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노론으로 시작해 한번도 기득권을 놓치 않고 역사를 망친 세력들
이덕일 / 한겨레21 347호(2001. 2. 1)
이 글은 한겨레21(2001. 2. 1일 발행)에 표지 이야기로, 이덕일 선생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이덕일 선생님은 한국사를 전공한 학자이면서 민간 역사연구소에서 역사대중화 작업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최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저술하였으며, KBS역사 스페셜에도 가끔 출연하여 역사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친일파가 반공세력과 손잡고 우리 현대사의 주류로 행세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보수적 단면을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권을 잡은 적이 한번도 없는 사회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류는
영원하다는 오만한 믿음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 주류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주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규정 없이 진행되는 논란이기에 조금은 혼란스럽다.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는 어떤 세력일까? 우리 역사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1. 고려 멸망과 신흥사대부의 등장
우리 역사의 첫 주류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른바 천강(天降)세력이었다. 환인(桓因: 하느님)의 서자 환웅(桓雄)의
아들인 단군이나, ‘광개토대왕비’에 천제(天帝: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세력이었다. 이는 정복세력이 자신들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조상을 하늘과 연결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고대사의 첫 주류는 정복세력인 셈이다.
통일신라의 주류세력인 진골귀족은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따라서 좀더 개방된 주류를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그 결과 후삼국의 혼란이 야기되고 새롭게 성장한 지방호족과 6두품 세력의 반발을 받아 신라는 붕괴된다.
이와 달리 고려는 비주류들을 광범하게 포섭했다. 왕건에게 무려 29명의 부인이 있었던 것은 고려가 이들 비주류,
즉 호족들의 연합에 의해 탄생한 국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들은 신라사회를 얽어매고 있던 골품제의
사슬을 과감하게 풀어버렸고, 이 점에서 이들의 집권은 역사의 진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역사의 주류가 신라의 폐쇄적인 진골에서 다양한 비주류 연합체로 바뀐 것이다.
고려는 문벌귀족사회였으나 무신정권과 몽고의 지배를 거치면서 주류의 성격이 변화한다.
일부 문벌귀족과 무신세력, 그리고 몽고에 붙은 친원배(親元輩)들의 집단인 권문세족이 주류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장악하고, 대규모 농장을 소유함으로써 정치·경제적 특권을 독점했다.
어떤 농장은 각지의 주(州)·군(郡)에 걸쳐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불과 70∼80여명에 불과한 권문세족이 정치·경제적 부를 독점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고
개혁요구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때 등장하는 개혁세력이 신흥사대부이다.
비주류였던 신흥사대부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주류 권문세족과 비주류 신흥사대부 사이의 대결은 결국 신흥사대부의
승리로 귀결지어진다. 역성혁명파 신흥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인 정도전이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이들은 조선 건국 2년 전인 공양왕 2년(1390)에 전국의 모든 공사전적(公私田籍), 즉 토지문서를 모두 불살라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린 뒤 조선을 건국한다. <고려사>는 이 불이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조처였고, 그만큼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500년 왕업이 무너지는데 농민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농민들이 조선개창을 적극 찬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노론의 조선엔 임금마저 비주류
조선 초기의 주류는 훈구파였다. 조선은 수양대군의 집권과정을 통해 새로운 주류가 형성된다.
단종의 제거와 세조의 집권에 협조한 인물들이 특권적 공신집단을 이루는데 이들이 훈구파(勳舊派)이다.
이들은 정치·경제적 특권을 누렸고, 이들 소수의 대토지 독점으로 조선의 농민들은 고려말의 농민들처럼 파탄에 빠졌다.
바로 이때 개혁정치를 주장하고 나선 세력이 사림파(士林派)였다. 사림파의 거센 비판에 직면한 훈구파는 네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무려 1세기에 걸친 끈질긴 투쟁 끝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역사의 뒷전으로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해 새로운 주류가 된다.
사림파는 집권과 동시에 당쟁으로 돌입한다. 이는 조선 사대부정치 구조의 필연적인 분화로 사대부의 역사적 순기능이
다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 후기 역사의 비극은 이들 사대부들을 대체할 비주류 세력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
. 그나마 임진왜란 와중에 집권한 북인이 다른 당파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정치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인의 집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내는 인조반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쿠데타를 통해 서인들은 주류로 부상한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백성들은 광해군이 쫓겨나야 할 이유를 몰랐다. 그러자 서인들은 남인들을 어용 야당으로 끌어들여 정권의 외연을 넓혀갔다.
