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01월 13일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짙은 박무, 날씨는 영상기온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7.5km(알바포함) / 10시간 50분 소요
☞참석인원: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둘이서
☞산행코스: 거점재-용천산-미산재-28.5봉-성산양수장-서해안 고속도로-청안마을 버스정류장
대명산-망경산-다리실재-27번국도-고봉산-애재고개-지장암갈림길-144.6봉-광법사 임도
26번 국도(통사동고개)-대아배수지-군산남고, 옥구중-장항선 철길-지경교-지경삼거리
718지방도-용화산-칠거리재-황새고개-청암산-119봉-금성산 갈림길-금성산-칠다리재
709번 지방도-백석교회-돗대산-21번국도-상평승마장-아리랑고개-은파유원지-은파교회
☞소 재 지: 전북 군산시 나포면, 임피면, 성산면, 대야면, 개정면, 회현면,옥산면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1월9일부터 11일까지 제주도 크라운C.C에서 열린 골프투어를 갔다가 금욜 저녁 늦게
서울로 올라와서 토욜은 음력으로 섣달 초하루라 절에서 초하루 법회에 참석한 후에 사무실에서
사흘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서둘러 영등포역으로 향한다. 바쁘다~~~바빠 ㅋㅋㅋ
영등포역(20:00)
금남기맥 5구간을 하기위해 오늘 저녁에 베낭을 메고 영등포역으로 향한다
3주만에 동료산꾼 젠틀맨님을 만나 반갑게 조우를 하고 플렛폼으로 내려간다
서울발→ 익산행 전라선 20:32분발 열차 승차권
열차에 올라 3주만에 만난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익산역에 도착한다
익산역(23:38)
3시간 6분만에 익산역에 도착하여 역을 나와서 역 건너편 편의점에서 둘이
캔맥주 하나씩을 마시고 횡단보도를 건너서 찜질방으로 향한다.
중앙 찜질방(24:20~06:00)
사우나탕에 들려서 따뜻한 물에 20분정도 몸을 담근다.
오랫만에 골프채를 잡은 탓인지 예전에 다쳐서 좋지 않았던 왼쪽 어깨에 통증이 심하다.
낮에 한의원에 들려서 침을맞고 부항을 떳지만 통증은 쉽게 가라 않지 않는다.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고 수면실로 향하는데 나이 지긋하신 분이 TV에 킥복싱 프로를
보면서 혼자서 박수치고 떠드는 바람에 잠자리에 예민한 범여로서는 잠을 자는둥 마는중
하면서 아침을 맞이한다. 상당히 피곤하다.
찜질방을 나와서 근처 식당에 들려서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택시를 타고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거점재로 향한다. 아~글쎄 택시기사가 길을 잘모르는 바람에 한참을 헤맨끝에
겨우 거점재에 도착하는데 택시비가 12,800원 밖에 안나오는 거리에 26,000원이나 나왔다.
빠듯한 경비로 산행을 하는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거점재(07:30)
전북 군산시 임피면에서 나포면 원부곡 마을을 넘어가는 고개로 우측에는 기독교인들의
묘지들이 즐비하고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이라 어둡기만 하다.
도로 아래쪽에는 온천하만민기도원의 십자가 2개가 빨갛게 보인다.
오늘은 지난주에 엄청나게 추웠던 날씨가 많이 누그러진 탓인지 어둠속에 짙은 운무가
온 천지를 흐릿하게 하고있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길을 걷는다.
초반부터 잡목과 가시들이 산꾼의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이곳은 남쪽지방이라 그런지
다행히 눈은 그리많지 않아서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아도 될듯싶어 그냥 진행한다.
잠시후 능선으로 올라서니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이곳은 옛부터 용천산성이 자리를 잡고있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용천산성(혹은 예산성)은 임피면 취산리 교동마을 앞 취산제의 서편에 자리잡은 용천산에 위치한다.
임피면 교동에서 나포면에 이르는 고개의 좌측에 자리잡은 용천산은 그 형세가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새모양의 몸통과 양날개에 산성이 위치하고 있어 포곡형에 가까운 산성이라 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산은 진산(鎭山)으로서 그 형상이 봉황과 같고 옛 성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적조사자료」에는 둘레가 1,417m의 토성이며 예산성이라고 적고 있다.
