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행장과 말씀 退翁 性徹大禪師의 生涯와 思想
(퇴옹 성철대선사의 생애와 사상)(The Life & the Sayings of Ven. S ngch l)
圓澤 (Ven. Won Taek, 白蓮佛敎文化財團 理事長)
* 이 글은 백련불교문화재단이 1994년 10월 8일 조계사에서 개최한
[퇴옹 성철 대선사의 생애와 사상]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임.
1. 행장
작년에 저희들은 큰스님의 어록 11권도 다 출간하고 선림고경총서 37권도 출간해서 9월 20일에
출판회관에서 출판기념회도 갖고, 또 10월 8∼9일 양일간에는 돈오돈수사상을 주제로 해인사에서
제1회 국제 불교세미나도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큰스님께서 작년에 열반에 드시었습니다.
생각 같으면 더욱 더 국제 학술회의를 발전시키고 싶었지만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올해는
큰스님의 사상을 조명해 보는 조촐한 자리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
제가 스님을 가까이 모시었으면서도 이제 스님의 행장과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하니 상좌와 시자로서
최선을 다했나 하는 자책감이 앞서는 자리입니다. 나누어 드린 책자를 보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큰스님께서 종정이 되시기 전에는 세상에 그러한 큰스님이 계시는지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하시면서 제7대 종정에 취임하시자, 세상에서는 해인사 골짜기에
그런 스님이 계시는가 하고 큰스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큰스님은 세상에 나가시지 않으시고 산승은 산사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관하셨습니다.
4월 초파일이 되면, 스님께서 여의도 광장에 한번만 나와 주시면 몇 백만 명이라도 모아서, 여느 종교의
군중집회를 능가하는 규모로 불교계에 큰 사기를 올리겠다고 총무원에서 해마다 간청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스님께서는 山僧(산승)을 자처하시고 "산승은 산에 살아야지 산을 떠나 도시에 나가면 우리 속에
갇힌 호랑이와 같이 아무 쓸모가 없다" 하시고 "호랑이는 산에 살아야 제 멋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저도 산에서 스님을 모시고 사니까 저도 산에 사는 꼬마 산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스님께서 떠나시고 나니 산승이라고 하신 의미를 다시 한 번 자리 매김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출가동기를 말씀하시면서 나는 證道歌(증도가)를 읽어보고 뭔가 진리가 있는 줄 알았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캄캄한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으며 내 갈길이 훤히 비쳐 보이는 듯 하였다"고 증도가를 읽으신 소감을 피력하셨습니다.
증도가의 첫머리는
"絶學 無爲閑道人(절학 무위한도인)은 不除妄想 不求眞(불제망상 불구진)[배움이 끊어진 할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다]"로 시작됩니다.
돌이켜 보면 산승이라 자처하신 그 의미는 곧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 배움이 끊어진
그러한 한가한 도인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뒤에 스님의 행장에 대한 자료정리의 중요성을 느끼고, 태어나신 생각에서 부터 행적을 더듬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스님의 조카 되시는 분에게서 스님께서 생전에 보시던 책을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책들을
뒤지다가 스님께서 손수 적어 놓으신 책 목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책 제목을 열거해 보면, 행복론 · 순수이성비판 · 실천이성비판 · 7대 철인전 · 민약론 · 남화경 · 근사록 ·
하이네시집 · 신구약성서 · 자본론 · 유물론 등등 70여 권의 책이었습니다.
지리산 어귀인 산청 골짜기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 인생 철학서를 폭넓게 보신 데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끔 스님께서는 "쌀 한가마니 주고 책 얻어 봤지" 하셨는데 그때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고 귓가에 흘려버렸습니다마는
이번 독서 목록의 발견으로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새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20대에 스님의 생가는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였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러한 배경에서 비록 시골이지만 많은
책을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 스님께서는 병 치료를 위하여 지리산 대원사에
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불교 잡지를 보고 화두공부를 하게 되고 동정일여를 얻어 출가하셨다고 하나
이번 독서 목록의 발견으로 스님의 출가동기를 달리 해석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20대 초반에 인생고민으로 독서와 명상을 하시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차,
신심명 증도가라든지 불경을 접하고 뭔가 불교에 당신이 찾고자 하는 진리가 있겠다는 확신에서
대원사에 가신 것이고, 그것은 집을 떠나 출가하기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타스님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큰스님께서 그 당시를 이야기하시며
"무자화두를 열심히 드니까 화두가 성성하게 되고 동정일여가 되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이것이 42일 만이다"라고
신이 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대원사에서는 열심히 정진하시는 스님을 감당할 수 없어
해인사 본사로 연락을 하게 되고, 그 후 해인사에 오시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선방에는 십여 명 정도의
스님들이 계셨고 그나마 화두 드는 수준은 형편이 없었다고 합니다.
