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서방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恨맺힌 구부시령의 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3년 12월 08일
☞ 산행날씨: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26.2km / 8시간 05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댓재-황장산-1,105m봉-1,069m봉-1,062m봉-준경묘 갈림길-큰재
1,059m봉-귀네미마을 갈림길-자암재-헬기장-환선봉(지각산)
예수원 갈림길-덕항산-새목이-구부시령-1,055m봉-1,017m봉
997m봉-한내령-951m봉-푯대봉-902m봉-건의령(백인교군자당)
960m봉-새목이-945m봉-961m봉-노루목이-피재
☞ 소 재 지: 강원도 삼착시 하장면, 미로면, 신기면, 도계읍 /
태백시 조탄동 하사미동, 상사미동, 창죽동
요즘 얼치기 불교신자이기는 하지만 창피해서 얼굴을 못들겠다.
일련에 스님들이 하는 행태... 시정잡배 보다도 못하는 짓거리 뭐라고 해야할까?
일반사람들이 있는 연수원에서 술판 벌리고 노래하는 저급한 행동
그렇게 술먹고 노래하고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짓거리 하고 싶거든
파계하고 환속을 하여 맘대로 하던지... 왜 먹물 옷입고 부처님을 욕보이게 하는가?
2000년을 도도하게 이어온 한국불교 욕먹이지 말고 중노릇 제대로 좀하소.
그리고 스님들 앞에서 온갖 아부를 떠는 덜떨어진 반푼이 불자들
스님들한테 돈 갖다주지마소...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수행해도 모자랄 판에.
돈과 권력 그건 스님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아닌가요.
정말 창피한 짓거리 하지말고... 당신네들 때문에 처절하게 수행.참선하는
고승.대덕 욕먹이지 말고..성직자들이 돈 맛을 알면 이 사회는 희망이 없소
제발 중노릇 제대로 하던지 아니면 때려 치우던지 참으로 한심하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서울서 삼척가는 고속버스표
지난 10월 2주에 불알친구인 바람친구 아들 결혼식이 일요일이라 빠진
백두대간 댓재에서 피재구간을 땜빵을 갈려고하니 괜스레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 오전에 결혼식 한군데 들렸다가 부지런히 2번째 결혼식장인
동료산꾼 원일님의 아드님 결혼식에 참석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잔무를 정리한 다음에 서둘러 베낭을 메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경부고속터미널(19:00)
경부고속터미널에서 19시발 삼척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횡성휴게소(20:20)
횡성휴게소에서 내려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닌 탓에 내일 산에서
먹을것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휴게소 편의점에서 우유 하나, 커피쥬스
하나를 사서 베낭에 넣고 다시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진다.
삼척고속버스 터미널(22:50)
횡성 휴게소부터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니 버스는 강릉을 지나
옥계를 통과하고 있고 잠시 후 동해에 들려 손님을 내려놓고
삼척버스 터미널에 도착을 하여 버스에서 내린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찜질방 위치를 이곳에서 20분
이상을 가야 한다기에 택시를 타니 요금은 기본(2,800원)이다.
택시기사에게 내일 아침 05시에 댓재를 가야하니 와달라고 예약을 하고 찜질방을 향한다.
삼척온천 찜질방(23:10~05:00)
삼척온천 찜질방은 웨딩센터, 호텔, 찜질방이 같이 있는데
시설은 상당히 좋은 편이지만 물은 그리 좋은편이 아니다.
원래 이곳은 레미콘 공장이었는데 지하수를 파다가 더운 물이
나오는 바람에 온천으로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찜질방에 들어가서 입장료(9,000원)를 주고 락커 키를 받아서
샤워를 하고 잠을 자기위해 찜질방으로 올라가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들은 많이 있는데 벌써부터 코고는 사람들이 많아
이곳저곳을 찾다가 조용한 곳이 있어서 거기서 매트를 깔고 잠을 청한다.
