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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교 공부

조계사의 팔상도 설명

by 범여(梵如) 2012. 11. 2.

조계사 대웅전입니다.

 

대웅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큰 영웅이 계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걸림이 없는 분, 대자유인,

스스로를 극복하고 능히 자유자재가 되시는 분,

하늘과 땅, 모든 존재로부터 마땅히 존경받는 분을 모신 곳,

즉,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입니다.

조계사의 경우처럼 좌우에 아미타부처님과 약사여래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 경우에는

대웅전이라는 명칭보다 격이 높은 대웅보전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계사는 창건 당시부터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을 모셨기 때문에

대웅전이라고 불러져, 2006년 삼존불(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아미타부처님,

우측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이후에도 이전에 부르던 명칭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조계사 대웅전 편액은

전북 구례 화엄사에 있는 대웅전 편액을 탁본하여 조각한 것을,

대웅전 낙성 당시에 단 것입니다.

글씨는 조선시대 선조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의창군 이광(1589~1645)의 것입니다.

 

팔상도 입니다.

1) 석존의 전신 호명보살이 입태할 곳을 살피시다.

 

석가세존의 전신(前身)인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보살만행을 닦아서

갖가지 공덕을 만족하게 이루어 한 생 있다가 부처를 이룰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의 몸으로 도솔천 내원궁에서

하늘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었다. 그때 호명보살은 사바(沙婆) 중생을 제도할 인연이

왔음을 관찰하시고 여러 하늘 임금에게 여래의 부모 될 사람을 물색하도록 명하신 바,

금단천자가 카필라국의 석가족은 대대로 성왕(聖王)이 나타나 백성을 덕으로 교화하였고,

현재는 사자협왕(獅子頰王)의 아들인 정반왕(淨飯王)이 백성을 통치하고

왕후는 마야부인인데 매우 현명하고 단정하신 분이니

그를 부모로 정하심이 어떠한가 하고 아뢴다.

그러자 호명보살은 일생보처보살이 태어날 곳은 60가지 공덕이 구족되어야 하고

어머니 되실 분은 32가지 공덕을 갖추어야 하는데

정반왕과 마야부인이 마땅하니 부모로 선택할 것을 결정하신다.

 

2) 마야부인의 태중에 드시다. - 도솔래의상(蔸率來儀相)

 

마야부인은 정반왕을 모신지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훌륭한 왕자를 잉태하기를 기도하였다.

그렇게 지성으로 기도하기를 100일이 되어 가는

초가을 보름달 밤 난간에 기대어 졸다가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하늘문이 열리며 오색광명이 뻗치고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을 덮은 그 속에

연화관을 쓴 거룩한 상호를 갖춘 보살이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좌우에 무수한 하늘 사람과 보살들의 호위를 받으며

부인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소자는 다생의 인연으로 부인께 입태하오니 어여삐 여기소서.”하고는

오른쪽 옆구리로 드는 태몽이었다.

 

3) 룸비니 꽃동산에 탄생하다. -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태자를 잉태한 정반왕비는 산달이 되자 당시의 풍속대로 친정을 가다가

룸비니 동산을 지나던 중 잠시 연(輦)에서 내리어 백화만발한 꽃동산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 동산 한복판에 무우수(無優樹:바라차 나무)가 있었는데 오른손을 들어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 때에 뱃속의 아기가 태동하여 아는 듯 모르는 듯 태자가 탄생하였다.

태자가 한손으로 하늘을, 한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옮기는데

땅에서 연꽃이 솟아 올라와 태자를 떠받들었다. 태자는 낭랑한 음성으로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가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고 외치었다.

<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 보요경(普曜經)>, < 태자서응경(太子瑞應經)>,

<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4) 아시타 선인의 예언 - 선인점상(仙人占相)

 

태자의 탄생 소식을 들은 정반왕의 기쁨은 그지없었고 나라 안팍이 온통 경축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곧 이름 높은 바라문을 불러서 태자의 이름을 싯달타(Siddartha)라고 명명하였다.

싯달타(Siddartha)는 모든 것이 다 성취된다는 뜻이다.

그때에 선산(仙山)에서 백여 세 동안 수도하던 아시타(Asita)선인은 상서로운 기운이

카필라국에 뻗치는 것을 보고 대각성자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짐작하고 궁궐로 태자를 친견하러 찾아왔다.

