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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9 (1)

by 범여(梵如) 201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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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9 (1)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설법,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킨 『금강경』을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더니

그 무엇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텅 비어 적적(寂迹)하였습니다.
불성의 실다운 모습은 모양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無相)이고 저것도 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수행(修行)의 결과는 이 실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보살, 부처가 다 이 실상 반야의 현현(顯現)이라면 결과의 모양이

있을 수 없으며 얻었다는 마음의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이고 저것도 무상이면 최후에 '무상이라는 상'은 진실이겠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그 '무상 이라는 상'도 끝가지 상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須陀洹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가."
 
지금까지는 부처님의 깨달음, 설법, 『금강경』을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수행자와 수행의 결과도 그렇게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수행의 수준 단계를 하나하나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소승(小乘)불교에서는 성자(聖者)가 되는 단계를 대개 네 단게로 구분하였는데
이 모든 것을 다 부정해 보이면서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는 상을 털어 냅니다.
 
먼저 소승 네 단게의 첫째 단계인 수다원을 살펴 봅니다.
첫째 수행 단계인 수다원을 수행하여 수다원과를 얻은 사람이 스스로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고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수행의 단계를 네 단계로 보지만, 대승 불교에서는 오십이 단계로 세밀하게 나눕니다.
『화엄경』을 보면 우리들이 깨달음을 얻어가는 단계를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오십이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만나서 부처님을 따르고 믿는 것이 열 단계이고 그것이 지나면
불법 안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그것도 열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저절로 구체적인 실천이 나옵니다.
'나는 보현보살행을 할 것이다. 나는 관세음보살행을, 나는 지장보살행을 할것이다.'하는 서원을 세워 실천해 갑니다.
그러다가 좀 더 경지에 깊어지면 회소향대(廻小向大)하여 보다 높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 진실한 회향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내 아이의 입학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들의 성불을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큰 다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단계가 더욱 깊어지면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리와 실상을 바로 보게 되는 지혜가 뚫리게 됩니다.
이 과정들이 각각 열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 지위가 지나면 거의 성불에 이르른 등각(等覺)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드디어 개달음을 얻어
불지위(佛地位)에 오르는 묘각(妙覺)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 오십이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큰 스승 원효대사는 흔히 팔지 보살이라고 합니다.
또, 요즈음 소설이나 영화로도 유명한 『화엄경』중 「입법게품」에 나오는 선재(善財)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이 대승 오십이위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되니 결국에 오십이 선지식을 만나게 되어
바로 이 대승 오십이위를 실천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선지식을 만나게 될 때마다 한 단계 나아가는 것입니다.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 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須陀洹은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이다
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을 입류라 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하옵니다."
 
수다원은 범어로서 입류(入流)라는 뜻입니다.
또는 성류(聖流), 예류(預流)라고도 합니다.
말 그대로 성자의 무리, 수행자의 무리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말하자면 불교에 입문했다.경전 공부에 발심했다. 기도에 동참했다.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 이, 비, 설, 신, 의를 통해 인식하는 색, 성, 향, 미, 촉, 법의 객관에
들어간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니니 최초의 수행 단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올랐다 하는
마음의 때가 있으면 수다원과를 얻엇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우리들에게 맞추어 이야기할 것 같으면 진정한 불교에 입문했다하여 불교인이다
하는 의식이 남아 있으면 진정한 불교인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불교에 입문했다고 하지만 무엇이 어디에서 어디로 들어갔다고 하겠습니까.
불교와 세속의 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삼귀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문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불상을 보았으니 눈이 들어갔다고 해야 할지, 향 냄새를 맡았다고 코가 들어갔다고도 할 수 없고,
부처님 명호를 불렀다고 입이 들어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등신불에 절했다고해서 신체가 들어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들어갔다는 표현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그러므로 입류(入流)는 입류(入流)로되 들어감이 없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斯陀含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이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되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   명일왕래

而實無往來일새  是名斯陀含이니이다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을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 일왕래로되 왕래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이라 합니다."

수행의 둘째 단계 사다함은 일왕래(一往來)입니다.
'한번 갔다온다'라는 뜻인데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사다함에 올랐다 하는 것은 사람이 천상(天上)에 한번 갔다가 다시

인간으로서 와서 최후에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상에서 사다함이 되었다면 인간으로서 한 번 왔다가 다시 천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왕래해야 그 때 비로소 아라한과를 얻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사다함이라는 두 번째 수행의 단계에 올랐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나는 도를 알았다.

얻은 바가 있다.'라는 상이 남아 있으면 사다함과에 올랐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실로 없기 때문에 사다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 십 년쯤 불교를 열심히 믿고 수행을 하였다고 해서 '나는 불교인이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 년쯤 정진 했어도 그러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십 년쯤 다녔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那含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이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阿那含은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일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이다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    명아나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냐.

아나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함과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씀 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는다

하오나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합니다."


세 번째 단계 아나함의 사전적 의미는 '오지 않는다'라고 하는 불래(不來)입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천상으로 가든지

다른 세상으로 가서 다시는 여기로 올 필요가 없이 거기서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천상에서 아나함과를 얻어 다시는 천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오지 않는다.'라는 의미에 맞습니다.


그러나 실로 오지 않음이 없다고 하니 오지 않는 그런 이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30년 동안 불교를 닦았다 해서 이제는 불교인이라 해도 되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진하면 할수록 얻은바가 더 없어야 하고 더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되면 진실로 불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네들 사이에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 사람은 중물이 안 들었다."

같은 불문(佛問)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뜻을 함게 세우려면

수행자의 면모가 나타나야 하는데 중물이 안 들었다는 것은

아직도 세속의 생활 모습을 다 일소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면 "아직도 중물이 안 빠졌다."라고 의미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수행자의 무리에서 뛰어나와 속인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중물이 빠졌다는 것은 수행의 연륜이 쌓이고 쌓였지만 상이 없고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중물이 안 드는 것이 문제이지만 나중에는 중물이 안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제대로 중물이 잘 들고 잘 빠져야만 완숙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