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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풍류를 찾아서

그옛날-"구룡포"라는곳

by 범여(梵如) 2012. 10. 31.

 

 

 

 

 

<특집> 日帝가 춤을 추는 ‘구룡포공원‘

차 례--------------------------
1. 프롤로그
2. 구룡포읍의 일본인 이주
3. 도가와 야사브로
(1) 조선으로 건너오다
(2) 구룡포 이주
(3) 수산업의 막후 실력자
4. 구룡포공원의 뒤범벅 역사
(1) 구룡포신사
(2) 제국재향군인회 비
(3)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
(4) 구룡포공원 돌기둥
(5) 구룡포용왕당
(6) 충혼탑과 충혼각
(7) 공원계단의 재활용

(8) 부동명왕상과 사자상의 재활용
(9) 뒷골목이 된 구룡포공원
(10) 구룡포정신
5. 구룡포와 ‘구룡포회’
6.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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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구룡포향토사 편찬회가 ‘구룡포향토사’를 집필하면서
작성한 내용 중 구룡포공원에 관한 것을 일부 정리한 것으로
영일군사(迎日郡史)나 포항시사(浦項市史)에 없는 내용을
독자적으로 찾아내고 분석했으며 케이뉴스가 6월 호국의 달을 보내면서 충혼각이 있는 구룡포공원의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는 특집으로 마련했습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여러사정으로 최근 자료실로 백업했지만 독자들의 절대적인 요청으로 다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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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prologue)

꽁치를 다듬어 구룡포의 차가운 겨울 바다 바람에 쏘이면 사람들의 입맛은 탄성으로 표현된다. 이 맛의 근원이 바로 경북 동해안의 어촌 구룡포에 있어 구룡포과메기라 부른다.

비록 과메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구룡포는 전국 최대의 대게와 오징어를 어획하는 항구다.

지금은 인구 1만이 겨우 넘는 소읍으로 전락해 ‘퇴락한 어촌’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1800년대 말부터 일본 어업인들이 신대륙을 개척하듯 하나둘 진출하면서 수산세(水産勢)가 확장됐고 1942년 10월 인천과 같이 읍으로 승격될 때만 해도 부촌의 부러움을 받던 항구다.

고등어 어획으로 돈을 만지던 어선업자들이 물 쓰듯 돈을 뿌리던 구룡포는 청어, 정어리까지 넘쳐나 동해안의 어업전진기지로 변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개(犬)가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비유될 만치 불황을 모르고 있던 곳이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 어획부진과 어가의 하락은 소득의 감소와 종사자의 이동으로 이어지면서 인구까지 줄어들었고 수산세력도 약화됐다. 어민들은 그나마 희망이 있어 일하기보다는 아는 게 뱃일이라 손을 놓을 수 없어 어업을 한다고 하소연한다.

이처럼 구룡포는 어촌으로 성장한 탓에 산업화의 물결이 더디었고 도시화가 진행되지 못한 곳이다. 특히 구룡포의 번화가였던 구룡포공원 주변은 변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보다는 아직도 일제의 근대문화가 옛날이 그리운 듯 춤을 추고 있으며 일본인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 근대문화재는 고대문화재보다 오히려 쉽게 넘어지면서 사라지는데도 구룡포공원 주변은 그때의 시간이 멈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발전이 더딘 곳이고 개발의 대상에서 소외된 곳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포항시가 구룡포의 일제시대 주택과 주변거리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거나 복원해 관광자원화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에 본 고(考)에서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구룡포가 인본인들의 유입과 활동으로 동해안 수산업의 전진기지로 변화되는 과정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또 이들은 가고 없지만 거주했던 수십 년 간의 흔적과 구룡포의 일본 근대문화와 역사를 통해 당시의 부귀와 굴욕이 교차하는 현장을 둘러보며 구룡포사람들의 혼재된 문화의식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일제가 물러나는 해방직후의 노도와 같던 반일 의식이 구룡포에서 만큼은 조용했다는 사실과 구룡포의 반일 역사보다는 환경적으로 수용했던 지역민의 의식을 확인하고자 한다.

