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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慶州金氏-桑村公派 ♣

상촌공의 학문적 배경

by 범여(梵如) 2012. 8. 15.
 

 


상촌선생의 학문적 배경은 학문의 수학기(修學期)와 정연기(精硏期)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학문수학기는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크게 가정 교육기와 성균관 교육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년기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에게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가문(家門)은 그가 출생할 때는 비록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조부(祖父) 영백(英伯)은
봉상대부(奉常大夫) 삼사부사(三司副使)였고, 부(父) 오(?)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있었다.
삼사(三司)의 직은 국가재정을 관할하는 관부(官府)였고, 통례문(通禮門)은 조정(朝廷)의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관부(官府)였다. 또 지제고(知制誥)는 왕명(王命)을 받들어 교서(敎書)를 작성하는 관직이었다.

이로 볼 때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하였던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문에서 생장(生長)한 그는 일찍부터 조부(祖父)와 부(父)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성균관 입학전의 그의 학문적 배경은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보편적인 교육사조를 볼 때 학당(學堂)이나 십이도(十二徒)에서 수학하였을 것이다.
이색·정몽주 등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 수학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시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교육중흥을 일으키던 때였다.
그 당시 교관들은 모두 당대의 석학들이었고, 이들은 성리학(性理學)의 보급을 자기의 임무로 알아
교육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대사성(大司成)으로 교육의 책임을 맡았던 이색이 후일 이때를
생각하면서 지은

璧水光陰記少年(벽수광음기소년): 벽수(璧水 : 성균관)에서 보낸 세월 생각하니 젊은 때였구나.
八齋環列誦聲連(팔재환열송성연): 둘러선 팔재(八齋)에선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았네.
升堂最?抽籤講(승당최파추첨강): 당(堂)에 올라 추첨 뽑아 강(講)함을 두려워 하였네.
爲是音訛意莫傳(위시음와의막전): 글자 잘못 읽어 뜻을 잘못 전할까 해서였지.
當時諸子摠眞儒(당시제자총진유) 당시의 제자(諸子 : 교관)들은 모두가 진유(眞儒) 였도다.
說到精微肯?浿(설도정미긍섭유): 정미(精微)한데 이르러도 머뭇거림 없었도다.
獨有牧翁長閉口(독유목옹장폐구): 홀로 목옹(牧翁)만이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어,
中堂兀坐似枯株(중당올좌사고주): 중당(中堂)에 오똑앉아 마치 마른 나무 같았지.
敎養諸生豈有他(교양제생기유타): 제생(諸生)들을 교양하는데 달리 길이 있으랴.
欲令風化播中和(욕령풍화파중화): 풍화를 바꾸어 중화(中和)의 도(道)를 펴려했지.
金陵王氣回天意(금릉왕기회천의): 금릉왕기(金陵王氣)의 천운을 돌리려는 뜻을 펴니,
講舌徒然似決河(강설도연사결하): 강론하는 혀가 마치 둑을 터트린 강물 같았네.

라는 시에서도 보인다.

당시 그에게 감화를 준 성균관 교관들을 살펴보면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색과 정몽주는 그의 인품과
학문을 사랑하여 제자로서보다는 벗으로써 예우하였고, 그도 이들을 스승으로 받들면서 평생토록 뜻을 같이하였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문관(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후 관로(官路)생활을 통하여
그의 은문(恩門) 및 교유문인(交遊門人)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연되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미 석학(碩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의 은문(恩門)인 이무방(李茂芳)과
염흥방(廉興邦)은 그를 아들과 같이 사랑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과거의 고시관(考試官)과 합격자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이들은 서로 은문(恩門)과 문생(門生)의 관계를 가지면서 그 의리(義理)는 마치 부자지간(父子之間)과 같았다.
과거 합격자의 방(榜)이 발표되면 고시관은 자기 문하에서 합격한 문생들을 불러 학사연(學士宴)을 베풀어
이들을 축하하였는데, 이때 고시관은 그가 합격할 때의 좌주(座主)도 초청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경비를 출연하기도 하였고, 더 나아가 궁중 음악을 하사하여 축하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성현(成俔)이 {용재총화(傭齋叢話)}에서

