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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금남(금강)기맥(終)

금남기맥 제1구간 - 금만봉에서 말골재까지

by 범여(梵如) 2012. 11. 19.

☞산행일자:  2012년 11월 18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오후에 약간 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0 km / 9시간25분 소요

☞참석인원: 방초님과 함께

☞산행코스: 작은 싸리재-금만봉(싸리재)-왕사봉-644봉-656봉-운암산갈림길

                 칠백이고지-봉수대산 갈림길-써래봉-선녀남봉-선녀봉갈림길                

                 417봉-용계재-불명산-시루봉-장선리재-392봉-460봉(암봉)

                 미륵산-말골재

소 재 지:  전북 진안군 주천면 / 완주군 경천면, 운주면. 동상면

 

지난주에 비를 쫄딱 맞으면서 금북기맥을 마무리 하고나니  아무래도 뭔가 허전하다.

그래서 이번주부터 5번에 걸쳐서 금남기맥길을 나선다.금남기맥을 내년 1월중에 끝내면 이젠 9기맥중에 3기맥만 남는다.

한강기맥이야 경기도와 강원도 구간이라 나홀로 살방살방 다니면 되련만 아무래도 남도 맛과 멋이 어루려진 땅끝기맥과

영산기맥은 거리도 그렇거니와 나홀로 산행때는 경비문제도 많많찮아 고민이 많다.

그래서 내년 1월부터 3월까지 도솔기맥과 수도기맥을 마친 다음에 고민을 해봐야지.

 

이번 산행도 나홀로였는데 그와중에 千軍萬馬를 얻었다.

2010년도 낙동정맥길을 10개월 같이한 동료산꾼 방초님이 동행을 해주시겠단다.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이 분 고향이 진안이라 고향산길을 밟고 싶었던 모양이다.

토요일 저녁에 영등포역에서 접선하여 영등포발 서대전행 전라선무궁화호에 몸을 싣는다.

 

금남기맥 개념도

오늘 시작하는 금남기맥은 부르는 이름이 참 많은듯 싶다.금남기맥이라기도 하고 금강정맥, 대동금강기맥,

신금남정맥이라고 부르기에 혼란 스럽다

금남기맥(금강정맥)이란 백두 대간이 덕유산을 지나 백운산에 내려서기 전에 영취산에서 장안산.신무산.팔공산.

성수산.마이산을 거쳐 진안과 전주사이의 모래재고개위 조약봉(주줄산 또는 주화산)에서 두줄기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남서쪽 만덕산으로해서 내장산.추월산.무등산.제암산,존제산.조계산.백운산등
전라남북도를 휘돌아서 섬진강하구의 망덕산까지 이어지는 호남정맥이고, 또 한줄기는 북진하여 연석산.운장산.

장군봉을 지나서 싸리재와 봉수대사이의 싸리재 분기봉에서 다시 두갈래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북진하여 인대산.대둔산.계룡산을 지나서 부여 부소산에서 맥을 다하는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이고, 또한줄기는 서진하여 왕사봉을 거쳐 칠백이고지.시루봉.장재봉.작봉산.천호산.

미륵산.함라산.망해산.고봉산, 청암산을 지나 장계산에서 서해바다로 잠긴다.

 

이 산줄기를 보통은 금강정맥 혹은 대동금남정맥이라고 부르는데, 박성태님이 만든 신산경표는 조약봉분기봉에서

군산의 장계산까지 가는 산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부르고 싸리재 분기봉에서 부여의 부소산까지를 금남기맥이라고  부른다.

거리는 조약봉에서 부소산 조룡대까지나 군산의 장계산까지나 신기하게도 같은 도상거리로 131.4km이다 그렇게 이름진 이유는  정맥은 강을 구획하는 경계가 되고 맥이 바다에 닿아야 하는데 산경표의 금남정맥은 이 모두를 충족하지 못하니 온전히

금강의 남쪽과  만경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이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산경표』(山經表)라는 글자의 뜻을 풀어 보면 '산줄기의 흐름을 나타낸 표'라는 뜻이다.
이 책의 저자라고 알려진 조선 말기의 여암 신경준 선생은, 이 책에서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형식으로 도표화하여, 우리나라 산줄기 흐름의 큰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실학자이다.
이 책의 내용구성을 보면 1대간과 1정간 13정맥등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산줄기체계가 정립되어 있다.
이책에서 저자 여암 신경준 선생은  첫 째로 "산은 물을 넘지 못한다"는 山自分水嶺의 원칙과,
둘째 "모든 산줄기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원칙으로 1대간 1정간 13정맥의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셋째로  "산은 인간을 나누고 물은 인간을 잇는다"라는 등 불멸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박성태 선생이 전국방방곡곡을 발로 누비어서, 기존산경표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듯한  "신산경표"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신산경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옛날의 산경표와 기본정신은 같으나
 논리적으로 원칙을 정해서 현실적이고

체계적으로 다시 정리하여, 1대간 1정간 13개정맥의 개념을, 이 책에서는 1대간 12개정맥과 13개 기맥으로 재구성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책이 발표되고나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산꾼들의 신선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산경표와 신산경표의 서로 다른 내용에 대하여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느 의견이 옳다고 뚜렸하게 말할 수는 있는 단계는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와 구글어스 

영등포발 서대전행 열차표

전라선 22시 32분발 열차를 타라고 방송이 흘러나온다.

영등포역에서 방초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풀렛홈으로 걸어간다.

영등포역 여행센터(20:32)

영등포역을 출발한 열차에서 방초님과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다보니 금새 서대전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린다.

지난 9월에 지리산 성삼재에서 백무봉까지 걸으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서대전역(22:22)

서대전역에서 내려 둘이서 베낭을 메고 30분정도를 걸어서 대전시 서구

유천동에 있는 대전 서부터미널로 향한다. 그리고 터미널 근처에 있는 찜질방에 여장을 푼다.

유천 찜질방(23:00~06:00)

찜질방에 여장을 풀고 생맥주 한잔 생각이 나서 방초님의 의중을 물으니

아무래도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아쉽지만 포기를 하고 샤워를 마치고

수면실로 향한다. 수면실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어서 편한 잠을 잘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찜질방이 상당히 춥고, 이불이 없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런 제기럴... 찜질방에서 더워서 못 잔적은   있어도

추워서 웅크리고 잔 적은 없는데...추워서 몇번이나 잠을 깬다.

