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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금남(금강)기맥(終)

금남기맥 제4구간 - 석불사거리에서 거점재까지

by 범여(梵如) 2012. 12. 24.

☞산행일자:  2012년 12월 23일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간간히 눈발이 날림, 강한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27.2km(어프로치1.2km포함) / 9시간05분 소요

☞참석인원: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둘이서

☞산행코스: 석불사거리-상마사거리-23번국도(정금주유소)-호남선 철도-용산리 표시석-갈마고개

                 711번 지방도로-함라초교-함라 삼부자 가옥-웅포재-함라산 갈림길-함라산-봉화산

                 입점재-칠목재(722번 지방도)-소룡마을-어래산-179봉-143봉-방령고개                

                 NO18송전탑-수레재-홍법재-망해산 동봉(팔각정자)-망해산-임도-취성산-부곡재(거점재)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삼기면,낭산면,황등면,함열읍, 함라면, 웅포면 / 군산시 서수면, 나포면

 

지난 19일에 18대 대통령으로 새누리당의 박근혜후보가 대통령에 당선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소간 갈등, 보수, 진보간의 갈등과 이념차이, 갈수록 커져가는 빈부격차 등 풀어야 할

숙제도 산적해 있다. 늘 初心을 잃지마시고 반대한 48%의 유권자들을 보듬어 줄

정책을 펴시길... 부친인 박 정희 대통령이 비록 독재자라는 소릴 들었지만 그래도

그 분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이만큼 먹고 사는게 그 분의 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아버지를 뛰어넘는 정책을 펴시어 성공한 대통령이로 역사에 기록되시길 바란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것 같다. 추워도 너무 춥다... 그래도 목적 산행이라 빠질 수 없어서

오늘 저녁도 베낭을 메고동료산꾼 젠틀맨님을 만나러 영등포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서 익산가는 무궁화호 열차표

금남기맥 4구간을 산행하기 위해서 오늘 저녁에도 어김없이 베낭을 메고

영등포역으로 향한다.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조우를 하고 열차를 타기위해

플렛홈으로 내려가는데 차가운 바람이 상당히 세차다.

아직까지 감기 기운이 남아서 목은 아프고 기침이 심하지만 산행은 멈출 수가 없다.

이젠 주말마다 하는 산행이 일상화되고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범여에겐 어쩌면 수행의 한 방편인지도 모르지. ㅋㅋㅋ

영등포역에서 20시 32분발 익산행 열차에 몸을 싣고이 사가지고 온

캔맥주 하나씩을 마시면서 2주간에 있었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산행정보도 교환한다.

완행열차를 타고가서 하는 산행은 산악회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멋과 낭만이 있어서 그런지 범여는 자꾸만 이런 맛에 푹빠지는 느낌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천안역을 지날 즈음에 동료산꾼 젠틀맨님이 2주전에 참으로 많은

신세를 진 연무대 이 영서 선생님에게 안부 전화를 올리는데 아 글쎄! 이 분이 논산역에

내려서 당신집에서 자고 가라고 성화이다. 내가 옆에서 잰틀맨님을 나무란다.

지난번에 민폐를 끼쳤으면 됐지. 또 가느냐고 하니까.  막무가내인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익산행을 포기하고 논산역에서 내리니까 선생님이 차를 대기하고 기다리신다.

논산역(22:56)

논산역에서 기다리는 이 선생님 차를 타고 20분정도 달린 다음에 연무에 도착한다.

우리를 위해서 방도 따뜻하게 해놓으셨고 여러가지 준비를 해놓으셨다.

이 선생님은 참 사람을 좋아하시는 모양이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를 2번이나 이렇게 환대를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다.

오늘도 당신이 직접 끓이신 김치찌게에다가 소주 3병에 캔맥주 4개를 마시고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든다.

석불사 사거리(06:35)

새벽 5시에 일어나니  이선생님께서 푹 끓인 곰국에다가 아침 식사를 차려 주신다.

정말 미안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차량에

시동을 걸어 히터를 털어놓고 식사가 끝나니 연무에서 꽤나 먼 석불사 사거리까지

차를 태워 주신다. 새벽에 눈이 살짝와서 미끄러운데도 불구하고...

 

연무에서 출발하여 호남고속도로를 굴다리를 지나 육균부사관학교 정문을

지나서 좌측으로 꺽어져 닭고기로 유명한 하림 공장을 지나 석불사 사거리로 향한다.

 

우리를 석불사 사거리에 내려주시고 가시면서 안전산행하라는 말씀까지 하시고...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장비를 점검한다. 아침 6시 30분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주위는 칡흙같은 어둠이 깔려있고 헤드렌턴을 켜고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사거리 건너에 있는 석불사로 향한다. 

석불사 일주문(전북 익산시 삼기면 소재)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석불사에 들려서 오늘의 무사산행을 기원하면서

베낭을 메고 선 채로 부처님께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산행을 시작한다.

석불사 담장(06:45)

산행을 시작한다.임진년 음력 11월 열하룻날 새벽의 어둠속에 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한 채 도로를 따라서 길을 걷는다.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부터

함라산 아래까지 약 12km 가량을 도로와 들판만을 걷는다.

 

이곳은 일제시대에 농지를 조성하기 위해서 산을 깔아 뭉개어 토지를 만든탓에

맥길은 아예없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없는 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도상의 脈이기에

걸어야 할 길이다. 길에는 눈이 살짝 내렸고 그 아래는 얼음이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시작부터 만나는게 산업단지 조성부지이다. 도로와 공장부지를 만드느라

온 천지를 파헤쳐져 있어서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도로를 걸으면서 산행을 시작초에 만나는 우측의 중화요리집

이른 새벽인데도 식당안에 불이 훤히 켜져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축사가 있다.

어둠속에 10분을 조금넘게 걸어가니 좌측에는 아마 조면관련 회사인듯한

알룩스입중(주)라는 회사가 나오고 어둠속에 드문드문 공장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계속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그런데 어젯밤에 마신 술탓인지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에 도로옆 공터에서 시원하게 버리고나서 다시

계속해서 직진을 하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하다. 그러나 어둠속에

확인이 안되니... 다시 지도를 확인하니 구간을 놓쳐 버렸다.

다시 되돌아와서 복기를 한다. 도로를 가다가 좌측으로 꺽어져야 하는데

직진을 한 것이다. 그 바람에 약 15분정도 알바를 한 것이다.