전조(前朝) 과거(科擧)에서 시관(試官)은 지공거(知貢擧)·동지공거(同知貢擧) 2명 뿐이었으며,
문신(文臣)으로서 명망 있는 자로 이를 삼았다. 은문(恩門 : 考試官)은 문생(門生 : 科擧合格者) 보기를
자제와 같이 하고, 문생은 은문 보기를 부모와 같이 하여 데릴사위는 내실에 들어가지 못하여도 문생은
상견(相見)함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문생을 더욱 중히 여기는 까닭이다.
라고 하였고, 또 권근(權近)이
우리 동방(東方)은 고려 시대 광종(光宗) 이래로 그 예(禮)가 지극히 풍성하여 무릇 고시(考試)를 맡아 보는
사람은 반드시 풍성한 음식을 장만해 놓고 공복(公服) 차림으로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좌주(座主)를
모셔다가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마치 자기 부모에 대한 대접과 다름이 없이 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유사(有司)에 명하여 청사(廳舍)를 마련하도록 하고 특별히 내악(內樂 : 宮中音樂)을 내려
축하하니, 이로 말미암아 좌주는 문생 보기를 자식과 같이 하고 문생은 좌주 보기를 어버이 같이 하였으니,
사제(師弟)의 예가 후하다고 할 만하다.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같은 해에 합격한 자들은 동년(同年)으로 결합되어 동년회(同年會)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이때 장원
급제자가 동년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 회(會)를 주관하였다. 이들은 우의를 돈독히 하면서 정치활동에
있어서도 서로 이끌어 주었고, 또 정치적인 견해도 같이 하였다.

이것은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신돈전(辛旽傳)에서

이때 왕[공민왕]은 왕위에 오른지 오래되었고, 재상(宰相)들은 많았으나 뜻을 펴지 못하였다. …
또한 문생(門生)·좌주(座主)·동년당(同年黨)이니 하여 서로 사정(私情)에 얽매임으로 삼자(三者)는
모두 쓸모가 없다고 보았다. 이로써 속세를 초월하여 우뚝 선 인물을 구하여 크게 등용함으로써
인습이 된 폐습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라고 한 것에서 보인다.

또 같은 은문으로부터 배출된 자들도 서로 선후배의 동문(同門)으로 결합되어 유대가 돈독하였다.
이것은 공민왕 18년에 이색의 문하에서 합격된 권근(權近)이 공민왕 14년에 이색의 문하에서 합격한
맹희도(孟希道)에게

나는 선생의 뒤를 이어 기유년(己酉年 : 恭愍王 18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선생을 형으로 대해 온지 몇 해가 되었다. …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이러한 과거 운영은 결과적으로 좌주(座主)·문생(門生)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여 갔고, 또 좌주를 중심으로 학맥(學脈)이 형성되게 된다. 특히 고려 후기에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됨으로써 성리학의 의리사상과 대의명분은 이러한 사조를 가속화시키게 된다.

고려 후기에 과거 고시관(考試官)을 맡았던 자들은 그 자신의 학문을 그들 문생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고,
또 그 자신의 은문(恩門) 또는 문인(門人)으로부터 수용하였던 학문을 전승시킬 수도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인 배경하에서 그도 은문(恩門)인 이무방(李茂芳)과 염흥방(廉興邦)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그의 학문적인 배경을 사문(師門)과 은문(恩門), 그리고 교유문인(交遊門人)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색(李穡: 1328, 충숙왕 15∼1396, 태조 5)
이색(李穡)은 고려말의 대학자로 자(字)는 영숙(潁叔)이고, 호(號)는 목은(牧隱)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부(父)는 가정(稼亭) 이곡(李穀)이다. 충숙왕(忠肅王) 15년(1328)에 출생하여 14세인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2년(1341)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0세인 충목왕(忠穆王) 3년(1347)에 원(元)에 가서 그곳의
국자감(國子監)에서 3년동안 수학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년(1353) 5월에 이제현(李齊賢)과 홍언박(洪彦博)의 문하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동년 가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실시한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다음해 2월에는 원(元)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학문이 빼어나 그가 과거에 합격한 5년 후에 공민왕으로부터 "이색(李穡)은 재주와 도덕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 아니다"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이 중건되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하여
교육중흥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그는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에게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고, 교육체계를 사서오경재(四書五經齋)로 개편하여 교육을
일으키니, 학교교육이 크게 중흥을 맞게 된다. 상촌선생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는 시기도 이때 그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공민왕 20년(1371)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이후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다.
공민왕은 그를 유종(儒宗)으로 받들어 존경하였고,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禑王)도 그를 사부(師傅)로 받들었으며,
창왕(昌王)은 그에게 검리상전(劍履上殿) 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전을 내렸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조정에 나오도록 권고하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켜 이를 거절하였다. 태조(太祖) 5년(1396) 5월에 여흥(驪興)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그는 당시 모든 학자들로부터 유종(儒宗)으로 존경을 받았던 대학자였다. 그는 유학(儒學) 뿐만 아니라
불교(佛敎)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역사(歷史)에도 높은 식견이 있었다.

