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 불교 사상의 형성과 발생 과정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여 활동했던B.C. 6세기경의 인도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상적으로 커다란 변화와 전환의 시대였다. B.C. 1000년경 갠지스 강 상류지역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와 제식주의적 세계관에 바탕한 바라문 문화가 확립되었지만, B.C. 800년경엔 철제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갠지스 강 주변의 원시림을 개간하면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B.C. 6세기 무렵엔
갠지스 강의 중류, 하류 지역까지 개간되었다. B.C. 1000년 무렵엔 인도 문화의 중심이 갠지스 강 상류,
지금의 델리 부근이었다면, 불교가 발생했던B.C. 6세기경엔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이 인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발달한 철제 농기구와 갠지스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은 풍부한 농산물의 생산을 가능케 했고 잉여 농산물에
바탕하여 상공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농촌 중심 사회에서 새로운 지역으로
개척해 들어가면서 원주민과의 혼혈도 빈번해졌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형성에 따라 바라문 중심의
사성계급 제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바라문의 절대적 권위, 제식만능주의, 베다의 절대적 신성성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정치적으로는 종전의 촌락을 바탕으로 한 부족장 중심제에서 점차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 혹은
공화제로 바뀌어 갔다. 라자(Raja)라고 불리는 군주들끼리의 영토와 권력 확대를 위한 싸움이 빈번해졌고
그 결과 군소의 부족들이 강대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초기불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는
16대국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중부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16대국 가운데서도 국력이
강했던 나라는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반티의 네 군주국이었고, 주변의 군소 국가들은 점차로 이들에게 합병되어 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카필라 왕국도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 코살라 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 대국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당시 특히 번성했던 대도시로서 참파, 라자가하(왕사성),
사바티(사위성), 코삼비, 사케타, 바라나시의6대 도시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종래의 바라문을 정점으로 한 사회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제식만능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농촌 중심 사회에선 브라흐마나(바라문, 사제), 크샤트리야(찰제리, 정치가, 군인),
바이샤(서민, 생산자), 수드라(노비)의 순서로 위계질서가 이루어졌으나, 새로운 시대에선 막대한 권력을 쥔 왕과
커다란 재산을 소유한 부호(長者)가 사회의 실권을 가진 가장 높은 신분으로 부상했다.
그만큼 새시대에선 바라문과 베다, 그리고 제사의 절대적 권위와 권능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전에선 종래의 바라문,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가 크샤트리야, 바라문,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로 바뀌어 기술되어 있다.
이미 우파니샤드기(期)에 오면 철학적, 종교적 탐구가 바라문의 전유물이 아니고 크샤트리야나 여성들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B.C. 6세기경엔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 이미 계급적 제한을 받지 않고 어느
계층에서나 철학자나 구도자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리와 지혜는 계급을 초월한 가치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바라문이 아닌 크샤트리야 출신의 ‘고타마 사문’이
붓다(Buddha, 覺者)로서 인정받고 거대한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이자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타(혹은 마하비라)도 크샤트리야 출신이었다.
제사 행위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인 브라흐만을 통제하고 획득하는 방법이며, 따라서 제사행위를 독점한
바라문만이 그 힘의 비밀을 쥐고 있다는 신념에 대한 회의는B.C. 8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우파니샤드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갔으며,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그 절대적 힘과 지고의 가치인 브라흐만(梵)이 외적인 제사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실재하는 참 나(眞我), 즉 아트만에 대한 인식(智), 즉 자각에
의해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베다 문화 자체에서도 낡은 가치와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던B.C. 6세기경의 중부
인도는 베다 문화의 흐름에 대립되는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이기도 했다.
전통과 정통적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反)문화(counter-culture) 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을 사문(沙門, raman.a)이라고
부른다.
불전에서도 바라문과 사문을 나란히 열거하고 있는데 당시 사문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바라문에 대해
새로운 시대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진보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일상적,
세속적인 의무와 책임을 벗어버리고 재가자들의 시여(施輿, 탁발)에 의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논쟁하면서 돌아다니는 출가유행자(파리브라자카)들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일화 가운데 마지막 성문 밖에서 목격한 광경이 바로 생사의 고(苦)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유행하는 사문이었고,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도 그 후 세속을 등지고 사문이 되어6년간의
탐구 끝에 붓다가 되었다.