용천산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기어
지금의 익산에 나라를 세운 후 준왕이 만들었다는 말이 전하는데 산성의 모습이 익산을 등지고
금강을 방어하는 모습으로 전설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은 듯 싶다. 주변의 임피읍성이나 남산산성
보다는 축조 연대도 오래되고 그 기능도 본래는 임피읍성의 외성 역할이나 진성창 방어용이었다기
보다는 순수한 익산의 최전방에 자리한 금강 방어용 성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용천산성은 지리적으로 금강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성산을 지나 금강에
적이 상륙했을 경우 이곳 용천산만 넘으면 익산에 다다를 수 있는, 서(西)로는 금강이 보이고
동(東)으로는 미륵산이 한 눈에 보이는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남쪽에는
고려시대 12조창(漕倉)의 한 곳인 진성창이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2㎞ 전방에 임피읍성과
그 앞 1.5㎞상에는 남산산성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산성은 이 지역에는 드믄 포곡형 토성 형태로 추정된다. 성벽의 높이는 2.5~3m정도였고
회랑의 넓이는 1.5m정도 였으며 삭토법과 판축법을 병행한 토성으로 용천산 봉우리에서
시작하여 새의 양날개와 같은 양쪽 능선을 따라 흘러내려 서쪽에서 양쪽 능선이 만나고
바로 그 부위에 성문이 만들어져 있는 형태로 보인다. 40m정도의 남쪽 평지는 논으로
개간되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나 본래는 판축양식의 성벽 혹은 목책이 성문과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은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는데 그 모습이 복주머니의 안쪽과
같으며 군시설과 민가가 있었으리라 추정되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성의 네곳에 문루의
흔적이 보이고 성의 북쪽 정상 문루에는 석축의 흔적이 보이고
바로 밑에는 건물 자리의 흔적 또한 발견된다. (펌글)
용천산(龍泉山:136m:07:45)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와 나포면 부곡리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옛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용천산이라 부른다고 하며 용천산성
중심에 용천(龍泉)이 있어서 용천산(龍泉山)이라고도 부른다.
산 정상에는 용천산을 알 수 있는 그 어느 표식도 없고 소나무 한그루만 우뚝 서있다.
용천산성의 중심에는 맑은 물이 넘쳐 흐르고 있는 샘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시간적으로 그 샘을 찾을 여유가 없어서 그냥간다.
용샘은 오랜 세월동안 산성안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수가 되어 왔을 것이다.
용천산(龍泉山)은 그 가운데 한자를 천(天)으로도 기록한다.
용천(龍泉)과 용천(龍天)을 함께 부르는 것은 용이 샘에서 나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단어 속에서 이곳 산성 주민들이 고대부터 용천산과 용샘 모두를
신성시여겼다는 생각의 편린을 읽을 수 있다.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만이 용천산을 지키고 있는 능선을 지나 포곡식 산성 흔적을 안부를
조금 내려와 우측의 급경사로 내려와 잡목과의 한바탕 전쟁을 치른후에 묘지로 내려온다.
용천산에서 내려오니 커다란 묘지군이 나타나고...
묘지옆 임도를 따라서 계속 내려간다
눈쌓인 임도를 계속 내려가니...
여산 송씨 가족묘지가 나타나면서 바로 아래에 포장도로가 나온다.
미산재(08:00)
군산시 임피면 미원리와 나포면 부곡리를 연결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간다.
도로를 가로질러 야특막한 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에는 대나무를 베어 방치한 바람에 상당히 불편하다.
28.5봉(08:05)
미산재를 지나 5분정도 올라오니 야트막한 곳에 삼각점이 있다.
삼각점(△익산407-경도125도 49분 48초-위도35도 59분 24초)
지도상에는 28.5봉으로 기록이 되어 있건만 국립지리정보원에는 29봉으로 기록했다.
28.5봉에서 내려와 농로를 따라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주위에는 축사들이 많이 있건만 어쩐 일인지 소는 한마리도 없다.
대나무숲이 있는 포장농로를 지나는데 길은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생명수 교회 간판을 지나 축사가 있는 농로를 계속 걸어간다.
우측 축사 뒤로는 꽤나 큰 저수지인 우곡제가 보인다.
성산양수장(08:15)
성산 배수장을 지나니 서해안고속도로 굴다리가 나온다.
서해안 고속도로(08:18)
청안마을 버스 정류장(08:20)
버스 정류장 앞으로는 744번 지방도가 지나가고 산에 갖다온듯한 한 여인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연신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검색을 하고 있다.
우리사회에 스마트폰이 일상속에 들어온 이후로 자꾸만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다. 그래서 난 아직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산에서도 모든 기록을 수기로 하고있다. 사업을 접으면 핸드폰도 없을 생각이다.
가수 송창식씨는 집 전화도 없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도 그럴 생각이다. 내가 필요하면 공중전화로 하면 될것이고 상대방이 아쉬우면
찾아오겠지 ㅋㅋㅋ. 기계에 예속되지 않는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살고싶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 마을의 포장도로로 100여m 정도를 가다가 우측으로 꺽어진다.
새로 지은듯한 건물을 지나니 우측에 커다란 노거수 한그루가 있고 조금을 더가니
다시 허름한 가옥한채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을 돌아 대밭을 지난다.
