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01월 27일
☞산행날씨: 아침에 눈, 오후에 맑음. 엄청 춥고 강한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8.5km / 놀멍 쉬멍 4시간 소요
☞참석인원: 동료산꾼 젠틀맨님, 이영서 선생님과 셋이서
☞산행코스: 은파교회-리츠프라자 호텔-부곡사거리-97.9봉 갈림길-97.9봉-83봉
NO 2송전탑-88봉-생태계이동통로-공동묘지-나운 배수지-할매산
78봉-도로 삼거리-안부-군산상고 갈림길-석치산-청소년문화센터-주차장
점방산 갈림길-점방산-장계산-월명공원-3.1운동기념비-월명산-채만식 문학비
금강매점-바다조각공원-수시탑-해병대전적비-군산횟집-군산 도선장
☞소 재 지: 전북 군산시 나운동, 소룡동, 송풍동, 월명동, 신흥동, 해망동
토욜에 밀양에 있는 고종사촌 딸 결혼식에 형과 여동생이 함께 갔다오며 혼자 운전한 탓에 평소에 아프던어깨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엄청나게 피곤하지만 동료산꾼 젠틀맨님과의약속 때문에 이른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통증 부위에 핫파스를 붙이고간단한 베낭을 메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는데 차가운 바람이볼기짝에 닫는다. 하늘에 섣달 보름달이 이별을 준비하고...버스를 타고 도곡역에 내려 다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매생이국으로 아침식사를 하는데 식사가 가격에 비해 형편없이 나온다.뜨내기 상대로 하는 음식점들이 그려러니 하고 억지로 식사를 마치고 동료산꾼을 만나고속버스에 올라 잠을 청한다. 어제밤에 어깨통증 때문에 고생을 한 탓인지 차에 오르자마자잠에 떨어지는데 정안 휴게소를 지나 잠결에 차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쏟아진다.2시간 30분이 소요한 뒤 군산 터미널에 도착하여 택시로 은파교회에 내려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서 군산가는 고속버스표
서울 강남 센트럴시티(호남선) 고속버스 터미널(06:45)
군산가는 호남선 개찰구
군산가는 고속버스(07:30)
버스에 올라 억지로 잠을 청한다. 어제밤 어깨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한탓에...
버스는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안 휴게소에 15분간 정차를 한 다음에 다시 군산을
가기위해 청양쪽을 빠져서 서해안 고속도로 동서천I.C로 접어드는데 잠결에 차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하여 조금은 불안한 생각이 든다.
오늘 산행은 지난해 12월에 눈이 많이오고 추운탓에 거리를 줄이지 못해 나머지 남은
약 9km정도의 거리를 땜방하러 가기에... 그리고 오늘은 산행이라기 보다는 군산시내
둘레길 걷는 코스이고 군산시내를 거치기에 빈베낭에 물과 갈아입을 옷만 가지고 왔다.
군산 고속버스 터미널(09:55)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기 직전에 다행히 눈은 그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을 건너서 택시를 타고 은파교회로 향한다.
은파교회(10:20)
은파교회에서 내려 교회 건너편 미제저수지(은파유원지)를 보니 저수지는
꽁꽁 얼어 붙어있고 그 위에는 조금전에 내린 눈으로 인해 온통 은백색이다
은파교회 앞에서 산행을 시작하다.
이곳은 예전에 기맥길이었던 곳을 군산시가 커지면서 낮은 봉우리들이
택지로 바뀌어 도로와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산행이라기 보다는
군산시내 구불길을 걷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내 평생 아무 연고도 이곳에 올 일이 별로 없을것 같고 또 지도상으로
엄연한 기맥길이기에 눈덮인 군산시내를 걸어간다.
은파교회에서 시내쪽으로 내려가다가 사거리가 나오기 직전에 좌측 군산대학교
가는 방향으로 꺽어져 들어서니 좌측에는 미제저수지(은파유원지)가 나온다.
눈앞에 보이는 롯데아파트 앞에 있는 지곡교회 가기 직전에 좌측으로 꺽어진다.
은파 유원지로 불리는 미제지(米堤池)
요즈음 米堤(살뭍방죽)하면 잘 모르지만 '은파유원지'하면 금방 알아차린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실정이다. 본 이름이 米堤池(쌀뭍방죽)이고 "銀波"는 훨씬 후에
임의로 만들어 부른 별명에 불과한데도 본 이름은 모르고 별명만 아는 격이 되었다.
은파란 이 저수지를 유원지로 개발할 때 사업자가 신청서에 '國民觀光地 銀波'라고 써서
교통부에 제출한 데서 시작되었고 또 그대로 허가가 나 '銀波'라는 간판으로 유원지 사업을
벌인 때문에 얼른 퍼진 것이다. 유원지 이름은 곧바로 번지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상황이었다. 나이 많이 든 사람 말고 젊은 층에서는 아예 '米堤'라는 이름을 모른다.
'米堤池'가 문헌에 나타난 것은 {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이 문헌의 沃溝縣 山川條에 "米堤池在縣西北十里一萬九百六尺"이라고 간략하게 쓰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미제방죽'이라고 불리웠던 이 미제지는 둘레가 10,910尺(3,600m)이니까
10리에 달하는 큰 방죽이었다. 이 방죽의 축성 연대는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언제 저술되었는가를 추스려 가려보면 대개 축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米堤池는 오래 전부터 몽리구 10여리의 들농사의 젖줄이었고 이 바람에 쌀의 집산지가
그 주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제지 물로 지어 거둔 쌀이 그 주변에 있었던
社倉으로 입고되었을 것이다. 미제지의 중부 동쪽 골짜기를 일찍부터 사창굴이라고
해왔고 미제지의 북서부 곧 지금 개발한 은파유원지의 입구 골짜기를 '사창'이라 불러왔다. 이
두 곳에 사창을 두고 斂散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미제지는 현재의 규모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아래쪽에 둑이 있었고 둑은
낮아 저수량이 적었다. 수심도 낮아 한쪽은 연이 무성했다. 둘러싸인 산과 마을이
여러 귀가 되어 아흔아홉귀라고도 했다. 그러나 옛날의 사정으로 보아 무척 큰 방죽이었다.
아흔아홉귀라는 말도 귀가 많다는 것도 의미하나 사실은 방죽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진다.
미제 저수지가 보이는 곳을 지나니 음식점이 몰려있는 곳이 나오고...
慶州李氏 宗山을 지나니 또다시 미제지(米堤池) 가 보인다.
미제 저수지(은파 유원지)
햇살 받은 물결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모습. 이 때문에 은파(銀波)라 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옛부터 수리시설로의 가치가 높았던 저수지다.
