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2년 12월 09일
☞산행날씨: 아주맑음, 오후늦게 흐림/ 올들어 가장 추운날씨, 체감온도 -15
☞산행거리: 도상거리 22.4km(어프로치 1km포함) / 10시간 30분소요
☞참석인원: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둘이서
☞산행코스: 고내곡재-350봉-태백이산-누항재-석회폐광-천호산-440봉-갈매봉 초소-문드러미재
호남고속도로-148봉-양동재-쑥고개(1번국도)-삼각점봉-용화산-돌탑봉-228봉
다듬재(아리랑고개)-미륵산성-미륵산 장군봉-142봉-옥수도예-포장도로-삼기가든-석불사거리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연무읍 / 전북 완주군 화산면, 비봉면
익산시 여산면, 왕궁면, 금마면, 낭산면,삼기면
눈이 많이 내린다는 大雪이 지난 7일... 올해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양의 눈이 내리면서 몰아닥친 한파는 가뜩이나 움추려든 사람들의
맘을 더 움추려들게 만드는 것 같다.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로 인하여 찬공기를
마시면서 현장에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나도 4년만에 심한 감기가 찾아온다.
머리가 심하게 아프면서 목에 피가 나오기까지 한다
집에서는 이번주는 집에서 푹쉬라고 하지만 그러나 경험상 감기는 산에 한번만
갔다오면 나을것 같아 오늘도 베낭을 메고 탑승지인 영등포역으로 향한다.
2주전에 해장국집에서 푸대접을 받은 좋지않은 추억 때문에 집에서 저녁을 먹고 떠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영등포에서 논산가는 20시 32분발 무궁화 열차 티켓
영등포역 전철에서 내려 3층의 열차 대합실로 향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년말에 이곳에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구세군에서 하는 이것은 참으로 잘하는 것 같다.
종교를 초월하여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행사... 참으로 고맙다.
요즘처럼 민초들의 삶이 팍팍한 시절에 말이다.
열흘후면 제18대 대통령 선거인데... 이번 대선에는 정책선거는 실종된 듯하다.
각 후보들은 국민들에게 어떻게 하겠다는 공약보다는 표를 얻기위해
상대방에 대한 네거티브와 민초들에게 실천하기 힘든 감언이설로 표를 얻어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전 정책토론이라고 방영된 방송에서 모 야당의 여성후보의 돌출행보는
과연 대한민국의 대통령 후보인지 의심케한다.
국민들을 알기를 장기판에 卒만큼도 안 여기는 그런자를 토론에 참석시키다니...
우리나라 국민의식은 90점에 가까운 점수인데 정치인들은 20점도 안되면서 말이다.
당신네들이 한게 뭐있는가?... 하긴 있지 당신네 세비인상과 보좌관 확대는 만장일치더군.
제발 정신들 좀 차리고 일 좀합시다.
하긴 가난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고 했지만
조금만 배려하고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듯 싶은데...
누가 저 할머니를?
역 대합실에 올라가서 화장실에 들렸다가 나오니 보따리를 깔고 앉은
할머니 한분이 참으로 안쓰러워 보인다. 이곳 영등포역에는 워낙
노숙자가 많긴 하지만 할머니가 너무나 측은해보여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호빵 2개와 따뜻한 두유 한병을 갖다 드리니 근방
옆에 있는 남자 노숙자가 와서 호빵 하나를 뺏어가 버린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지키면서 두유와 빵을 다 드시는걸 보고서
대합실로 향하는데 영 마음이 편치는 않다. 이 엄동설한에 말이다.
2주만에 동료산꾼 젠틀맨을 만난다.
그런데 2주전에 고내곡재에서 논산 나오는 버스에서 만난 이 선생님이
전화가 왔단다. 당신집에서 자고 아침먹고 고내곡재까지 태워 줄테니
꼭 오시란다. 당신이 우리가 내릴즈음 논산역까지 나오시겠단다.
이렇게 고마울수가... 그러나 남한테 민폐 끼치는게 싫어서 찜질방에서
자고 아침에 버스타고 고내곡재 가자고 하니까, 너무 간곡한 바람에 승락을 한다.
시간이 다되어서 열차 승강장으로 내려오니 어찌나 추운지
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목이 아파서 목도리를 하고 열차에 오른다.
열차에 올라 젠틀맨이 사가지고 온 오징어땅콩에 캔맥주 하나를 마시면서
2주만에 만난 회포를 푼다. 흔히들 남자들끼리 모여 군대 이야기를 하면
밤새도록 한다고 하지만 일반 등산객이 아닌 정통 산꾼들끼리 모여서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2박3일을 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특히 기맥, 지맥같은 곳을 독립군(나홀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면서 각종 산행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편이다.
젠틀맨과 만나서 늘 하는 주제가 산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어느덧 논산역에 도착한다.
논산역(22:58)
논산역에 내려 대합실로 나오니 2주전에 만난 이선생님이 나와 계신다.
염체불구하고 차에올라 자택이 있는 연무읍으로 향한다.
이곳도 눈이 참 많이와서 도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30여분만에 이 선생님 자택에 도착한다.
선생님은 원래 고향은 수원이시고, 5년전에 교직에서 명퇴를 하시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농가주택을 하나 구입하여 혼자 사신다고 한다.
사모님은 대전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들과 함께 계신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축구와 테니스를 즐겼는데 축구선수 시절 다친 다리 땜에
산행을 잘 못하시고 그 바람에 전국의 산을 헤매고 다니는 우리가
딱 걸렸다(?) ㅋㅋㅋ 우리를 너무 부러워 하신다.
자택에 도착하여 선생님이 농사 지은 알타리 김치와 캔맥주 5개 소주 1.5병을
가지고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새벽 1시30분에 잠이든다.
너무나 고마운 이 선생님!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이 선생님이 우리의 밥상을 차린다.
커다란 컵라면 하나에 잡곡밥에 어제 저녁에 너무 맛있게 알타리무 김치에다
아침밥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화목 보일러에서 구운 고구마를 호일에
싸서 주시면서 산에서 먹어라고 주신다. 그리고 차를 몰아서 고내곡재로 향한다.
이곳 논산은 밤사이에 눈이 꽤나 많이 왔다. 도로에는 눈이 가득하여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고내곡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07시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이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것 같은데.
이 선생님같이 이런분들이 계시기에 아직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걸 느낀다.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늘 건안하시고 복받으시기 바랍니다.
고내곡재 버스 정류장(07:00)
해가뜨기 직전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춥다.
장비를 점검하고 스패치와 아이젠을 착용하는 사이에
손가락이 완전히 빠져 나가는것처럼 손이 시렵다.
다시 손을 손난로로 녹인 다음에 1km 가량되는 고내곡재로 향한다.
이곳은 논산 연무읍에서 완주군 화산면을 넘는 22번 군도이기 하지만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아예 차량통행이 불가하다. 등산화 발목끝까지 눈이 찬다.