가옥을 지나니 비닐하우스 한 동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
대밭을 지나 안부 능선을 올라 우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오르막에서 조릿대 군락지를 만나고...
이곳에서부터 다시 잡목과 넘어진 나무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여기저기 가시에 할키고 긁키면서 힘든 산행을 진행한다.
대명산(大明山:100m:08:40)
전북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와 도암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이곳 역시 아무런 표식도 없고 커다란 떡갈나무 한그루만 덩그러니 서있다.
군산시 당국의 산에 대한 무관심은 극치를 이르는 느낌이다.
지도상에 엄염히 대명산이란 지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내려오니 이곳에도 아카시아를 비롯한 잡목들이 산꾼을 괴롭힌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눈쌓인 도로가 나온다.
마을 고개(08:47)
성산면 도암리 창암마을과 창오리를 넘는 고개로 고개 좌측에는 운동기구들이
있고 우측에 엄청나게 크게 지어놓은 경주이씨 가족추모관이 있다.
고개 우측에 있는 운동기구들이 있고
운동시설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미끄러운 능선을 치고 오른다.
이곳 역시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오를수가 없는 곳이다.
다행히 겨울철이라 조금은 낫지만 여름철에는 상당히 힘들것 같다.
망경산(望景山:129m:09:00)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와 도암리, 공봉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나라에서 관리하는 창고가 있어서 이 산에서 망을 보았다고 하여 망경산이라고 한다.
지도상에는 망경산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건만 현장에는 그 어디에도
망경산을 알 수 있는 표식이 없다. 이웃도시 익산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망경산 아래로 내려오니 묘지 2기가 있고 잡풀이 무성하다.
이 산아래 있는 창오리
이 마을은 1724년 (조선 英祖 初) 李碩章씨가 이룬 마을이다.
李씨는 3천섬의 큰 거구였다. 조창의 望京山에서 이어 연봉을 이루고 있는 高峯山의 남쪽 기슭이다.
李씨는 토호였다. 가짐새나 그 위엄이 따른 장중한 토호였다고 전한다.
특히 전라감사 李書九씨와 각별한 교분이 있었다. 한다.이씨터에서 북쪽 산기슭에 倉雁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鎭城倉地다. 고려 12漕倉 중의 하나였다.
'倉雁'은 원래 '창안' 이를테면 '倉의 안쪽'이라는 이름이었던 것이 한자로 정리하면서
엉뚱하게 倉雁이라 붙은 것이다.
고려의 조창과 조운은 국가의 대무(大務)이었고 생명선(生命線)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시책이었다.
고려시대 조창제도가 완비된 것은 고려 6대 성종(成宗 11년, AD 992) 경으로 개경 이남에
주(州), 현(縣)에서 받아들이는 조세미의 보관창으로 십이지창(十二之倉)을 두었다.
즉 개경(開京) 이남에 12곳의 조창을 두었다.
이 고장에 진성창(鎭城倉)을 임피현에 두었다(지금의 성산면 창오리).
진성창은 지금의 전라북도 전체의 조세미를 보관, 관리하고 있었다.
금강연변의 당시 진성창은 많은 조세미의 보관창고이기에 창고의 규모도 크고 그 수도 많았었다.
진성창이 있었던 창오리의 만경산을 주산(主山)으로 지금의 창안방죽 동쪽을 향하여 많은 창고가 있었다.
이 창고를 방어하기 위하여 출입문 외에는 토성(土城)으로 막아 보호하였다.
또 조운은 망경산 중턱에서 서쪽 반대편으로 가는 산속의 운반로를 만들었고
만경산 서쪽 반대편까지 금강물이 드나들어 조운의 기지(基地)를 만들고 있었다.
조창의 조세미는 가까운 곳은 2월부터 4월까지, 먼 거리의 것은 5월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곳에 토성을 쌓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였으며 이를 노리는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진성창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군산진(群山鎭)은 선유도에 있었지만,진성창의 바닷가인
진포 혹은 조종포(지금의 군산 내홍에서 나포사이)에서 왜구와의싸움이 고려 말에는 자주있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싸움이 바로 진포대첩이다.
조금을 내려가니 안부가 나오고 송전탑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좌측 능선길로 접어든다.
송전탑이 있는 뚜렷한 길을 포기하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좌측으로 꺽어지니 희미한 등로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달려있고...
길이 보이지 않는 편백나무 숲을 지나니...
다리실재 구도로(09:17)
도로를 가로 지르니 편백나무가 울창한 평강채씨 종산이 나오고
고봉산 올라가는 군사도로를 따라서 다리실재 육교로 향한다.
다리실재 육교(09:20)
예로부터 창오리(倉梧里) 다리실재 주변은 금강 수운(水運)의 중심지였으며,
곡물의 집산지인 진성창(鎭城倉)이 있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으로 지나며 남부로는 군산 방면의 국도가 통한다.
