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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山經表

『산경표』를 다시 펴내면서

by 범여(梵如) 2012. 2. 7.

『산경표』를 다시 펴내면서

 

 

 

하나의 문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가치는 시대의 변화와 필요, 재인식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던 문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 반대로 무관심 속에 묻혀 잇던 자료가 새롭게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산경표』는 80년대 중반부터 비록 일부에서나마 주목하고 있는 지리서이다. 『산경표』의 문헌적 가치는 무엇보다 이 책이 우리 고유의 지리인식에서 비롯된 산줄기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뚜렷한 활자를 통해서 처음으로 확인해주는 데 있다. 그리고 백두대간, 장백정간 등이 책에 나타나는 산줄기 이름이 우리가 배웠고 또 그렇게 믿으면서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의 명칭과 다르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 이름과 구성은 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통용되었고, 그로부터 해방된 지 반 세기가 가까워진 지금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국토는 하나의 민족이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민족생존의 공간적 터전이다. 그리고 국토는 단순히 지형, 기후, 토양 등 물리적 자연환경만을 뜻하지 않고, 대대로 살아오면서 이룬 우리의 민족문화가 뿌리 내리고 있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따라서 미미한 지명일지라도 그 속에는 그 땅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지리 인식과 언어, 풍습 등 생활양식이 용해되어 있다. 이러한 지명의 왜곡, 훼손은 결과적으로 땅에서 비롯된 삶의 양식과 정신적 소산을 손상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913년 최남선의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출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교육 때문에 그 가치가 80년 가까이 버려져 있었고 민족 간의 전쟁 등이 땅을 휘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광문회 간행의 『산경표』도 이제는 희귀한 귀중본이 되었다. 이를 다시 펴냄으로써 조선광문회에 지고 있던, 소중한 문헌을 보존, 보급해야 하는 빚에서 얼마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산경표』가 제시하고 있는 산줄기와 이름 그리고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분명한 풍수지리사상 등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과 사상 등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 앞에 서있게 괸 것이다.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혹은 '일본인이 만들었기 때문에'라는 식의 배타적인 민족의식을 억제하고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출 때만이 '창씨개명'된 우리 산줄기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발간은 이같은 연구와 논의를 위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경표』에 대한 연구가 모든 관련 분야에서 하루 속히 그리고 심도 있게 진전되어 앞으로 10년 뒤인 21세기에는 우리 교과서에 백두 대간이라는 뚜렷한 활자가 자리잡을 수 있기를 갈망하면서, 영인에 사용된 『산경표』는 필자 소장의 조선광문회 본임을 밝힌다.
 

                                                                      박 용 수 (199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