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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慶州金氏-桑村公派 ♣

상촌공의 생애

by 범여(梵如) 2012. 8. 14.
 

 

 

상촌선생(1351, 忠定王 3∼1413, 太宗 13)은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귀족가문의 출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1784년에 발간된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에서 그의 조선(祖先)은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예종(睿宗) 10년(1115)에 낭중(郎中)으로서 요(遼)에 사은사로 다녀온 김인관(金仁琯)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同) 세보(世譜)에서는 그가 조산대부(朝散大夫)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역임하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지냈음을 밝히고 있다.

위 세보(世譜)의 내용대로 본다면 김인관(金仁琯)이 예종 10년에 낭중(郎中)으로서 요(遼)에 사은사로
갔다면 그가 과거에 합격한 시기는 늦어도 예종 10년 이전일 것이고, 또 그가 활동한 시기도 예종을
전후한 시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과거방목(科擧榜目)』이나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이 시기에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김인관(金仁琯) 이후 그의 가문은 칙려(則麗)→필균(匹勻)→정유(貞裕)→종성(宗誠)→예(裔)→영백(英伯)→오(?)를
거쳐 자수(自粹)에 이르고 있지만 그 동안에 그의 가문은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음의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에 나타나는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가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김인관(金仁琯)의 아들인 칙려(則麗)와 손자인 필균(匹勻)은 종6품인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와 종7품인 위위시주부(衛尉寺主簿)를 역임하였고, 정유(貞裕)와 종성(宗誠)도
정5품인 도감판관(都監判官)과 종6품인 예빈성승(禮賓省丞)을 역임하였을 뿐이다.
상촌선생의 고조(高祖)인 예(裔)는 정7품인 합문지후(閤門祗候)였고, 조(祖)인 영백(英伯)은 종4품인
삼사부사(三司副使)를 지냈으며, 부(父)인 오(誤)도 정6품인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지냈을 뿐이다.

<桑村先生의 家系>

세계 이름 관직명
1세 仁琯 文科壯元 朝散大夫(종3) 衛尉寺卿 檢校太子太師
2세 則麗 殿中內給事(종6)
3세 匹勻 衛尉寺主簿(종7)
4세 貞裕 都監判官(정5)
5세 宗誠 禮賓省丞(종6)
6세 閤門祗候(정7)
7세 英伯 奉常大夫 三司副使(종4)
8세 ? 奉常大夫 通禮門副使 知製誥(정6)
9세 自粹 文科壯元 成均大司成 忠淸道觀察使 刑曹判書

위에서 볼 때 상촌선생의 조선(祖先)으로서 5품직(品職) 이상을 역임한 사람은 1세인 인관(仁琯)과
4세인 정유(貞裕), 7세인 영백(英伯)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고, 특히 3품직(品職) 이상을 역임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와 같이 볼 때 그의 가계(家系)는 고려시대에 크게 현달하지 못하다가 상촌선생대에 이르러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 신흥사대부 가문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입신과정은 고려후기 신흥사대부들의
입신과정과 동일하다.

즉 고려후기에 빛을 발한 안향(安珦)·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도 그의 부(父)
또는 본인의 능력에 의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안향(安珦)의 증조(曾祖) 자미(子美)는 흥위위(興威衛)의
별장(別將)이었으며, 조(祖) 영유(永儒)는 관직이 없었고, 부(父) 부(孚)는 흥주(興州)의 서리(書吏)에 불과하였다.

정몽주(鄭夢周)의 가문도 11대조인 정습명(鄭襲明) 이후 그에 이르기까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며,
부(父) 운관(云瓘)은 성균관(成均館) 복응재(服膺齋)에서 수학하였을 뿐이다. 길재(吉再) 역시 한미한 가문이었다.

