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상촌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해 보았다. 그는 안향(安珦)·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과 같이 고려말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 가문이었다. 그의 조선(祖先)으로서 3품직 이상을 역임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그의 가문(家門)은 대대로 문한(文翰)을 업(業)으로 계승해 온 학자(學者)의 가문이었다. 그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의 가문에서 2남 4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공민왕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이색·정몽주·박상충·이숭인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 이무방(李茂芳)과 염흥방(廉興邦)의 문하에서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덕녕부 주부(德寧府 主簿)를 제수 받았다. 우왕(禑王) 즉위 초에는 정언(正言)으로 올랐는데, 이때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 都巡問使) 조민수(曺敏修)에 대한 교서(敎書)를 지으라는 왕명(王命)을 거절하여 유배를 당하였다. 이후 그는 전교부령(典校副令),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충청도 관찰사 (忠淸道 觀察使)를 지냈으며,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성균좨주(成均祭酒),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좌상시(左常侍)를 거쳐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그는 재관(在官) 중에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하였고, 당면 정치의 개혁안을 수없이 올렸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공양왕(恭讓王) 즉위 후에 올리고 있는 시무5조(時務五條)와 공양왕 4년에 올리고 있는 정치개혁안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性理學)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주지로하여 척불론(斥佛論)과 당면 정치의 개혁안을 조목별로 열거하면서 개진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켜서 조선에는 사환(仕宦)하지 않았으며, 태종(太宗) 13년에 형조판서로서 소환하자 광주(廣州)의 추령(秋嶺)에서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이 세상을 마감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 그는 개경(開京)의 옛 터를 순방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시로서 읊고 있는데, 그의 실록에는 이때 지은 시(詩) 3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성리학(性理學)의 실천이었다. 일찍이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을 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3년상을 치른 것이라든지, 또 그가 왕에게 항상 직언으로 일관하였던 것도 이러한 성리학의 이념적인 실천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킨 것도 바로 이러한 이념이 그 전제가 되고 있다. 그의 학문적 배경은 크게 학문 수학기(修學期)와 정연기(精硏期)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학문 수학기는 공민왕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가정수학기와 성균관수학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수학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이색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교육중흥을 꾀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입학할 때 이색은 대사성이었고, 정몽주(鄭夢周)와 박의중(朴宜中)은 성균사예(成均司藝)였으며, 김구용(金九容)은 성균직강(成均直講)이었고, 이숭인(李崇仁)은 진덕박사(進德博士)로 있었으며, 정도전(鄭道傳)은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있었다. 또 박상충(朴尙衷)도 이때 교관으로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석학(碩學)으로서 성리학의 보급에 전념하였던 자들이다. 이들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성리학의 대의(大義)를 이때 터득하였고, 이후 그는 이를 자신의 지침으로 하여 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학문정연기는 공민왕(恭愍王) 23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로 볼 수 있다. 그는 성균관에서 가르침을 받는 교관들을 사문(師門)으로 받들면서 이후 계속 이들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정연하였다. 또 은문(恩門)인 이무방(李茂芳)과 염흥방(廉興邦)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학문을 정연시키게 된다. 당시 은문(恩門)과 문생(門生)의 관계는 돈독하여 그 의리는 마치 부자지간과 같았다. 이 밖에 문익점(文益漸)·권근(權近)· 조계생(趙啓生)·김진양(金震陽)·이문화(李文和) 등과도 교유하면서 학문을 정연시켰다. 특히 이색과 정몽주는 그가 평생토록 받들었던 사문(師門)이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성리학 이념의 수용과 실천에 있었다. 그는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정명사상(正命思想)과 의리(義理)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이념을 전제로 정치개혁을 시도하였고, 왕에게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의 사상은 크게 의리론(義理論)과 벽이론(闢異論)으로 구분된다. 그가 공양왕 즉위 초에 상소를 올려 왕의 왕대비(王大妃)에 대한 불경(不敬)과 왕세자(王世子)의 책봉에 대하여 부당성을 논핵한 것은 이러한 그의 의리사상(義理思想)이 기조가 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 건국 후 고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서 조선에 사환(仕宦)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그의 이념의 현실적인 실천이었다. 그는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성리학을 보급하는 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로 생각하였다. 그는 이색·정몽주와 뜻을 같이하여 이단을 배척하는데 선봉에 섰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역시 공양왕 즉위 초에 올리고 있는 상소에서 보인다. 그는 이 상소에서 당(唐)의 한유(韓愈), 송(宋)의 경종(景宗)의 예를 들어 불교배척에 대한 이론을 전개시키고, 또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수축에 대한 부당성을 강력하게 올리고 있다. 그리고는 "어찌 반드시 불법(佛法)을 숭봉(崇奉)하고 크게 탑묘(塔廟)를 일으킨 뒤에야 나라의 운세가 신령하여 질 것입니까. 신라가 불교행사를 많이 하다가 망하게 되었다는 신성(神聖)의 교훈을 가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왕의 숭불정책(崇佛政策)을 비판하고 있다. 또 그는 무당(巫堂)의 혁파도 강력하게 개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바로 성리학 이념의 현실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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