어제밤에 이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교통편이 없어서 산행을 포기할 뻔 했다.
고내고개 올라가는 도로에서 바라본 고내곡 저수지와 고내곡 마을
고내 저수지는 수철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수철천은 논산시 연무읍 고내저수지에서 발원하여 황하천에 합류하는 하천지방 2급하천으로 본류는
금강이며, 제1지류는 강경천, 제2지류는 마산천, 제3지류는 황하천이다. 유로연장은 3.1㎞이고,
유역면적은 5.15㎢이다. 수철천은 연무읍 남동쪽에 위치해 있는 고내리 고내못이 위치해 있는
소규모 분지에서 발원하여 북서 방향으로 흘러 마산천과 합류한 후 강경천에 유입된다. 상류부의
고내곡마을과 고내곡를 제외하곤 대체로 구릉지 및 평지로 둘러싸여 있는 하천으로, 주변의 구릉지에는
고내곡·옹정·보성·외평·신평·고분·장골 등의 자연마을이 입지해 있다.
고내곡재(高內谷:07:30)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와 전북 완주군 화산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22번 군도가 지나간다.
북쪽은 소룡고개외 함박재로 이어지며 서쪽은 성삼재와 화산재로 이어진다
고내곡재는 성재또는 고내골재라고도 부르며, 옛날에는 산적들이 웅거(雄據)하여 이 고개를 넘어가는
행인들을 괴롭히기도 했다고 한다. 6.25때는 이곳의 골이 깊어서 연무쪽의 사람들이 피란지이기도 하였단다.
논산시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논산시와 전라북도 완주군, 충남와 전북의 행정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이다.
고개는 논산시와 완주군을 연결하지만 주요 도로는 지나지 않고, 기타 도로가 고개를 관통하여 완주군 화산면을
통과하는 지방도 740호선에 이어지고 있다. 고개 서쪽에는 고내곡이 있는데, 이곳에 고내곡저수지가 있다
고개 정상 우측에는 커다란 당산나무 한그루에 무속인이
굿을 하였는지 나무에다 각종 색깔의 천을 감아 놓았고
2주전에 있던 당산나무 앞에 있는 텐트는 눈에 폭삭 내려 앉았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바람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다.
이곳에서 화산면쪽으로 내려가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서 산행을 시작한다
도로개통 기념비와 안내문 표지판을 끼고 우측으로 접어든다.
온 산이 백색으로 뒤덮혔다
임도를 따라가니 잘 관리된 파주염씨와 청주한씨의 묘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묘지 봉분 뒤를 치고 오르면서 길이 없는곳에 나무를 헤치고 등로로 접어든다.
지난 구간에 지나온 범허리재와 함박봉이 보인다.
날씨는 너무 좋다. 동쪽에는 게으름을 피웠는지 해는 이제사 뜨기 시작한다 (08:15)
또다시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완주군 화산면의 산그리메가 보이고...
누가 대신 가주지 않는 이 기맥길 무소의 뿔처럼 나혼자 걸어간다.
멋진 상고대... 산은 역시 겨울산이 최고여!
이곳은 길이없고 능선 관리가 안되어 있어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거기다가 눈이 의외로 많이 쌓여있어 초반부터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다.
능선에서 바라본 고내저수지 너머 연무읍의 모습
이 나라 남자들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연무는 6·25전쟁이 끝난 후 육군 제2훈련소가 구자곡면
지역에 창설되고, 군인들이 훈련받는 곳이라는 뜻으로 연무대(鍊武臺)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가시 넝쿨에 뿌러진 잡목과 잡풀이 뒤엉킨데다가 눈이 많아 애를 먹는다
350봉(08:15)
이곳부터는 우측으로 금남기맥길에 여태껏 같이해온 논산시와 이별을 고하고
우측으로 새로운 전북 익산시 여산면을 맞이하고 좌측으로는 화산면과 계속 같이한다.
등로에 눈이 많이 쌓여 길이 거의 보이질 않으나 가끔씩 나타나는 시그널을 의지하면서 간다.
태백이산(08:30)?
전북 완주군 화산면과 익산시 여산면의 경계에 있는데
지도상에는 엄연히 태백이산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높이를 비롯해
그 어디에도 자료는 없고 정상에는 가시넝쿨만 가득하다
조그만 계곡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잡목을 헤치고 능선으로 오른다
망개열매가 외로운 산꾼을 유혹하고...
누항재(漏項峙:08:45)
전북 완주군 화산면 누항마을과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를 잇는 1차선
740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이 고개 근처에는 석회광산등이 있어서
'작은 독고개'라고 부른다 아마 뜻이 '작은 돌고개'인것 같고 근처에
돌광산이 있어 이름 붙여진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누항이란 이곳에 흐르는 물이 다른 곳에 비하여 역수하여 흐르며
샌다하여 누항이라 하였고, 한글로는 ‘샐목’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고 한다
누항재에서 바라본 화산면 누항마을의 모습
누하(漏下)마을이라고 부르는 누항마을은 완주군 화산면 누항재
좌측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로 마을에는 목장이 많이 보이고
골짜기 안쪽은 신양수양관이라는 커다란 종교시설이 보인다.
누항(漏項. 시어목. 시우목). 하호(下虎. 고산거리). 중리(中里) 누하는
누항과 하호에서 한 자씩 취한 분리된 마을로. 시어목은 누항의 본 이름으로
이 마을 물이 천호동굴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목(좁은 통)이라는 뜻이란다.
눈에 파묻혀 뭔뜻인지 해독할 수 없는 표지석도 보이도...
누항재로 올라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천호산 줄기로 접어든다.
50번 송전탑을 지나 희미한 등로를 따라 10분정도를 진행하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절개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원래 석회광산이었는데 천호동굴이 발견되어서 석회생산이
중지되고 원상복구공사를 한다는 펫말이 붙었건만 어느새
복구될 지 요원하게만 보인다. 급경사 암릉에 눈이 많이쌓여 발한번
헛디디면 단방에 황천길이건만 안전망은 물론 로프 하나도 없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네발로 기다시피하여 등로 아래로 내려선다.
천호동굴(天壺洞窟:08:55)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위치한 동굴로서 1966년에 천연기념물 제177호 지정됐다.
길이 800여m로 약 2억 5000∼4억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호남지방에서
하나뿐인 석회암동굴이다. 굴 안의 냉기가 대류(對流)하여, 춘분 후에는 바람이 구멍에서
나오고, 추분 후에는 바람이 구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시로 은은한 뇌성이 울리는
듯하다. 속칭 ‘바람구멍[風穴]’이라고도 하며, 종유석과 석순 등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입구에서 약 100 m 거리인 지굴(支窟:150 m)과의 분기점에서 다시 150여 m를 들어간
곳에 있는 水晶宮이라는 광장은 거대한 석주.석순.地下泉水 등이 어울려 장관이다.
