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파니샤드 이전의 사상
1) 『리그 베다』의 신관(神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종교 문헌인 『리그 베다』는 신(deva)들을 찬미한1,017개의 찬가 (r.c) 이루어져 있다.
한역 불전에선 천(天) 혹은 제천(諸天)으로 번역되는 ‘데바(deva)’는 ‘빛나다’라는 의미의 어근d v로부터
파생한 명사로서 라틴 어의 데오(deo)와 같은 어원이다.
신들의 거처는 보통 천(天), 공(空), 지(地)의 세 영역으로 나뉘어져 형식적으로 33천이라고 말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불의 신 아그니(Agni), 태양의 신 수르야(S죚vrya) 혹은 사위트르(Savitr.), 번개와 전투의 신
인드라(Indra), 소마(Soma), 새벽의 여신 우샤스(Us.as), 사법(司法)신인 와루나(Varuna), 언어의 여신 와츠(V죚ac),
하늘의 신 디아우스 피트르(Dyaus pitr.), 대지의 여신 프르티위(pr.thv ), 폭풍의 신 루드라(Rudra), 강물의 여신
사라스와티(Sarasvat ), 바람의 신 마루트(Marut), 우정의 신 미트라(Mitra), 조상의 신 야마(Yama)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삶에 밀접히 연관되어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경이롭고 신비한 힘들을 상징화하고 신격화한 것이다.
『리그 베다』는 그러한 상징화된 힘들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경외하여 우유와 버터, 소마 등을 바치면서 읊은 노래들의 기록들이다.
예를 들어 아그니 신은 베다 종교의 중심인 화제(火祭)의 신으로서, 소박한 베다 인들의 심성에 불은 경이롭고
두려운 힘으로 비췄다. 그것은 번개가 되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르면서 양자를 결합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숲과 동물과 인간을 태우기도 하고, 고기와 야채를 음식으로 바꿈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며,
무엇보다 제사에선 신들에게 바치는 공물을 연기의 형태로 신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므로 『리그 베다』 찬가의1/3가까이 아그니를 언급하고 있다.
소마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식물에서 추출된 환각물질로서 『리그 베다』의 시인들은 이것을 복용한 후
특수한 의식상태에서 신들과 소통하고 찬가를 읊기도 했는데, 소마 신도 그 물질이 갖는 힘을 상징화한 것이다.
불전(佛典)에서 제석천(帝釋天)으로 불리는 번개의 신 인드라는 인간을 해악으로부터 방어해 주고, 적을
정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며, 생명의 원천인 물을 방출해 주는 신으로서 『리그 베다』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고 있다.
언어의 여신 와츠는 언어와 그것의 바탕인 의식이 사회적 소통과 인간에 대해 갖는 경이로운 힘을 신격화한 것이다.
여신 우샤스는 하늘의 딸이며, 태양의 신부로서 밤의 어둠을 뚫고 나타날 태양 빛을 예기하며 희망과 기쁨을 상징한다.
또 우샤스는 잠재적 상태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둠과 혼돈으로부터 창조와 존재로의 이행을 상징하며, 또 모든
생명의 창조자인 태양(수르야 신)과의 재결합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만물을 뒤덮고 떠받치는 하늘과 대지가 갖는 경외로운 힘은 각각 디아우스 피트리와 프리티위로 신격화되었다.
디아우스 피트리는 희랍 신화의 제우스 파테르, 로마 신화의 쥬피터와 같은 근원을 갖는 신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매개하는 허공의 신인 와루나는 우주의 신성한 이법(理法)인 르타(r.ta)를 수호하는 사법신이다.
르타는 희랍 철학의 로고스에 상응하는 관념으로서 우주적 에너지에 리듬과 조화를 부여함으로써 이 세계가
혼돈과 무질서와 파괴로 나가지 않도록 통제하는 힘이다.