아침식사(06:00~06:30)

찜질방에서 나오니 도로 맞은편에 순대국집이 하나있다.

순대국집에 들려 순대국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대전서부터미널 근처에는 카바레, 나이트클럽과 술집이 많아서

그런지 이런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술취한 손님들이 식당에 가득하다.

우린 얼른 식사를 마치고 5분 거리에 있는 대전서부터미널로 향한다.

대전서부터미널

양촌가는 버스표와 버스(07:00)

작은 싸리재로 가기 위해서 이곳 대전 서부터미널에서 충남 논산시

양촌면까지 가는 버스에 오른다. 우리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까지 가야 하는데

2011년까지 이곳에서 운주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는데 전북 완주군에서 버스회사에

보조금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양촌까지 노선을 단축시켜 버렸다고 한다.

충남 논산시 양촌면소재지(07:40)

버스는 07시에 출발하여 계룡시와 논산시 연산면을 거쳐

40분만에 양촌면 버스 정류소에 도착한다

대전 서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서 운주에서 개인택시를 운영하시는

강희진 기시님(011-678-7799)에게 전화를 걸어 놓았더니 버스 시간에

맞춰서 버스 정류장에서 반갑게 우리를 기다린다.

택시는 우리를 태우고 작은 싸리재로 향하는 길에 운주에 있는 자기 집에

들려서 곶감 몇개를 주면서 시식을 해보란다.

택시기사 강희진님의 자택

이곳 전북 완주군 운주면은 대둔산 아래의 오지로서 노천에서 말린

곶감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곶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우리를 싣고 작은 싸리재로 향하다가 자기 집에 들려서 말린 곶감 2개씩을 맛보라고 준다.

이 분은 참으로 다복하신 분 같다. 올해 나이가 64세인데 아들 나으려고 하다보니

자식이 여섯이란다. 1남 5녀... 막내가 올해 고3이라고 자랑을 한다.

집 마당의 커다란 오석에다가 명패식으로 자기와 자기부인의 이름을 새겨놨다.

이곳에서 40년을 택시 영업을 하셨다고 하는데 참으로 멋있게 사시는 것 같아 부럽다.

다시 택시를 타고 작은 싸리재로 향한다.

740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황골으로 우측으로 꺽어져 대궁동과

여항곡의 구절양장의 구비구비 도로를 따라 작은 싸리재로 향한다.

대둔산과, 천등산이 있어서 그런지 이곳 청정지역의 오지에

펜션과 유원지 시설들이 참으로 즐비하다. 기사분의 말로는 이곳은

2개월 영업하여 1년을 먹고 산단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음식값을

담합하여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런 청정계곡은 그냥 자연그대로 둬야되는데  개발이란 미명아래 마구 파헤쳐 있다.

산꾼으로서 참으로 보기가 않좋다. 난 개인적으로 연예인들이 나와서

하는 1박2일이란 같은 프로그램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런 프로그램에 한번 나오는 마을은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 같아서...

제발 청정지역은 그대로 두었어면 한다. 자연은 우리것이 아닌

우리의 후손들에게 잠깐 빌려쓰는 것이니... 제발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

작은 싸리재(570m:08:30)

싸리재의 유래는 이곳에 예전에 그렇게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차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지금은 싸리보다 두릅나무가 훨씬 더 많은것 같다.

택시를 타고온 계곡을 뒤돌아보니 참으로 깊다. 운주에서 이곳까지

계곡 깊이가 12km가 넘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작은 싸리재 넘어 진안

주천 사람들이 이 재를 넘어서 양촌장을 보러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장꾼들을 재물을 노리는 도적들이 참 많았다고 한다.

기사분의 말에 의하면 자기들이 어렸을 때까지도 그런일이 잇었다고 한다.

여자들을 겁탈하고 소 판돈을 빼앗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일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작은 싸리재

바로 아래는 그때 당시의 집이였던 폐가도 보인다.

드디어 작은 싸리재에 도착한다. 길이좁아 나무가지 차가걸려 흡집이

나는데도 이곳까지 데려다 준 기사분이 그져 고맙기만 하다.

작은 싸리재 서릿발

이곳 작은 싸리재는 전북 진안군 주천면 대봉리와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조그만 차량이 다닐정도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고개에는 진안군에서 설치한 홍수예방을

위한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고마운 기사분과 작별을 고한다.

 

고개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준비한다.

아뿔싸 그런데 장갑을 챙기려니 아침에 버스에다가 장갑을

놓고 와버린게 아닌가?... 밤에 잠을 못잔 탓인지 잠깐 졸다가

버스에서 내리는 바람에... 이런 낭패를 당한다.

하는 수없이 비상용 겨울장갑을 꺼내서 낀다. 날씨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꽤나 춥다. 이곳에는 서릿발과 얼음이 보인다.

14개월만에 이곳 작은 싸리재에 선다. 지난해 8월에 금남정맥길에 이곳을

지나갔는데 참으로 세월이 빠르구나... 금만봉을 향해서 초반부터 급경사를 치고 오른다.

20분간의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추운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난다.

아침에 끼었던 안개도 걷히고 날씨는 참으로 좋다.

잠시후에 금남정맥과 기맥의 갈림길 삼거리가 나오고

선답자들의 반가운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내가 금남기맥길을 나설줄이야...

금만봉(750m:07:50)

전북 진안군 주천면과 완주군 운주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금남기맥의 분기점이다. 금만봉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금강과 만경강의

분수령이라 그렇게 부르는데 이곳의 빗줄기가 우측으로 떨어지면 금강의

수계로 흘러들고 좌측으로 떨어지면 만경강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 싸리봉이라고도 부른다.

금남정맥과 기맥의 분기점 삼거리

같이 동행한 방초님의 모습

범여도 금남기맥길을 시작하면서 인증샷을 남기고...

싸리봉(07:55)

전일상호신용금고에서 표시한 금만봉(싸리봉)은  갈림길이고

실질적인 싸리봉(금만봉) 정상이 이곳이다

건너편 금남정맥 능선에 있는 성제봉(태평봉수대)의 모습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에 자리잡은 803봉의 태평봉수대가 가장 크고

원형이 그대로 복원돼 관심을 끌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이 봉수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금만봉 정상에서 잠깐 머문 다음에 직진을 하여 기맥길의 첫발을 내딛는다.

