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 | |||||||||||||||||||||||||||||||||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 중국의 동부에 있었다" | |||||||||||||||||||||||||||||||||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2부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1부) 백제의 기원과 사서로 본 위례성의 위치 (2부)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의 왕성인가? 위대한 제국 백제를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가두어 놓은 식민사학계와 가지마 노보루를 고발한다. 우리는 백제라는 국호는 건국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초에는 십제(十濟)라는 국호였다가 형인 비류가 죽고 그의 땅과 백성들이 귀의하자 국호를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약자로 백제로 고쳤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백가(百家)가 바다(海)를 건너왔다(濟)."라고 해석을 하여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백가(百家)가 제(濟水, 강 이름)와 해<海, 산동성 동남쪽의 지명)>에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 이유는 본시 백제는 래이(萊夷)였고 마한(馬韓)의 종족이며, 래이와 마한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인근에 걸쳐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는 직위가 가능하며 산서성의 요서와 대방군에 관한 설명도 가능하다.”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설명한다.
<한단고기>와 <사기>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기원 여하튼 백제라는 단어가 처음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에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遼) 중에 12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년.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이하생략)” 여기서 우(虞)라 함은 3황 5제의 하나인 순임금을 말함이고, 요(遼)라 함은 산서성 태행산맥 내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으로 예로부터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그 일대에 12개의 성을 쌓았는데 백제와 관련된 낯익은 지명들인 한성.대방.백제 등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가 백가제해의 준말이 아니라 지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백제도 고구려처럼 지명을 가져와 국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첨언을 하나 하자면,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에 있는 요수가 중국에 의해 점차 동으로 옮겨진다. 즉 동북공정은 수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최초 요수(遼水)는 황하나 요라는 지방 근처를 흐르는 그 지류였으나, 그것이 하북성 난하로 옮겨가고, 요나라가 들어서서는 현 요하가 요수가 된다. 현 요하와 옛 요동.요서의 중심이 되는 산서성 요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요동하면 현 요하 동쪽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안시.요동성이 현 요하 주변이 되고 평양이 대동강 평양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사대주의 매국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을 국가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아직도 우리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인가!!!
조선은 44세 구물 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이 중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린다. 그 중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번조선의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기준은 해대(海岱)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옛 한나라 땅 아니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기자조선의 기준은 위만조선에게 망해 대동강 평양에서 바다를 통해 남하하여 한반도에 삼한을 세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는 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가짜 역사를 아직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놓고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할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인가!!!
시조인 온조의 건국지는? 백제의 건국에 대해 여러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한단고기>에는 백제국본기가 따로 되어있지 않고 백제에 대한 내용이 <고구려국본기>에 일부 나온다. (인용)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경인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도망하여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서 경지를 넓히다 보니 큰 부자가 되었다. 먼 데 사는 사람들까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南至帶水)까지 이르고, 동으로 빈.대해(東濱大海)까지 이르고 반천리(半千里,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을 시켜 고주몽 임금에게 글을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칭찬하여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이름을 내렸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이어지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슷하고,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위 문장이 <한단고기> 번역본마다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남지대수(南至帶水)가 다른 본에는 북(北)지대수로 되어있고, 동빈대해(東濱大海)가 다른 본에는 서(西)빈대해로 되어있다. 경인(庚寅)년 3월은 다른 본에는 기묘(己卯)년으로 되어있다. 즉 동.서.남.북을 고의로 바꾸어 위치비정을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조작되어 있다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지적했다.
위의 남지대수/동빈대해 내용은 이유립선생께서 소장한 진본 영인본 <정본 한단고기> 내용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내용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유립선생이 쓰신 대배달민족사(大倍達民族史)라는 책과 대조해보니 남지대수/동빈대해가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서의 지리지에서 동.서와 남.북을 반대로 조작하면 그 나라의 강역이 전혀 달라진다. 그럼 남지대수/동빈대해를 북지대수/서빈대해로 조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건 <한단고기>를 일본에서 최초 출판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로 보인다. 그럼 왜 일본은 백제 건국지의 방위를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고쳐야 했을까? 그 의문의 해답은 다음 연재인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에서 밝혀진다. 이번엔 지면상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여하튼 이 기록은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의 기록인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양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는 기록과 같다. 해서 위의 가지마노보루의 북지대수/서빈대해는 분명한 조작임이 여기서 밝혀진다. 참고로 而瀛濱海之陽의 陽은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는데, 시경에 의하면 "在南山之陽"이나 "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즉 산을 기준으로 할 때는 따뜻한 햇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을 기준으로 할 때는 햇빛이 먼저 드는 북쪽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주몽의 곁을 떠난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어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태자가 된 비류가 즉위하자 온조가 떠나 새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처음 이른 곳이 미추골이고, 그 다음에 이른 곳이 한산의 부아악이다. 그리고 뒤에 비류가 죽으니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귀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몽의 부인이며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의 딸인 소서노는 어하라를 세운 초대 여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초 건국지 고주몽에게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열 사람의 신하와 함께 남으로 떠났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고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은 “이 하남(河南)의 땅은 北으로 한수를 띠고 東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였으며 南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西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보기 어려운 천험 (天險)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겠습니다.”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이다. (참고로 대(帶)자는 ‘띠를 두르다’의 뜻인데, 왜 하필 이 글자를 썼는지? 한단고기의 대수(帶水)와 혼돈된다.)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는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고 고 기록되어 있다. 또는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한다며 <한단고기>와 비슷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미추홀을 식민사학계는 인천으로 비정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이론이며, 민족사학계는 천진 근처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패수(浿水)는 북경과 천진을 잇는 강이고, 미추홀은 고구려와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단고기>에서는 패수를 북경 근처를 흐르는 현 조하(潮河)로 말하고 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편에 보면 “기해 38년 연나라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의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己亥38年 燕盧?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 浿水今潮河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에서 발간한 <한단고기>에는 패수가 조하가 아니라 현 하북성 동부 난하로 적혀 있다. 가지마 노보루는 참으로 나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왜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일본인이라 그의 조상인 왜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북경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유적이 가득한 곳이며, 소서노 일행이 건넌 패수가 조하(潮河)이기 때문에 미추홀은 천진 부근인 것이다. 실제로 천진 부근에는 동양 최대의 염전이 있다. 그래서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어서 비류가 잘못을 뉘우친 것이다. 역사의 스토리 전개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소서노 여왕이 건넜다는 대수(帶水)는 어디인가? 대수는 그 한자로 보아 대방(帶方)의 땅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대방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하북성 석문(石門 현 석가장)과 접하고 있는 대방이 확실하다. 그 대방의 땅을 흐르는 강이 있으면 필시 대수임이 틀림없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면 대방 지역을 흐르는 큰 강은 없다. 작은 강은 있다. 그렇다면 그 작은 강을 대수라 했을까? (대수가 어떤 강인지는 다음 연재에 언급한다.) 여하튼 이 위례성의 위치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분명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이 현 서울 한강 남쪽이라고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10명도 몰랐던 지명인 위례성이 어떻게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었으면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모른다는 350여개의 지명은 다 중국 대륙에 있는 지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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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27 [13:39] 최종편집: ⓒ 뉴스터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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