그는 경상도 선산부(善山府)의 속현(屬縣)인 해평(海平) 부곡(部曲)출신으로서, 그의 증조(曾祖) 시우(時遇)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을 뿐 벼슬에는 나아가지 못했으며, 조(祖) 보(甫)는 실직(實職)이 아닌 산원동정(散員同正)에
불과하였고, 부(父) 원진(元進)도 겨우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역임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문에서 출생한 이들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후 자신들의 능력으로 관로(官路)
사회에서 확고한 기반을 쌓으며 가문을 번창시켰다.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 역시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이제현(李齊賢)은 그의 부(父) 진(玲)이, 이색(李穡)은
그의 부(父) 곡(穀)이 각기 문과에 급제하여 관로(官路)에 진출함으로써 가문을 일으켰다.

상촌선생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부(父)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지낸 오(?)이고, 모(母)는 일직(一直)
손씨(孫氏)로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한 정평공(靖平公) 홍량(洪亮)의 따님이다.

그는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2남 4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이름을 자수(子粹)라 하고, 자(字)를
거광(去圓)이라 하였으며, 호(號)를 상촌(桑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과거에
합격하고, 이후 관로에 진출하자 자(字)를 순중(純仲)이라 고쳤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즐겨하였다. 20세가 되던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균관은 이색(李穡)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교육중흥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이색은 성리학(性理學)의 보급을 위하여 경학(經學)에 박통한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에게 교관 직을 겸직케 하여 교육에 전념하도록 하였고,
또 학식(學式)을 세워 교육을 엄하게 하였다. 이로써 학풍이 크게 번창하여 배우려고 하는 자들이 운집하여
성리학이 크게 발흥하였다.

이색은 만년에 이때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 있다.
國家崇文敎多術(국가숭문교다술): 국가에서 문(文)을 숭상하니 가르침이 다양하였도다.
大作泮宮高??(대작반궁고율올): 크게 성균관을 지으니 높고도 높도다.
仍開九齋各授徒(잉개구재각수도): 이제 구재(九齋)를 열어 각기 생도를 가르치니,
侁侁靑衿盈國都(신신청금영국도): 많고 많은 유생들 서울에 가득하도다.
夏天都會松山麓하천도회송산록): 하천도회(夏天都會)는 송악산(松嶽山) 기슭에서 행하였고,
讀書賦詩須刻燭(독서부시수각촉): 글도 읽고 각촉(刻燭)하며 시도 지었지.
全篇警句世所知(전편경구세소지): 전편(全篇)이 경구(警句)인 것은 세상이 아는 바요,
討論講習仍孜孜(토론강습잉자자) 토론하며 강습하길 부지런히 하였네.
昔賢遺跡可對越(석현유적가대월): 옛날 현인(賢人)들의 자취 대할만 한데,
風移世變成挑撻(풍이세변성도달): 풍속과 세상이 변하여 제 멋대로 바뀌었지.
如今濂洛敎初行(여금렴락교초행): 이제 염락(濂洛)의 가르침 처음으로 행해지니,
謳吟直欲求性情(구음직욕구성정): 시를 읊으며 성정(性情) 구하기를 바랐노라.

당시 이색의 교육활동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이색전(李穡傳)에서는
공민왕 16년에 성균관을 중수하고 색(穡)으로 하여금 개성부사로 삼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다.
생원을 늘리고 경학에 밝은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을
뽑아 타관(他官)으로써 성균관 교관을 겸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관생(館生)이 수 십명에 불과하였으나 이색이
다시 학식을 정하여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경서를 나누어 교육하고, 강의가 끝나면 서로 모여 어려운
부분을 토론하고 바쁜 줄을 몰랐다. 이에 배우려는 자가 몰려들고 서로 감화되니,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 그의 문생(門生)인 권근(權近)은 이색(李穡)의 행장(行狀)에서

정미년(丁未年 : 공민왕 16) 겨울에 (목은 선생은) 원(元)으로부터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을 제수받고 본국[고려]에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제수받았다. 처음에 신축년(辛丑年 : 공민왕 10)의 병화를 겪은 뒤로부터 학교가 폐허화되고 해이해졌기 때문에 왕이 이를
부흥하기 위하여 숭문관 옛터에 성균관을 새로 짓고 제관을 보충하려 하여 한때의 경술에 정통한 사람들을
뽑았으니,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경산(京山) 이숭인(李崇仁) 등으로 이들은 모두 다른 벼슬에 있으면서 학관을 겸했으며
공은 여기에 장관이 되었다. …