금남기맥 나무사이로 멋진 운장산과 연석산과 좌측 너머 구봉산도 아련히 보이고...

금남정맥 산너머 저멀리 백두대간길의 덕유산군이 실루엣처럼 보이고...

고향의 산그리메를 카메라에 담기 여념이 없는 방초님

나이가 들면서 고향은 늘 그리운 동경의 대상인가보다...

등로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어 걷기가 참으로 불편하다.

한가지 장점은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건너편에 왕사봉이 보이는데 기맥길은 형태로 이어진다.

멋진 소나무도 만나고 산죽과 억새를 보면서 호젓한 길을 걷는다.

山竹능선을 지나니 또다시 낙엽이 수북한 호젓한 길이 나오고...

지나온 금만봉과 그 너머의 성제봉은 마치 여인의 乳頭처럼 보인다.

오늘길은 여태껏 걸어온 기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참으로 편하고 거기다가 선답자들의 시그널은 왜그리 친절(?)한 지...

광주의 백계남님은 화살표 표시까지... 넘 고맙심더.

우측에 태평봉수대와 금만봉을 바라보면 왕사봉으로 향한다.

구름에 살짝 가려져 신비로움을 더해 주는 운장산의 모습

조선시대 중종때 성리학자 운장 송익필(宋翼弼)의 이름에서

유래되어다는 운장산은 19세기 중엽까지 주줄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왕사봉 바로 아래에도 서릿발이 가득하다.

왕사봉(王師峰:718.3m:09:30)
전북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와 동상면 대아리에 경계해 있는 봉우리로정상에는 새마포산악회에서

걸어둔 아크릴 표지판과 삼각점(△진안 411 1984재설)이 있다. 옛날 왕의 스승을 뜻하는 국사봉이란

지명은 수도없이 많으나왕사봉은 그리 많지가 않은데 이곳 왕사봉의 유래를 알아보려고 자료를 찾았으나

완주군의 그 어느 자료에도 왕사봉의 유래는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왕사봉 정상 삼각점((△진안 411 1984재설)

방초님이 그렇게 오고 싶어했던 왕사봉 정상

NO:26 송전탑

왕사봉에서 주위 仙景을 즐기고 능선을 타고 급경사로 떨어지는 초록색

26번 송전탑이 나타난다. 이른 아침에 식사를 한 탓인지 벌써 배가 고프다.

방초님과 함께 이곳에서 1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하면서 막걸리 한통을

둘이서 나눠 마신다.배가 고플때는 아마 막걸리가 최고인 것 같다.

싸리재에서 백두사랑산악회를 따라서 새벽부터 이 코스를 타고 있는 젠틀맨님에

전화를 하니 지금 용계재라고 하면서 용계재 정자아래에 범여가 좋아하는

인천 소성막걸리 한병과 인삼으로 만든 안주를 숨겨놓고 갈터이니

이곳 지나가면서 마시라고 한다. 이렇게 고마운거... 복받을깁니다.

오늘 가야할 능선이 보인다.

저기 좌측의 높은 봉우리가 칠백이고지이다. 오늘은 비록 목적 산행이기는

하지만 느긋하게 동료산꾼 방초님과 여유만만하게 길을 걷는다.

참으로 오랫만에 여유로운 걸음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멋진 바위를 지나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낙엽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 굉장히 미끄럽다.

더군더나 어제 내린비로 인해 낙엽은 젖어있고 음지라 살짝 얼어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미끄러운 낙엽길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바로 아래에는 천길 낭떠리지처럼 보이는 엄청난 깊이의 골짜기다.

발한번 잘못하면 그냥 황천길을 갈것 같은 아찔한 느낌을 준다.

자꾸만 스틱을 잡은손에 힘이 들어간다...

우측으로 보이는 금남정맥의 모습

흔히들 정통 산꾼들은 錦男正脈을 정맥의 꽃이라고 부른다.

9정맥 가운데 가장 전망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이곳 싸리재에서부터 태평봉수대,대둔산,  바랑산까지 구간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여암 선생이 왜 대둔산, 계룡산으로 해서 부여로

금남정맥으로 정한 이유를 알것만 곳이다. 참으로 멋진 풍경을 즐기면서 산길을 걷는다.

저 멀리 금남정맥길에 지난해 지나온 성제봉, 신선대. 계목재와 성치지맥 분기점도 보이고...

천하절경을 감상하면서 암릉능선의 칼날등을 타고 곡예하듯이 걷는다.

늘 친구넘들이 나를 완전히 맛이 간넘을 취급한다.

그래! 이 넘들아 니들이 이런 정상에 한번이라도 서 본적이 있느냐?

니들도 이 맛을 한번 보면 맛이 가는게 아니라 오줌을 좔좔 쌀것이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고당골의 모습

운주에서 진안 주천면으로 연결하는 이 계곡은 금남정맥과 기맥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이곳 주위는 아직도 6.25라는 동족상쟁의 잔재들이

많이 보인다. 조금 있으면 가야할 칠백이고지, 저 건너 금남정맥길에 있는

600고지, 백령재의 위령탑 등등... 우리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능선 안부에는 두릅나무와 엄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저 놈을 짤라다가 엄나무 백숙이나 해 먹을까 ㅋㅋㅋ

암릉 능선을 따라 우측의 낭떠러지 절개지를 끼고 가는데

650봉(암릉)이 앞을 가로막아 좌측으로 우회하여 정상으로 간다.

650봉 정상의 모습(10:15)

우측으로 뱀처럼 꼬인 도로의 끝부분까지 개발이란 미명아래 마구 파헤쳐있다.

운주면 계곡입구에서 저곳까지 약 10km 정도의 거리이다. 

인간의 손이 닿는 즉시 자연이 파괴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아침에 차를타고 올라간 도로의 모습

그 뒤에 여인의 젖꼭지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가 성제봉(태평봉수대)이다.

능선에서 바라본 완주군의 동상면과 경천면의 산그리메

다시 능선 안부를 타고 편안한 걸음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싸리봉으로 급하게 치고 오른후에 그리 고도차가 많치않은

능선 안부를 타고 주위의 멋진조망을 호강을 하면서 산행을 한다.

