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十勝地 硏究
청산보명황보 규 태
目 次
1. 십승지(十勝地)의 개념(槪念)
2. 십승지(十勝地)의 시원(始原)과 유래(由來)
3. 십승지(十勝地)의 목적(目的)
4. 십승지(十勝地)의 조건(條件)
5. 십승지(十勝地)의 교훈(敎訓)
6. 십승지(十勝地)로서 거론(擧論)된 대표적인 비결(秘訣)
(1) 정감록(鄭鑑錄)의 감결(鑑訣)
(2)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3) 토정가장결
(4)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5) 두사충비결
7. 현대(現代)에 와서 십승지(十勝地)의 신(新) 개념(槪念)과 조건(條件)의 설정(設定)
8. 결론(結論)
1. 십승지(十勝地)의 개념(槪念)
십승지(十勝地)는 <정감록(鄭鑑錄)>에서 나온 말이다. 십승지(十勝地)의 십자는 처음에는 10의 뜻으로 쓰였으나
나중에는 ‘가장 좋은’. ‘대표적인’, ‘남조선에 있는’ 등의 의미로 쓰였다.
즉 전란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곳을 말하며 <정감록(鄭鑑錄)>에 나와 있는 십승지(十勝地)만해도 모두 60곳이 넘는다.
십승지(十勝地)는 구체적으로 1) 난리가 났을 때 반드시 그 곳으로 피난가야 할 좋은 피난처(避難處)이며 2) 풍수지리의 길지로서 기도나 수도에 좋은 토속신앙의 성지이며 3) 역성혁명가가 미래를 준비하며 은둔해있는 보신처(保身處)이다. 즉 평소에 생활하는 터전과 달리 난세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곳을 말한다.
2. 십승지(十勝地)의 시원(始原)과 유래(由來)
십승지(十勝地)는 <정감록(鄭鑑錄)>의 원전(原典)인 감결(鑑訣)에서 나온 말이다.
<정감록(鄭鑑錄)>은 <감결(鑑訣)>을 비롯해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 (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 (歷代王都本宮數), 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秘記), 무학비결 (無學秘訣), 오백론사비기 (五百論史秘記), 도선비결(道詵秘訣),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토정가장결,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정북창비결(鄭北窓秘訣), 서산대사비결, 두사충비결, 피장처, 화악노정기, 북두류노정기(北頭流路程記), 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 옥룡자기(玉龍子記),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 삼도봉시(三道峰詩), 갑오하곡시(甲午夏穀詩), 등등의 여러 편의 예언서가 함께 수록되어있다. 이러한 예언서는 적게는 십수 편, 많게는 삼십 수편이나 모여서 만든 책이다.
그러나 <정감록(鄭鑑錄)>의 원본(原本)은 감결(鑑訣)로서 나머지 예언들은 감결(鑑訣)을 보완하는 역할로서 덧붙여 쓰인 것으로 이들을 모두 총칭해서 <정감록(鄭鑑錄)>이라 부르게 되었다.
감결(鑑訣)에 십승지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모두 나와 있다. 십승지의 지명과 위치, 들어갈 시기, 들어가는 목적, 들어갈 때 마음가짐, 십승지가 된 이유도 암시해 주고 있다.
감결(鑑訣)은 고려 때 사람으로 이심(李沁). 이연(李淵) 형제가 촉(蜀)나라의 도인에서 온 도인 정감(鄭鑑)을 모시고 팔도강산을 두루 살펴보고, 이심의 자손이 세울 조선왕조 운명과 그 뒤를 이어 일어나는 왕조들의 흥망을 예언한 것으로 3인의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는 2천자도 안되는 짧은 비결이다.
이 책은 여러 비기(記)를 모은 것으로, 형식면에서는 예언설·참요(讖謠)·역수(易數)의 풀이와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 등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사상적으로도 유교의 외도(外道)나 도교(道敎)사상 및 참위설(讖緯說), 음양오행설 등의 다채로운 배경을 가지고 있다.