東國輿地勝覽에도 이 동굴에 관한 기록이 있다.
1965년 황성호(黃聖浩)목사에 의하여 발견된 굴이라고 하며 천연기념물 제 177호로 지정되었으나
현재는 완전 방치 상태에 있다.
석회동굴 아래는 복구가 안 된채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상당히 위험하다
호남고속도로 건너편에는 용화산과 미륵산이 보인다.
계산상으로는 5시간 후면 도착한 산이건만 오늘처럼 춥고
눈이 많을땐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부지런히 가야겠지
천호산 오름길은 등로에 눈이 몰려 있어서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길은 잘 보이지 않으나 두발달린 짐승이 산꾼을 안내한다.
이 넘들은 참으로 기특하다... 님들도 눈길에 행여 길을 잃어시거든
무조건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도로가 나오는 것을 참조하시길...
이곳 천호산 오름 중간부 아래에 여산'송'씨의 시조묘역으로 우암 송시열선생의
묘도 있다 하는데 눈덮인 산길에 어디가 어딘지 확인할 길이없다.
호남의 8대 명당중의 하나인 여산송씨의 시조 묘
익산군 여산면 호산리 외사마을의 천호산자략 유점저수지 부근은
여산 송씨 시조인 송유익의 묘가 자리를 잡고있다.
송유익은 고려말 송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호산군(壺山君)에 봉해진 공신이다.
그의 묘역은 호당의 8대명당으로 알려져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곧잘 찾는 곳이라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송유익의 묘터가 대둔산에서 흘러온
용맥이 천호산을 만들고 그 중심맥이 변화를 끌고 내려와서 다시 용이 일어서는
기룡혈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곳이다.
호남 8대 명당으로 『순창 인계면의 마명당(馬明堂),
순창 복흥면의 김병로 조상묘(祖上墓), 순창 복흥면의 노사 기정진 조부묘(祖父墓),
고흥에 있는 인촌 조모묘(祖母墓), 전주 이씨 조경단, 순천의 옥천조씨 시조산(始組山),
영암읍에 있는 신모씨 조부묘(祖父墓), 군산의 술산(戌山)』중에서 순창에 3개나 있다.
천호산 오름길도 잡목으로 인하여 길은 별로 보이질 않고
오르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상고대를 형성한 눈들이 옷속으로
들어오니 상당히 차갑다. 거기다가 찬바람이 불어대니 체감온도는 더 떨어지고...
오늘 아침부터 걸어온 능선을 뒤돌아 본다.
고내곡재. 350봉, 태백이산 누항재, 천호동굴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좋은 등로에 올라서니 온 세상이 은빛이다.
바로 아래에는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여산 휴게소도 보인다.
그 뒤로는 미륵산과 익산, 군산, 서천이 한 눈에 들어오건만
온통 은빛세상이라 어디가 어딘인지 도대체 구분이 잘되지 않는다.
어느 예술가가 이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런 작품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가지않은 저 길을 내발자국을 남기려니 괜시리 미안한 생각이 든다.
갑자기 백범김구 선생이 해방이후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담판하러 갈 때
자신의 각오를 서산대사의 시를 인용해서 피력한 바가 있다고 한
踏雪野中去 라는 서산대사의 詩가 생각난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에는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 (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후세들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눈속에 파묻힌 기독교공원 묘지를 지나서 다시 고도를 높인다.
묘지를 지나 편안한 안부 능선으로 오르니 성채굴과 미사굴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은 천주교 성지순례코스인 모양이다.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에서 만난것처럼...
천주교는 내 전공이 아니라 잘 몰라서 자료를 찾아보니...
여산순교성지(礪山殉敎聖地)는
여산면 여산리 숙정이는 병인박해로 숨진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피가 묻어 있는 성지이다.
여산 관아에서 형벌과 굶주림으로, 백지사형(白紙死刑 : 얼굴에 백지를 붙여 질식사 시킴)으로
죽어간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후세들이 축대를 쌓고 순교비와 백지사 기념비를 세워 성지를 조성해 놓았다.
천주교 전주교구의 제2성지라고 부르며 천주교 박해 가운데 최대규모였던 병인사옥
가운데서 가장 많은 신도가 순교한 곳이란다.
병인사옥 박해(1866년)가 일어나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1868년 순교한 곳으로 기록상 25명이나 그외 더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고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익산시 여산면의 모습
'춘향가'에서 어사또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갈 때 서리(書吏)와 역졸(驛卒)들에게
"전라도 초입(初入), 여산읍에 가서 기다려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전라도 초입이라고 한 여산읍이 바로 호남고속도로 여산 휴게소가 있는 여산면이다.
충청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오는 첫 길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여산(礪山)은 전라북도 익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여량(礪良)과 낭산(朗山)
두 현(縣)의 합명인데, 여량현(礪良縣:일명 礪良)은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을
신라 경덕왕이 여량으로 고쳤다.
낭산현(朗山縣)은 본래 백제의 알지산현(閼地山縣)인데 경덕왕이 야산(野山)으로 고치고
고려 때 낭산으로 하였으며, 1401년(정종 3) 두 현을 합하여 여산현(礪山縣)으로 칭하고
세종 때 군으로 승격, 1699(숙종 25) 부(府)가 되었다가 1895년 다시 여산군이 되고
1913년 익산군에 병합되어 그 일부지역은 여산면으로 남아 있다.
여산은 조선 초기만 해도 조그만한 현(縣)에 불과했다.
여산이 조선 초기와 중기 이후로 군(郡)과 부(府)로 승격된 것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성향(姓鄕)이라는 이유가 작용했다고 한다.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의 비(妃)였던 원경왕후(元敬王后)는
양녕,효령, 충녕, 성녕 등 4대군과 정순, 등 4공주를 낳았다.
셋째인 충녕대군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1436년 원경왕후의
외조부인 송선(宋璿)의 본관이라는 이유로 여산현을 여산군으로
승격시켜 충청도로 편입시켰다. 얼마후 전라도로 다시 환원된 여산군은
1699년(숙종25년) 부(府)로 승격되고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배치되었다.
숙종이 여산을 부로 승격시킨 이유는 단종(端宗)의 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성향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망좋은 곳에서 포즈를 잡아보지만 역광이라 사진이 영 엉망이다.
동료산꾼 젠틀맨님의 모습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등로를 치고 오르니 천호산성 표지판이 보인다.
천호산성(天壺山城:09:33)
천호산성은 천호산(해발 500m)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성의 축성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기록은 없고, 다만 여산 구지(礪山舊誌)에 의하면
천호산성은 부의 동쪽 십리에 있는데, 성 아래 용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호산은 익산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방어에 유리한 성으로 판단된다.
성의 외벽은 비교적 납작한 사각형 석재로 내탁과 협축 방법으로 축성하였다.