조그만 무명봉이 하나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운암산 갈림길을 올라 가는데 보라색 버섯이 하나 보인다.

뒤따라 오는 방초님... 약초, 버섯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이게 무슨 버섯이냐고 물으니 가지버섯이란다. 청버섯으로도 부른다고 하면서

버섯갓을 꺽어서 입에 넣는다. 향이 참으로 좋다고 하면서...

 

가지버섯 효능

피를 맑게 해주고 피부미용에 좋고 여러가지 비타민이 들어 있음

독성은 없음

 

 

가지버섯 요리

 

1. 데쳐서 손질

2. 느타리버섯처럼 양파랑 당근 썰어넣고 볶아 먹는다.(들기름에 볶아야 맛있다네여)

3. 야채 썰어넣고 버섯전

4. 된장찌개 끓일 때도 같이 넣고 끓인다.

5. 엄지 손가락 크기만큼 작은 것들은 따로 모아 소금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가지버섯 보관 방법

 

서늘한 곳에 잘 펴서 말려두었다가 요리 할 때만 조금씩 데쳐서 먹으면 오래 보관 할 수 있다

운암산 갈림길(10:53)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운암산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금남기맥길을 이어간다. 무심코 가면 놓치기 좋은 곳이다.

이곳이 운암산 갈림길이란 표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늘구간의 능선은 알바 할일은 없을것 같다. 워낙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기에...

운암산 갈림봉에서 능선 안부로 내려오니 산허리로 가는 길목에 이정표가 있다.

다시 편안한 안부를 가다가 가파른 능선을 치고 오르니 칠백이고지가 나온다.

702고지(700.8m:11:00)

전북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와 동상면 대야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대둔산과 천등산, 운장산, 연석산이 한 눈에 보인다.

칠백이고지 산불 감시탑

이곳은 6.25사변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현장이며, 수많은 국군과 애국지사들이 산화한 피로 얼룩진 비극의 현장이다.

1950년 9월28일, 수복과 아군의 진격에 쫓겨 북녘으로 도망치던 괴뢰군 패잔병과 공산분자들이 이곳 칠백이고지와

동쪽으로 육백고지, 팔백고지, 느티골, 대활골. 피목리, 고당리, 싸리재, 왕사봉 등에 진을 치고 본거지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그리고 무기탄약까지 만들어 금산군 전지역과 논산, 완주, 무주군 등의 지역까지 출몰하여 양민대학살, 식량과 가축약탈,

민가방화, 경찰관저 습격등 청인공로 할 만행을 일삼았다.

 

이곳을 요새로 준동하던 공비들은 소위 남조선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휘하 45사단 총참모장 길병래가 지휘하던 

백두산부대, 압록강부대, 청천강부대, 한듬산부대, 외팔이부대, 나팔부대, 호량병단인민학교, 인민병원, 남로당 완주.

금산. 논산군당 등 각부대 괴뢰군 대위 전광순외 거물급이 통솔하는 2만명이 집결하여 인접 대둔산, 운장산지역과

멀리는 덕유, 지리산을 거점삼아 출몰하던 공비들까지 합동작전을 지휘하던 막강한세력으로 국내 치안을 교란했다.

이에 따라 경찰, 군인, 향토청장년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9·28수복과 동시 약 5년반동안 공비 토벌작전을 감행 수백회의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으며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경찰대 향토방위대 국군 8사단 화랑부대 김화산 부대 등이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적사살 2,287명 생포 1,025명과 중화기 탄약등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칠백이고지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면서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정상에 있는 폐헬기장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이곳 역시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어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나무사이로 아련히 보이는 운암산(雲岩山,597.0m)의 모습
완주군 동상면과 고산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이름이 말해주 듯이 구름운(雲), 바위암(岩)을 써서,

구름 위에 솟아오른 바위산이란 뜻이다.

 

주능선이 마치 설악의 용아릉 축소판 같은 이 산은 모산을 운장산으로 받든다.
운장산은 예로부터 전국 8대 오지로 알려진 이 곳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태고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비경으로서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하며

완주군과 진안군의 험준한 산자락을 거의 다 거느리고 있다.
운장산을 주봉으로하는 대부분의 봉우리들은 산세가 운장산과 비슷하다.

깍아 지른 듯한 남쪽 절벽아래 대아댐 주변의 풍광과 정상에서 봉화대로 이어지는 암벽능선이 수려하다.
정상에서 동릉선을 타고 560고지에 올라 암봉에 올라 동쪽 절벽 바로

아래 은천리 계곡을 내려다보면 어지러울 정도로 아찔하다.
정상의 정남쪽 절벽지대에는 하사관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으로 군부대의

유격 훈련장으로 입산이 통제되어 있으나 능선 등산에는 지장이 없다.

정상과 저승봉은 조금 떨어져 있어 표고차 약160m 되는곳을 내려갔다 올라가야 된다

 저승봉에서의 전망은 매우 뛰어나 운장산, 칠백이고지, 봉수대산, 대둔산등 주변의

전망이 매우 좋고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의 명당으로 알려진 동성산이

 산 그림자를 드리운 대아저수지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저승봉에서 보면 중국의 무릉도원이 이곳에 옮겨 왔음을 실감 할 수 있다.

주변의 산세와 어우러진 저수지 그리고 산천리 대아 수목원 뒷산의 팔각정에서

선비들이 모여 앉아 시한 수를 읊는 모습과 기생들과 어우러져 춤판을 벌이고

있는 듯 풍악소리가 들려 오는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정상에는 가로 10여m 높이 4m가량 되는 봉화대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완주군지에 의하면 운암산에서 동으로 멀지 않은 대둔산에서 운장산으로 이어지는

산릉상의 싸리재 일원이 백제와 신라를 연결하는 길목이자 국경을 방어하는 요충이었다고 한다.

능선 안부에 멋진 바위하나가 나타난다.

아! 글쎄 이 바위넘이 저 여린 나무를 상당히 괴롭히네.

엄청나게 큰 바위를 저 여린 나무가 받치고 있다.

능선 안부에서 바라본 완주군 경천면의 계곡

멋진 골짜기 너머로 전주시내가 아련히 보이기 시작한다.

능선 안부와 능선 아래에는 재선충으로 인해 갈참나무를 베어서

비닐로 쌓아서 흔증을 해논것이 많이 보이건만 엉성하여 비닐이 다 찢어졌다.

