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
형조판서 벼슬 받으러 가던 중 태재서 자결 … “비석 세우지 말라” 대대손손 강직 이어받아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
두문동 72현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죽음에 이르러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고, 비석을 눕혀두었다. 김자수 묘는 경기도 분당 서현역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넘어가는 태재마루 근처 오포읍 신현리 상태마을에 있다. 고려 향한 충절 목숨 바쳐 실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태종 13년(1413) 11월14일이다. 태종으로부터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고향 안동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아들 근(根)이 초상 치를 준비를 갖추고 뒤를 따랐다. 김자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독약을 준비한 상태였다. 벼슬을 받으면 고려를 향한 충절을 저버리는 일이 되고,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그가 추령(秋嶺, 현재의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오직 신하의 절개를 다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바로 이곳에 묻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김자수가 남긴 절명사(絶命詞)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 포은 정몽주(鄭夢周)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有忠有孝難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그의 죽음을 두고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다.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였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었다.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한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이색(李穡)이었고, 선생으로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 있었다. 김자수는 성균관에 머문 지 1년이 안 되어, 편찮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렸지만 어머니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3년 시묘살이를 한다. 그때의 정경을 문익점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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