둘레는69m 이며 높이는 현재 잘 남아 있는 부분이 5∼6m 정도 남아있다.
주변에서 백제토기와 기와편이 수습되어 백제시대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천호산성(天壺山城)은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의 가장 높은 500m의 중봉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가 약 4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성이다.
산명에 따라 천호산성이라 칭하고 있으나, 속칭에는 태성(台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이 성은 속칭 농성(農城)이라고 하는데, 『조선고적조사자료』익산 여산면조에 의하면
"城址 礪山面 臺城里 天壺山城 壺山里國有林 全州郡界의 천호산 정상에 있으며, 석성으로서
周圍凡六町全部 붕괴되었으며 속칭 농성(農城)이라 칭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곳은 후백제(後百濟)와 고려군의 격전장이라고도 전하여 온다.
성곽은 폭이 약 4.4m로 비교적 넓게 성저(城底)를 잡아서 쌓은 석성인데 성벽의
북벽을 보면 치석(治石)한 석재를 써서 정교하게 축성(築城)한 것을 볼 수 있고,
봉수시설(烽燧施設)로 추정되는 원형의 유구(遺構)가 남아있다.
여기에서는 멀리 부여와 대전 남쪽의 면병산(綿屛山)이 바라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무주방면이 가리는 것 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전략적 요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의 높이는 약 2m인데 원래는 그 보다 더 높았다고 하겠다.
천호산 3등삼각점(논산314-1980재설)
천호산성 안내판에서 미끄러운 눈길을 치고 오르니 가장 먼저 삼각점이 반겨준다.
정상에는 커다란 헬기장이 있는데 마치 고글 스키장을 연상케 할만큼 여인의
젖가슴처럼 불록볼록 눈이 쌓여있어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정상에 머물지도 못하고 우측 능선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천호산 아래에 있는 천일사 주지스님이 나와 동대 불교학과 동문이라서 지난번
전화 통화를 하다가 천호산을 간다고 하니 꼭 들리라고 하였는데 오늘 갈길이 멀고
더군나 눈이 많아서 러셀을 하면서 산행을 하다보니 예상시간이 많이 걸려서
전화도 올리지도 못하고 그냥 천호산을 통과한다... 더군더나 요즘 불사로 바쁘실텐데.
천호산(天壺山,501.1m:09:38)
전북 익산군 여산면과 완주군 비봉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하늘천(天), 병호(壺)를 써서 속이 텅빈 산이라는 뜻이다.
천호산의 서북쪽에 호남에서 유일한 길이가 약 800m에 이르는 천호동굴(天壺洞窟)을 간직하고 있다.
성치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성치마을 윗쪽, 냇가에 구멍이 있는데, 비가 많이 오면 그 구멍속으로 냇물이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결국, 그 텅빈 구멍으로 스며들어간 물은 석회를 녹여 큰 동굴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며, 그래서 동굴이 있는 마을의
이름도 호산리(壺山里)이다.
천호산이 물줄기는 북서쪽은 여산천을 통하여 금강에 합수되고, 남쪽은 천호천을 통하여 만경강에 합수되어 모두
서해로 흘러든다. 천호는 천호산 남쪽 기슭에 있고, 성주산 기슭에는 성주 산제당이 있고, 천호공동묘지에는
오선지(吳善智)의 천주교 순교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봉면 주민들은 옛적에 천호산을 성주산으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여산면 주민들은, 이 산을 성태봉으로도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상
북서쪽에축성연대가 미상인 옛 성터(혹은 봉화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을 피해서 천호산 아래로 내려와서 벤치에서 5분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물을 마신다. 어제 저녁에 이 선생님과 기분좋게 마신
술 때문에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게 물이 많이 먹힌다.
잠깐 사이에 손이 빠져나갈만큼 손이 시리다.
체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서둘러 베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천호산 중간의 허리부분으로 나있는 천주교 성지길을 계속 만난다.
이곳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인 모양이다. 곳곳에 벤치들이 설치되어 있다.
천호산에서 우측 능선들을 타고 오르니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연속적으로 나온다.
산꾼들은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하는 이런곳을 가장 싫어한다.
잔펀치에 많이 맞으면 나중에 회복하기가 가장 힘들기에...
여기서부터 카메라에 문제가 생긴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만땅으로 충전해온
밧데리가 방전으로 인해 작동이 되질않고 가방속에서 꺼낸 세컨드 카메라도
작동이 되질 않는다. 참으로 난감하다. 옷의 가장 안쪽 주머니에 넣어서
따뜻하게 5분 정도를 하고나니 거짓말처럼 다시 작동을 시작한다.
전자기기도 상당히 추위를 많이 타는가보다.
헬기장(10:10)
440봉(10:20)
이곳이 천호산 남봉이라고 하는데 눈이 많이 쌓여서 무릎까지 파묻힌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봉천장여신(烽天張茹信)이라고 쓰여진 삼각점 같은 대리석 표시석이 있다고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호기심 많은 범여가 그걸 포기하고 다시 길을 걸어서 갈매봉으로 향한다.
이젠 카메라 작동 횟수를 줄여야겠다... 자꾸만 불안하다.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금남정맥의 산그리메가 시원스레 보이고 운장산도 보인다.
오늘 내가야할 능선들이 조망되고 그 너머로는 전주시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갈매봉(360m:10:35)
봉우리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데 하단부의 철제만 있고
윗쪽 지붕은 온데간데가 없다. 지난번 태풍에 날아가 버렸나?
이곳에서 다시 내리막길의 급경사를 치고 내려오니 임도가 나온다.
이런곳에 올 때 비료포대 하나를 가져올 걸 썰매장으로 끝내주는데 ㅋㅋㅋ
가야할 조그만 능선 너머로 호남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완주군 비봉면에 있는 수봉산도 보이고...
지나온 갈매봉의 모습
10분만에 임도를 내려오니 y자형의 임도와 만나고 간이 화장실이 있다.
이곳 천주교 천호산 여산성지 둘레길인 모양이다. 갖가지 표지판이 보인다
문드러미재(10:45)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와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를 잇는
741번 지방도가 통과는 고개로 고개위 능선에는 3개 이동통신사의
중계탑이 세워져 있고 익산 둘레길이 계속된다.
문드러미재의 유래는
산이 높아서 극난(極難)하고 예전 서울에서 옛 고산으로 올 때,
고개가 높고 고산으로 가는 문과 같다 하여 문드러미재라 한다고 한다.
도로로 들어서서 좌측으로 들어서서 비봉쪽으로 가다고 우측 능선으로 오른다.
문드러미재에 있는 이동통신사의 중계탑
편안 등로를 타고 오르니 낡은초소가 하나 나타난다.
혹 지나온 갈매봉에서 없어진 지붕이 이곳으로 날아오진 안을터이고...
다시 조금을 지나니 눈속에 파묻혀 편안 잠을 자고 있는 망자의 천년주택도 나오고...
