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여관 6인의 순정,사랑,예술,인생 이야기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 이응로 화백. 김태신(일당스님=
김일엽과 일본인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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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꺾어버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center>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면박을 주던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소일한다</p>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김태신이다.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느낀 혜석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p>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p>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뜻하지 않게 이른바“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남편을 기다려 온다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 날 같은 희망으로살아 왔지만,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추억의 인물은 김태식 한 사람만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 시대 한국 최초의여자 유학생이자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나의 고독, 나의 절망,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이로써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6사람의 이야기가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