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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교 공부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의 행장

by 범여(梵如) 2012. 10. 26.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석가세존 제57대손이며 임제정맥(臨濟正脈) 제19대 적손이다.

태고는 호(號), 보우(普愚)는 휘(諱)이고, 법명은 보허(普虛)다.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의 행장

태고보우국사는 고려 충렬왕 27년(1301) 9월 21일 경기도 양근에서 개부의동삼사주국 문하시중판리병부사 홍주(洪州) 홍씨(洪氏) 연(延)을 아버지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정(鄭)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해가 품안에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고 하며,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기골이

준수해 법왕아(法王兒)라 불렸다.

 

13세(충성왕 5) 때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스승으로 득도하고, 19세(충숙왕 6) 때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총림인 보림사(寶林寺)에서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로서

선지(禪旨)를 참구했으며, 교학연구에도 힘을 써 26세 때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했다.

30세 때 출가장부의 큰 서원을 세워 대도를 성취하고 교계와 사회의 정화에 심신을 바치고자

용문산 상원암에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올리면서 12가지의 큰 서원을 세웠다.

 

33세(충숙왕 복위2) 때 일대사인연을 성취하지 못하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성서(城西)

감로사(甘露寺)에서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으며 용맹정진한 끝에 지혜가 크게 열리었다.

37세(충숙왕 복위6) 때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일체진멸 명위부동(一切盡滅 名爲不動,

일체가 모두 멸한 그것을 일러 부동이라 한다)"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했고,

38세 때 전단원(栓檀園)에서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로 의문을 크게 타파해 마침내 견성오도했다.

 

그후 고향 양근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효성을 다했으며, 41세(충혜왕 복위 2)때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절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짓고 오랫동안 주석했다.

46세(충목왕 2) 때 중국으로 건너가 2년여 동안 수행하던 중 원나라 황제로부터 특별한 우대를 받아

몇 차례 법회를 주관했으며, 특히 임제선사의 18대 법손으로 당시 중국에서 으뜸가는 고승인

석옥청공(石屋淸珙)선사(禪師)를 만나 심계(心契)를 얻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임제의 정맥이 계승되었다.

 

48세(충목왕 4) 때 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미원(迷源,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소설산(小雪山)에 들어가

몸소 밭을 경작하며 정진수행했다. 52세 때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경용사에 주석했으며, 56세(공민왕 5)때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開堂)하였다. 그때 왕은 만수가사와 좌구·수정염주·침향과 불자(拂子)를 올리고 왕사로 모셨다. 이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면서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일을 모색했다.

 

71세 때인 1371년(공민왕 20)에 국사(國師)가 되어 영원사(瑩原寺)에 있었다.

그 뒤 양산사(陽山寺)로 옮겼으며, 81세 때 우왕에 의해 다시 국사로 책봉되는 등 왕사로서 16년 국사로서

12년 동안 봉직하다가 82세 때인 1382년(우왕 8) 12월 24일 세연을 마치니 세수 82세요 법랍 69세였다.

시호는 원증(圓證),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고 했다. 저술로는《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2권이

현존하며, 시문집《태고유음(太古遺音)》등이 있다.

 

임종게 / 태고보우(太古普遇)  人生命若水泡空 인생명약수포공
八十餘年春夢中 팔십여년춘몽중
臨終如今放皮 임종여금방피대 一輪紅日下西峰 일륜홍일하서봉

 

해석1> 사람의 목숨이란 물거품과 같아서
팔십 여년을 봄꿈 속에 지냈구나
숨이 다하여 오늘 허울을 벗어놓고 가려하니
한 바퀴 붉은 해는 서쪽 봉우리로 잠긴다

 

해석2>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

팔십 여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자루를 버리노니

수레바퀴 같은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종조의 사상
태고종조(太古宗祖) 보우국사(普愚國師)의 종풍(宗風)은 원융불교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곧 원융사상이

그의 중심사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원융은 주지하다시피 불교에서 주로 쓰는 말이다.

