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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교 공부

반야심경 금강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by 범여(梵如) 2012. 9. 19.

 

 

 

지금까지 대승불교를 공부한 후 초기불교를 다시 공부한 대부분의 스님이나 학자들이, 아직도 대승불교 경전인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강의하는 것은, 초기불교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교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반야경이나 금강경이 공 = 무상 무아를 얘기하는 것이니까 초기불교와 다를 것이 없다는 시각이 주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핵심 사상인 일체법(나와 대상)이 허망한 환상계라는 여몽환포영을 뜻하는 용어이고 보면, 무상 무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를 공부하는 분들에게 대승불교 경전의 올바른 이해를 도우려는 목적으로, 지난 8월 15일 쓴 것을, 며칠 전 혜천스님께서 초기불교적인 시각으로 해석하신 반야심경 강의를 읽은 후,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를 공부하는 분들이 대승불교 경전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일부 수정해서 올립니다.

 

1. 반야심경 금강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2. 교학이나 논장, 위빠사나 명상에 심취한 재가불자들에게

 

212.08.15

원불사 단현

 

 

 

반야심경 금강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한국에 남방 상좌부에서 수행한 스님이나 학자가 제법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아직도 한국불교의 습으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등을 강론하거나 법회에서 염불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 금강경 등 초기대승경전의 본보습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려드렸으면 하는 충정에서 글을 씁니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안내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지금 한국의 초기불교를 강의하는 대부분의 스님들의 실태를 말해야겠습니다.

 

한국대승불교로 출가해서 간화선 참선 등을 하시다 '대승불교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 인도나 스리랑카 등지로 유학한 다음 니까야를 연구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한국대승불교에 출가하여 수행하시다가 '이게 아니다'라는 자각과 함께 멀리 미얀마나 태국으로 달려가서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도 위빠사나를 수년씩 수행하신 스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스님들이 대승불교사상의 잔재가 남은 상태에서 근본불교를 공부해서, 교리교학의 핵심이나 맥을 뚫지 못하고, 바로 강의에 나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으로 김해의 붓다ㅇㅇ라는 스님은 철저한 단멸론자로 주위 모든 스님이나 재가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합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철저한 조사와 논증으로, 밝혀지면 그 즉시 힌옷 입혀 강제출교 되는 것이지만, 지금 한국 초기불교 스님이나 학자 그 누구도 그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마디도 없는 실정입니다. 또 많은 스님들은 아직 대승불교의 습을 버리지 못하고 대승불교 경전을 아무런 부담 없이 강의하거나 인용하거나 하면서 근본불교와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불교의 대표적인 학자이신 팔리문헌연구소 마성스님 같이 불교사상의 변천사를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브라만교 힌두교 근본불교 대승불교 티벳불교 등과 인도역사 인도사상사 불교역사 불교교리발달사 등 근본과 대승 전분야를 공부하신 분도 계시지요.

 

그런 분들은 불교의 교리가 처음에는 어떠했고 나중에는 어떻게 바뀌었으며 시대를 따라 어떤 모양으로 변질되어서 지금에 이르렀고 각 나라마다 불교교리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그들의 신행이나 수행, 교리는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를 연구합니다.

 

 

누가 반야부경전을 만들었는가?

 

저 역시 학자는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나름대로 종교를 연구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불교철학이나 신앙보다는 학문적인 불교를 먼저 조금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제가 불교사를 공부한 바로는, '반야경 금강경은 부파불교 당시부터 불교로 유입된 힌두논사들이 점차적으로 불교를 힌두교로 변질시켜가던 과정에서, 힌두논사들의 입장에서 불교를 재해석한 하나의 문학'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분들은 '비록 대승경전이지만 그 주장이 공과 무아를 설하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경전의 교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승불교 스님도 아닌 초기불교를 전공한 스님이나 학자들이 굳이 반야부경전(반야경 금강경)을 강의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놓았다가, 지난 주 혜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를 읽은 후, 초기불교에 대한 완전한 공부가 된 분의 강의는 도리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야부경전의 내용은 어떠한가?

