지리에 대한 인식체계의 변화는 조선사회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지식의 축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자연, 지리의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조선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후기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가 지역 내지 국토의 공간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인식한 실학적 지리학자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지리학의 다양화, 계통지리학적인 전문화의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18세기는 조선후기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이며, 지리학에서도 지리지, 지도, 실학적 지리학이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16세기 이후 지방 단위로 개별, 분산적으로 편찬되었던 읍지들을 국가가 종합하여 18세기 중엽에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로, 18세기말에는 해동읍지(海東邑誌)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의 전국 읍지들은 공시적(共時的)인 지리지로서 전국 각 지역의 사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밖에 추관지(秋官志), 탁지지(度支志) 등의 관서지(官署志), 호구총수(戶口總數), 도로고(道路考), 산수고(山水考) 등 다양한 주제별 지리서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던 것도 동일한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는 조선의 지도 발달사에서도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지도의 정확성 등 지도제작 기술의 발달, 양적인 증가가 전국지도, 도별도, 군현지도, 관방도와 같은 특수도 등 다양한 종류의 지도에서 이루어졌다. 또 이 시기에는 17세기의 이수광, 한백겸, 유형원에서 싹튼 실학적 지리학이 체계화되고 발달하고 성숙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사회변화와 함께 국토·지역의 구조가 변화함을 인식하고, 지리학의 중요성과 실용성을 주목하여 지리에 관한 저술들을 남겼다.그러나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1712∼1781)처럼 방대한 지리학 저술을 남기고 자신의 지리적 지식을 인정받아 국가적인 편찬사업으로 연결시켰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실학자들이 재야에서 활동하였음에 반하여 그는 국가적인 사업에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실천적 지리학자라는 점에서 다른 실학파 지리학자들과 구별된다.
묻혀진 지리학자, 신경준
신경준은 전라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고령 신씨가 순창에 거주한 것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가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한 15세기 부터였다.
신경준은 서울, 강화 등에서 수학하였으며, 한때 소사, 직산 등에 옮겨 살았으나 1744년에 다시 순창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관직에 나아간 것은 43세 때인 1754년(영조 30)에 실시된 증광향시에 급제하면서 부터였다.늦은 나이로 관계에 진출한 그는 승문원 기주관,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서산 군수, 장연현감, 사간원 헌납, 종부시정 등을 거쳤으나 관직생활은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어서 15년만인 1769년(영조 45)에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의 영유권에 관한 외교관계의 문건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을 편찬할 것을 청하여, 이 때 홍봉한의 천거로 비변사의 낭청(郎廳)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영조는 신경준이 편찬한 강역지(疆域誌)를 보고 그로 하여금 여지편람(輿地便覽)을 감수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여지편람을 본 영조는 그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文獻通考』와 비슷하다 하여 동국문헌비고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 편찬하게 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찬집청을 설치하여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을 선발하고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도록 함에 따라 신경준은 여지고(輿地考) 부분을 관장하였다.
역대국계(歷代國界), 군현연혁(郡縣沿革), 산천(山川), 도리(道里), 관방(關防):성곽(城郭)·해방(海防)·해로(海路)로 구성된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그의 해박한 지리 지식을 종합하여 편찬한 것이었다. 그는 당대에는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였던 뛰어난 지리학자였으나 20세기의 지리학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리학보다도 국어학자로 일찍부터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주요 저작은 지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 중에 시문과 성리학적인 글들과 훈민정음운해 외에 대작(大作)은 산수고(山水考), 강계고(疆界考), 사연고(四沿考), 도로고(道路考), 군현지제(郡縣之制), 가람고(伽藍考), 차제책(車制策), 등 대개 지리학적인 것으로서 여암 만큼 다방면에 걸친 지리학 저술을 남긴 사람은 없다.여암이 저술한 지리에 관한 장편의 글들은 그가 세상을 뜬 뒤 홍량호의 서문을 붙여 편찬한 여암집(旅庵集), (규장각 소장, 8권 4책, 필사본)과 1910년에 후손들이 목판으로 간행한 여암유고(旅庵遺稿), (13권 5책)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문집에는 그가 남긴 시문(詩文)만 묶여져 있다.신경준의 업적과 그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1939년부터 여암전서(旅庵全書)를 간행하였는데 원래 계획했던 신경준의 저작을 다 싣지는 못하였으나 도로고를 제외한 지리에 관한 글들이 대부분 실리게 되었다.