이듬해 무신년(戊申年 : 공민왕 17) 봄에 사방에서 배우려는 자가 모여들었으며, 제공(諸公)이 경서를 나누어
맡아 수업하였는데, 강의가 끝난 뒤에는 서로 뜻에 의심나는 것은 논란하여 각각 끝가지 연구하였다.
이때 공은 언제나 공정한 입장에서 분석하고 또 판단을 내려서 그 뜻을 절충하되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합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로써 우리 동방에 성리학이 크게 일어났다. 이로부터 배우려는 자들은
사장을 기송(記誦)하는 버릇을 고쳐 신(信)·심(心)·성(性)·명(命)의 이(理)를 연구하게 되어 공자의 도를
높이고 이단에 현혹되지 않게 되었으며, 인(仁)과 의(義)를 숭상하고 공리(功利)를 꾀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유풍(儒風)과 학술이 빛을 내어 새롭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라고 하여 이색의 교육 활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이색과 같이 교관으로 활동한 이숭인은 이때를 회상하면서

지난날 오천(烏川) 정달가(鄭達可)·인산(仁山) 최언보(崔彦父)·밀양(密陽) 박자허(朴子虛) 등이 성균관 교관이
되었는데, 나도 또한 같은 반열에 섞인지 7∼8년이 흘렀다.

이때 학도들은 날로 번창하였고, 재무(齋?)에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교관들은 새벽에 일어나 성균관에 들어가 당(堂)에 오르면 학도들은 차례로 정(庭)의 동서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몸소 예를 행하였다. 그런 후에는 각기 공부해야 할 경(經)을 갖고 좌우 전후로 잇달아 교관에게 나아갔다.
교관과 학도 사이에 수업이 끝나면 어려운 내용을 발표하여 서로 절충하여 변석한 후에야 끝을 맺었다.
책을 읽는 소리는 하루종일 끊이지 않았다. 나는 여러 차례 사람들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넘치는 것을
보고는 일러 말하기를 "사문(斯門)이 일어서는구나"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성균관에 입학한 상촌선생은 이들 교관들의 감화를 받으면서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는 성리학 이념의 실천을 생활의 신조로 하게 된다.

또 당시 교관으로 있었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도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여
많은 가르침을 내렸고, 또 그는 이들을 사문(師門)으로 사모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성균관에서 수학한지 일년도 못되어 홀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위중하자 귀향하게 된다.
이때 교관으로 있었던 박상충(朴尙衷)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고 있다.

浩然歸志白雲秋(호연귀지백운추): 돌아가고픈 마음 호연(浩然)하여 백운(白雲)의 가을 같은데,
太學諸生可得留(태학제생가득유):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어떻게 만류할 수 있을 것인가.
侍奉高堂應不暇(시봉고당응불가): 고당(高堂)을 모시자면 필시 겨를이 없을 터이니,
那堪一醉映湖樓(나감일취영호루): 영호루(映湖樓)에서 한번 취해 보고픈 뜻 어찌 견디리.

그는 안동(安東)으로 귀향하자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奉養)의 도(道)를 다하였고,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여묘(廬墓)살이 3년을 하면서 예(禮)를 다하였다.
그의 효행(孝行)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정려(旌閭)를 내려주었고, 또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의 여묘(廬墓)
생활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는 그의 효행(孝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지낸 김자수는 안동인(安東人)으로 성격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편모(偏母)를 섬김에 있어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봉양(奉養)의 도(道)를
다하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廬墓) 3년을 하였는데, 이 동안 한번도 집에 간 일이 없으며,
한번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날마다 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니 지나가는 자와 나무꾼들도 이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애훼(哀毁)함이 극에 이르니 얼마 되지 않아 성정(性情)을 상하기에 이르렀다.
국왕께서는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정려(旌閭)를 명하시고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출거여도(出居廬圖 : 여묘(廬墓)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는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이후 그가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이때의 여묘(廬墓)살이를 생각하면서 문익점(文益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위문하고 있다.