 

제가 [대승경전을 보는 바른 시각 / 반야심경과 금강경에 속을 것인가?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0] 라는 글에서 예를 든 부분을 다시 거론하게 됩니다만, 반야부경전의 모든 내용은 부처님의 근본교학인 ‘오온부터 12처 18계 우주 등 온 세상과 나까지 포함하는 일체법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근본불교 교학을 허망한 것(空)혹은 없는 것(無)’이라고 단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부처님의 모든 교학을 쓸데 없는 것으로 만든 다음, 모든 것은 공이다‘라고 힌두교의 근본교리인 공사상으로 불교교리를 무효화 시킨 원흉 같은 경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래 근본불교는 힌두교의 바탕에서 성립된 것입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무명 업과 연기 윤회 해탈 이런 용어들은 모두 힌두교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 2가지, 일체법이 허망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공사상이 아닌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과, 영원히 존속한다는 아트만이 아닌 제법무아만 힌두교와 판이하게 다른 사상입니다.

 

브라만 경전인 베다와 베다의 후신인 힌두경전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자아추구의 결과물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 존재의 허망함, 끊임없이 계속되는 탄생과 죽음의 의미 등에 대한 고민과 번뇌를 벗어나는 길을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을 찾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무아라는 것을 체득하는 것으로 서로 상반된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금강경 등의 대승경전 

 

또한 근본불교 교리는 철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부터 불교는 무수한 말의 잔치가 영판 불교의 본령인양 호도되었습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해석하는데 이천년 동안 모두의 해석이 각기 다를 정도로 애매하게 표현된 몇몇 구절로 인해, 불교는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으로 철학이 불교이고 불교가 철학인양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교학은 맺고 끊는 법이 칼 같은 것이지요. 와서 보라 할 만큼 누구나 들으면 즉시 이해되고 감동 받아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 뿐이지요. 어느 누가 해석하든 초기불교 교학은 한 치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물론 논장불교를 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으로 와서는 경전 하나를 해석하는데 평생을 바쳐도 또 다른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금강경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45년 부처님 가르침을 수보리와의 질의응답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수보리야 내가 한마디라도 설한 것이 있었느냐?' '그렇다. 나는 한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라고 부정하게 만든 후 '일체법은 무상이 아니라 여몽환포영로전의 공이다'라는 힌두대승불교로 전환하는 전환점으로 만든 것이 금강경인 것입니다.

 

 

경전으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아상이니 중생상이니, 자아니 개아니, 법이니 비법이니, 보살이나 여래니 같은 말을 수십 번 중언부언하고,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 복덕이 얼마나 크다며, 끝없이 되풀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초기경전에 어디 그런 술 취한 자가 횡설수설, 했던 말 또 하고 또 했던 말 또 하는 쓸데없는 말이 단 한 줄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강경은, 힌두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닌, 그렇다고 불교가 아닌 것도 아니고 힌두교가 아닌 것도 아닌, 힌두교라고 말기도 그렇고 불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불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힌두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힌두교이면서 불교라고 하기도 그렇고 불교이면서 힌두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불교는 불교인데 힌두교 같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힌두교는 힌두교인데 불교 같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힌두교적인 불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불교적인 힌두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불교적인 눈으로 보면 불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힌두교적인 눈으로 보면 힌두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불교라고 하는데 힌두교와 더 가까워 보이고 힌두교라 하는데 불교와 더 가까워 보이고, 불교가 불교라서 불교가 아니고 힌두교가 힌두교라서 힌두교가 아니고, 불교가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이고 힌두교가 힌두교가 아니기 때문에 힌두교이고....

 

이런 중언부언,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아상 인상 중생상을 철저히 부정하다가 갑자기 긍정해버리고, 금강경에 그 많은 '수지독송하면 그 공덕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 니까야에 단 한 줄이라도 있으면 손에 장을 지집니다. 이런 애매한 말장난으로 일관된 경전은 니까야 7000여 개 경전 중에 단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지난 번에도 예를 들었던,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라.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데 이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금강경(응모소주 이생기심)보다 최소 3~5백년 앞선 힌두교의 최고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신의 노래)에 나오는 말인데, 이런 힌두교사상을 대승불교논사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차용해서 그대로 불교의 이름으로 경전을 만든 것이지요.