그는 재임 중에 6차에 걸쳐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역임하여 무려 135명의 문생(門生)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생들은 이후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고려 후기 및 조선 초기의 학문 발전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권근(權近)과 하륜(河崙) 등이 있다. 또 그의 문생은 아니지만 그가 성균관 교관으로
있을 때 배출한 인재도 수없이 많았다. 그 중에서 상촌선생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그는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자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지어 축하하였으며, 상촌선생의 은문(恩門)인
염흥방(廉興邦)이 이에 대한 답례로 연회를 마련하여 그를 초청하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斯門盛會世無多(사문성회세무다): 사문(斯門)의 장한 모임 세상에 많지 않아서,
每向東亭簇玉珂(매향동정족옥가): 동정(東亭)을 찾으면 인재가 가득하더라.
桃李門庭移日語(도리문정이일어): 도리(桃李)의 문정(門庭)에서 늦도록 말을 나누는데,
綺羅絃管?雲歌(기라현관알운가): 비단결 같은 관현(管絃)은 구름도 멈춰서서 노래하네.
滿前才俊今如許(만전재준금여허): 뜰 앞에 가득한 재준(才俊)들 이제는 얼마나 되는지,
居右衰遲我奈何(거우쇠지아내하): 상석에 앉은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어찌할꼬.
泥醉夜深歸柳里(이취야심귀유리) 크게 취하여 깊은 밤에 유리(柳里)로 돌아오니,
洗空塵慮暗天河(세공진려세천하) 티끌 같은 마음 말끔히 씻기니 은하수가 다가서네.

상촌선생도 이색의 학문을 존경하여 그의 문하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상촌선생은 이색을 찾아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하였다.
이에 이색은 크게 기뻐하면서 자(字)에 대한 설(說)을 지어 주었는데, 그 주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갑인년(甲寅年) 장원(壯元) 김정언(金正言)이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은 자수(子粹)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字)를 순중(純仲)이라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선생께서는 그 뜻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수는 마음속 깊이 이를 간직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은
하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바가 또한 얕지 않으니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늘의 명(命)은 심원(深遠)하여 쉬지 않는다.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고 크면서도 빠뜨림이 없으니, 어찌 주재(主宰)하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상(象)을 보이는 것과 풍우와 상뇌(霜露)가 가르침을 주는데 있어 어찌 일찍이
조그마한 어김이라도 있었던가. 비록 꾸짖는 것이 위에서 보이고 재앙이 아래에서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잠깐일 뿐이요, 그 생성(生成)하고 함육(涵育)하는 조화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와 같으니,
그 다함이 없는 것과 순일(純一)한 것을 알 수 있다.

건괘(乾卦)의 대상(大象)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자강(自强)하여 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사람에게 바라는 바가 깊다 하겠다. 군자(君子)가 자강(自强)하면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으면 폐(廢)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폐하지 않는 것은 그 지극한 데에 이르자는 것이다.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하늘보다 후에 하더라도
천시(天時)를 받들어 행하니, 하늘이 바라는 묘한 이치가 이에 나타난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니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였으랴"하였다. 주공이 문왕을 스승으로 하여
역(易)의 괘효(卦爻)를 찬(讚)하였으니, 이것은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주공의 뜻을 따르는 바이다.

붉은 신발을 보더라도 진중한 모양을 갖춘다면 마음이 어찌 순일(純一)하지 않겠는가.
문왕이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교화를 파장결부(破?缺斧)의 때에도 행하니, 이로써 풍속을 바꾸어
다시 바른 데로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바로 이것은 순일하여 쉬지 않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말하기를 "역경(易經)에 처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주공(周公) 같은 성인(聖人)도
이와 같은 때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디를 붸아서 그 효(孝)를 성취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있겠는가?

아! 순일한 법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순중(純仲)이 장원(壯元)에 뽑히어 언관(言官)이 되었으니,
가히 현달(顯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 후에 버림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 마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자설(字說)을 지어 권면하는 바이니, 지킴이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지킴이 있으면 순일(純一)하여 질 것이다.
상촌선생도 만년에 이색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東國文章集大成(동국문장집대성): 동국(東國)의 문장을 집대성하였으니,
稼亭父子冠群英(가정부자관군영):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文人)의 으뜸이었네.
山川孕秀今猶古(산천잉수금유고): 산천의 품은 정기는 지금도 옛과 다름 없는데,
借問何人繼盛名(차문하인계성명): 묻노니 어느 사람이 그 이름을 이을꼬.

2)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 6∼1392, 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는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1337)에 영천군(永川郡)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우항리(愚巷里)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가 9세 때에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관례(冠禮)를 치른 후에 몽주(夢周)로 다시 고쳤다. 자(字)는 달가(達可)이고, 호(號)는 포은(圃隱)이며,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그는 21세가 되던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의 문하에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4세인 공민왕 9년(1360)에 김득배(金得培)와 한방신(韓方信)의 문하에서 연괴삼장(連魁三場)하여
탁제(擢第)하였다.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이 중건되고 이색이 교육중흥을 일으킬 때 그는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게 되었고, 이로써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동료 교관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이색으로부터는 "포은(圃隱)의
횡설수설(橫說竪說)은 이치에 맞지 않는 바 없다"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
이로써 다음해에는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승차(陞次)하고, 공민왕 20년(1371)에는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직되었으며, 공민왕 23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이색을 이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이 되었다.
상촌선생이 입학하여 그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있을 때였다.

