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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慶州金氏-桑村公派 ♣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김자수 선생 묘역 및 역사

by 범여(梵如) 2012. 8. 22.

상촌공 김자수 묘소 전경
상촌공 金자수의묘(경기도 기념물 제98호,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金자수는 대사헌을 지낸 金영유의 조부이시다.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상촌 김자수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 98호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120-1번지)-사진 2012년 6월8일 오후 촬영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에 소재한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인 상촌 김자수 선생의 묘역을 참배했다.

두문동 72현으로 유명한 할아버지 답게 신도비(구 신도비는 뉘어져 보관되어 있음)가 있고

아래쪽에는 사당도 있었다.

 

고려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 선생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며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사진과

 같이 뉘어져 보관중이며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웠다


[와비, 신도비, 순절비각 전체전경]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李穡(이색)이었고,
선생으로 朴尙衷(박상충), 鄭夢周(정몽주), 金九容(김구용),
朴宜中(박의중), 李崇仁(이숭인)이 있었다.

선생은 포은 다음으로 이어진 생려효자였다.
형이 벼슬살이로 나섰기에 자신은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살려 하였으나, 과거에 나서라고 하는 어머니의 명에따라 성균관에 들어가서,
머문 지 채 1년이 안 되어, 어머니에게 병환이 있음을 알고 급히 내려가서는,
2년을 하루같이 어머님을 보살피며 약을 구하려고 헤메었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리며 효를 다 하였지만, 끝내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어머님 묘소 곁에
움집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旌閭(정려)를 명하시고, 畵工(화공)에게
명하시어 出居廬圖(출거여도, 묘에서 여묘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는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와비와 새로 세운 신도비]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侍墓洞(시묘동)'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
'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하였다.

공민왕 22년에 효자로 정려가 내려지니 이른바 생려효자였다.
그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와비]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神道碑(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워놓았다한다.

고려 말,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충청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 집으로 돌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 가셨다.
새 정부가 두문동을 불살라 버리자 선생은 향리 안동으로 다시 돌아 오셨다.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그와의 친분을 고려하여 그를 대사헌으로 불렀으나,

그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방안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이 다시 병조판서로 부르면서 나오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다.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지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한 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라가 망하면 같이 죽는 것이 도리이다.
내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어 왔는데 이제 몸을 잃으면
무슨 낮으로 조상들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내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


이윽고 그는 조상의 사당에 엎드려 절한 후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내 장례식에 쓸 물품들을 챙기거라"
깜짝 놀란 아들이 되물었다.

"갑자기 웬 장례물품입니까?"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이 있다."
이윽고 감자수는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와비 2]

그의 아들 根(근)은 장례 때 쓸 물건을 챙겨 뒤따랐다.
성균관시절 스승으로 모셨던 정몽주 선생의 묘지를 참배 한 후
秋嶺(추령, 현재 대지산 준령인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고갯마루에 서서 산천을 둘러본 후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 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뒤로는 스승인 포은 鄭夢周(정몽주) 묘가 있었기 때문이라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것이다.

여자도 不敬二夫(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어찌 두 왕을 섬길 수 있으랴하고 아들 근에게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하고 유언을 하기를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며, 행적을 金石(금석)에 새기지
말라.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武人(무인) 투성인 신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하는 말을 남기고 그는 '絶命詞(절명사)'
시 한 수를 남기고는 독약을 삼켜 자결하셨다.

때는 태종 13년(1413) 11월 14일 이었으며 향년 63세였다.


絶命詞(절명사)

平生忠孝意(평생충효의)
평생토록 지킨 충효

今日有誰知(금일유수지)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일사오휴한)
한 번의 죽음 무었을 한하랴만

九原應有知(구원응유지)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상촌선생 순절비각]

상촌선생의 묘역은 김자수가 자결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묘역이 있는데, 묘역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에 있고,
묘하에는 고려충신 상촌 김자수선생의 순절비각이 서 있으며,
와비를 비롯하여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輓詞(만사)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이자기운득)
이 두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황우살신난)
하물려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그의 죽음을 두고 黃喜(황희)가 지은 '輓詞(만사)'이다.
상촌 김자수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셨다.

'삼강행실록'
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기도 했다.

김자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눞혀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金弘郁(김홍욱)이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때 소현세자 姜嬪(강빈)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는 應旨上訴(응지상소, 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이 직접 친국한 심문을 받던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찼다.

김홍욱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으며, 추사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순절 비각과 절명시 시비]

우왕 초에 正言(정언)이 되었는데, 그때 임금으로부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曺敏修(조민수)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는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하여 많은 군사를 죽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명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突山(돌산)에 유배되었다.

 

뒤에 典校部令(전교부령)을 거쳐 判司宰寺事(판사재시사)가 되고
공양왕 때 이르러 대사성, 世子左輔德(세자좌보덕)이 되었다.

1392년에 判典校寺事(판전교시사)가 되었고 곧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경북 안동에 그가 살던 옛 집터가 있고, 그의 효자비가 있다.

 
[상촌순절비]

이 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追遠齋(추원재)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하였다한다.

안기동으로 이전하였을 때는 앞에 하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가가 되었다.

 
[절명사 시비]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1352~1413)는 경주 김씨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 세자좌보덕 등을
거치며 불교행사의 중지와 언관의 신분 보장 등을 직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상촌 선생 묘소]-옛날 사진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1352~1413)의 묘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石羊(석양)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金冠朝服(금관조복)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 장명등, 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라한다.

 
[부인 우봉이씨묘소]


桑村先生遺杖 詩(상촌선생유장 시)


平一疑雲(평일의운)
고려말의 어지러운 시국을 말함

老當益壯(노당익장)
늙음을 맞이해도 더욱 장건할 것이며

窮當益堅(궁당익견)
궁함을 당해도 더욱 굳건하리라

嗟爾吾與(차이오여)
슬프다! 너와 내가 더불어

無替永年(무체영년)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이 시는 상촌선생이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지팡이에 남긴 것이다.

[우봉이씨 묘소 앞 비석]

칠언절구 /金自粹(김자수)

憑虛樓次金少尹師古韻(빙허루차금소윤사고운)
빙허루에서 소윤 김사고의 운을 따라-桑村(상촌) 김자수

新樓壓水對靑山(신루압수대청산)
신루(憑虛樓)는 청산(永嘉山)의 물(주천강)을 마주하고

朝暮烟嵐?案間(조모연람궤안간)
아침저녁 아지랑이가 책상 사이에서 피어나네

幸有村庄?隔岸(행유촌장재격안)
다행하게도 언덕너머에는 시골집이 있으니

暮年投?共淸閒(모년투불공청한)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남의 여생을 즐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