 
▲구룡포 정어리잡이가 대풍을 이뤘다는 1926년 신문보도


▲구룡포공원이 있는 구룡포읍 용주리, 장안리의 요즘 전경


2. 구룡포읍의 일본인 이주
원양어업을 통해 희망을 찾던 일본인들은 1800년대 점진적으로 대륙으로의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일본 군함 윤요호사건을 계기로 1876년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일본인의 조선 내 활동이 보장되면서 원양어업으로 동해안을 넘나들던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도 부산, 원산, 인천을 중심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특히 조선 연안으로의 진출은 동서남해를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꾸준히 진행됐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업종별로 집단을 이뤄 신대륙을 개척하듯 조선해로 진출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구룡포로 진출하는 첫 집단 어업인은 1878년경 일본 가가와현(香川縣) 출신 건착(巾着) 어선들이며 이들이 건너오면서 조선 근해어업이 조명을 받아 수산물 운송업도 같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 뒤 1902년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50여척이 내항하면서 이후 고등어류가 풍어로 넘쳐나 구룡포의 수산업이 개척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강산현(岡山縣)에서 정어리 지예망(地曳網) 어선 10여척도 진출했다.

이 가운데 강산현(岡山縣) 어업자들은 후일 장기면 모포리에서 가가와현(香川縣)출신이 대부분이던 구룡포로 다시 이주해 구룡포발전에 초석을 이루는 어업인들이다.

1904년에는 다시 가가와현(香川縣) 소전조(小田組) 80여척이 집단으로 진출했으며 1906년경에는 오사카(大阪)의 유어조(有漁組) 수십 척이 구룡포로 진출했다.

마침내 1909년에는 이들 유어조(有漁組)의 구룡포항사무소가 설치되면서 고등어어업의 근거지로 시발이 돼 일본을 떠나 아예 구룡포에 정착한 이주어민도 1912년에는 42호수나 됐다. 1929년이 되면서 일본인의 당시 창주면 구룡포리 거주는 192호에 815명이나 됐지만 1933년이 되면서 이주호수는 모두 220호수에 937명으로 늘어났다. 그 가운데 순수 어업을 하는 주민이 절반을 차지했으며 1936년에는 출입선박 1995척에 선박규모도 13만9182t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영일군에서는 포항, 구룡포, 흥해 순위로 일본인 거주 수가 많아졌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밀집해 취락을 형성했으며 구룡포의 경우는 공원이 있는 장안리와 용주리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됐으며 이곳에 집중됐다.

동해안이 수산업의 희망이 보이면서 조선을 넘보는 일본 수산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이주가 본격화되지만 이들 일본인 어업자들이 모두 풍요롭게 산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8년의 구룡포 지도

 


3. 도가와 야사브로

(1) 조선으로 건너오다

구룡포 근대사를 논하면서 일본인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를 빼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어렵다. 그가 비록 일본인이지만 반일(反日)의 민족 정서 속에 존경은 받지 못했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구룡포에서만은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것은 구룡포를 개척한 장본인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兒島郡 山田村) 출신 수산업자 도가와 야사브로는 1899년경부터 원양어업을 위해 각종 회유성 어종이 풍부한 조선의 동해로 출어하다가 27세가 되던 1902년 8월 현재의 장기면 모포리로 이주해 온다.

이곳은 다른 지역보다도 기온이 따뜻한 포구로 바위가 동해로 돌출해 구석을 만들고 있다 하여 바우꾸지(巴衣浦)라고도 불렀다. 당시 장기면에는 33개의 나루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모포나루가 최고였다. 모포리에는 수산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수산물이 풍성했고 항구로써 구룡포나루 이상의 어촌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농업보다는 어업을 중시하던 곳이었다.

 

(2) 구룡포로 이주

모포리에 거주하며 근해어업과 원양어업을 했던 도가와 야사브로는 33세가 되던 1908년(대한제국 융희 2년) 도로개설이 보다 쉽고 수산업기지로 전망이 밝다고 판단한 현재의 구룡포읍(滄州面)으로 거주를 옮긴다.

각종 수산물의 많은 어획에도 불구하고 당시 구룡포도 역시 항만시설이 미비했으며 수산물을 운반하는 내륙으로의 도로건설도 돼 있지 않던 시기였다. 도가와는 1913년 포항간 도로 개설에도 힘을 보태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운수업(동해산업)을 시작해 지역의 교통개선에도 적극 나선다.

