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十勝地)란?
십승지의 개 념을 낳은 '비결' 에 대해 살펴보자. 비결 (秘訣) 이란 원래 어떤 문제에 대한 개인의 비밀스런 해법이나 방책을 뜻한다. 널리 알려진다면 이미 그것은 비결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일찍부터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 사회.정치적 용어로 정착됐다. 오늘날 '비결' 이란 말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정감록 (鄭鑑錄)' 은 한가지 비결만을 담은 책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내용들을 담고 있는 비결의 결집록이다. |
대표적으로 '감결' 을 비롯해 '역대 왕도 본궁수' '삼한산림비기' '무학비결' '도선비결' '남격암 산수십승보길지지'
'토정가장결' '정북창비결' '피장처' 등 필사본에 따라 20~30여개의 비결을 담고 있다.
이들 책의 주된 내용은 정감이란 인물과 이심.이연이란 인물의 대화록을 담은 '감결' 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조 이씨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정씨 왕조가 건국된다는 것과 외적의 침입 등 환란이 발생하는 때와
그때에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장소 (이른바 십승지) 를 열거하고 있다.
'정감록' 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대개 임진왜란 이후로 학계는 보고 있다.
그러나 '감결' 에 나타난 내용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조선초기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아무튼 '감결' 을 중심으로 덧붙여진 비결들은 대부분 조선중기 이후의 유명 지사 (地師) 나 역학자의 이름을 빌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등장한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임란에 이어 병자호란의 외침과 내부적으로 민란 등이 속출하면서
민중들은 각자 자신의 살 곳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와중에 비결에서 말하는 '십승지' 는 더욱 민심에 깊이 각인됐고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심층의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십승지' 란 일반적으로 10개의 피란지를 뜻한다. 그러나 한자 십 (十) 이란 꼭 10개만이 아닌 '많다' 는 의미도 담고 있다.
'감결' 의 경우에도 1개에 2개처씩 예를 들고 있어 이것만 해도 20여개 지명이 등장한다. 또 '남격암 십승보길지지' 에는 28개다.
이 중 중앙일보가 취재한 15개 십승지를 발취해 보았다.
[1] 지리산 운봉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3.19
아직도 우리에겐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땅이 남아 있다. 이른바 '정감록' 에서 말하는 십승지 (十勝地) 이다. '난리를 피할 수 있고 가난과 질병이 미치지 않는 땅' 으로 알려진 십승지는 '새로운 시대' 를 열망하는 민초들의 가슴에 꿈에도 그리는 고향' 으로 전승돼 오고 있다. IMF시대를 맞아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미래의 땅, 십승지의 지리적 특성과 주변의 볼거리 등을 소개한다.
운봉은 동으로 팔랑치, 서쪽에 여원치라는 큰 재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운봉은 등반객에게도 낯선 곳이다. 인월에서 운봉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황산과 덕두산 자락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외부의 간섭이 없고 먹을 식량이 풍족하면 인심은 절로 좋게 마련. 여기에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주변의 산들이 하나같이
[2] 봉화군 춘양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3.26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떠나려니 생각나네/햇밥 고기 생각나네 /
울고 왔던 억지 춘양/떠나려니 생각나네"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전래하는 '억지 춘양' 이라는 속요이다.
예나 지금이나 배부르고 등 따시면 서민은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런 줄 모르고 산간오지라고 하여 오기를 두려워 한다면 그건 순전히 주는 복을 차버리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조선조가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 아래 이곳 각화사에 사고 (史庫) 를 지은 것만 보아도 춘양이 지닌
지리적 여건을 짐작할 수 있다. 춘양은 태백산이 소백산으로 건너가는 과협처 (기를 모으는 곳)에 도래기재를
만들면서 남향받이로 생긴 마을이다. 지금은 영동선 기차가 면소재지를 지나고 한 여름 피서객이 몰려드는
불영계곡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를 끼고 있어 벽지라는 인상은 많이 가셨다.
그런데도 여전히 춘양은 새색시처럼 얼굴을 숨기고 있다. 특히 마을 어구이자 면을 관통하는 운곡천의 수구 (물 빠져나가는 곳)에
삼척봉이란 둥근 산이 마을을 가리고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돼 있다.