스님의 출가에 얽힌 이야기입니다만 한번은 기자들이 "출가 하실 때 집안에서는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하고
여쭈니 "그러니까 사주팔자를 팔았지, 그냥 도망가지는 못하니까. 내 사주가 집에 오래 있으면 죽을 팔자다.
절에서 한 십년공부를 하고 오면 괜찮고 집에 오래 있으면 일찍 죽을 팔자다"라고 거짓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스님의 어머니께서는 점을 보러 가셨는데 그 점쟁이는 "그것은 거짓말이오.
당신의 아들은 사주가 좋고 집을 나갈 사람이 아니오."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 사주쟁이 말이 틀리니까
어머님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라고 설득하여 출가를 하시면서 십년 뒤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을 남기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십년이 다 가기를 학수고대하셨다는
이야기를 묘엄스님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1. 그렇게 하여 스님께서는 1937년 정축년 3월에 해인사에 출가하시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간 출가년도에 대해서는 1936년과 37년 설이 있었으나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37년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출가하시면서 지은 출가시가 있었는데 일타스님과 법전스님께서 알고 계시어 일러 주셨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彌天大業(미천대업)은 :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紅爐雪(홍로설)이요 :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跨海雄基(과해웅기)도 :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赫日露(혁일로)로다. :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誰人(수인)이 甘死片時夢(감사편시몽)인가 : 그 누가 잠깐의 꿈 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超然獨步(초연독보)에 萬古眞(만고진)이로다. :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2. 위 출가 시(詩)는 스님께서 출가한 초년에는 자주 들려 주셨다 합니다.
스님께서는 해인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하시고 그 후 동산스님과 용성스님이 계시는 범어사로 가시어
금어선원 원효암 내원암 통도사 백련암 등에서 정진을 하시고 1939년(28세)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하시게 됩니다.
이 마하연 시절에는 오직 정진에만 힘써 큰 한방에서 50여 명이 같이 한철을 나도 서로 모를 정도였으며,
금강산이 하도 좋아 오래 살고 싶었지만 겨울에는 눈이 너무도 많이 와서 눈을 치우는데 진절머리가 나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3. 그 후 동화사 금당에 동안거중 견성오도를 하셨다고 하는데 그 오도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黃河西流昆崙(황하서류곤륜)이어 :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日月(일월)이 無光大地沈(무광대지심)이로다. :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遽然一笑回首立(거연일소회수)하니 :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靑山(청산)은 依舊白雲中(의구백운중)이로다. :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그때가 1940년 29세 겨울, 어느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오도송에 대해 큰스님께서 가끔 "향곡스님이 내 오도송을 보고 기상이 정말 씩씩하고 옹혼하게 잘 지었다고
칭찬을 많이 해 주었지"라고 큰스님은 더러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그 오도송을 생전 일찍이는 보지 못하고,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 스님 육필로 29세 때 동화사 금당의 오도송이라고 남겨 주셨습니다.
4. 그 후의 행적으로는
1941년 송광사 삼일암 하안거, 수덕사 정혜사 동안거
1942년 아산군 간월도에서 만공스님과 대담, 간월암 하안거 동안거
1943년 법주사 복천암 하안거, 선산 도리사 동안거
1944년 도리사 하안거, 문경 대승사 동안거, 이때 묘엄스님 출가
1945년 대승사 하안거, 대승사 묘적암 동안거
1946년 과계사 성전암 하안거 동안거
1947년 통도사 내원암 하안거, 문경 봉암사 동안거
5. 문경 봉암사에 계시는 이때 조계종 현대사 속에서 가장 주목받는 봉암사 결사가 이루어집니다.