표현기법상의 특징은 직설적 표현을 피하고 은어(隱語)·우의(寓意)·시구(詩句)·파자(破字)를 많이 써서 해석이 어렵고 애매한 표현이 많다. 반 왕조적이며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난세에는 풍수설에 따라 복정(卜定)된 피난처에서만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으며, 정 도령인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逆謀)도 이런 내용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그 뒤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과 19세기 민중운동· 동학농민운동을 기점으로 속출한 민중항거 대부분이 <정감록>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통사회의 황당한 예언서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조선시대의 사회 사상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정감록(鄭鑑錄) 만큼 끈질기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책도 드물다. 최근에는 격암유록 이라든가 그 밖의 비결서가 나타나도 미래예언에 있어 정감록이 으뜸에 속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일반 서민들이 원하는 태평성세의 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말세에 가면 정 도령이 나타나서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려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내용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3. 십승지(十勝地)의 목적(目的)
1) 머지않아 무능하고 부패한 이씨왕조는 멸망하고 계룡산에 정씨의 새 왕조가 탄생한다. 그 때의 개국공신과 새 시대 역군들은 모두 태백과 소백(즉 십승지) 출신이다. 이 사실을 알고서 자손을 양백(십승지)에 살게 해야 한다.
2) 십승지는 모두 민속 신앙의 성지이다. 뿐만 아니라 풍수적으로도 뛰어난 명당자리다. 자손들이 모두 잘될 땅이다.
3) 십승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으나 토양이 비옥하고 수리가 좋아서 한 마을을 이루어 살만한 곳이다. 산채 약초도 있어 안심하고 살만한 곳이다.
4) 그곳에 가면 명화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겁먹지 말고 서로 통혼(通婚)해서 한 식구 한 형제가 되어 함께 평화롭게 살수 있는 사람들이다.
5) 이씨왕조가 망할 때 여러 지방에서 난리가 나고 흉년도 든다. 9년이나 흉년이 들어도 삼풍(三豊)지방에 가면 곡식씨앗을 구할 수 있고 12년 전쟁이 계속되어도 양백(兩百:태백과 소백)에 가면 인재를 구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정도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십승지(十勝地)는 정도령이 출현할 때까지 숨어서 힘을 기르면서 기다리는 혁명의 거점인 셈이다.
4. 십승지(十勝地)의 조건(條件)
1) 십승지(十勝地)는 병화도 들어가지 않고 흉년도 들어가지 않는다. 즉 삼재(三災)와 팔난(八難)이 없어야 한다.
* 삼재(三災) - 여기서는 기근, 역병, 전란을 말함
* 팔난(八難) - 여덟 가지의 어려운 경우. 곧 배고픔(먹고)·목마름(마시고)·추위·더위·물·불·칼·병란
① 정신적으로 그 땅은 토속신앙의 성지이면서 풍수지리 적으로 길지라야 한다. ② 경제적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토와 약초가 있어야한다.
③ 전략적으로 도(道)나 군(郡)의 경계에 위치해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다른 행정구역에 있는 십승지와 쉽게 연결되어야 한다.
④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기다리는 역성혁명세력의 근거지로 십승지 주변 주민의 지지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⑤ 병란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대로변을 피하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가까운 곳에 국도나 하루거리 간격의 적당한 고갯마루가 있어서 생활에 필요한 소금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한다.
2) 한국의 대표적인 감결서에 나타난 십승지를 종합하여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거론되는 17곳의 빈도수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풍기(11), 가야(10), 공주(10), 안동(9), 예천(7), 운봉(7), 보은(6), 대소백산(6), 개령(5), 봉화(5), 부안(5), 영월(5), 무주(5), 진목(鎭木 4), 단춘(丹春 3), 단양(1), 영춘(永春 1)등으로 나타난다.
이를 유추해 보면,
① 이 지방들이 모두 38선 이남에 있고 이북에는 한 곳도 없다. ② 부안 변산 1곳을 제외하면 모두 해안과 멀리 떨어진 곳이다. ③ 서울ㆍ부산간이나 서울ㆍ목포간 기타 대로변을 피했다는 사실이다.
십승지가 생기게 된 배경은 기근, 역병, 전란의 삼재(三災)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삼재 중에서도 특히 난리를 피하려는 것이 우선이었다. 38선 이북에 1개소의 피난처도 없는 것은 이 지역이 오랫동안 북방민족들의 침략이 심했거나 그들의 지배에 있었던 까닭이다.
또 해안지역이 제외된 것은 고려말기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왜구가 창궐하면서 해안지대는 왜구의 침해를 받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근교나 대도시 주변 또는 대로변은 병란의 화가 미치기 쉽고 역병은 대도시나 대로변일수록 더 빨리 미치게 되어 배제되었을 것이다.