봉수대산 갈림길(11:40)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약간의 내리막길을 간 다음에

다시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는다.  갈림길 능선에는 성터의 흔적같은

돌담 비슷한 것이 보이기도 하지만 성터인지는 확신이 서지를 않는다.

급경사를 내려왔다가 다시 암릉구간의 칼날능선을 타고 올라간다.

안부 능선으로는 멋진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그 너머로는 옛날에 봉수대가 있었던 봉수대산이 뾰죽하게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써래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갈참나무가 군락지를 이룬다. 소나무는 거의 보이질 않고...

늦여름 같을때면 이런곳은 노루궁뎅이 버섯이 좀 나올 장소 같은데...

능선을 넘어가는데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배가 고파온다.

능선 안부의 장소에서 점심밥상을 편다. 점심이래야 라면 달랑 2개다.

방초님은 보온 도시락을 싸오셨다... 라면 2개를 끓여서 막걸리 한병과

백세주 한병을 비우고 나홀로 산행에선 상상도 못할 1시간 을 넘기면서

식사와 휴식을 취한 다음에 베낭을 메고 써래봉으로 향한다.

저 멀리 경천저수지(완주군 경천면 소재)가 보이고...

인근 대아리 저수지에 비하면 규모는 적으나, 총저수량이 12309m2로서 관계면적이

 42.6km2에 이르고 있다.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어족이 풍부하여 여름철에는 피서객이

 많고, 일년내내 강태공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곳 운제리(雲梯里)는 옛운주 고을터이며,

성지(城址)들이 남아 있다. 운주는 백제시대때 지벌지현(只伐只縣)이라고 불렸고,

신라통일후에는 운제현(雲梯懸)으로 되었다가, 고려E에는 전주에 합해지고, 조선조에는

고산현에 편입되었다.특히 봄철이면 저수지 아래에 있는 벗꽃이 만발하여 상춘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경천저수지의 물줄기는 천호산에서 흘러나오는 화평천이 고산천에 합수되어 만경강의 수자원이 된다고 한다.

멋진 암릉으로 이뤄진 써래봉이 보인다.

멀리서 보니  북한산에서 바라본 오봉 비슷한 느낌을 준다.

줌으로 살짝 당겨서 본 써래봉의 모습

가운데 오똑 솟은 봉수대산 뒤로 아직도 雲長山群이 보인다.

멋진 안부능선에서 금남기맥 仙景에 취한 범여

 이 역마살은 언제까지 이뤄질 것인가?

써래봉 가는 암릉 능선에 올라서니 갑자기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 써래봉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맥길에선 사람 만나기 힘든데...

안부 능선에서 바라본 경천면의 계곡모습

운주면쪽의 산그리메

저 멀리 대둔산과 그 능선으로 연결된 충남 금산에 있는 서대산도 보인다.

식사를 마친뒤라 그런지 써래봉 갈림길 가는 길은 힘이든다.

방초님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걸으니 훨씬 힘이 덜드는 느낌이다.

기맥길에서 바라본 써래봉의 모습

써래봉은 논밭을 고르는 농기구의 하나인 써래발처럼 암봉이 뾰쬭뾰쬭하게 솟구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끄러운 낙엽길을 힘들게 오르니 써래봉 갈림길에는 목포에서

오신 산악회에서 등로를 완벽하게 점령(?)하고 있었다.

전라도 사람들의 후한 인심

써래봉 갈림길에 오르니 20여명의 등산객들이 써래봉을 왔다가

이곳 능선 갈림길에서 점심상을 펼치고 있다.  우리가 올라서니

반갑다고 하면서 술한잔을 권한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랴.

그 자리에서 독한 담근 술을 연거푸 2잔을 마신다.

조금전에 마신 백세주와 막걸리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기다가 배추잎에 과메기 그리고 이것저것을 자꾸만 권한다.

산꾼들의 음식인심 참으로 대단하다... 잘먹고 간다는 인사를 남기고

베낭을 벗어놓고 기맥길에서 15분정도 떨어져 있는 써래봉으로 향한다.

써래1봉의 모습

써래봉 갈림길에서 써래봉 가는길은 암릉의 멋진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아래로 우회하는 길이 있긴 하지만 자칭 정통 산꾼이

우회하면서 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전에 마신 술로 인하여

혹 실수를 할까싶어 바짝 긴장을 하고 암릉을 곡예하듯 걷는다.

이곳에는 엄청난 낭떠러지라서 발한번 헛디디면 그대로 황천길이다.

써래봉 능선에 올라서니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이 한 눈에 조망된다.

저 끝의 운장산과 연석산 그리고 맨 좌측의 구봉산도 보이고

그 앞으로 싸리봉과 성제봉... 702고지와 우측의 운암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암릉구간을 로프를 타고 곡예하듯이 올라서니 써래봉이 나온다.

북쪽으로는 대둔산과 천등산도 보인다.

대둔산의 아주 옛적인 이름이 한등산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백제시대에  대둔산과 천등산에 군사를 천명씩

올려보내서 전투를 하였는데 나중에 전투가 끝나고 내려오니

천등산의 군사는 천명이 다 살아서 내려왔는데 대둔산의 군사는

한명만 살아서 내려와 이 지역 사람들은 한동안 한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무속인들은 대둔산보다 천등산이 기가세고 효험이 있다고 하여

천등산에서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강희진 기사님의 口傳 내용)

써래봉(660.0m:14:00)
전북 완주군 경천면에 자리잡고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돌무더기가 있고 거기다가 누군가가 써래봉이라고 메직으로

써놓았는데 그것마져 희미하여 잘 보이질 않는다.


써래봉은 논밭을 고르는 농기구의 하나인 써래발처럼 암봉이

뾰쬭뾰쬭하게 솟구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이름과 형상이 내장산에 있는 써래봉과 비슷하다.

정상에 올라서면 북으로 선녀봉. 대둔산. 천등산. 진악산, 동으로 칠백이고지,

 성치봉, 803봉, 남으로 봉수대산, 주줄산(운장산), 연석산. 운암산 등이

 사방에 빼곡이 자리잡고 첨첩산중을 이루고 있어, 눈앞을 가득 채운다.

