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수의 15대손이 쓴 기문이 걸려 있다. 가로 105cm와 세로 28cm이다.
관련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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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실기(桑村先生實記) |
고려 말기의 문신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1351~1413)에 대한 실기(實記)로 1793년 초간본에 상세한 주석을 보충하여 1803년 중간한 것이다. 본서의 발문을 쓴 13대 후손 김한구(金漢龜)와 그의 아들 김일주(金日柱)에 의하면, 금자수가 조선 개국 시 충절을 지켜 자살한 사료를 수집하여 왜곡의 폐해를 씻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 관련 내용을 수집하였으나 자료가 병화에 소실되고 집안의 기록이 흩어져서 결국 다른 야사나 전대의 문집에서 관련 기록을 수집, 교열하여 1793년(정조 17) 1책으로 완성하였다 한다. 한편 그의 아들 김일주는 다시 의문 나는 것에 상세한 주를 붙여 1803년 중간하였는데 바로 이 책이다.
한편 실기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편은 선생유작 한산제영(韓山題詠) 등 6수의 시와 제현기증(諸賢寄贈)이라 하여, 김자수의 여로에 붙이는 친우들의 시 6수와 김자수의 만사(輓詞)가 있다. 그리고 「사전기재(史傳記載)」라는 항목에서는 김자수에 관련한 여러 가지 야사류들을 수집한 것으로 ‘선생본전’이라 하여 행장을, 그리고 여사초록(麗史抄錄)은 고려사에서 관련 사항을 초록하였다.
이외에도 여지승람경주인물록(輿地勝覽慶州人物錄), 신증동경지(新增東京誌), 영가지효자편(永嘉誌孝子篇),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해동야승(海東野乘), 성원총록(姓苑叢錄), 수선총록(蒐善叢錄), 관규록(管窺錄) 등에서도 김자수와 관련된 내용을 수집하였다. 한편 「비보문자(碑譜文字)」항에는 채유후(蔡裕後)가 지은 김자수의 신도비명(神道碑銘)과 김자수의 후손으로 십청공(十淸公) 김세필(金世弼)의 비문(碑文), 학주공(鶴洲公, 이름 불명)의 비문(碑文)이 있다. 그리고 이민서(李敏敍)가 찬한 김씨족보구서(金氏族譜舊序)이다.
하편은 먼저 「원향사실(院享事實)」로 서간문을 수집한 것으로 김자수의 절개가 야은(冶隱) 길재(吉再)에 버금간다는 내용이다. 이어 삼계서원통문(三溪書院通文), 주계서원통문(周溪書院通文), 경광서원통문(鏡光書院通文), 배행검소록(裵行儉所錄), 옥계서원통문(玉溪書院通文), 추향초강서원사적(追享草江書院事蹟), 본원위차(本院位次), 봉원제문(奉安祭文), 춘추향축문(春秋享祝文), 제기수목(祭器數目), 추향시유사명록(追享時有司名錄) 등 서원의 배향과 관련한 문서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비문전말(碑文顚末)」의 항에서는 후일 김자수의 비문(碑文) 및 비각(碑閣)의 중수와 관련한 내용을 수집하였는데, 효자비표제(孝子碑標題), 망호루제영(望湖樓題詠), 광주장사소기(廣州庄舍所記), 과추령기묘노언(過秋嶺記墓奴言), 중수비각기(重修碑閣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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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金自粹, 1351~1413) |
고려시대 충정왕 3년에서 태종 13년까지 생존했던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 경주(慶州),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이다. 『고려사(高麗史)』와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그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그는 안동부내 상촌(桑村), 현재의 금곡동(金谷洞)에서 태어났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해 회답교시(回答敎示)를 작성하라는 왕명을 받고, 조민수가 왜적의 김해 침입 시 겁을 내어 많은 사졸을 죽게 하고 패한 사실을 들어 이를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전교부령(典校副令), 사재시판사(司宰寺判事)에 이르고, 공양왕 때 대사성(大司成),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상소하였다. 뒤에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 좌상시(左常侍),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동지들과 두문동(杜門洞)에 숨었다가 고향인 안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조 선 개국 후 태종 때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상촌실록(桑村實錄)』에는 그가 만년에 지었다고 생각되는 다음과 같은 시 3수(首)가 전해지고 있다.