'정감록' 은 물론 여타 비결서도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춘양을 반드시 꼽고 있다. 춘양을 두고 '소라고기 (召羅古基)' 라 했고
이는 옛 부족국가시절에 이미 이곳에 소라국이라는 독립된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춘양면 일대가 외부의 도움없이 자생할 수 있는 지역임을 말해준다. 또 전란을 피하기 좋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서울의 사대부들과 서애 유성룡의 형 유운룡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춘양면은 3개 지구로 나눌 수 있다.
도래기재 밑의 서벽리 일대와 중간 마을격인 도심리 그리고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의양리가 그것이다.
이들 3개 지역은 모두 외부와 차단된 듯한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각 지역마다 쌀과 밭작물이 주업이었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사과나무를 심어 '경북 능금' 의 주산지로 바뀌었다. 최재국 (50.부면장) 씨는 "IMF사태로 사과의 소비가 줄어
주민의 소득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없지 않다" 며 "다시 밭작물과 쌀농사로 전환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고 했다.
춘양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소나무로 불리는 춘양목 (春陽木) 의 집산지로, 또 우구치리의 금정광산에서 캐내는 금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흘러간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흔히 봄 춘 (春) 자를 파자 (破字) 하면 삼인일 (三人日) 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보면 춘양은 적어도 세번은 좋은 시절을 맞게 돼 있다.
단순히 피난처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또 한번의 영화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3] 공주시 유구·마곡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2
충남공주시유구읍과 사곡면 경계에 상원계곡이 있다. 공주 일대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다.
이곳에서 50년을 살아온 閔씨 할머니 (67.푸른상회 주인) 의 말. "6.25가 나기 전 강원도 삼척군 가곡면에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다.정감록에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가솔을 이끌고 오셨다.
그런데 정작 이곳에 와서 6.25를 겪었다. 공비들 등쌀에 죽을 고생을 했다."
당시 외지인으로 이곳에 정착한 비결파들은 집집마다 직조기를 들여놓고 명주와 비단을 생산, 생계를 유지했다.
유구.마곡은 공주에서 천안으로 올라가는 대로변에서 비껴나 있다.
[4] 예천 용문면 금당실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9
'정감록' 자체에서 내린 십승지의 정의는 "세상에서 피신하기 가장 좋은 땅" 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신' 이란 말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내우외환 (內憂外患) , 즉 외적의 침입은 물론 국내의 쿠데타 등 정변으로부터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십승지라고 하여 모두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단서조항이 붙기도 한다. 예컨대 예천 (醴泉) 금당실 (金塘室) 의 경우,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고 했다.
여기에다 공항이 생기고 충북 단양을 잇는 저수령이 개통되면서 군청 소재지인 예천은 교통의 요지로 바뀌었다.
먼저 금당실을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예천읍에서 두어 고개 넘자마자 눈앞에 전개되는 광활한 대지에 깜작 놀라게 마련이다.
용문면 인구는 2천여명. 이 중 반 가까운 인구 (5백戶)가 금당실에 모여산다.
"임진왜란때 이여송장군이 이곳 지세를 보고 인물이 난다고 하여 오미봉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합니다.
[5] 충북 영춘면 의풍리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16
앞의 '단춘' 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개 충북 단양 (丹陽) 읍과 영춘 (永春) 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영춘면 의풍리는 충북 단양군 소속이다. 단양이란 말은 선가 (仙家)에서 말하는 연단조양 (煉丹調陽)에서 비롯됐다.
단양군에서 영춘면은 '육지 속의 섬' 과 같은 곳이었다. 삼면이 남한강에 둘러싸였고 남동쪽은 소백산이
영춘면 소재지에서 남한강의 북벽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동대리가 나온다.
금년에 일흔이라고 나이를 밝힌 박문찬씨는 깜짝 놀랄 만큼 젊어 보였다.
[6] 경북 상주 우복동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23
<"허어, 요즘 우복동 찾는 사람 없는데 보통 사람 아니구먼. 예전엔 우리 집이 우복동 찾는 사람으로 가득했지."
경북 상주 (尙州) 시 화북 (化北) 면 상오리, 속칭 '높은다리' 라는 동네에 사는 김중만 (65) 씨의 말이다.