공민왕이 피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이 해에 이인임(李仁任)을 비롯한 친원(親元)세력들이 발호하여
지금까지의 친명정책(親明政策)을 버리고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하려고 하자 그는 성균관에서
교관으로 같이 활약한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 등 10여인과 더불어 글을 올려서 그 부당성을 극간하였다.

이로써 그는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상촌선생은 그와 뜻을 같이 하였지만 조민수(曺敏修)를
포상하려는 왕에게 그 부당성을 극간하여 돌산수(突山戌)로 유배당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못하였다.

이후 예의판서(禮儀判書)·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우왕 10년(1384)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다음해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창왕 원년(1389)에는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배수하고, 얼마 후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킨 공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는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을 제수 받아 인사권을 총괄하였고,
공양왕 4년 2월에는 대명률(大明律) 지정조격(至正條格)과 본국의 법령을 참작하고 산정(刪定)하여
신율(新律)을 지어 바치니, 왕은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이를 무려 6일이나 걸쳐
진강(進講)하게 하면서 누차에 걸쳐 그 정교함에 탄복하였다.

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이성계 일파의 세력들로부터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대외정책과 정치개혁에서는 서로 동조하는 입장에 있었던 이를 두 사람의 관계는 고려왕권의 맥락계승에
있어서는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양왕 4년은 이들 두 세력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공양왕 4년 4월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는 도중에 이방원(李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피살되었다.
이것은 바로 고려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상촌선생은 좌상시(左常侍)와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하면서 그와 뜻을 같이하였고, 정몽주가 피살되고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는 상촌선생과 비록 15세의 차이가 있었고, 또 서로간에는 사제(師弟)의 관계에 있었지만 그는 상촌선생을
벗으로 예우하였고, 상촌선생 또한 그에게 스승으로서의 예(禮)를 다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상촌선생이 안동(安東)으로 낙향하였을 때 그는 직접 안동으로 찾아와 위로하였고,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서 그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지은
상촌선생의 시에서도 보인다.

이때 상촌선생은 그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있다.

烏川先生傑作(오천선생걸작): 오천선생(烏川先生 : 정몽주)의 작품은 훌륭하도다.
字?整整斜斜(자화정정사사): 자(字)와 획(?)이 바르고도 비스듬하도다.
道德優遊聖域(도덕우유성역):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篇章獨步詩家(편장독보시가):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 났도다.
壁間喜看濃墨(벽간희간농묵): 벽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板上恨未籠紗(판상한미농사): 마루[板上]위에서는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는구료.
屹屹高山仰止(흘흘고산앙지): 우뚝하게 높은 산[포은을 지칭] 우러러 보니,
顔衰正怯年華(안쇠정겁년화): 나이 늙어 얼굴이 쇠하니 참으로 두렵도다.

3) 박상충(朴尙衷: 1332, 충숙왕 복위 원년∼1375, 우왕 원년)
박상충(朴尙衷)은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수(秀)의 아들로, 충숙왕 복위 원년(1332)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성부(誠夫)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공민왕 2년(1353)에 이제현(李齊賢)과 홍언박(洪彦博)의
문하에서 이색(李穡) 다음의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따라서 이색과는 동년(同年)이 된다.
이로써 벼슬길에 나아가 얼마 후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당시에 문란한 향사(享祀)의 의례(儀禮)를 고례(古禮)에 준하여 조목(條目)별로 정리하여
사전(祀典)으로 삼으니,
이것은 이후 향사(亨祀)의 준칙이 되었다.
이때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는 3년 상을 치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은 부모의 상을 100일만 입고 탈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100일이 지나자
나라에서 전교령(典校令)을 제수하니, 그는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3년 동안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성균관을 중건하고 이색을 겸대사성으로 삼아 교육중흥을 펴게 되는데,
이때 그도 타관(他官)으로서 교관(敎官)의 직을 맡아서 교육에 전념하였다.
 
공민왕이 피살당하고 우왕이 즉위하자 당시 조정은 이를 비밀로 하였는데, 그는 성균사예(成均司藝)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명(明)에 사신을 보내 상사(喪事)를 알리도록 권고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이인임(李仁任)은 찬성사(贊成事) 안사기(安謝琦)와 더불어 원(元)과 화친하고자
김의(金義)를
사주하여 명(明)의 사신 채빈(蔡斌)을 죽였는데, 그는 상소를 올려 "이제 만약에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안사기(安謝琦)를 처벌하도록 건의하였다.
이로써 안사기(安謝琦)는 처형되었다.

