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선생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우뚝한 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당시 그와 교유한 선·후배의 석학들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고, 또한 앞으로 유도(儒道)를 일으킬 거목(巨木)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그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하였고, 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상제(喪制)를 치루었다.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은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조선에는 사환(仕宦)하지 않았고, 태종의 부름을 거부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 23년(1374)의 과거에서 장원(壯元)으로 합격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이미 그 기반은 닦여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받은 감화가 컸을 것이다.
우왕 원년에 그가 정언(正言)을 제수받고, 이색을 찾아가서 그의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하였는데, 이때 이색은 그의 학문의 깊이에 대하여 칭찬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색은 처음에 "나는 비유하면 제패(?稗)와 같다. 학문이 조잡하고 말이 망발되니, 어찌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거절하였으나,
상촌선생이
제가 들으니 '나타나지 않음이여! 문왕(文王)의 순수한 덕(德)이여!'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대개 문왕(文王)의 업적이 하늘의 뜻에 부합한 묘함을 찬양한 것입니다. 배우는 자로서는 감히 바랄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문왕(文王)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것이 평범한 백성이니, 저도 어찌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말을 써서 자(字)를 순중(純仲)이라 하였는데, 대개 강건(剛健)하고 정중(中正)하며, 순수(純粹)하고 정(精)한 것은 건(乾)의 덕(德)입니다. 건(乾)의 덕(德)은 문왕(文王)의 덕(德)과 같지 않습니까. |
라고 하니, 이색은 그가 학문의 대도(大道)를 깨우친 것을 알고 기뻐하면서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賢人)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聖人)은 하늘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것 또한 얕지 않으니 말이 없을 수 없다. |
라고 하며 설(說)을 지어 주고 있다. 위에서 볼 때 그는 이때 이미 성리학의 정수(精髓)를 체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건괘(乾卦)의 논리를 차(借)하여 자(字)로 하였고, 또 천(天)의 이치를 문왕(文王)의 덕(德)과 비유하면서 자신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생활철학으로 하여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성리학 이념을 실현시키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장례를 치르고 있는 것에서도 보인다. 이때 행한 그의 행적은 당시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가 3년 동안 시묘(侍墓)할 때 이를 직접 목도한
남을진(南乙珍)은
來見居廬子(내견거려자): 내려와서 시묘(侍墓)하는 사람을 보니, ?前祭禮明(점전제례명) 거적자리에 제례(祭禮)도 밝더라. 筍生誠意?(순생성의근): 죽순이 난 것은 정성이 간절함이며, 栢枯孝心傾(백고효심경): 잣나무 마른 것도 효성이 지극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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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시를 지어 그의 예법(禮法)과 효행을 기리고 있다. 당시 고려사회의 사상적 이념은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당시 이색·정몽주 등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고려사회의 사상적인 구조를 개변시키려고 하였으며, 또 이러한 의도에서 이들은 공민왕 16년에 교육중흥을 일으켰다. 당시 이들에게 주어진 명제는 성리학의 이념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의 실천과 이단(異端)의 배척이었다. 그 또한 이러한 이념의 실천을 자기의 본분으로 삼아 이를 몸소 실천하였고, 또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서 이의 실현을 건의하였다. 이제 그의 사상을 의리론(義理論)과 벽이론(闢異論)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義理論 상촌선생은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정명사상(正命思想)과 의리(義理)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것은 의성(義城)에 있는 김전서(金典書) 유(游)에게 보낸 제문(祭文)에서도 보인다.
返我初服(반아초복): 나의 초복(初服)으로 돌아오니, 薇蕨其志(미궐기지): 미궐(薇蕨) 같은 그 심지(心志)요. 樂我名敎(낙아명교): 나의 명교(名敎) 즐기니, 與世相違(여세상위): 세상과는 괴리(乖離)가 있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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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생활은 관로(官路)생활에서도 일관되고 있다. 그가 우왕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조민수(曺敏修)에 대한 포상교서를 거부한 것은 이러한 그의 이념이 전제가 되고 있었다.