아시타 선인은 태자의 상을 두루 살피고나서 태자의 발에 경배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정반왕은 놀라서 까닭을 물으니

“태자의 상을 보니 32상 80종호를 갖추어 반드시 부처가 되실 터인데

자신은 나이가 많아 부처님을 뵐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5) 치국평천하의 입태자식 관정례(灌頂禮)를 하다.

 

고대인도 풍속에 태자의 나이가 성장하면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머리에 붓는

관정식과 아울러 태자식을 올리게 되어있다.

인과경에는 태자가 15세 때에 관정식을 행하였다고 하며,

남전불교에서는 태자가 다섯 살 때에 관정식을 행하였다고 한다.

정반왕은 대신들과 의논한 뒤 길일(吉日:2월 8일)을 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보배병에 사해의 바닷물을 길어오게 하여 이것을 바라문에게 주고 바라문은 대신에게,

대신이 왕에게 바치면 왕이 태자의 머리에 붓고 갖가지 꽃과 향과 음악으로 입태자식을

정성스럽게 거행하였다.

 

6) 학문과 무술과 남김없이 통관한 싯달타태자

 

당시 인도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에 24종이 있고

심신을 단련하는 무술에 29종이 있었는데

싯달타 태자는 소년기에 이미 문무를 다 통달하여 더 가르칠만한 스승이 없었으니

차라리 그는 스승이 가르치기 이전에 모든 것을 다 통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구라도 학문과 총명한 지혜와 무술과 체력으로든 감당할 수 없는 경지였다.

 

7) 야소다라 비를 맞이하다.

 

염부수(閻浮樹: 잠부 jambu나무) 아래의 명상(冥想) 이후 태자는 항상 무엇을 깊이 생각하며

세속의 오욕향락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므로 정반왕은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생각하며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세속의 향락으로 유도하였다.

이웃나라의 절세 미녀 야소다라(Yosodhara)공주가 있었는데 그의 총명함과 아름다운

마음씨는 온 천하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태가가 17세가 되자 정반왕은 그녀를 태자비로 맞이하고자 했는데

경합자가 너무 많아 관례에 따라 무술시합으로 결정짓게 되었다.

싯달타 태자도 부왕의 명을 받고 이 시합에 참여하여 크게 승리하고

야소다라 공주를 태자비로 맞이하게 되었다.

 

8) 생로병사의 허무를 관찰하다. -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싯달타태자는 어느 날 궁궐의 사대문 밖으로 나아가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정을 시찰하게 되었다. 그 때 동문으로 나아가 머리에는 흰 서리를 이고
활등같이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가는 노인을 보았고,
다시 남문으로 나아가 살가죽은 말라붙고 뼈만 앙상한 것이 길가 더러운 땅에 쓰러져
‘나를 좀 일으켜 달라’고 목 메인 소리로 외치는 병자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서문에서는 한 시체를 상여 위에 메고 가는 처자와 권속이 그 뒤를 따르며
가슴을 치며 목메어 울부짖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다시 북문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어떤 사문(沙門)을 만났다.
것을 본 태자는 궁궐로 돌아와서 7일 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본행경>인생의 허무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의 근본 고(苦)를 깊이 관찰하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생의 행락은 불타는 집 안에서의 놀이일 수밖에 없다고 크게
비관하고 개탄하였다.
 

9) 세 명의 태자비와 세 궁궐

 

태자의 출가할 뜻을 크게 걱정한 부왕은 제2비 구리와 제3비 녹야를 더 맞이하고

연못에서는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이 피고 겨울, 여름, 우기를 지낼 수 있도록

세 궁궐을 더 세워서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하게 하는 등 온갖 배려를 다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아름다운 세 태자비의 지극한 애정과 수많은 궁녀들이 받드는

인간 최대의 부귀영화와 향락을 인생 배후에 숨은 검은 도적의 영상으로 보아

전혀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인생의 깊은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최대의 적(賊)인 생사를 해결하기 위한 명상에만 전념하였다.

 

10) 한밤에 성을 넘는 태자 -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정반왕은 태자의 마음이 오직 구도일념으로 뭉쳐 있음을 짐작하고 크게 걱정한 나머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장수와 군사들로 궁성 안팎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싯달타 태자는 생의 본래 면목을 밝혀서 생로병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통감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위한 구도의 출가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2월 8일 한밤중에 부왕의 간절한 애정과

아름다운 세 명의 태자비와 이별하고 애마(愛馬) 간타카를 타고

마부 차익(車匿: 찬다카chandaka) 한 사람만을 데리고 성을 뛰어 넘어 출가한다.