당시의 인도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었으므로 수많은 사문들에 의해 각양각색의
사상들이 주장되었다. 불전(梵網經)에서는 그것을 62견(見)으로 자이나 문헌에선 363견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내용엔 윤회와 업을 인정하는 견해, 윤회와 업을 부정하는 견해, 해탈과 열반의 상태에 대한 문제,
회의론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62견, 363견의 경우는 그 견해를 주장한 사람의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사문과경(沙門果經)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외의 다른 여섯 사문들의 사상을 기술해 주고 있다. 이들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르며, 모두 특색 있는 주장을 표명한 자유사상가들이다. 이들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각자의 교단을
이끌었고, 추종자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에 이들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해 간략히 기술한다.
① 도덕부정론 :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 카사파는 인과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그는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을 행해도 악을 짓는 것이 아니고 악의 과보도 발생하지 않으며,
반대로 보시를 하고 제사드리고 감관(感關)을 제어하고 진실을 말해도 선행이 아니고, 또 선의 과보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부정론은 그 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주장했으며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② 숙명론 : 아지비카(A jv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 고살라는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의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도, 또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도 원인이 없는 것이며, 다만 자연의 결정과 상황과 천성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한다.
고살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 영혼, 득(得), 실(失), 고, 낙(樂), 생, 사의 열두 가지 요소를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여겼다. 비록 영혼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도 원자(原子)와 같은 것이라고 본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그가 속한 교단의 명칭인 ‘아지비카’는 원래 생활법을 의미하지만 교단의 명칭으로서는 ‘생활법에 관한 규정을
엄밀히 준수하는 자’라는 뜻이고, 다른 교파에서는 ‘생계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역 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번역했다.
이 교파는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후대의 아쇼카 비문에서도 불교나
자이나교도와 나란히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였고,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교세를 유지했으나 그 뒤엔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③ 유물론 :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모든 것이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와 그리고 이들 원소가 활동하는 장소로서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 따위는 없으며, 인간은 죽으면 신체를 구성하는 네 원소가 각각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오직 현세뿐이고 내세는 없으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다.
존재론적으론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 쾌락주의인 아지타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로야타(Loka yata), 혹은 차르와카(Ca rva ka)파로
불리는 이 파는 한역 불전에선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번역한다.
④ 7요소설 : 파쿠다 카차야나는 지, 수, 화, 풍의 네 요소 외에 고, 낙, 영혼을 더해7요소를 인정했으나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7요소는 만들어진 것도,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일도 없으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다. 그러므로 설사 사람을 칼로 베어도 칼은 다만 7요소
사이를 통과하는 것 뿐이며,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⑤ 회의론 :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 없이 진리 주장을 하는 독단론에 대해 산자야는 ‘내세가 있는가?’
‘선악업의 과보는 존재하는가?’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그런 것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확정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애매한 답변을 하므로 ‘미꾸라지처럼 미끌미끌하여
잡히지 않는 설’이라고 불렸다. 불교의 62견 가운데는 네 가지 견해, 그리고 자이나교의 363견에서는 67종이
불가지론임을 미루어 당시 인식능력에 대해 회의한 사상가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 사리불과 목건련도 처음엔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부처님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경험의 범위를 넘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설(無記說)은 산자야로
대표되는 회의설에 바탕하여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⑥ 자이나교 :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다의 본명은 와르다마나이고, 깨달음을 얻은 후엔
마하비라(큰 영웅) 혹은 지나(승리자)라고 존칭되었다. 그의 생애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유사하여 비슷한
시대에 밧지 국의 베살리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고,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지(完全智)를 성취하여 그 후30년간 교화활동을 펴다가 72세에 입적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활동무대도 같고, 교리용어나 교단구성에서도 공통점이 많으며 경전도 빨리 어와 같은 계통의
속어(프라크리트 어)인 아르다 마가디 어로 씌어졌다.
그러나 사상적으론 다른 점이 많다.
모든 존재를 영혼(지바)과 비영혼(아지바)으로 나누고 비영혼은 다시 다르마(운동의 조건), 아다르마(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영혼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달리 상주변재하는 단일자가 아니라 다수이며 업에 따라
신체에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업(카르마)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됨으로써 그것을 윤회에 속박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미세한 업의 물질이 영혼에 부착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 방법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하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 진실어, 불투도, 불사음, 무소유의 다섯 가지
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 결과로 자이나교 특유의 종교적 관습이 생겨났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마셔서 죽이지 않도록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옷을 입지 않는 수행자도 있다. 이 때문에 불전에선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흰 옷을 입는 백의파와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로 갈라져 있다. 자이나교는 인식론적으로 상대주의 입장을 취한다. 즉 모든 판단이나 견해는 특정한 관점에서의 일면적 진리이므로 반드시 ‘한 점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자야의 회의론에 대한 자이나교적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자이나교는 이미 마하비라 재세시 튼튼한 교단을 형성했고, 그 후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3대 종교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인도에는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으며, 비록 소수이긴 하나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신도들이 농업을 버리고
일찍부터 상업을 주업으로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이상에서 육사외도의 사상을 간략히 조망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흐르는 몇 가지 사상적 경향이 있다.