 

삼거리인듯한 도로공사 현장 앞에는 방직업체인 ‘전방 익산공장’ 신축공사장에서

 좌측으로 꺽어서 도로공사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데 날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삼기제일교회(07:35)

알룩스입중에서 조금을 더 가다가 버스가 다니는 직진 도로를 버리고

좌측의 공단지역 도로를 따라가면 우측 언덕위에 삼기제일교회가 나오고

이곳에서 교회를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다시 공단도로를 횡단해야 한다.

삼기제일교회를 지나니 또다른 공단도로가 조성되고 다시 도로를 건넌다.

우측으로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이른 아침에 잡부들이 조경공사가 한창이다. 

날이 밝으면서 미륵산이 뚜렸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해가 뜬는지 구름이 벌겋게 보인다.

뒤돌아보니 미륵산은 더욱 뚜렷히 보이고 공단부지를 지나 小路로 접어든다.

소로로 접어드니 좌측으로는 성광이라고 써있는 벽돌공장 굴뚝이 보이고

묘지군들이 나타난다. 눈이 내린 小路를 따라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벽돌공장 정문을 지나니 호남선 고속전철 철로공사가  한창이고 낭산면 표지판이 나온다 

뒤돌아보니 벽돌공장 굴뚝위로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매일 뜨는 해이지만 산행할 때마다 늘 새롭게만 보인다.

그러다가 눈 아래에 유리알처럼 얼어있는 빙판길에서 된통 넘어진다.

엉덩이가 얼얼하고 땅바닥으로 짚은 팔목이 엄청 아프다.

다행히 베낭 덕분에 머리는 괜찬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다.

상마사거리(08:00)

전북 익산시 삼기면 상마리 사거리로 삼례와 웅포를 잇는 723번 4차선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교통량이 상당히 많은 곳이다.   벽돌공장 소로에서 나와 좌측으로

꺽어져 723번 도로를 건너서 우측 도로로 간다. 좌측에는 인공수로가 있다.

신호등을 건너서 수로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농.수로를 계속 걸어서 직진을 하는데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도로 준공 표시석도 만나고...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며 수로가 계속 이정표 역할을 한다.

좌측에 형제농원이 나오고 이곳에서 직진으로 걸어간다.

형제농원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니 비닐하우스 단지와 마을이 나온다.

마을에서 직진을 한다. 수로는 계속 따라오고 이제부터 비포장 농로가 나온다.

수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가는데 오늘 처음으로 선답자의 시그널을 만난다.

우측에는 진주 정씨의 가족묘지가 있고...

23번 국도(08:20)

전남 강진에서 충남 천안을 잇는 23번 국도가 지나가는 도로를 만난다.

국도 옆에는 Oilbank 정금 주유소가 길 건너에 있고 기맥길은 도로 좌측으로

가서 신신판넬 앞을 지나서 200여m 를 가니 건널목이 있고 좌측에는

익산의료단지가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서  골목안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건설자재를 취급하는 신신판넬을 지나서  200여m를 걸어서 간다.

익산의료단지 앞에있는 신호등을 건너서 골목안으로 직진을 한다

광명신재생산업과 유한회사 대한RPF 골목안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광명신재생공장을 지나서 가니 (주) 그린환경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골목으로 계속 기맥길을 이어간다.

호남선 철도 용산리 건널목(08:35)

호남선 철길의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용산리 건널목이 나오고 철길을

건너서 양계장 단지가 보이는 ㅜ자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호남선 철길의 모습

양계단지가 나오고 이리노회회관 350m 이정표를 따라서 걸어간다.

좌측 언덕에는 상당히 큰 양계단지가 있는데 지금은 계사(鷄舍)가 텅비어 있다.

이곳 익산은 우리나라에서 가금류를 가장 많이 사육하는 곳이라 그런지

양계장들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하림같은 대형업체들이 이곳 익산에 있다.

이리노회회관을 좌측에 두고 조금을 더 걸어가니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건너니 좌측에는 도사견같은 송아지만한 개들이 엄청나게 많다.

우리에서 짖어대는 개소리에 귀가 아플정도이다.

좁은 우리에 많은 개들이 갖혀서 꼼짝도 못하게 해놨다.

식용도 아닌것 같은데 왜 저럴까?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잔인한 것 같다.

이곳에서 도로 가운데를  걸어가니  왕복 2차선의 도로가 나타난다.

용산 초등학교앞 도로(08:50)

익산시 황등면 용산리에 있는 용산초등학교 앞 도로에서 다시 4km를 넘게

도로를 따라서 함라면에 있는 삼부자집까지 도로를 따라서 걸어야 한다.

미끄러운 도로에서 초반에 된통한번 크게 넘어진 학습효과 탓인지

상당히 조심스럽게 걷는다. 아직까지 넘어지지 않았으니 ㅋㅋㅋ

정겨운 이름인 뽀빠이 수퍼가 나온다. 몸을 녹이려고 따뜻한 음료를  사먹으려

수퍼를 가니 휴업중이라는 표지판이 있고 진열대에 물건은 전혀없다.

산꾼이 산을 가지않고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오늘 벌써 약 10km가량을 도로로 걸으니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산꾼도 산길을 걸어야 하는데

도로를 걸으니 탈이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곳도 엄연한 기맥길이기에

누가 대신 걸어주지 않는 이 길... 꾸준히 걸어간다.

용산리 마을 표시석(08:55)

이곳 Y 자 도로에서 좌측으로 길을 이어간다.

우측으로는 성내보건진료소 간판이 보인다.

주택 담장과 붙어있는 황교마을 버스 정류소가 있고 맥길은 계속 직진으로 이어진다.

구자마을 표시석(익산시 황등면 소재:09:00)

구자마을을 지나서 약간 굽은도로를 지나니 병풍처럼 둘러진 봉화산과 함라산이 보인다.

수확이 끝난 들판이 여유롭게만 보인다.

탑고지복지마을 버스정류소도 지나고 (유)모음수지쪽 도로로 계속 걸어간다.

시골 교회규모로는 꽤나 큰 에바다 교회를 지나고...

봉곡마을(09:20)

갈마재(09:23)

갈마재 고개에는 원불교에서 운영하는노인복지센터인 효도의 집도 있고...

노인복지센터를 지나니 참숯마을이란 육류가공공장도 나오고...

서해물류 센터를 지나...

익산군산축협이 나오고 건너편에는 축협이 운영하는 송아지 경매장도 보인다.

함라삼부잣집 표지판을 따라서 직진한다.

함라산 정상이 손에 집힐듯이 가까워진다.

행동교차로(09:32)

군산과 임피를 연결하는 711번 지방도가 있다.