3시간 정도를 맛있게 잠을 잤나... 그런데 50대 초반의 여인이
나를 보더니 ‘아저씨 여기서 있으면 어떡하냐면서 빨리 나가라고’ 한다.
아줌마 아무데서나 자면되지 당신 자리도 아닌데 시비냐고 하니까.
이곳은 여성 수면실이란다... 난 찜질방에 여성 수면실이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대한민국 남자들 참으로 불쌍하다.
갈수록 위축되는 설 곳없는 남자들의 세계... 이게 대한민국 남자들의 실상이다.
아줌마에게 쫓겨나와(?) 다른 곳에서 잠을 청하려니 한번 깬 잠이
다시 오질않아 1시간을 뒤척이다가 04시에 욕탕에 들어가 몸을
따뜻하게 한 다음에 면도와 샤워를 하고 베낭을 챙겨 05시에 나오니 예약한
택시가 기다린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삼척에서 유일하게 24시간
영업하는 해장국집에 들려 식사를 하는 사이에 택시는 대기를 한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다음에 다시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댓재로 향한다.
택시를 타고 30여분을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니 댓재에 도착한다.
택시 요금이 대기 요금을 포함하여 22,700원이 나오는데 택시 기사가
고양이 쥐 생각하듯이 30,000원만 달라고 한다.
처음엔 미터기 요금대로 달라고 해놓곤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25,000원만 달라고 한다... 더 이상 시비하기 싫어서 25,000원주고 택시에서 내리니
기온은 -3도를 가리키는데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부는지 체감온도는 -10도는 되는것 같은 느낌이다.
댓재(810m:06:10)
두타산과 덕항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있는 댓재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예로부터 삼척지방에서 하장,정선을 거쳐 서울로 가는 주요 고갯길이었다.
꼬불 꼬불 급경사의 15km에 이르는 도로를 차로 오르는데도 현기증이 날만큼
위험한 해발 810m의 고갯길이다. 대나무가 많다는 뜻에서 유래된 댓재는 일명
죽현(竹峴), 죽치령(竹峙련嶺)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은 4,5km 이르는 댓재 옛길이
복원되어 또다른 산행길의 멋을 더해준다.1984년 10월 지금의 도로가 개통되기까지는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를 넘나들던 옛 고갯길로서 보행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택시에서 내려 잠깐동안 장비를 점검하고 산행을 준비하는 사이에 손가락이
빠져나갈 것 같은 추위가 엄습해오고 바람이 어찌나 센지 몸을 가누기가 힘이든다.
서둘러 해드렌턴을 켜고 자켓을 하나 더 입고 산행을 시작한다.
댓재 표지석 뒤에 있는 詩
정일남 시인은 삼척시 미로면 출신이라서 미로에서 하장으로 넘는 댓재의 시가 의미 있다.
댓재 이정목
황장산(黃腸山:1059m:06:25)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황장목을 쓰기위해 왕실에서 일체의 벌목과 개간을 금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면서 부터 황장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관곽(棺槨)재와 궁궐 건축에 쓰일 황장목(黃腸木)을
확보하기 위해 지정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는 보통명사가 ‘황장산’(黃腸山)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이곳 강원도 삼척의 黃腸山은 산림청 선정 100명산인 문경의 황장산과 同名異山인데,
이름의 유래가 옛날에 황장목이라는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점과 함께
현재에는 황장목은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까지도 공통점이 있지만,
문경의 황장산이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릴 만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반면에
이곳 삼척의 황장산은 북쪽의 두타산과 남쪽의 덕항산이라는 두 곳의 100대 명산
사이에 낀 그저 평범하고 순하기 이를 데 없는 산봉우리라는 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질좋은 소나무를 적송 또는 금강송이라 하는데 이들은 주로 강원도나
경북 북부지방에서 자라며 잔가지가 적고 곧게 자라서 중요한 목재로 활용하였다.