이곳의 상고대는 정말 일품이다.
다시 조금 더 등로를 진행하니 뚜렸한 Y자형의 길이 나오고
육군부사관학교에서 설치한 독도법 코팅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90도를 꺽어져서 내려간다.
이곳은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조금을 더 진행하니 차량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호남고속도로가 나타난다.
미끄러운 철계단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가서 우측 절개지로 꺽어진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호남고속도로를 건너는 동물이동통로를 향한다,
호남고속도로(11:10)
광주에서 서울로 잇는 왕복 8차선의 시원한 호남고속도로가 보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를 가면 여산 휴게소가 나온다고 한다.
동물이동통로를 지나서 다시 절개지로 오르니 콘크리트 수로가 나온다.
아침 일찍 아침을 먹은 탓인지 점심시간이 아직 멀었는데도
배가 고파오기에 수로의 양지 바른 곳에서 밥상을 펴고 도넛 2개와
두유를 마시고, 젠틀맨이 가지고 온 치킨 다리 하나와 날씨가 넘
추워서 발렌타인 17년산 미니어츠 양주를 한잔 마신다.
햇빛은 따스하나 앉아 있어서 너무 추워 얼른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겨울 산행은 체온을 뺏기면 위험한 상태가 발생하기에...
수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우측으로 꺽어지니 알 수없는 표지판이 나오고...
148봉(11:55)
이곳도 육군부사관학교에서 설치한 독도 표지판이 있고 우측으로 뚜렷한
등로가 보이는데, 기맥길은 이곳에서 계속 직진하여 이어진다
양동재(12:20)
전북 익산시 왕궁면과 여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좌측에는 양동마을이 있고 799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양동마을 버스 정류소와 마을 표시석이 있다.
버스 정류소에서 좌측으로 조금 내려가니 양동마을 표시석이 나오고
왼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양동마을 표석과 慶州崔氏 敬慕齊와 延安李氏 世阡碑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여산면 쪽으로 넘어가니 도로변에 멋진 가옥이 2채가 있다.
이곳은 아마 예술가의 집이거나 그런것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모양이다.
지도상의 기맥길인 이 집 안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주인이라는 자가 갑자기 창문을 열고 고함을 친다.
당신들은 지도도 볼 줄 모르고 남의 집으로 무단으로 침입하여 산을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지랄발광을 한다. 여보슈... 분명히 이 집이 능선길이요.
지도를 완벽하게 해독할 줄 알고요. 나침판과 독도법도 보는법도 완벽하요 하니까
갑자기 집에서 쫒아나와 나와 개지랄을 떠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도로로 쫒겨 나온다.
도로롤 쫒겨 나와서 버스 정류소 맞은편 절개지로 치고 올라가니
가시넝쿨이 온 몸이 할키는데 상당히 쓰라리다. 괜스레 성질이 난다.
쫒겨난 분함으로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 집에 쳐논 철조망이 계속 보인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어느 천주교회의 공원 묘지군들이 나온다.
눈 덮인 천주교회 공원묘지를 지나서 계속 걸어간다.
한참을 진행하다가 등로가 뚜렸한 우측길을 버리고 계속해서
좌측 능선을 오르내린다. 우측으로는 눈덮인 논밭이 나오고 축사도 보인다.
조림을 한듯한 해송과 편백나무 숲이 보이고 계속해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니
차량소리가 나타나면서 1번국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가야할 용화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1번국도/쑥고개(13:00)
전북 익산시 여산면과 왕궁면의 경계로 1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도로위의 동물이동통로를 건너서 맥길을 이어가는데 대파가 심어진 밭을 지난다.
이곳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를 징벌할 때 견훤의 아들 신검과 문무관졸에게
황복을 받았다는 탄현(炭峴:숯고개)이라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쑥고개라 부르게 된 이유는 옛날 산적이 많이 출몰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항상 수비병을 배치한 곳이라하여 수(守)고개라 하다 지금은 쑥고개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쑥고개 명칭은 숯을 굽던 가마가 있던 숯고개에서 변했다는 설이 가장 많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깊은 골짜기에 쑥 들어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숯을 굽던 곳이나 계곡 깊이 쑥 들어갔다는 이야기 모두 비슷한 내용 아닐까 싶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인 것이다.
동물이동통로를 지나 눈덮인 대파밭을 지나니 용도폐기된 1번국도가 나온다.
舊 1번국도(13:05)
동물이동통로를 지나 눈덮인 밭을 지나니 새로생긴 4차선의
1번국도에 모든것을 넘겨주고 잊혀진 길로 변해버린 느낌이다.
커다란 노거수 한그루가 있고 이곳 아래에는 고물소파가 하나있다.
이곳에서 두유 한병을 마신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구도로 좌측에 있는 은행나무 뒤의 능선으로 올라선다.
조금을 더 오르니 피톤치드향이 많이 나온다는 편백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피톤치드는 식물이 병원균, 해충, 곰팡이에 저항하기 위해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이다.
사람이 공기 중에 있는 피톤치드 성분을 호흡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이 이뤄진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 발산량이 가장 많은 나무로서 시민들의 인기가 높다.
삼각점봉(172m:13:15)
삼각점이 있다고 했지만 많이 쌓인 눈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고
둥근의자 3개와 긴 의자 2개가 있고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가는 이정표가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
가람 이병기 선생은 “바람이 소슬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라는 ‘별’을 노래한
익산시 여산면 출신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조시인, 국문학자이다.
1891년 여산 원수리 진동마을에서 태어난 가람 이병기 선생은 국문학자이며 시조시인으로 한국 현대시조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가람 선생은 1921년에는 권덕규·임경재·최두선 등과 함께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활약했고,
1922년부터 동광·휘문고등보통학교 교원, 1926년부터 시조에 대한 논문과 시조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가람 선생은 전북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56년 정년퇴임한 후 이듬해 뇌일혈로 쓰러져 앓다가 1968년 여산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병기 선생생가(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는 지방기념물 제6호로 초가 네 채가 있다.
조선 말기 선비 집안의 배치를 따라, 안방과 사랑채 등을 만들었으며, 관리는 가람의 자부 윤씨부인이 하고 있다.
2) 묘(생가 앞에 위치) : 봉분이 따로 없이 묘비만 서 있고 그 밑에 잠들어 있다.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바람이 소슬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
삼각점봉에 계속해서 치고 오른다. 그런데 해발 고도가 342m 밖에 안되는
용화산 오름길이 참으로 힘이든다. 날씨가 조금 풀렸는지 땀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숨은 차고 그렇다고 고어텍스 자켓을 벗어면 춥고한다. 힘들게 정상을 오른다.
용화산 정상에는 긴 벤치들이 놓여있고 눈에 파묻힌 묘지 1기가 보인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이곳에는 등산객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용화(龍華)란
대승불교는 석가모니불만이 아닌 다른 많은 부처님이 필요에 의해 발생한다.
