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9 (1)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설법,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킨 『금강경』을 반야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더니
그 무엇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텅 비어 적적(寂迹)하였습니다.
불성의 실다운 모습은 모양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無相)이고 저것도 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수행(修行)의 결과는 이 실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보살, 부처가 다 이 실상 반야의 현현(顯現)이라면 결과의 모양이
있을 수 없으며 얻었다는 마음의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도 무상이고 저것도 무상이면 최후에 '무상이라는 상'은 진실이겠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그 '무상 이라는 상'도 끝가지 상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陀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斯陀含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이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陀含은 名一往來로되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 명일왕래
而實無往來일새 是名斯陀含이니이다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을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 일왕래로되 왕래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이라 합니다."
수행의 둘째 단계 사다함은 일왕래(一往來)입니다.
'한번 갔다온다'라는 뜻인데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사다함에 올랐다 하는 것은 사람이 천상(天上)에 한번 갔다가 다시
인간으로서 와서 최후에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상에서 사다함이 되었다면 인간으로서 한 번 왔다가 다시 천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왕래해야 그 때 비로소 아라한과를 얻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사다함이라는 두 번째 수행의 단계에 올랐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나는 도를 알았다.
얻은 바가 있다.'라는 상이 남아 있으면 사다함과에 올랐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실로 없기 때문에 사다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 십 년쯤 불교를 열심히 믿고 수행을 하였다고 해서 '나는 불교인이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 년쯤 정진 했어도 그러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십 년쯤 다녔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阿那含이 能作是念호대 我得阿那含果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不也이니다 世尊하 何以故오 阿那含은
수보리 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일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이다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 명아나함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냐.
아나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함과를 얻었다.' 하는가."
수보리가 말씀 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는다
하오나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합니다."
세 번째 단계 아나함의 사전적 의미는 '오지 않는다'라고 하는 불래(不來)입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천상으로 가든지
다른 세상으로 가서 다시는 여기로 올 필요가 없이 거기서 아라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천상에서 아나함과를 얻어 다시는 천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오지 않는다.'라는 의미에 맞습니다.
그러나 실로 오지 않음이 없다고 하니 오지 않는 그런 이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30년 동안 불교를 닦았다 해서 이제는 불교인이라 해도 되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진하면 할수록 얻은바가 더 없어야 하고 더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되면 진실로 불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네들 사이에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 사람은 중물이 안 들었다."
같은 불문(佛問)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뜻을 함게 세우려면
수행자의 면모가 나타나야 하는데 중물이 안 들었다는 것은
아직도 세속의 생활 모습을 다 일소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면 "아직도 중물이 안 빠졌다."라고 의미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수행자의 무리에서 뛰어나와 속인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중물이 빠졌다는 것은 수행의 연륜이 쌓이고 쌓였지만 상이 없고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중물이 안 드는 것이 문제이지만 나중에는 중물이 안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제대로 중물이 잘 들고 잘 빠져야만 완숙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 佛 敎 ♣ > 經典講解'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0 (1) (0) | 2013.03.22 |
---|---|
금강경 -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9 (2) (0) | 2013.03.21 |
금강경 -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8 (2) (0) | 2013.03.15 |
금강경 -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8 (1) (0) | 2013.03.13 |
금강경 - 무득부설분(無得無說分) 제7 (2) (0) | 2013.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