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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山經表

형남북기맥(兄南北岐脈) 개요

by 범여(梵如) 2012. 8. 25.

 

형남북기맥(兄南北岐脈) 개요

 

  (백호산악회 이경수님)

 

1. 산경표를 중심으로

형남기맥은 낙동정맥의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중 가장 큰 물줄기인 형산강의 남쪽에 위치한 산줄기이다.

 

형산강의 북쪽에 형북기맥(성법령봉-성법령-비학산-원고개-도음산-지곡봉-연화재-소치재-죽천마을)이 있지만

세력은 약하기에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여도, 정확히 삶의 흐름을 경계하는 맥이었다.

 이에 비하여 형남기맥은 신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교통과 문물의 흐름을 경계하고 있는 맥이다.

 

 **(((兄南岐脈 관련 모음글)))**

 

①포항시의 호미곶(虎尾串)은 우리나라 풍수사(史)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소(名所)중의 명소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동으로 뻗어나온 지맥이 치술령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진 후,
  그 북쪽 줄기가 토함산(吐含山)에 이르고, 그 토함산의 북쪽 지맥이 추령(楸嶺)을 지나 운제산(雲梯山) 줄기와
  함월산(含月山) 줄기로 양분되는데, 
이 함월산 줄기가 줄곧 동북쪽으로 치달으면서 대곡산(大谷山 혹은 三峰山)-

운장산(雲章山)-공개산(孔開山)  -명월산(明月山)-봉화산(烽火山)과 고금산 등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호랑이

꼬리의 연골을 일궈놓았다. 
  동해쪽으로 불쑥 튀어 나와 있는 그 돌출된 지세를 어찌 옛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보았을 리 있겠는가(=퍼온글).


  ②형남기맥(가칭)은 낙동정맥의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중   가장 큰 물줄기인 형산강의 남쪽에 위치한

도상거리 90km정도의   산줄기로, 분기점은 낙동정맥 백운산에 4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북쪽에서
  2번째 봉우리인 약 845봉에서 분기한다(포항제철 백호산악회)   ③형남기맥상의 주요지점은 다음과 같다.
  백운산-고속도로(35번국도)-치술령-사일고개-원고개-가나안 목장-석굴암주차장-토함산-추령-함월산-성황재-

만리성재-삼봉산-세계원재 -조항산-희날재-금오산-공개산-180봉-고금산-호미곳으로 이어진다.

 

형남기맥은 치술령과 토함산을 통과하기 때문에 토함기맥으로 칭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맥의 개념으로 볼 때

강을 중심으로 맥의 이름을 만들어 부른 산경표의 서술로 보아 형남기맥으로 불러야 타당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산경표에서는 형남기맥이 단석산에서 분기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백운산에서 분기하여 치술령과

토함산 자락으로 진행한다.

 

산경표에서 원줄기는 단석산-치술령-토함산-추령-함월산-독령-망해산에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태화북기맥으로 부를 수 있는 또 한줄기는 가나안목장에서 남쪽방향으로 태화강을 가르는 삼태봉-만리성-동대산-

무룡산 등으로 한줄기가 뻗어나간다.  형남기맥의 분기점은 낙동정맥 백운산에 4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북쪽에서 2번째 봉우리인 약 845봉에서 분기한다.  

 

능선의 아래쪽으로 급히 내려가는 맥이지만 이후 치술령에서 크게 솟아오르고, 토함산에서 또한 크게 솟아오른다.

추령을 통과한 맥이 성황재와 만리성재를 넘어 호미곶까지 진행하는 맥의 흐름은 삶의 경계선이자 장애물(방어선)이 되기도 했다.

 

  이 맥의 흐름은 산경표에서 분기하는 맥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크게 형산강의 흐름과 생활권역이 분리하는 것을

참고로 삼은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만리성(관문성-울산시와 경주시의 경계)의 커다란 울타리가 되기도 하며, 토함산과

비슷한 높이의 치술령(치술산으로 기재하지 않고 치술령으로 명칭이 붙어있는 것은 치술령은 군사적인 망루가 설치된 장소로 추정됨.)

울산방면에서 들어오는 군사(왜군)들과 양산과 언양방면(가야군)의 주요 통로를 감시하던 장소가 아닌가???

하고 추정해 본다.    

 

2. 물줄기를 중심으로 볼 때

낙동정맥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중 가장 긴 형산강의 물줄기는 낙동정맥의 인내산의 동쪽계곡에서

시작한 지류를 포함하여 약 65.5km이다.

 

형상강 발원지는 경주시 서면 도리의 인내산이 가장 길며, 다음으로 백운산의 자락에서 오는 지류와 거의

비슷한 거리 수준이다. 이 두 물줄기는 경주시 태종무열왕릉(김춘추묘)의 앞쪽에서 서로 만나 동쪽으로

흘러 포항 앞바다와 영일만으로 흘러 나간다.

  

다음으로 큰 물줄기는 영덕 오십천으로 약 55.6km 이며, 죽장면 상옥리 성법령 북쪽계곡에서 발원한다.