흔히 원융무애(圓融無碍)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떤 사상이나 편견에 걸림 없이 이(理)와 사(事)가

한결같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태고보우국사의 중심사상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원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敎)와 선(禪)을 일치시킨 것이 그 첫째요, 정토(淨土)와 선(禪)을 방편과 지혜로 수용해 곧 정토와

선은 다르지 않다는 중도적(中道的) 융합을 모색한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세간과 출세간을 원융한 것이 그 세 번째다.

 

1. 교와 선을 일치시키다
태고보우국사는 교와 선의 통섭(通攝)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구산일문론(九山一門論)과 오교홍섭론(五敎弘攝論)을

공민왕에게 개진했는가 하면, 법호기(法號記)에서 종(宗, 뿌리:禪宗)을 부양하고 교(敎)를 수립(樹:나무)한다는

뜻의 부종수교(扶宗樹敎)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자신 스스로 교와 선을 겸수해 원융의 자세를 견지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참선하는 가운데에서도 주요 경전을 두루 섭렵하는 등 간경(看經)에도 게을리 하지 않아

화엄선(華嚴選)의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특히 《원각경》에서 마음의 응어리를 풀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고 조주무자(趙州無字)의 공안을 관철하여 확철대오하기에 이르는데,

이때 이르길 "내 마음이 곧 부처요, 내 마음을 깨닫게 하는 방편이 곧 교화"라고 말했다.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사상(通佛敎思想)은 이렇듯 선·교의 원융을 토대로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싹터왔으며, 태고보우국사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2. 정토와 선을 융합하다
태고보우국사가 염불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했으며, 선을 주로 하던 그가 염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특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보조국사 지눌이 정토수행에

대하여 일단 부정적 입장을 취한 것과는 달리, 태고보우국사는 같은 선사이면서도 정토수행을 선의

입장에서 수용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고보우국사의 어록들을 살펴보면 염불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그 자신이 누구인가를 돌이켜 관찰하는 것이다.

더욱이 돌이켜 관찰하는 그 자신 또한 누구인가를 관찰하는 것이니, 선가의 '이뭣고'화두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태고보우국사의 염불은 선의 입장에서 정토를 수용한 선적(禪的) 미타염불관이라 볼 수 있으며,

염불수행을 공안화한 것으로 태고보우국사의 정토관은 한마디로 간화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태고보우국사는 지혜와 방편이 둘이 아닌 것처럼 선과 염불을 다르지 않게 봄으로써 선과 정토의

중도적 회통을 이뤄냈던 것이다. 곧 염불수행을 선수행 차원으로 끌어올려 서로 다른 수행체계를 융화시켰으니,

곧 선과 정토의 원융이다.

 

3. 세간과 출세간을 원융하다
태고보우국사의 이러한 자재원융(自在圓融)한 삶은 세간과 출세간을 원융한 점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세간과 출세간의 원융이라 함은 부처님의 삶의 방편을 그대로 따른 것을 의미한다.

태고보우국사가 출가이후 용맹정진 실참실수(實參實修) 끝에 마침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뒤

제일 먼저 기쁨을 전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친가의 부모였다.

 

보편적으로 출가승이라 하면 가정이니 국가니 사회니 하는 이른바 세속을 멀리 떠나는 것을

본분(本分)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태고보우국사는 출가의 목적이 수행에 있으며 수행의 목적은

삼보·부모·국가·중생의 네 가지 큰 은혜를 갚는데 있다고 믿었기에 깨달음을 이룬 직후 부모를 찾아

효양에 힘썼던 것이다. 이는 곧 부처님의 상구보리(上求菩提)를 향한 출가의 큰 뜻을 따른 것이며,

깨달음을 이룬 뒤 교화의 현장으로 몸소 걸어 나온 부처님의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서원을 그대로

실천한 것과 다르지 않다.