 

11) 스스로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다.

 

한밤중에 성을 넘어 출가한 싯달타태자는 차익과 함께 히말라야산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여러 달 만에 마침내 박가바 선인이 수행하는 숲 근처에
다다르니 과연 세속의 때를 벗을 수 있는 수행처였다.
태자는 그곳의 아노바강 상류 기슭에 자리 잡은 후 찬나에게
“내가 이제 성불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않고는 환궁하지 않을 것이니
부왕께 이 뜻을 잘 말씀드려라”고 당부하였다.
 

12) 설산의 6년 고행 -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당시의 수행자였던 박가바와 알라라 칼라마 그리고 웃다카라마풋타 등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의 수행목표가 천상에 태어나고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증득(證得)하여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목표이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여

궁극적인 고통의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태자는 마가다국의 니련선하(尼連禪河:네란자라 Nairanjara) 동쪽 가야산(伽耶山) 깊은 곳

나무 아래에 자리하여 고행을 시작하였다.

싯달타는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하였다. 몇 톨의 낟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어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싯달타는 아직도 완전한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 넘지도 못했다.

 

13) 수자타(선생녀)의 유미죽 공양

 

고행을 시작한 지도 다섯 해가 지나갔다.

아무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 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어느 날 싯달타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괴롭히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고요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그는 고행을 중지하고 단식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목욕을 한 뒤 강가의 큰 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우루벨라 촌장의 딸인 수자타 여인이

유미죽을 태자에게 받들어 올리니 유미죽의 맛은 비길 데 없이 감미로웠다.

그것을 마시고 나니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

이것을 본 다섯 명의 수행자는 싯달타가 타락했다고 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14) 마왕녀의 유혹

 

목욕을 마치고 유미죽 공양을 마친 싯달타태자의 마음은 날듯이 홀가분 하였다.

모든 것이 맑고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의 환희를 느꼈다. 그는 다시 비장한 맹세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육신이 다 죽어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싯달타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든 지 7일이 되었다.

이 삼매는 보살이 최후에 부처가 되는 단계에서만 얻는 선정이다.

이러한 선정에 들어서 삼매의 위신력으로 두 눈썹 사이

흰 터럭(미간백호 眉間白毫)으로부터 광명을 놓아 아래로 6욕천(六欲天)에서부터

위로는 색계 18천까지 다 비추었다. 제6천인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을 비추시니

마왕 파순은 서른두 가지 악몽을 꾸고 크게 놀라 태자의 성불을 결사적으로 방해하였다.

먼저 마왕의 네 딸을 시켜서 갖가지 유혹을 한다.

 

15) 마왕 파순의 도전 (마왕을 항복받으시다) :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마왕은 미녀들을 동원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태자의 마음을 흔들어 성도를 깨뜨리려 했지만

태자는 이미 희로애락, 시비분별을 초월한 불생불멸의 선정을 성취하였으므로

조금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제 마왕은 다시 맹수와 나찰, 아귀들을

수없이 동원하여 태자를 해치려고 온갖 신통한 재주를 다 하였지만

보살의 몸에는 추호도 접근할 수 없었고, 그들의 독기와 살기는 기진맥진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다. 마왕은 마지막으로 80억의 악마 군중을 이끌고 태자를 살해하려 하였다.

입으로 호랑이, 사자, 독룡, 군사 등을 토해냈고 창, 칼, 화살 등을 무수히 토해냈으며,

80억 마군들이 갖가지 무기로 공격했으나 모두 연꽃으로 변하여 떨어졌다.

그리고 마왕과 군졸들은 태자가 세운 빈병을 쇠사슬로 얽어매어 쓰러뜨리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16) 최후 구경의 정각을 이루시다.

 

마왕의 귀의를 받은 태자는 다시 선정에 들어 그 이튿날 동쪽 하늘에 샛별을 보는 순간

큰 지혜의 광명을 얻으시어 최상의 정각을 성취하였다. 이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최상의 지혜. 이것을 일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곧 최상의 바르고 원만한 정각(무상정등정각 無上正等正覺)이라 하니

곧 성불(成佛)이다. 태자의 나이 서른다섯 살 되는 섣달 8일(12월 8일) 이었다.