속칭 살밑방죽으로 1908년 옥구 서부수리조합인가의 근거가 되었으며 현재의 모양을
가지게 된 것은 1959년과 1966년 증설된 이후다. 현재는 은파 유원지라는 말이 일반화 되어
있으며 군산시민의 휴식공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군산 시내에 인접한 낮은 구릉의 울창한 수림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
역사 깊은 미제 저수지를 중심으로 무려 70여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 내에 조성한
국민 관광지로서 넓고 잔잔한 호수는 전국체전 때 조정경기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보트장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군산·옥구 출신 독립유공자 충혼탑이
세워진 2만 3천여평 규모의 만남의 광장에 느티나무 1백여주를 심어 국민관광지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은파관광지 주변에는 군산 근해에서 잡은 싱싱한 생선 횟집이 많다.
저수지 주변에는 관광지로 변해있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워킹족들이 많이 걷고있다.
은파의 상징인 길이 370m, 너비 3m의 국내 유일의 보도현수교로가 나타난다.
은파를 가로지는 ‘물빛다리’ 위에서 호수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를 느낄수 있다.
야간에는 조명으로 연출된 빛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저수지 건너편에는 우리나라 작가중에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시인
고은(高銀)의 고향인 군산시 이용동 용둔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시인 고은(高銀)님의 모습
본명은 고은태(高銀泰)이며 대한미국의 대표적 참여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전북 옥구(지금의 군산시 미용동 용둔리) 출생으로 호는 파옹(波翁)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군산고등보통학교 4학년을 중퇴하였다. 이후 그 어떤 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았다. 6.25전쟁으로 전란 시기였던
1952년 일본 조동종의 군산 동국사에 출가하여 중관학 권위자인 중장혜초로 부터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8년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60년대 초에 본산(本山) 주지,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내고
1962년 환속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리츠프라자호텔(10:40)
도로를 따라서 조금을 더 올라가니 좌측으로 커다란 건물이 하나 보인다.
지방 도시에서는 꽤나 커게 보이는 관광호텔이다.
부곡사거리(10:45)
도로를 건너서 군경묘지 방향으로 직진을 한다.
부곡사거리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좌측 조그만 동산에서 불어오는
눈보라가 건널목에 서있는 산꾼을 덮친다.
건너편에 보이는 예림옥(설렁탕집)과 GS 주유소 사이를 지나간다.
주유소를 지나니 이곳은 유흥업소와 모텔, 그리고 안마시술가가 즐비하고
그 뒤로는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어 교육상 문제가 있어 보이는 곳이다.
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이 함께 있으니 상당히 보기가 좋아 보이진 않다.
도로 끝부분에 도착하니 ㅜ 자 도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간다.
송전탑(10:50)
송전탑 좌측으로 아침에 내린 눈으로 쌓인 나무계단으로 올라서
오늘 처음으로 동네 야산같은 기맥길 능선으로 올라선다.
눈이 쌓여 있긴해도 그리 미끄럽지도 않고 그냥 걸을만하다.
더군더나 오늘은 거리도 짧고 동네 야산 같아서 며칠전에 고객이 선물한
새로운 등산화 길도 낼겸 새 신발을 신어서 그런지 미끄럽지도 않다.
97봉 갈림길(10:55)
좌측으로 5분 거리에 있는 97봉으로 향한다.
이곳은 기맥길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것이 있는건 아니지만
오늘 산행거리가 너무 짧아서 조금이라도 더 걷기 위해서 97봉으로 향한다.
97봉으로 올라가는 중( ing...)
97봉(11:00)
정상에는 긴 의자 2개만 덩그러니 정상을 지키고 있고 커다란 나무가 있다.
이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는데 잠깐사이에 손이 너무 시려서 얼른 내려와
기맥길로 복귀를 하여 83봉으로 향한다.
83봉(11:05)
83봉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초소옆에는 커다란 웅덩이 하나가 있다.
그리고 군산시민들이 자주 다니는 구불길 코스라 그런지 의자와 운동기구들이 있다.
83봉 정상에 있는 산불감시초소와 커다란 웅덩이의 모습
83봉에서 좌측의 뚜렷한 길을 따라서 내리막길로 내려온다.
눈속의 강추위에서도 푸르름을 잃지않고...
NO2 송전탑(11:12)
88봉(11:20)
정상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깨진 삼각점이 있고 운동기구와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다.
이곳에서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니 잡목사이로 난 희미한 등로로 내려선다.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88봉 삼각점
급경사로 내려서니 눈길에 상당히 미끄럽다.
기맥꾼들도 희미한 이 길을 선택하지 않고 좌측의
구불길이 있는 편한 길을 따라서 기맥길을 이어 가는지
그쪽에도 시그널이 많이 있지만 우린 악착같이 우측의 힘든길을 고집한다.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오 생태이동통로가 나온다.
생태이동통로(11:23)
이동통로 아래에는 군산시내와 군산국가 산업단지를 연결하는 6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좌측에는 동아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그리고 조그만 묘지옆에 위령비도 있다.
생태이동통로옆에 서있는 위령비
생태이동통로 안내문
동아아파트 단지도 보이고...
생태이동통로 아래로 지나가는 6차선 도로의 모습
생태이동통로를 지나니 우측으로 굉장히 큰 나운 배수지가 나오고
그 철조망을 따라서 할매산으로 향하는데 좌측으론 관리가 안된 공동묘지가 나온다.
관리가 안되어 있는 공동묘지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는데 금남기맥길에서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貴人인 연무대에서 이 영서 선생님께서 우리의 졸업산행을 축하여 주시기
위해 군산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이곳으로 택시를 타고 오신다는 전화가 온다.
금남기맥길에서 2번씩이나 후한 칙사대접을 받아서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오늘 또 이렇게 축하해 주시기 위해 오신다니...
관리가 안되어 있는 공동묘지사이로 난 구불길의 모습
나운 배수지(11:30)
은적사 갈림길
나운 배수지 끝부분을 시작으로 이제부터 본격적인 월명공원으로 접어든다.
군산시 소룡동에 자리잡은 은적사(隱寂寺)는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무왕 14년(서기 613년)에 원광법사 혹은 원종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신라 스님이 백제땅에 와서 창건했다고 하는 설은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당나라 소정방이 나당 연합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 천방산 아래까지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사찰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후 고려 광종 3(952)년에 정진국사(靜眞國師)가 중건하였고, 고려말 공민왕 22(1373)년에
고승 나옹(懶翁) 화상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 인조 7(1629)년에 수종(守宗) 화상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석가삼존불을 봉안하였으며, 현종 7(1666)년에는 천홍(天弘) 화상이
극락전을 신축하고 아미타불을 안치하였다.
철종 7(1856)년에는 보경당 취훈(寶鏡 就訓) 화상이 중수하였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84호로 지정된 대웅전 석가삼존불의 복장기에 의하면,
인조 7(1629)년 수종 화상이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안하였고, 옛 극락전 아미타불의
복장에 의하면 현종 7(1666)년 천홍 화상이 미타불을 정수암(淨水庵)에서
조성하여 은적사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월명공원
소 재 지 전북 군산시 신흥동, 해망동, 금동 일원
월명공원은 군산시 중심에 위치한 곳으로 시민의 안식처이자 관광지로써
봄에는 화려한 벚꽃과 동백꽃이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이 시민들을 유혹하며,
정상에 오르면 금강과 서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군산시의 상징인 월명산(月明山)을 비롯하여 장계산·설림산·점방산·석치산 등으로 이어져 있다.