또 공양왕 때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는 이러한 그의 이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공양왕은 현릉대비(玄陵大妃)의 명을 받들어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공양왕은 즉위하자 생모(生母)인 국대비(國大妃)에게 효(孝)를 다 하면서 왕대비(王大妃)에 대하여는 예(禮)가 극히 소홀하였다. 이러한 왕의 처사에 대하여 그는 상소를 올려서 그 부당성을 극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하는 잠저(潛邸)시에 덕망이 빼어남을 듣고 백성들이 마음을 합하여 추대(推戴)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성(異姓)의 화(禍)를 방제하고 조종(祖宗)의 업(業)을 광복(光復)하였으니, 이는 모두 현릉대비(玄陵大妃)의 명(命)을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맹정책(主盟政策)의 공(功)으로써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삼한(三韓)이 그 의탁할 바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여 그 지위와 칭호를 정하고 책봉을 표시하는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성대한 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하니 전하께서 왕대비를 섬기는 예가 마땅히 낳아주신 분보다도 더 두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해 남(南)으로 갔을 때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국대비(國大妃)의 전(殿)에는 친히 행차함이 한번 뿐이 아니요, 또 봉양도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왕대비(王大妃)의 전(殿)에는 일찍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니, 이는 낳아서 길러 준 은혜만 알고 종묘(宗廟)를 계승하도록 한 일의 중함을 소홀히 한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전(傳)에 말하기를 '뒤를 이은 자는 그 아들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고금(古今)의 대의(大義)인 것입니다. 왕대비가 세상을 떠난다면 양음(亮陰)의 예(禮)는 마땅히 정성을 다 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섬기는 예도 어찌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사시(四時)의 절후(節侯)와 여름의 복일(伏日) 및 겨울의 납일(臘日)에는 반드시 먼저 왕대비의 전(殿)에 나아가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국대비의 전(殿)에 나아가도록 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
또 그는 위의 상소에서 왕이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성리학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왕도 아직 책봉을 받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아들부터 책봉을 받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왕세자를 책봉하려는 왕의 처사를 선후(先後)의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성리학의 대의명분과 의리사상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때 그가 올린 상소의 내용에서 이러한 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근일(近日)에는 봉숭도감(奉崇都監)을 두어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고 하는데, 신(臣)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직 책봉을 받지 못하였는데 세자가 먼저 책봉의 예를 받는 것이 옳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아들이 비록 성인(聖人)과 같다 하더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봉록을 받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후(先後)의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친히 제소(帝所 : 中國 皇帝)에 조회하여 명(命)을 받은 연후에 서서히 의논하여 행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중국의 사신이 와서 양마(良馬) 만 필을 징발하라, 하여 백관(百官)들이 분주하여 피곤한 터인데, 이때를 당하여 구태여 봉숭(奉崇)의 예를 거행하고자 하니, 이는 아마도 여론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행동강령이기도 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대의명분과 의리의 실천을 평생의 지침으로 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서 조선에 사환(仕宦)하지 않았다. 또 태종의 부름에 대하여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세상을 마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2) 闢異論 고려사회의 일반적 사상구조는 불교와 유교였다. 이 당시 유교는 치국(治國)의 도(道)로, 불교는 수신(修身)의 도(道)로서 양자는 공존하면서 서로 교류하였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전래됨으로서 불교는 비로소 이단(異端)으로 규정되어 배척되기에 이르렀지만, 그 이전까지는 유자(儒者)도 불교를 숭상하여 재가불자(在家佛者)로 행세하였다. 특히 국난을 당하여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나 백성들이 삶의 위기를 느꼈을 때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타개하고, 또 민생의 삶을 구하겠다는 것이 일반적 사조로 되어 있었다. 거란(契丹)의 침입이나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장경(大藏經)이 간행되었던 것도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와서 안향(安珦)·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성리학이 보급·발전되었고, 또 불교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수 백년 동안 인습에 젖어 왔던 당시 사회에서 비록 성리학이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었다. 당시 이러한 사조는 고려말에 정도전(鄭道傳)이 정몽주(鄭夢周)에게 보낸 다음의 글에서 보인다.