육교 아래로는 군산에서 익산을 잇는 27번 4차선 신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있다.
고봉산으로 향하는 군사도로를 따라서 미끄러운 길을 올라간다.
눈이 쌓인 미끄러운 군사도로를 올라가다가 좌측 가시덤불로
우거진 산 능선으로 올라갔다. 능선 정상에는 미군부대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어서 다시 우측으로 우회하여 군사도로로 내려선다.
고봉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부대 철조망
철조망을 우회하여 10여분만에 군사도로로 내려선다.
후답자들께서는 이곳으로 오르지말고 그냥 군사도로로 오르심이 좋을듯...
고봉산(高峰山:148m:09:40)
전북 군산시의 개정면 고봉리 · 아산리와 성산면 산곡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조선 시대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관련 산 지명을 찾을 수 없어 지명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지형도』에 고봉산이 아산리와 산곡리 사이에 등재되어 있어 기록된 역사가 길지 않은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호구총수』 방리조에 북일면 소속의 고봉리가 표기되어 있어 고봉산과 관련된 촌락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 "고봉 : 본래 임피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고봉산 밑이 되므로 고봉이라 하였는데"라는 기록이 있다.
1914년에 단행된 전국 단위의 행정구역 개편 결과가 수록된 『신구대조』에도 고봉리가 등재되어 있어
산 지명에서 유래된 촌락 지명이 현재까지 '고봉리'로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 정상에는 미군부대가 점령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곳으로 이전을 했는지
군부대는 텅 비어있고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어 보기가 썩 좋치않다.
군산시는 하루빨리 복원하여 시민들에게 되돌려 줬으면 좋으련만
다른 산을 보면 아마 그럴 의향이 전혀없어 보인다.
정상에서 되돌아와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우측으로는 군산 구불길이 연결되어 있고
구불길 옆에는 이동통신 중계탑이 있다. 구불길과 헤어져 좌측 기맥길로 접어드니
헬기장과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기맥길은 좌측 철조망을 따라 이어간다.
철조망을 따라 희미한 길을 따라서 가니...
우측으로 꺽어지는 희미한 등로와 함께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나온다.
편안한 내리막길을 조금 내려가니 차량이 다니는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애재고개(09:50)
이 도로를 따라서 한동안을 걷는다.
내리막길이 나오고 Y자 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조금을 더가니
다시 Y자 길에서 임도를 버리고 능선길로 올라선다.
능선길을 올라서니 안부능선에 호화로운 묘지가 나오고 우측으로 90도 꺽어진다.
호화묘지에서 꺽어지니...
측백나무 숲을 지나 두릅나무를 심어놓고 꺽지말라는 리본이 붙어있다.
측백나무가 있는 안부 능선을 계속 걸어간다.
십자안부
우측으로는 지장암이 보이기 시작한다.
태고종 사찰로서 신라시대에 진표율사의 제자인 도신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자세한 기록이 없으며 전통사찰로 지정되어있고 가을에는 감으로 유명한 사찰이라고 한다.
산에서 나이든 부부를 만난다. 진돗개 한마리와 조그만 개 한마리를 데리고 군산 구불길을
걷다가 만났는데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오늘 처음 산에서 사람을 만난다.
144.6봉(10:10)
봉우리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삼각점(△
144.6봉 삼각점(익산405-1980재설)이 설치되어 있고 카메라 아래에는 호화묘지(金海 金公)가 있다.
이곳 묘지옆 바람이 없는 곳에서 휴식을 취할겸 간식으로 치킨 한조각과 영지술 2잔씩을
젠틀맨님과 함께 나눠 마시고 10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안부 능선을 조금 걸어가니 공동묘지만큼이나 큰 묘지들이
나오고 광법사로 향하는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오늘 기맥길은 마치 묘지와 납골당, 추모관 순례길같은 느낌이다.
묘지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리고 한결같이 호화롭다.
마치 가문의 위세라도 하는것 처럼...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다가 눈쌓인 능선으로 올라간다.
편하게 좌측으로 돌아 광법사 가는 임도를 따라가면 편하지만 원칙을 따라서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곳도 온 천지가 묘지 뿐이다.
이 지역은 기독교가 엄청나게 강한 곳이지만 묘지만큼은 유교를 숭상하는
안동보다도 훨씬 많은 느낌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묘지옆을 지나는데 가시나무와 전쟁을 치른다.
5분만에 다시 편안한 임도로 내려선다.
눈이 소복히 쌓인 임도를 따라서 편안한 기맥길을 이어간다.
잠시후에 이정표가 나타나고 우측에 운동시설이 있는 팔각정이 나온다.
전망이 좋은 팔각정으로 향한다.
팔각정을 배경으로 운동나온 사람에게 부탁을 하여 인증샷을 남기고...
