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임금을 섬기느니 죽음을 택하리라" | ||||||||||||
고려의 멸망에 비관, 형조판서도 거절 | ||||||||||||
강인호 기자 kai76@kocus.com | ||||||||||||
이것은 의리가 아니라 지하에 가서 선왕과 부모를 어찌 대하랴. 내가 죽을 때가 왔으니 아들은 수의와 장례기구를 마련해 배종케 하라"이후 수일만에 광주에 도착해 말에서 내린 김자수 선생은 "포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 내가 죽을 땅은 이 곳이다. 여자도 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의 왕을 어찌 섬길 수 있으랴,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이곳에 매장하고 행적을 금석(金石)에 새기지 말며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무인 투성이인 신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된다" 때는 태종 13년(1413) 11월14일 향년 63세로 고려의 충신 김자수 선생이 자결을 택하고 마지막 남긴 유언이다.광주시 오포읍 신련리에 위치한 김자수 선생 묘는 1987년 2월12일 경기도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됐다. 당초 선생의 묘비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세워지지 않았으나 조선 효종에 이르러 7대손 적의 발의에 따라 신도비를 마련했으나 김자수가 생전에 남긴 훈계가 지엄해 반성하고 묘 아래쪽에 묻어두었다가 926년 후손들이 발굴해 비문의 마모가 심해 새로 건립했다고 전해진다.김자수 선생은 증례조참 오의 아들로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나 자는 순충, 호는 상촌이다.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해 편모 봉양에도 극진했을 뿐 아니라 병환중 시탕에도 정성을 다해 별세후에는 3년간 시묘하였으며 임금도 이를 인정하고 효자정려를 내렸다고 전한다. 그 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좌정언직에 승진하였다. 당시 경상도 도순문사 조민수의 포상문제를 논의할 때 반대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도 돌산으로 정배되었다가 4년만에 풀려나 복직했다. 공양왕 4년(1392)에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칭하는 변혁이 일어나자 김자수 선생은 안동으로 귀향한다.조선조에 와서 공의 도덕과 경륜을 아껴 누차에 걸쳐 헌장(현 검찰총장)으로 초청했으나 불응했는데 태종이 노하여 다시 공을 형조판서로 제수하여 급히 부임하라 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탄식하고 음독자진의 길을 택한 것으로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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