이로써 싯달타 태자는 아득한 과거세 연등불께서 예언하신 대로 사바세계에 나시어서

3명(천안명·숙명명·진명), 6통(천안통·천이통 ·타심통·신족통·숙명통·누진통),

10력(力), 18불공법(不共法), 4무소외(無所畏)등의 온갖 지혜와 공덕을 원만히 성취하였다.

 

17) 성불 최초의 공양
 

부처님이 처음 성도하신 직후 대상인 타파수와 발리카라는 두 형제로부터 첫 공양을 받으셨다.

이 두 상인은 본래 북인도를 왕래하며 많은 무역을 하는 이들로서

마침 5백 수레에 보물을 가득 싣고

이 지역을 통과하던 중, 천신의 계시를 받고 부처님이 이곳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신바

첫 공양을 올릴 수 있음을 알고 크게 환희심을 내어 연유(煉乳)에 꿀과 미묘한 향을 화합하고

쌀을 넣어 끓인 죽을 공양으로 올리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供養)을 받으시고

‘너희들이 하는 일이 다 상서롭고, 구하는 것이 뜻대로 되며,

있는 곳에는 선신(善神)의 수호를 받을 것이고,

이 공양을 베푼 공덕으로 장차 최상의 감로법을 얻어 정각을 성취하리니

이름을 마단삼바바불이라 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셨다.

이것이 맨 처음의 공양이며, 맨 처음의 귀의자이며, 또한 맨 처음의 수기(授記)였다.

오른쪽의 사천왕(四天王)은 발우를 바치고 있다.

 

18) 대범천왕이 설법을 청하다.(범천권청 梵天勸請)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시어 이 세간을 관(觀)하시며 이렇게 생각하셨다.

‘내가 증득한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나니

분별과 생각으로써 알 바가 아니요,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서로 알 것이다. 또한 그 바탕이 청정하여 취할 수도 놓을 수도 없고,

공적하여 얻을 것이 없고 길이 적멸한 열반의 바다이니 이것을 사람에게 말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으며 도리어 비방할 것이니 이익이 되지 못할 뿐더러

구업(口業)만 짓게 되리니 어찌하면 좋은가, 그렇다고 설법하지 않고 열반에 들면

무량겁에 중생을 위하여 원을 세우고 정진한 뜻이 없게 되리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시며 미간 백호로부터 광명을 놓으시니 대범천왕이

신력으로 부처님 앞에 나타나 우슬착지(右膝着地)하고

합장공경(合掌恭敬)하며 중생을 위하여 법륜(法輪)을 굴리기를 간청하였다.

또한 재석천왕과 타화자재천왕도 부처님께 중생을 위하여 법륜(法輪)을 굴리기를 간청하였다.

 

19) 5비구의 귀의와 녹야원 설법 - 녹원전법상(鹿圓轉法相)

 

부처님은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이시고 먼저 이 땅 위에서 법을 듣고

깨침을 얻을 사람을 관(觀)하였다.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라마풋타를 찾고자 ‘천안(天眼)’으로 관해 보니 이미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함께 고행하였고 현재는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다섯 사람(콘다나(=고진여), 바파, 바디야, 앗사지(마승), 마하나마)을 관하여 보시고

천여리가 되는 그곳에 이르시어 4성제(四聖諦)와 중도(中道)의 법문(法門)을 말씀해 주시는

첫 법문을 하셨으니 이것이 유명한 녹야원의 초전법륜이다. 이것이 승가(僧伽)의 성립이다.

교진여(=콘다나) 등의 다섯 사람은 본래 정반왕의 명을 받고 출가하여

태자를 잘 모시도록 했으나 고행 도중 수자타(선생녀)의 공양을 받은 태자를 보고는

타락했다 하여 녹야원으로 자리를 옮기었던 이들이었다.

 

20) 본국에 돌아온 부처님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계시면서 항상 북쪽으로 향하여 앉으셨다.

하루는 사리불이 그 뜻을 여쭈었다.

“사리불이여, 나는 부왕이 계시는 카필라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늙으신 부왕은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하루 빨리 카필라성으로 돌아가 부왕 뵙기를

생각하셨으나 새로 교단에 들어온 모든 비구의 교화에 틈이 없으시고

또 석가족들이 교만하여 아직 교를 받을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때를 기다리고 계셨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6년이 되던 해에 정반왕은

부처님과 동갑이며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카알루다인을 보내어 부처님의 환국을 청하였다.