팔각정(10:40)
팔각정에서 내려다보니 군산시 계정면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쉽게도 짙은 박무(薄霧)로 인하여 사물이 뚜렸하지 않다.
면소재지 너머로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제평야를
적시는 만경강이 아련히 보인다.
만경강(萬頃江)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율치의 밤샘(또는 진틀, 657m)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황해의
새만금사업지구로 유입하는 국가 하천이다. 상류로부터 김제 · 익산 · 군산 등의 여러 고을이 발달하여 있다.
완주군에서는 고산천, 전주에서는 전주천과 소양천, 익산에서는 익산천, 군산시에서는 탑천 등의
여러 지류들이 이 하천에 합류한다. 하류인 군산 일대의 조석 간만의 차이가 커서, 만조시에는
전주천과 소양천 및 고산천이 합류하는 대천(한내 마을, 삼례대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예로부터 관개와 주운(舟運)에 이용되어, 완주군 봉동읍의 구만리와 전주천의 추천까지 운항이
가능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하천의 발원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우리 람길라잡이』에서는
전북 완주군 동상면의 막은대미재 북쪽 산록으로 표기하고 있다.
'만경' 지명은 조선 시대 하천의 하류에 입지하였던 만경현(현 김제시 만경읍)에서 유래되었다.
만경(萬頃)의 뜻은 '백만이랑'의 의미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 만경강의 하류에 형성되어 있는
평야는 '김제'와 '만경'의 합성 지명으로 금만평야로 불리기도 한다.
새만금방조제도 여기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시대에 이 하천은 '사수(泗水)'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고』(김제)에 "사수(泗水)는 속칭 회연(回淵)이라고 하는데 그 아래를 율포(栗浦)라
일컫고 그 아래를 신창진(新倉津)이라 일컫는다."라는 기사가 있고, 동일 문헌의 전주조에서도
유사한 내용의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전칭으로 불렀음을 보여 준다.
『대동여지도』에도 『여지고』에 수록된 율포, 신창진 등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한편, 고산현 남쪽의 하천에 '남천(南川)' 지명이 표기되어 있어 부분칭으로 사용하였음을 보여 준다.
팔각정에서 다시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곳곳에 빙판이 되어있고
운동시설들이 있으며 구불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편백나무 숲에서 큰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접어든다.
부부가 다 김해김씨인 묘지가 나온다. 예전에 완고한 봉건사회에서
동성동본끼리 혼인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이곳에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통사리의 고개가 나타난다.
통사동 고개(11:10)
군산시 개정면 통사리와 대야면 신월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26번 국도가 지나는 4차선 도로가 있고 기맥길을 이 도로를
가로질러 가파른 고개위로 이어진다.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오르막 고개로 올라선다
통사동고개 개정면 방향
오르막을 오르니 대야면쪽에 엄청나게 큰 건물인 한국가스공사(KOGAS) 건물이 나온다.
차량이 다닐만큼 큰 도로 옆에서 간이화장실도 있고...
대아배수지(11:20)
2층 팔각정(11:25)
팔각정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길을 내려서니 밭이 나오고 묘지들을 만난다.
좌측으로 대야면소재지가 보이고...
밭을 지나 묘지가 나오고 계속 기맥길을 진행하니...
대밭이 나오고 대밭을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군산남고와 옥구중 담장 펜스가 나온다.
군산남고 & 옥구중 교정(11:35)
군산남고와 옥구중 교정을 빠져 나와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장항선 만자 건널목을 건너서 우측 도로로 걸어간다.
장항선 철길(11:40)
718번 지방도를 따라서 40분을 계속 걸어간다.
지경삼거리(11:45)
지경교 다리를 건너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718도로를 따라서 용화산을 향해서 한없이 대야면 넓은 들판을 걷는다.
자동차 전용도로인 21번 국도 굴다리를 통과하여 우측에 수로를 따라 걷는다
가야할 용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확이 끝난 대야면 들판에는 철새들이 군무(群舞)를 추고있다.
용화산이 가깝게 보인다.
대야면(大野面) 들판
전북 군산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이다. 면의 중앙으로 군산선과 서해안고속도로가 경유하고,
21번과 26번 국도를 통해 군산 시내와 익산시 로 연결된다. 북쪽으로 대초산 등 고도 1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남쪽으로 만경과 탑천 유역의 충적 및 간척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중요한 벼농사 지대를 이룬다. 면 소재지인 지경리를 비롯하여 산월리 · 복교리 · 광교리 등 7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대야' 지명은 『여지도서』(임피) 등 조선 후기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촌락 지명에서 상 · 중 · 하 등의 방위를 나타내는 지명소가 다수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저습지 개간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등장한 촌락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임피현에 속하였다가 1914년 남이면 · 남삼면 · 남사면 등을 통합하여 옥구군 대야면을 신설하였다.
