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9 (2)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이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實無有法名阿羅漢 世尊이니 若阿羅漢이 作是念호대
실무유법명아라한 세존 약아라한 작시념
我得阿羅漢道라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이다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입니다."
아라한은 수양을 많이 하여 도가 가장 높은 경지로 흔히 응공(應供), 무쟁(無諍), 이악(離惡), 무학(無學)이라고 합니다.
말그대로 수양을 많이 쌓아 남으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하고, 마음속의 번뇌와 탐진치
망상, 악을 다 떠나보내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성인을 말합니다.
가끔은 살적(殺賊)이라고도 하는데 육근을 통하여 우리들의 진성(眞性)을 도둑질해 가서
우리의 본 마음자리를 흐트려 놓는 것을 즉인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의 흔들림이 없어 안팎이 고요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텅 빈 상태가 되었으니
부처가 되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수행자가 스스로 내가 바로 아라한도를 얻었다.
나는 바로 깨달은 부처이다 라고 하다면 즉각 상에 떨어져 아라한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과 삼라만상, 나타난 현상들, 우리들의 몸과 마음,
온갖 지식곽 감정들이 다 텅텅비어 공한데 깨달음이나 수행도 말할 것도 없이 공한 것입니다.
수행은 그래도 뭔가 있지 않겠는가 한다면 그 순간 즉각적으로 본래로 있지도 않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권선징악(券善懲惡)을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손해를 끼치는 일반적인 여러가지 죄, 악, 업이 모두 없고
무상하다는 것은 좋은데, 우리들이 힘들게 노력하여 얻은 수행이나 지혜 복까지도 없다는
것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수행을 하여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는 상도 철저하게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초기 불교의 네 단계 수행 결과를 다 털어 내었습니다.
수다원,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 모든 가설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행의 상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없다고 하는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수행이 되어 마음의 눈이 열려 한단계 한 단계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단계뿐만 아니라 더 세분하여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은 '수행'이라는 한 낱말로만 나타내기 송구하여 십단계로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수행하실 때를 보살이라 하여 '보살 십지'라 합니다.
이것이 더 세밀해지면 앞에서 살펴 본 대로 대승 오십이위가 되겠습니다.
소승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네 단계인 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용어는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의 수행 용어를 불교에서 빌어 왔다고 하겠습니다.
바라문교에서는 아들이 7,8세 쯤 되면 출가를 시켜 스승을 만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바라문교의 기초를 다지게 합니다.
이것이 수다원, 즉 수행자의 무리에 드는 입류(立流)입니다.
그 다음의 사다함은 일왕래(一往來)입니다.
즉 20세 전후가 되면 천상과 같은 출가한 무리에서 세속의 집으로 한번 돌아 옵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약 20여 년 동안 환속하여 생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불리고, 결혼을 하여
자식도 낳아 집안의 대를 잇습니다.
이런 세속적인 삶을 20여 년간 살다가 40세 전후가 되면 재차 출가를 하여 다시는 인간 세상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래(不來),아나함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속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수행을 열심히 해서 아라한의 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야 바라문 종족과 종교가 대를 이어갈 수가 있고 또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世尊하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에 最爲第一이라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 최위제일
是第一離欲阿羅漢이라하시나 我不作是念호대 我是離欲阿羅漢이라하노이다
시제일이욕아라한 아부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무쟁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에서 제일이라 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심이나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자기자신의 예를 직접 들어 보충 설명을 합니다.
무쟁 삼매(無諍 三昧)란 우리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번뇌와 투쟁, 갈등, 욕망이 일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경(經)을 독송할 때 처음에 외우는 개법장 진언의 '옴 아라남 아라다'에서 아라남이 무쟁 삼매입니다.
경을 읽을 때 마음이 고요하고 동요하지 않아야 경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그대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경을 읽기전에 '옴 아라남 아라다'하여 마음 정지 작업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무쟁 삼매를 얻은 수행자들도 각자 단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 수행자들 중에서 수보리가 제일이라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보리 자신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수보리가 기뻐하였다면 즉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떨어져을 것입니다.
끝가지 철저하게 하나의 상도 내지 않았을 때 비로소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욕심을 떠났다는 것은 바로 무쟁과 통합니다.