때가 되었음을 아신 부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본국에 돌아가시는데

정반왕과 백관들을 위해 본생담을 설법하셨으며,

정반왕은 총명한 소년 5명을 선발하여 스님이 되게 하였고,

뒤이어 부처님의 동생 난타와 그의 하인 우바리존자도 이때에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21) 라훌라의 출가
 
부처님이 카필라국에 계실 때 목련존자를 부왕에게 보내어
부처님의 아들인 왕손 라훌라를 출가시키도록 권청하였다.
부왕은 반갑게 승낙했으나, 야수다라 비는 크게 반대하였다.
이에 세존께서 정거천자(淨居天子)를 보내시어
세존과 야수다라 비는 성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서원했던
연등불(=정광불) 때의 일을 깨우치게 하여 라훌라의 출가를 승낙토록 하였다.
그리고 정반왕은 나라 안의 좋은 집안에서
각각 한 아들씩 50명을 뽑아 라훌라와 함께 출가시키니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명하여 머리를 깎게 하고, 사리불을 화상(和尙)으로 삼고
목건련으로 아사리(阿闍梨)를 삼게 하였다. < 미증유경(未曾有經)>
 

22)술 취한 코끼리를 항복시키다

 

부처님이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계실 때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데바닷다는

심성이 좋지 않아 항상 부처님을 시기하여 자기가 교단을 장악하고자

아사세왕(=아자타삿투 Ajatasattu : 빔비사라왕의 아들)과 모의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출타하고 5백 나한 밖에 없을 때에 부처님을 청한 뒤

5백 마리의 사나운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서 취하도록 한 다음 부처님을 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들의 술책을 알고 오른손을 드시니

다섯 마리의 사자가 나와 일시에 큰 소리를 벽력같이 질러 천지를 진동시키니

술 취한 코끼리들이 땅에 엎드려 유순해졌다.

왕과 백성들이 놀라서 엄숙하지 않는 이가 없음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천천히 걸어서 왕궁으로 들어가 공양을 마치시니

아사세왕이 ‘저의 품성이 밝지 못하여 참소하는 말만 듣고 큰 역죄(逆罪)를 저질렀나이다.

원컨대 대자비로 저의 미혹한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에 부처님께서는 여러가지로 설법하시어 발심회개(發心悔改) 시키셨다.

 

23) 부처님의 이모 대애도 부인의 출가

 

부처님의 생모이신 마야부인은 부처님이 탄생한 7일 뒤에 세상을 떠났고,

마야부인의 동생 즉 이모인 대애도(=마하파자파티고타미) 부인이 부처님을 양육하였다.

부처님이 부왕의 장례를 마치시고 카필라국에 계시던

어느 때 부처님의 양모가 되시는 마하파자파티 고타미 왕비가

부처님께 출가하여 수행 득도할 것을 세 번이나 간청을 했으나 물리치셨다.

부처님은 카필라성을 떠나 바이샬리의 대림정사(大林精舍)에 계셨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그곳에 온 마하파자파티왕비를 보고

아난존자는 부처님께 여인의 출가를 두 번 청했지만 두 번 다 허락하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여인은 세속에 애착이 깊으므로 도에 들어가기 어렵고,

여인이 출가하면 청정한 정법이 천 년에서 5백년 밖에 전하지 못한다고 거절하였지만

아난존자의 세 번째 청에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지킬 것을 조건부로 하여

출가를 허락하니 이 여인이 최초의 대애도 비구니이다.

이로써 부처님의 교단에 사부대중이 성립하였다.

 

24) 석가세존의 아우 난타의 출가

 

부처님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난타(Nanda)라는 이름의 그 동생은

가비라성의 왕자였으며 착하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손타라'하는 아주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난타는 아내를 무척 사랑해서 늘 아내 곁에 있기만 좋아하였다.

석가모니가 출가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난타는 아내가 그리워서 출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난타를 데리고 극락세계로 갔다.

그리하여 극락세계의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삶을 일일이 구경 시켰다.

그리고 지옥에도 데려가서 지옥에서 고통 받는 많은 죄인들의 처참한 모습도 구경시켰다.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온 석가모니는 난타에게 출가해서 도를 닦으면

극락에 태어나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고, 출가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떨어져서 무한 겁 동안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친절히 일깨워 주었다.