특히 산행 등기점이 되는 구제마을에서 신흥마을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흥계곡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의 옥류와 수려한 주변환경은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특히 가을 단풍이 옥류와 어우려져 비경을 자랑한다.

써래봉 정상의 변화무쌍한 암릉지대와 스릴 넘치는 등산코스가 산행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선녀남봉(14:15)

써래봉 갈림길로 돌아와서 북쪽 능선 안부를 걸으니 지도상의

선녀남봉이 나타나고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선녀봉이 보인다.

다시 편안 안부길을 걸으니 돌담같은게 나오고 헬기장이 나타난다.

선녀봉 갈림길(14:20)

선녀봉 갈림길에는 용도가 폐기된 듯한 헬기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선녀봉 가는 길이다. 이곳 선녀봉으로도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지 산악회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선녀봉을 가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여유를 부린 탓인지

선녀봉을 갔다오면 아무래도 오늘의 날머리인 말골재까지 가기는

무리일것 같아서 쎄래봉 갔다온 것으로 만족하고 1km의 거리에 있는

선녀봉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직진의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선녀봉 갈림길에서 바라본 운주면 금당리의 모습

대둔산, 천등산 그리고 그 너머 금남정맥길의 바랑산과 월성산도 보인다.

용계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선녀봉(仙女峰:665.9m)의 모습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 있는 봉우리로 산이름이 선녀가

신선들과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나무꾼이 선녀탕에서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 슬그머니 옷을 감춘 것이 인연이 되어 선녀와 백년해로하고

아이까지 낳아 서로 사랑하고 행복한 생활을 해오다가 어느날 선녀의 옷을 그 아내에게 내어 주었더니

그 옷을 입고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는 나무꾼과 선녀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설화의 본고향!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 용계천의 호젓한 계곡의 선녀탕과 선녀봉이 바로 이 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이 산은 바로 서쪽의 '숲속의 빈터'라고 불리는 내궁동계곡 건너편 금당리의 선녀봉(666m)과 마주보고 있는

고당리의 선녀봉으로 봉우리의 생김새가 마치 처녀가 잉태한 모습과 같다하여 선녀봉이라고도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하늘과 땅밖에는 보이지 않은 이곳 두메산골! 과연 선녀와 나무꾼이 만나 오붓하게
 사랑을 속삭일만도 한 곳이다.

협곡지대라 홍수가 날 때 소 장수가 소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가 소가 그만 계곡 소(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자

괴물이 나타나 소를 잡아 먹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선녀봉은 운주에서 용계원과 활골을 거쳐 고당리로 가는 도중 탄형성으로 갈라지는
3거리 못 미치는 곳에 위치하여

길 건너 북쪽의 천등산, 서쪽의 대궁동계곡 건너의 금당 선녀봉, 동남쪽의 선야봉, 남쪽의 칠백이고지 등 사방 높은

산으로 둘러 싸인 비좁은 곳으로 암벽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계곡물과 함께 오염되지 않은 주위의 환경이 뛰어나게

아름다우며 이곳은 등산보다는 가을단풍의 명승지로서의 탐방객이 더 많이 몰려든다.금남정맥 산행때 정확히 보지 못했던 천등산은 오늘 확실히 보여준다.

 

천등산(天燈山,706.9m)은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산으로서 바로 옆에있는

대둔산의 명성에 가려 빛을 못보지만 대둔산못지 않은 명산이다.


천등산의 유래가 흥미롭다.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우려고, 천등산 기슭에

용계산성을 쌓고, 적군과 싸우고 있는데, 대둔산에 용굴에 있는 용이 닭이 우는

소리를 내고, 천등산의 신이 환한 빛을 내비쳐서 견훤이 승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늘의 등이라는 뜻으로 한자로 하늘천(天), 등불등(燈)을 써서

천등산으로 부르게되었다. 그리고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천등산 주변에는

 용계산성을 비롯한 신복산성과 700고지 산성 등 3개의 산성이 있는데,

위급할 때, 또는 마을간에 긴급한 연락이 필요할 때에는

 이 산성에 불을 놓아 서로 연락을 취하는데 이용했다고 한다.

선녀봉 갈림길에서 용계재까지 고도를 400 이상을 낮추어서

급경사의 길을 내려간다.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속을 걷기도 하고

칼날처럼 뾰족한 암릉을 걷는 묘미를 맛보면서 고도를 낮추니

꽤나 넓은 비포장 도로인 용계재가 보인다. 서서히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누군가 소원을 빌면서 바위위에 돌탑을 쌓아놨다.

용계재(龍鷄峙:15:15)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와 경천면 가천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 아래로는 740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조선조에는 용게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에는 용과 닭의 관련된 지명이 많다. 대둔산과 천등산이 경계로되어있는

17번 국도와 나란히 흐르는 옥계()원장선에서  장선리까지 지명중에

용계천(龍鷄川). 용계성(龍鷄城). 용계재(龍鷄재).용계원(龍鷄園) 모두가 천등산의

유래에서  용이 닭소리를 내었다는 전설과 무관하지 않은것같다

 

견훤이 등불(天燈山)과 닭소리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설이 있고 고산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조선조에 용계원이 있어서 부른 모양이다.

이 재 아래에는 용계천이 흐르고 있다. 고개 정상에는 사각정자가 있다.

정자 아래의 까만 비닐봉지에는 젠틀맨이 숨겨둔 소성막걸리와

안주로 인삼뿌리가 있다. 목마르던 차에 어찌나 반가운지...

방초님과 함께 막걸리를 따서 한잔 마시려는데 바로뒤에

산꾼 한명이 우리를 뒤따라 온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용계재에서 만난 ‘청산가는 길’님

우리보다 늦게 작은 싸리재에서 출발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산꾼들 사이에 블로그에서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인데 서로의 닉을 확인하는 순간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청산가는 길”이라는 분인데 가끔 내블로그에 놀러 오시는 분이다.

참으로 반갑다. 젠틀맨님이 숨겨둔 막걸리를 한잔하고

그 분은 먼저 출발하고 나는 방초님과 여유롭게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간다.

불명산 오르는 길은 막걸리 한잔을 했더니만 훨씬 수월한 느낌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이 주마등처럼 보인다... 좌측의 선녀봉도.

급경사의 오르막을 가뿐 숨을 몰아치면서 힘겹게 오른다.