욕심을 떠나 보내면 마음 속에서 쓸 데 없는 번민이나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른으로서 대접받고 싶은 욕망, 칭찬 받고 싶은 욕망, 잘 살고 싶은 욕망에 벗어나면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다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귀으를 할 때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법에 귀의하여 욕망과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세존 즉불설수보리
是樂阿蘭那行者라하시련만 以須菩提實無所行일새니 而名須菩提가
시요아란나행자 이수보리실무소행 이명수보리
是樂阿蘭那行 이라하시나니이다
시요아란나행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그래서 우리가 삼귀으를 할 때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법에 귀의하여 욕망과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世尊하 我若作是念호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世尊이 則不說須菩提가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세존 즉불설수보리
是樂阿蘭那行者라하시련만 以須菩提實無所行일새니 而名須菩提가
시요아란나행자 이수보리실무소행 이명수보리
是樂阿蘭那行 이라하시나니이다
시요아란나행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려니와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아란나(阿蘭那-Aranya)는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라는 뜻으로 수행하기에 좋은 조용한 곳을 말합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고요한 숲이나 들, 모래밭 같은 곳을 말하는데 그 곳에서 일체의
경계를 끊어 버리는 무쟁 삼매의 수행을 하는 것을 아란나행(阿蘭那行)이라고 합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무쟁 삼매를 얻은 사람 중에서 제일이라는 인정과 또, 욕심을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무쟁 삼매를 얻은 사람 중에서 제일이라는 인정과 또, 욕심을
여윈 아라한 중에서도 제일간다는 친찬을 받았습니다만 실로 그 칭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또 아무런 상이 없기 때문에 진실로 아란나행, 즉 무쟁 삼매행을 즐기는 자라고 할 만합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깨달음과 설법, 『금강경』, 수행의 결과, 수보리의 수행까지를다 궁극적인
지혜의 안목에서 들추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일관되게 맥락이 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찬탄하는 그 위대한 것들도 반야의 광명에서보면
그랬더니 일관되게 맥락이 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찬탄하는 그 위대한 것들도 반야의 광명에서보면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적적하여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절에 다니면 절에 다니는 대로의 상, 또 절에 다닌 연한에 대한 상,
절 예절을 알면 아는 대로의 상, 수행을 하면 수행을 했다는 상 등 온갖 상 투성이에 꽁꽁
매여 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만 여유를 두고 보면 실존적인 내가 무상인데 이런 나를 근거로 하여 생긴 것에 과연 무엇이 참답게 있겠습니까.
잠깐의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다시 흩어지고 말터인데 거기에 집착하여 상처받으며 한정적으로
조금만 여유를 두고 보면 실존적인 내가 무상인데 이런 나를 근거로 하여 생긴 것에 과연 무엇이 참답게 있겠습니까.
잠깐의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다시 흩어지고 말터인데 거기에 집착하여 상처받으며 한정적으로
살아갈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들이 얻고자 하는 복이나 수행의 열매,
지혜에 대한 기대감. 이 모든 것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라고 생각하여 끈적끈적하게 매여지낼게 정녕코 없습니다.
도를 깨달은 분들의 소감을 시로 표현한 오도송(悟道頌)을 보면 대개가 평상시의
'있다'라고 생각하여 끈적끈적하게 매여지낼게 정녕코 없습니다.
도를 깨달은 분들의 소감을 시로 표현한 오도송(悟道頌)을 보면 대개가 평상시의
평범한 도리이지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서산 스님의 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작야송담풍우악 어생일각학삼성
昨夜松潭風雨惡 魚生一角鶴三聲
간밤에 소나무 푸르른 못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니
고기들은 한 모퉁이에 살고 있고, 학이 세 번 울며 날아가도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대로 평상 도리입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비가 심하게 몰아치니 물고기들이 한 귀퉁이에 몰려 붙어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또 다음날 날이 새면 학이 울면서 날아가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생일각(魚生一角)'을 '고기에 뿔이 하나 생겼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하여 뭔가 기특한 생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못 된다 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비바람이 몰아치니 고기들이 한데 몰려 살고 있다는 것은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평상심이 진정한 깨달음 이라고 할 것입니다
서산 스님의 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작야송담풍우악 어생일각학삼성
昨夜松潭風雨惡 魚生一角鶴三聲
간밤에 소나무 푸르른 못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니
고기들은 한 모퉁이에 살고 있고, 학이 세 번 울며 날아가도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대로 평상 도리입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비가 심하게 몰아치니 물고기들이 한 귀퉁이에 몰려 붙어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또 다음날 날이 새면 학이 울면서 날아가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생일각(魚生一角)'을 '고기에 뿔이 하나 생겼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하여 뭔가 기특한 생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못 된다 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비바람이 몰아치니 고기들이 한데 몰려 살고 있다는 것은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평상심이 진정한 깨달음 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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