우리 동방(東方)은 그 폐해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단(異端)을 돈독히 믿고 근엄하게 받들었으며, 또 대유(大儒)라 부르는 선비들까지도 이를 찬송하고 노래를 지어 읊었으니, 그 명성과 위세는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저 아래의 혼미한 백성들은 통달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쫓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왕(先王)의 학문은 적요(寂寥)하여 들림이 없고, 귀로 듣고 보는 것이 이단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강보(襁褓)에 어린아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먼저 이단의 말을 외었으며, 기뻐하고 재롱할 때에도 문득 그 몸짓을 배워 습관이 성품으로 이루어져 천연히 그 그릇됨을 깨닫지 못하고 간사한 마음이 몸에 배어 굳어져서 그 뿌리를 뽑아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직 그 학술이 마르고 또 도덕적인 수양이 깊어서 다른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남을 바르게 할 수 있다고 보겠습니다.
나의 벗 달가(達可)는 바로 그 적격이라 하겠습니다. 달가는 비록 지위는 없으나 달가의 학술을 말한다면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달가의 올바른 학술을 본받아 배웠고, 도덕에 있어서는 이를 배우려 하는 사람들이 달가의 통달한 덕성(德性)을 쫓아 닦았습니다. 하늘이 달가를 내심은 진실로 우리 도(道)에 복(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고려 후기에는 불교의 폐단이 막심하였다. 사원(寺院)은 막대한 농장(農莊)을 소유하고 있어서 국가의 재정을 파탄에 빠지게 하였고, 또 역대 왕들의 불사(佛事)로 농민들은 도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교의 타락상은 일찍이 이제현(李齊賢)이 [중수개국율사기(重修開國律寺記)]에서
내가 생각하건대 근래에 승려들이 일을 경영함에 있어서 반드시 권세 있는 자와 결탁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지고 나라에 피해를 주고 있다. 비록 복을 심는다고 하나 결국은 원망을 사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공민왕 10년 5월에 어사대(御史臺)에서 올린
불교는 원래 청정을 숭상(崇尙)하거늘 그 무리들이 죄복(罪福)의 설(說)로 과부와 고녀(孤女)를 유혹하여 머리를 깎아 중을 만들고 잡거하면서 그들의 음욕을 자행하고 있다. 또 사대부와 종실의 집에도 불사(佛事)를 권하여 산간에 유숙시켜 추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풍속을 오염시키니 금일부터는 일체 이를 금하도록 할 것이며, 어긴자는 죄로서 다스리소서. 또 향역(鄕役)의 관리나 공사(公私)의 노예는 부역을 피하여 불문(佛門)에 귀탁하고는 단지 손에 불상을 잡고 입으로 범패(梵唄)를 외우며 여염집에 횡행하여 백성의 재산을 소모시키니, 그 해가 가볍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들을 체포하여 모두 본역(本役)에 종사하게 하소서. |
라는 상소에서도 보인다. 이색도 일찍이 공민왕 원년에 복중상서(服中上書)를 올려서 이러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불씨(佛氏 : 불교)가 중국에 전해오자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는 말할 것도 없고, 모두 이를 높이 섬기었습니다. 그리하여 한(漢)나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융성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 태조(太祖)께서 왕업(王業)을 창시하자 불사(佛寺)와 민가(民家)가 삼삼오오 뒤섞여 있었으며, 중세 이후로 그 무리들은 더욱 번성하여 오교(五敎)와 양종(兩宗)이 모리의 소굴로 화하고, 냇가와 산굽이마다 절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부처의 무리가 비루(卑陋)해졌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백성들 역시 놀고 먹는 자가 허다하게 되어 식자는 매양 이를 가슴 아파 하였습니다. 부처는 대성인(大聖人)이오나 좋아하고 미워함이 반드시 사람들과 같이 하였으니, 어찌 돌아가신 망령(亡靈)인들 그 무리들의 이와 같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