인조반정이 비극인 것은 당시 사회가 밑에서부터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는데도 반정 주도세력은 거꾸로 갔다는 점에 있다.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등은 신분제의 해체를 요구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주도세력은 이런 움직임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는 지배층 사이에 관념적인 문제로 당쟁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어용 야당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남인세력이 점차 국왕과 결탁해 정권 장악에 나서면서 서인과 남인은 정면충돌했다.
숙종(1674∼1720) 재위 초반 잠시 남인들이 승리했으나 서인들은 정치공작으로 정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가혹한 정치보복이 뒤따랐다.
이때 집권세력인 서인 일각에서 정치보복의 근절과 공작정치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서인도 분당을 맞게 된다.
이때 공작정치의 근절을 요구한 세력이 윤증(尹拯 1629∼1714)을 영수로 삼은 소론(少論)이었고,
공작정치를 합리화한 세력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영수로 삼은 노론(老論)이었다.
조선 후기는 노론이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남인이 인위적으로 제거된 정치판에서 소론은 야당의 역할을 대신했으나
그 세력은 미미했다. 집권 노론은 남인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한 숙종 20년(1694)부터 1910년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만 따져도 무려 216년을 집권하게 된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국왕도 비주류일 뿐이었다. 노론에 의해 제거된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노론이 반발하자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절규했으나
이는 비주류의 울분일 뿐이었다. 정조는 재위 24년간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정치개혁에 매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3. 나라 팔고 뛸 듯이 좋아하다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은 주류 노론에 도전하는 비주류 자체가 사라진 것을 뜻했다.
순조 즉위년(1800), 즉 정조 사망해에 경상도 인동(仁同)에서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잇따랐던 것은 농민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던 비주류마저
사라졌음을 알아차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경래의 봉기(1811), 진주를 비롯한 삼남의 농민봉기(1862) 등 조선 후기는 노론의 시대이자 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은 주류 노론이 국망(國亡)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노론은 아무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후작 여섯명, 백작 세명, 자작 스물명, 남작 마흔다섯명 등
총일흔여섯명에 달하는 인물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는데 대부분 노론이었다.
일제가 자의적으로 수여한 남작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수작(授爵)의 영광에 감읍했다.
‘합방공로작’ 수여 다음날에는 1700여만원의 거금과 이른바 ‘은사공채’(恩賜公債)가 내려져 경제적 보상이 뒤따랐다.
양반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창숙이 자서전에서 “그때에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비판하고 있듯이 당시의 주류였던 노론은 독립운동은커녕 일제가 내린 작위와 돈을 받고 뛸듯이 좋아하며 따랐던 것이다.
양반 중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쪽은 소론과 남인들이었다. 소론의 대표적 집안인 우당(右黨) 이회영 가문은
나라가 망하자 6형제 모두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나섰다.
서간도 유하현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는 이들 집안의 자금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양반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이상설, 이동녕, 이상룡, 김창숙, 김대락 등은 모두 소론이나 남인계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상하이 망명 시절 서로, “나라는 노론이 다 망쳤고, 우리는 권력의 곁불도 쬔 적이 없는데
고생은 우리가 다 한다”고 자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론이 일제 치하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린 반면 이들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불우한 최후를 맞았다.
이회영은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했고 그의 형 이석영도 상하이에서 병사하는 등 이시영을 제외한
일가 대부분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이상설은 소련령 니콜리스크에서, 이동녕은 쓰촨성에서,
이상룡은 지린성에서 병사하는 등 대부분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4. 친일파와 반공주의의 환상적 결합?
우리 역사의 비극은 해방 이후에도 이들 독립운동가들보다 친일파들이 주류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데 있다.
일제시대 때도 지주의 지위를 계속 누릴 수 있었던 이들 친일파들은 해방과 동시에 한민당을 만들었고
국내 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과 결탁해 주류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 때의 악질 고등경찰 김태석이 해방 이후에는 좌익을 검거하러 다니는 경찰간부가 되었던 사실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성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 친일파가 반공세력과 손잡고 해방 50년간 우리 현대사의 주류로 행세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보수적 단면을 잘 말해준다.
중국은 한 고조 유방(劉邦)과 명 시조 주원장(朱元璋)이 저잣거리 출신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최하층의 인물들이
당대에 중원을 석권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권을 잡은 적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류는 영원하다는 오만한 믿음인지도 모른다.
이덕일/ 역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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