그는 이어 뒷산을 가리키며 "저게 장각 (長角) 이고 동네 이름도 장각동이니 쇠뿔인 셈이지.
그러니 우리 동네가 당연히 소의 배에 해당하고 화북시장 터는 소의 엉덩이" 라고 했다.
그의 설명에 옆에 있던 김태진 (65) 씨는 "화북면 7개 동리가 저마다 우복동이라고 한다" 며 말을 거들었다.
우복동 (牛腹洞) 이란 예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해오는 피란지의 이름으로 상주에 있다고 했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는 곳이다.그 우복동이 상주에서도 속리산에 둘러싸여 있는
화북면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화북면은 대부분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서울에서 이곳으로 가자면 괴산에서 선유동 계곡을 지나 늘티를 넘거나,
아니면 충북 청천면에서 용화동을 거쳐 밤재를 넘는 방법이 있다. 남쪽 상주시에서 들어가는 길은 갈령재를 넘어야 한다.
동편 문경쪽에서는 가은을 지나 농암의 쌍룡계곡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전부 도로가 포장돼 있어
접근이 매우 쉽지만 예전엔 깊고 깊은 산골이 분명하다. 화북면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용화 (龍華) 지구. 지도상에 문장대온천이라고 표시된 곳이다.
[7] 영주시 풍기 금계동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30
소백산 천문대 남쪽, 경북 영주 (榮州) 시풍기 (豊基) 읍 삼가리 한 언덕에서 사과나무를 손질하는 金유홍 (47) 씨 - .
그는 서슴없이 집안 내력을 털어놨다.
"원래 선대는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셨다. 1백30년전에 비결을 보고 이곳으로 오셨다. 현재 4대째 이곳에 산다.
아버님께서 이사 나가면 굶어 죽는다고 하셨다.
풍기 사람들은 풍기를 두고 '작은 서울' 이라고 한다. 이곳 토박이보다 전국 각처에서 비결의 가르침을 좇아 모여든
과연 비결서는 풍기를 두고 뭐라 했는가.정감록의 감결은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 이 십승지의 첫번째라고 꼽았다.
첫째는 돌이 없어야 한다. 둘째는 바람이 없어야 한다. 셋째는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세가지 조건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현재 금계동으로 불리는 임실 (任實) 지역이라고 한다.
비로사는 임실이나 욱금동보다 산속에 위치한다. 그런데도 전란의 참화를 겪었다.
[8] 무주군 무풍면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5.7
북한의 삼수.갑산과 남한의 무주 (茂朱) 구천동은 오지 (奧地) 의 대명사다.
세상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 라고 할 정도로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무주다. 97년 동계유니버사드 대회가 열려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보다 앞서 지난 75년 덕유산 일대가 국립공원이 되면서 무주 또한 이름난 휴양지로 바뀌었다.
정감록 등 비결서는 무주군에서 가장 오지로 통하는 구천동을 제쳐두고 무풍면 (茂豊面) 을 십승지로 꼽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구천동의 빠른 변화를 예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풍면으로 가려면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에서 만나는 나제통문 (羅濟通門) 을 통과해야 한다.
나제통문은 이름 그대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대에 설치된 관문을 뜻한다. 무주읍에서 경북 성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가 개설될 때, 이 작은 터널도 뚫렸다. 자칫 그 이름으로 인해 고대에 개설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지만, 통문의 역사는 70여 년밖에 안된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10리 계곡을 만나고 그 끝에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다.
대덕산 (大德山) 을 가운데 두고 남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과 동쪽에서 오는 무풍천이 만나는 사이가 들판이다.
"쌀독에서 인심난다" 고 너른 들판은 한눈에 이곳의 인심을 대변해 준다. "살기 좋으니 인심이 온후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에다 예부터 학문을 숭상해 예절 또한 군내에서는 으뜸이지요. " 유한철 (58) 부면장의 자랑이다.
현리 새터에서 무봉산을 바라보면 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한 마리 큰 새가 날개를 펴고 훨훨 나는 형세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황인성 전총리와 김광수 자민련부총재가 태어났다.