저녁이 되어가니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약간의 한기를 느낄 정도로...

능선을 치고 오르니 선답자의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다.

능선 정상에는  봉수대터처럼 꽤나 높은 돌담이 쌓여있고

그 돌담사이로 완주 불명산이란 나무펫말이 내팽겨져 있다.

불명산(佛明山,480m:)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운주면 장선리, 금당리에 경계에 있는 산이다.
불명산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밝혀주는 곳이라는 뜻에서 부처불(佛),
밝을명(明)을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명산(佛明山,480m:)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운주면 장선리, 금당리에 경계에 있는 산이다.
불명산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밝혀주는 곳이라는 뜻에서 부처불(佛),
밝을명(明)을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명산을 확인하고 우측으로 꺽어져 기맥길을 이어간다.

불명산 자락에는 멋진 암릉이 이어지고 암릉이 위험하여 우회를

하여 기맥길을 이어서 가는데 낙엽과 산죽 군락지를 지난다.

다시 편안한 능선을 우측으로 계속 이어간다.

시루봉 가기전에 다시 무명봉이 하나 볼록하게 산꾼의 눈앞에 나타난다

가야할 시루봉도 보이고...

봉우리를 힘들게 올라서니 이장한듯한 묘지의 흔적이 보인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호젓한 산죽 군락지를 걸으니 다시 오르막이 나오고...

다시 오르막길이 나오고 출입금지 표지판이 나온다.

아마 이곳은 화암사의 뒷산인듯 싶다... 다시 오르막길을 오른다.

우측의 금당골 내려가는 길과 좌측으로 유명한 화암사 가는 길인데

이정표가 땅바닥에 내팽겨져 있어서 보기가 영 좋지를 않다.

이곳 아래에 있는 화암사의 자료를 찾아보기로 한다.

화암사(花巖寺)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자리잡은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김제 금산사의 말사로서,

원효와 의상이 유학한 후 수도했다는 기록으로 봐 신라 문무왕 이전에 개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진성여왕 3년(694년)에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설총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정유재란 때 피해를 당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중건돼 오늘에 이르렀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제10호)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제289호) 등에 이어

전라북도 내의 12번째 국보가 됐다.

 

화암(花巖)이란 이 사찰의 반석위에 하얀 모란이 피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 모란꽃은 관음조가

물고 와서 뿌렸다는 설과 모란꽃에서 비친 서광이 당나라가지 뻗어 당나라에서 이곳까지

사신을 보내 그 꽃을 따오게 하여병든 공주에게 먹여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중창비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의상대사, 윤필거사와 같이 이 사찰에 머물며,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300년 전 신라 진덕여왕 3년(649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은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쓰고 선조 5년(1572년)에 세워졌으나

비문이 상당히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비문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성달생(成達生)이 사찰을 지을 터를 물색하여

세종 7년(1425년)에 산 좋고 물 맑은 화암사를 중창했다고 한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完州 花巖寺 極樂殿:국보 제316호)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칸 뒤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 닫집

화암사 극락전 외부 전면 공포

 완주 화암사 우화루 (完州 花巖寺 雨花樓)

 우화루는 화암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화암사 중창비 전북시도유형문화재 제94호

중장비 비문에는 조선조 태종 17년(1417년) 전라도 관찰사인 성달생이 절 하나를 세우고자하여 

절터를 물색하던 중, 세종 7년(1425년) 화암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에 성달생은 화암사 주지였던 해총(海聰)스님을 찾아 뵙고  뜻을 전하니 해총스님도 쾌히 승낙해 화암사를 중창했다는 것이다.

 

당시 화암사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오간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또 화암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수십길의 절벽과 폭포가 있었으며 폭포 옆절벽사이로 한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게 트여

있었다고 한다.

시루봉(427.6m:16:20)

완주군 운주면 장선리와 경천면 가천리의 경계에 있는봉우리로 시루봉은 떡시루 모양으로

생긴 뜻에서 이름이다. 시루봉을 중심으로 장선리재와 용계재 사이에 반달형태로 여러개의 연봉들이

줄지어 있고, 남쪽 산기슭은 울창한 숲에 둘러쌓인 천년고찰 화암사가 있다.

시루봉 삼각점

시루봉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시루봉을 내려서니 능선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능선 중간을 따라 내려간다.

장선리재(220m:16:40)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에서 운주면 장선리를 넘는 고개의 비포장도로로 코너로

굽어지는 넓은 안부가 나온다.  길을 건너 다시 고도를 높혀서 올라간다.

장선리재를 바로 건너 다시 능선으로 치고 올라간다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올라간다. 태풍으로 넘어진 나무를 지나 고도를 높인다.

대둔산과 천등산의 夕陽

대둔산(좌)과 천등산(우)에 석양의 그늘이 지기 시작한다.

그 아래의 장선리 마을은 한가롭기만 한데 석양을 바라보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면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견현이 나라를 세우기위해 이곳에 숨어있을적에 한밤중에 적군이 처들어오는것을 연못에

용이 닭울음소리를내어 일어나 물리치고  견현이 진주성을 칠때 산신령이 등불을 밝혀주어

승리하여 후백제를건국하였다하여 천등산(天燈山)이라 한다고한다

대둔산 도립공원에속해져있는 천등산은 대둔산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수있는 전망대이며 

부드러운 육산과 정상부근의  암봉과 암능 기암 괴석들 옥계천과 용계천의 둘려쌓인

아름다운 조망은 어느 큰산에 못지않게 모든것을 고루갖춘 명산이다.

암봉으로 오르는 길은  톱니처럼 생긴 암릉에다가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불명산과 시루봉의 줄기들이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천년고찰 화암사를 포근히 감싸고 있고 그 너머의 써래봉도 아련히 보인다.

용계재로 연결되는 740번 지방도가 산허리를 휘감으며 돌아가고 있다.

다시 급경사를 치고 오르며 암봉을 계속 오르내린다.

암봉 오름길은 로프도 없어서 곡예를 하듯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암봉(460m:17:10)

암봉을 어렵게 치고 오르니 다시 내리막을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고

계속되는 오르내림에 갑자기 체력이 확 떨어지는 느낌이다.

해는 서산으로 기우는데 마음만 급해진다. 이를 악물고 걷는다.

급하게 내려섰다가 다시 뾰족한 농바위를 치고 올라간다.