이렇게 존재의 기본적인 힘들을 신격화하여 이들을 찬탄하고 기뻐하고 제사드리는 것이 『리그 베다』의 종교로서,
이런 면에서 다신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다 인들은 이러한 신들과 여신들을 찬양하고 희생제를 올리는데
그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이런 존재들 너머 더욱 근원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신성한 이법인 르타는 신들과
여신들도 그에 따라야 하는 보다 근원적인 힘이었다. 그러므로 신들에 대한 제의(yaj~na, 야냐)도 르타와 상응할 때는
신들의 도움이나 방해와 상관없이 바라는 결과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르따의 통제적 측면이 사회에 적용된 것이
다르마(dharma)이며, 후대엔 제사를 다르마와 동어어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신들을 넘어선 보다 근원적 존재에 대한 모색의 결과로 모든 신들을 하나로 구현한 위슈와카르만(Visvakarman, 만유의 조형자),
프라쟈파티(Praj죚qpati, 피조물의 주), 브라흐마나스파티(Brahman.aspati, 기도의 주)와 같은 추상적인 신 개념이 등장했으며,
더 나아가 인격성을 배제한 형이상학적 일원론으로까지 나아갔다. 『리그 베다』에선 “현인들은 단일자(Ekam-sat)를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라고 말하며, “현자들은 일자(一者, Ekam)를 아그니, 야마 혹은 마타리슈완 등 많은 형태로 표현한다.”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이 다수의 신들이 하나의 동일한 실재의 다른 측면이라는 사상 때문에 베다의 선인들은 하나의 신을 다른
신들과 동일화시킬 수 있었고 다른 신들에 대해 관대할 수 있었다. 또한 신을 찬양드릴 때 그것에 최고 신에게
바치는 모든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뮐러는 교체신교(Kathenotheism)라고 불렀다.
요컨대 『리그 베다』는 다신교, 일신교, 교체신교 그리고 일원론이라는 다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2) 제사의 의미
베다의 종교는 곧 제사(yaj~na)의 종교다. 베다적 세계관에선 모든 사건과 행동은 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사가 세계의 중심이다. 마치 바퀴가 축을 중심으로 돌듯이 세계는 제사 위에서 움직인다.
『리그 베다』의 원인가(源人歌, Purus.a─su죚kta)는 제사의 본질과 기능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찬가다.
원인가는 천 개의 머리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발을 가진 원초적 인간인 푸루샤의 자기 희생, 즉 자기 제사에 의해
이 세계와 인간이 출현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제사는 지고의 힘이고 모든 존재는 이 힘을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찬가는 또한 인간과 자연과 신들이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음을 노래하였다. 원인(源人)의 자기
희생(self-sacrifice)은 원초적 제사로서 베다 인은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밑바탕에 놓인 단일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로써 궁극적 존재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와의 연결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제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원천으로 돌아감으로써 그 근원적 힘에 의해
삶과 세계를 재창조하고 재생하고자 한다. 제사란 인간과 신과 자연적 존재의 친교(親交)를 즐김이며 그 친교로부터
새로운 존재를 창조함이다. 베다의 선인에 따르면 이 친교와 그를 통한 힘의 획득은 삶을 유지하고 갱신시키는 데 필수 조건이다. 『샤타파타 브라흐마나』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무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우주는 존재하는
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사엔 다음과 같은 세 측면이 있다. 첫째는 존재가 성취한 힘을 경축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성의 바탕으로 돌아감으로써
존재를 갱신하는 것이고, 셋째는 자기를 바침으로써 새로운 존재를 창조함이다. 제사는 단순히 신들에게 찬사와 공물을
바침으로써 그 대가로 이익과 은혜를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고
유지하려는 행위다.
그런데 제사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근원적인 힘인 르타에 상응해야 한다.
제사를 구성하는 율동적인 노래와 기도, 주의 깊게 통제된 봉헌과 예배 행위에 의해 르타의 중심으로 침투하여
궁극적 힘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만트라와 행위로 제사를 관장하는 바라문(사제)은 제사의 힘을
통해 우주를 통제한다고 여겼다.
3 우파니샤드의 사상
베다의 마지막 부분(anta)을 차지하며, 또 베다의 궁극적 취지라는 의미에서 ‘베단타(Veda죚nta)’라고도 불리는
우파니샤드는 어원적으로 자격을 갖춘 제자가 스승 가까이(upa-ni) 앉음(sad)을 의미하여, 우주와 인간의 궁극적
진리에 대한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이다. B.C. 800년 이후 수세기에 걸쳐 많은 철인(哲人)과 신비가들에
의해 형성된 이 문헌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일관된 것이 아니지만 이후의 인도 종교와 철학사상을 결정짓는 바탕이 되고 있다.