능선과 골짜기 사이에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공원으로 올라가면 군산 시가지와 금강하굿둑·
서해·외항·비행장·장항제련소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공원 정상에는 전망대와 바다조각공원, 수시탑, 삼일운동기념비, 개항35주년 기념탑,
생각하는 시민상, 채만식 문인비가 있다. 수시탑은 타오르는 불꽃과 바람에 나부끼는 돛의 형상을 띠고 있다.
공원 서쪽 설림산 기슭에는 고찰 은적사가 있으며, 점방산과 설림산 사이를 막아 만든 제일수원지가 있다.
1906년 군산 각국 거류지역의 명승지인 해망정 인근 9,907 평을 일명 각국공원이라 이름을 정했다.
이후 각국공원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 각국 조계지역 법이 폐지되자
각국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군산공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군산시가 대일 무역으로
호황을 누리던 1933년에는 현 수시탑이 서 있는 산의 토지 6,088평을 매입하여 공원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이후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절제한 삼림의 남벌로 산의 나무가 적어지자
1972년 해망동 수시탑에서 미룡동의 군산대 뒷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개발제한구역
공원지역 으로 지정하고 그때까지 불리던 군산공원이라는 명칭을 월명공원이라
바꾸어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무대에서 오신 이영서 선생님을 동료산꾼 젠틀맨님이 모셔온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할매산으로 오른다.
할매산 오름길 우측으로 화장실이 있고 좌측으로는 산책길이 있다.
할매산(90m:11:40)
군산시 소룡동과 나운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야트막한 뒷동산에
불과하지만 엄연한 금남기맥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산으로 정상에 서니
군산시내에 한 눈에 들어오면 전망이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일제시대에는 이곳에서 금을 생산하는 금광이 있었다고 하며 정상에는
금을 생산하던 굴과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정상에 평화정이란 육각정과 그늘막 쉼터, 각종 운동시설과
2001년도 8월 대홍수때 순직한 공무원 추모비가 있다.
평화정(육각정) 옆에 있는 월명산 찬가 표지판
공무원 순직 추모비
할매산 정상에서 바라본 군산 시내의 모습
이곳 할매산은 이 지역출신 시인이신 고은님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란다.
그가 고향을 찾을 때 으레 찾아보는 곳이 할미산이였다고 한다. 청소년기 문학의 꿈을 키웠던 야트막한 산. 6·25 전쟁 때 정신병자처럼 허탈해진 영혼을 쉬기도 했던 곳. 그 할매산을 통해 그가 살았던 생가를 둘러보거나, 그 옆 한적한 어느 곳에 묻혀 있을 그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을 것이리라.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군산 출신 고은 시인의 세노야 시 일 부분이다.
지금은 옛날이 되어버린 1970년대 우리세대 때에
통키타를 치면서 흥얼거렸던 노래가 고은 시인이 지은줄은 이번에야 알았다.
군산 앞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의 흥얼거림인 ‘세노야‘을 고은 시인은 예술로 승화 시켰다.
고은 시인의 세노야 시는 가수 양희은의 노래와 영화 그리고 드라마로 제작돼 전 국민이 알고 있다.
하지만 세노야 배경이 군산이라는 사실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시대의 방랑자이자 이상주의자였던 고은 시인. 탈속과 환속, 저항과 순응, 이런 것들이
버무려진 통일운동, 민족문학 등이 그의 삶이자 화두이다.
'방황과 질주'로 일관한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낭떠러지 같은 시대를 살면서 흔들림이 없었던
그의 외길 인생. 그래서 고은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두의 고개를 숙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쉼터 정자에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금남기맥 마지막 구간에 동참하신
이 영서 선생님과 젠틀맨님이 가지고 온 고량주와 영지술, 그리고 과메기 안주로 한달만에
만난 회포를 푼다. 손이 빠질정도의 추운 날씨탓인지 독주를 마시니 조금은 나은듯하다.
추워서 너무 오래있지는 못하고 커피한잔 마시고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도로로 내려서니 좌측의 편백나무 숲이 나오고 이곳에서
좋은길을 버리고 우측길로 접어들어...
다시 만난 편백나무 숲을 젠틀맨님과 이 선생님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걸어간다.
군산 제1수원지 갈림길(12:15)
수원지로 내려서서 구불길을 버리고 뒷동길 같은 등로로 오른다.
편안한 길을 다시 만난다.
우측 안부 아래에는 관음사가 보이고...
82봉(12:20)
다시 월명공원 안부를 지나니 군산상고 갈림길이 나온다.
나운동 가는 길도 보인다. 지금의 나운동이 탄생된 때는 1973년 7월이다고 한다.
그 전에는 조선시대 옥구군(沃溝郡) 미면(米面) 신풍리(新豊里)에 속했던 곳으로, 신풍리에는 상나운, 하나운,
부곡, 대정, 정성, 대전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이중 큰 마을 중 하나인 나운리(羅雲里)의 운중반월(雲中半月 ;
구름 속에 반달과 같음) 명당 터에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나-랭이 또는 나-룬이’라고도 했던 나운리 마을의 규모가 크다보니 신풍초등학교의 서쪽지역(시민문화회관 일대)을
상나운(윗나룬이)으로, 동쪽지역(롯데아파트 일대)을 하나운(아랫나룬이)으로 나누어 불렀던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에도 줄곧 시골마을이었던 나운리 일대는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산시에
편입되며 군산의 최대 주거단지로 탈바꿈해 발전과 동 분할을 거듭했다.
이 나운동이 만들어지며 상나운의 할매산 능선에 이어져 있던 ‘서당모퉁이산’과 ‘안산’은 택지개발과 함께
아파트 신축부지로 사라졌다
군산상고 갈림길(12:30)
갈림길 우측으로는 김해김씨 안경공파 묘지가 보이고...
등로에서 바라본 군산상고의 모습
예전에 우리 세대에는 군산상고하면 야구에 역전의 명수라는 애칭을 얻은 학교다.
야구에서 역전을 떠올리면 단연 군산상고다. 1972년 황금사자기 지역의 라이벌끼리 맞붙은
부산고와 군산상고의 결승전. 창단 20년이 넘는 부산고와 달리 군산상고는 당시 창단한지
4년된 신생팀이었고 전국무대에서의 활약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경기시작 후 1회초 공격에서 바로 선취점을 올리며 투지를 보이지만 3회 1점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하고 8회에는 집중 6안타를 맞으며 3실점해 4-1로 점수차가 벌어지며 패배위기에 맞는다.