남이면은 『호구총수』에 입석리(立石里) · 고척리(高尺里) · 하죽산리(下竹山里) 등 8개 리를 관할하였고,
남삼면은 역리(驛里) · 석화리(石花里) · 만자산리(萬子山里) 등 10개 리를, 남사면은 상리(上里) · 하리(下里) ·
내상리(內上里)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야면'이라는 면 지명은 이 일대에
분포하는 대규모 평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995년에 군산시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율 버스정류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옥산면 방향으로 향한다
옥산 방향으로 5분 정도로 가다가 좌측 공동묘지 방향으로 올라선다.
용화산 이정표가 있는 임도로 올라서는데 좌.우는 공동묘지이다.
능선 안부에 올라섰다가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문화마을과 용화마을 갈림길이 나오고 체육시설들이 있다.
용화산(龍華山:104m:12:30)
군산시 옥산면 남대리와 회현면 원우리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에 큰 굴이 있어 용이 살았는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용화산이라고 부른다.
산 아래에는 용화마을이 있고 남사쪽으로는 군산공항으로 향하는 회현면이 보인다.
이곳 정상에는 초록색 산불감시초소와 길다란 의자 2개가 있고 이곳 앞뒤로는
호화롭게 꾸민 묘지들만 즐비하다. 이곳 역시 그 어디에도 용화산이라 알만한 표식은 없다.
용화산으로 향하는 이정목은 설치해놨지만 정작 주인공인 용화산 정상표시는 없다.
군산시의 상식이하의 지리행정... 정말 이해가 안된다.
용화산 아래에는 기독교인 출신인 경주김씨 추모관이 있는데
종교는 기독교인지는 몰라도 연혁과 묘지형태는 정통적인 유교방식으로 봉안됐다.
용화산 바로 아래에 내려오니 용화산 0.13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그러면 당연히 정상표지판도 세워놔야 하는데 군산시 당국자의 산에 대한
무관심인지 무지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러고도 녹을 먹다니 ㅉㅉㅉ
다시 조그만 능선을 치고 오른후에 좌우로 묘지만 구경하면서 편안한 능선을 내려가다
칠거리 가기 직전에 커다란 묘지에서 점심상을 펼친다.
점심은 젠틀맨님이 가져온 과메기에다 영지로 담근 술, 찐계란 2개, 그리고 영등포
백화점에서 산 야채로 만든 이름모를 빵에다가 커피한잔을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묘지를 지나서 내리막길에 좌측으로 꺽어진다.
칠거리재 내려오기 직전 등로옆에는 옛날에 부원군까지 지낸 장흥오씨 묘지가
관리가 되지 않은채 방치되어 있는 곳을 지나니 칠거리재가 나온다.
칠거리재(13:10)
군산시 옥산면 남내리와 회현면 고사리를 잇는 709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고
고개 정상에는 전북 주유소가 자리를 잡고있고 도로를 가로질러 기맥길을 이어간다.
회현면쪽에 있는 전북주유소의 모습
묘지를 치고 올라 안부 능선을 조금 걷다가 우측으로 꺽어진다.
고가유택(13:30)
고가유택을 지나 편안한 구불길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황새고개(13:35)
황새고개에는 자연 체험학습장인 반딧불이가 있는데 부도가
났는지 모든 구조물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어 보기가 좋지않다.
구조물 사이 타이어로 만든 길로 능선위를 오른다.
능선 정상에는 폐의자가 하나 놓여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있는 잡목지대를 치고 나오니 다시 묘지가 나오면서 군산 구불길이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청암산가는 이정표를 따라서 동네뒷산 걷듯이 기맥길을 이어간다.
등로 좌측으로는 대위제가 보인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최대곡창지대답게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참으로 많다.
척동마을 갈림길
명당터로 알려진 고사리 척동마을은 옛 말에“척동 흙 한 말은
금싸라기 한 말과 안 바꿔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명당이다.
형국이 삼태기와 같아 모든 것을 쓸어담을 수 있는 형태이기에 길지(吉地)라 하는데
다른 시각으로는 이 마을 산의 형태를 보고 많음을 뜻하는 물(勿)자형 명당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예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지만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의 쉼터가
자리하게 되는 형상을 낳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척동마을에는 남원 양씨, 두릉 두씨, 담양 전씨, 광산 김씨, 평산 신씨 등의 다섯 개
집안 선산과 제실들이 몰려있는데 광산 김씨와 평산 신씨는 각각 대정전과 사정전의 두 개씩의
제실을 지니고 있어 결과적으로 좁은 척동마을에 총 7개의 제실이 자리하고 있는 보기 드문 모습을 하고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척동마을의 모습
척동마을 아래의 십자안부에서 편안한 구불길을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곳 역시 묘지 천국이다.