 얼마 후 이인임(李仁任)이 종친(宗親)을 비롯한 권문세족(權門勢族)들과 결탁하여 연명으로
글을 만들어 북원(北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올리려 하자, 그는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선왕(先王)은 이미 명(明)을 섬기도록

 결정하였으니, 마땅히 원(元)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하고는 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는데, 이때 북원(北元)의 사신이 내조(來朝)하자 그는 상소를 올려
이를 물리치도록 극간하였다.

또 간관(諫官)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도 상소를 올려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논하고
그의 목을 베도록 청하였다.

 이로써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은 투옥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 배후세력으로 그와
전녹생(田祿生)이
지목되었고, 이로써 유배되어 중도에서 죽었다. 이때는 우왕 원년 7월이었고, 그의 나이 44세였다.

상촌선생이 그로부터 교육을 받은 것은 공민왕 19년(1370)이었다.
그가 우왕 원년에 죽음을 당함으로써 상촌선생과의
교분은 깊지 않았지만 그는 상촌선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
이것은 상촌선생이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의
시중을 위하여 성균관을 퇴관할 때 그가 아쉬워 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귀근(歸覲)하는 생원(生員)
김자수(金子粹)를 보내면서(送生員金子粹歸覲安東)]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4) 이무방(李茂芳: 1319, 충숙왕 6∼1398, 태조 7)

이무방(李茂芳)은 찬성사(贊成事)를 증직(贈職) 받은 인미(仁美)의 아들로, 충숙왕 6년(1319)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석지(釋之)이고, 호(號)는 남곡(南谷)이며, 본관은 광양(光陽)이다. 이색(李穡)과는 16∼17세 때부터
 함께 교유하면서 공부하던 지기(知己)이기도 하다.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김광재(金光載)의 문하에서 이색과 더불어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충목왕 3년(1347)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한산군(韓山君)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로써 전교교감(典校校勘)을 제수받았고, 공민왕 초에 순창군지사(淳昌郡知事)로 출보하였다.

 이후 장령(掌令)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고 민부상서(民部尙書)를 배수하였다.
얼마 후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가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의 호를 하사 받고
 밀직학사(密直學士)에 승보하였다. 이때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니 왕은 그에게 명하여
경안전(慶安殿)에서
비를 빌게 하였는데, 그는 연비(燃臂)를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공민왕은 이를 듣고는

 "백성 사랑함을 이와 같이 하니 가히 수상(首相)이 되겠다"라고 경탄하였고, 얼마 후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제수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의창(義倉)을 설립하여 백성들을 규휼하였고, 또 밝은 덕으로 교화를 베푸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듣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소환하고 여절공신(礪節功臣)의 호를 더하여 하사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하였는데, 이때 왕은 그에게 "이정당(李政堂)은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비록 고인(古人)이라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 염흥방(廉興邦)과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여 김자수(金子粹)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로써 그는 상촌선생의 은문(恩門)이 되었다.
이후 상촌선생은 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된다.

우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을 열고 전녹생(田祿生)과 더불어 그를 사부(師傅)로 삼았다.
우왕 2년(1376)에는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에게 공민왕 시해에 가담한 한방신(韓方信)과 노진(盧?)의
재산을 적몰하지 않은 책임을 극렬하게 통박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광양군(光陽君)의 봉함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소환되어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제수받았다.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배수하였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여절찬화공신(推忠礪節贊化功臣)의 호를 내렸다.
조선이 건국되자 문생(門生) 조준(趙浚)의 천거로 다시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 되고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에
봉작되었다. 태조 7년 8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80세였다.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백성 사랑하기를 부모를 받들듯이 하였다.

이색이 그의 행적을 평하면서

그가 베푼 사랑은 백성들의 마음에 남아 있고, 그의 빛나는 이름은 물망(物望)에 합하니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로다.
다음날에 큰 계책을 세워 위로 임금의 덕화 펴기를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에서 일어나던 때와 같이
할 것인지
이는 모두 하늘에 있는 일일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5) 염흥방(廉興邦: ?∼1388, 우왕 14)
염흥방(廉興邦)은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제신(悌臣)의 아들로, 자(字)는 동정(東亭)이고, 호(號)는 어은(漁隱)이다.
공민왕 2년(1353)에 송천봉(宋天鳳)의 문하에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공민왕 6년(1357)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복(李仁復)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김희조(金希祖)의 문하(門下)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가 공민왕 12년(1363)에는 위위윤(衛尉尹)으로 승직되었고,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경성(京城)을 수복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왕이 교육중흥을 위하여 성균관을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그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주관하였다.