그 당시 함께 정진한 스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의 법대로 살자'가 당신들의 모토였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비구승으로 살자는 것으로 당시 일제 치하에서 36년 간 일본의 영향으로 거의 대처승으로
되어버리고 일본에 유학 간 승려 150여 명 중 한 분만 남고 속퇴해 버리는 그런 시절에 봉암사
결사에서는 부처님 법대로 살 것을 그 가치로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저희들이 입고 있는 승복과 비슷한 광목으로 기사를 해 입으시어 당시 태고종 스님들이 입고 있던
붉은 류의 화려한 색깔을 멀리 하셨으며, 또 당시 동산 큰스님(수계은사스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행나무로 만든 질 좋은 목 바루조차 화려하다고 깨어버린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부엌 찬그릇으로도 쓸 수 있었을 텐데 하시며 좋은 바루를 깨어버린 것이 잘못 되었다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지만 그 당시는 도반들에게 당신의 확실한 결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봉암사 결사는 일본 불교인 대처불교를 밀어내고 조선불교를 재흥시키는 초석이었다고 스님께서는
평소 말씀하시었고 후세에도 그렇게 평가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 봉암사 결사를 함께 하신 분 중에서
종정이 두 분(청담, 성철) 나시고 총무원장이 세 분(청담, 성수, 법전) 나시었습니다.
그곳에는 월산스님도 계셨으니 따지고 보면 봉암사 결사의 의의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난리를 짐작하고 짐을 챙겨 1949년 묘관음사로 내려오시고 이듬해 6.25 사변을 맞게 됩니다.
6. 이후 행적으로는
1950년 청담스님과 고성 문수암에서 하안거 동안거
1951년 고성 운봉암 하안거, 안정 천제굴 동안거
1952년 천제굴 하안거, 마산 성주사 동안거
1953∼54년 천제굴 하안거 동안거
1955년 남해 용문사 백련암 하안거, 파계사 성전암 동안거
이때부터 10년 간 동구불출하시며 성전암 주변에 철망을 치고 사람들을 제접하지도 않고 오로지 정진에 일관하십니다.
이 당시 초록한 9권 분량의 노트는 이후 백일법문을 포함한 11권 저술의 모태가 되었으며, 그 내용은 윤회이야기,
심령과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이었습니다.
7. 그 후 1964년 잠깐 도선사에 계시면서 서원문을 작성하신 것을 자료정리 도중 발견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誓願文(서원문)
佛祖(불조)의 大道(대도)를 重興(중흥)하고 末世正法(말세정법)을 扶揚(부양)하기 위하여
삼가 三寶前(삼보전)에 千拜(천배)하옵고, 左記誓願(좌기서원)을 仰품(앙품)하오니 萬若(만야)
이 誓願(서원)을 違背(위배)할 때에는 生陷地獄(생함지옥)하겠습니다.(청담스님 글씨)
오직 三寶(삼보)께옵서는 特(특)히 加護(가호)를 주시옵소서.
이 誓願(서원)을 圓滿成就(원만성취)케 하여 주시옵소서(성철스님 글씨)
1. 恒常 山間僻地의 伽藍과 蘭若에 止住하고 都市村落의 寺院과 俗家에 駐錫하지 아니 하겠습니다.(성철스님 글씨)
- 항상 산간벽지의 가람과 난약에 지주하고 도시촌락의 사원과 속가에 주석하지 아니 하겠습니다.
2. 恒常 古佛 古祖의 遺法과 淸規를 示範 力行하고 一切의 公職과 一切의 集會와 會議에 參與하지 아니 하겠습니다.
(성철스님 글씨) - 항상 고불 고조의 유법과 청규를 시범 역행하고 일절의 공직과 일절의 집회와 회의에
참여하지 아니 하겠습니다.
3. 恒常 佛祖聖訓의 仰揚에 專力하며 其他 如何한 일에도 發言 또는 干與하지 아니 하겠습니다.(청담스님 글씨) -
항상 불조성훈의 앙양에 전력하며 기타 여하한 일에도 발언 또는 간여하지 아니 하겠습니다.
甲辰(갑진) 九月 十三日 三角山 道詵寺 淸淨道場(삼각산 도선사 청정도장)에서
誓願佛子 靑潭(서원불자 청담)
誓願佛子 性徹(서원불자 성철)
돌이켜 보면 한 분은 이 서원대로 철저히 살았고, 또 한 분은 중생구제가 급하다고 하여 우리에
정화불사의 등불을 드높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다른 길로 가신 것 같습니다.
또 당시 도선사에서 悉達學院(실달학원)이라는 현관을 걸고 두 스님께서는 춘천 성심대학을 오르내리시면서
승려교육이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대학 수준의 기관 설립도 힘써 보셨지만 끝내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승가 교육에 관심이 남달랐던 두 큰스님의 유훈을 다시 새겨 볼 시점인 것 같습니다.