이 도로는 함라면소재지를 우회하는 도로로 지방도임에도

불구하고 왕복 4차선 도로로 시원하게 뚫려있다.

함라초등학교 정문(09:35)

2008년도에 개교 100주년이였으면 1908년도에 설립이된 학교로 학교 연혁이 대단히 오래된 초등학교다.

함라면소재지의 모습

‘함라’라는 명칭은 이곳의 주산인 함라산에서 취한 것으로 전해지며 홍길동전의

 작자로 유명한 허균이 1611년(광해군3)에 함열로 귀양을 와 유배되어 있는 동안

 시가(詩歌)를 96권으로 묶은 『성수시화(惺#21471;詩話)』등 여러 작품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뒤의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옆으로 부를 가져온다는 길상(吉祥)의 의미로 알려진

소가 누워 있는 형세에서 따온 와우산이 마을 전체를 싸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일찍이 부농촌으로 자리 잡았다.

711번 구도로(09:38)

이곳에서 파출소를 끼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3시간 가까이를 걸어오면서 날씨가 추워 물한모금도 안 마셨더니만

힘이 들어서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한모금을 얻어 마신다.

동료산꾼 젠틀맨님은 먼저 가버리고 없다.

익산 함라 삼부자집

 일제 강점기에 이 세부자들은 익산을 대표하는 만석꾼이었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한양을 가려면 이 삼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갈 수 없을 정도라니...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지역에서 서로 비교되는 부자들이었고

집마저 가까웠으니 규모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1900년대 초에 한국 상류가옥의 변천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富의 축적에만 경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베품에 있어서도 경쟁적이어서 빈민구제나 사회봉사에도 재물 쓰기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인심은 함라’라는 말도 이들의 베픎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문화재로 등록된 높다란 붉은 토담을 따라 걷노라면 만나게 되는 일제 강점기시절

고래등같은 기와집 세채, 그러나 그 길과 집이 욕되지 않고 정겨운 까닭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삼부자의 인심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함라면 파출소를 찾아 뒤로 돌아가니 바로 조해영 가옥의 안내판을 만난다. 

조해영 고택 옆에 김육의 불망비를 세운 것은 조해영의 조부 조용규가 농장을 경영하여

부를 쌓았으며 대동법을 제정한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를 세우는데 공이 컸기 때문이었다.

함라 삼부자집 중에 조해영 가옥(09:40)

조해영가옥(지방문화재자료 제121호) 조부 조용규는 농장을 경영하여 부를 쌓았으며

 대동법을 제정한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를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신을 기리고 있다.

조 해영부자집에는 아마 후손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식당 간판과 된장을 만들어 파는지 장독대가 많이 보이지만

관리는 영 엉망이라서 기맥길을 지나면서 들리는 산꾼으로서는 실망이 크다.

조해영가옥(지방문화재자료 제121호)

관리는 영 엉망이지만 함라 삼부자집의 위용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본래는 여러채의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남아있다.

안채 상랑문에 ‘대정(大正) 7년’이라 명기가 되어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남향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며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는 알 수가 없다.

안채와 별채는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으로 배치하게 되어 있으나

안채는 남쪽을 별채는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안채의 난간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으며  모든 건불의 기와가 퇴락하였고

보존상태가 상당히 불량하다. 자세히보면 우리 전통가옥이라기보다는

일본 교토(京都)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일본풍의 냄새가 짙다.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조해영 부자집 고택 마당에는 대동법을 제정한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가 서있다.

비석의 지붕돌은 없지만 이수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는 봉황이고 몸통은 용이다.

한 쌍의 용봉문양이라고 해야 할까. 비석의 이수에 문양을 조각할 때 용봉차의 의미로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육의 차 사랑과 나의 관심이 맛 닿아 용봉문양을

단차(團茶)와 연관짓게 한다. 단차 즉 떡차에 용봉 문양을 새기면 용단봉병이 되었다.

용봉차의 시작이었다. 송나라 때는 단차를 만들고 숯불에 구워서 가루를 내어 마시는 말차가 유행하였다.

 황제에게 용봉차를 공납하는 다원이 있었고 시장에서는 금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고려 때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말차를 마실 수 있는 고려 청자 다완이 탄생되었다.

 고려의 왕실 귀족들과 선비들이 송나라에서 수입한 단차를 애용하여 고려의 임금도 신하에게 차를 하사하곤 했다.

 

혹시 비석을 조각하는 사람이 김육이 그 용봉차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에 차문화가 쇠퇴하였지만 고려 때의 영향이 조선왕실에 이어지고 있었다.

 김육도 명나라에 다녀왔기 때문에 차에 대한 지식을 집필하기도 하고 애용하면서

 백성들에게도 알리고 싶어했을 것 같다. 함라 지방에 우리나라의 최북단 야생차 군락지가

 있는 것을 보아서도 김육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되지 않는다.

익산 둘레길의 시작인 함라마을에는 함라 3부잣집과 돌담길이 있다.

김안균가옥(지방민속자료 제 23호) 부친 김병순은 진사를 지내 평소 마을에

걸인과 과객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으며, 주변에 많은 은덕을 베풀고 많은 재물을

사회봉사에 사용하여 그 소문이 백리 안까지 자자하여, '인심  좋은 함라'라는 명성을 얻었다.

 

조해영가옥(지방문화재자료 제121호) 조부 조용규는 농장을 경영하여 부를 쌓았으며

 대동법을 제정한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를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배원가옥(익산시향토유적제10호) 부친 이석순은 참봉으로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을 썼으며,

이배원은 교육사업가, 서예가로, 동생 이집길은 유명한 배우로 활동하면서 사회봉사에 헌신하였다.

조해영 부자집 고택을 나와 돌담길을 따라 기맥길을 이어가는데

 함라마을 돌담길을 따라 계속 걸어간다.

익산 함라마을 돌담길

 함라마을의 돌담길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주택인데도 담장이 높은 점이 특징이다.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이다. 그 밖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섞여 있다. 담장 일부는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 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되었다. 이곳은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다.

마을의 건축물은 새마을운동 당시 상당 부분이 신축 또는 개축된 것으로 시도민속자료 제 23호

 ‘김안균가옥’ 등의 지정문화재가 마을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차순덕 가옥의 담장은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한 보기드문 전통적인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어 눈에 띈다.

전통가옥들과 마을 한편에 자리한 문화재자료 제85호 ‘함열향교대성전’은 전통마을로서의 품위를

 더해주고 있으며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온 묵은 돌담길은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다.