또 구룡포항만 조성이 자신의 사업은 물론이고 구룡포에 필수라는 판단아래 1917년 구룡포항만수축기성회(九龍浦港灣修築期成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방파제 축조에 나선다.

1914년 4월에 관공서가 들어서자 이주어민이 급격히 늘어났고 어업인들의 협동체 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22년 11월 9일 일본인들이 주축이 돼 구룡포어업조합을 만든다. 어업조합은 차츰 조선인들도 많은 참여를 했고 1929년에는 일본인 75명, 조선인 523명 등 모두 598명으로 늘어난다.

어선의 안전을 위해 1923년 2월 28일부터 1926년 8월 2일에 걸쳐 총독부 보조, 지방비, 민부담 등 총공사비 35만원으로 182m의 방파제를 만드는 제1기 매축공사에도 나선다.

또한 방파제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고 1931년 경북빈민구제사업(慶北貧民救濟事業)의 하나로 1932년 2월부터 총공사비 59만4천원으로 방파제확축매립공사(防波堤擴築埋立工事)를 시작해 1935년 3월 방파제연장 70m(38만원)와 재해복구연장 135m의 공사를 추가했다.

또 구룡포항에 부산물이 쌓이면서 수심이 얕아질 때마다 경상북도 토목과장에게 진정해 대형선박의 입출항을 위한 항내 부산물 준설(浚渫)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구룡포를 개척하기 위한 항구조성과 구룡포를 수산업의 전진기지로 끌어올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장본인이었다.

▲구룡포 병포리에 있는 용두산에서 돌을 채취해 구룡포방파제 공사장으로 레일을 깔고 운반한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보도된 내용. 진흥조합장 십하(十河)라는 十河 彌三郞(도가와 야사브로) 이름이 나온다.

▲구룡포항 확축공사 준공비


(3) 수산업의 막후 실력자

그는 구룡포는 물론이고 경북지역의 수산업 분야에 다양한 자리를 가졌고 재력만큼이나 자비를 내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총독부의 국고지원에다 1만5천원을 기부한 나카베 이쿠지로우(中部幾次郞)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도움과 자비 등으로 구룡포발전의 원동력이 된 방파제를 만들었다. 이 때 도가와 야사브로는 경북도 평의원(1924)으로 활동하면서 영향력이 넓어져 그의 명성은 구룡포 뿐만 아니라 본국인 일본에서도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또 도가와 야사브로가 해산물 수송을 위해 포항에서 구룡포간 도로 건설에 앞장서면서 일본에서도 정책적으로 많은 배려를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인사흥신록(朝鮮人事興信錄)과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도가와 야사브로는 경북 수산업 발전에 공로가 많았다. 경북수산주식회사 감사, 농산어촌진흥조합장(農産漁村振興組合長), 위생조합장, 제국재향군인회 고문, 구룡포소방조 고문, 번영회장, 동해산업주식회사 사장 등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늘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특히 운수업을 했던 그는 구룡포리에서 대보리로의 자동차 개통이 필요하다고 보고 자동차 개통에 앞장섬으로써 1934년 2월 1일 새로운 항구로서 주목을 받던 대보와의 교통을 트고 수산물수송을 원활히 했다.

또 구룡포어업조합(九龍浦漁業組合)을 설립해 조합장이 됐으며 어업인들을 지도하고 어업 방법을 개선시켰으며 조합을 통해 공동판매하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당시 대보로 가는 자동차 도로 개통을 했다는 신문의 보도 

4. 구룡포공원의 뒤범벅 역사

(1) 구룡포 신사(神社)

일제시대 구룡포의 중심은 장안리와 용주리였다. 이들 마을의 뒷산 언덕인 구룡포 5리 382-7번지는 구룡포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터로 도가와야사브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은 구룡포도로를 개설하던 1913년(大正2年) 5월 왜국의 이데올로기를 심게 되는 신사를 세운다.

신사는 조선에 대한 정신적 지배를 상징하며 군국주의적 침략정책과 식민지 통치를 대표하는 건물로 특히 1930년대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부분의 면 단위 이상에는 하나씩 세웠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엔 소위 황민화(皇民化)정책으로 노골적으로 참배를 강요하며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처럼 한일합방이 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서울 남산을 비롯한 전국 요소요소에 건립하고 참배를 강요했는데 일제 말기로 올수록 심했다.