그리하여 난타는 깨달음을 얻고 출가하게 되었다.

 

25) 외도 앙굴리마라를 구제하시다

 

바라문 외도를 섬기던 아힝사카는 뛰어난 실력 때문에 사람들의 질투를 얻게 되고

사람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트리게 된다. 소문을 믿은 스승은 아힝사카에게

사람 천 명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을 가져오면 도를 가르쳐 준다고 한다.

"스승의 말을 따른 아힝사카는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는데

손가락 목걸이를 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앙굴리마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앙굴리마라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두 피해 달아나므로

천 명째 사람은 만날 수가 없으므로 어머니를 죽이려 하였다.

때마침 앙굴리라마는 부처님이 지나가심을 알고 부처님을 해치려 하는데

있는 힘을 다해 뛰었으나 이상하게도 부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사문아, 거기 섰거라!

”부처님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앙굴리마라에게

“앙굴리마라여, 나는 여기 이렇게 멈추어 있다.

너는 어리석어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해쳐왔고 나를 해치려 하지만

나는 여기 이렇게 멈추어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다.

너를 가엽게 여겨 여기에 왔다.” 이 말을 들은

앙굴리마라는 모든 악몽에서 깨어나 올바른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칼을 내던지고 꿇어 엎드렸다. “부처님,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부터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후에 아라한과를 얻었다.

 

26) 계율을 제정하시다

 

부처님은 대중에게 수행규범으로써 5계, 10계, 150계 등의 계율 제정하여 지키게 하셨다.

그 가운데 5계는 재가신도들이 지켜야 할 기본 계율이고, 10계는 사미행자의 계율이며

2백 50계는 비구, 3백 48계는 비구니의 계율이다.

이 밖에도 10중 대계, 48경계가 있으며, 이 모든 계율을 통틀어 3취 정계라고 한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교는 “내가 열반하고 나면 계율로 스승을 삼으라.”하셨다.

 

27) 부왕을 위한 최후의 설법

 

정반왕이 97세가 되던 해 중병을 얻어 아들 세존과 난타,
왕손 라훌라를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때 세존은 왕사성 기사굴산에 계시어 부왕과 2천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부처님은 천이통, 천안통으로 보시고
난타, 아난, 라훌라를 신족통(神足通)으로 부왕을 뵈며 마지막 설법을 하셨다.
“내가 이제 여래를 뵈오니 나의 원이 다 이루어져서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으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소이다.
”이때에 부왕이 합장하고 세존의 발아래 절하면서
부처님의 손을 당신의 가슴 위에 얹고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28)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한 도리천의 왕래

 

어느 때 부처님께서 도리천 환희원에 계실때에 문수사리보살님이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부인께 부처님이 도리천궁에 오심을 알렸다.

마야부인은 부처님을 낳으신지 7일만에 돌아가시고

도리천에 왕생하셨다. 부처님이 친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중생이 육도에 윤회하는 것은 오로지 탐진치 삼독(毒) 때문이오니

이 삼독을 끊어 해탈 묘과를 성취하고 일체를 제도하소서.

”이 법문을 들은 마야부인은 곧 속세의 깊은 인연과 번뇌의 얽힘에서 풀려나

깨달음을 얻어 물러남이 없는 지위에 들어갔다.

 

29) 우전국왕이 조성한 최초의 불상

 

부처님이 도리천궁에서 어머니를 위해 3개월 동안 설법하셨다.

그간에 인간 세상에서는 부처님을 뵈올 수 없게 되었는데

코삼비국의 우전국왕은 부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간절하였던지 전단향나무로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하여

도량을 만들어 놓고 조석으로 예배하였다.

부처님께서 도리천궁으로부터 내려오시자 우전국왕의 이 일을 칭찬하시었다.

 

30) 열반에 드시다 :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부처님은 45년간의 설법을 마치시고 80세를 일기로

쿠시나가라성 사라쌍수아래에서 열반에 드시었다.

열반에 드시기 3개월 전에 미리 예언하시고 제자들에게 법을 묻게 하시었다.

부처님은 무수히 모여든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그동안 내가 한 설법의 내용에 대해서 의심나는 점이 있거든 묻도록 하여라.

승단이나 계율에 대해서도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문을 지닌 사람이 없다고 아뢰자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열반에 든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