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興天寺 (흥선대원군의 친필인 현판)
흥천사(興天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가 죽자 1396년 능지(陵地)를 정릉(貞陵)에 정하여 조영(造營)하고, 그 원당(願堂)으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절을 세워 흥천사라 칭하였으며, 조계종의 본산(本山)으로 삼았다. 초창기 이 절은 좌선(坐禪)을 하는 것으로 항규를 삼았다.
1398년 6월에는 왕명으로 3층 사리각과 사리탑을 절의 북쪽에 세웠고, 7월에는 우란분재(盂蘭盆齋)를,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를 베풀었다. 그러나 1403년(태종 3) 태종이 이 절의 노비와 밭의 양을 감하게 하였고, 1408년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이 절을 화엄종(華嚴宗)에 귀속시키는 한편, 태평관(太平館)을 철거한 뒤 그 밭과 노비를 이 절에 이양하였다.
1410년 태조의 유지(遺旨)를 따라 절을 수리하였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1424년(세종 6) 이 절은 교종에 속하게 되었다. 1435년 사리각을 중수하였고, 1437년 왕명으로 이 절을 중수하였으며, 1440년 9월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1441년 3월 이 절의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慶讚會)를 개최하였으며, 1443년 4월 회암사(檜巖寺) 주지로 있던 만우(卍雨)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1447년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하였다.
1469년(예종 1) 명나라 왕과 왕후가 불번(佛幡)을 만들어 보냈으므로 이 절에 봉안하였다. 1480년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절이 불타고, 1510년(중종 5)에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그 땅을 탐내는 자도 많이 생겼다. 다만, 그때의 대종(大鐘)만은 덕수궁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1569년(선조 2)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지었다.
1794년(정조 18)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1846년(헌종 12) 구봉화상(九峰和尙)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1849년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1853년(철종 4) 대웅전(지금의 極樂殿)을, 1855년 명부전(冥府殿)을, 1865년(고종 2)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다시 흥천사(興天寺)라 하였다. 1885년에는 대방(大房)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지붕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용화전(龍華殿)·칠성각·독성각(獨聖閣)·만세루(萬歲樓)·승방(僧房)· 대방·일주문(一柱門)·종각(鐘閣) 등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흥천사는 지난해(2012-6-21) 정념스님(조계종 특보담당)께서 주지를 임명을 받으셨다. 주지 정념스님께서는 흥천사를 조계종단의 포교도량으로 자연과 문화가 공존하는 생태공간을 만들어 서울시민들의 쉼터로 복원할 것이라 하셨다.
*흥천사 극락보전 (興天寺 極樂寶殿)*
흥천사 극락보전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봉안한 법당으로, 조선 철종 4년(1853)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흥천사는 창건 당시부터 정토신앙의 사찰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극락보전이 중심건물이다.
문수보살 / 아미타보살 / 사십이수관세음보살(1891 고종28년에조성) 현왕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
천용탱화
감로탱화
극락구품 연화도 도량신탱화 흥천사 극락보전은 철종 4년(1853)에 구봉 계장(九峰啓壯) 스님이 중수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측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돌층계를 정면에 두고 기둥은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사이에도 전ㆍ후면에서는 각 2구, 측면에서는 각 1구의 공간포를 두었다. 정면 3칸에는 꽃살 창호를 달고 좌ㆍ우 뒷면은 판벽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가운데 우물천정을 두었다. 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 두 기둥 위에 돌출 되어 있는 용머리 장식이 특징이다.
극락보전이란 십겁(十劫) 이전에 성불(成佛)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이 부처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중생이 염불을 하고 일념이라도 지심회향(至心廻向)하면 곧 왕생할 수 있게 해주며, 그 때 서방에서 성중(聖衆)이 와서 그 사람을 맞이해 간다고 한다. 그 세계에 살게 되면 다시는 전생(轉生)하지 않으므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보전에는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살기 좋은 극락의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불상과 그 뒷면 벽에 아미타불화가 배치된다.
이 극락보전의 구조와 형태는 조선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시대 건축의 모범이 될만하다. 이 건물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흥천사 명부전 (興天寺 冥府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7호)
(고종황제의 친필) 명부전의 현판도 다른 곳과 다르다. 가로가 아닌 세로현판인데다 글씨도, 붉은 바탕에 금(물)로 된 힘차고 당당한 세로글씨다. 곧, 황제나라의 격을 차려낸 첫 자료로서 새겨둘 것이다.
흥천사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철종 6년(1855)에 순기(舜麒)가 세웠으며, 고종 31년(1894)에 중수되었다.
무독귀왕 / 지장보살 / 도명존자
시 왕
흥천사 극락보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명부전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로서 좌우에 풍판을 달았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그 뒷면 벽에는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와 시왕(十王)을 그린 불화가 걸려 있다. 이곳에는 시왕을 거느린 지장보살상이 배치되고 그 뒷면 벽에 지장보살 후불탱화를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도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은 안락한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부처를 가까이 모시는 협시보살이기도 하다.
