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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부처님 같이

主·客 떨친 一喝은 天地 울리는 소리

by 범여(梵如) 2012. 8. 31.

 

 

 

 

 

주·객 떨친 일갈은 천지 울리는 소리

 

 

 

 

 

혜국 스님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인을 만나면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편안했느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엔 “부자 되십시오”한다면서요?

단순한 일상에서의 인사말이라 하지만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이전과 비교해 가치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서입니다.

나와 남이 경쟁하는 회사에서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이 오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과 재물을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합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나는 주관이고 보이는 대상은 객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와 남을 항상 둘로 나누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서 누가 아프면 온 집안이 울지 않습니까?

가족의 건강이 내 건강이고 내 건강이 가족의 건강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불이(不二)의 철학 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성주의’는 주관과 객관을 나눈 이원론을 원칙으로 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성주의는 ‘내가 사유하는 정신은 우월하고 저 대상인 물질은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만 봅니다.

그러니 하인주의와 지배주의, 개발의식이 이원론에서 싹트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 ‘서편제’를 관람하며 저도 좀 울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화면에 나오는 필름을 비춘 그림자를 보고 울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그림자를 삼라만상 즉 객관이라고 보고 필름을 주관이라고 보는데,

 그 필름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울고 웃었지만 실제로 그 그림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관이라 하는 필름에 있습니까, 아니면 객관이라 하는 화면에 있습니까?

모두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관과 객관은 무엇입니까?

화두참선법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모두 그림자일 뿐입니다.

어제 저녁 꿈에서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던 것이 아침에 눈을 딱 뜨고 보면 결국은 주관도 객관도 꿈이었을 뿐입니다.

이원론이라는 것도 인간의 생각에서 만든 것일 뿐입니다.

일원론, 이원론을 생각하는 순간 그 이름이 갖는 구속력이 곧 나를 구속하고야 맙니다.

그 구속은 결국 물질만능과 경쟁만을 조장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이치를 홀연히 깨달으시고서는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부처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하셨습니다.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보지 않으셨기에 고구정녕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중생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한 번뇌망상에 의해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 태양광명이 이 도량을 비추고 있지만 문을 닫고 커텐을 쳐 버리면 빛이 들어올 수 없듯이,

번뇌망상이라는 커텐을 탁 쳐서 나는 나고 너는 너,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보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는 겁니다.

 

광명을 가로 막고 있는 커텐을 버리고, 나와 남이라는 벽을 부수고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유정무정이 다 불성임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유정무정 개유불성’(有情無情 皆有佛性)이라는 말씀을 바로 듣고 알면 정말 춤을 덩실덩실 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무릎을 베며 들었던 중용과 중도의 지혜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지금의 영어,

수학 배우듯 듣고 행동으로 옮겨 체험을 했다면 지금 바로 이 자리서 알아들을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만 합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와 마음길이 끊어진 자리를 보여주기 위해 조사어록을 인용하는 겁니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다는 말은 그냥 뜬 구름 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관과 객관이 탁 떨어져 나간, 천지를 울리는 소리인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라 하지 않았습니까? 섬진강, 낙동강도 바다가 되면 짠 맛 하나로 통합니다.

순간순간 변해가는 지금의 ‘마음’만을 쫓아 가는 강이 되지 말고 바다가 한번 돼 보라 이 말입니다.

강에서 바다가 되어가는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동산 양개의 은사는 운암 당산 스님인데 그 스님이 돌아가시려 하자 동산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어떤 사람이 묻기를 화상의 초상을 누가 그릴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저 그런 늙은이였다고 해라.”

동산 스님은 여기서 꽉 막혔습니다.

 

동산 스님이 머뭇머뭇하고 있으니 스승이 한 말씀 더했습니다.

“이것은 밤송이와 같아서 삼켜도 넘어가지 않느니라. 천생만겁토록 쉬어야 하느니라.

그대가 한 생각만 일으켜도 물이 한길 깊을 터인데 하물며 말로 표현하겠는가?”

천생만생을 쉬라는 이 말씀, 밤송이와 같다고 하는 이 말씀, 한 생각만 일으켜도

물이 한길이 깊어지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이 말씀에 동산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이 때 스승이 한 말씀 더 하시려 하자 “스승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저는 사람 몸 잃지

 않길 원할 뿐이니 오직 이것은 제가 공부해서 깨우치겠습니다.”하고 일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