영덕 오십천은 오십계곡에서 흘러 나온 물이 모여 이루어졌다 하여 오십천이라고 하며 삼척 오십천과 이름이 같다.

삼척 오십천은 59.9km로 영덕 오십천보다 조금 더 길다.

  

세번째로 큰 물줄기는 울산 태화강으로 48.5km이며, 이 또한 발원지는 백운산 동쪽 계곡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중 가장 긴 형산강의 물줄기는 경주와 포항 일부지역의 물줄기를 모은 것과 같으며,

경주평야지대와, 안강평야지대, 연일평야지대의 옥토를 간직하고 있다.

     

3. 옛날 교통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로서 경주는 동으로는 형산강 하구로 통하는 연일과 연결된다. 바닷길의 주요 통로였던

경주 강동면의 국당리와 연일 중명리를 연결하는 부조와 아래부조는 예전에 큰 시장과 상권을 이루었던 장소였다.

  

연일을 통해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간직한 도구(도기야)까지 해상연결통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도구가 예전엔 항구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포항항은 7번국도의 개통과 철도의 개설로 인하여 항구로서의 역할을 일제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으며, 이런 도로망의 변화로 인하여 강동면 국당리의 부조와 연일읍 중명리 아래부조의 상권은 퇴색되어 없어지고 만다.

  

경주의 남쪽으로 7번국도를 따라서 진행하면 울산 방어진이 나온다. 신라시대의 경주의 국제항은 아마도 울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큰 장애물이 없이 곧바로 울산까지 진행할 수 있는 지형적 여건과 울산에서 처용을 신격화한 놀이까지 있는 것으로 본다면 신라의 국제항은 울산이었을 것이다.

  

또한 경주를 일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만리성(관문성-치술령에서 천마산 삼태봉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쌓아서 군사를 주둔시키고 요새로 만든 것만 보아도 울산은 국제교류의 항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남쪽길은 언양을 통하여 낙동강까지 이르는 길인데, 치술령과 백운산의 중앙 협곡이다. 현재는 고속도로와 35번 국도가 지나가는 복안리 활천리 등은  예전에 군사시설이 있었다고 전하며, 암각화가 있는 울산 천전리에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시 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경주의 북쪽으로 통하는 길은 4번 국도 아화고개를 통해 넘어가는 루트이다. 이는 내륙으로 통하는 길이니 성을 쌓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부산성을 쌓아둠으로 인해 만약을 대비한 북쪽의 길이다.

  

또한 안강평야와 동해안을 잇는 또 하나의 길은 형북기맥을 넘어간다. 관문성 안쪽 괘릉리에 형남기맥이 지나가는 원고개가 있다. 이와 반대로 925번 지방도로 형북기맥의 신광면 냉수리에 원고개가 또 있다. 냉수리 신라비는 많은 고증을 거쳐 볼 때 신라의 왕이 이곳을 다스리는 호족에게 절대권력을 행사하라고 내린 교지와 같은 것이며, 신라시대 때 북방민족이 이 길을 통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들어왔을 것이다.

 

4. 옛날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예전에 시군 통폐합을 하기 전에는 정맥을 중심으로 또는 기맥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이 나누어 졌다. 경주와 월성군도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형남기맥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였고, 포항과 영일군도 이런 구분이 있었다.

 

형남기맥의 바깥 부분인 감포는 추령의 바깥방향으로 감은사지와 문무대왕수중왕릉이 있다. 감포는 일제시대 때 행정구역이 통합되기 전까지 장기쪽에 소속된 것 같다.

 

포항의 장기면은 영일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엄연히 하나의 큰 고을이었고, 해상을 통제하는 현감이 있었다. 장기는 한때 지행면으로 일제 때 이름이 바뀌었다가 최근에 다시 이름이 복원되었고, 현제 호미곶으로 칭하던 장소도 불과 10년 전까지 장기곶 또는 장기갑 등으로 불렀다. 장기면의 읍성은 현재의 전시개념으로 본다면 1차 방어선인 셈이다.

  

포항의 흥해읍도 흥해현감이 다스리던 고을이었고, 연일현감이 다스리던 형산강 하구와 엄연히 구분된다. 형북기맥의 마루금을 그을 때 흥해와 연일의 경계선으로 구분지은 것도 또한 이런 맥락에서 구분지은 것이다.

 5. 어링불. 호미등(형남기맥) 용덕등(형북기맥)은 형남기맥과 형북기맥으로 일치한다. 

향토사학자 박일천(朴一天)님에 따르면 『 조선중엽 풍수로서 유명하고 지리학자로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이성지는 영일군 의창읍 용덕갑(龍德岬)을 용미등(龍尾嶝)이라 하였고, 영일군 구룡포읍 대포리의 장기산맥의 최동단 즉 동해로 돌출한 최동단부를 호미등(虎尾嶝)이라고 말하였고, 그 지형을 용호상박지형국이라 卜相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형북기맥을 좌청룡으로 보고 형남기맥을 우백호로 본다는 의미로 사료된다.  그 중심에 어링불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장소 곧 포항시내의 지형이며, 영일만을 중심으로 돌출된 두 곶을 중요시 했다.