 

 

근본불교교리와 어떻게 다른가?

 

또 무주상보시라는 것을 많이 강조하지만 이것은 초기불교와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가 공덕을 쌓았으면 평소에도 그 공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야 임종할 때 그 즐겁고 행복한 죽음의식이 남아 다른 생명으로 재생연결 될 때 선처에 태어나서 후생을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 선행의 즐거움을 잊어버리고 괴로움만 있다면 악처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듯 금강경에서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무주상보시마저 근본불교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금강경 맨 마지막 32품 응화비진분,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은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론이고 금강경의 핵심이지요.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금강경을 적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은 허망한 것(공)이다. 부처님은 무상이라고 했으나 그것은 잘못 본 것이고, 일체법은 허망한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수보리야, 내가 단 하나라도 설한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여래께서는 하나도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 부처님은 스스로 근본불교교리를 하천한 것으로 버리셨다고 주장한 후에 '모든 것은 개시허망하여 제상이 비상(공)임을 본다면 진리(참나)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면서 '세상은 허망한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물 건너 갔다(所謂佛法者 卽非佛法 :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이 금강경인 것입니다.(단현의 일방적인 해설)

 

아쇼카 대왕의 전국가적인 지원으로 정사마다 화려한 식당이 차려지고 산해진미를 공양올리는데 현혹되어 불교승단에 대거 유입된 힌두논사들이, 평생 <이 세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참나(아트만)을 찾아 브라만과 합일하는 것이 해탈 열반>이라고 신념하던 힌두교적 사고가 뿌리 깊게 젖어 있던 힌두교논사들이, 비록 향기로운 음식을 쫓아 불교승단에 들어왔지만 그들의 머리 속 깊이 세뇌되어 있던 사상은 죽어도 불교의 근본교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공사상을 주장하는 반야경과 금강경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제행무상과 일체개공은 얼마나 다른 사상인지 이미 알고 계실테니 간단히 말하지만, 불교는 무상이라서 무아가 나올 수 있지만, 힌두교는 허망하기 때문에 참나를 찾아야 한다는 사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금강경은 힌두교의 논사들이 불교로 들어와 불교를 힌두교로 변질시키기 위해 만든 초기대승경전으로, 대부분의 불교학자들과 특히 대승불교의 영향을 입지 않는 유럽의 불교학자들이 그 점을 격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불교 전공자가 반야부경전을 강론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지만 금강경은 각 종단에서 앞다투어 소의경전으로 정해서 한국 스님들이 가장 먼저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여 공부한 경전이기 때문에, 대승불교에 출가한 후 초기불교를 공부하신 스님들은 아직도 '금강경이 아주 좋은 경전으로 초기불교적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미련이 남아 금강경을 강의하고 있고 법회 때마다 독송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 산냐 무아 등 초기불교 비슷한 내용도 있고, 부파불교의 유식사상 자아나 영혼사상을 고발하는 내용, 기타 도덕적으로 좋은 내용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금강경은 근본적으로 힌두사상에 가까운 경전이고 근본불교적 측면에서 볼 때 없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경전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사상의 변질사를 공부하지 않는 분들은 저의 이 말을 도무지 믿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이런 관점의 전환이 없으면 진정한 근본불교 교학으로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니까야에 非我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불교에서 我라는 것은 없다(無)는 것과, 我가 아니다(非)라는 것은 너무 다른 것입니다. 니까야 속에 我를 無가 아닌 非로 표현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지요.