먼저 이들은 세계와 인간이 다수의 요소나 원리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브라흐만이라는 하나의 원리로부터 이 세계가 전개되었다는 바라문교의 전변설(轉變說)에 대해
다양한 요소가 결합하여 세계를 구성한다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하였다.
구성요소 가운데는 심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도 원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유물론적인 색체가 짙다. 유물론에 바탕하여 인과업보나 내세, 윤회를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적 경향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인식론적으로 희의론과 상대주의도 전통적 가치와 사고방식이 붕괴되어 가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사상이다.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대립되는 태도가 공존하였다. 유물론과 연계되는 쾌락주의는 추종자가
많지는 않지만 도시 중심적인 당시 사회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불교와 육사외도의 사상과 비교해 보면 양자가 베다와 바라문과 제사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여러 점에서 입장의 차이가 발견된다. 우선 적취설에 대해 불교는 실체가 없는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여 생멸한다는 연기설(緣起說)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불교는 인과업보와 내세와 윤회,
그리고 윤회로부터 해탈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이런 점에선 베다에 속하는 우파니샤드와 견해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적인 면에서 불교는 회의론이나 상대주의에 대해 극히 실제적이고 실용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무기설(無記說), 즉 형이상학적 논쟁의 무용성을 주장한다. 또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지양한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바라문에 대립되는 사문운동의 흐름 속에서 탄생했지만, 다른 사문들의 사고나 가치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4절 불교의 특성
불교의 특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불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서울’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서울이 긴 역사를 통해
수많은 건물과 도로가 증대되면서 지금도 변화하고 있듯이, 불교도 시간적으로 2천5백 년의 긴 세월을
통해 공간적으로 남쪽으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로 북으로는 중앙아시아, 티벳,
네팔, 부탄, 중국, 몽고, 만주로 동으로 한국, 일본으로, 그리고 오늘날엔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세계로
확산되면서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발전하고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어 변형되어 왔다.
그러므로 불교란 어떤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과 종교들의 집합이다. 거기엔 남방에서 신봉되는
상좌부 불교가 있고, 북방의 대승불교가 있으며, 대승불교 가운데서도 티벳불교와 중국의 선불교는 독특한
성격 때문에 다른 대승불교와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
이상은 지역에 따른 분류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세 개의 동심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제일 가운데 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가리키고, 그 다음 원은 그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해석과
재해석을 통해서 발달한 불교를 가리키며, 마지막 원은 불교가 들어간 지역의 문화가 동화되어 덧붙여진 부분이다.
가운데 원이 초기불교라면, 중간의 원은 부파, 대승불교이고, 마지막 덧붙여진 것들은 우리 나라의 경우엔
산신이나 칠성신앙 같은 민간신앙이 그 예이고, 티벳은 본교라는 샤마니즘, 중국의 경우는 도교나 유교,
일본의 경우는 신도가 그 예다.
이렇게 다양한 교파들을 모두 ‘불교’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이 모두 붓다께서 깨달음에 의해 무명을
소멸하여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믿고, 가르침(다르마, 法)과 그것을 통해 범부 중생들도 깨들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각양각색의
불교에 통일성을 주는 근거다.
불교(Buddha-dharma, Buddha-s′a sana)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깨우친 자[覺者, Buddha]의 가르침(dharma)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法)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불전 가운데서 역사적 붓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 상좌부의 팔리어
경전이나 한역의 아함(阿含) 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2∼3백 년간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다가
B.C. 1세기경에 문자화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변형이나 첨삭이 없는 원래 그대로의 가르침인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러므로 부파에서 전해진 여러 경전들을
비교, 검토하여 공통되거나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 교설은 원래의 가르침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종래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불교의 우월성이나 차이점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은데,
차이점과 동시에 공통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인도에서 발생한 철학체계나 종교는 힌두교이든지 자이나교이든지
불교이든지 모두 업에 따른 인과응보와 윤회계의 고성(苦性), 그리고 윤회의 원인인 실재에 대한 무지 혹은 무명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와 그 결과로 얻어지는 해탈, 이런 기본적인 개념과 사고의 틀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나 아닌 것[非我]을 나와 그릇되이 동일화시키는 나에 대한 착각이 무지와 그로 인한 고(苦)의 원인이라 보고,
참 나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도 종교의 기본적이고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실재를 보는 방식,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설명과 해석방식, 그리고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음도 사실이다.