하지만 9회초 부산고 에이스 편기철선수를 상대로 김우근선수가 출루하며 기회를 잡았고 1사 이후
연속 볼 넷으로 만루 찬스를 잡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계속된 찬스에서 김일권선수의 몸에 맞는 볼과
양기탁선수의 2타점 적시타가 터지며 동점에 성공했고, 다시 김준환선수의 1타점 적시타로 역전승을
일구어 내며 창단 후 첫 황금사자기를 품에 안았다.
이날 이후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라는 멋진 애칭을 들으며 동문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많은
이들에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군산상고 야구부(교장 한상하·부장 원종혁·감독 나창기)는 창단 3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역전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군산상고의 '역전 스토리'는 정인엽 감독에 의해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라는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군산상고의 인기는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전국구'였다.
68년 이용일씨(당시 경성고무 사장·전 쌍방울 구단주 대행)가 선수들이 먹을 쌀을 직접 손수레에
실어나르는 정성으로 창단한 군산상고 야구부는 70년 국가대표 투수 출신인 최관수 감독(98년 작고)이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다. 최감독은 강도높은 훈련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이끌어 71년 전국체전 우승을 이루며 호남야구의 기틀을 다졌다.
희한하게 생긴 나무를 지나서 다시 편백나무 숲을 호젓하게 걷는다.
다시 조그만 뒷동산인 석치산으로 오른다.
석치산(石峙山:98m:12:35)
군산시 소룡동과 나운동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석치사(石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꿩이 많아 '석치산(夕雉山)'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그 산기슭은 아늑하고 양지 발라서 고순겸(高淳謙)이 그 조상이 오식도(筽篒島, 筽食島 또는 梧竹島)에
귀양살이(고려 고종 1214-1259) 끝에 죽게되자 내려와 석치산 기슭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이 고씨 때문에
이 곳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거기에는 지금도 '숭모사(崇慕詞)'라는 고씨 문중의 제각이 있다.
정상에는 무인감시 카메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삼각점과
일반 삼각점 등 2개의 삼각점이 있다. 직진으로 계속 등로를 이어간다.
무인감시카메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2개의 삼각점이 있는걸 보아 석치산은 욕심이 많은 산인가보다?...뭣이던 2개이니
석치산에서 다시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좌측에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는 편백나무 숲이 가득하고 산림욕장이 보인다.
석치산 아래에 있는 산림욕장의 모습
산림욕장 아래로 내려서니 월명공원을 잇는 도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니 군산 청소년 수련원이 나온다.
군산청소년 수련원(12:45)
군산 청소년 수련원 주차장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능선을 올라서서 점방산 방향으로 향한다
점방산 갈림길(12:53)
점방산은 기맥길에서 10여분 정도 벗어나 있는 곳이긴 하지만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산이고 전망이 가장 좋은 산이라 필히 들린다.
점방산가는 능선에서 바라본 군산제1수원지
월명공원에 있는 저수지로 점방산과 설림산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집수구역내에
큰 오염원이 없어 상급수의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수원지 주위를 산책하는
코스는 군산의 자랑거리라 할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점방산에서 수원지를 바라보는 경치는 등산객의 발을 잡는 곳으로 겨울철
눈이오는 경치는 이루 말할수 없는 형용사를 만들어 내는 곳이라고 한다.
능선에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서니 Y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 바로 앞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있었던 봉수대 자리에는
전망대가 서있고 바로 아래에 둥근돌로 만든 점방산 봉수대 사적비가 있다.
군산은 지정학적으로 바다와 강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 한 곳.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주요 통신방법으로 활용했던 봉수대가 여러군데
있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시설은 흔적도 없어지고 이제는 점방산
의 사적비 한개가 그 옛날을 증거하고 있다고 한다.
해망동 바닷가에 우뚝 솟은 점방산(봉화재)은 해발 135m로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그 정상에서는 서해와 금강하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정상에 바로 봉수대가 있었고 지금도 봉수대의 터가 남아 있는데 둘레 약 70m,
높이 3m의 모서리가 둥근 네모 모양의 돌을 섞어 쌓은 토단이 있고 토단의 남동쪽
아래에는 50여평 남짓한 평평한 대지가 있다. 이 곳은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바람과 추위를 막고 의지할 수 있는 봉수군의 막사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봉수대터에는 도내에서 유일하게 향토문화자료로 사적비를 세워 관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옥구현편에 동쪽으로는 임피의 오성산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화산,
북쪽으로는 충청도의 서천군 운은산에 응한다고 기록되었고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설촌사 정방산봉수 설촌산상 석축이라 기록되어 있다.
(점방산을 설촌산이라 칭했고 수원지쪽 아래에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설촌사라는 절이 있었음을 이 기록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봉수망/자료출처《全北의 烽燧台》<1992년 전북체신청 간>
봉수(烽燧)라 함은 횃불(烽)과 연기(燧)로써 급한 소식을 전했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를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방식인데.
우역(郵驛)의 역참제도(驛站制度)와 더불어 전근대적인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방의 군사적인 국방 전보기능(傳報機能)의 하나였다.
봉수의 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먼 옛날부터 있어 왔으며, 중국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
주(周)나라에서 이미 봉수로써 북방의 견융족(犬戎族) 침공에 대처하였음이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나라 13대 왕인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요녀(妖女)에게 빠져
봉수로 작란질 놀이를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피살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기록상으로 보면 우리나라 봉수제도의 확실한 시발은 고려(高麗) 중기로 보아진다.
고려시대 봉수(烽燧)에 관한 기록은 인종(仁宗) 1년인 1123년에 송(宋)나라 사신의
한사람으로 고려의 송경(松京:개성)을 다녀간 서긍(徐兢: 1091~1152)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봉수제도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고려(高麗) 제18대 의종(毅宗) 3년인 1149년에 이르러서야 봉수의 제반 격식이
규정되었는데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구분하여 신호하기로 하고 적군과
접근하고 있는 변경(邊境),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역과 서남 해안지방에서의
급변하는 적정의 완급에 따라서 거화(炬火: 횃불)의 수를 다르게 정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봉수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서 더욱 강화하였으며,
태종(太宗)에 이어 1419년 세종(世宗) 1년에는 종전의 봉수 사거(四炬)제도를
오거(五炬)의 방식으로 거화법(擧火法)을 더 세분하고 봉수군들의 근무소홀에
대한 과죄규정(科罪規定: 처벌규정)도 정하였으며, 세종 4년에는 각 봉수처에 연대(烟台)를
높이 쌓고 그 위에 병기등을 배치하여 주야로 간망(看望)을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점방산 정상에 있는 월명공원 전망대
전망대에 올라서니 금강건너 장항읍과 금강 하구언이 보이고
고개를 돌리니 군산시내와 지나온 금남기맥 능선들이 한 눈에 보인다.
갑자기 불어닥친 눈보라와 세찬 바람이 너무 세어서 2분만에 전망대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추워도 너무 춥다.
서해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산꾼을 주눅들게 만든다.
