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불교계 역사추동력 고취
이동인스님과 무불스님의 죽음
이동인스님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에 인촌(燐寸, 성냥)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
하였다 한다. 또 많은 책을 가져와서 은밀하게 청년들에게 전달하였다. 서재필의 회고에
따르면, 서재필을 봉원사로 찾아가 서너 달 동안 머물 때 이 책을 얻어서 봉원사나 동대문
바깥의 절에서 1년 동안 읽었다. 서재필은 일본어로 된 이 책들이 한자가 많이 사용되어
있어서 대강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였다.
잘못된 현실 바로잡으려는 자발적 개화운동
개혁개방 필요성 통감 ‘조선자주독립’ 전개
서재필은 또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들처럼 인민의 권위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여. 이것이 우리가 개화로 첫 번 나가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라는
중이 우리를 잘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 절
(봉원사)이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것이다”〈서재필 박사 자서전〉이라고 회고하였다.
끝까지 승려신분…의문싸인 죽음
이동인스님은 봉원사만이 아니라 민영익의 집에도 거처를 정하였다 한다. 민영익은 민씨들
속에 개화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이동인스님을 식객으로 삼아 은밀한 곳인 연당에 거처
하게 하고 때때로 임금과 만나게 주선하였다 한다. 그가 입궐할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써서
삭발한 모습을 가리고 몸에는 전복을 걸쳐 입고 들어가 단독으로 임금을 만났다 한다. 이로
보면 끝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고 승려 신분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만국공법〉
과 한미조약으로 말미암아 전국에 걸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동인스님에게
관직을 준 일도 규탄하고 나섰다. 이제 이동인스님은 숨은 인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의문에 싸여있다. 어느 날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려 할 때 늘
문기수(門旗手, 문지기)가 데리고 들어갔다 한다. 행방불명 되기 직전에도 문기수가 민영익의
집으로 와서 그를 데리고 나간 뒤에 소식이 끊겼다 한다. 이를 두고 그가 도망쳤다고도 하고
죽임을 당하였다고도 하는데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죽였을 것이라고 의심하였고 김옥균은
급진 개화정책을 추구한 탓으로 온건파인 김홍집이 제거하였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또 그가
민씨에 의지하여 급박하게 공로를 탐낸다고 하여 김옥균이 자주 충고하였다고도 한다.
아무튼 승려의 신분으로 그의 짧은 생애는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동인스님을 꾸준히 추적해온 이광린은 “그는 승려였기 때문에 유대치를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나 역시 그 신분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제약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가 죽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을 따진다면 당시 사회에서 천시 받고 있던
승려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축이 된다”(이광린의 〈개화승 이동인〉)이라 하였다. 그는
승려였기에 현실사회에서 더 많은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무불스님(속명 탁정식)은 이동인스님이 행방불명이 된 뒤 신사유람단의 비공식 수행원
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때 찍은 것으로
보이는 명함에는 한자의 이름 밑에 영문 표기를 하였다. 일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어에도
어느 정도 소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882년 김옥균이
처음 일본 시찰길에 오르자 무불스님은 안내를 맡았다. 귀국할 때 무불스님은 서양 사람에게
부탁하여 다량의 화약을 구입해왔다. 탁정식은 1884년 2월 평생의 동지 김옥균의 뜻을
저버리고 병사하였다. 그리하여 이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참여치 못하였다.
갑신정변 때에 또 한 사람의 승려출신이 활약하였다. 차홍식은 화계사의 16세 된 사미승
이었다. 그는 김옥균의 눈에 들어 김옥균의 수행원 노릇을 하였고 김옥균이 일본에 갈 때에
동행하여 밥 짓고 수발하는 일을 맡았다. 그 뒤 화계사에 있다가 갑신정변 당시 18세의
몸으로 서재필이 이끄는 선봉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승려의 몸으로 “역적의 혈당”이
되어 궁중에서 칼을 빼들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초기 개화파인 유홍기 김옥균 박영효는 거사림(居士林)으로 불교에 심취하면서 봉건
모순을 청산하고 개혁의 길을 추구하였고 나라를 부강한 근대화로 이끌려 하였다.
이동인스님 무불스님 차홍식 등 승려그룹은 이들 개화파와 연계를 가지고 개화운동에 참여
하였다. 특히 이동인스님은 잘못되어 가는 나라의 현실을 보고 개혁 개방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자발적으로 개화운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의 힘을 빌려는 방법적
모순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친일파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만약 일본이 끝내 조선 침략을 도모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논란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초기 개화파들은 비록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결코 조선 침략을 방조하지
않았고 기회가 있으면 조선의 자주 독립을 역설하고 내정 개혁을 도와 달라고 외쳤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애국적 정열에 불타 있었다. 이동인스님이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말을 배우고
일본 옷을 입었다는 것을 내세워 친일파로 몬다면 이는 더욱 당시의 실상에 무지함을 보이는
꼴이 될 것이다. 이들은 지치고 늘어져 생기가 없는 후기 불교계에 역사를 추동할 동력을
불어넣었다.