더욱이 사막의 종교인 셈 족의 유일신적, 권위주의적, 도그마적 종교들(유대교, 회교, 기독교)에 비하면 대조되는
점이 적지 않다.
① 불교는 다양성을 수용한다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문화의 특성은 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 역시 앞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단일한 철학과 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과 종교의 집합이다.
남방불교와 북방의 대승불교, 현교와 밀교, 자력교와 타력교, 티벳불교, 선불교, 기타 중관, 유식,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등 수많은 교파와 종파들을 모두 합하여 ‘불교’라고 부른다. 이렇게 다양하지만 모두가 삼법인(三法印)을
믿고, 삼보에 귀의한다는 점에서 불교라는 통일성을 갖는다.
② 도그마(독단)의 초월 : 붓다의 가르침엔 정해진 법이 없으며[無有定法] 불법은 도그마나 독단적 교설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수준과 성향에 따라 설해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며, 환자의 병에 따라 처방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며,
방편시설(方便施說)이다. 유치원생에 대한 가르침과 대학원생에 대한 가르침이 같을 수 없으며 감기 환자에게 주는
약과 배탈 환자에게 주는 약이 같아선 안 된다. 그러므로 불교 교리 가운데는 근시안적으로 보면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가르침도 적지 않다. 궁극적 진리[勝義諦, 眞諦]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직 스스로 체험해야 하는 것
[自內證, 所證法]이고, 말로 표현된 진리[所說法]는 가시설(假施說)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교설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할 일종의 번뇌, 즉 병으로 본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에 비유되기도 한다.
뗏목은 강을 건넌 후엔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듯 이 교설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언어분별의 일종이다.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으며 불교의 여러 종파나 교설은 그러한 방법이다.
③ 불교는 유화와 관용의 종교다 : 다양함의 인정, 그리고 비도그마적인 특성과 관련된 불교의 또 다른 특성은
유화와 관용의 정신이다. 이것은 이미 인도 문화 일반의 특성으로서 앞에서 논의하였지만 불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는 긴 역사를 흘러오면서 광대한 지역으로 확산되어 왔지만, 어느 곳에서도 종교분쟁이나 종교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위로부터의 권위나 바깥으로부터의 강요를 원치 않는 불교는 자율성과 자발성을 중시해 왔으므로
타종교의 신자를 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교세의 확장을 위해 타종교와 갈등하고 마찰하지 않는다.
타종교나 심지어는 토속적인 민간신앙까지도 배제하지 않고 포섭하고 동화시켜 불교의 가슴 안에 껴안아 왔다.
그러므로 티벳에선 본이라는 무속신앙을 포용했고 중국에선 도교나 유교를 포용했으며, 한국에선 산신이나
칠성신앙을 포용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흑과 백으로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이므로
다른 종교도 낮은 단계의 부분적 진리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다. 성문, 독각, 보살의3승이 마침내는 모두
일불승에 돌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는 타종교나 사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④ 불교는 인본주의다 : 서양의 사상사에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의
선언과 더불어 신(神) 중심적 사고에서 인간과 자아의 문제로 전환한 이래 인간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어 왔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룸비니에서 태어난 직후 사방을7보씩 걸으면서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는 선언으로써 처음부터 인본주의(휴머니즘)로 출발했다.
불교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다. 불교는 붓다, 즉 깨친 분의 가르침이면서[佛陀之敎] 동시에
모든 인간이 그 내면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함으로써 가장 진화되고 완성된 인간인
붓다가 되기를 목표로 하는 종교[成佛之敎]다. 불교는 궁극적 가치와 종교적 진리(실재)가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바로 인간의 삶과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치 금을 함장하고 있는 광석처럼 여래장(如來藏), 즉 여래를 품고 있는 모태다.
또, ≪열반경≫에선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가르친다.
미혹에 사로잡힌 범부들이 ‘나’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은 실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5온으로서,
5온은 가아(假我)이고 비아(非我) 혹은 무아(無我)다. 그러나 참 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장 가까운 곳,
우리 존재의 심연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이 곧 여래이고 진여이고 열반이고 불성이다.