김안균가옥(지방민속자료 제 23호)

의 건축년대는 오래되지 않으나 규모를 보면 대지가 2,318평에

건평만 188평이 되어 전북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가옥(家屋)이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나

 꾸밈 일부에 일본 건축 수법이 섞여 있는데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으로 당시 주택구조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이 가옥이 1920년대에 지어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적(傳統的)인

상류가옥이 이무렵에 어떻게 변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면에서도

강릉의 선교장(船橋狀)과 더불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김안균의 부친인 김병순이 1922년에 지었다고 하는데 김병순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사회봉사 등, 후한 인심덕에 장사와 농사가 아주 잘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인심도 넉넉해서 일대 백리안에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과거 화려했던 부농의 명성은 사라지고 없지만  고향의 정취는 그대로 남아있다.

가옥에 쓰인 나무는 금강산에서 베어와서 집을 지었다고 한다.

김 부잣집 고택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좀 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사유재산이라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판과 함께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구경도 못하고 그냥 돌담길을 걷는다.

김안균 가옥 행랑채 왼편에는 조그만 제각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고 그 안에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자세히는 볼 수 없으나

아마도 열녀문으로 추정되는 듯 하다.

아쉽게도  삼부자중 이배원 고택을 볼 수가 없다. 기맥길에 벗어나 있기도 하지만

너무 춥고 가야할 시간이 바쁘기에 아쉬움을 접고 바삐 웅포재 방향으로 향한다.

함라현 관아터(09:47)

김안균 가옥을 끼고 돌담길을 따라 올라오니 함라현 관아터가 나온다.

관아터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서 올라오니 이정표(←수동마을↑야생화 군락지↓삼부자 돌담길)가

나오고 기맥길은 야생화 군락지 방향으로 이어간다.

사회복지법인인 함라어린이집을 지나니...

추억남기기라고 붙혀진 사각정자가 나오고 자연주의 토종음식점

간판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우측에는 조그만 폭포가 하나 나온다.

한낮인데도 기온이 올라가지 않고 자꾸 기온이 내려가는 모양이다.

손도 시렵고 발가락도 시렵다. 눈이 살짝 깔린 미끄러운 Y자 도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둘레길 표지판이 나오고

자연주의 음식점이 나오는데 겨울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영업을 하지 않는 음식점을 지나니 기맥길에는 모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복지시설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나무 다리를 건너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오늘 산행을 하여 12km를 도로와 공장지대,  농로를 지난 다음에

처음으로 산길을 밟아보기 위해서 능선 기맥길로 올라선다.

다리에 피로도가 엄청나게 몰려오는 느낌이다. 산꾼은 산을 걸어야지 웬...

야생차 군락지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 함라산과 봉화산에는 야생차가 많다고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봉화산 임해사터에 있는 차나무 야생지는 722번 지방도에서 중앙교회

수련원 입구 옆 시멘트 포장도로인 임도를 약 4.5km정도 들어가면 오른쪽 산기슭에 현재 3천 300여㎡에

1만 그루의 1~30년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야생차 전문가들은 이 차잎의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곳 차나무 밭의 생태 유전학적인 고찰 결과 강진군에 있는 백련사 차나무와 일본의 재배종 차나무와는 유전적으로

매우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 오래 전에 분화 적응된 생태종으로 추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차나무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즉 견당사 대렴이 828년에 중국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현재의 지리산에 심은 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인데 이 차나무가 전북의 일부지역과 전남지역, 그리고 경상남도 지역에서 종자 번식을  되풀이하면서

여러 지역에 오랜 기간에 걸쳐 선발되어 적응된 것만이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차나무 분포지역의 최북단 한계는 35°13´인 김제군 금산사 일대로 알려져 왔는데 연구 결과,

익산군 웅포면 봉화산 남서쪽 계곡 임해사(臨海寺) 터로, 최북단 한계 북위 36°03´로 북상하였다.

 

익산의 야생 차나무는 우리나라 야생 차나무 중 수고가 높은 쪽에 속한다(2.5m~2.7m).
우리나라 차나무 중 키가 제일 큰 차나무(약 3m)는 통도사 금강계단 입구 서쪽에 있었으나 1985년 이전에

훼손되었고 현재는 돌산의 차나무와 밀양의 차나무, 봉화산의 차나무가 3m 미만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꽃은 10 -11월 흰색 계통으로 피며 열매는 다음해 봄부터 자라기 시작하여 가을에 익기 때문 꽃과 열매를 같은 시기에 볼 수 있다.

함라산 갈림길(10:05)

직진을 하면 웅포재인데 기맥길에서 600m 떨어진 함라산으로 향한다.

함라산가는 능선 안부에 있는 이정표

능선 안부에는 멋진 공자님 말씀이 걸개에 걸려있고...

함라산을 가는 길은 참으로 편하다. 이곳은 둘레길이라 그런지 사람들을 만난다.

갑자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기온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함라산(咸羅山:240.5m:10:15)

전라북도 익산시의 함라면 함열리와 웅포면 웅포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조선 시대 함열현의 별호인 '함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열)에는 "함라산은 현의 서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라는 내용이,

 『조선지지자료』(함열)의 군내면에는 "함라산(함나산)은 읍내 서북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함열), 『대동여지도』(함열), 『1872년지방지도』(함열),

『한국지명총람』에도 표기자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옆으로 부를 가져온다는 와우산이 마을 전체를 싸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등 일찍이 부농촌으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다. 

정상 표지석에서 100m 떨어진 헬기장에 삼각점(△한산467 1980복구)이 있다.

함라산 정상에서 바라본 함라면소재지와 넓은 들판

정상에 서니 함라 삼부자집과 면소재지 그리고 함라의 넓은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반대편에는 도도히 흐르는 금강이 한 눈에 들어오고  강건너에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갈대로 유명한 신성리가 가깝게 보이며 바로 아래에는  베어리버 골프장이 보인다.

 

좌측의 와우산(臥牛山)과 가운데 함라산 그리고 우측의 봉화산에

감싸여 있는  함라면... 왜 부자들이 나오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갑자기 내리는눈으로 인해서 더 좋은 그림을 볼 수가 없어서 다시

봉화산을 향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간다.

 

숭림사 일주문 편액

숭림사라는 이름은 숭산 소림사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우리나라 불교가 달마선법을 이었음을 주장하는 말이라고 한다.

 역대에 많은 조사스님들이 계시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달마대사와 혜능대사가 유독 존중되고 있다.