전망대에 설치된 안내판의 모습
금강하구언 너머에 아련히 보이는 구) 장항제련소(LS메탈)의 모습
예전에 기벌포라 불렀던 군산 하구언의 모습
옛부터 군산은 외세의 약탈과 침략으로 얼룩진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한 군산(기벌포)은 삼국통일의 큰 획은 그은 세번의 전투가 있었다.
삼국통일의 큰 획을 그은 세 번의 기벌포 전투군산은 백제시대에 기벌포라 불리우던
지역이었는데 기벌포는 넓게는 현재 금강 하류 지역을 나타내었고 좁은 의미로는
군산 인근 지역을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이르는 뱃길이
금강뿐임으로 인하여 기벌포 즉 군산은 군사적 요충지역이 되어 역사책에 삼국통일전쟁의
가장 중요한 세 번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전투는 나당 연합군의 백제 기습공격 때 소정방의 당나라군이
상륙작전을 벌인 기벌포 상륙작전의 현장이 곧 군산지역인 것이다.
이때 침입해 오는 당나라군을 맞아 항거하다 죽음을 당한 분들을 기리는 오성인대제가
매년 군산의 오성산 정상에서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다.
두 번째 전투는 663년 쓰러진 나라를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나당 연합군과의
기벌포 해전 혹은 백촌강 해전이라고 불리우는 전투가 바로 금강하구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패배함으로써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세 번째 전투는 백제, 고구려 멸망후 신라를 포함한 우리의 땅을 직접 지배하려는
당나라군에 맞서 신라군이 전쟁을 하게 되는데 매초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이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을 이곳 기벌포에서 20여회의 전투 끝에 승리함으로서 한반도
남부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마지막 전투가 군산지역에서 있었다.
군산이 백제시대에 기벌포라고 불리우며 많은 인구가 거주했던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시대 군산에 살았던 사람들의 외세 저항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통일신라 때는 전국을 9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전주는 그 중 하나였다.
전주에는 다시 10군이 있었고 그 중 하나인 임피군(백제의 시산군)은 함열현(백제 감물아현),
옥구현(백제 마서량현), 회미현(백제 부부리현)을 거느렸다.
고려 현종(10C 초) 이후에는 전주목 아래 임피현이 있어 현령을 두고 현령이 없는
회미, 옥구, 만경 등의 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 들어서 가장 흥미있는 이 지역의 역사는
왜구의 침입과 성산면 창안마을에 자리하고 있었던 조창(진성창鎭城倉)의 운영일 것이다.
조창이란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두는 곡식을 개경(고려시대 서울)으로 실어 가기 위해서
해안이나 강가에 두는 보관창고로 고려는 전국에 12조창을 두었다.
이 중 하나인 진성창이 지금의 성산면 창오리 망경산(望景山), 창안 방죽 근처에 있었다.
이 곳에 토성을 쌓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였으며 이를 노리는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진성창 인근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가장 유명한 싸움이 바로 진포대첩이다.
고려 우왕6년(1380) 8월 왜선 500척이 진포 입구에 침입하여 밧줄로 서로 묶어
일부는 배를 지키고 일부는 상륙하여 노략질하고 백성을 죽였다.
이 때 나세, 심덕부, 최무선 3장군은 이미 최무선이 만든 80여 척의 병선에 역시
최무선이 만든 화통, 화포를 설치하여 진포에 이르렀다. 왜의 병선에 다가가 일시에
화포를 쏘아대자 적의 배는 서로 묶어 놓은 터라 일시에 불타 가라앉아 버리고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 때 육지로 도망친 적이 옥천, 영동을 거쳐 전국을 휩쓸고 다니다가 이성계 부대에
의하여 황산(남원 운봉)에서 거의 전멸을 당하는데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월면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근대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시내의 모습
군산은 근대문화의 도시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에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한 항구도시이다.
다른 항구와는 달리 오직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군산은 일본인의 도시로 호남과 충청도의 쌀은 이곳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강제로 수출됐다.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했던 역사적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군산이다.
수탈의 아픈 흔적은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라는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그려진다.
과거문화 자료들을 근거로 근대문화를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체험학습의 장이 많다.
일제시대에는 군산의 인구 중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중 5:5정도나 됐다고 한다
내항을 중심으로한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으로 주거하는 지역이다.
현재 원도심(구도심 지역)의 건물 가운데 약 20%는 일제시대 지어진 가옥이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는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로 1909년에 창건됐다.
이를 미루어보아 이전에도 일본인이 군산에 많이 거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국사는 일본 조동종에서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군산에 있는 5개의
일본 사찰중에서 가장 컸다고 한다. 동국사 인근에 있는 해망동에는 구 히로쓰 가옥이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가 게다를 신고 나오는 장면을 촬영했다고
해서 하야시 집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집은 포목점을 경영하여 큰 돈을 번 뒤 군산부의회
의원을 지낸 히로쓰의 저택으로 일본퐁의 정원이 아름답다고 한다
월명공원 아래로는 해망굴이 있는데 1926년 10월에 개통된 터널로써 (구) 군산시청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만든 반원형 터널이다.
내항에 자리잡은 구 군산세관은 1908년 6월에 완공된 건물로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등 건축재를 수입해 유럽 약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부잔교도 수탈의 상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배들이 부두에 정박할 수 없자
수위에 따라 높이를 자동 조절할 수 있는 부잔교를 설치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는 한해에 200만석의 쌀이 이곳에서 실려 나갔다고 한다.
점방산(135m:13:05)
전북 군산시 월명동과 해명동 사이에 있는 월명공원에 있는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상봉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말까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에는 점방산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정자가 세워져 있어
전망이 좋은 곳이다. 옛날에 이곳 군산은 왜구 침범이 빈번하였고 그때마다 이곳에서는
봉화를 올려 위급한 사항을 알리곤 하였다.
왜구가 접근해오면 봉화를 3개 올랐고 이 급보를 개경의 우왕에게 알렸으며 최무선으로
하여금 왜구를 물리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최무선은 이곳 금강하구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왜적선 500척을 물리쳤는데 이 전투가
유명한 진포대첩이었다.
사진찍기 명소라는 점방산 전망대 아래에서
이 선생님과 함께 군산제1수원지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이 선생님의 멋진 포즈
날씨가 너무 추워서 서둘러 점방산을 내려와 군산 도선장으로 향한다.
점방산 갈림길을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서다 다시 오르니...
능선 우측 아래로는 신천암이 보이고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오르막을 오르니 좌측 아래에는 절개지가 있고 안전을 위해
쇠파이프로 울타리를 쳐놓았고 바로 아래에는 금강 하구언이 보인다.
장계산(108.2m:13:25)
군산시 해망동 월명공원의 일원으로 공터에는 예전에 헬기장으로
사용한듯하다. 산불감시초소와 삼각점(△군산 302 1980 재설)도 박혀있다.
금남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에 서니 남다른 감회가 다가온다.
서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당히 드세다. 산불 감시초소를
보호막으로 하여 바람을 피하며 마지막 남은 영지술과 과메기로 정상주를 마신다.