그런데 한때 이런 적송(赤松)이 외지로 반출되는 집산지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춘양역이었기에 춘양목이라는 별칭이 있다.
그런 적송이 오래되어 300년 이상 고목이 되면 속에 송진이 배어들어 누렇게 되므로
황장목(黃腸木)이라 하며 잘 썩지않아 적송중에서도 적송중에서도 최고로 질이좋은
소나무로 분류되었고 황장목이 생산되는 산을 황장산(黃腸山)이라 불렀다.
댓재에서 15분만에 황장산에 도착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허전하다.
자세히 보니 헤드렌턴에 신경쓰고 바람이 너무 불어 옷에 달린 모자위에 다시 쓴 모자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렀다고 어둠속에 찾아 나설수도 없고하여 옷에 달린 모자로 바람을 피하며 정상에 도착을 한다
황장산 정상 이정목
황장산 정상 주위에는 어둠속이라곤 하지만 황장목(黃腸木)은 눈을 씻고봐도
보이지 않아 이름이 무색하다. 능선 좌측 아래의 삼척시내 야경만이 찬란하다.
조선지도 삼척편
삼척시 지도(위키백과 인용)
삼척(三陟)의 지명유래
삼척은 신라 때는 올곧은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실직(悉直)에서 꼭 지켜야만
할 땅이라는 북진(北鎭)으로 바뀌더니 고려 때는 오름의 땅이라는 척주(陟州)
그리고 따로 보배로운 땅이라는 진주(眞州)라고 하는 곳이더니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숫자 三이 들어간 세 가지 오름4)의 땅 삼척(三陟)이라 하는 곳이다.
이곳은 한때 군(郡)의 넓이나 인구, 세수(稅收)규모가 남한에서 최고였다.
지금의 태백시와 동해시의 남부 북평 지역이 모두 삼척에 속했다.
남평이라 하지 않고 북평이라 함은 삼척을 기준으로 ‘뒤뜰’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짐작을 해보면 강릉이 ‘하슬라’로, 삼척이 ‘실직’으로, 두 지역은 국경도시로 북진과 남진을
시도하기 위한 동해안 전초기지로 서로 경쟁관계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를 나타내는 화강암으로 된 1.5M 높이 정도의 지줏돌이
부곡동 승지골에 가면 보인다. 향로봉과 송이고개로 이어지는 구릉에는 고구려 군사가
매복하고 평릉과 부곡에는 신라군사가 매복하여 국경충돌이 자주 벌어진 곳이다.
근처에 위치한 사문치라는 고개도 삼국통일 후 김유신이 死門峙에서 士文峙로
개명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삼척은 묵은 한 왕조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왕조가 창업의 꿈을 키운 예사로운 땅이 아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의 외향이기 때문이다.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인 준경묘와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가 삼척에 있다.
전주지방 호족이었던 이안사가 기생 한 명을 두고 산성별감과 다투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몸을 숨겨 찾아온 첩첩산중인 삼척시 미로면 할기리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묘자리를 찾던 중 “여기다 소 백 마리를 잡아 개토제(開土祭)를 올리고 금으로 관(棺)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면 5대 후에 창업할 귀한 인물이 나올 명당이다”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고승의 말을 따라 백 마리의 소 대신에 하얀 소[白牛]와 금관 대신에 금빛 나는
마른 귀리 짚으로 관을 만들어 묻었다는 무덤이 이른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2년(1393년)에는 현에서
부(나중에 삼척도호부)로 행정구역의 격이 승격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려왕조가 마직을 고한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부자가 1차 원주에서 2차 간성을 거쳐 다시 이곳으로 3차로 유배된 곳인데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을 집행한 ‘살해재’가 ‘싸리재’ 또는 ‘사래재’가 있는 곳이다.