始見安東居堊子(시견안동거악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剖氷求鯉自恢恢(부빙구리자회회):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자득(自得)해 하더구만.
筍生雪裏誠心厚(순생설리성심후):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치하고전효열개):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3년상을 끝내고 귀경한 그는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무방(李茂芳)과
밀직부사(密直副使) 염흥방(廉興邦)의 문하에서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덕령부주부(德寧府主簿)를 제수하였다.
그가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환향(還鄕)할 때 일찍이 성균관에서 그를 가르쳤던 이색과 정몽주 등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그의 합격을 축하하고 있다. 이때 이색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기쁨을 표하였다.

禹門魚躍一聲雷(우문어약일성뇌): 우문(禹門)에서 어약(魚躍)하니 그 소리 우뢰와 같았는데,
矯矯群龍變化來(교교군룡변화래): 꿋꿋하고 날랜 뭇 용들이 크게 변하여 돌아왔구나.
只把高低比頭尾(지파고저비두미): 다만 높고 낮음만 가지고 머리와 꼬리를 정했으니,
若論靈異共胚胎(약논영이공배태): 영이(靈異)함을 논한다면 모두가 함께 배태(胚胎) 했지.
在田政値文明運(재전정치문명운): 밭에 있어도 바로 문명(文明)의 운을 만나게 되는데,
澤物還同燮理才(택물환동섭이재) 만물을 윤택하게 하면 되려 섭리의 인재 같았다네.
最喜病餘參此會( 최희병여삼차회): 무엇보다 병뒤에 이 모임에 참여했음이 기쁜데,
風流往事眼中回(풍류왕사안중회): 풍류의 지나간 일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 다음해에 정언(正言)에 올랐는데, 그는 직언으로 왕을 보필하였다.
이때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 都巡問使) 조민수(曺敏修)가 왜(倭)를 밀성(密城)에서 쳐서 수십 구를 참(斬)하니,
우왕이 의복과 술 그리고 말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조민수(曺敏修)가 전(箋)을 올려 사양하므로 왕은
상촌선생에게 명하여 회답하는 교서(敎書)를 짓도록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민수(敏修)는 한 도(道)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김해(金海)와 대구(大丘)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패몰(敗沒)하여
사졸(士卒)들을 많이 죽였으니, 밀성(密城)에서 비록 조그마한 승리를 하였다고 하나 공(功)이 죄(罪)를 덮을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의복과 술, 그리고 말을 상(賞)으로 하사하는 것도 이미 지나친 것인데, 이제 또 무슨 회교(回敎)를 내립니까? 또 회교(回敎)는 공적을 기록하는 것인데 이제 민수(敏修)는 공(功)이 없으니, 감히 명(命)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왕이 노하여 상촌선생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지윤(池奫) 및 대사헌(大司諫) 하윤원(河允源)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왕명을 어긴 죄로써 다스리려고 하자, 상촌선생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간관(諫官)을 둔 것은 임금의 잘못을 보필하기 위한 까닭이다. 옛날부터 왕의 말에 불가(不可)함이
있으면 간관이 이를 간(諫)하는 것이니, 원컨대 제공(諸公)들은 나라에서 간관(諫官)을 둔 뜻을 살피라.
라고 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크게 노하여 장형(杖刑)을 가하여 유배시키려 하여 이를 도당(都堂)에 의논하니,
모든 재상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밀직부사(密直副使) 이보림(李寶林)이 말하기를