8. 이후 행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64년 부산 다대포 하안거, 서울 도선사 동안거
1965년 문경 김용사 동안거
(육조단경 금강경 증도가 및 중도이론 등을 대중에게 최초 법문)
1966년 문경 김용사 하안거, 해인사 백련암 동안거
1967년 해인사 초대 방장으로 추대, 이후 27년 간 백련암 주석
1981년 7대 종정 추대
1991년 8대 종정 추대
1993년 세수 82세 법랍 57세 11월 4일(음력 9월 21일) 입적
9. 임종게
平生을 欺狂男女群(기광남녀군)하니 :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미천죄업)이 過須彌(과수미)로다. :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활함아비) 恨萬端(한만단)이여 :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一輪吐紅(일윤토홍) 掛碧山(괘벽산)이로다. :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 품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2. 저서
1976년 스님께서는 [한국 불교의 법맥]을 지으셨는데 조계종의 종조는 태고보우가 되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셨습니다.
당시 서옹스님이 종정으로 계셨는데, 한국 불교의 법맥에 대한 이론은 스님 자신이 제공하겠으니 서옹 종정 큰스님은
이것으로 종헌을 고치도록 협조하십시오. 하고 비매품으로 발간하였습니다.
1981년 12월 [성문정로] 출간
1982년 11월 [본지풍광] 출간
위 두 권은 스님의 대표적 역작으로서 스님 스스로도 "나는 이 두 권의 책으로 부처님게 밥값 다했다"는 말씀도 하셨고
"누가 후일에 나의 안목을 보려면 본지풍광과 선문정로를 보면 그 속에 내 안목이 다 들어있고, 내가 누구의 법을 이었느냐
묻지 말고 이 두 권의 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이는 내가 어느 법을 이었는지 알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신
당신의 역작입니다.
1986년 6월 [돈오입도요문론 강설], [신심명 · 증도가 강설] 출간
1987년 6월 [자기를 바로 봅시다] 출간
1988년 2월 [돈황본 육조단경] 출간 -▶ 1988년 7월 [영원한 자유] 출간
1992년 4월 [백일법문] 상·하 출간 -▶1993년 5월 [선문정로 평석] 출간
{선문정로 평석}은 스님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 아니고 원융스님이 선문정로는 어려우니까 좀 더 쉽게 풀어서
일반 사람들이 스님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외 큰스님의 지도로 1988년 9월 15일
[禪林寶典(선림보전)] 초판 발행을 시작으로 하여 1993년 7월 25일 벽암록 상·중·하를 끝으로
[禪林古鏡叢書(선림고경총서)] 전 37권을 완간하였습니다.
3. 사상
큰스님의 사상은 방대하고 깊어서 많이 연구하고 정리해야 될 것으로 여깁니다.
그간에 이야기되어 온 것을 중심으로 저의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돈오돈수 사상
익히 알려진 대로 큰스님의 사상의 요체는 돈오돈수입니다.
평소 스님께서는 예를 들어 남들이 서울이 어떻고 남대문이 어떻고 하는 것은 다 소용없고 자신이 직접
차를 운전하여 한강다리를 지나서 남대문을 거쳐 광화문을 직접 돌아보는 것이 돈오돈수사상으로 서울
얘기를 하는 사람이고, 괜히 서울도 와 보지 않고 비디오테이프로 남대문 보고 국회의사당 본 것으로
서울을 봤다고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하면 이것은 돈오점수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의 사상은
견성에 있어 점차나 차제를 논하지 않는 것이며, 고불고조의 선종 전통 종지인 돈수사상을 육조단경에 의지하여
한결같이 일생동안 주장하시고 규봉스님과 그를 이은 보조스님의 점수론을 배격하고 선종의 종풍을 드날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이 사족을 붙인다면
경허 큰스님께서는 사그라져간 禪風(선풍)을 다시 일으키신 분이라면,
성철 큰스님께서는 돈오돈수사상을 표방함으로써 선종의 우담바라를 만개시킨 분이라 보고 싶습니다.
스님께서 초록해 둔 노트와 법문집들을 참조하여 큰스님께서 정리해 놓으신 참선의 대원칙을 한번 새겨 보겠습니다.
[참선의 대원칙]
☞ 공부가 아무리 잘 되는 것 같아도 꿈에 되지 않는 공부는 공부라고 말할 수 없다.