  

현재 용미곶(용미등)에는 신항만이 조성되고 있으며, 호미곶에는 해맞이공원을 조성하고 등대박물관도 설립하여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형남기맥의 마지막 구간 중 약 12km 지점부터 고금산까지 길의 형성이 되어 있지 않아 산행하는데 불편함과 혼돈을 줄 수도 있겠지만, 두 개의 맥은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미곶은 구룡포를 위시한 여러지역에서 용의 전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있지만 남사고 및 이성지의 호미등과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지형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져 현재 호미곶으로 부르는 것 같다.

일제시대 때에는 장기곶으로 불려지고, 장기갑등대라는 지명이 10년 전까지 있었다.

  

★ 어룡사(어링불)와 구룡포의 전설 ★

 ▷ 어룡사(魚龍沙)의 신비 지금 포항제철소가 자리잡고 있는 일대를 ‘어룡사’, ‘어룡불’, 또는 ‘어링이불’ 이라고 불렀다. 옛 사람들은 장기곶(호미곶)이 영일만을 감싸고 동해로 길 게 돌출한 것을 보고 마치 용이 등천하는 형국이라 하여 용미등(龍尾嶝)이라 부르고, 흥해읍 용덕리의 ‘용덕곶’ 이 동남으로 돌출한 것을 어약승천(魚躍勝天)의 형국으로 보았다.

 

양곶[兩岬]의 형상을 풍수학적으로 어룡상투(魚龍相鬪)의 형국으로 보았다. 그래서 영일만의 중심지대인 이곳을 어룡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또 이 ‘어룡사’ 는 광의(廣意), 협의(狹意)의 ‘어룡사’ 로 나누고 있다. 광의의 어룡사는 동해면 약전동으로부터 형산강을 지나 포항시 두호동에 이르는 넓은 백사장을 총칭하는 것이고, 협의의 어룡사는 형산강 하류를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즉 포항제철소가 자리잡은 지대와 지금의 포항송도 해수욕장 전역을 말한다.  

 

장장 20여리나 되는 옛날의 어룡사는 모래벌판으로 풀 한 포기없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동지섣달의 하늬바람이 불어 닥치면 눈을 뜰 수 없고 발을 붙일 수도 없는 지대로서 수천만년 동안 황폐하여져서 갈매기가 나래를 쉬어가는 절해의 고도와 같았다. 

 

 조선의 유명한 지상학자였던 성지(性智)가 이 지역을 둘러보고는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서편의 운제산이 십 리쯤만 떨어졌더라도 수십만의 사람이 살았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이만한 위치와 지형이라도 좀 늦어지기는 하겠으나 많은 사람이 모여 살 거라고 예언했다.  같이 길을 나섰던 이 지방의 선비들이 풀 한포기 없는 이 백사장에 어찌 수십만의 사람이 살 수 있는 대도시가 된단 말인가 하고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자, 성지(性智)는 혼자말처럼 ‘죽생어룡사 가활만인지 서기동천래 회망무사장(竹生魚龍沙 可活萬人地 西器東天來 回望無沙場)’ 이라는 시를 뇌었다고 한다. 

 

위 글의 의미를 새겨 보면 「 어룡사에 대나무가 나면 가히 수만이 살 곳이니라. 서쪽 그릇이 동쪽 하늘에 오면, 돌이켜 보니 모래밭이 없어졌더라 」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이후 이 지방에는 성지(性智)의 예언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 예언은 수백년이 지나도 아무런 징조가 없더니 약 30년 전, 어룡사가 포항제철 부지로 선정되어 대나무 같은 굴뚝이 치솟아 올라가고, 수십만의 사람이 모여 살게 됨으로써 실현된 셈이다. (자료 : 영일군사)

 

 ▷용이 승천한 구룡포 영일만을 형성하고 있는 범꼬리의 동쪽 해안선이 남쪽으로 내리 달리다가 응암산의 한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활처럼 휘어져 구룡포만을 이루는데 이를 끼고 길다랗게 놓여 있는 마을이 구룡포리이다.

 

읍소재지로서 우체국, 파출소, 단위농협, 포항수산업협동조합, 농협중앙회 구룡포지점 등의 관공서와 금융기관,구룡포초등학교, 구룡포동부초등학교,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 등의 각급 학교가 밀집돼 있다.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용두귀운(龍頭歸雲), 옥산반조(玉山返照), 주잠명월(珠岑明月), 항구장제(港口長堤), 유명조일(維溟朝日),창주모연(滄珠暮煉), 우진화선(盂津畵船), 석문청풍(石門淸風)등 8가지를 구룡포 팔경(八景)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에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친 일이 있는데, 9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두산 아래에 깊은소(沼가)있었는데, 이 소(沼)안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자료 : 영일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