고려말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숭림사는 임진왜란때 이 보광전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보광전의 건축양식은 맞배지붕에 다포양식으로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며

보물 8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숭림사 보광전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보광(普光)이라는 말의 유래가 부처님이 화엄경에서 7처9회의 설법을 하시는 중

 도솔천 보광전에서 하신 설법에 근거를 두고있기 때문이다.

손의 모습인 지인을 보더라도 석가모니부처님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인데

 일부 기록에서는 비로자나불로 본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함라 두동교회(사진 펌)

우리나라 도시중에 익산만큼 교회가 많은 도시가 그리 흔치않다고 한다.

구한말 개항도시 군산을 통해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전주 가는 길에 있어 아무래도 일찍 개화가 되었다.

마을을 지나치면 교회종탑들이 우뚝 서있어 마치 금강변을 오가는 황포돛배처럼 보일 정도로 교회가 많다.  

그러나 남의 종교를 인정하자 않는 폐해도 엄연히 존재한다. 원불교 성지가 있는 익산땅에서 선교는 엄두도

못내고 천년고찰이자 보물(대웅전)까지 가지고 있는 숭림사가 처음 템플스테이를 할때 목사들이 데모를 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배타적인 모습은 이땅의 초기 기독교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서양 선교사가 한복을 입었고 초기 신부들은 갓을 쓰고 다녔다. 

민초의 얼굴을 닮아야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다.

서양 선교사가 한복을 입었고 초기 신부들은 갓을 쓰고 다녔다. 

민초의 얼굴을 닮아야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다

 

함라산 아래에는 천년고찰 숭림사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관념을 수용해 ㄱ자 형태로

독특하게 지어진 두동교회가 있다고 교회건물이  'ㄱ'자로 껵여 이색적이다.

당시 유교적 관습 탓에 남녀가 함께 앉을수 없는 노릇.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교회에서 이것을 받아 들였다.

아마 교회는 민초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타종교에 대해 마음을 열고 사람들품에 다가서는 것이 진정한 선교가 아닐까 싶다.

 

오른쪽은 여성(동서), 왼쪽은 남성(남북), 가운데 휘장이 쳐 있어 남녀가 눈을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교회가 청소년들 연예장소였다는 말은 두동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 목사님의 강론대는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어 전체를 다 볼 수 있고  남자도, 여자도 모두

목사님을 바라볼 수 있다. 마루를 높였고 가운데 8각 기둥을 세워 목사님의 권위를 세웠다.

 

강단은 단을 높였고 창문틈으로 빛이 쏟아지면서 나름 신성한 분위기를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때는 이곳에 학교를 세워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본 순사가 검문오면 급히 불온서적(?)을 강단 마룻바닥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표안나게 열 수 있도록 마루가 열려 있다. 

독립투사도 저 마루에 숨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함라재(?)

이것은 지도상에 분명히 웅포재이건만 함라재로 표기해놔서 혼란스럽다.

웅포재(熊浦峙:10:23)

전라북도 익산시의 웅포면 웅포리에서 함라면 함열리 행개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관련 지명인 웅포면, 웅포나루터 등이 여러 사료에서 수록되어 있다.

 '웅포(곰개)'에서 유래한 고개 지명으로서의 '곰개재'와 '웅포재[熊浦峙]'

지명은 『한국지명총람』(익산)에 "(웅포면) 웅포재[熊浦峙]는 재궁에서

 함라면 함열리 행개골로 가는 고개이다. (중략) (함라면 함열리) 곰개재(웅포치)는

 천북에서 웅포면 웅포리 곰개로 가는 고개이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고 있다.

나루지명이 먼저 형성된 후 '웅포(곰개)'라는 나루 지명의 전부 지명소를 활용하여

고개 지명이 이후에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웅포재에서 고개에서 나무다리를 지나서 봉화산으로 향하는데

이곳은 익산 둘레길이라 그런지 맥길도 양호하고 등산객도 자주 만난다.

둘레길 주위에는 소나무들이 참으로 많다.

이곳도 지난구간인 용화산 등로에서처럼 칠목재까지 200m 단위로 구조목이 설치되어 있다.

봉화산(烽火山:236m:10:47)

전북 익산시 함라면과 웅포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익산의 최북단에 자리잡은 봉화산 호남평야 가운데 솟아있어

더욱 더 높아 보이는 것 같다. 익산지역의 명산인 지나온 천호산,

용화산, 미륵산보다는 높지 않지만 전망은 훨씬 좋아 보인다.

 

이 봉화산 기슭에는 야생차가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흔히 차(茶)하면 전라남도 보성을 떠올린다.

“봉화산 야생 차나무는 봉황이 날아와 차잎으로 부리를 씻고 갈만하다”는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차나무의 크기가 대부분 2.5m~3m의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것으로 알려진 여수 돌산과 밀양의 차나무와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곳 익산의 봉화산 능선에도 야생차들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차나무 자생지의 최북단 지역으로 차나무 북방한계선인 36도 03에 위치한다

봉화산 정상에서 본 익산시 함라면과 황등면의 들녘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베어리버 골프장과 금강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웅포(熊浦:곰개나루)

곰개나루는 공주와 부여를 거친 금강이 남하하다가 남서쪽으로  급히

꺽이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루의 언덕위에 서면 금강과 서해바다의

합수지점이 보일락말락 하는 곳이다. 왜구들이 자주 발호했던 시절에는

망루역할을 했고 금강 하구둑이 생기기 전에는 조운선과 고깃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고려말기 우왕 6년(1380년)에 왜선 500척이 이곳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하려다가

 이에 화포롤 무장한 최무선 장군의 병선 80여척이 왜구를 물리쳤다

이 싸움을 진포대첩이라고 하는데 이때 왜의 패잔병들은 배를 잃고 내륙으로 올라왔지만

결국 전라도 남원땅에서 이 성계의 군사들에게 전멸되는데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했다.  

곰개나나루는 20년전까지만 해도고깃배가 드나들던 곳이면 객주가 즐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퇴적물이 많이 쌓이고 금강 하구둑이 생겨나면서 논산의 강경까지 오르내리던

어선들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나루 맞은편의 금강 건너는 갈대숲으로 유명한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이다

봉화산 봉수대의 유래 안내판

봉화산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초소가 있고 넓은 사각정자와 벤치도 있고

이곳은 칠목재에서 올라오는 등산객이 많아서 그런지 정상이 북적거린다.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정상에서 소주 한잔을 마신다.

날씨가 추운탓인지 물도 먹히지 않고 모든게 귀찮기만 하다.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칠목재 방향으로 향한다.