존재의 기본적 힘을 찬탄하고 존재의 근원에 회귀하여 세계와 삶의 재창조에 참여하는 행위인 제사가 아랸야까에선
내면화되고 상징화되기에 이르렀으며, 우파니샤드에 와선 그 근원적인 존재(=브라흐만, 梵)를 외적인 제사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제사, 즉 작은 나의 포기와, 참 나, 근원적인 자아(아트만)에 대한 명상적이고 신비한 지식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행위로부터 내적인 지식(직관적, 신비적 지식)으로 모색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한 변화의 요인은 초기의 낙관적인 관점이 바뀌어 생사의 반복적인 순환 즉 윤회와 삶의 피할 수 없는 한계들
즉 고(苦)의 관념이 우파니샤드 시대의 철인들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벗어나는가 하는 문제가
그들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위(카르마)란 제사행위와 같은 좋은 행위일지라도 인과의 법칙에 따라
과보를 낳게 마련이고, 설사 내세에 조상들이 사는 하늘(天)에 태어나도 그 업력이 다하면 다시 죽어 지상에 돌아와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윤회의 관념은 우파니샤드에서 확립된 이래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탈이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마침내는 그로 회귀하는 존재의 근원을 ‘브라흐만’(梵)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생사의 윤회에 영향받지 않는 불변의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된다면
더 이상 생사의 윤회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브라흐만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곧 브라흐만이 된다.”고 가르친다.
또 이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므로 브라흐만을 알고, 브라흐만이 된 자는 더 이상 욕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족과 지고의 축복 상태에 든다.
그러면 어떻게 브라흐만을 알 수 있는가?
브라흐만은 어떤 속성도 갖지 않고 또 모든 존재의 바탕이므로 다른 사물이나 대상을 인식하듯이 지각이나
개념적 사고에 의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브라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 철인 야갸왈캬는 “그것을 안다고
하는 자는 그것을 모르는 자이고, 그것을 모른다고 하는 자는 아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브라흐만은 개념화될 수도 기술될 수도 없는 초월적 실재이지만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발견은 그것이
바로 가장 가까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의 ‘참 나’ 즉 아트만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곧 인간 내면의 아트만이므로 아트만을 아는 자는 브라흐만이 되고 이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가 우파니샤드의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 흔히 ‘타트 트왐 아시’(Tat-tvam-asi, 그대가 곧 그것이다)
혹은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 ‘이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리하여 존재의 힘을 축하하고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제사의 의미가 아란야카에서 내면화되었듯이,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에 대한 모색은 인간 내면의 아트만에 대한 탐구로 내면화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제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하였다. 거짓된 나를 제사지냄으로써(자기포기, 희생)
근원적인 실재인 참 나, 대아(=아트만)로 회귀하고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 우파니샤드적 제사의 의미다.
그러나 브라흐만과 둘이 아닌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아트만은 최고의 가치로서, 다른 모든 가치들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트만 때문에 귀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것들은 언젠가 모두 소멸하지만 아트만은 시간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늙음과 죽음,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자 해야 하며
그것을 아는 자는 전 세계를 얻는다고 말한다.(『찬도갸)8.7~12)
그러나 아트만은 아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주체이므로 다른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으론 알 수 없다.
우파니샤드는 인드라 신이 101년이나 걸려 프라자파티 신으로부터 아트만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는 신화로써
아트만의 인식이 길고도 어려운 수련과 탐구를 요구하는 과정임을 예시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의식의 네 단계설(四位說)이나5장설(五藏說)에서 인간을 여러 가지 층으로 이루어진 심층적
존재로 분석하고 그것들이 모두 아트만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아트만을 깨닫기 이전의 일상인들은 아뜨만이
아닌 신체나 감관, 마음 혹은 소유물 따위를 아트만으로 동일화하여 그에 집착한다.
그것이 바로 윤회와 고의 원인인 착각이고 무지다. 그릇된 자기 동일화에서 벗어나 아트만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와 고에서 해탈하려는 것이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목표였다.