무주는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과 함께 남한 오지(奧地)의 대명사다.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기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무주의 무풍은 그야말로 심심산골.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 덕유산과 삼도봉 사이에서 활 모양으로 휘어 돌며 싸안은 면(面) 단위의 산골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당당히 사또(현감)가 다스렸던 하나의 행정 지역이었다.
"무산(茂山). 무(茂)의 훈은 '성 '. 산(山)의 훈은 '뫼'. 무산(茂山)을 '무풍(茂豊)'으로 개명한 것은 '풍(豊)'이 '풍(酉豊)'의 약자로
그 훈이 '술'이므로 '풍(豊)'으로써 '수리(봉우리)'에 훈차한 것이다. 따라서 '무산'이나 '무풍'은 '성한뫼'가 그 원이름이다."
즉,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지 말고, '산(봉우리)'이란 뜻의 '수리'로 보라는 뜻이다. '성한뫼'에서 '성한'은 '성하다(많다)'의 뜻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높고 많은'의 의미일 것인데, 지금의 무풍 지역으로 보면 그 지형상 딱 어울리는 땅이름이 아닐 수 없다.
[10] 邊山호암(壺岩:병바위)
[11] 보령시 남포
보령시에서 서천으로 이어지는 21번 국도변에 있는 남포면은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된다.
이곳 토박이 박창선 (72) 씨는 "예부터 십승지라는 말은 들었지만, 외지인이 일부러 찾아온 경우는 없었다" 고
그래서 우선 바위부터 찾는다. 우금산성에 우금바위가 있다. 우금바위 동남편이 개암사 계곡이다.
고광충 (57) 씨는 "부안 고을에서 첫 손꼽는 마을이 노적" 이라고 한다. 진사 급제자가 가장 많았고 유명 부자는
이곳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성계골과 실학의 문을 연 반계 유형원이 경국 (經國) 의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단서조항, 변산과 탐라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제주도가 '남의 땅이 된다' 는 것은
그렇다. 십승지 남포는 오늘날 면소재지 쪽보다는 성주면 일대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성주사가 자리한 이곳은 비록 임진왜란이란
병화를 입었지만, 지금은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보령시의 관광.휴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름에 집착하면 본령을 보기 어렵다는
옛말을 남포는 일깨워 준 셈이다.
산골과 갯마을이 함께 있는 비인의 첫 인상은 이렇게 다가왔다.
비인을 십승지로 꼽은 비결은 '남격암 산수십승보길지지' 다. 이 책은 "평평 울울이 가장 길하고 내포의
비인.남포가 다소 낫다" 고 했다.여기서 '평평 울울' 은 동해안의 평해와 울진으로 대개 비정한다.
이에 비교되는 서해안의 십승지가 비인과 남포라는 뜻이다. 그런데 비인이 십승지의 하나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비갠 다음날 비인향교 옆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전홍석 (73) 옹은 "타향살이를 오래 하다 3년 전에 고향에 돌아왔다" 고 한다.
"비인이 십승지라는 걸 아는 사람은 100세 넘은 노인뿐일 걸. " 저승에나 가서 물어보라는 뜻이다.
어린 시절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믿지 않는다" 고 했다. 향교 뒷산 월명산 주위를 공군비행기들이 쉴새없이 나른다.
노인은 더 이상 목청을 높여 대꾸하기가 힘들다는 듯이 밭이랑에 눈길을 떨어뜨렸다.
비인의 원 이름은 비중 (比衆) 이다.
신라 경덕왕이 비인으로 고친 이후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1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름이다. 굳이 지명의 의미를 캔다면 '어진 것을 감싼다' 는 뜻이다.
조선조에 들어 서울의 사대부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다. 고려중엽 이후 서해안은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고
조선조 세종 때 (1418) 는 비인 앞바다 마량진에 왜선 50척이 나타나 우리 병선을 불사르고 비인성까지 공격했다.
이 싸움 이후 평지에 있던 비인성은 현재의 위치인 산 위로 올라왔다. 그 뒤에도 비인은 전란이 비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 사대부들이 즐겨 낙향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택리지의 지적은 이렇다.