이러한 시대상에서 정몽주·정도전 등은 불교배척의 선봉에 섰고, 상촌선생도 이들과 뜻을 같이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공양왕 즉위 초에 올린 상소에서 보인다. 그는 이 상소에서 당(唐)의 한유(韓愈), 송(宋)의 경종(景宗)의 예를 들어 불교배척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이 상소에서 그는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수축에 대한 부당성을 강력하게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唐)의 한유(韓愈)가 헌종(憲宗)에게 말하기를 "황제(黃帝)와 요(堯)·순(舜)으로부터 삼대(三代)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수(長壽)를 누렸고 백성들도 안락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불교가 없었다. 한(漢)의 영평(永平) 년간부터 불교가 비로소 전파되었으며, 그 후에 난세(亂世)와 망국(亡國)이 연이어 있어서 왕조의 운명이 길지 못하였다.
송(宋)·제(齊)·양(梁)·진(陳)·원위(元魏)로 내려오면서 점점 부처를 섬김이 독신 하였으나 그들의 연대는 더욱 더 짧아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유(韓愈)의 억설이 아니고 역사책을 살펴보면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처음에 연복사(演福寺)의 탑(塔)을 수축하여 넓히면서 민가 30∼40 호(戶)를 철거시켰고, 이제 또 탑을 크게 세우면서 빈번히 토목(土木)의 역(役)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농사일이 바야흐로 바쁜데도 교주(交州)의 온 도(道)에는 나무를 찍고 또 수송하느라고 사람들과 가축들이 모두 병들었으나 조금도 돌보아 준 일이 없습니다. 그러고서도 얻어질지 말지 하는 명복(冥福)을 맞이하고자 현세(現世)의 생령(生靈)에게 커다란 화를 끼치고 있으니, 백성의 부모로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밝은 명(命)을 내리시어 역(役)을 중지시켜서 백성들로 하여금 고역(苦役)에서부터 헤어나도록 해 주소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놀고 먹는 중의 무리를 사역(使役)에 동원한다면 해(害)가 없다고 하나 중들이 과연 주린 배를 참으면서 역(役)에 나가겠습니까. 국가 비용의 낭비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것이며,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는 것도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가 즉위한 이래 태묘(太廟)와 여러 릉(陵)에 대한 수리와 영선(營繕)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탑을 세우는 데는 급급하니, 이것은 근본에 대하여 보답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성의가 오히려 복을 구하고 생활을 편리하게 하자는 생각보다 못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찌 전하의 훌륭한 덕에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송(宋)의 경공(景公)이 군주다운 말을 하였더니 형혹성(熒惑星)이 물러갔고, 성왕(成王)이 근거가 없는 참소에 미혹되니 뇌성벽력이 바람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인군(人君)의 한 마음 얻음은 족히 천심(天心)을 느끼게 하고, 또한 행실 잘못됨은 족히 천재(天災)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보존하여 상제(上帝)와 마주 대하고 계신 것처럼 할 것이며, 비록 조용히 혼자 계실 때라도 언제나 상제가 자기 앞에 있는 것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응대할 때에 미쳐서는 더욱 생각을 깊이하여 근신하여야 할 것이며,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때에는 예(禮)로써 하고, 출입기거(出入起居)에는 불경(不敬)하지 않을 것이며, 일을 처리할 때에는 사욕(私慾)에 가리움이 없어야 할 것이며, 고식지책(姑息之策)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경건한 마음이 족히 천심(天心)을 감동시켜서 천재(天災)는 사라지고 교화(敎化)는 일어나 나라가 융성하게 될 것입니다. 또 어찌 반드시 불법(佛法)을 숭봉(崇奉)하고 크게 탑묘(塔廟)를 일으킨 뒤에야 나라의 운세가 신령하여 질 것입니까. 하물며 신라(新羅)가 불교행사를 많이 하다가 망하게 되었다는 신성(神聖 : 太祖)의 교훈을 가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