칠목재 방향으로 가야할 능선의 모습

봉화산을 내려서니 등로에는 많은 묘지들이 보이고 편안한 안부 능선을 걷는다.

중간중간 등로에 묘지들이 많이 보이고 등산객들도 자주 마주친다.

좌측으로는 예비군부대 사격장이 있는지 경고판이 서있다.

입점재(11:20)

함라면 입남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 민초들이 다니는 길이다.

다시 편안길을 걸어가다가 묘지 몇기를  지나면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또다른 임도를 만나고 우측에는 수목장이 보인다

등로옆에 있는 수목장의 모습

우측으로보니 묘지너머로 교회 기도원인듯한 파란색 건물도 보인다.

다시 약간의 오르막을 치고 오르다가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선답자의 시그널을 만나고 다시 내리막을 내려서니 칠목재가 나온다.

칠목재(七牧峙:11:40)

칠목재는 722번 지방도로로 우측은 웅포면, 좌측은 함라면을 잇는 도로다.

소룡골(巢龍)과 칠목마을을 합쳐서 1972년 한 마을이 되었는데 소룡은 남병산에

쌓여있어 마치 용이 서리고 있는것과 같다고 해서 풍수지리설에 취해진 이름이며

옛 기록에는 소농(巢農)으로 되어 있으며 칠목은 웅포로 가는 고갯길 옆으므로

길목의 전라도 사투리인 ‘질목’이 변음이 되어서 칠목이 되었다고 한다.

칠목재 구릉 중턱에는 백제의 무덤인 익산 입점리 고분군이 있다.

 

1986년 한 고등학생이 이곳에서 칡을 캐다가 금동제 모자등을 발견하여

신고하게 되어 알려졌는데 현재까지 8기가 발견되었는데 제1호기를 제외

하고는 파손상태가 심각하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류, 금동모자와 금귀고리, 유리구슬 등의 장신구

말갖춤(마구)이나 철기들로 백제중요 문화재로 밝혀졌다.

유물로 보아 5세기경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정되며 금동제 관문은 일본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하게 생겨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 문화재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입점리 고분(笠店里 古墳: 사적 347호)

예전의 익산은 건마국의 영토였으면 한때는 마한연맹의 맹주국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튼실한 건마국이 4세기초에 백제에 병합됨으로써 건마국의 세력가들이

백제의 중앙 귀족이 되었을것으로 추측된다

이와같은 내용으로 익산지역이 백제의 중앙권내로 흡수 편제되었다고 보여지므로

입점리 고분은 백제사뿐만 아니라 익산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된다.

 

삼국시대

치레걸이(裝身具) 중 하나로, 금동으로 된 것이 주류이고 바닥에는 스파이크가 달린 것도 있다.

이들은 크기와 형태로 미루어보아 일상생활에서의 실용품이 아니며 장송용(葬送用)으로 제작된 의례용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은 모두 금동제품으로 보통 3매의 금동판을 못으로 박아 형태를 만들고 내부에

 천이나 가죽을 덧댄 것이다. 표면에는 각종 문양을 투조(透彫)하거나 타출점열문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삼국시대 각 나라별로 형태와 문양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고구려의 신발은 바닥만 금동제로 앞창이 약간 들리고 바닥에는 굵고 긴 못을 비교적 촘촘히 박았는데,

이것은 ‘山’자모양 금동제앞가리개와 새 깃모양 관식과 함께 출토되었다.

백제의 신발은 공주 무녕왕릉 왕과 왕비, 나주 신촌리 9호분, 나주 복암리 3호분, 익산 입점리 고분 출토품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귀갑문(龜甲文)을 기본적인 문양으로 하고 있고 발등쪽 접합부가 하단부 쪽으로 경사진 형태이다.

 이러한 백제의 특징적인 금동신발의 제작모티브는 신라와의 교역 뿐 아니라 일본 금동신발의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특히 무녕왕릉 출토품은 귀갑문 안에 봉황을 투조한 금동판을

덧씌웠으며, 전면에 영락을 달았고, 바닥에는 9개의 스파이크가 달렸다

고개마루에는 버스정류장과 함라산 등산안내도와 등산객을 위한 주차장과 칠목재휴게소가 있다.  

산행을 하기전에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칠목재 휴게소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하여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려고 최대한 베낭무게를

줄이고 이곳에 왔는데 아! 글쎄 이곳 휴게소 식당에서 영업을 하지 않고있다.

참으로 난감하다. 세찬 바람에 추위는 엄습해오고...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

이리저리 쥔장을 찾아도 식당 문은 열려있는데 식당내 불은 꺼져있고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식당안으로 들어가서

일단 추위를 피하고 간식으로 가지고 온  호떡 2개를 꺼내서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나눠 먹는다. 다행히 식당안에 있는 미니 자판기가 가동중이다.

이 자판기는 고객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라 동전을 넣지 않아도 커피가 나온다.

추워도 너무 추워서... 커피 2잔씩을 연거푸 마시고 10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을 떠난다. 휴게소 쥔장나리 미안하오... 그리고 추운데 커피는 잘 마셨오.

도로를 건너서 마을 가운데로 지나서 간다.

마을 도로를 가로질러서 송전탑을 향해서 올라간다.

마을 끝에는 새로 지은 주택을 지나니  감나무밭이 나오고 이곳에서 Y자의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야 어래산으로 가는데 그냥 길이 좋은

좌측의 좋은길로 올라간다.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이쪽으로 걸려있다.

능선을 치고 오르니 가선대부를 지낸 파평윤공의 묘지가 나오고 곧 179봉이 나온다.

179봉(12:05)

봉우리 정상에는 삼각점이 없으면 모르고 그냥 지나갈 정도로  잡목이

완벽하게 정상을 정복하고 있다. 정상에는 삼각점(△한산25 1986 재설)이 있다.

어래산성(御來山城:문화재자료 173호)

전북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산136-1와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에 있는 성으로

이 산성은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쌓은 성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주변의 함라산성, 도청산성 등과 함께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쪽 능선과 서쪽의 사면을 감싼 테뫼식 토성으로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인근의 익산입점리고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485m 정도로서 남문지와 동문지가 남아 있고, 성의 외부에는 5m 내외의 회랑도가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어래산이 나오는데 시간상 조금 애매하고

날씨가 추워서 아쉽지만 포기를 하고 그냥 기맥길을 떠난다.