우파니샤드에 바탕하여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킨 것이 ‘베단타’ 철학이며, 그중에서도 샹카라(A.D. 8세기경)의
아드와이타(不二) 베단타는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4 베다 사상과 불교
B.C. 1500년경부터 시작된 베다 문화는 불교가 발생할 무렵인B.C. 500년경엔 이미 천년 가까운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므로 비록 불교가 베다나 바라문, 그리고 제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반문화 운동이기는 하나 베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인과응보 사상이나 윤회의 관념, 그리고 무지와 고(苦), 지(知)와 해탈,
요가와 명상(선정)의 방법 등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형성되었고, 비록 불교적으로 재해석되었을지라도
불교 특유의 관념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 규범 등을 뜻하는 다르마(dharma, 法)도 『리그 베다』에서 만물에 질서와 조화를 주는
통제력인 르타(r.ta, 天則)에서 발전된, 힌두와 불교가 공유하는 관념이다. 또 『리그 베다』의 신(데바)들은
범천(梵天, 브라흐마), 제석천(帝釋天, 인드라) 등으로 불교 신화 속에 흡수되었다.
베다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다. 하나는 라다크리슈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처럼
불교가 우파니샤드적 전통을 이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유사한 사상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적
전통과 불교는 유아적(有我的) 전통과 무아적(無我的) 전통으로 전혀 대립되는 사상이라고 하는 견해다.
앞에서 든 몇 가지 예가 시사하듯이 불교는 베다적 전통으로부터 적지 않은 덕을 입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불교를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우파니샤드의 한 갈래로 볼 수는 없다.
우선 드러나는 차이는 우파니샤드는 궁극적 실재를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이라고 적극적으로 내걸고 출발하는데
반하여 불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스스로 체험해야 할 것(自內證法)은 말을 아끼고 가능하면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고(無記) 경험적이고 현상적인 영역만을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불러
그것을5온, 12처, 18계, 12연기 등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도 비록 ‘아트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라는 유명한 문구가 가리키듯이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를 우파니샤드적 전통의 일부로 보는 것도 극단적 견해이지만, 양자를 유아론(有我論) 대 무아론(無我論)으로
대립관계에서 해석하는 것도 극단적 견해라고 생각한다. 우선 불교에서 ‘무아’(無我, ana tman)라고 할 때 부정되는
‘아’(我, 아트만)의 의미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전제부터 검토해야 한다.
만약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적(無記的) 입장에 모순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무아’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체법인 현상적, 경험적 차원에서의 인간을 이루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 즉5온에 독립적이고
영구불변한 실재성이 없음을 가르침으로써 아집과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도에서의 무아설은 불교만의 특유한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의4위설이나 5장설도 유사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교설이다. 예를 들어5장설은 신체나 생기(生氣), 마음, 의식 등이 아트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덮개(藏)라고 가르침으로써 나 아닌 것과의 그릇된 동일화와 그로 인한 집착을 소멸하고자 의도한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와 불교를 유아론 대 무아론으로 일반화하기 이전에 두 사상체계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조심스러운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의 특징은 우파니샤드의 유아론을 부정한 무아론이라기보다 무아론에
바탕하여 현상계(一切法)를 ‘연기’(緣起)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무아 → 연기 → 공 → 유식(唯識)으로 이어지는 불교적 개념들은 인도와 세계사상계에 대한 불교의 위대한 기여다.
2절 인도 문화의 특성
일반적으로 한 사물의 특성이란 다른 사물과의 비교에 바탕한 그 사물을 다른 사물로부터 구분해 주는 그 사물만이
갖는 성질을 가리킨다. 인도 문화의 경우에도 그 특성이란 우선 다른 나라나 다른 세계의 문화와 비교하여 인도만이
갖는 독특한 성격을 가리킨다.
1 다양성
인도는 우선 지리적 환경이나 언어, 인종 그리고 종교와 사상의 다양성으로 특징지워진다.
인도 문화의 다양성은 먼저 지리적, 자연적 환경의 다양성에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인도 문화권은 인도뿐 아니라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를 포함한다. 북으로는2천5백 킬로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아시아 대륙의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있으며, 남북으로3천 킬로에 뻗친 역삼각형의 인도
반도는 하나의 나라로만 볼 수 없는, 아(亞)대륙으로서 험준한 산들과 광막한 평원, 사막, 고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기후도 아열대의 타오르는 열기와 히말라야 지대의 만년설, 세계 최다 강우량과 사막의 건조함, 힌두스탄 평원의
풍요로움과 데칸 고원의 척박함 등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성격이 공존하고 있는 광할한 지역이다.
