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4 (1)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은 몸이든 마음이든 어떠한 행위를 하기 마련입니다.
행위란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엮어가는 행위가 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금강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가 한 행위에 안주(安住)하지 말라. 머물고 집착하지 말라.
미련과 아쉬움을 보이면서 끈적끈적 늘어 붙지 말라.
하찮은 일로 생색을 내면서 추잡을 떨지 말라.
어떠한 일에도 정체되지 말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라.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보다 큰 인생,
탁 트이고 시원스런 인생을 살라.
그런 삶은 세계적 삶이요, 우주적 삶이요,
반야의 빛이 빛나는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진실로 온 우주 법계(宇宙 法界)를 다 채울 수 있고, 또한 한량없이 아름답습니다.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또 설명하겠다.
수보리야,보살은 모든법에 안주하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수보리가 제2분에서 “깨어있는 삶을 살고저 하는 사람들, 즉 보리심을 낸 사람들은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항복받습니까”하고 법을 청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 3분에서 ‘마음을 항복받는 법’을 말씀하시고, 여기서는 머무는 법, 안주하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법(法)에 안주하지 말라’에서 법은 단순히 어떠한 가르침만을 말하는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存在)와
그 존재의 법칙인 일체법(一切法)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를 통해 인식되어지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모두인 것입니다. 무를 ‘있다’는것이란 이것들 외에 사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인식 대상이고, 인식한계인 것이며 우리들의 생활 터전입니다.
안주의 주(住)란 사람이 보통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는 곳을 주소라고 하듯이 하루하루 펼쳐가는 삶입니다.
우리들이 행위를 하되 어떠한 대상에게도 주착(主着)하여 작은 삶을 엮어가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주(無住)의 삶, 즉 반야의 빛이 넘치는 힘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보시(布施-dana)'란, ’베푼다‘라는 뜻으로, 부단히 자기 향상을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힘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모든 보살들이 수행하는 여섯가지의
실천 덕목(德目) 중의 첫째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베푸는 일을 굳이 덕목이라고 할 것까지 없이 우리 불자들의 일상적인 생활 전부를 보시라 하겠습니다.
유용한 물질로써 남을 도와주는것, 조그만 친절이라도 베푸는 것,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것,
모임에 같이 동참하는 것 등 헤아릴 수 없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보시인 것입니다.
좀 더 의미를 깊게 가진다면 인간에 대해 깊이 성찰(省察)하고 사물 하나하나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도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말라. 그 일이 베푸는 일일 때에는 더더욱 집착해서는 안된다.
”참된 불교인이라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대상에 집착하여 한정된 삶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고정적인 통념이나 관습을 털어내고 늘 깨어있는 안목으로 세상사를 바르게 이해하여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소질과 능력을 계발(啓發)하여 긍적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須菩提야 菩薩 이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이른바 물질에 안주하지 말고 보시를 하라.
소리와 양기와 맛과 감촉과 일체 작용에도 안주하지 말고 보시를 하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아 같이 보시하여 상에 안주하지 말지니라."
앞에서 한거번에 했던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고 낱낱이 분석하여 일러 주십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살아온 경험과 익혀온 지식(知識)에 의해서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향기를 맡는 것, 혀로 맛보는 것 등등 육진 경계에 머물러 판단을 하고 견해를 가집니다.
집착이 있고 고집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는 그 집착의 울타리 속에서 안주하게 됩니다.
안주하고는 떠날 줄을 모릅니다.
자신의 좁은 소견에서 떠나면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줄로 압니다.
이제까지 의지해 오던 소견에 온 인생의 무게를 다 올려 놓고 살아갑니다.
끈적끈적하게 주저않고 눌러앉은 모습은 어리석고 미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근본이 굳히게 되어 있지않은데 우리들은 무엇이든 자꾸 고정하려 하고 머물려고 합니다.
거기에만 머물고 집착하니 다른 길이 보일 리 없습니다.
나약하고 좁은 삶, 아프고 쓰라린 불행한 삶이 되지 않을래야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컵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물을 마시는 도구로만 생각하면 그 작용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용도로도 두루 쓸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누가 나를 해치려고 할 때 그 쪽을 향해 던져 보호 수단으로도 쓸수가 있습니다.
좀 더 안목이 있다면 지금은 이러한 형태지만 컵이 되기 이전에는 흙이 있었고 물과 불이
던졌으면 다시 흙으로 흩어질 수 있다는 것도 간파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공(空)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미묘한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집착할 것이 못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크고도 힘찬 삶은, 아름답고도 빛나는 삶은, 기쁘고도 행복한 삶은 모든 '있음'에 집착하거나 머무르지 않는 데에 있다.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살아라. 머무르되 머무는 바 없이 머무르라.
그것이 상(相)에 머물지 않는 보시니라.
그런 삶이야말로 금강석처럼 빛나는 반야의 삶이니라."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안주하지 않고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불교의 가르침은 왜소하거나 찌들린 삶에서 크고 활짝 열린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제한과 한계 속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히 확대된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속박과 부자유한 삶에서 해탈(解脫)의 참된 자유를 삶의 이상(理想)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삶에서 밝고 지혜로운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쓰라리고 불행한 삶에서 무한 행복의 삶을 살고저 합니다.
이와 같은 불교의 크고 드넓은 이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상에 안주하지 않는 보시, 즉 자신의 어리석은 소견과 그 집착에서 가차없이 버리고 떠나는
지혜있고 용기있는 행위로써 가능합니다.인간이란 본래로 속박되고 부자유한 존재가 아닙니다
.쓰라리고 불행한 존재가 아닙니다.먹구름에 가려서 침울하고 어두운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맑게 빛나는 공명(光明) 그 자체로서의 존재입니다.불성 인간(佛性 人間)이기 때문입니다.
불성 인간에 대한 학신은 자질구레한 소견과 집착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도곡 되어 있습니다.
자유와 행복을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큰 복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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