내려다보는 마을에도 석양의 그늘이 비치기 시작한다.

능암산(陵巖山:475m:17:20)

힘들게 암릉 봉우리를 치고 오르니 아무런 표식판도 없다.

자세히 보니 노란 띠지에 어느 산꾼이 “농바위(미륵산) 서봉이라고 적어놨다.

아마 이 지역을 잘아는 산꾼인 모양이다. 그런데 2개의 봉우리중에 이곳은

서쪽이 아닌 분명히 동쪽에 있기에 동쪽이 맞지않나 싶다.

 

본래 '능'이란 왕의 묘를 의미하는 것이다. 때문에 '능바위'란 지명은 납득이 가지 않으며 이는

 '농바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농'은 옛 날 버들 채나 싸리채로 함같이 만들어 종이를

바른 상자를 말한다. 능바위산의 우뚝 솟은 바위들은 옛날 농의 채처럼 켜켜이 포개져 절벽의 층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농처럼 생긴 바위'라는 뜻에서 '농바위'라 불렀으며 이것이 '능바위'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전국 각지에 '농바위'란 지명은 흔하게 널려 있다.

전국의 농바위란 지명처럼 이 산도 '농바위'가 맞지만 현지 주민들이 부르는 명칭을 존종해 '

능바위산'으로 정했다. 475m의 능바위산은 두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서족과 남쪽은 천길 낭떠러지며 바위들을 켜켜이 쌓은 것처럼 보여 신기하다.

특히 이 바위들 사이에 자라는 나무들은 능바위산의 색다른 면을  보여준다. 능바위산은 전면의

바위 층 사이에 나무가 자라고 있어 바위와 나무가 구분되지 않는다. 아주 무성한 것은 아니지만

봉우 리를 나무가 덮고 있다. 때문에 능바위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암봉 같지 않은 것이다.

두 암봉 가운데 서쪽 봉우리가 주봉이며 사방  어느쪽에서 올라도 매우 험하고 가파르다. 또한 서봉과

동봉 사이는 깊은 잘록이를 이루고 있어 두 봉우리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도 상당히 힘이 든다.

(이 지역 산꾼인 소머즈부부님 블로그 인용)

능암산에서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갔다가 급경사의

절개지 암릉을 네발로 엉금엉금 기다시피하여 미륵산으로 향한다.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고 건너편 산허리로는 운주와 양촌면에서

완주군 화산면으로 연결되는 17번국도 산허리를 휘감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는 임진년 시월 초닷새날의 상현달이 뭣이 그리도 급한지

해가 완전히 지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갈길 바쁜 산꾼을 심란하게 한다.

해는 서산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봉우리에 올라 미륵산의 표시석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맨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미륵산의 표지는 보이질 않는다.

미륵산을 찾아 능선 끝까지 갔는데도 보이질 않고 그 대신 산불감시 카메라만 만난다.

그리고 말골재로 내려가는 길로 되돌아오니 거기에서 미륵산 표지기를 만난다.

미륵산(彌勒山:476m:17:30)

전북 완주군 경천면과 운주면 사이에 있는 미륵산은 뾰족한 암릉사이로

멋진 소나무들이 분재처럼 있고 정상에 서면 대둔산을 비롯해 주위 전망이

그야말로 일망무제인 멋진 곳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청정지역으로 남아있다.

능선 끝부분에는 완주군에서 설치한 산불감시 카메라만 외로운 산꾼을 반기고 있다.

 

미륵(彌勒)이란 용어는 보살의 몸으로 천(兜率天)에서 머물다가 미래에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 대승 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이다.

미륵은 사랑과 자비의 부처로 자씨불(慈氏佛)이라고도 한다.
 
미륵은 도솔천에 살며,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미륵산에서 말골재를 향하는 곳은 엄청난 급경사이다.

거기다가 낙엽이 수북하여 엄청나게 미끄럽다. 이젠 해는 완전히 지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베낭에서 헤드렌턴을 꺼내서 켜고

아침에 탔던 택시기사분에게 18시까지 말골재를 와달라고 전화를 하고 서둘러

길을 내려오니 말골재는 짙은 어둠에 깔려있고 기사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말골재(200m:馬骨峙:17:55)

전북 완주군 경천면과 운주면을 잇는 17번 국도상의 고개로 말골재는 옛날 천등산부근 마을에서 애기장수가

탄생했는데 그가 훗날 집안에 액운을 갖다주고 대(代)를 끊어 놓을 애라고 하여 그 부모가 그를 무거운 돌로 눌러 죽였다한다.

런데 그가 죽고 나서 3일이 지난 뒤 갑자기 용마(龍馬) 1필이 나타나더니 울부짖으며 애기장수를 사방으로 찾아다니며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이 고개에 떨어져 죽었다하여 마골치(馬骨峙:말골재)라고 불리었는데 변음이 되어 말골치라고 부른다.

 

말골재에서 아침에 타고온 택시를 호출하여 10분만에 양촌면 버스 정류장에 와서 대전가는 버스표를 구입한

다음에 도로변 으슥한 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니 마음이 한결 푸근한 느낌이다.

양촌(논산시 소재)에서 대전 서부터미널 가는 버스표(18:30)

버스에 오르니 갑자기 배가 고프다. 오늘 동행한 방초님과 함께

베낭에 남은 도라야끼 2개와 베지밀, 그리고 밀감을 먹고나니

배가 든든하다. 저녁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밀린다.

계룡시를 지나서 터미널에 도착하여 서둘러 택시를 타고 서대전역으로

향한다. 10분만에 서대전역에 도착한다(택시비 2,800원)

서대전역(19:30)

서대전역에  도착하여 표를 예매하는데  좌석은 없고 입석인데 금새 열차가 들어온다.

오랫만에 만난 방초님에게 저녁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이 되지 않으니...

열차에 오르니 열차는 입석 손님도 가득하다. 식당칸은 발디딜틈도 없다.

할 수 없이 식당칸 입구 화장실 앞에 간이의자를 펴고 앉아서 영등포로 향한다.

서대전발 영등포행 무궁화호 열차표(19:41)

19시 41분에 서대전역을 출발하여 영등포에 도착하니 21시 35분이다.

영등포에서 방초님과 헤어져 40분만에 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마치고

한 구간을 마친 성취감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