 

근본불교에서 無我가 아닌 非我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 옛날부터 이단취급을 받았던 케케묵은 이야기입니다. 역시 남방 상좌부에서 이런 비아를 주장한다면 그날로 멸빈되어 쫓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아직도 무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아를 말하는 것은 아직 힌두불교적 참나 개념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제행비상(諸行非常) 제행개고(諸行非苦) 제행비아(諸行非我) 역시 근본불교 교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가가 아니라 제행비상 제행비고 제행비아라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학자에게도 나오지 않은 말로서 이것은 근본불교가 이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불교적으로는 비상 비고 비아라는 용어는 유식논사들이 무아라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껴, 나라는 것은 완전히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피해 "아트만이 아니다 무아가 아닌 그 어떤 실체가 있다"는 의미로 윤색해서 쓰는 용어이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근본불교에서는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근본불교 학자이신 마성스님의 신간인 <왕초보 초기불교 박사되다, 민족사> 143페이지에, 힌두논사들이 점령한 부파불교 중에서도 초기 유식사상을 주장한 설일체유부가 기록한 잡아함경 제1권 제1경 무상경에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이른바 '나의 생은 다하고 범행은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아느니라. 무상하다고 관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이요, 空하며,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러나 이 경과 대응하는 상윳다 니까야에는 공이나 비아라는 대목은 없다. 오직 무상 고 무아로 되어 있다. 니까야의 무아(anatta)를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의도적으로 공 비아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라문 힌두논사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아함경은 의도적으로 무상 무아를 공이나 비아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마성스님을 만났을 때 비아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여쭈기도 했고, 춘천 흥천사의 혜천스님께도 여쭙기도 했었습니다 [혜천스님, 반야심경 강의 / 반야의 지혜! 마음으로 흐르다...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7G7/117] 너무나 좋은 위대한 강의, 불자라면 무조건 필독 요) 물론 스님들의 답은 대승불교의 역사는 무아를 탈피하고 유아로 회귀하려는 역사라고 이구동성이셨습니다. 

 

무아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참나 아뢰야식 여래장 본래면목 그놈 주인공 주시자 등등의 비아를 만들어 마치 그 어떤 실체가 존속하는 양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비아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접습니다. 저는 불교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전개할 수 없고, 무아와 비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마성스님 각묵스님 전재성박사님 임승택교수님 등의 강의나 질문을 이용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스님들이나 법사들은 가장 먼저 불교사상사를 공부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불교의 교학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불교교리발달사부터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교리가 어느 시대 무슨 이유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교리도 자기 기호에 맞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게 되어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불사 불자필독자료란 게시판의 글 중에 [단현의 신앙고백 / 출재가자가 반드시 읽어야 할 불자 필독서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73] 중에 불교사상사 책 5가지 중에 양훼이난 교수의 불교사상사를 먼저 읽으시면 오늘 이 글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이 되고, 또한 근본불교 교학의 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며, 이후에 니까야나 교학을 공부하거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바르고 빠른 길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학이나 논장, 위빠사나 명상에 심취한 재가불자들에게

 

 

불교의 근본진리는 무엇인가?

 

자공과 증자가 공자님께 물었지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리 많이 아시고 가르치십니까?' 공자님의 대답은 '나는 하나로 꿰뚫었기 때문이다(一以貫之)'. 공자님의 인의예지처럼 부처님께서는 무상과 무아로 꿰뚫으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5온 12처 18계 5근 5력 7각지 37조도품 4제 8정도 12연기 등 8만 4천 법문은 오직 무상과 무아를 논리적으로 설득시키고 체득하여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설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 부처님 외 모든 제자나 외도들이 삿된 이론과 철학으로 부처님께 다가와 가르침을 청하거나 논쟁할 때, 각자의 근기와 견해에 따라서 무상 무아를 밝히 깨달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편과 수단으로 설하신 것을 모은 것이 니까야 7000여 편(5부 모두)의 경전들입니다. 그러나 그 복잡하고 지루한 모든 경전들을 모두 이해해야 할 필요는 결코 없지요.

 

그래서 근본불교는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니까야 속 그 많은 교리교학이나 아비담마 청정도론 등의 논장, 미얀마에서 개발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위빠사나 수행명상들을 우리가 모두 공부할 필요는 추호도 없는 것이지요. 쭐라 판타까 존자께서는 그저 무상 무아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셨고, 왁깔리 존자 핑기야 존자께서는 부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탈하셨습니다. 맛타꾼달리는 부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만으로도 천상에 태어나는 공덕을 쌓았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를 믿어서 네가 평안하여 이웃과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라고 하셨지요. 불교는 나와 남이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데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지, 모두가 교리교학이나 수행명상해서 해탈 열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재가신자들도 무상 무아를 체득해야 하는가?

