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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4 (2)

by 범여(梵如) 201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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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4 (2)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佛也니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世尊하  須菩提야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佛也니이다 
세존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世尊하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히난 福德도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야, 너의 생각에 어떠하냐?  동쪽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과 서쪽과 북쪽과 서북 서남 동북 동남의 네 간방과 위와 아래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는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안주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넓은 것이 허공입니다.
여기에서는 단순하게 허공이라 하지 않고 동쪽부터 하나씩 짚어가시면서 시방(十方)의 허공을 다 열거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집착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복덕(福德)이 그토록 크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복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행복(幸福)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원하게 마음이 열려 무엇에든지 적극적으로 살면 바로 거기서 행복이 시방의 허공만큼이나 보장되는 것입니다.
취한 듯이 꿈꾸듯이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살림살이가 깨어있는 부처님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겠습니까.
먼지보다도 더 작고 미미한 순간적인 즐거움을 붙들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부처님

 자신의 무한한 자유와 행복에다 비교해 볼 때, 위와 같은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마 허공보다 더 큰 무엇이 있었다면 그것에 비유하셨을 겁니다.
 
사실 허공은 비어 있기도 하지만 걸쳐 있지 않은 곳도 없습니다.
어디를 잘라 여기서부터 동쪽 허공이고, 저기부터는 남쪽 허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온 우주 법계(宇宙 法界)에 통채 하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삶을 위하여 탁 트인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온통 하나로 되어있는 허공 만큼이나

 무한히 큰 복덕을 얻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는 물론이고 풀 한 포기, 작은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조각의 의미도

 깨닫게 되는 복덕도 얻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해 새로운 안목이 열려 신선한 아이디어가 본성자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와 매일매일 우리들의 생활은 활기차고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야 말로 색(色)·향(香)·미(味)·촉(觸)·법(法) 그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한정짓지 않는 툭 트인

  부처님 살림 살이 같은 광대무변(廣大 無邊)의 삶을 살게 되는 무량 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須菩提야  菩薩은 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이렇게 가르쳐 준 대로 안주할지니라."

『금강경』은 상이 없는 것으로로써 으뜸으로 삼고 주함이 없는 것으로써 근본으로 합니다.


안주하되 안주함이 없음이요, 또 안주함이 없이 안주함입니다.
보시하되 보시함이 없음이요, 또 보시함이 없이 보시합니다.
행위를 하되 행위함이 없음이요, 또 행위함이 없이 행위함입니다.


아무리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나태내려 하거나 거기에

끈적끈적 달라붙어 있으면  그만 그것이 추해 보이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역겨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복덕을 짓기보다는 있는 복덕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참말로 미련스럽고 답답한 행동이지요.
그래서 먼저 눈을 뜬 부처님께서 우리들 중생이 하는 답답한 짓을 보고 제발 머물지 말고

안주(安住)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작은 마음으로 어디 좀스럽게 매달려 한계가 있게 살지 말고 허공처럼

툭 트인 마음으로 시원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로 미묘하고 아름다운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동안 자신이 환하게 들여다 보고 깨달은 실상을 사구게로 나타내었습니다.
"현실에서 겪는 모든 문제와 고통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결할수 있는가.
그것은 진리를 알고 우주와 인생의 실상을 앎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래는 어떻게 하여 볼 수 있는가.


진리는 어떻게 하여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인생과 우주 삼라만상의 참모습을 아는 길은 무엇인가.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
형상을 보되 진실한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虛忘)합니다.
우리 눈에 잡히는 사물 하나하나 모두가 허망할 뿐입니다.
귀중한 금이나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다고 하는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결국은 허망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상(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은 공(空)인데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동안 형상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다 되어 버리면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지종지하는 우리들 육신도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본래는 텅 빈 것인데 연기(緣起)에 의해서 지.수.화.풍이 잠깐 결합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이 흩어지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망하고 무상하며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몸은 몇십년 후에 어차피 죽을 것인데. 죽을 바엔 지금 죽어 버리자'라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연의 도리를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의 도리를 아는사람은 인생을 알고, 인생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인연의 도리를 안다."라고 하겠습니다.
비단 여래를 보고 진리를 알고 세상의 사물과 우리들 자신을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살이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인 양 거기에 온 마음을 걸고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이미 우리들 나름대로의 업과 인연에 의해 어떠한 견해가 자리잡아

하나의 형상으로 굳어져 진실을, 법을, 여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상(相)'이라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이 불생불변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에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비치고 생각으로 잡히는 형상을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고 온갖 삶의 무게와 가치를

다 싣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금(金)으로 불상(佛傷)을 만들었을 때 부처의 모양을 보지 말고 금(金)자체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금의 가치는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금(金)에 있습니다.


설사 그 금으로 돼지의 형상을 만들었어도 금의 값은 변함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돼지의 형상은 얼마든지 불상으로 변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불상이라는 형상도 얼마든지

 돼지로 변할 수 있지만 금이라는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금불상은 값진 것이고 금돼지는 무가치한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相)에 걸려서 근본의 가치를 보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눈을 뜨고 보면 안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게 아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있는게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만상(萬傷)을 이해하는 도리를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상을 형상이게 한 근본은 영원한 것이며, 불변의 것이지만 현재 눈앞에 보이고 생각으로

잡히는 것은 일체가 다 허망합니다.
허망한 것을 허망하게 볼 줄 알때 바로 그 자리에 여래가 나타납니다.
인연에 의해 잠시 결합되어 형상이 있는 것이지만 본래가 텅비었고 고정 불변한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닌 것,

즉 만상(萬傷)너머에 있는 실상(實相)을 보는 것으로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변덕스럽고 차별하는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근본마음, 본마음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현상에 쫓아가서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고 울긋불긋한 현상에 매여 너무나도 얄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너무나도 안타까워 모든 상 너머에 있는 여래를 찾으로 하신것입니다.
재론하지만 존재를 존재 아닌 것으로 보아 만상이 다 무너졌을 때 그곳에 반야(般若)가 드러납니다.
반야는 바로 지혜이고 여래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참된 나를 보고 너를 보며 부처님도 보고 온 우주의 참모습이 드러나 비로소 깊이 있고

가치있는 인생길이 열립니다.
그리하여 지혜의 삶, 보살의 인생, 여래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말 같지만 우리의 인생, 삼라만상, 온 우주와 거기에서 벌어지는 사사건건을

시원하게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금강경』이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서 근본 취지, '무상위종(無相爲宗)'으로 삼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