지장신앙은 신라 때 성행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아미타신앙과 함께 유행하여 널리 믿어져 민간신앙이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사찰에는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다.
흥천사 명부전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장엄된 법당으로,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 방 (관음전)*
남순동자 / 관세음보살 / 해상용왕
(신중탱화) (제석탱화)
*종 각* (오세창글씨)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의글씨-鍾閣. 고박(古朴)-예스럽고 수수하다는 그의 전서(篆書)다, 으뜸(최고봉)이라는 위창은 중인(中人) 역관으로 김옥균(金玉均·0박영효(朴泳孝)들의 (젊은) 양반에게 이른바의, 개화바람을 불어넣은 첫 개화사상운동가이자, 추사 김정희의 (말년)제자의 한사람인 서화가·금석학자로 이름난 아버지 오경석(亦梅 吳慶錫, 1831-1879)의 재조를 그대로 받은 이로써, 우리네 첫 신문 한성순보 기자에 만세보·대한민보를 세운 (민족)계몽사상운동가이자 이름높은 서예가이다.
절 이름에 봉(奉)이니 흥(興)과 국(國), 경(慶)들이 붙으면, 모두 왕실·궁실 끈의 절. 이른바 그 원찰(願刹)이다. 봉선사, 흥천사興天寺, 흥국사, 경국사. 멀리는, 고려 태조(왕건) 초상(진영)을 뒀던 안성 봉업사(터)가 그렇다.
그 하나인 삼각산 흥천사는 서울 미아리고개 아니, 왼쪽의 아리랑고개 막바지 왼쪽 500m 속에 앉음. 이제는 높은 아파트벽에 가려진, 비좁고 초라하나, 환갑을 비롯한 서울의 (집)바깥잔치터로 좋고, 이름난 숲골였던 곳.
태조(이성계)는 2비 신덕神德왕후(康씨, ?-1396.8)를 못잊어 경복궁서 보이는 앞쪽(덕수궁) 언덕(경향신문사 쪽)에 묻는다(1397.1). 곧, 정릉貞陵이고 그래서, 동네는 정동貞洞. 이 때, 그 동에(덕수초교∼서울시의회 쪽) 정릉을 기리는 흥천사까지 지으니(1397.8.13. 낙성식) 조선, 그것도 그 나라에서 세운 첫절이다.
게다가, 2비에게 태어난 막내(8째, 방석芳碩)까지 이미 세자를 삼았으니(1392), 이에 1비 신의神懿왕후(韓씨, 1337-1391)에게서 태어난 5째 방원芳遠이 난을 일으켜(1398) 막내 등을 죽이고 임금(태종)자리에 오른다. (1400) 하여 태조는 고향 함흥 가버림(1401)…(함흥차사咸興差使..) 그러니, 태조가 죽자(1408.5) 바로 태종은 무덤을 파 저 삼각산 살한(沙乙閑→沙阿里) 으로 던져 버림(1409. 태종9) 아리랑고개 너머에... 해서 정릉貞陵 동네가 또 생김.
그러나 흥천사는 그런대로 남아오다, 1504·1510 해의 큰불로 다 타버리면서 그만 사라짐. 1576(선조9)해에 와서야 능이 복릉(復陵)되고, 제사절로 마침 무덤 곁에 있던 신흥(新興)암를 써다 마침내는, 1669(현종10)해에 제대로 제사와 능을 돌보자면서, 좀 떨어진 터(含翠亭)로 절을 옮겨 신흥사寺로 높이고 아울러, 밑 뒤쪽의 두 절(藥師寺·靑巖寺)도 봉국사·경국사로 높여 원찰로 함께 삼음.
그러다, 정조에 의해 1794(정조19)해에 오늘의 자리에 옮겨 세운다. 순조를 거쳐, 1865(고종2)해부터 대원군이 다시 크게 지으면서 흥천사라하고, 손수 쓴 흥천사 (예서隸書) 현판을 내거니(1870)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왕·종실과 궁녀와 벼슬아치들이 늘 무삼 드나는 큰 믿음터로.
드디어는, 엄비 곧, 순비 엄씨(淳妃 嚴氏, 1854-1911, 고종계비-엄상궁→순빈淳嬪→ 순비=엄비→순헌귀비=엄귀비→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마지막 황태자 영왕(英王, 1897-1970)를 낳자, 이 절에 대시주를 하며(1899, 대한제국 광무3) 원찰로 삼으니, 5살(1901) 영친왕의 금金 먹인 글씨 현판까지 극락보전 왼쪽에 걸려있다.
이러한 흥천사는, 1855(철종6)해에 지은 시왕(十王)전 곧 명부(冥府)전을, 1894해 갑오(甲午) 곧 고종 즉위 30돌해 맞이로, 대원군과 궁녀들(尙宮 淸信女 洪氏 敬心華· 李氏 慈仁華) 힘으로 다시 크게 짓고(3×2칸, 겹처마 맞배지붕, 다포와 익공 절충식) 단청(단확丹)을 빛나게 올려 아울러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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