인도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두번째 근거는 언어의 다양함이다. 백 가지가 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중 국가에서 공인한 주요 언어만 14개로서 전혀 다른 네 개의 어족(語族)으로 구분된다. 북부의 열 개 주요
언어들은 인구어 족에 속하는 산스크리트 어(梵語)에 바탕한 것이고 남부의 네 개의 주요 언어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둘은 외국어처럼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북부 인도와 남부 인도는 커다란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며, 이것이 인도 사상과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인도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도 대륙이 오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주와 침입, 무역 등을
통해서 많은 민족이 만나고 교류해 온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B.C. 3000년경 이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검은
피부색의 문다 족, 드라비다 족을 비롯하여 인도-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 B.C. 6세기 말 다리우스1세의 서북 인도
정복에 따른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 2세기 후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과 서북 인도 침입 이후 희랍 미술의
영향(간다라 미술), 남인도와 로마제국과의 무역거래, 회교도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도(拜火敎徒), 로마의 박해를 피해 남인도로 도피한 유대인,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이때 인도는 중국의 비단 제조술을 배워 로마에 비단을 수출함), B.C. 2세기 이후 차례로 인도에 침입한
중앙아시아의 파르티안, 스키티안, 쿠샨 족의 영향, 그리고 회교도의 침략과 무갈제국의 지배, 18세기 이후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의 침입과 150년간의 영국통치 등 전 세계의 문화가 인도에서 만났다. 그 결과 인도에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뿐 아니라 시크교, 회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의 추종자들까지 있어 실로
세계의 종교 박물관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인도의 지리적, 언어적, 종족적, 정치적, 종교적 다양성에 또 하나 덧붙이자면 사상의 다양성이다.
인도철학사에서 우리는 세계철학사에 나타났던 거의 모든 사상의 유파를 발견할 수 있다. 일원론(베단타),
다원론(정리, 승론학파), 이원론(수론학파)이 있고, 쾌락주의적 유물론(順世派)과 고원한 정신주의가 공존하며,
숙명론(아지비카)과 회의론(산자야), 도덕부정주의가 고행주의(자이나교)나 인간의 무한한 영적 변형의 가능성을
믿는 불교나 요가 사상과 공존하고 있다.
종교 사상 역시 매우 다양하다. 불교나 자이나교는 무신론적이나 힌두교는 유신론적이고, 같은 힌두교 내에서도
일신교적인 종파가 있는가 하면 다신교적인 종파도 있다. 또 종교의 목표에 이르는 길이나 수행법도 추종자의
천성이나 기질에 따라 다양한 길이 제시되었다. 예배나 신앙은 그런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 밖에 지식의 길,
명상의 길, 봉사의 길 등이 있다.
세계에서 인도보다 더 다양한 문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유화와 관용의 정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도에는 다양한 종족과 언어, 철학체계와 종교들이 있어 왔으나 다른 나라에 비해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인도에선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처럼 사상 때문에 독배를 마셔야 했던 철학자가 없었고,
예수처럼 종교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했던 성인이 없었으며, 종교로 인한 박해나 전쟁도 없었다.
광신적인 교도가 없는 인도에선 자신이 따르는 종교나 사상 외의 다른 종교나 사상을 이단으로 몰거나 배제하지 않았다.
인도의 철인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실재는 단일하며, 또 그것은 언설과 개념적 사고, 분별을 넘어서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견해나 철학적 이론으로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사상과 교리나 견해들은
특정한 관점에서 본 부분적인 진리이며 전적으로 옳은 견해도 전적으로 틀린 견해도 없다.
특정 관점에서 본 나의 인식이나 견해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틀렸다는 독단과 독선은 다툼과 불화와
편견으로 이끌며, 이런 태도야말로 해탈과 자유의 길에 방해가 되는 악이라고 보았다.
『리그 베다』에선 하나의 실재를 현자들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고 말한다.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종교나 교리,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는 틀리다고 고집하며 다투는 사람을 불전이나
자이나 경전에선 일곱 명의 맹인과 코끼리의 우화로 풍자한다. 배를 만져 본 맹인은 코끼리는 벽과 같이 생긴
동물이라고 주장하고, 귀를 만져 본 맹인은 부채와 같은 동물이라는 등등 서로 자기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며 말
다툼하나 사실은 이들 중 어느 누구의 말도 완전히 진실은 아니며, 반대로 어느 누구의 견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는 사상도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상호보완적이며, 궁극적 실재의 한 측면을 가리키는 일면적,
부분적 진리일 수 있다. 외관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은 다양하나 그 근원과 바탕은 하나라는 사고가 인도의
관용과 유화의 정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양의 철학사가 한 철학자의 사상이 다음 철학자에 의해 비판, 부정되면서 직선적으로 발전해 왔다면
인도 사상은 여러 학파들이 동시에 공존해 왔다. 후대의 철학자는 전대의 철학자의 사상을 수용하여
재해석하고 새로운 사상을 첨가해 가면서 눈 덩이가 불어나듯이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로 발전해 왔다.