공민왕 16년 7월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으며,
공민왕 23년에는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었다. 또 이해 4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김자수(金子粹)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이인임(李仁任)의 북원(北元)사신 영접에 반대하여 투옥된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의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를 당하였으나 곧 소환되어 서성군(瑞城君)의 봉작을 받았다. 우왕 10년(1384)을
전후한 시기에는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어 이인임(李仁任)과 더불어 국권을 총단하였다. 우왕 14년(1388)에
조반(趙懈)의 옥사(獄事)를 다루는 과정에서 왕의 미움을 받아 이인임 일파가 숙청 당하면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는 이색(李穡)과 일찍부터 교유하여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자호(自號)를 어은(漁隱)이라 하고 그에 대한
기(記)를 이색에게 부탁하였으며, 이색은 그를 위하여 수 십여 수에 달하는 시를 지어 {목은집(牧隱集)}에 남기고 있다.

우왕 만년에 그가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와 더불어 권세를 잡고 탐학하는 인물로 변하자, 이색은 크게
실망하여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한미한 집안에서 생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자 전민(田民)을 탈점하고
한꺼번에 큰 집 세 채를 지었고, 좌사(左使) 염흥방(廉興邦) 역시 수탈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릇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다.
라고 탄식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그를 평(評)하여
동정(東亭)은 옛 것을 좋아하고 몸을 닦으며 참된 마음을 간직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렴주구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개나 돼지 보다 못하게 여기었고, 물고기나 자라 따위에게도
덕화를 입게 하여 널리 베푸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그는 상촌선생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그는 이색·정몽주와 함께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였고,
또 그가 행례(行禮)를 행할 때는 상촌선생으로 하여금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일찍이 그가 연회를 베풀 때 상촌선생을 직접 보내어 이색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이색은 몸이 불편하여 참가하지 못하였고, 그 서운함을 시를 지어 표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少壯元招老壯元(소장원초노장원): 젊은 장원[金子粹]이 늙은 장원[李穡]을 초대하는데,
壯元郞又特傳言(장원랑우특전언): 장원랑(壯元郞)이 또 특별히 말을 전하는 구나.
斯爲盛事足驚世(사위성사족경세): 이것은 장한 일이라 세상을 놀라게 할 만 하지만,
只恨病軀難出門(지한병구난출문) 다만 병든 몸이 문밖을 나가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聚散却同萍與水(취산각동평여수): 만나고 헤어짐은 흡사 물과 부평초 같으며,
閑忙只合酒盈樽(한망지합주영준): 바쁘고 한가함은 술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은가.
四支調適知何日(사지조적지하일): 사지(四支)는 어느 때나 제대로 풀릴 것인가.
風雨蕭蕭獨?軒(풍우소소독의헌): 풍우(風雨)가 소소(蕭蕭)한데 홀로 마루에 기댔도다.

6) 문익점(文益漸: 1329, 충숙왕 16∼1398, 태조 7)
문익점(文益漸)은 진주(晋州) 강성현인(江城縣人)으로, 부(父)는 숙선(淑宣)이다.
그는 처음에 이름을 익첨(益瞻)이라 하였으나, 후에 익점(益漸)으로 개명하였다.
자(字)는 일신(日新)이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또는 사은(思隱)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색(李穡)의 부(父)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공민왕 9년(1360)에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김득배(金得培)와 한방신(韓方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급제하였다.
이로써 정몽주와는 동년(同年)이 된다.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에 제수되었고, 이어 순유박사(諄諭博士)가 되어
성균관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공민왕 12년(1363)에는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름사(計凜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에 갔다. 귀국하면서 그는 종자(從子) 김용(金鏞)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귀국하여 진주(晋州)에서 사돈인 정천익(鄭天益)과 더불어 이를
재배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목화가 전래된 기원이다.

우왕 원년(1375)에는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시학(侍學)을 겸하여
왕에게 학문의 도(道)를 논하였다.

이때에 조준(趙浚) 등이 주체가 되어 사전개혁(私田改革)을 추진하였는데, 그는 이색과 뜻을 같이 하여 반대하였다.
이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집 후원에 정자를 지어 삼우당(三憂堂)이라 편액하고, 학문을 즐기면서 만년을 보냈다. 태조 7년(1398) 6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였다.

그는 이색의 부(父)인 가정(稼亭)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일찍부터 이색과는 교분이 두터웠고,
정몽주와는 동년(同年)으로 또한 교분이 두터웠다. 이들과는 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면서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그와 상촌선생과의 관계는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깊은 교유가 있었다.
그는 상촌선생보다 20여년 이상의 연상이었지만, 상촌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사랑하여 마치 벗과 같이 대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상촌선생이 여묘(廬墓)생활을 마치자, 이를 위로하면서 보낸 [김정언(金正言) 순중(純仲)의 여묘(廬墓)를 위문하며(慰問金正言純仲廬墓)]라는 시에서 알 수 있다.