조선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계속 장려하면서 1936년 신사제도 개정에 관한 칙령 5건을 공포해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듬해는 기독교회에도 참배를 강요했다.

게다가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6월까지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2천2백29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해 각급 학교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발광을 했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사는 1919년에 시작해 1925년에 완공했지만 구룡포신사는 면 단위에도 불구하고 매우 빠른 1913년에 세워졌다. 1897년 10월 개항된 목포도 1910년에 신사를 만들어 참배를 하게 했는데 1913년에 신사를 세웠다는 것은 좀 이른 일이다.

그래선지 구룡포신사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고 다소 왜소하고 단순화된 모양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구룡포신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구룡포공원에서 50여m 위쪽 일제시대 사찰인 본원사(本願寺)로 쓰다가 해방 후에는 카톨릭 재단에서 공소로 사용하던 일본 양식의 목조건물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해 용왕당 자리에 신사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 올해 용왕당 신축공사 터파기하던 중 나온 주춧돌 4개와 쵸우즈야라는 돌을 찾아내면서 신사의 위치와 건립 연도를 밝혀냈다.

이 쵸우즈야라는 돌은 신사 참배에 앞서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해 손을 씻고 입을 행구는 물을 담아 흐르게 하는 돌이다.

또 구룡포 신사에도 토리이(鳥居)라고 하는 구조물이 있었는데 신이 있는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내는 신도의 상징으로 신사입구에 어김없이 세워져 있다.

당시 구룡포의 신사에 있던 토리이는 처음에는 나무로 세워졌으나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가 세워질 때 콘크리트로 교체됐다.

현재 목재 토리이는 없어졌지만 시멘트 토리이는 절단된 채 공원으로 올라가는 입구 바닥에 묻혀있는데 노출돼 있다.

▲구룡포에서 가장 왜색을 많이 풍겼던 건물이라고 해서 구룡포신사로 오인됐던 구룡포 아홉번째 공소 건물. 지금은 헐리고 없지만 당시 케이뉴스가 밀착 취재해 구룡포신사가 아님을 바로 잡았다.

▲철거되기전의 구룡포용왕당 건물과 신사 담장


(2) 제국재향군인회
용주리 언덕은 해방 이후에 공원으로 불리어졌지만 원래 명칭은 ‘신사’였으며 경건하고 엄숙한 장소였다.

당시 제국재향군인회(帝國在鄕軍人會) 고문을 맡고 있었던 도가와야사브로는 1929년(소화 3年) 11월 신사가 있던 우측에 일본의 순국군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운다. 이로써 구룡포공원은 후일 영령들의 추모와 관련한 문화가 숨 쉬는 곳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지만 이 추모비는 해방 후 충혼탑으로 재활용되면서 논란이 된다.

 

(3)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
수산업으로 명성을 떨치던 구룡포는 도가와야사브로가 구룡포에 정착한지 34년만인 1942년 10월 1일 영일군 창주면에서 구룡포읍으로 승격된다. 이 때 구룡포는 경북에서는 11읍 중 6위 규모가 됐고 영일군에서는 1931년에 읍으로 승격한 포항 다음으로 큰 2위가 됐다.

하지만 1944년 도가와는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지역민에게 도가와야사브로의 치적을 알리는 것은 곧 일본의 은혜를 한국인에게 전하는 일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당시 경북도내 실력자이며 구룡포개척 공로자인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일본 고향 마을인 일본 강산현 아도군 산전촌(日本 岡山縣 兒島郡 山田村) 지인들과 하시모토(橋本) 등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돼 공덕비를 세우게 된다. 이름하여 ‘도가와야사브로 송덕비(十河 彌三郞 頌德碑)’가 바로 그것이다.

규화석으로 된 이 비(碑)는 구룡포공원에 올라서면 우측 입구 쪽에서 구룡포 바다를 굽어보면서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 기단석을 제외하고 높이 7m에 폭 1.5m 되는 제법 큰 규모로 당당하지만 새겨진 비문은 시멘트로 덮여 있다. 이 비는 구룡포의 읍 승격과 구룡포항 축조와 개척에 공로한 도가와의 덕을 기리기 위해 1944년 계단과 같이 세워졌다.  