안부에서 올라가니 기맥길 가운데 생전에 교장선생을 지내신 묘지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섰다가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군산의 둘레길인 구불길을 다시 만나
가파른 등산로 표시가 되어있는 청암산으로 향한다
청암산(靑岩山:118.7m:14:20)
전북 군산시 옥산면 금성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2층으로 된 사각정자가 있고
산불감시초소와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1등 삼각점이 있으며 군산(옥산) 저수지가 보인다.
청암산의 명칭 유래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푸르다는 의미의 취암산(翠岩山)이었으나
일제시대 같은 푸르다는 의미로 청암산(靑岩山)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청암산의 다른 이름으로 샘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샘산이라는 말은 주민들이
취암산을 빠르게 말하다 보면 샘산으로 들려 그렇게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암산 정상 삼각점(△ 군산 11 1996 복구)
청암산에 바라본 군산(옥산) 저수지
청암산 일대는 일제시대 1939년도에 최초로
수원지로 조성되고 1963년도에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2008년 3월에 지정이 해제될때까지 45년 동안 자연생태계가
보존 되었으며 제1 수원지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데 부족하여 옥산 수원지는
군산시 제 2수원지로서 군산시민의 식수와 북선제지공장 (현.페이퍼코리아)의
공업용수로 사용하여 왔다고 하며 면적은 2.34㎢라고 한다
옥산저수지 및 청암산 일대에 5개 마을은 장다리.팔풍갱이.세동.요동.고사동 마을로
옥산저수지내가 예전에 전부 논(답)이었고 가운데에 군도 정도의 큰길이 있었으며
회현↔군산 간 도로로서 회현 월하산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월하산은 조선시대
포구로서 넓게보면 만경강과 금강을 연결하는 도로기능을 하였다고 한다.
청암산 사각정자에서 바라본 군산시 회현면의 들판
지도상에 표기된 산 중에서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를 만나 인증샷을 남기고
좌측으로 이어진 군산 구불길을 따라서 편안 기맥길을 10분정도 이어가다가
편안길을 버리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길이없는 길로 들어선다.
구불길을 넋놓고 가다가는 알바하기 딱 좋은 곳이다. 바짝 신경을 써야 할 듯...
희미한 길을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엄청나게 큰 채석장이 나온다.
채석장 절개지 능선을 끼고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듯이 걸어간다
엄청나게 큰 채석장의 모습
채석장 절개지를 지나니 이곳 역시 잡목이 우거져 잡목의 가시에 얼굴과 베낭이 할킨다.
절개지를 벗어나 우측 묘지옆을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후 산불감시탑이 나온다.
119봉(14:50)
119봉을 지나 우측의 편백나무 숲을 거치니 다시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김해김씨와 고흥류씨의 부부묘를 지나 오르막을 올랐다가 내려서니 금성산 갈림길이 나온다.
금성산 갈림길(15:00)
임도 가운데 묘지 한 기가 있고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300m 떨어진 금성산을 향한다.
유수같은 세월앞에 어쩔수가 없는 모양이다.
빨간 망개나무 열매는 고운빛깔을 잃고 쭈그렁 밤탱이가 되가고 있다.
박지산성(朴只山城)이라 불리는 금성산성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금성산 올라가는 길
금성산 정상 삼각점(△군산 414)
금성산(錦城山:122.9m:15:05)
군산시 옥산면 금성리와 옥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이 산 아래의 지명이 박지산면이 있어서 박지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금성산 정상의 모습
이곳 역시 삼각점이외는 그 어느 곳에도 금성산이라 확인할 길이없다.
다시 금성산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우측 으로 내려오니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 가운데는 예전에 집이 있었는지 절구통같은 것이 보인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대나무밭이 나오고...
대나무밭을 지나서 어느 가옥의 가운데 샛길을 통과하여 마당이 나오고...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니 대문을 나서니 마을 도로가 나오고...
다시 마을회관인듯한 玉流亭을 지나니 마을입구 도로가 나온다.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인공수로를 지나니... 내류마을 표시석이 나온다.
내류(內柳)마을(15:25)
마을 뒷산인 금성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을 뒷산의 지세가 꾀꼬리가 버들잎을 물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형국이라 하여 ‘안 내(內)’ ‘버들 류(柳)’를 써서 내류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도로를 나와서 좌측으로 꺽어져 회현. 대야 표지판을 보고 간다.
칠다리(15:30)
군산시 옥산면 금성면 내류마을에 있는 다리로 70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물줄기가 일곱 칠(七)자 모양으로 흐른다고 해서 칠다리라는 설도 있지만
실은 다리를 만들때 다리난간 받침으로 옻칠을 입힌 나무로 사용해서 칠다리라고 한다.