1976년에 기존에 출간되었으나 구하기 어려운 여암유고와 여암전서, 그리고 여암전서에서 간행하지 못하였던 도로고(道路考)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海), 연보, 후손댁에 전하는 강화도전도, 팔도지도 등을 합해서 다시 여암전서(旅庵全書), (경인문화사 간)라는 이름으로 간행함으로써 여암의 저술이 대부분 망라되었다
조선 역사지리학의 체계화
1756년에 편찬한 강계고는 신경준의 저작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역대의 강계와 지명 등을 고찰한 역사지리서로서 일본, 대만, 유구국(오키나와), 섬라국(태국) 등도 별도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역사지리학은 당시에는 지명의 고증, 영토 국경 수도와 도시의 위치 및 그 변화 등을 고찰하는 것을 지칭하였으며 , 오늘날의 역사지리학의 개념과는 상이하다.조선의 역사지리학을 체계화하였다고 평가받은 강계고의 서술체제는 대체로 국가적 단위를 중심으로 각국의 국도(國都)와 강계(疆界)를 정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도와 강계 항목에서는 각 조항마다 관련이 있는 지명이나 산천, 국가들을 덧붙였다. 서술방식 및 자료이용과 관련된 특징을 보면, 문헌 실증적인 입장이 관철되고 내용적으로는 주로 강역에 대한 비정과 지명고증이 특징이다.
특히 언어학이나 금석학 지식을 역사연구에 적극 응용하였으며, 역사지리고증에 방언을 활용하거나 음사(音似 ) 이찰(吏札) 등의 자료를 적극 활용한 점도 발전적인 면모이다. 또한 많은 다양한 자료, 기존의 문헌자료 외에도 금석문이나 사찰자료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였다. 문헌자료에서도 사료의 인용범위를 넓혀 야사자료, 그리고 만주일대를 조선과 삼한의 지역으로 비정하였던 요사, 성경지와 같은 자료도 요동과 요서지역에서의 열국들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용하였다.
강계고에 나타난 강역인식은 주로 기자조선 및 한사군, 고구려 등 국가들의 초기 중심지를 요동일원으로 비정함으로써 확대된 영역관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동시기의 이익이나 이종휘의 영역관보다는 상대적으로 좁으나 조선 전기의 영역관에 비해서는 구체적이고 확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계고는 당시까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룩한 우리나라 역사지리에 관한 가장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서 중의 하나였다 옛 국가, 영토, 지명의 변천 등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였던 역사지리학의 탐구는 주체로서의 국토의 중요성과 자국(自國)의 역사성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신경준 이후 한진서, 정약용 등으로 이어졌다.
사회와 공간의 변화 인식 : 유통과 유통로의 파악
신경준은 유통과 유통로에 관한 저술로 도로고와 사연고를 남겼다. 도로고(4권 4책)는 어로(御路)와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는 육대로(六大路), 팔도 각 읍에서 사계(四界)에 이르는 거리, 그리고 사연로(四沿路), 대중소(大中小)의 역로(驛路), 파발로(擺撥路), 보발로(步撥路), 봉로(烽路), 해로(海路), 외국과의 해로, 조석(潮汐), 전국 장시의 개시일 등 각종 도로 즉 육로와 해로, 정기시장이 망라된 글이다. 1770년에 쓴 도로고 서문에 나타나 있는 신경준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로의 공익적(公益的)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으며,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로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인식하여 도로고를 저술하였다.