송악산 제영(松岳山 題詠) 봄바람에 절뚝거리는 말을 타고 산을 바라보는 이 나그네. / 春風騫馬看山客 걸음을 천천히 하여 마침내 만수(萬樹)의 그늘에 이르렀네. / 步步遲來萬樹陰 시냇가의 숲은 깊으나 괴이한 돌은 없고, / 澗畔林深無怪石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 일세. / 嶂崖花落摠新禽 석 잔의 주기(酒氣)를 빌어 오늘을 논하는데, / 三盃酒氣論今日 한 곡조 송성(松聲)은 옛날 거문고 소리 들려주네. / 一曲松聲報古琴 고국(故國)은 아스라하여 어제의 일과 같나니, / 故國蒼莛如昨事 충신 열사들은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네. / 忠臣烈士共爭吟
부조현 자영(不朝峴 自咏) 충신과 열사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 忠臣烈士今安在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 / 飛去山禽語古春 옥계(玉階)의 꽃술들은 바람 뒤에 시들었고, / 玉階花心風後老 금릉(金陵)의 나무 빛깔은 빗속에 파리하네. / 金陵樹色雨中貧 알괴라 청향각(淸香閣)에는 해가 짧아졌을 것이고, / 應知日短淸香閣 필시 관덕인(觀德人)에게도 날씨는 차가울 것이라. / 想必天寒觀德人 대(臺) 위에 선 이 길손은 강개한 마음에 옷을 떨치는 도다. / 感淚振衣臺上客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 / 此時幾泣我王身
배알송경 태조릉(拜謁松京 太祖陵) 덕(德)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뒷일망정, / 修德就閒後 신(臣)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소이까. / 臣維安獨歸 진령(榛苓)은 누구를 위하여 읊겠는가. / 榛苓爲誰詠 규곽(葵藿)은 봄부터 피어 있구려. / 葵藿自春開 풍운(風雲)의 눈물 수 없이 흘리면서, / 泣下風雲淚 진세(塵世)의 겁회(劫灰)를 밟아 왔다오. / 踏來塵劫灰 능침(陵寢)을 모시고 술잔을 올리니, / 侍陵將酹酒 북두(北斗)의 그림자가 배회(徘徊)하네. / 北斗影徘徊
위의 시들은 그 내용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지은 것이 아니고, 조선 건국 후에 지은 것이 분명하다. 위의 시에서는 고려에 대한 충절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 송악산 제영(松岳山題詠)」에서 그가 “고국(故國)은 아스라하여 어제 일과 같나니, 충신열사들은 다투어 회포를 읊네.”라고 한 것이라든지, 「부조현 자영(不朝峴自咏)」에서 “충신과 열사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라는 내용과, 「배알송경 태조릉(拜謁松京 太祖陵)」에서 “덕(德)을 닦느라 벼슬길 떠났을망정 신(臣)만이 어찌 홀로 돌아가겠습니까.”하는 내용은 고려에 대한 그의 충절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부조현 자영」에서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는가.”라고 한 것은 이 시를 쓸 때가 고려가 망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조선에는 벼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태종(太宗) 13년에 그가 죽자 그의 문인(門人) 황희(黃喜)는
충(忠)이 있으면서 효(孝)가 있기는 어렵고, / 有忠有孝難 효(孝)가 있으면서 충(忠)이 있기도 어려운데, / 有孝有忠難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어 가졌었건만, / 二者旣云得 하물며 살신(殺身)의 어려움까지야. / 况又殺身難
라는 만사(挽詞)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는데, 위의 글에서도 그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다 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는 일직(一直) 타양서원(陀陽書院)을 비롯하여, 옥계서원(玉溪書院)과 화산서원(花山書院) 등 전국의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련리에 신도비와 비각 그리고 묘소가 있다. 상촌의 정효비각이 재사와 거리를 두고 마을의 내오산 아래에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 수몰로 현 위치로 이건 후에는 바로 재실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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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 시내권 > 안기동 |
- 조선시대 안기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
안기동은 원래 안동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안기역(安奇驛)이 있었다고 하여 안기역마 혹은 안기골이라 하였다가 1964년 지역명 개편에 따라 안기동이 되었다.
과거 안기역은 안동에서 가장 큰 역이었다. 국가의 행정통신망은 역참(驛站)으로 구성되었는데 고려시대에 전국적인 체계를 갖추었고,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의 역참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기능적으로 더욱 안정화시켰다. 영남 지역과 서울을 연결하는 소위 영남대로는 크게 부산-경주-안동-죽령-충주-서울로 이어지는 역참로와 부산-대구-문경-충주-서울로 이어지는 역참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안기역은 경주-안동-죽령으로 연결되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참이었다. 역은 대개 여섯 단계의 규모로 분류할 수 있는데, 안기역은 적어도 두 번째 단계의 규모를 가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초기의 우역제(郵驛制)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역들을 10여 개로 구성한 역도(驛道)로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세종대에 이 역도는 41개로 조성되어 그 후 변하지 않았다. 역 도는 직급상 현감과 같은 찰방(察訪:종6품)이 관장하고 관찰사의 명령만 받도록 되어 있다. 찰방이 있는 찰방역이 중심이 되어 7~8개의 군현 역을 관할한다. 안기역은 찰방역이었고 단원 김홍도가 지방관으로 처음 부임한 곳이 바로 안기찰방이었다. 1900년대에 안기역에 소속된 가구 수는 대략 190가구 정도였으며 오늘날의 안기동은 이 안기역의 역촌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현재의 경안고등학교와 안동성소병원 사이의 골은 서당골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에 서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 감나무가 많이 있어서 감나무골이라고도 불려졌다. 안기동에서 제비원 미륵불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서 오른쪽 화백산 기슭에는 석수암(石水庵)이라는 사찰 암자가 있는데, 목욕할 수 있는 맑은 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 일반 초암이었다가 사찰 암자로 바꾸어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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