친일파 논란 vs 애국적 정열
이런 시대 상황을 타고 일본 불교의 침투가 계속되었다. 앞에서 개항과 함께 동본원사의
부산 진출을 말하였다. 이는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서양 세력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전파하려는 목적과 다름없었다. 곧 일본 정신을 심으려는 공작이었다.
그리해 정토 진종 대곡파(大谷派)는 호국 호법을 기치로 내걸고 조선 포교를 열어 나갔다.
1881년에는 일본 불교의 거대 종파인 일련종이 뒤를 이어 서울로 침투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여러 종파에서는 다투어 종군승을 파견하였다.
종군승들은 일본군을 불도로 위안하고 조선인을 선무하는 일을 벌였다. 종군승을 파견한
일본 종파는 대곡파 동본원사와 일련종, 본파 서본원사와 정토종 등이었는데 서로 교세를
확장키 위해 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이들 종군승들은 전선의 후방에 있는 서울 도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일본 승려들은
간편한 검은 법복을 입고 있어서 희색의 먹물 장삼에 대나무 삿갓을 쓴 조선 승려와 쉽게
구분되었다. 조선 승려들은 경복궁을 지을 때 노동자로 징발되어 서울에 들어온 뒤에 다시
출입금지령이 내려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다. 이에 김홍집이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내각
회의에서 이를 해제하려고 안건으로 상정하였으나 천주교를 철저히 탄압한 흥선대원군이
방해 공작하여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승군의 노역 동원, 승직의 통제 등 불교 예속화를
타파하려는 뜻이었다.
일련종의 승려인 사노(佐野前勵)는 1895년 조선 승려들이 도성 출입을 금지 당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를 자신의 힘으로 해금을 추진하려 결심하였다. 그 추진 동기와 목적과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노스님은 경성에 체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선
불교의 생기가 이미 사라져서 승려에게 종승도 종지의 신조도 없음을 간파하였다. 좋은
방편을 쓰면 그들을 일본 불교의 종지로 개종시켜 일련종으로써 조선 불교계를 통일하는
것이 반드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때에 조선 승려를 위하여 어려운
난관을 타개하는 은혜를 베풀고 이로써 그들을 우리 종파로 유인하는 계기를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기발한 재주를 가진 사노스님이 착수한 것이 바로 조선 승려의 입성 해금의 실현
이었다”(高橋亨의 〈이조불교〉, 崔柄憲의 〈일제의 침략과 불교〉참고)
승려 도성출입 역사적 당위
사노는 일본 공사관을 배경으로 하여 내각의 집정인 흥선대원군과 총리인 김홍집 등에게
로비를 벌여 그 허가를 받아 놓았다. 김홍집은 이에 동의하여 형식적으로 고종에게 최종
재가를 받아냈다. 사실 사노가 주선하지 않아도 실현을 보게 되어 있었지만 그가 선수를 친
것이다. 김홍집도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개혁의 일환으로 해제하려 하였고 더욱이 박영효가
내무대신 등 내각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이를 풀어주려 힘썼던 것이다. 당시 천주교 신부나
선교사 목사들이 법적으로 해금하지 않았는데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혁을
추진하면서 불만에 찬 불교세력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공로는 고스란히 사노
에게로 돌아갔다.
어쨌든 세종 때에 처음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시기인 16세기
끝무렵에 잠시 풀렸다. 1623년(인조 1) 다시 강화된 지 270여년 만에 해금되었다. 그 동안
금지가 해이해지면 다시 금령을 발동하였으나 한번도 완전히 해제하지는 않았다. 이제
합법적으로 해제하였으니 승려들과 신도들의 기쁨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조선 후기 도총섭이 있었던 용주사의 석상순은 사노스님에게 긴 감사의 편지를 보내 그
공로를 치하하였다. 또 그해 5월 5일 단오절을 맞이하여 북일영(지금의 서울대 병원 자리
에서 축하 무차(無遮)대회를 열었는데 그때의 정경을 이능화는 이렇게 전한다.
“여러 절의 승려들이 일본 승려와 더불어 법단을 경성 원동 북일영 안에 설치하고
무차법회를 며칠동안 열었다. 경성의 양반 여자들이 다투어 와서 구경하였으며 나도 그들
무리 속에 끼어 즐거워하였다. 어떤 이는 기쁜 기색을 띠고 ‘조선의 승려들이 수백년 동안
도성 밖에서 떠돈 상한(常漢)이었는데 오늘날 구름을 헤집고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불일(佛日)이 다시 빛나리라’라고 말하였다” 〈조선불교통사 하편〉 아마 범패를
울리고 잿밥이 질펀한 속에 축제를 벌였을 테고 사람들이 운집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1905년에야 도성 출입의 자유를 완전히 누릴 수 있었다.
- 불교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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