7) 권근(權近: 1352, 공민왕 원년∼1409, 태종 9)
권근(權近)은 부(溥)의 증손으로 공민왕 원년(1352)에 출생하였다. 조(祖)는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지낸
 고(皐)이고, 부(父)는 호군(護軍)을 지낸 희(僖)이다.
처음에는 이름을 진(晋)이라 하였다가 후에 근(近)으로 고쳤고, 자는 가원(可遠)이라 하였다가 후에 사숙(思叔)으로 고쳤다.
호는 양촌(陽村)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공민왕 18년(1369)에 이인복(李仁復)과
 이색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에 그의 나이 18세였다.
과거에 합격하고 궁으로 들어가니 왕이 그를 보고 노하여 "저 어린 것이 어찌 합격하였는가"하였는데, 이에 이색이 "장차 크게 쓰일 것이니, 가히 어리다고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배수하고
왕부(王府)의 필도치(必寐赤)로 삼았다.

공민왕 19년(1370) 8월에 이인복과 이색이 고시관이 되어 공사(貢士)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부시(赴試)하지는 못하였다. 공민왕 22년 6월에는 백문보(白文寶)·권중화(權仲和)가
고시관이 되어 공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도 합격하였지만 나이가 어려 부시는 하지 못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는 성균직강(成均直講)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우왕이 즉위하자
예의군부정랑(禮儀軍溥正郞)을 지내고, 이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우왕 6년(1380)에는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승보시(升補試)를 주관하여 홍상빈(洪尙彬) 등 110명을 선발하였다.

우왕 8년(1382)에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배수하였고, 다음해에는 예의판서(禮儀判書)와 좌대언(左代言)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는 지신사(知申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정도전과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여 이치(李致)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어 그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더불어 명(明)에 사신으로 갔는데, 귀국하자
명(明)에서 보낸 국서(國書)를 먼저 보았다는 죄명으로 탄핵을 받아 우봉현(牛峯縣)에 유배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다시 탄핵을 받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고, 이어 흥해(興海)로 옮겼다가 또 김해로 옮겼다.
얼마 후 윤이(尹?)·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여기에 연루되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얼마 후에
또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 그는 이 기간에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고, 태조 7년(1398) 4월에는 정도전과 더불어 성균관제조(成均館提調)가
되어 한량(閑良) 4품 이하의 유사(儒士)와 삼관유생(三館儒生)들에게 경사(經史)를 습독(習讀)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정종(定宗)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으로 책록되고 참찬의정부사(?贊議政府事)로서 겸대사성을 맡아
성균관 교육을 담당하였다. 태종 2년(1402)에는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이 되었으며, 이 해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粟)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태종 5년(1405)에는 왕의 친시(親試)에 하륜(河崙)과 더불어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선발하였다. 태종 7년(1407)에는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제진(製進)하여 성균관을 비롯한 학교교육의 개혁안을 올렸고,
이어 학식(學式)을 제정하여 올렸다. 태종 9년(1409)에 병을 얻어 돌아가시니, 향년 58세였다. 문충(文忠)이라 시호하였다.

그는 상촌선생과 막역한 벗으로 지냈다.
그는 상촌선생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과거는 5년이 앞서는 공민왕 18년(1369)에 급제하였다.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막역하게 지냈다.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고, 상촌선생은 이색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허물없는 지기(知己)로 교유하였다.
이들은 우왕을 섬길 때 왕에게 직언(直言)으로 간하였고, 이로써 상촌선생은 돌산수(突山戌)로 유배되었으며,
그도 왕의 미움을 받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상촌선생이 정언(正言)을 제수 받고 고향으로 떠날 때 이를 아쉬워 하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 보인다.
匹馬千山路(필마천산로): 필마(匹馬)로 첩첩산길을 돌아가는데,
孤鴻八月秋(고홍팔월추): 외로운 기러기 날으니 팔월의 가을이로다.
歸寧之子迫(귀녕지자박): 부모를 찾아 떠나는 그대이니 무척도 바쁠터이지만,
惜別故人愁(석별고인수): 작별을 아쉬워함은 친구의 심정일레라.
芋栗村中樂(우율촌중락) 토란과 밤 등은 마을에서의 즐거움이고,
??物外遊(박로물외유): 순채와 농어회로 세상 밖에서 노닐테지.
也應同去圓(야응동거광) 필시 함께 광(圓)을 떠나가면서,
 
笑我自悠悠(소아자유유): 나 홀로 유유(悠悠)하다고 비웃을 테지.

이 밖에도 상촌선생의 학문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그가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교관으로 있었던
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
정도전(鄭道傳)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박의중(朴宜中)은 그가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성균사예(成均司藝)였으며, 김구용(金九容)은
성균직강(成均直講)이었다.