석가모니불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가 있듯이
부처도 그러한 과거라든지 미래를 관장하는 부처의 발현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부처 중에 미래에 나타날 부처로 미륵불이 탄생되었다.
석존 사후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서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다.
근데 미륵은 석가 생존시 동 시기의 수행자였는데 먼저 석가보다 먼저 열반하여
천상계 중에 하나인 도솔천에 올라 천인들에게 설법중에 있다.
미륵이 내려오면 천하가 태평해지는데 이 세계를 용화장세계라 한다.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것에 비해 미륵은 용화수 아래서 설법한다 하여 그렇게 불려진다.
이 세 번의 설법을 용화삼회라 한다.
익산 미륵사지가 삼탑삼금당의 의미도 이러한 용화삼회의 법당을 의미한다
절 뒷산이 용화산이고 그 뒷산이 미륵산이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용화산(龍華山:342m:11:20)
전북 익산군 여산면, 왕궁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익산시지’의 용화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초기까지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합하여 용화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옥녀봉, 선인봉(仙人), 노승봉(老僧), 성태봉(城胎)의 산줄기만 용화산이라 한다.
옥녀봉은 320m인데 성인 30여명 정도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자연석굴이 있다.
북쪽 후미에 있는 성태봉에는 둘레가 약 500보(步)정도의 석성이 남아 있다.
또 선인봉 동쪽 기슭에는 도산사 터(道新寺址)남아있다.
그리고 이산에는 동산사 터(東山寺址), 상원사 터(上院寺 址) 등 몇개의 옛절터가 남아 있다.
서쪽 기슭에는 일산의 명승중의 하나인 황각동계곡(黃閣洞)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산군 산천조에는 ‘군의 남쪽 12리에 군 입산(軍 入山)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징벌할때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산관아에서 남족으로 12리쯤에 있는 산은천호산에서 용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탄현(炭峴, 숫고개)에 해당한다.
이 탄현은 ‘고려사’의 추백제 군 정벌기에 ‘우리군대는 황산군에 이르러 탄령을 넘어 마성(馬城)에 주둔하였는데,
신검과 그 동생 그리고 문무관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는 기사에서 보이는 ‘황산군의 탄현’을 가르키는 것이며,
태조 왕건의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는 마성은 용화산의 석성으로 보인다.
지금도 용화산의 석성아래에는 견훤의 밑터라고 하는 마산(馬山) 진터가 있다.
용화산의 동굴은 원수리 샘골, 동쪽기슭의 중턱에 20미터쯤 되는 암벽 중간지점에 있는 30평정도의 자연석굴이다.
굴 내부의 높이는 2m, 깊이는 10m이다. 작은샘이 있는데 약수로 이용된다. 혹자는 현재의 위치와는 반대편이 용화산쪽
기슭에 잇는 상원사 마을앞의 작은 동굴과
위로 통하는 굴이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로 이굴에서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저쪽에서
나온다는 것을 들고 있다. 굴의 높이는 10m쯤 되는 암벽에 있다.
이곳에 기생하고 있는 소나무뿌리를 이용하여 굴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통로를 만들었다.
용화장 정상의 이정표
이곳은 익산시민들이 즐겨찿는 산인 모양이다. 이곳부터는 이정표와
구조 표지판이 자주 보이고 등로는 아주 양호하다
용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눈덮인 익산시내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노령산맥의 지맥인 천호산과 미륵산이 동부에 아름다운 산세를 이루고 있다.
서북부에 함라산 줄기가 이어져 남서로 향하는 구릉과 대,소하천이 비옥한 평원을 이룬다.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시와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다.
호남선이 남북으로 중앙을 관통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군산선(장항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호남고속도로는 동부를 지나 금마 진입로에 있고, 1번 국도와 23번 국도 및
10여개의 국도.지방도등 전국각지를 이을 수 있는 편리한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다.
익산은 서해와 옥구, 김제 평야를 어머님 품안으로 껴안고 있는 형상이다.
배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류가 유통되어야 하는것과 같이 일맥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전라북도 익산은 전국에서 수도를 가장많이 한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문명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축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이나 수도였다.
첫 번째 수도는 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8년경에 남하하여 금마에 수도를 세웠고
두 번째는 마한의 수도로써 금마지역은 마한 54개국을 총괄하던 도읍지였다.
세 번째는 보덕국의 수도로써 고구려 왕손 안승이 세운나라이다
네 번째는 백제의 무왕이 익산 왕궁으로 천도한 것으로 백제의 유일한 왕궁터가남아있으며
또한 익산 미륵사지를 해체복원 하던중 발굴된 사리장엄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신청한 상태이며
백제무왕때 증축한 미륵산성은 금마 미륵산의 해발430m의 장군봉과 동쪽계곡을 둘러쌓은 석성으로
길이 1,822m로 익산 최대규모의 산성이며 산성내에는 건물지,장대지,우물터 및 동문지,남문지와
10개의 치가 남아있으며 성벽높이는 4~5m 폭은 6m 사진과 같이 복원중이다.
용화산에서 가야할 미륵산을 바라보면서 용화산의 안부능선을 걷는다.
200m 단위로 구조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걸로 보아 등산객이 많은 곳인 모양이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군부대장의 경고문과 함께 철조망과 함께
우회하라는 경고문이 나온다. 기맥길은 직진이다.
부대장한테는 미안하지만 악착같이 철조망을 넘어 기맥길을 고집하며 직진한다.
나말고도 간큰(?) 기맥꾼들이 많이 지나간 모양이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암튼 정맥, 기맥꾼들은 간을 빼놓고 사는 모양이다.
내가 조금후에 가야할 미륵산과 다듬재가는 능선이 보인다.
미륵산 아래에는 새로 축성한 미륵산성이 V자형의 모습을 하고있다.
건너편으로는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들이 아스라이 보인다.
오늘 산행코스는 ⊃형으로 걸어왔다. 다시 S자형태로 산줄기는 이어진다
돌탑봉(14:20)
용리산과 선인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갈라지는 곳에는
쌓다만 돌탑이 두개 있고 나무에 용리산 이정표가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 미륵산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부대 철조망을 끼고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좌측으로 군부대를 끼고 계속해서 조그만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락한다.
군부대 안쪽에는 앙증스런 송신탑도 보이고...
군부대 능선을 끼고서 좌측 안부를 걷다가 Y자형의 길을 만나
이곳에서 우측 3시방향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다듬재(일명: 아리랑 고개:14:45)
익산시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2차선 포장도로
15번 군도가 지나가고 있고 길 건너에는 또다른 군부대가 보인다.
일명 아리랑고개라고도 하며 통신철탑과 수원백씨 세천비가 있고
오른쪽으로 여러기의 묘지가 있다.
이곳은 다듬잇돌이 많이 나오는 고개라 하여 다듬재라 한다
도로를 건너 '수원백씨세천비'앞으로 미륵산 산행로는 이어진다.