여러 읍과 이웃해 있고 뱃길이 편리하여 서울과 가깝기 때문" 이라는 것. 그런 점을 중시한다면 비인은
과거보다 미래를 위해 남겨진 땅이다. 한때 이곳에 공단을 유치하려던 정부의 발상도 지역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비의 상징 인 (仁) 을 숭상하는 비인 사람들의 '양반기질' 이 이웃 한산면 (韓山面)에 뒤질 리 있겠는가.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6.10
[14]단양군 단성면·적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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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은 충북 단양 (丹陽) 을 두고 '산과 물이 기이하고 아름답다' 고 한마디로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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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물, 계곡의 아름다움을 단양처럼 한곳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곳도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그래서 예부터 문인들이 즐겨 유람을 왔고 선비들의 휴식처가 됐다.
- 오늘날 역시 이곳은 월악산.소백산국립공원과 충주호로 연계되는 관광의 중심지다.
- '정감록' 역시 단양을 십승지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단양 가차촌 (駕次村)' 을 피장처로 꼽았다.
- 문제는 가차촌이 어디인가다. 다른 십승지와는 달리 같은 이름이나 비슷한 지명이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 이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대개 적성면 성곡리에 있는 가은산성 (可隱山城) 으로 추정한다.
- 그러나 이번 취재를 하기 위해 기자가 자료를 조사하던 중 '여지도서' 와 '호서읍지' 에서 '가차읍리' 의 기록을 찾게 됐다.
- 두 문헌은 단양 (현재의 단성면 소재지) 관문으로부터 20리 서쪽에 '가차읍리 (加次邑里 또는 佳次邑里)' 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또 같은 지역에 장회천 제방이 있다고 했다. 이로 미뤄 오늘날 단성면 장회리 일대가 바로 가차촌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봉과 옥순봉 그리고 가은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피란처라기보다는 명승지다.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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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을 즐기고 환란시에는 가은산성으로 피란하지 않았나 싶다. 이를 입증하듯 '여지승람' 에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때 단양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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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청풍과 제천 사람들까지 이 성에 피란했다고 전한다.
- 이르는 경기도 가평군 (加平郡) 설악면 (雪岳面) 이 그곳이다. 강원도 설악산과 같은 이름의 설악면은
-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처음 붙였다.
본래 이곳은 고려말 미원현 (迷原縣) 으로 양평군에 속했었지만, 1942년 가평군으로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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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미원현의 역사적 흔적은 이곳 미원초등학교 이름에 남아 있다. '정감록' 은 설악면에서도 소설촌 (小雪村) 을 승지로 꼽는다.
양평 북쪽 40리에 있는 소설촌은 미원으로부터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은 '가장 깊은 심심계곡' 이라 했다. -
소설촌은 설곡리 (雪谷里) 라는 행정구역 안에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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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면 일대가 휴양지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설곡리는 여전히 숨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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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으로 가려면 면소재지를 지나는 37번 국도를 타고 유명산쪽 (양평 방향) 으로 가다가 엄소리라는 동네를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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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리는 말하자면 설곡리의 초소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다시 양의 창자와 같은 굽이굽이를 지나야 설곡리를 만나게 된다.
북으로 북한강이 가로 막고 동.서.남에는 용문산의 큰 줄기가 에워싸고 있어 이곳은 그야말로 천혜의 피난처라고 할 수 있다. -
황해도 신계에서 조부때 이곳으로 왔다는 김종섭 (60) 씨는 "이곳은 퇴로 (退路)가 없어 군부대가 주둔할 수 없는 곳" 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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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용문산 전투가 매우 심했지만 이 마을에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고 덧붙였다.
설곡리는 여느 피란지와 달리 골의 폭이 매우 좁다. 또 소설이란 말이 상징하듯 겨울이면 설악산에 비견할 만큼 많은 눈이 내린다. -
용문산 뒷쪽인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집단적 거주지는 결코 아니다. 고려말 보우국사가 소설암을 짓고 몸소 경작을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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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소로 적합한 곳이다. 오늘날 눈으로 보면, 소설보다는 이웃 묵안리 (墨安里)가 더 승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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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조세희씨의 고향인 묵안리는 동리 입구에 검은 바위가 빗장을 지르듯 가로막고 있다. 바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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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동천삼청일월 (墨巖洞天三淸日月)' 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바로 속리산 우복동이 자랑하는 '동천' 이 바위 뒤에 숨어 있다.