옛날 다리 건너편 금성산 중턱에 만경강을 이용하여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박지산성(금성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칠다리의 유래 표지판
칠다리를 건너니 우측 수퍼가 하나 있어서 배고 고프고 휴식도 취할겸
수퍼에 들어가서 젠틀맨님과 맥주 3병에 오징어땅콩을 하나 사서
나눠 마시고 30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수퍼에서 올해 연세가 아흔인 촌로를 만나 이 지역의 유래를 듣는다.
이곳에서 태어나 90까지 이곳에 사신분이라 군산 문화원에도 없는 자료를 얻는다.
쥬스 한병을 사드리고 얻은 정보이다. 다시 길을 가기위해 베낭을 맨다.
수퍼를 나와서 삼거리를 만나 우측으로 백석교회까지 1.7km를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림마을 버스 정류장과 이정석을 지나 직진으로 계속 걸어간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철길을 지나 골프 연습장을 바라보며 계속 걷는다.
에이스 골프클럽 연습장
인도어 골프장 담장을 끼고 좌측으로 백석마을길로 접어든다.
마을길로 접어드니 산 언덕에 백석교회가 보인다
교회 가기 직전에 김해김씨 효열비가 보이고...
백석교회(16:20)
백석교회 마당을 지나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조릿대 군락지와 묘지가 나오고
조금을 더 진행하니 산 능선에 아무런 표식도 없는 돗대산이 나온다.
돗대산(91m:16:30)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와 상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의 형국이 배의 돗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돗대산이라고 부른는데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나.당군이 백제와의 전쟁을 치를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강하구인 기벌포 전투를 치르고 이곳까지
진격하였는데 예전에는 이곳이 바다였다고 한다( 칠다리 수퍼에서 만난 노인의 口傳)
돗대산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넘어진 나무들이 태클을 건다.
조그만 산허리를 돌아소 좌측 임도로 이어진다.
나무 터널을 지나니 T자형 임도에서 우측으로 이어진다.
임도 한가운데 군부대 구조물이 나오고 이곳에서 임도로 내려선다.
눈쌓인 임도 우측으로는 대밭이 나오고 잠시후에 도로가 나온다.
군산시 예비군 훈련장 후문앞 도로(16:55)
도로를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오니 21번 국도가 지나가고 이곳 굴다리를 통과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지난주 3일동안 제주도 갔다가 저녁 늦게 오는바람에
자료를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게 화근인데다가 그 자료마저도 산에서 빠져 버린 모양이다.
참으로 난감하다. 지도를 보니 당북 교차로로 가야 한다고 되어있다.
굴다리를 건너서 상평 승마장에서 21번 도로를 따라 원담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지곡동에서 아리랑고개로 넘어온다. 이곳이 원래 금남기맥길이나 일반적으로
21번 굴다리를 지나 승마장에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아리랑 고개에서
좌측 임도로 꺽어져 가는 우회길로 금남기맥을 가는데 우린 결과적으로
정통 기맥길을 간것이다. 그 바람에 30여분을 알바아닌 알바를 했다.
당북 교차로 아래에 있는 21번 굴다리를 지나 마을로 접어든다.
고개를 넘어 좌측 능선으로 넘어가 도로에 내려서니 아리랑고개가 나온다.
승마장에서 5분이면 올라올 거리를 30분이상을 허비를 하였다.
아리랑고개(17:50)
아리랑고개에 도착하니 길은 좋으나 눈이 녹아 길이 약간 얼어있어
베낭에서 헤드렌턴을 꺼내서 머리에 착용한 다음에 산행을 진행한다.
지곡동 도로(18:13)
임도에서 도로로 내려서니 군산시내로 접어든다.
좌측에는 은파 유원지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어 사람들이 많다.
도로를 건너서 빨간 십자가가 보이는 은파교회 앞까지 간다.
은파교회(18:18)
기독교 감리교회 소속으로 교회 규모가 상당히 크다.
오늘은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해야 할듯 싶어 스틱을 접는다.
교회앞에는 버스가 자주없다. 하는 수 없이 5분정도 걸어 내려와
택시를 타고 군산고속터미널로 향한다 (택시비 4,000원)
군산발→서울행 고속버스 티켓
군산고속버스터미널(18:35)
내 평생 처음으로 군산이란 도시를 와본다.
꽤나 큰 도시로 알려진 군산고속버스 터미널은 아주적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18:45분 우등고속이 있고 19:00에 떠나는 일반고속버스가 있다.
우등고속은 출발시간이 5분정도 밖에 없어서 19:00표를 끊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선지해장국에다 소주 한병을 15분만에 먹고 터미널로 향한다.
서울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다.
아마 어젯밤 찜질방에서 잠을 설친 탓인지 상당히 피곤하다.
버스가 천안휴게소에 정차하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
버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서울에 도착하여 21시 25분에
서울 강남터미널에 도착하여 또다시 한구간을 끝내는 희열을
맛보면서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작별을 하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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