좌측에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계속해서 올라간다.
이정표(미륵산성← ↑ 등산로 ↓ 장암마을)에서 등산로가 표시된 직진으로 향한다.
익산미륵산성(益山彌勒山城:15:00)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된 미륵산성은
古朝鮮時代 기준왕이 이곳으로 내려와 쌓았다고 하여 箕準城, 龍華山城이라고도 부르며
馬韓의 여러나라 중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성도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高麗 太祖가 後百濟의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이를 토벌하여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이 바로 이 미륵산성이다.
산성의 길이는 약 1,822m, 높이 4~5m, 폭 약 5m로 익산지역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능선을 따라 성이 만들어졌고, 그 중하나는 물 흐르는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데 여기에는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에는 작은성을 따로 쌓아 방어에 유리하게 하였으며, 성안에서는
돌화살촉, 포석환 등 기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익산지역의 기맥길을 걷다보니 의외로 산성을 많이 만난다.
익산은 지형적으로 동북 측의 천호산이 해발 500m로 가장 높다.
익산의 중앙부에는 약간 북측으로 치우쳐 있는 해발 430m의 미륵산과 해발 342m의 용화산이 위치한다.
시의 서측 금강 변을 따라서 해발 200m 내외의 산들이 이어지고 있다. 익산의 남측은 평야지대로
해발 10m~15m 내외의 낮은 구릉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 의해 익산지역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산성은 미륵산과 용화산, 천호산 주변의 익산토성, 금마도토성, 미륵산성,
용화산성, 성태봉산성, 선인봉산성, 낭산산성, 천호산성, 학현산성, 당치산성 등 10개의 산성이 자리한다.
금강변의 함라산에는 함라산성과 어래산성 등 2개의 산성 있다. 이 중 백제 무왕대의 왕궁 방어를
위해서는 익산토성과 미륵산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능선 저 너머 천호산의 능선들이 보이고...
조금전에 지나온 용화산의 산줄기도 보이고...
미륵산성의 끝을 치고 오르니 멋진 상고대가 연출되고 다시
깔닥고개를 치고 오르는데 암릉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다.
우측으로는 각종 통신탑들이 점령하고 있는 미륵산 우제봉이 보인다.
헬기장 공터(15:30)
미끄러운 암릉길을 치고 오르니 헬기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모든것이 하얀 눈으로 덮혀서
순백색의 세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논산지역도 시야에 들어오고...
오늘 아침 07시부터 시작한 고내고개부터 시작하여 천호산, 용화산 등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조그만 내발(足)로 걸어온 능선들이다.
미륵산 우제봉(405m)
우제봉 정상에는 KBS송신소와 KT 중계기지와 이동통신 기지가
점령하고 있고 기맥길에서 우측으로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그냥 장군봉으로 향한다.
미륵산의 정상인 장군봉으로 향한다.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는데 갑자기 하늘이 잔뜩 지푸리면서
눈이라도 쏟아질듯한 기세이다. 기온도 급격하게 떨어진다.
15분만에 미륵산 장군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은 마치 우리동네 지역의 산인 청계산같은 느낌이다.
등산객이 상당히 많고 산불감소같은 곳은 노점상이 점령하고 있다
이곳에서 갈증이 나서 생수 한병을 사서 마시고 주위를 둘러본다.
정상에는 미륵산성 표지판도 있고...
각종 시설물과 함께 등산객들이 상당히 많은걸로 보아서
익산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산임에 틀림이 없다.
가야할 능선이 보이고 서서히 군산에 있는 금강 하구언도 보인다.
오늘 처음으로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함께 미륵산 정상에서...
미륵산 장군봉(彌勒山將軍峰:430.2m: 15:45)
전북 익산시 금마면·삼기면·낭산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평지 돌출형의암산으로 흡사 호남평야에
홀로 솟은 삿갓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래 이름은 용화산이었으나 601년(백제 무왕 2년) 남쪽 기슭에
미륵사가 창건된이후부터 미륵산이라고 불렸으며 봉우리가 사자 형상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한다.
미륵사는 17세기 무렵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지만 미륵산 북쪽 중턱의 심곡사는 건재하다.
김제 금산사의 말사인 심곡사는 본디 현 위치에서 정상 쪽으로 200미터쯤 올라간 곳에 있었으나
100여 년 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년) 때 무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심곡사의 그 후 연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미륵산은 넓디넓은 호남평야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산이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백제의 무왕이 된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간직한 미륵사가 있던 곳이고,
정상에는 마한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마륵산성이 남아있기도 하다.
산 구경하기 어려운 익산땅에서 미륵산은 등산인들의 유일한 휴식처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미륵산을 중심으로 금마, 삼기면 일대에는 마한 선인들이 남긴 민속놀이와 미륵산록에
찬란하게 꽃피웠던 백제문화를 보존 전승하기 위하여 매년 10월 8일에 축제를 벌인다.
축제에는 마한 때 유래된 것으로 보여지는, 깃대를 앞으로 숙여 세배를 하는
금마기세배(金馬旗歲拜)놀이를 비롯한 많은 민속놀이가 벌어진다.
특히 ‘콩 깍자, 콩 깍자’로 시작되는 ‘지게 목발 노래’는 지방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된 농요(農謠)이다.
미륵산의 물줄기는 기양천과 부곡천을 통하여 금강과 만경강에 살을 섞고 서해로 흘러든다.
미륵산 장군봉 삼각점(△논산11-1986재설)
미륵(彌勒)이란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준말이며, 불교용어이다.
그 뜻은 도솔천에 살며 지금은 천인(天人)을 위하여 설법(說法)하고 있는 중이나,
석가가 입멸(入滅)한지 56억7천만년 후에 미륵불로 태어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미륵사는 백제때의 사찰로서 당시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절이었으며, 지금은 석탑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고 복원 작업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무왕때 세워진 화강석탑으로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목조탑의 건축양식을 모방하였으며, 국보 제11호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라는 것은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말로서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전북지역은 김제 금산사를 중심으로 해서 익산, 전주지역에는 미륵사상이 많이
숭앙되고 있는 지역이다
미륵산에서 전망을 조망하고 나니 너무 추워서 서둘러 하산한다.
정상에서 200m 쯤 내려오니 ㅏ형의 길이 나오고 긴의자 2개가 있다.
이곳에서 우측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눈이 얼어서 상당히 미끄럽다.
이곳은 등산객이 상당히 많이 오르내린다.
10분 정도를 내려오니 ㅓ형태의 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이곳은 등산객도 많이 다니고 시그널도 없어서 바짝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다
채석장 같은 곳이 나오고 아랫쪽에는 대나무밭이 보인다.