 

동물들은 저축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동물 중에 인간만이 저축을 합니다. 재벌이 되어도 악랄하게 더 많은 재물을 욕심내지요. 진시황제나 파라오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도 전생의 영화가 계속 이어진다는 근본적인 본능이나 무의식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의식이나 자아가 영속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무상하고 나는 무아라는 것을 깨달아서 과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아이기 때문에 계속 영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탐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업은 다른 생명으로 이어져 그 과보를 받게 되기 때문에 내가 선업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업을 쌓는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후생에서 나의 업을 이어 받는 사람 역시 행복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불국토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의 공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다시 탐욕과 악의가 스물스물 살아납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지요. 수행이라는 것은 이 무상 무아를 깊이 체득하여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이루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수행이지 과도하거나 변질된 교학공부가 아닌 것입니다. 더구나 논장불교 철학불교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공부나 수행도 적당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공부가 많은 깊은 산속 수행승도 완전한 경지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완전한 열반을 유지하지 못하셨지요. 가난하고 불쌍한 재가신자들이나 교활하고 악랄한 외도들을 만나고 세상의 불법 비법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 들으시면 안타까운 자비심으로 괴로워하신 분이시지요. 그때마다 부처님께서는 고요한 숲속을 거니시거나 앉아 요가하시며 그 괴로움의 찌꺼기를 비워내는 수행을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부처님께서는 재가자에게 교리교학이나 수행명상을 거의 가르치지 않으셨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재가자들은 부처님이나 수행스님들의 욕심과 악의를 버리고 떠난 성자의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감동과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론적으로는 이해하고 위빠사나 할 때는 마치 아라한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다가, 돌아서서 생활전선에 나서면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사기 치고 거짓말 하고 교언영색 해야 하는 자신을 뒤돌아보고, 적지 않은 실망과 회의를 거듭하다가 괴로워 하고, 결국 불교에 회의를 느끼거나 식상하여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신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신 때문인지 모르지만, 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도 유지하기 어려운 수행명상을 통한 열반의 상태를 재가자에게는 결코 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처님께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바로 재가신자들의 수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믿음으로 청정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보시하고 오계 팔계를 지키면서 선업을 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계도 재대로 지키지 못하는 재가자 주제에 무슨 교학이며 삼매 명상이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사띠라는 단어를 니까야에 수천 번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라는 단어는 몇 번 나오지 않지요. 내 마음이 가는 곳을 성찰(사띠, 깨어있음)하며 무상 무아를 관(위빠사나)하라고 하신 것뿐이지요. 그런데 미얀마 위빠사나가 너무 침소봉대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위빠사나 열풍 속에 속상하게도 그 속에 부처님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서글픕니다.

 

 

재가자의 수행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쭌다의 돼지고기요리를 공양 받으시고 토사광란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경에도, 아난다 존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쿠시나가라로 걸음을 옮기십니다. “부처님 왜 이 아픈 몸을 이끌고 굳이 쿠시나가라 그 먼 곳까지 가시려 하십니까? 대도시에서 열반에 드시면 대왕이 전륜성왕에 버금가는 화려한 장레를 치러 줄 것인데...” 여쭐 때, “흙벽집에 사는 가난한 밧지족들이 내생이나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마지막 법문을 해주기 위해서 가련다” 하시며 극심한 토사광란에 탈수증상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 제대로 자시지 못하시면서 수십 번 가다 쉬다를 반복하신 후 결국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보시의 공덕을 설하신 후 길옆 숲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 재가자의 수행은 이런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사랑을 체득하고, 감동과 은혜를 입어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재가자의 견성이라는 것은 이런 ‘부처님의 중생을 위한 한없이 큰 사랑과 자비의 거룩한 행적을 알고 공부하는 것’이고, 성불이라는 것은 ‘우리도 부처님 같이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깨닫고, 재가자 다운 겸손한 수행과 실천이 따르는 진정한 불자 되시길 절실한 마음으로 염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