 

(4) 구룡포 공원계단의 돌기둥

구룡포공원은 신사, 제국재향군인회비, 도가와야사브로의 송덕비가 들어섬으로써 차츰 용도가 다양(?)해졌고 규모도 커지게 된다. 올라가는 입구는 지금처럼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돌계단으로 만들어졌고 계단에는 돌기둥을 세워 일본인 이름을 새기게 된다. 소화 19年(1944년) 9월의 일로 해방되기 1년 전이다.

전당포업을 하며 거액을 환원했던 나까노 켄타로우(中野健太郞), 향천현 출어단의 일원으로 조선에 들어온 이시하라 가키츠(石原嘉吉)의 아들로 先代의 사업을 계승하여 고등어, 정어리 등의 어업 및 운반에 이름을 날렸던 이시하라 사까에(石原榮), 창주보통학교장이었던 스미이 야스모리(住井保盛), 구룡포우편소장이었던 핫토리 시게자에몬(服部茂左衛門), 1910년 구룡포에 와서 수산업을 개척하고 정상조(井上組)를 조직해 대표가 됐던 이노우에 쇼우시치(井上庄七).....등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돌기둥 또한 1960년에 충혼탑과 더불어 재활용하게 된다.

(5) 구룡포용왕당

해방이 되어 일인들이 일본으로 가면서 구룡포는 일본인들의 집사로 일하던 한국인들이 대거 구룡포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주인이었던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집과 재산을 물려받아 부를 축적했으며 일본인들이 거드름을 피우던 흉내를 내며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아 갔다.

자연스레 구룡포의 수산업은 그들이 이어갔으며 닦아놓은 어업도 다시 전성기를 맞았지만 지속적인 풍어를 위해 이제 용왕에게 제사지내는 일이 필요하게 됐다.

1955년 구룡포 앞바다에는 북쪽으로부터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 해안에 쌓였다.

1960년 제5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당시 36세의 최해용(崔海鎔) 씨가 앞장서서 “신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떠내려 온 나무로 용왕당을 짓자”고 제안해 1956년 2월 30일 신사와 비슷한 크기로 신축하면서 신사터는 그때부터 어업인들의 용왕에 대한 제사터로 변한다.

이때 신사는 철거하면서 신사를 둘러싸고 있는 이중으로 된 담장은 아까웠는지 그대로 재활용하게 된다.

그러다 52년이나 된 용왕당이 비가 새자 2008년 3월 포항시 예산 8천만 원으로 새로 건축하면서 1백년 가까이 된 신사의 담장과 함께 허물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두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던 용왕당


(6) 충혼탑과 충혼각

한국전쟁이 지나고 1960년(단기 4293년) 호국영령들을 달래는 충혼각과 충혼탑을 세우는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구룡포공원에도 충혼각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때 구룡포공원의 새로운 재활용 문화가 시작된다. 예산은 없고 목표는 있었기에 주변에 있던 일제 잔재들을 활용하는 것이 구룡포공원의 상징처럼 되기 시작한다.

대한군인유족회에서 ‘제국재향군인회’ 글자를 시멘트로 덧씌우고 그 위에 ‘대한군인유족회‘라고 다시 새긴 것이다.

또 충혼각 내부에는 한국전쟁 국가유공자들의 위패와 일제 징용인 김학윤, 4.19때 숨진 천복수 씨의 위패까지 범벅으로 안치해 구룡포공원의 줏대 없는 역사를 만들었다.

이처럼 구룡포공원은 한국근대사를 식견 없이 섞어버린 소위 짬뽕의 문화가 점철돼 있으면서도 불편과 불만을 못 느낀 채 버티고 있는 독특한 역사의 현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기단부 재활용으로 인해 논란이 일자 2008년 기존 충혼탑 기단부는 역사 상징성으로 그대로 두고 상단부의 오석을 들어낸다. 그리고 바로 옆 자리에 시비 2000만원을 들여 새로운 모습의 충혼탑을 건립했다. 
 