사회와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가장 먼저 점증되는 분야가 도로임을 간취하였으며, 환경지각(environmental perception)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 중국 고제(古制)를 바탕으로 현실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정밀한 이론의 추구를 기했으며, 도로 이정(里程)에서도 정확한 측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도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치정(治政)의 기본으로 치도(治道)를 내세웠다.도로고는 유통경제, 시장경제,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육로와 수로 등 도로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잘 정리하여 반영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공간적인 변화의 상호작용, 그리고 양자의 관계의 중요성을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8세기 후반 이후 도로표(道路表), 정리표( 程里表), 도리표(道里表) 등의 책자들이 많이 제작되고, 도리표를 함께 그린 지도들이 출현하는 것도 이 책의 영향을 반영한다.
사연고(四沿考)는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과 팔도해연로(八道海沿路), 그리고 중국과 일본으로의 해로(海路), 조석간만 등 바다를 낀 연안지역을 정리한 글이다.자원이나 도로의 측면에서 바다와 해안도서가 지니는 경제적인 효용성, 연해 지역에 대한 국가 민간의 관심의 증대, 바다가 지니는 국방상의 중요성 등을 깊이 인식한 데서 출발한 글이라는 점에서 신경준의 사회와 지역에 대한 통찰력과 체계적 정리를 보여 주는 저술이다.
지도 제작
우리 나라 지도 발달의 전환기였던 18세기 중엽에 신경준은 지도 제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국여지도발(東國輿地圖跋), 동국팔로도소지(東國八路圖小識), 어제여지도소서(御製輿地圖小序) 등의 글을 보면 그가 지도 제작에 일가견을 가지고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지도발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던 농포자 정상기(1678∼1752)와 아들 정항령, 손자 정원림까지 삼대에 이어졌던 지도제작의 기법을 정항령과 친교가 있었던 신경준도 나누어 가졌음을 지도에 관한 그의 글에서 살필 수 있다1769년 국왕 영조가 강역지 편찬에 관해 물었을 때, 신경준은 360주의 각 읍지도를 따로 만들 것을 건의하였으며, 동국문헌비고 편찬을 진행하면서 영조의 명에 따라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제작하였다. 여암유고 권5, 「발(跋)」 동국여지도발(東國輿地圖跋)에 의하면 신경준은 정항령(鄭恒齡)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게 하고, 신경준에게 별도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 것을 명하자, 신경준은 공부(公府)에 있는 지도 10여건을 검토하고, 여러 집을 방문하여 소장된 지도들을 살펴보았으나 정항령이 그린 지도 만한 것이 없어 정항령의 지도를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지도에 약간의 교정을 가하여 6월 초 6일에 시작하여 8월 14일에 지도 편찬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열읍도(列邑圖) 8권, 팔도도(八道圖) 1권, 전국도(全國 圖) 족자 1축을 임금께 올렸다. 이 지도는 주척(周尺) 2촌(寸)을 하나의 선으로 하여 세로선 76, 가로선 131개의 좌표 방안 위에 그렸던 방안지도(方眼地圖)였다. 방안지도(또는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지도)는 모든 군현지도를 같은 축척으로 그림으로써 군현지도들 사이의 분합(分合)을 가능하게 한 지도이다.이로써 전국의 각 군 현지도를 연결시켜 지역별, 도별, 나아가 전국지도로 합해 볼 수 있고, 나누어 볼 수도 있다. 동일한 축척을 가진 군현지도들은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일정한 축척을 적용함으로써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도안에 1리, 혹은 10리, 20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리게 되면, 지역과 지역간의 거리 파악이나 방위, 위치 등이 더욱 정확하고 정교하게 된다.