3)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① 위만조선 이전의 2천여 년은 11차례에 걸친 북방민족의 침략, ② 신라건국 초부터 고려의 삼국통일까지 1천여년 동안은 대륙으로부터 110회, 해양방면에서 33회, ③ 고려조 450여 년 동안은 북방 125회, 해양 292회, ④ 조선조 500여 년 동안은 북방 192회, 해양 168회, ⑤ 합계로 대륙 438회, 해양 493회로 총계 931회에 이르는 침략을 받았다.
이 같은 외침과 이에 못잖은 내우 환란 속에서 민중들은 삼재팔난(三災八難)을 피할 수 있는 승지를 찾게 되고, 이를 일러주는 각종 비기와 참위, 풍수지리설과 명당, 길지론이 나돌게 되었다.
5. 십승지(十勝地)의 교훈(敎訓)
1) 십승지(十勝地)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과 지치고 희망 없는 고달픈 삶을 사는 일반 백성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고 위안이 되게 했다.
2)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고 있다.
6. 십승지(十勝地)로서 거론(擧論)된 대표적인 비결(秘訣)
(1) 정감록(鄭鑑錄)의 감결(鑑訣)
1) 이심의 십승지 요약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① 풍기(豊基)와 예천(醴泉)
② 안동(安東) 화곡(華谷)
③ 개령(開寧) 용궁(龍宮)
④ 가야(伽倻)
⑤ 단춘(丹春), - 단양과 영춘
⑥ 공주(公州) 정산(定山) 마곡(麻谷)
⑦ 진천(鎭川)과 목천(木川)
⑧ 봉화(奉化)
⑨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으로 이는 길이 살 수 있는 땅이어서 어진 정승,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날 것이다.
⑩ 태백(太白)
2) 정감의 십승지
① 풍기(豊基)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으로, 소백산 두 물곬 사이에 있다.
② 화산(花山) 소령(召嶺) 고기(古基)로 청양현(靑陽縣)에 있는데, 봉화(奉化)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③ 보은(報恩) 속리산 사증항(四甑項)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④ 운봉(雲峰) 행촌(杏村)이다.
⑤ 예처(醴泉) 금당실(金塘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⑥ 공주(公州) 계룡산으로, 유구(維鳩) 마곡(麻谷)의 두 물곬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⑦ 영월(寧越)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하다. 그러나 수염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⑧ 무주(茂朱) 무봉산(舞鳳山) 북쪽 동방(銅傍) 상동(相洞)으로, 피란 못할 곳이 없다.
⑨ 부안(扶安) 호암(壺岩)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⑩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 만수봉(萬壽峰)으로, 그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동북쪽 정선현( 善縣) 상원산(上元山) 계룡봉(鷄龍峰)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총 10항목 13곳이다.
(2)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조선 명종 때 이름이 높았던 예언가이다.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 등에 능하여 관상감에서
종6품 벼슬인 천문교수(天文敎授)를 지냈다.
그는 1575년(선조8)의 동서분당을 예언하였고, '임진년에 백마 탄 사람이 남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과연 가토오키요마사(加藤靑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와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였다 한다.
그는 소년 시절에 고향인 울진의 불영사에서 신승(神僧)을 만나 비결을 전수받고 전국의 명산을 둘러보았다 하는데 그가 남긴 글인 <남사고비결>, <남격암십승지론>이 <정감록>에 수록되어 전한다.
1) 남사고가 지목한 십승지는 남한 지역에 한정
도별로는 경상도 4개소, 전라도 3개소, 충청도 2개소, 강원도 1개소로 대체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십승지 중에는 그 소재지가 지금의 어디인가를 헤아리기 쉽지 않는 곳도 있으나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2.안동(安東)의 내성(奈城)
3.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4.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5.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동점촌(銅店村)
6.공주(公州) 유구천(維鳩川)과 마곡천(麻谷川) 사이
7.영월(寧越)의 정동(正東) 상류
8.무주(茂朱) 무풍(茂豊)의 덕유산(德裕山)
9.부안(扶安) 변산(邊山)의 호암(壺巖)
10.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이다
① 기천(基川)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은 마을 북쪽의 소백산 아래 두 물줄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② 화산(花山) 북쪽에 있는 소령고기(召嶺古基)는 바로 내성현(奈城縣) 동쪽, 태백(太白) 양면(陽面 )이다.