▲지금은 상단부가 철거됐지만 철거되기 전의 당시 충혼탑(좌)의 모습과 지난해 9월 새로 조성한 충혼탑(우)

 

(7) 공원계단의 재활용

한국전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60년 충혼각을 세우던 해에 일본의 ‘제국재향군인회’ 기념비에 우리 ‘대한군인유족회’ 명의의 비문을 새기는 충혼탑을 만든다.

또 공원을 오르는 계단 양편으로 세워진 돌기둥을 돌려 세우고 일본인 이름을 시멘트로 덮은 후 충혼각을 세우는데 일조한 지역 유지 이름과 단체명을 넣게 된다. 모두 117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졌다.

단기 4293년(1960년) 7월에 구룡포읍유족회가 주최하고 구룡포읍 유지일동이 후원했다는 표석과 함께 영일군수 김우복, 영일교육감 임종락, 제일제당 구룡포통조림공장, 구룡포어업조합, 대보어업조합, 강사리진흥회, 구평2리부흥회, 최해용, 이판길.........

 

▲부동명왕상(좌)과 신사 앞에 있던 사자상(우측)

또 당시 신사를 지키던 수호 상징물인 사자상 2기도 현재 충혼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쪽으로 하나씩 서 있다. 충혼각을 짓고 충혼각에 모신 영령들을 지키라고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룡포공원의 재활용문화는 고물상, 또는 골동품전시장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극치를 이룬다.


(8) 부동명왕(不動明王)상과 사자상의 재활용

구룡포공원에는 ‘부동명왕 대정(大正) 6년’이라 새겨진 석불상이 하나 있는데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사자로서 밀교 5대 명왕 중 하나다.

밀교란 비밀 불교를 말하는 것으로 소위 성력(性力)이 강조되는 주장도 나오는 일본 고유의 불교형태의 하나다. 1890년대부터 우리지역에 침투해 전파됐으며 우리의 전통문화나 우리나라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 일본 사찰의 위치는 공원 옆에 있는 골짜기 아래에 있었으나 해방 후 잠시 속칭 ‘토끼집’이라고 불리던 개인암자에서 잠시 이용되다가 헐렸다.

이 절에 들어가면 신도들은 맨 먼저 이 석불상에서 소원을 빌고 석불상 앞에 있는 일종의 세숫대야로 만들어놓은 황등(黃燈)에서 손을 씻은 뒤 법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처럼 일제 당시 사찰앞에 있던 부동명왕상이 현재는 구룡포공원 마당에 옮겨져 있는데 밀교성격이 강한 일본 불교의 석불상을 호국영령들을 지켜준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충혼각 앞에 지역민들이 옮긴 것으로 보인다.

또 당시 신사를 지키던 수호 상징물인 사자상 2기도 현재 충혼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쪽으로 하나씩 서 있다. 충혼각을 짓고 충혼각에 모신 영령들을 지키라고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룡포공원의 재활용문화는 고물상, 또는 골동품전시장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극치를 이룬다.

 

(9) 뒷골목이 된 구룡포공원
해방 이후의 구룡포공원은 지역 불량배들의 아지트였다. 추모의 장소에서 놀이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폭력배들이 서성거리는 곳이었다.

공원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서상호(91세) 옹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당시의 구룡포 사정을 알아본다.

 

▲ 구룡포 용주리 서상호(90) 옹

“공원이 있는 지금 용주리는 구룡포서 가장 번쩍거리는 동네였지. 우체국과 지서 등 모든 관공서 건물들이 있던 중심지 삼거리 동네라케서 ‘산가꾸마찌‘라 불리기도 했고 싸움이 많아가지고 ’텍사스골목‘이라고 불렀는 구룡포 영욕의 동네였지. 그런데 갑짜기 크다문 항구로 바께서 그란지 12월이 가까워오모 고대 건착선이 한해를 마감하는 곳이라꼬 해가 지모 사람들이 들끌것지. 배 한 척에 수십 명의 선원들이 타던 때라 수백 척의 선박이 정박했던 구룡포 거리와 골목엔 정말로 인산인해였다 말이다. 이들 배들은 처음엔 거문도나 흑산도서 고대잡이를 시작해가꼬 10월에서 12월이 가까워지면 구룡포 앞바다로 옴개와서 구룡포에서 한 해의 어업을 끝냈거든. 그러이 당시 구룡포엔 요즘 사람들이 상상모할 정도로 사람들이 북신댔지. 용주리 골목에노 공원계단을 중심으로 아래쪽으로는 술집이 억수로 많았는데 위쪽으로는 여자들이 몸을 파는 빨간 색시집이었지. 색시집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10개 정도와 우리 구룡포사람이 장사하는 세군데가 있었지. 한국 사람것은 한양루, 대정루, 영락관이었는데 일본사람 집 이름은 이저뿌렀어. 일본넘들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곳엔 안 갔지만 우리들은 일본넘이 운영하는 곳에 마이 갔지“