나라 안에서 제일 좋다는 국수 (國水)가 또한 이곳에 있다. -
묵안리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방일리 (訪逸里).가일리 (可逸里) 다. 지금은 유명산 휴양림으로 더 소문난 이곳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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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오늘의 변화를 예고해 왔다. 두 동리 모두 '크게 숨는 곳' 이란 대일 (大逸)에서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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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에 숨어있는 선조들의 예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곳이 설악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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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경기 가평 설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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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비인면 (庇仁面) 을 보러 가는 날, 하늘은 짓궂게도 비를 내렸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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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생각을 몰고/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라는 서천 출신 나태주 시인의 마음이 떠오른다.
그는 이어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쓰고/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 -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안개. …" ( '대숲 아래서' 의 일부) 라며 축축한 날 만나고픈 님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안개비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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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촌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데 반해 여전히 옛날의 지세와 이름을 유지하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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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리에서 멀지 않은 적성면 품달촌 (品達村 : 상리와 현곡리 일대) 이 그곳이다. 해동 성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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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탁 (禹倬 ; 1262~1342) 선생의 탄생지이기도 한 품달촌은 금수산 (錦繡山) 이 진산이다. 금수산 정상은 마치 한자 품 (品) 자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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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관작의 품계 (品階) 를 뜻하며 품달이란 말의 어원이 됐다. 우탁선생 이후 조선조 영조때 영의정을 역임한 유척기 역시 이곳 사람이다.
- 아직도 한 명의 큰 인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 '요즘도 친정 와서 아기 낳는가' 라는 질문에 박옥자 (63) 씨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 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들이 "아, 첫날밤이 어디 따로 있유. 만나면 즉석에서 끝내지.
- " 스스럼 없는 농담이 삶의 여유처럼 다가왔다. 또 물 한바가지 퍼주면서 150살까지 살라고 축원한다.
- 자신들은 "미수 (米壽 : 88세)가 보통" 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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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강원도 정선군 북면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6.24서해안에서 낙조를 바라보면 대개 황홀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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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강원도 어느 산마루에서 넘어가는 해를 보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때 누군가 부르는 "세월아 네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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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달 봄철아 오고 가지 말아라/알뜰한 이팔 청춘이 다 늙어를 간다" 는 정선아라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귓볼을 건드리면 애간장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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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산다는 게 뭔가.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강원도 땅은 이렇게 인생의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 굳이 '정감록' 을 들먹이지 않아도 강원도는 영동이나 영서 어디든 십승지가 아닌 곳이 없다. 강원도의 여러 산골 중에서 특히 정선은 '무릉도원' 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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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만들어 놓은 험준한 산들이 고을마다 둘러싸고 있어 웬만한 장정 한 사람이 고개만 지키면 외적의 침입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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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자랑하듯 정선에서 북평면으로 넘어가는 반점고개에는 '만세성도 (萬歲聖都)' 라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정선에서도 정감록이 꼽는 십승지는 상원산 (上元山) 동남쪽 일대다. 행정명으로 정선군 북면 여량리와 유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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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리 (九切里) , 봉정리 (鳳亭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량은 아우라지와 함께 널리 소개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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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리는 구절리 입구 마을로 이곳에선 '흥터' 라고 부른다. 패가가 없는 부유한 동네다. 봉정리는 임계면으로 넘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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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대로 역 (驛) 이 있던 마을이다. 반륜산 (半輪山 : 지지 않는 해) 이 지키고 있어 아직 속세의 때가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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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리는 노추산 (魯鄒山) 이 진산이다. 또 상원산이 안산으로 가마솥처럼 버티고 서서 구절리의 지기가 누설되는 것을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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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예부터 노추산 아래 만인활거지지 (萬人活居之地)가 있다고 했는데 구절리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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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부터 지난 92년까지 8개 석탄광업소에 근무하는 5천여명의 근로자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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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있는 상원산은 그 정상에 오르면 운동장 크기의 몇 배나 되는 평지가 있다. 거기서 나는 산나물은 기근을 막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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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춘 승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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