어래산(御來山:180.4m)은 전북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와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

 경게에 위치한 산으로 동쪽으로는 넓은 익산평야와 미륵산이 보이고  서쪽은 금강이 내려다 보인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에게 쫓겨 익산의 금마에 마한을 세우고 나포포구에

자리잡고 있는 공주(公州: 군산시 나포면 공주산을 말함)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왔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서쪽 능선이 금강 능선과 맞닿아 있어

옛날부터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정상에는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어래산성(御來山城)이 있다.

179봉에서 비교적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여기서부터 우측은 여태껏 같이해 온 익산시와 헤어지고 군산시로 접어든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이곳도  같은 익산시의 산이건만 조금전 지나온 함라산에서

칠목재까지 온 길과 이곳은 그야말로 차별이 심해도 너무 심한것 같다.

함라산과 봉화산이 있는 구간에는 각종 편의시설과 이정표가 잘되어 있건만

이곳은 나무가 넘어지고 길이 막혀서 걷는데 애를 먹는다.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과 사투를 벌이면서 겨우 도착한 밀양박씨 가족묘를 지나고...

이름모를 버섯이 잔뜩 붙은 나무도 보이고...

다시 잡목과 사투를 벌이면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143봉(12:25)

전북 익산시 함라면과 군산시 나포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잡목만 무성하다.

이곳은 기맥꾼들이 상당히 주위를 요하는 구간으로 잠깐 정신을 놓고

우측으로 가면 대형알바를 하며 실제로 우측으로 가는 산꾼이 많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좌측으로 내려오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걸려있고...

급한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니...

임도(12:28)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자동차가 나닐만큼 넓은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내리막길을 계속한다.

다시 조그만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좌측에는 편백나무 숲이 나온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니 묘지가 나오고 이윽고 NO 21 송전탑이 나온다.

잡풀이 우거진 절개지로 내려서니 조그만 고개가 나온다.

방령고개(12:35)

익산시 함라면 관원리 방령마을과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고개를 가로 질러서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몇번이나 미끄러진다.

무명 묘지를 지나니...

죽고 못사는 정겨운 나무도 만나고...

애정이 듬뿍 먹은 나무를 지나니 우측에 무명 묘지 4기가 있고 뚜렸한 등로도 있다.

이곳에는 시그널도 없고 양쪽 다 길이 뚜렸하여 혼란스럽다.

이곳은 무조건 송전탑을 기준으로 따라 가야만 하는 곳이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좌측으로는 눈이 약간 싸인 공동묘지가 나오고

묘지 위의 능선에는 NO 19 송전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공동묘지 위로는 편안한 안부 능선이 나온다.

NO19 송전탑(12:50)

수원백씨와 김해김씨 합장묘를 지나니...

좌측으로는 조릿대 군락지가 나오고 우측 능선 안부를 타고간다.

다시 무명 묘지군을 지나니...

편안한 안부능선이 나오고 낙엽위에 살짝 눈이 상당히 미끄럽다.

NO 18 송전탑(13:05)

송전탑을 조금 지나니 양쪽 다 길이 뚜렸한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서 등로를 타고 내려오니...

또다시 무명묘지군이 나오고 편안한 내림길을 따라 내려간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따라 내려가니...NO17 송전탑이 나온다.

빨알간 청미래(망개나무) 열매가 잔뜩 달려있는 곳을 지나니 도로가 나온다.

수레재(車嶺:13:30)

전라북도 군산시의 나포면에서 서수면으로 넘어가는 15번 군도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한국지명총람』(옥구)의 "(서수면 취동리) 수레재(차령 車嶺, 수내미채)는 흥법에서

나포면 장상리 와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수레같이 생겼다 함."이라는 기록에서

고개 모양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을 찾을 수 있다. '차령'은 수레재의 '수레'를

훈차 혹은 훈음차한 표기로서 확인할 수 있다. 『군산의 지명유래』의 나포면 장상리에는

수레재의 또 다른 명칭인 '순남미재[車峙]'가 기록되어 있다.

거봉포도 농장을 지나 나포면 이정표를 보면서

100여m 정도를 올라가다가 좌측 이정표를 따라 올라간다.

지나온 능선

18번과 17번 송전탑이 보인다. 지금부터 약간의 햇볕이 비치긴

 하지만 기온은 자꾸만 떨어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한다.

우측에 고추밭을 끼고 완만한 능선을 타고 망해산으로 향한다.

능선에 올라 우측으로 꺽어지니 대나무밭이 나오고...

홍법재(13:45)

군산시 나포면 와촌마을과 서수면 홍법저수지를 잇는 고개로 대나무 숲이 있고

이정표가 서있다. 저수지 아래에 있는 홍법마을은 원래 옥구군이었는데 군산시와

통폐합이 된 곳으로 밧무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흥법대사가 살았다하여 홍법마을로 불린다..

와촌마을 뒷산(14:00)

와촌마을을 치고 오르니 멋진 묘지들이 많이 보이고 이정표가 서있다

이곳은 바람도 없고하여 묘지옆 잔디에서 앉아 과일과 초콜렛 하나로

허기를 면하고 5분정도의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을 나선다.

묘지에서 바라본 망해산 동봉의 모습

묘지 건너편은 취성산으로 오르는 임도가 보인다.

수원백씨 임파공파 영묘단도 지나고...

잡목과 잡풀이 가득하다... 여름산행땐 상당히 힘이들 구간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느낌이다.

오르막을 조금 치고 오르니 망해산 동봉 아래에 있는 임도가 나온다.

망해산 동봉 아래에 있는 임도(14:30)

오늘 내가 지나온 구간을 뒤돌아보니...

나무 계단을 따라서 망해산 동봉으로 향한다

망해산 동봉(14:35)

내가 오늘 걸어온 구간을 뒤돌아본다. 미륵산도 보이고...익산들판이 보인다

망해산을 향해서 걸어간다.

군산 구불길이란 이정표를 따라서 좌측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군산시 나포십자들의 모습

경지정리를 하여 바둑판처럼 생긴들과 그 옆에 흐르는 금강이 있다.

첫눈에 봐도 곡창지대임을 느낄수가 있다. 나포십자들은 원래 원나포에서

서포까지 갈대가 무성한 강기슭이었는데 1920년대에 간척사업으로 농경지로 바뀐 곳이란다.

임도로 내려와 다시 망해산으로 오른다.

임도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서 5분사이에 3개의

헬기장을 거친 다음에 망해산 정상에 도착한다.