▲1959년 11월 사라호 태풍의 기억도 잊을만치 구룡포항구에는 풍어를 맞아 흥청대고 있다는 당시 신문 기사와 구룡포항구 사진

 

당시 구룡포공원이 있던 주변은 구룡포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밤이면 향락의 거리가 조성됐고 소비의 즐거움이 밤새 뿌려졌다. 어촌항에 수십 개의 술집과 매춘가가 형성될 정도로 구룡포항은 어획량으로서도 동해안 최대의 어항이었지만 소비문화를 따져도 손꼽히는 어항이었다.

구룡포 6리에 사는 김용관(75세) 옹은 해방 후 일인들이 건너가고도 구룡포공원 주변의 문화는 결코 주택가답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경건하고 엄숙한 장소로 출발한 구룡포공원이 현대로 오면서 난장판이 되어 간 조폭문화의 장소가 이곳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의 증언으로 당시의 구룡포공원 근대사를 느낄 수 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검은 주먹들이 설쳐댔고, 밤이면 술취한 폭력배들의 술주정하는 소리와 곤봉과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하늘을 울랬다 아이가. 충혼각 뒤에 구석진 자리는 남녀가 몸을 섞는 곳이었고 만만한 가게의 유리창 깨는 소리는 쉽게 들을 수 있는 밤의 행사가 돼 한마디로 무법천지였지“


(10) 구룡포정신

구룡포공원은 시대의 영령들이 혼재돼 자리 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 치욕의 역사 속에 신사가 있던 곳이고, 대륙을 넘보다 전사한 일본군 영령들과 또 일본인 개척자와 그를 따르던 일인들을 추모하고 기리던 곳에 한국전쟁으로 숨진 순국선열들의 혼을 섞어 놓은 곳이다.

신사로 출발해 용왕당과 충혼각으로, 제국재향군인회의 영령비에서 대한군인유족회의 충혼탑으로, 그리고 도가와야사브로와 일인들의 기념비에서 충혼각 조성 한국인들의 기념비로, 최근에는 어린이와 노인들의 놀이터와 휴게공간으로 변해오면서 재활용의 극치를 보여준 무이념(無理念) 역사의 장으로 둔갑한 구룡포공원.

일부 논객들은 구룡포공원의 시멘트 덧칠을 일제의 강점에 우리 국민이 저항한 흔적이라고 하지만 호소력이 약하다.

그 이유로 1945년 해방된 지 15년이나 지난 뒤인 1960년에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제에 저항했다면 반일감정이 극심했던 해방 직후에 모든 게 훼손돼야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뒤에 이루어져 저항의 흔적이 아니라 재활용의 의미가 더 크다. 더구나 다른 지역에 비해 일제의 근대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구룡포가 그런 말을 하기엔 아무래도 어색하다.

특히 일제가 물러가고 구룡포의 새로운 주도세력은 일본인들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사실 친일(親日)에 가까웠던 인물들은 아닐지라도 배일(排日)이나 반일(反日)은 분명 아니었다.

또 당시 구룡포인과 일본인들간의 친분관계는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정도를 가지고 저항의 역사를 쓰기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독립투사들에게 오히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5. 구룡포와 ‘구룡포회’

해방 후 일인들은 일본으로 갔고 일제 잔재 청산이 여도의 불길처럼 몰아쳤지만 구룡포는 잠잠했다. 일인들이 살던 집이나 가재도구를 불 지르던 국내사정과는 달리 구룡포에서는 현실적으로 재활용하거나 이용하게 된다. 자연적으로 감정이 약할 수 밖에 없다.