장계산 정상 3등 삼각점
장계산에서 바라본 금강 건너 장항제련소의 모습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국내 비철금속산업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1962년에는 한국광업제련공사가 되었으며, 1972년에는 한국광업제련주식회사로 민영화되었다.
1986년부터 스테인리스 파이프 제조설비 등 금속가공사업에 착수했으며, 2000년 현재
한일합작회사인 LS-Nikko동제련의 장항공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용광로의 준공으로 처음에는 동제련만 이루어졌으나 1965년 연제련 설비가 준공되었으며,
1974, 1976년에는 동제련 공정이 증설되었다. 1982년 온산 동제련주식회사를 흡수·합병함에
따라 1983년 귀금속공장이 온산제련소로 이전했으며, 1984년에는 주석제련 설비가
준공되어 구리(동)·납(연)·주석을 전문적으로 제련하게 되었다.
장계산 정상에서 마지막 술을 비우고 추위를 피해서 서둘러 내려오니
좌측에는 매점이 있고 군산 3.1운동 기념탑이 나온다.
군산 삼일운동 기념비(13:43)
전 민족적 항쟁인 3.1운동은 전국 어디에서나 있었지만 군산은 3월 5일부터
일어났고 이것은 호남지방 최초로 지방 3.1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군산 구암동(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본래의 이름은 궁멀弓乙里)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학교인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인 김병수가
2월 28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가지고 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박연세, 송현호, 고석주,
김수영 등에게 전하였고 그들은 그곳에서 3,500장을 더 인쇄하여 기독교 신자에게
돌리고 널리 인근 지방까지 나눠주었다.
이어 태극기를 만들고 조직을 갖추어 만세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무장 경찰관 수십명이 와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교사를 붙잡아 가는 바람에 6일 설애장터서 계획된 만세 시위는 못할 형편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김수영, 고석주 교사와 학생들은 당장 선생님의 석방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군산경찰서 앞에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전북 최초의 만세 시위였다.
이때 몰려간 영명학교 학생 70명 가운데 과반수를 유치장에 잡아 넣었다.
경찰이 주동자를 잡아 넣고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3월 5일의 만세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주로 학교와 예수병원 사무원들 그리고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까지 합세한 군중 500여명은 설애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까지 갔다. 경찰서 앞에서의 시위가 점점 열기를 더해가자 일본 경찰은 재향군인들과
익산에 있던 헌병대의 응원까지 요청할 실정이었다. 그때 붙잡힌 사람은 모두 90명이었다.
이런 만세 시위는 열기를 더해 3월말에 군산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입학 거부에
이어 학교에 불을 질러 일본 경찰을 놀라게 하였다.
3월 28일에는 일본인이 많이 사는 대화정(현 영화동)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3월 30일에는 다음날 열릴 만세 주동자 공판을 앞두고 시민들 수천명이 밤에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시내에서 일본 경찰과 큰 충돌이 있었다.
다음날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열린 법정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군산에서는 3월에서 5월까지 시위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의 의거 횟수는 21회였고 참가 연인원은 25,800명이었으며 21명이 죽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에 군산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6,581명이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일본식 절인 동국사가 있다.
동국사 [ 東國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로서 군산시 금광동에 있다.
1913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승려 우치다(內田)에 의해 일본 조동종(曹洞宗) 사찰인
‘금강사’로 창건되었고 8·15광복 후 김남곡 스님이 조계종 사찰 동국사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정토진종 대곡파(淨土眞宗大谷派)가 포교를 개시하였고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고 일연종(一蓮宗)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일본불교의 한국진출은 순수한 불교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에
同化시키려는 일본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본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전국에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하였다.
금강사가 창건되기 전 군산에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강사를 창건한 내전불관(內田佛觀)은 1909년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군산지역을 순석(巡錫)하다가 군산 일조통(一條通)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하였다.
1913년 7월에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단기간에 본당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단가(檀家)에서 많은 시주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금강사에 등록된 단도(檀徒)로는 대지주였던 궁기가태랑(宮崎佳太郞)과 웅본이평(熊本梨平)을
비롯하여 대택등십랑(大澤藤十郞), 하전길태랑(下田吉太郞) 등이 있었다.
동국사 대웅전 전경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형식의 에도시대(江戶時代) 건축양식이다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群山 東國寺 塑造釋迦如來三尊像 및 腹藏遺物) 보물 제1718호
군산 동국사의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석가여래와 2대 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로 구성된 삼존이다.
150cm가 넘는 대형상으로는 유일한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한 석가여래삼존이며,
이 불상 들에서 나온 전적물이나 복장물의 기록에서 이 상이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이름이 알려진 조각승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불상양식이 형식적으로 흐르기 전 단계의 소조불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며
세 불상에서 나온 복장물은 후령통의 제작기법, 내용물, 재질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군산(群山) 동국사(東國寺)는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한일합방.韓日合邦) 1년 전인 1909년 일본 승려(僧侶) 선응불관(善應佛觀)스님에 의해 창건(創建)되어 일제 강점기 36년을 일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품으로 돌아온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명치(明治)42년이다. |
대웅전은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 양식을 따른 사찰로 한국의 전통사찰과는 다른 양식을 띠고 있다.
동국사에 들리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기맥길 능선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월명공원의 이름이 된 기맥길에서 떨어져 있는 월명산으로 가기 위해 3.1운동
기념탑 뒤의 운동시설이 즐비한 곳을 지나서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월명산 정상에서 삼각대를 이용하여 셋이서 인증샷을 남긴다.
월명산(月明山:101m:13:47)
군산시 월명동에 있는 산으로 3.1운동 기념탑 위에 있는 산으로
금남기맥에서 5분정도 떨어져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폐벙커가 있다.
월명산 정상에 있는 폐벙커
월명산 정상을 찍고 다시 3.1운동 기념탑으로 내려와서
좌측으로 나있는 타탄트랙을 따라 도선장으로 향한다.
군산 구불길을 따라서 편하게 간다.
조금을 더 가니 서군산 로타리클럽에서 세운 ‘네가지 표준’이란 윤리강령비도 있고...
해망동 배수지
금강매점(13:58)
금강매점을 지나니 내 평생 처음보는 화장실 이정표도 만나고...
군산어업정보 통신소(77m:14:00)
채만식 문학기념비
문학비 앞에 서면 군산까지 흘러와 서해 바다와 합쳐지는 금강, 눈물의 강이라고도 했고
슬프다고도 했던 '탁류'가 보인다. 그 너머로 <탁류>의 초봉이 아버지, 정주사의 고향 충청도 땅도 보인다.
채만식은 1902년 군산 임피에서 태어났다. 그가 쓴 <탁류>는 군산이 배경인데 1930년대에
일제 수탈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농민들이 도시 산동네에서 어떻게 살아가다 몰락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직도 소설처럼 월명 공원 아래에는 일본식 집들이 있다.
미두장, 째보 선창, 초봉이 남편 고태수가 다녔던 조선은행, 초봉이네가 살았던 콩나물 고개도 있다.