 

태고보우국사가 그같은 효양지심(孝養之心)과 더불어 왕사 16년 국사 12년 동안 보여준 나라에 대한

봉공정신(奉公精神)에서도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다. 구산원융과 오교홍통을 모색한 원융부의 설치·국왕의

선정교화(善政敎化)·한양천도 진언·홍건적의 침략 예견 등 교단안팎으로 원융화합을 모색함은 물론

국가문화창달에 이바지한 일 등은 태고보우국사가 보여준 진속원융(眞俗圓融), 즉 세간과 출세간을

하나로 섭수한 원융불교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태고보우국사는 명예나 이익을 뜬구름처럼 여겼으니, 제자 유창(維昌)이

"사지염담(師之恬淡)이여 어아(於我)에 여부운(如浮雲)이라"고 상찬한 사실에서 그의 진면목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태고보우국사가 출세간인 불승(佛僧)이면서도 세간을 저버리지 않았고, 또 세간에 출입하면서도

출세간에 철저했던 것이니 진리를 통달한 대도인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종조의 사적(史的)지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일대사인연은 오직 중생교화에 있다.
그런데 중생의 근기는 너무나 각양각색이라 그에 대응하는 부처님의 교화방법도
다양했으니, 교화에 대응하여 나투신 몸을 천백억 화신이라 하고 그 나타내
보이신 법을 팔만사천법문이라 하였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천7백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우리의 독특한 지역성·시대성·민족성·문화성 등을 가늠하여 수없는 방편이
더해지고 덜해지면서 각 종파가 성립되었으니, 교단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교리의 발달사와 종파의 변천사가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교리의 발달과 종파의 변천이라는 역사적인 면에서 살펴볼 경우
태고보우국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위치는 참으로 획기적이고
그 중요성은 심대하다고 하겠다. 태고보우국사 이전의 한국불교는 흔히
『오교구산(五敎九山)』으로 불리었다. 이 오교구산에 대해서는 그 교리의 발달과
선양의 측면에서 또는 종파의 성립과 변천의 측면에서 앞으로 많은 고증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불교가 전래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는 동안 교리적으로나 종파적으로
많은 변천과 분파가 있었던 것은 뚜렷한 사실이라 하겠다.

불교의 이런 종파적 분립은 한때 불교의 저변확대를 이루어 종지선양과
교세확장을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차츰 말기로 내려오면서 도리어 분립으로 인해 모순과 대립이 심하였으니,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이면서도 이교도 이상으로 서로 배척을 일삼아 그 결과
한 국민으로서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혼란과 대립의 극심한 상황을 초래했던 것이다.

태고보우국사께서는 이러한 시대적 폐단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이의 지양에 힘쓰셨다. 그것은 태고보우국사 스스로 어느 한 종파 특히 선(禪)과 교(敎)에 치우치지 않고
폭넓게 수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왕사와 국사가 된 이래 교단정책을 시행함에
원융부를 두어 구산원융 오교홍통(九山圓隆 五敎弘通)에 힘을 다한 것이 그것이다.

태고보우국사의 이러한 행적은 시대적 폐단을 개혁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이것이 훗날 우리나라 불교계의 한 지표가 되었으니, 선·교 겸수라는 독특한
사상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또한 종파의 원융을 도모한 교단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국사의 본뜻과는 다른 측면에서이지만 국가정책으로 여러 종파의
통합을 강행했으니, 세종 이후에는 선종과 교종만을 인정하여 조선말기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태고보우국사 이전의 한국불교교단은 여러 종파로 분리되어 각 종파마다
종조(宗祖)와 종지(宗旨)와 종도(宗徒)와 종세(宗勢)가 따로 있었지만, 태고보우국사
이후에는 그의 수행관과 원융정책에 의해 종파를 포괄하는 사조가 형성되는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국가정책에 의한 종파의 통폐합으로 종전처럼
각기 종조와 종지와 종도와 종세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태고보우국사 이전의 한국불교는 이른바 『오교구산』이 각기 성립·발전하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으며, 태고보우국사 이후부터는 여러 종파를 포괄하여
원융하는 시대라 할 것이다.

태고보우국사는 그렇듯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사상사적 차원의 수행관으로 보나
교단사적 차원의 원융정책으로 보아도 중흥조의 위치는 물론 종조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조 서산대사 휴정(休靜) 이후 그의 문도에
의해 태고보우국사의 법맥을 계승하는 법통확립에 따라 오로지 그의 사상과
법맥을 계승한 문손들만이 그 주인공이 되어 오늘의 한국불교를 계계승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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