초기불교가 생멸하는5온이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고 고(苦)인데 대해 열반은 불생불멸
즉, 적정(寂靜, s~a~nti)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한 데 반하여, 대승불교에선 열반은 상(常)이고 낙(樂)이고
아(我)이고 정(淨)이라고 긍정적,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열반=여래=진여=불성이 곧 참 나[眞我, 아트만]이고
대아(大我, 마하-트만)이다.
⑤ 불교는 비권위주의적인 자각의 종교다 :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것이다.
믿음이나 신앙은 초기 단계에서 요구되는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어떤 교설이든 권위 때문에 받아들이고 맹종해선 안 되며, 자신이 스스로 검토하고
실험하고 검증하여 바르다고 확인되었을 때 비로소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믿고 따르라’가 아니라 너 스스로
‘와서 보라’(ehi passa)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불법의 특성이다. 이 점은 경직된 도그마를 거부하는 불교의
특징과 연관된 것이기도 한다.
⑥ 불교는 심리학적이고 분석적인 종교다 : 인본주의적이고 자각의 종교라는 불교의 특성과 연관된 불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교가 세계의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인간의 의식세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분석의 종교라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본질이 마음에 있고, 궁극적 진리도 마음 속에서 발견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마음 혹은 의식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인 복합체이고 또 다양한 차원의 깊이가
있으며, 불교는 그러한 의식의 구성과 변형의 메커니즘에 대해 치밀하고 심도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초기불교의5온, 12처, 18계설[三科], 12연기설, 그리고 부파의 아비달마 교학(중국에선 구사종), 대승의
유식설(중국에선 법상종)은 모두 미혹과 번뇌의 마음에 대한 정밀한 검토를 통해 초월적 의식 혹은 깨달음의
마음으로 변형시키기[轉迷開悟] 위한 실천적 심리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서양에서 현대에 와서야 인정된 개인의식(프로이트), 집단무의식(칼 융)의 존재가
불교에선 이미 천여 년 이전인A.D. 4~5세기경에 알라야식(藏識)이라는 개념으로 유식학파의 중심이론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양에선C. J. 융이나 에이브러햄 마슬로우의 제3세력의 심리학, 더 나아가
초개인(트랜스 퍼스널) 심리학에서 동양의 명상이나 신비체험에서 드러나는 초월적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동양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과학적 심리학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요가나 선불교, 유식불교에 대한 심리학적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⑦ 불교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엔 사문이라고 불리는 많은 자유사상가 내지는
구도자들이 활동했으며, 우파니샤드의 흐름에 속하는 사상가들과 더불어 갖가지 이론과 견해들이 난무하면서
서로 시비를 따지고 논쟁하기를 즐겼다. 그러는 와중에 62견, 363견, 혹은 육사외도라 불리는 이론들이 나타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의 견해나 주장만이 옳다는 고집을 견착(見着)으로서 아집(我執)과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특히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지적 만족을 위한 이론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불교의 목적은 생사윤회의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열반의 언덕으로 건네주는 것이며, 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을 위한 이론, 이기기 위한 논쟁을 거부했다.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세계는 시간적으로 영원한가, 끝이 있는가? 신체와 정신은 하나인가,
다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소멸하는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침묵[無記]을 지켰다. 침묵의 이유는 회의주의나 불가지론(不可知論)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이 아예 문제로서 가치가 없고
무의미한 공리공론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고 또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모습을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 비유했다.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이 당장 독을 제거하고 치료를 받는 대신, 이 화살을 만든 재료가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고, 또 그것을
쏜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고 신분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을 떠난 요원한 이상이나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현상을
편견이나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에 다름이 아니다.
범부들은 사물을 자기의 욕망이나 과거의 업력에 의해 왜곡된 의식으로 보기 때문에 실재가 아니라
자기의 주관이 투사한 영상을 볼 뿐이다. 불교는 바른 지견(知見)을 열기 위한 방법으로서 계ㆍ정ㆍ혜의
삼학(三學)을 제시한다.
⑧ 불교는 근본적으로 수행의 종교다 : 불교는 타종교처럼 절대자를 숭배하고 찬양하고 기도드리는 종교라기보다 -
대승불교에서 이런 요소가 도입되긴 했지만 -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물과 자기의 마음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요가수행(瑜伽行), 혹은 선정수행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수행의 종교다.
그러므로 출가한 스님은 다른 종교의 사제나 성직자처럼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면서 남들도 이끌어 주는 수행공동체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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