미륵사지 가는 길 이정표
미륵산(彌勒山)은 고대 삼한시대 백제국과 합쳐져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국 이라는 큰문명을 이루며 그 큰 문명의 중심에 있는 미륵사지는
백제국 미륵신앙의 큰 본산이랄수 있는 곳이다.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그의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서 서울의 위례지역에
자리한 후 마한을 통합해 백제를 만들며 그 기틀을 형성한곳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회두 되어 전해져 내려오는곳이 이곳 미륵산 미륵사지이다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의 터로 익산 금마면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석탑의 시원으로 불리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통일신라대의 당간지주
(보물 제236호), 건물지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마치 세 개의 절이 합쳐진 모양의 삼원일가람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한 사찰이며,
막새 기와류와 명문이 있는 기와, 토기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출처-다음사전>
간재 선생길 이정표(16:20)
둘레길이정표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이정표(←미륵사지 2.1km →장항동 마을
↑간재선생 묘소 1.5km) 에서 간재선생 묘소쪽으로 향한다
다시 갈림길에서 이정표에 간재선생 묘소 1.1km 방향으로 걸어간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선생(1841~1922)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로 고향이 전북 익산이며 호가 간재이다.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은 계화도이고 묘지는 이곳 고향 익산에 있다.
선생은 임헌희 문하에에서 20년간 학문을 배웠으며, 고종19년(1882년)
벼슬에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강탈되자 선생은 통분하였으며 스스로 귀향하여
도학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도학만을 이야기한다고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22년까지 이곳에서 도학을 가르치며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정기를
진작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전우선생의 성리학적 연구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 추앙을 받고있다.
능선길을 계속 걸어가다 보면 우측으로 간재선생 묘소가는 이정표로는
길이 잘 나있지만 기맥길은 직진이다... 직진으로는 사람들이 거의 안다닌다.
우측으로 편안하게 길을가도 나중에 기맥길을 만나지만 원칙대로 걸어간다.
능선 끝에 도달하니 연안 이공과 부인 금의이씨의 묘지가 나오고
이 묘지 옆으로 내려가면 조금전에 갈라진 둘레길을 만난다.
묘지 아래로 내려오니 둘레길이 나오고 이정표가 보인다.
다시 길을 내려가니 죽정마을 표지판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져서 간재선생 묘소 방향으로 향한다.
좌측으로 꺽어지니 논이 나오고 논 건너편에 굉장히 큰 느티나무가 보인다
논을 가로질러서 노거수 방향으로 간다.
이 건물이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옥수도예라는 곳이다.
건물을 끼고 뒤를 돌아 나오니...
옥수도예로 연결되는 비포장 도로가 나온다.
뒤돌아본 옥수도예 건물과 그 너머로 미륵산이 보인다.
5분 정도를 걸으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직진으로 걸어가니
황토밭이 나오고 밭을 가로질러 묘지 방향으로 올라선다.
뒤돌아 본 미륵산의 모습
산이 별로없는 익산 들판에 연인의 젖가슴처럼 우뚝 선 미륵산의 모습은
마치 홍성의 오서산과 파주의 심학산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밭을 가로질러서 묘지 뒤로 올라선다.
묘지 갓길을 따라가다가 좌측으로 빠지니 도로가 나오며
주유소와 삼기가든이 나오고 이곳부터는 기맥길이 도로로 이어진다.
석불사거리(17:00)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인 석불사 사거리에서 10시간 30분에
걸친 긴 산행을 마무리한다. 눈쌓인 등로를 러셀하면서 걸었더니만
종아리에 알이 배겼는지 뻐근하다. 사거리를 건너 버스 정류소로 향한다.
석불수퍼를 지나서 석불사 앞에있는 버스 정류소로 향한다.
석불사 버스 정류소
버스 시간표를 보니 17:25분이 되야 버스가 도착한단다.
아이젠과 스패치를 벗고 스틱을 접어 장비를 정리한 다음에 석불사 경내로 접어든다.
석불사(石佛寺)
全北 益山市 三箕面 蓮洞里 산220-2번지에 위치한 한국 불교 華嚴宗 本山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寶物 제45호로지정된 百濟時代의 石佛座像과 光背가 있는데, 조성시기는 AD 600년경으로
여겨지며, 三國時代 환조불로서 國內 最大의 것이고, 광배 또한 최대 규모다.
創建年代는 百濟武王 7세기 전반에 彌勒寺址 창건에 앞서서 건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石佛座像은 백제시대에 조성된 매우 귀중한 불상이다.
높이가 156cm나 되는 거구의 如來坐像은 당당한 자세로 얇게 표현 통견의 법의를 結跏趺坐한 무릎위로 흘러 덮었다.
그리고 거대한 주형광배는 7개의 화불과 불꽃 무늬를 조각하였다.
석불사에 들어서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경내에 들어서서
범종각 앞에있는 시원한 약수로 힘들었던 산행의 갈증을 푼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있고 그 안에 16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광배도 볼록하게 나와있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백제시대 불상으로 석불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부처에게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장식)까지 잘 남아있다.
머리는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광배는 정교한 불꽃무늬 안에 돌아가며 일곱구의 화불(化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삼국시대 금동삼존불의 광배와 유사한 것으로 불상은 7세기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불의 머리 바로 뒤 광배 중앙에는 세겹의 동그라미 속에 16잎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두광을 표현하고 있는데, 백제의 와당이나 벽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꽃잎의 모습이다
석불사 대웅전
지금 시간대는 저녁예불 시간대라 예불을 시작하면 예불에 참석하고
버스를 타려는 생각을 했건만 사찰내에는 인기척도 전혀없는 적막강산같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저두삼배를 올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가 오려면 아직도 10분정도를 더 기다려야 하는데
자꾸만 추워지고 옷을 갈아입지 못한탓에 추위가 엄습해오고
발가락이 빠져나갈 정도로 시리다... 오뉴월 개떨듯이 떠는데
드디어 익산역가는 39번 버스가 온다.
버스에 올라타서 45분이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익산역에 도착한다.
익산역(18:10)
익산역에 도착하여 열차표를 예매하니 저녁 9시 이전에는 좌석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입석표를 예매하고 역 구내에 있는 장애인용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씻고는 대합실 맞은편 전주비빔밥 집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시키고 이 음식점에는 주류를 팔지 않아서 베낭에
남은 4홉짜리 소주 한방을 젠틀맨님과 나눠 마시고 나니 살것만 같다.
콩나물 해장국
배고 고팠던 탓인지 너무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나니 열차타는 시간이 빠듯하다.
줄행낭을 치듯이 달려가 열차에 올라 잽싸게 마지막칸
의자뒤로 자리를 잡는다... 이곳이 가장 따뜻한 곳이다.
베낭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등산의자를 펴 곤하게 한숨 자고나니
열차는 어느덧 천안역에 도착한다...수원역에서 자리를 차지하여
영등포역까지 편하게 왔다. 한구간 끝냈다는 뿌듯한 자부심과 함께...
익산발 영등포행 무궁화호 입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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