처음에는 맑았던 물이 점차 탁하게 바뀌어가듯이 일본의 가혹한 탄압이라는 배경하에 비참해져가는 주인공 초봉이의 삶을 암시해주는 제목 탁류.
탁류는 1930년대의 사회상을 리얼하게 담아낸 세태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1930년대에 살아보진 않았지만 그 당시 사회상이 어땠는지를 지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다. 탁류를 비롯한 삼대, 태평천하 등 채만식의 작품에는 어려운 어휘와 일본어체가 많고 여자로서 불편한 장면(강간 상황이던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태도 등)도 많았고 무엇보다 주인공의 행동과 상황이 머리로는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낀다.
결국 초봉에 싫증을 느낀 제호는 떠나고 초봉은 자기 신세를 서러워하면서도 자기 가족의 궁핍한 살림을 돌보기 위해 장형보에게 희생하듯 몸을 맡긴다. 형보와 살면서 몸도 마음도 병들어 가는 초봉을 보며 아무리 작품이지만 끄집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봉은 학대당하는 자신과 자신의 딸을 보며 자기에게 생긴 모든 불행은 형보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고 결국 자살할 결심을 하고 형보를 죽이게 된다.
어떠한 이유라도(연쇄살인범이나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살인은 정당한 행동이 될 수는 없지만 초봉이
자신의 딸과 동생에게 함부로 하는 형보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 지를 생각하면 살인 행위가 이해가 된다.
내가 그 상황이었어도 형보를 10번이고 100번이고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사랑하는 사이가 된 계봉이와 승재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초봉을 구출하려 노력하고 초봉은
그런 승재가 아직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해 자살을 포기하고 자수를 결심하게 된다.
문학 기념비 뒤에 적힌 탁류에 대한 내용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 내에 고요하던 수명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으로 밋밋이 충청 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써 물은 조수까지 섭슬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넓이가 훨씬 넓게 퍼진게 제법 양양하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 무엇인고
탁류채 얼려 좌르르 쏟아 버리면 강은 다하고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 곳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 문학비를 지나니 바다조각공원이 나온다.
군산 바다조각공원(14:10)
바다조각공원 작품
바다조각공원에 있는 작품
수시탑(14:15)
월명산 정상에 있는 탑으로 군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선박의 돛모습과 군산의 번영을 상징하는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
수시탑 앞에는 이영춘 박사의 약력이 기재된 비가 있다.
쌍천 이영춘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쳐라 불리는데 호인 쌍천(雙川)은 두 가닥의
샘물 즉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샘물과 영혼을 치유하는 샘물이라는 뜻이다.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1903년 10월 태어났다. 평양고보 사법과 시절 담임선생이던
경성제대 와다나베 교수의 소개로 전북 개정의 구마모토 농장에 소속된 2만여 명 소작농
가족을 돌보기 위해 1935년 4월 33세의 젊은 나이에 자혜의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호교사제와 의료보험조합을 실시하였다.
해방이후 개정병원의 설립자인 쌍천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였기에 이영춘 가옥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본래 개정병원 터에 있었던 조선시대 최대의 농장주이었던 구
마모토 리헤이의 별장 건물로 당시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건축비를 들여
1920년대에 초호화 건물로 건립되었다.
서구식과 한식, 일식 3개 문화의 여러 건축양식이 합쳐진 이 건물은 설계는
프랑스인이 하고 감독은 일본인이 했으며 시공은 한국인이 했다고 한다.
빙점과 모래시계의 촬영장으로 유명하다.
수시탑에서 바라본 금강과 하구둑의 모습
전북 장수군의 수분리에서 발원한 금강은 전북 북부 지방과 충청도 땅을 동서로 가로질러 군산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숱한 역사와 애환을 담은 장장 400여km의 금강 하구에는 하구둑이 생겨나 새로운 관광의 명소로 부상하였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군산에서 장항으로 가려면 뱃길로 왕래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하구둑이 생기면서 군산과 장항 사이를 단숨에 자동차로 왕래하게 되었고,
주변경관 또한 상전벽해라 할만큼 달라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유원지가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금강은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 등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굽이치며 흐르는 강의 물결이 비단결 같다는 뜻으로 금강(錦江)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강외에 호강(湖水)으로도 불린다. 금강 하류가 폭이 넓어 호수로 연상해서였을 것이다.
해병대 전적비
해병대 전적비를 지나니...
의용불멸의 비가 나오고...
독립운동가 이 인식 선생의 동상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서 출감 후 부모님이 상속해준 전 재산을 정리. 머슴 벙어리 삼복이의
도움을 받아 상해임시정부에 그당시에 독립운동자금으로 8천만원을 헌납하셨다고 한다
군산 라이온스 클럽에서 제작한 생각하는 시민상도 만나고...
드디어 금남기맥의 종착지인 군산 도선장이 있는
군장대교 건설현장이 코 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군산횟집(14:35)
도로를 건너서 만난 군산횟집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금남기맥 입수지점인 군산 도선장이 있는 군장대교 건설현장이 나온다.
군산의 명물인 박대를 만나고...
구별이 쉽지 않은 박대 박대는 참서대과 생선이다. 참서대과 생선에는 박대 외에 참서대, 개서대, 용서대 등이 있다. 서대라 부르는 생선의 제 이름은 참서대이다. 또, 지역에 따라 여러 참서대과 생선을 서대라 부르기도 한다. 참서대과 생선은 황해와 서부 남해에서 많이 잡히는데, 참서대와 박대가 주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참서대과 생선의 구별을 두고 시장에서는 다소 혼란스럽다. 겉모양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국립수산과학원의 자료 등을 보면 박대가 가장 큰 참서대과의 생선이다. 다 자라면 40~60센티미터에 이른다. 그 외 참서대 등은 다 자라봤자 20센티미터 내외이다. 그런데, 어린 박대를 두고 참서대와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노련한 어부는 머리 끝의 굴곡을 보고 구분을 하지만, 따로 놓고 보면 이도 쉽지 않는 구별법이다. 군산의 어민들은 참서대과 생선들은 그 맛이 비슷하니 굳이 구별할 것은 없다고도 한다. 또 다르게는, 이렇게 말하는 어민들도 있다. "박대는 말려 먹는 것이고, 서대는 회로 먹는 것이다." 박대든 참서대든 작은 것은 회로 먹을 만하고, 큰 박대는 살이 제법 있으니 말려서 굽거나 찌거나 해서 먹는 것이 맛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참서대과 생선은 뭍에서 가까운 바다에서 잡힌다. 그러니 예부터 흔히 잡아먹었던 생선이다. 조선의 문헌에 설어(舌魚)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서대의 어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참서대과 생선은 혀처럼 생겨 설어라 하였을 것이고, 한자어 '설'이 '서'가 되고 그 뒤에 '대'가 붙은 것일 수도 있으나, 혀의 사투리로 '쎄''헤'라는 단어가 있으니 우릿말에서 온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혀를 닮은 물고기란 뜻으로 '쎄대''헤대'라 하였다가 서대로 변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박대는 왜 **서대라는 이름을 갖지 않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 크기가 확연히 달라 따로 불러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하였던 것일까.