③ 보은(報恩)의 속리산 아래 증항(蒸項) 근처로서 난리를 당했을 때 이곳에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대로 보존할 땅은 아니니라.
④ 예천(醴泉) 금당동(金堂洞) 북쪽이니 이 땅은 비록 얕게 드러났으되 병란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평안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임금의 수레가 임하면 달라질 것이다.
⑤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아래 동점촌(銅店村) 백리 안은 가히 오래오래 보전할 수 있는 땅이 니라.
⑥ 공주(公州)의 유구(維鳩)·마곡(麻谷) 두 물줄기 사이는 둘레가 백리인지라 가히 살육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⑦ 영월(寧越) 정동쪽 상류는 어지러운 일이 생겼을 때 가히 종적을 숨길 만하지만, 수염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⑧ 무주(茂朱) 무풍(舞豊)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德裕山)은 위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⑨ 부안(扶安) 호암(壺岩) 아래 변산(邊山)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로되 탐라(耽羅)가 다른 나라 땅이 되면 불가능하니라. 이 땅은 변산 동쪽에 있으므로 세상이 어지러워져 찾았다면 변산 동쪽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말 일이다.
⑩ 가야산(伽倻山) 아래 남쪽에 만수동(萬壽洞)이 있으니 둘레가 2백리로 가히 몸을 보전할 수 있지만 동북쪽은 불가능하다.
2) 그 밖에 보신처(保身處)를 논하자면
산수가 은밀하여 태백·소백 두 산의 그늘이 남쪽으로는 풍기(豊基)·영천(榮川), 서쪽으로는 단양(丹陽)·영춘(永春)에, 동쪽으로는 봉화(奉化)·안동(安東)에 있고 북쪽의 땅들은 좋지 못하다. 또 평평(平平) 울울(蔚蔚)이 가장 길하고 내포(內浦)의 비인(庇仁) 남포(藍浦)가 다소 낫다.
금오산(金烏山), 덕유산(德裕山), 두류산(頭流山), 조계산(曺溪山), 가야산(伽倻山), 조령( 鳥嶺), 변산(邊山), 월출산(月出山), 내장산(內莊山), 계룡산(鷄龍山), 수산(首山), 보미산(補彌山), 오대산(五臺山), 상원산(上元山), 팔령산(八靈山), 유량산(有良山), 온 산( 山). 그 밖에도 몸을 숨길만 한 곳이 군데군데 있으나 모두 이용하기는 어려우므로 가장 좋은 십승지(十勝지(地))만 기록한다.
(3) 토정가장결
내가 지도를 구하여 8년 병진에 금강산에서 기운을 바라보며 근원을 찾아 삼척부에 이르러 신술방을 향하여 오십천 우이 사이로 들어가 태백산을 바라보니 백 여리 중에 깊은 숲만 있고 인가는 없는바, 즉 대소궁기였다.
이 태백산 원줄기가 천봉만학이 병풍처럼 좌우로 늘어서고 유명한 내와 신령한 땅이 앞뒤를 두르고용이 경태 건해로부터 임감 맥으로 나누어 국세가 병, 오, 정 세 방향으로 열리고, 태을이 그 문을 지키고,청룡이 그 골짜기를 둘러 화기가 충만하니 참으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이 밖에 기이한 곳이 세 군데 있는바
하나는 풍기 예천이요,
둘은 안동이요,
셋은 운봉 두류산이니, 지형이 기이하고 아름답기는 이 궁기와 다르지만 편안하고 한가로이 몸을 보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4)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속리산의 증항(甑項)이 비록 길하긴 하지만 먼저 망하고 나중에 사는 만큼 나중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어찌 꼭 증항뿐일 것인가? 가까이에 있는 땅 역시 좋다.
산(山)과 선(仙) 사이에는 기근이 들어갈 수 없다. 작은 시내에 모습을 숨기는 것이 어떨까?
만약 그 땅에 들어가거든 협자촌(俠字村)을 찾을 일이다. 여덟 가지 물건이 장생(長生)하여 사람을 안고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살아나거든 돌아와서 다음으로는 유구(維鳩)·마곡(麻谷)을 물을 일이다. 황간(黃澗)·영동(永同) 사이에는 가히 만가호가 살아나고 청주(淸州) 남쪽과 문의(文義) 북쪽 역시 가히 모습을 숨길 수 있다. 옥천(沃川 )과 진잠(鎭岑)은 간혹 별이 비친다.