또한 그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무당(巫堂)을 혁파하도록 건의하였다. 당시 무당들은 왕실의 비호를 받아 별기은(別祈恩)이라는 것을 10여 곳이나 만들어 재정을 축내고 있었고, 또 무시로 제사를 지내면서 많은 돈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들 무당들은 행사가 끝나면 대낮에도 술타령을 하며, 북을 치고 피리를 불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등 그 행패는 말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나라에서 무당(巫堂)을 설치한 것도 벌써 정당하지 못한 일인데, 소위 별기은(別祈恩)이라는 곳이 10여 곳이나 되고, 또 사시(四時)에 지내는 제사와 무시로 지내는 별제(別祭) 등 한 해 동안 이에 낭비되는 돈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비록 금주령(禁酒令)이 엄격하나 여러 무당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나라의 행사라고 핑계함으로써 유사(有司)들도 감히 이를 꾸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고로 이들은 큰 거리에 모여 태연자약하게 술 타령을 하며, 북을 치고 피리 불고 노래하고 춤추는 등 못하는 것이 없으니, 풍속의 불미(不美)함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유사(有司)에 명하여 사전(祀典)에 기재된 제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잡신의 제사는 일체 금지하소서. 또 여러 무당들의 궁중출입은 엄금하여 요망(妖妄)한 것을 근절함으로써 풍속을 바로 잡도록 하소서. |
라는 상소를 올려서 이들의 혁파를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성리학의 이념인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입각한 의리(義理)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였고, 또 이단(異端)의 배척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왕에게 이를 강력하게 건의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정치기강의 확립을 주창하였다. 특히 그는 언로(言路)의 활성화를 정치기강 확립의 급무(急務)로 파악하여 이를 왕에게 건의하였고, 그 자신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는 거리낌없이 직언(直言)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공양왕 즉위 초에 올리고 있는 상소에서
전하께서 요즈음 교서(敎書)를 내려서 간절하게 직언(直言)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臣)은 대성(臺省)에서 시사(時事)에 대하여 말한 사람들이 갑자기 전하의 분노를 사서 혹 현직에서 해임되던가, 외지(外地)로 내쫓기던가, 또 아랫자리로 강직(降職)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전하께서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서가 비록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간(諫)함을 막고자 하는 생각이 오히려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일(前日)에 낙직(落職)된 신하들을 모두 다 등용하고, 또 그들이 제의한 일은 낱낱이 다 시행함으로써 장래를 권장한다면, 뜻있는 선비들이 누가 전하를 위하여 말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보인다. 또 공양왕 4년(1392)에 좌상시(左常侍)가 되었을 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연전(年前)에 조정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10인은 본시 우리 나라 사람들로서 요행히 함부로 천거된 자 들입니다. 이들은 혹은 창기(倡妓)에 의탁하거나 혹은 친척의 연분으로 청탁하여 벼슬을 요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방편상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게 되니, 진차(眞差 : 眞職과 假職)와 첨설(添設)이 문득 100여 자리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명기(名器)의 범람과 염치의 상실함이 극에 이르게 되었으니, 원컨대 이들을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그 직을 박탈하여 장래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또 삼사(三司)의 관원수가 15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녹패(錄牌)에 서명하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외(中外)의 전곡(錢穀) 출납(出納)은 먼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고, 사사(使司)는 이를 삼사사(三司使)에 이첩하여 회계를 정밀히 조사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도록 하게 한다면 재정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놀고먹는 관리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
라는 건의를 올려서 정치기강을 확립하도록 하고 있는 것에서도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