'속'이 좁기로는 밴댕이 못지않다 박대는 얕은 바다에서 자란다. 민물이 들락거리는, 바닥이 뻘인 곳이 그 서식지이다. 그 뻘 바닥에 바짝 붙어 어린 게나 갯지렁이 등을 잡아먹는다. 먹는 양이 많지 않은지 몸통에 비해 소화기관 등 내장은 매우 작다. '속'이 좁은 생선으로 흔히 밴댕이를 들먹이는데 박대의 '속'도 그에 못지않다. 속이 좁으니 성질이 급하고, 따라서 그물로 잡아 올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는 것도 밴댕이와 똑같다. 그래서 살아 있는 박대는 어민도 보기 어렵다 한다. 산란기는 5~7월로 알려져 있는데, 어민들은 겨울이면 알집이 잡힌다고 한다. 맛있기로는 겨울에서 봄까지이다. 산란기 이후에도 알이 든 박대가 시장에 나오는 것은 냉동하여 두었다가 그때그때 가공하여 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수입 참서대과 생선도 가공하여 팔리는데, 눈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하다.
박대는 생으로 조리하는 일이, 적어도 군산에서는, 거의 없다. 어물전에서 말려서 판매한다. 박대의 등짝 껍질은 질겨 이를 벗겨서 말린다. 거무스레한 껍질을 벗기면 박대의 옅은 분홍빛의 속살이 드러난다. 이를 소금물로 간하듯 씻어 볕에 말린다. 노천에서 말리니 그 말리는 계절이 퍽 중요한데, 사계절 중에 겨울에 말리는 것이 가장 좋다. 벌레도 없고 온도와 습도가 낮으니 상할 위험도 없기 때문이다. |
금남기맥의 맥이 입수하다
산경표가 가리키는 금남정맥은 진안의 조약봉에서 발원하여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서
부여의 부소산에서 백마강의 조룡대로 가라앉으며 그 맥을 다한다.
이는 정맥은 강의 울타리라는 물 가름의 원칙으로 볼 때 오류라고 지적되어왔다.
산경표의 원리에 충실하자면 금남정맥은 군산으로 산줄기를 이어가는 대동여지도가 합당해 보인다.
현재 많은 정맥꾼들은 산경표를 따라서 금남정맥 종주에 나서고있다.
산경표에 나타난 산줄기가 그 흐름이나 산세로 볼때 당당하고 멋지고 걷는 재미도 좋다.
금남정맥의 금만봉(750m)에서 북서쪽으로 또 하나의 산줄기가 분기하는 대동여지도를
따르는 금남기맥인데 이 산줄기는 옛 백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전주, 익산땅을 크게휘감으며 지나며
군산의 장계산(108.2m)까지 이어지며 마루금 우측의 금강과 좌측의 만경강이 만나서 서해바다와 합류하는
군산 앞 바다에서 그 맥을 지금 하려고 한다.
3개월에 걸쳐서 금만봉에서 걸어와 지금 이곳 군산앞바다에 입수하려고 하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2구간부터 같이 걸어온 동료산꾼 젠틀맨과 조우.
그리고 논산 연무대에서 만난 貴人 이 선생님과 귀한 인연... 잊지 않을겁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좋은 추억 가슴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군산도선장(14:40)
졸업 인증샷
졸업기념으로 군산도선장 옆에 있는 군산종합 수산물센터 2층으로 간다.
군산 도선장 횟집(14:50)
논산 연무대에서 오신 이 선생님과 젠틀맨님과 함께 자축파티를 연다.
익산횟집
이곳은 전라도 지방이라 그런지 횟값도 싸고 음식이 푸짐하다.
쓰까다시가 너무 많이 나와서 정작 회는 맛있는 줄 모를 정도이다.
2시간에 걸친 졸업파티를 마치고 논산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횟집에서 바라본 군산 앞바다의 모습
횟집을 나와서 택시를 타고 군산에 와서 꼭 들려야 할 전국 5대 짬뽕집의 하나인
중국집 복성루는 영업시간이 끝나버려서(15:30) 포기하고 터미널가는 길에
군산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단팥빵의 명소인 이성당에 들린다.
이성당 빵집(17:45)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이성당 내부에 들어서니 단팥빵을 사기 위해서
손님들이 줄을서서 대기하고 있는데 빵은 오후 6시에 나온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빵맛도 보지 못하고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이성당 빵집은
1920년 군산시 중앙로 1가에는 '이즈모야'라는 제과점이 있었는데
이 제과점은 일본 시네마현의 '이즈모시'의 지명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국으로 이주한 '히로야 야스타로'라는 일본인이 이 제과점의 주인이였는데
이곳에서는 찹쌀과자의 일종인 아라레와 일본식 전통과자를 주로 팔았다고 한다.
1930년대 후반 일본 정부는 이즈모야를 군인들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으로 지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회문화적,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공간이였기도 하고...
그러나 식민해방과 동시에 군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서둘러 돌아가야 했고 그들이 남기고 간 자리에서 이성당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성당의 초대 사업주는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집이란 뜻에서 지금 명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성당과 함께 빵을 만들 때 필요한 설탕,밀가루등의 재료를 취급하던 삼영상사도
함께 운영했고... 당시 이성당 내부에는 우물도 있었다고 한다.
우물물은 빵 반죽,아이스케키 등을 만드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하죠.
처음 이성당에는 빵이 없었고, 주로 과자와 사탕의 종류가 다양했고,
이후 제빵 기술을 배워온 기술자가 빵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성당은 그야말로 맨땅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성당에서 일했던 기술자는 직접 오븐을 만들어서 사용했으며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아치형 덮개를 올려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오븐은 나무 오븐,연탄 오븐,가스 오븐,전기 오븐으로 순차적으로 변해갔고
이성당과 이즈모야 역사의 근원을 쫓아 내려가다보면 근대의 맛,재료, 조리기구의
역사까지 근접할수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6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성당은 그 존재만으로도 연구해서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이성당 빵집안에 빵을 기다리는 손님들.
요즘 대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장악을 하고 빵집까지 운영하는 현실에서
이곳 이성당에서 참으로 신선함을 느꼈다. 조그만 곳도 맛으로 승부하면
가능한 모양이다... 내가하는 인테리어업도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상당히
타격이 많은데 이곳 이성당을 보니 나 역시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할듯 싶다.
군산서 서울가는 고속버스표
택시에서 내려 논산으로 가시는 이 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린 금방 출발하려는 버스표를 끊어서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
군산고속버스 터미널(17:55)
18:00발 서울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는데 추운 날씨탓인지
고속도로는 한가하다. 20시 30분에 서울에 도착하여 젠틀맨님과
호프집에서 치킨 한마리에 생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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