(5) 두사충비결
내가 조선의 산천을 돌면서 내 몸 보전할 곳을 두루 보니, 대개 태백산과 소백산은 백두산에서 갈려 내려와서 산맥이 나뉘었는데 본래부터 왕성한 기상이 있어 화기가 넘쳐흐른다.
화산, 가야산, 지리산, 두류산과 삼풍의 네 평야는 곧 어진 정승이나 좋은 장수가 계속해서 나올 곳으로서 땅은 기름지고풍속은 순후해서 오래 갈수록 더 좋으나 누가 주인이 되겠는가? 오서산과 성주산은 그 다음이다.
호남의 산은 등을 돌리고 달아난 것이 많아서 좋지 못한 일이 많이 생기니, 이것은 내버려두고 말할 것이 없다.
강화의 마니산, 약수산과 영가의 백운산, 화약산, 대아산, 도성산 같은 곳은 비록 산세가 얕게 드러났지만 병화가 들어가지 않고,
간사한 것이 침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덕을 쌓고 오랫동안 어진 일을 한 집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살 수가 있겠는가?
양근 용문산과 유양산은 안으로 세 가지 안목의 정교한 것이 없으면서도 오로지 깊고 궁벽한 것을 숭상하여,
이 때문에 다투어 여기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용문산 기운은 삼각산에게 빼앗겼으니 이는 아마도 헛된 꽃이요.
죽은 굴혈일 것이며, 산 안의 형세도 돌아서서 버리고 끌고 나갔으니 이것은 반드시 귀신의 맥의 무시무시한 기상일 것이다.
지각 있는 군자라면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것인즉 삼가고 삼가라.
영천의 백운산, 동주, 용해는 말들이 화락하고 입고 먹을 것이 풍족하니 여러 대를 내려가면서 길한 것을 보존할 곳이다.
내성, 명주, 평해, 울진, 삼척, 이천, 안협은 족히 세상을 피하고 몸을 감출 곳이 되지 못하나 그중에서는 명주가 가장 기기하다. 소양의 기린산과 낭읍의 대미산은 가장 사랑스러워 깊고 궁벽하니, 기이하고 기이 하도다.
임진강 서쪽과 철령 북쪽은 무엇을 족히 의논하랴? 태령의 수양산과 곡산의 밝고 아름다움은 재앙과
어지러움이 이르지 않아서 길이 복된 땅이 될 것이요, 신안 몇 고을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7. 현대(現代)에 와서 십승지(十勝地)의 신(新) 개념(槪念)과 조건설정(條件設定)
1)십승지(十勝地)의 신(新) 개념(槪念)
① 복잡한 세상사에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충전할 수 있는 웰빙 휴양처
② 풍수지리의 길지로서 정신수양 및 수련에 좋은 곳
③ 미래를 위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추진할 수 있는 문화 공간. 즉 평소에 생활하는 터전과 달리 난세에도 대비할 수도 있고 주말을 이용하여 심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2)조건(條件)의 설정(設定)
① 풍수지리상으로 형기가 유지고 있는 곳
② 도로나 개발로 인하여 훼손되지 않은 곳
③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토
④ 맑고 깨끗한 물
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소도로
⑥ 무선통신이 가능한 지역
8. 결론(結論)
십승지(十勝地)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과 지치고 희망 없는 고달픈 삶을 사는 일반 백성에게는 하나의 희망이고 위안이며 이상향이었다.
그 곳이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면서 후천(後天)개벽(開闢)을 기약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평등하게 잘 살수 있다는 이화세계를 기대했을 것이다.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잡다단한 일상과 스트레스에 십승지(十勝地)와 같은 곳은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은 것이다. 좀더 나은 생활과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야 말로 현대인의 영원한 바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崇仁堂(atman)블로그 인용
'十勝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지(十勝之地)의 땅 (0) | 2014.11.21 |
---|---|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0) | 2014.11.21 |
예언서에 나오는 미래의 땅 십승지(十勝地) (0) | 2013.12.04 |
십승지(十勝地)의 개요 (0) | 2013.12.01 |
십승지를 가다 - 강원 정선군 북면 (0) | 2012.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