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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3(3)

by 범여(梵如) 201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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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3(3)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卽非菩薩이니라
즉비보살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상(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소견이나 인식, 또는 번뇌가 "생각 상(相)"의 상태를 지나
어떠한 고정된 형상처럼 너무나 견고하게 우리 내부에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의 보검으로써 과감히 잘라버려야 할 네 가지의 전도(顚到)된 소견입니다.
"아상(我相)"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것, 또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와 사건을 말합니다.
그 나름의 자만 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에 대한 자존심을 건드리면 발끈하는 것이 보통 우리들 수준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게 자만심입니다.
근본은 있는 것이 아닌데 마음 속에 생긴 병인것 입니다.
이 "아상(我相)"은 "나" 외의 "남이다" 하는 차별에서 생기는 배타 의식이나 차별 의식을 말합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우리는 못난 존재라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힌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어디 우리가 중생이기만합니까.
우리는 부처의 바탕을 가진 중생인 것 입니다.
겉포장은 중생인지 몰라도 속은 고스란히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열등의식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이 다 부처다.
러므로 우리들 내부에 있는 불성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수자상(壽者相)"은 나이에 대해 편협된 집착 즉 나는 지금 몇살이다, 젊었다 늙었다

 또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이다 하는 한계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障隘)가 됩니다.
아상의 번뇌를 통해 인상이 나오고 또한 중생상, 수자상이 차례로 나오게 됩니다.
사실 아상은 매우 미세한 번뇌로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도 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니다.
어느 순간에는 떨쳐버렸는 줄 알았다가도 어느새 또 나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중생상, 수자상으로 갈수록 갈수록 거친 번뇌라 비교적 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습니다.
래서 평소에 불자라면 적어도 중생상, 수자상은 떼어놓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길 권합니다.
우리들은 참생명에 대한 신념(信念)과 이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못난 중생이라고 낮추어 생각합니다.
 
우리들 자체는 불성인간(佛性人間) 그대로이고, 그렇게도 내 생명은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無量功德生命)

 그대로이며, 우리들 내부에 온갖 만행만덕(萬行萬德)을 다 갖추고 있다 하여도 흔히들 "나는 업보(業報)가

많고 업장(業障)이 두터워 무엇이 안돼."하고 부정적인 생각즉 중생상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불성 인간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원력을 갖고 무한히 나의 참 생명력과 가능성을

 남김없이 활용하여 성취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믿고 활용하여 바라는 것을 성취해 가야 합니다.
업(業)타령은 진정한 불교인이 절대로 할 것이 못됩니다.
업을 극복해 가야하고 팔자도 극복해야 하고 인연조차도 힘차게 극복해가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중생이라고 생각하면 중생 행동밖에 못하는 것이고 부처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부처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나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마음자리가 진실한 삶이라면 마음은 나이를 먹지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마음자리에는 "천지보다 먼저 되었으되 그 비롯함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까지

있으되 그 마침이 없다(先天地而無基始 後天地而無基終)"라고 하였으니 어디를 토막내어

몇살이다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한 생(生)만을 기준으로 해서 '젊다', '늙다', '몇 살이다'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세 소년이 전생(前生)의 나이까지 합쳐 60세 노인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에 어디 나이가 있겠습니까?
그게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옛날 '구자불성(拘子佛性)'으로 유명한 조주 스님은 120세 까지 살았는데

그 조주 스님에게 제자들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오래 사실 수가 있으십니까?"
"나는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루 24시간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24시간을 부린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이나 시간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면 늙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젊게 살고 무엇에든지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좀 돕자."고 하면 "이 나이에 무얼 해. 젊은 사람들이나 하도록 내버려 두지."
하며 뒤로 물러나고 안으로 숨으려 듭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젊은 아이들만 봉사 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남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 작은 한모퉁이라도 비추는 등불이 되고저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당장 시간과 정성을 쏟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좀 주책없다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용기를 내어 열심히 작은 한 모퉁이를 비추다 보면 차츰차츰 더 넓은 곳,

더 많은 사람을 비추게 됩니다.

적어도 불교인이고 보살이라면 최소한 나이에 대한 고정 관념을 떨쳐내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상대사께서는 법성게(法性揭)에서 '파식망상필부득(파息妄想必不得)'즉 "망상을 쉬지

않을래야 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처럼 불교를 통해서 우리의 참생명을 바르게 이해하면 본래로 없는 아상(我相),

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번뇌도 저절로 쉬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력(願力)과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반야의 삶을 펼쳐 보이는 보살의 인생,

부처의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