그리고 이숭인(李崇仁)은 진덕박사(進德博士)로 있었으며, 정도전(鄭道傳)은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석학들로서 이색·정몽주와 더불어 공민왕 16년(1367)의 교육중흥에 참여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던 자들이다. 이로 볼 때 이 시기에 성균관에서 수학한 그는 이들로부터 많은 학문적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비록 이들과의 관계는 기록이 누락되어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모두 이색·정몽주와 뜻을 같이한
지기(知己)였으며, 그 또한 이색·정몽주와 더불어 막역하게 지냈음을 감안하면 이들과도 깊은 교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 그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로는 그와 막역하게 교유하였던 문인(門人)들을 들 수 있다.
그가 교유한 문인(門人)들을 살펴보면 조계생(趙啓生)·김진양(金震陽)·이문화(李文和)·정복주(鄭復周) 등을 그
의 실록(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계생(趙啓生)은 공민왕 12년(1363)에 출생하여 창왕 즉위년(138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그는 상촌선생의 후학으로 항상 그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교유하였다.

 일찍이 상촌선생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생각하면서 [한산제영(韓山題詠)]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의 운(韻)을 차(次)하여
山傍熊津疊?成(산방웅진첩장성): 산은 웅진강(熊津江)을 끼고 첩첩병장 이루어,
終敎李氏?其英(종교이씨품기영): 마침내 이씨일문(李氏一門) 그 영기(英氣)를 타고 났도다.
自從父子登科後(자종부자등과후): 저 멀리 원(元)나라에서 부자(父子)가 모두 등과(登科)하니,
天下皆知此邑名(천하개지차읍명): 천하(天下)는 모두 이 고을의 이름을 알게 되었네.

라는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이문화(李文和)는 인주인(仁州人)으로 자(字)는 백중(伯中)이며, 호(號)는 오천(烏川)이다.
우왕 6년(1380)에 염흥방(廉興邦)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상촌선생에게는 동문(同門) 후배가 된다.
 그도 일찍부터 이색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이색도 그를 위하여 자(字) 백중(伯中)에 대한
설(說)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그는 상촌선생을 선배로 받들어 존경하였다.
상촌선생이 일찍이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서 정몽주(鄭夢周)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도 이때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聞韶山水蕭灑(문소산수소쇄)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맑고도 깨끗하여,
夜靜簾?月斜(야정렴소월사): 밤은 고요한데 발[簾]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柳色靑靑客舍(유색청청객사): 버들잎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香烟苒苒僧家(향연염염승가): 향기로운 내음이 승가(僧家)에서 은은히 스미네.

憂民便爲鶴髮(우민편위학발) 백성걱정에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得雨還岸烏紗(득우환안오사): 비를 만나 강안(江岸)에 돌아온 검은 모자,
六月未成一事(육월미성일사): 여섯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却璃前後皇華(각참전후황화):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김진양(金震陽)은 계림부인(鷄林府人)으로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號)는 초려(草廬) 또는 초옥자(草屋子)라
하였고, 동두(童頭)라고도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이색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제수받았다.

이후 서해도(西海道) 안렴사(安廉使)와 문하사인(門下舍人)을 거쳤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좌사의(左司議)에 올랐다.
공양왕 3년에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고, 이어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는 글을 올려 유배시켰고, 이어 조준(趙浚)·남은(南誾) 등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공양왕 4년(1392)에는 이색·정몽주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정몽주와 이색의 당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유배되어 죽었다.

그는 상촌선생보다 3년 먼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이들은 서로 벗으로 지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식견도 뛰어났고 성격이 유달리 강개하였는데, 이 점에서 상촌선생과는
항상 통하였고, 또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상촌선생이 일찍이 빙허루(憑虛樓)에서 김사고(金師古)의 운(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도 더불어 같이 시를 지었다.

此樓臨水又依山(차루임수우의산): 이 다락은 물에 다달았고 산도 의지하였으니,
仁智兼全二樂間(인지겸전이락간): 인지(仁智)는 이요(二樂)를 아울러 가졌도다.
欲識主人成德處(욕식주인성덕처): 주인의 큰 뜻 이룬 뜻을 알고 싶어 하거들랑
軒裳不動一心閑(헌상부동일심한): 벼슬에도 동하지 않는 마음, 한가함을 보려므나.

정복주(鄭復周)는 동래인(東萊人)으로 자(字)는 사고(師古)이고, 호(號)는 죽당(竹堂) 또는 육괴(肉塊)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강개하였으며, 이단(異端)을 배척하는데 엄격하였다. 상촌선생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그가 일찍이 전라(全羅) 도관찰사(都觀察使) 장자충(張子忠)의 막사로 떠날 때 상촌선생은 이별을 아쉬워 하면서
惜別贈何物(석별증하물): 이별의 아쉬움 무엇으로 증별(贈別)할 건가.
一盃千里春(일배천리춘): 한잔의 술에 천리의 봄 담아 보내노라.
島夷方梗化(도이방경화): 섬 오랑캐들 바야흐로 찍자부리고 있나니,
須使自來賓(수사자래빈): 모름지기 스스로 감화되어 오도록 하려므나.

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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