꿈에도 공부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게 된 때 비로소 공부를 조금 하게 되는 것이다.
☞ 아무리 크게 깨쳐서 법을 다 알아도 잠들어 캄캄하면 죽어 몸을 바꾼 뒤에는 다시 캄캄하여 생사고를 도로 받게 된다.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밝음과 어둠을 뛰어 벗어난 절대적 광명이 항상 밝아있는 사람이라야 천만 번 몸을 바꾸어도
영원토록 부수어지지 않아 생사고를 받지 않고 큰 자유와 활동력이 있다.
이 절대적 광명은 천만 부처가 설명할래야 설명할 수 없으며 가르쳐줄래야 가르쳐 줄 수 없다.
오직 공부를 하여 이곳을 깨친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고 깊은 이치이다.
☞ 잠들어도 항상 밝아있는 절대적 광명을 얻기 전에는 화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전에 혹 아는 생각이 나더라도 그것은 바로 안 것이 아니니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스님이 말씀하신 화두공부에서 三分段(삼분단)입니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그것을 거쳐서 확철대오해야 견성이고 그것이 돈오돈수의 경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것은 사월 초파일 법어입니다.
요즘 지존파 사건이다 살인 사건이다 하여 신문에서는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그러는데 이 인간성은 어디서 찾겠습니까?
큰스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본래 자성을 돌이켜 깨닫는 길에 온 대중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고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나만을 위한 생각을 버리고 힘을 다해 남을 도웁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게 스님께서는 누누이 오늘 문제되는 우리의 불성 우리의 깨침에 대해서 이미 설파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웃에 전하고 법공양을 철저히 한다면 우리의 주변이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광명으로 훨씬 더 밝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3) 남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남을 10원어치 도와주고 선전은 100원어치 해서는 안 된다고 늘 당부하셨습니다.
백련암 신도들에게도 항상 자랑하지 말고 남모르게 남을 도와주라고 간곡하게 다음과 같이 법문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라고 하셨습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우리들이 몸과 마음과 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열리지 못하고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하여야만 반드시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나서 자랑하면 자신의 불공을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모르게 남을 도와주자는 이것뿐입니다.
4)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동체대비의 사상 없이는 큰스님의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인간성 회복문제에 있어서도 남을 위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불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의 법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비가 근본임으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입니다.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든 생활의 기준을 남을 돕는 데 두어야 합니다.
부처님 앞에 절을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절하거나 나 잘되도록 절하지 말고 남을 위해 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백련암에 다니는 신도들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참회문을 읽으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회법으로 일체중생을 위하여, 일체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의 근본자세이며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인과법칙은 불교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 원리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4. 결어
큰스님의 생활에 대한 자료들을 준비하면서 보니, 스님의 어록과 녹음 테이프도 남아 있지만 영상물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스님의 일대기를 5부작으로 영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 우선 봉녕사 학장으로 계시는 묘엄스님을 만나 뵈니 스님의 지난날을 잘 알고 계시었습니다.
묘엄스님이 중학교 입학 서류관계로 친척 어른과 함께 청담스님을 뵈러 대성사에 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 같이 계시던 성철스님을 뵈니 아시는 것이 자기 국민학교 선생님보다 좀 나은 것 같아서
묘엄스님이 말하기를 "스님 아시는 모두를 저에게 가르쳐 주면 출가하겠습니다."고 여쭈니 스님께서
받아들이시어 수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담스님께서 "묘엄이의 사미니계는 성철 스님이 직접 주어야 한다"고 해서 유일무이하게 성철스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미계를 주시고 또 사미계첩을 직접 써 주시면서 靈山正路(영산정로)라
이름하고 국한문 혼용, 친필로 써 주셨다고 합니다.
묘엄스님에게는 그 당시 큰스님이 학교 선생님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했었지만 가까이 모시고 보니
뛰어난 총명과 기억력과 정진의 남다름을 알게 되고 큰스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을 세상에 다 내어놓고
가셔야 한다고 찾아뵐 때마다 부탁드리지만, "글쎄 그렇게 쉬운 일인가" 하셨다 합니다.
저희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큰스님이 아시고 계시는 것을 모두 다 받아놓지 못한 죄가 수미산을 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바세계의 그릇이 작아 더 많이 내 놓고 가시지 못한 스님께서도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자니 받을 사람이 있나
말하니 들을 사람이 있나
그렇게 해서
곤하면 주무시고
배고프면 드시고, 그
렇게 묵묵히 사시다가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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