축척의 적용, 대축척지도, 전국을 포괄하는 공간적 범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18세기 중 후반에 여러 종 제작된 방안지도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신경준은 회화식지도의 전통과는 다른 방안지도를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의 제작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자연인식의 체계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산천(山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으니, 여암 신경준의 산수고가 그 선구였다. 산수고는 우리 나라의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의 분(分)·합(合) 체계로 파악한 한국적 지형학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산수(山水)를 중심으로 국토의 자연을 정리하였으나 그 속에는 인간 생활과 통합된 자연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산수고는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이루고 있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지리서이며, 한국적인 산천 인식 방식을 전해 준다.
산수고는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산(山)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은 물(水)이다. (우리 나라) 山水는 열 둘로 나타낼 수 있으니, (산 은) 백두산으로부터 12산으로 나누어지며, 12산은 나뉘어 八路(팔로)가 된다. 팔로의 여러 물은 합하여 12水가 되고, 12水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와 나누어지고 합함의 묘함을 여기에서 가히 볼 수 있다. 고 하여 산수고를 쓰게 된 동기와 산수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이 서문에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산과 강을 분합의 원리로 파악하여 대칭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음양의 구조로 이해하였던 저자의 생각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의 주요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로 파악한 점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연의 운행을 보면 1년은 열 두 달로 완결되며, 우주 만물에는 양과 음이 있다.우리 나라의 산천도 일반 자연법칙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어 12개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있으며, 산수의 흩어짐과 합함, 우뚝 솟아 서 있음과 아래로 흘러내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를 소우주로 이해하여 완결적인 존재로 파악하던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산중에는 삼각산을, 물은 한강을 으뜸으로 쳤으니, 이는 京都(수도)를 높이는 것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서문에서는 백두산에서 조선의 산들이 시작하는 것으로 기록하였으면서도 실제 산의 분포를 서술할 때는 한양의 삼각산에서 시작함으로써, 그가 백두산 중심의 사고와 수도 중심의 사고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산수고는 이와 같이 우리 나라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 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水經)과 수위(水 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던 사실을 신경준의 산수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날줄(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 한 것이다.
신경준의 우리 나라 산천에 대한 이와 같은 체계적인 파악은 전통적 지형학 또는 자연 지리학의 체계화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자연현상을 주제로 하여 전문적으로 접근하였던 산수고에서 우리는 지리학의 다양화와 계통지리학적인 요소, 나아가 근대지리학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지리학의 종합화와 공유화
신경준은 왕명에 의한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함으로써 당시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정리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지리관련 내용을 총정리한 여지고 부문을 담당하여 그의 지리에 관한 저술을 여지고에 종합해 놓았다.
동국문헌비고는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選),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 등 13고 1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여지고」는 17권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핵심적인 위치를 구성하였다.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신경준의 여러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저술들을 종합 정리하는 차원에서 편찬된 것으로, 고려와 조선전기 자료와 연구성과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전문적으로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한백겸, 유형원, 홍만종, 임상덕 등 관련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종합 정리하였다.
따라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한백겸 이후 일련의 역사지리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비고 여지고는 전장 제도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백과전서학적 연구에, 개인들이 발전시켜 온 역사지리학의 연구성과를 정부적인 차원에서 최대한 결집시키면서 이룬 조선후기 역사지리학 발전의 중요한 결과물이자 발전의 지표라고 평가할 수 있다.그러나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역사지리학뿐만 아니라 교통, 시장, 군사, 방어, 산천과 같은 경제지리학, 국방지리학, 자연지리학, 문화지리학 등이 종합된 책으로, 신경준의 사상이 결집된 책이다.
또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개인적인 수준의 학문 연구를 사회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저술이며, 사회적인 검증을 거친 실천적 지리서라 할 수 있다.
이는 신경준이 지식의 사적 소유를 넘어 이를 공유화하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지리적 공간적 지식의 공유화는 개인과 사회의 공간 인식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사회 경제변화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신경준의 저술들은 더욱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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