자수(子粹)는 비록 소유(小儒)이나 간관(諫官)이요, 또 소위 왕명을 어겼다는 것도 대개 사람을 동쪽에 두었다가
함부로 서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으니, 자수(子粹)의 죄는 아마도 이것으로써 논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하니, 도당이 그 말을 "옳다"라고 하여 단지 유배만을 청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순위부(巡衛府)에서
이미 그 죄를 의논하였는데, 이제 다시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태후(太后)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신(臣)은 무인(武人)이라 일에 밝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신(文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간관(諫官)이 비록 뜻에
거슬린다 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언로(言路)를 여는 까닭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자수(子粹)의 죄가
적은데도 중론(重論)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태후가 우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늙어 그 동안에 많은 일을 경험하였으나 간관(諫官)에게 매를 치고 욕함을 듣지 못하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을 것이니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우왕은 매는 면하게 하고 전라도(全羅道) 돌산수(突山戌)로 유배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생각하기를
상촌선생은 반드시 낭사(郎舍)와 더불어 의논하였을 것이라 하여 또
간의대부(諫議大夫) 정우(鄭寓)를 경상도(慶尙道)
죽림수(竹林戌)로 유배하였다.
해가 지나자 편의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고신(告身)을 환급하였다.

이후 그는 고향인 안동에서 유유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소일하였다.
이 시기에 지은 시에서 당시 그의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新樓壓水對靑山(신루압수대청산): 새로운 다락은 물을 굽어보고 청산을 마주하는데,
朝暮烟嵐?案間(조모연람궤안간): 아침저녁으로 연기와 아지랑이 책상 위에 머무네.
幸有村庄?隔岸(행유촌장재격안): 다행히 촌장(村庄)은 언덕 하나에 사이 하였으니,
暮年投援共淸閒(모년투불공청한): 늙으막엔 인수(印綬) 내 던지고 한가함 함께 하리라.

이때 이곳을 들린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생활을 부러워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永嘉好水又佳山(영가호수우가산): 영가(永嘉)는 물도 좋고 산도 좋구나.
恨未移居向此間(한미이거향차간) 이곳에 옮겨 살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客路再過頭已白(객로재과두이백): 나그네 길 다시 지나니 머리는 벌써 희였구나.
羨君樓臥作長閒(선군루와작장한): 그대의 다락에 누워 한가함을 부러워 하도다.

이후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제수받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겼다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었으며,
얼마 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로 출보하였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소환되었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는 세자시학(世子侍學)을
겸하였고,
얼마 후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올라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을 겸하였다.
이때 그는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당면 정치의 개혁안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크게 5개항으로 분류된다.

첫째, 왕대비(王大妃)에 대한 예(禮)를 존숭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히도록 건의하였고,

둘째, 봉숭도감(奉崇都監)을 설치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는데 대하여 이는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
하여 그 설행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며,

셋째, 왕의 숭불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논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수축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고,

넷째, 무당들의 행패를 근절시키고 이들의 궁중출입을 금하도록 건의하였고,

다섯째, 지금까지 직언(直言)으로 폄출된 자들을 소환하도록 건의하였다.

얼마 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고, 공양왕(恭讓王) 4년(1392)에는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좌상시(左常侍)로 전보되었는데,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왕에게
연전(年前)에 조정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10인은 본시 우리 나라 사람들로서 요행히 함부로 천거된 자 들입니다.
이들은 혹은 창기(倡妓)에 의탁하거나 혹은 친척의 연분으로 청탁하여 벼슬을 요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방편상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게 되니, 진차(眞差 : 眞職과 假職)와 첨설(添設)이 문득
100여 자리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명기(名器)의 범람함과 염치의 상실함이 극에 이르게 되었으니, 원컨대 이들을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그 직을 모두 박탈하여 장래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또 삼사(三司)의 관원수가 15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녹패(錄牌)에 서명하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외의 전곡(錢穀) 출납(出納)은 먼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고, 사사(使司)는 이를 삼사사(三司使)에 이첩하여 회계를 정밀히 조사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도록 하게 한다면 재정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놀고 먹는 관리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건의를 올렸다. 왕은 이를 수용하였고, 바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발탁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후
그는 고려 태조(太祖)의 릉(陵)을 참배하기도 하고, 또 송악산(松岳山)을 찾아 유유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한 후 개성의 송악산을 찾아서
春風騫馬看山客(춘풍건마간산객): 봄바람에 절뚝거리는 말을 타고 산을 바라보는 이 나그네,
步步遲來萬樹陰(보보지래만수음): 걸음을 천천히 하여 마침내 만수(萬樹)의 그늘에 이르렀네.
澗畔林深無怪石(간반림심무괴석): 시냇가의 숲은 깊으나 괴이한 돌은 없고,
?崖花落摠新禽(장애화낙총신금: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
三盃酒氣論今日(삼배주기논금일): 석잔의 주기(酒氣)를 빌어 오늘을 논하는데,
一曲松聲報古琴(일곡송성보고금): 한곡조 송성(松聲)은 옛날 거문고 소리 들려주네.
故國蒼茫如昨事(고국창망여작사): 고국(故國)은 아스라하여 어제의 일과 같나니,
忠臣烈士共爭吟(충신열사공쟁음): 충신 열사들은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네.