인도 철학은 어떤 사상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부분적이거나 낮은 단계의 진리로서 수용하면서
더 커다랗고 더 깊은 진리 속에 통합해 나가는 식으로 발전해 간다.
불교의 역사 속에도 인도 문화의 이러한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소승(小乘)의 성문(聲聞)과 연각승(緣覺乘)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살승, 나아가 일불승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된다. 초기불교를 수용하여 그 위에 새로운
사상을 첨가한 것이 대승불교이며 다시 대승을 수용하여 그 바탕 위에 새로운 것을 추가한 것이 밀교다.
각양각색의 불교 종파들은 불교를 분열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사상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했으며,
그러면서도 다양한 불교 속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관된 통일성이 있다. 이른바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이다
3 인도 종교의 특성
인도인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 더욱 종교적이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라는 네 개의 종교가 인도에서 기원하였고 그중 불교는 인도를 넘어서 전 세계의 종교가 되었다.
인도인은 궁극적 실재, 지고의 가치와 힘을 나뉘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 보았고 그것을 아트만(我), 브라흐만(梵),
푸루샤, 혹은 불성, 진여, 법계 등으로 불렀다. 개별적이고 특수하고 부분적인 현상들은 이 궁극적 실재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시적인 드러남(顯現)이다. 그리고 이 궁극자는 바로 인간 내면 깊이 인간의 본바탕과 다름이 아닌 하나다.
인도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참 나, 혹은 불성을 회복함으로써 무상하고 분리되고 단편적인 현상에
속박되지 않는 영원한 자유(해탈, 열반)를 획득하는 것이다.
인도 종교의 공통된 특성은 인간의 일상적 삶을 무명과 업(카르마)에 기인하는 윤회의 속박과 고(苦)로 규정하고,
무명을 제거하고 속박과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요가)을 제시하는 점이다.
우파니샤드는 궁극적 실재를 적극적으로 아트만, 혹은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는 데 반해 초기불교는5온을 아트만이 아니라고 표현했지만 그릇된 자기 동일화와 착각을 제거함으로써 속박과 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은 공통적 이다.
인도에도 초인간적인 신이나 불을 헌신적으로 숭앙함으로써 은혜의 힘으로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있긴 하나,
여타 종교에 비해 인도 종교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요가나 명상, 선정 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궁극적 실재(진리)를 실현한다는 사상이다. 인간에게는 단지 감각하고 사고하는 일상적 인식 능력뿐만 아니라,
요가 수행을 통해 개발되는 특수한 직관력 혹은 무분별지(無分別智), 반야지(般若智)가 있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대립을 넘어선 초월적 의식 상태에서 무차별적이고 나눠지지 않는 통합을 체험하는 신비주의가
인도 종교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나 인도의 종교는 신비주의와 정반대되는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종교이기도 하다. 인도에선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도의 종교는 철학적이고,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다. 기독교의 경우엔 종교는 유대 민족에서 기원되었고
기독교 철학(신학)은 희랍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도의 경우엔 종교와 철학이 하나의 원천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서양의 경우처럼 종교와 철학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없다. 인도의 종교들은 무지 특히 나에 대한 무지가 미혹과
속박의 원인이므로 무지를 제거하기 위해 이 세계와 인간의 실상을 직시하고 그 본질을 통찰할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인도에선 철학을 ‘통찰’(다르샤나), 혹은 ‘실재인식’(타트와 갸나)이라고 부른다.
인도 종교의 또 다른 특징은 내관적이고 심리학적이라는 것이다.
요가 즉, 명상은 내면의 심리과정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마음의 기능과 작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우파니샤드에선 인간의 의식을 ‘깨어 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꿈 없는 깊은 잠’ ‘초월적 의식상태’로 구분하였고,
인간의 자아를 다섯 가지 층으로 심층분석하였다. 샹캬 요가 학파나 불교의 유식학파에선 프로이트가 태어나기
천여 년 이전에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였고, 수행을 통해 무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다. 초기불교의5온,
12처12연기설이나 아비달마의 이론들도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심리학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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