무인도를 개척했다는 심정으로 애착을 가졌던 일인들은 구룡포를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곳이 돼 해마다 구룡포를 찾았다. 이유야 어찌됐던 스스로 제2의 고향처럼 일군 구룡포를 두고 떠나가기엔 아무래도 아쉬움과 미련의 연속이 이어졌을지 모른다.

또 당시 구룡포에서 태어난 후손과 주변인 등 2백여 명이 모여 ‘구룡포회‘라는 모임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구룡포를 찾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구룡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들은 어릴 때 살던 구룡포를 둘러보면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집 앞에서 얼마나 가슴 뭉클했을까?

하지만 그들이 하나둘 연로해지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구룡포회는 해체되다시피 해졌고 구룡포 방문행사도 없어졌다.

 
▲구룡포항구가 개척되던 당시의 모습

 
▲단기 4284년(1951년) 7월20일 촬영된구룡포항 어선들

 
▲현재의 구룡포초등학교 운동장 너머로 구룡포로타리로 가는 길이 좌측에 보인다.

 

6. 에필로그(epilogue)

구룡포항에 정박한 어선들은 최근 어업용 면세유의 고공행진으로 옛날을 회상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동해안 최대의 어선세력을 가지면서도 과거의 부귀와 영화로 치부되고만 있는 현실에 옛날을 꿈꾸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1949년 영일군에서 떨어져 나간 포항시가 오히려 영일군을 잡아먹으며 1995년 통합시가 됐지만 포스코라는 거대 기업이 주는 공업지향으로 인해 포항시의 수산시책은 미미했다.

인구 4만7천이라는 인근 영덕군이 수산업이 아니면 먹고 살수 없다며 수산에 관광을 보탠 군정을 통해 어업인은 물론이고 상공인까지도 아우러는 것과는 달리 포항시의 수산 시정은 사라지다시피한 채 공단에만 지나치게 쏠려 있다는 것이 연안을 끼고 있는 어업인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사고로 접근이 시작되고 있다. 구룡포에 잠자고 있던 문화콘텐츠를 새로이 개발해 어촌관광이라는 테마로 구룡포근대문화재 등록과 적산가옥 복원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도 도출되고 있다. 구룡포에서 가장 일본다운 건물이었다는 천주교 공소와 신사터가 일본 관광객들을 유인하는 데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포항시의 미온적인 접근으로 인해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앞으로 드라마세트장 같은 껍데기 복원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아쉬움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일반주택의 수십 배 가치가 있는 신사유적이 있는 담장을 철거하면서 일제시대 역사문화거리 조성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아쉬움이라는 지적이다.

일본의 문화를 가장 먼저 이해하기 위한 탐색은 바로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으면서도 고수하고 있는 일본정신의 이데올로기인 신사참배 문화다. 구룡포의 깊은 일본 심장인 신사(神社)터를 뭉개면서 적산가옥만을 복원해 관광자원화 한다는 것은 구룡포만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고 살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멘트로 덧칠해 지워져 있는 일본인들의 이름도 이제는 세상에 나와야 한다. 시멘트로 덮는 것도 역사이고 이를 보존하는 것도 역사이지만 새로이 뜯어내는 것은 시대의 새로운 역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바로 알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제 현대화의 흐름 속에서 아직 남아 마지막 몸부림하는 적산가옥들은 몰골이 사나운 꼴로 서 있다. 또 그나마 남아 있는 일본식 건물들을 보는 가진 자들은 빈민가 주택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도가와 야사브로라는 일본인이 자신의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성과를 일군 구룡포는 그를 중심으로 한 일제시대가 지나갔다. 그 뒤 구룡포를 새로이 지탱해간 주류는 당연 일본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구룡포를 이끌면서 왜인은 없어도 왜색은 짙어 있었기에 구룡포의 문화는 혼재의 재활용 문화가 이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어 받은 구룡포 적산가옥을 구룡포공원 아래쪽에서 아직도 일제의 모습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원형으로 복원해 부흥했던 당시의 항구도시 구룡포를 의미있게 재구성하겠다는 것은 구룡포의 현대화에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수많은 문화탐방 관광객들이 찾을 수 있도록 구룡포만의 밸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구룡포공원에서 내려다보면 구룡포적산가옥이 늘어선 장안리 골목길 좌우

 

/정태현(구룡포향토사 편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