망해산(望海山:230m:14:50)

전라북도 군산시의 나포면 옥곤리와 서수면 축동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여지도서』(임피)에 "불지산(佛智山)을 이루고, (중략) 불지산봉수(佛智山烽燧)는 서쪽으로

오성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동쪽으로 함열현 소방산 봉수에 신호를 보낸다. (중략) 불지사(佛智寺)는

취성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임피) 주기에 '望海寺'가 등재되어 있어, 망해산이란

지명이 사찰의 명칭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임피)와 『대동여지도』(임피), 『1872년지방지도』

(임피)에도 표기자 변화 없이 불지산과 불지산봉대가 등재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望海山은 꼭대기에 오르면 바다가 바라다보임."과 "佛智山은 나포면 옥곤리와

장상리에 걸쳐 있는 산. 불지사가 있음."이라는 기록이 있어, 산 지명이 능선의 서로 다른 지점을

지칭하면서 분화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망해산의 물줄기는 우측은 금강, 좌측은 만경강을 통하여 서해로 흘러든다.

망해산은 바라볼망(望), 바다해(海)를 써서, 서해바다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자리잡고 있다. 망해산(望海山)은 서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망해산 정상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비단을 펼쳐 놓은 듯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굽이쳐 흐르는 금강이 다가오고, 서쪽으로는 널다란 서해 바다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너른 들녘이 다가온다.

망해산 삼각점(한산459 1984재설)

망해산 정상에는  4등 삼각점이 있고 정상 표지목이 서있다.

긴 의자가 있는데 임피에서 왔다는 40초반의 등산객을 만나오늘

처음으로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같이 인증샷을 남긴다.

삼각점 뒤로는 무명묘지 1기가 있고 주위가  다보이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금강 하구언에는 장항 제련소 굴뚝이 보이고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금강대교도 보인다.

높이가 230m이지만 전망은 끝내준다. 왜 망해산이라는 이름이 부쳐진 이유를 알것만 같다.

오늘 가야할 취성산도 보이고...

망해산 봉우리에서 50m 정도를 되돌아와서 우측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군산시 나포면 주곡리에 있는 대동제도 보이고 그 위의 봉우리가 취성산이다.

축동리 순환 등산로(15:00)

순환 등산로를 따라서 걸어가니...

또다시 다른 길과 합쳐저서 포장도로 변한다.

원부곡마을 갈림길에서 축성산쪽으로 향한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를 5분정도를 걸어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잡목이 우거져서 걷기가 매우 불편하다. 베낭이 나무에 걸리고...

취성산(鷲城山:219m:15:10)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와 서수면 취동리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이 산 중턱에 있는 상주사라는 절집에서는 취성산이라 부르고

이 지역에서는 축성산이라고 부른다. 같은 수리 취(鷲)자를 쓰지만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영취산을 닮았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양산 통도사 뒷산을 영취산인데 영축산으로 부르는것과 같은 맥락이다.

산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취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할 군산지역의 마루금

바람이 세차고 추워서 얼른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 아래로 내려온다.

잡목과 몇해전에 산불이 났을때 타다만 나무들 때문에 걷기가 힘들다.

쑥대밭처럼 되어버린   청송심씨 묘지를 지나니...

다시 잡목과 전쟁을 하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힘든 사투끝에 뚜렷한 등로가 나온다.

기독교인 묘지가 나오고 그 아래 오늘 날머리인 거점재가 보인다.

공원묘지 아래로 내려오니...

거점재/부곡재(15:50)

전북 군산시 서수면  축산리와 나포면 부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2차선 포장도로가 있다.

도로를 따라서 내려오니 버스 정류소가 있는데 버스가 180분에 한번씩 온단다.

참으로 난감하다. 정류소 옆에있는 온천하 만민기도원에 들어가서 교통편을 물으니 여기서

버스 타기는 힘이들고 여기서 임피면 소재지까지 가야한다고 한다.하는 수 없이 도로를 걸어

내려오는데 손이 무척이나 시렵다. 하는 수 없이 히치를시도하는데 10분이 지나도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다...

 

10분이 넘은 다음에 카니발한대가 지나가는데 손을 들어도 그냥 지나간다.

곧이어 그랜저 승용차가 온다.염치 불구하고 도로를 가로 막으니 차를 세운다.

무조건 차량문을 열고 임피까지태워 달라고 하니 임피를 가지않고 익산으로 간다고 한다. 

서울가는 열차를 타기위해 익산역까지 가야 한다고 하니 이 추운 날씨에 산에 다니면 큰일난다고

하면서 기꺼이 익산역까지 태워준다.  오늘은 아침, 저녁으로 완전히 양넘 지갑주운 느낌이다.

아침에는 이 선생님의 신세를 지고... 저녁에는 고마운 분의 신세를 지니...

 

익산역에 내려 인사도 하기전에 차는 떠나 버린다.

거점재에서 익산역까지 태워주신 그랜저 15나9075 차주님 너무 고마웠습니다.

익산역(16:15)

역에 내려서 열차표를 예매한다. 좌석은 한장밖에 없다고 하여 입석1장, 좌석1장을

예매하고 1시간 20분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길건너 식당으로 간다.

배가 너무 고파서...

익산역 앞에 있는 고향역 이야기

익산의 구 지명은 이리(裡里)이고 원음은 솜리라고 한다.

익산역은 나훈아의 노래 고향역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고향역...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고쁜이 모두나와....

하는 노래는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으로 오랫동한 활동하신

임 종수 선생이 작사, 작곡한 노래이다.

그 분은 전북 순창출신으로 중. 고등학교시절 황등역에서 익산역으로 통학을 했다고 한다.

당시 기차길옆에 핀 코스모스를 보면서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라고 한다.

익신역 옆에는 고향역의 노래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익산역하면 생각나는게 이리역 열차사고 사건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1977년 11월 11일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에서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끔찍한 사고가 터졌다.

이 사고는 당시 기록적인 인명·재산피해 외에도 여러 가지 뒷얘기들을 남겼는데 당시 인근 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있던 가수 하춘화 씨가 생환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화제를 모았다.

 특히 하 씨를 구해낸 사람이 무대 사회를 맡았던 고 이주일 씨로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익산에서 영등포로 오는 누리호 열차표

익산역에서 인증샷

점심을 먹지 않은탓에 배가 너무 고파서 역전앞 식당에서 수육 한접시와

소머리국밥을 시켜서 둘이서 소주 각 1병씩 게눈 감추듯이 해치우고 나니

이제 좀 살것만 같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 옷을 말리고 씻고 이빨까지

딲고나니 이제 사람처럼 보인다. 오늘은 교통비를 아끼고나니 경비가 많이 줄었다.

익산에서 17시41분에 열차를 타고 20시 35분에 영등포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