라는 시를 지었다.
그는 위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라고 하여

고려가 망하자 새로운 사람들이 지조 없이 날뛰고 있음을 개탄하고는 '충신 열사는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는다'

라고 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고 있다. 또 그는 부조현(不朝峴)에 올라서

忠臣烈士今安在(충신열사금안재): 충신과 열사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飛去山禽語古春(비거산금어고춘):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
玉階花心風後老(옥계화심풍후노): 옥계(玉階)의 꽃술들은 바람 뒤에 시들었고,
金陵樹色雨中貧(금릉수색우중빈): 금릉(金陵)의 나무 빛깔은 빗속에 파리하네.
應知日短淸香閣(응지일단청향각): 알괴라 청향각(淸香閣)에는 해가 짧아졌을 것이고,
想必天寒觀德人(상필천한관덕인): 필시 관덕인(觀德人)에게도 날씨는 차가울 것이라.
感淚振衣臺上客(감루진의대상객): 대(臺) 위에 선 이 길손은 강개한 마음에 옷을 떨치는 도다.
此時幾泣我王身(차시기읍아왕신):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

라는 시를 지었다. 그는 위의 시에서 '충신 열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라고 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토로하고 있다.
또 그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릉(陵)을 참배하고

修德就閒後(수덕취한후): 덕(德)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뒷일망정,
臣維安獨歸(신유안독귀): 신(臣)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소이까.
榛?爲誰詠(진령위수영): 진령(榛?)은 누구를 위하여 읊겠는가.
葵藿自春開(규곽자춘개): 규곽(葵藿)은 봄부터 피어있구려.
泣下風雲淚(읍하풍운루): 풍운(風雲)의 눈물 수 없이 흘리면서,
踏來塵劫灰(답래진겁회): 진세(塵世)의 겁회(劫灰)를 밟아 왔다오.
侍陵將?酒(시릉장뢰주): 능침(陵寢)을 모시고 술잔을 올리니,
北斗影徘徊(북두영배회): 북두(北斗)의 그림자가 배회(徘徊)하네.

라는 시를 지어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성계(李成桂)는 왕위에 오른 후 그에게 대사헌(大司憲)의 직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太宗)은 평소부터 그의 덕망을 존경하고 있어 형조판서(刑曹判書)의 직을 내려 부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나라가 망하니 충의도 더불어 망하는 구나. 내가 평생에 충효를 기약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만약에 내가 몸을 굽힌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고 탄식하고는 서울로 향하였다. 광주(廣州)의 추령(秋嶺)에 이르자
자손들에게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신하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은 세우리 말라"고 유명(遺命)하였다.

이어

平生忠孝意(평생충효의): 평생토록 지킨 충효(忠孝),
今日有誰知(금일유수지):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일사오휴한): 한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마는,
九原應有知(구원응유지):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라는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는 태종(太宗) 13년(1413) 11월 14일이었고, 향년 65세였다.

그가 죽자 후학(後學)인 황희(黃喜)는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忠)이 있으면서 효(孝)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효(孝)가 있으면서 충(忠)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이자기운득): 이 두가지를 이미 다 얻어 가졌었건만,
?又殺身難(황우살신난): 하물며 살신(殺身)의 어려움까지야.

라는 만사(挽詞)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