또 삼척은 우리민족의 억눌린 기상이 펼쳐진 곳이다.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1224-1300)에 의해 두타산 천은사에서 고려 충렬왕 13(1287년)에
칠언시(七言詩)로 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완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삼척의 역사적 인물로는 독도를 정벌한 신라의 장수인 이사부와
신라시대 고승인 자장율사가 있고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몬주익의 영웅으로 불린 황 영조가 이 지역 출신이다
황장산 정상 삼각점(△삼척440 / 2005복구)
황장산 정상에서 유순한 안부 길을 걷는다.
이번 구간은 거리는 26km가 넘는 만만찮은 산길이지만 강원도의
산답지 않게 참으로 유순하고 편한 길이긴 하지만 먼 거리에다가
새벽4시정도에는 출발해야 되는데 날씨도 춥고 나홀로 산행이라
어둠을 피해 늦은 6시가 넘어 출발을 하였기에 서둘러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조금을 지나니 산죽지대가 잠깐 나오다가 낙엽길을 만난다.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동해바다 쪽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06:45)
위험한 구간은 로프로 설치해놨다.
일출이 시작되려나보다 (06:50)
지대가 높은 산이라 그런지 해도 빨리 뜨는 느낌이다
1,105m봉(06:53)
정상에는 ←황장산 1.5km →큰재 2.9km의 이정표가 있다.
1,069m봉(07:10)
정상에는 3등 삼각점과 ←황장산 2.5km →큰재1.9km 이정표가 있다.
아무도 찾지않아 낙엽속에 묻혀있는 1,059m봉 삼각점
1,059m봉 삼각점(△ 삼척310 / 2005재설)
날이 밝으면서 삼척의 산그리메가 보이기 시작하고...
준경묘 갈림길(07:15)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 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다.
조선개국을 합리화한 용비어천가 첫장에 등장 하는(목조.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중에서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 살았다가 전주 산성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두고 다투어 사이가 나빠 처가인 강원도 삼척으로 피해 왔다
목조 이안사는 부친이 죽자 이곳에서 장사 지냈고 모친이 죽자 동산리에 장사 지냈다
그후 별감이 다시 삼척 으로 부임 한다기에 함경도로 이주 해 여진에서 벼슬을 했다 한다
고종 광무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이 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강원도 기념물 제43호)가 있다.
준경묘(濬慶墓:강원도 기념물 제43호)
준경묘에 얽힌 조선의 개국 설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왔는데,
삼척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양무장군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묘 자리를 찾고 있던 중 산 속에서 한 도승이 동자승에게 하는 애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이 곳에서 장사를 지내면 5대 안에 한 나라를 개국하는 그런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
그럴려면 반드시 개토제(開土祭)때 100마리 소를 제물로 바쳐야 하고,
금으로 만든 관을 사용해야 한다"
이에 목조는 궁리 끝에 100마리의 소(百牛)는 흰 소(白牛)로 대신하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은 황금빛이나는 귀릿짚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해서 예언대로 이성계가 태어나게 됐다는 이야기다.
백우(百牛)를 흰소(白牛)로 대신하여 천년 갈 조선이 5백년만 유지 됐다고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이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조선왕조의 수명이 500년이였다고도 한다.
준경묘의 풍수지리 - 백우금관형(百牛金棺形)
100마리의 소를 잡아 피를 뿌리고, 금으로 관을 만들라는 도승의 말에 따라,
근처에서 흰색 소 즉, 白牛로 百마리 소를 대신하고,
귀리의 짚이 황금빛이라
귀리짚을 금으로 만든 관으로 대신해서 안장했다는 전설로
우리나라 최고의 묘자리라는 풍수지리 이론가들의 평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에 좌우로 수로가 있고 습지며 좌우 물길이 시야 끝에서 합쳐지고,
앞에는 낮은 산이 펼쳐 있고 최고의 우리나라 소나무(황장목) 숲이 넓게 펼쳐진,
명당 중의 명당 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한다. (사진.글 - 펌)
일출(07:28)
해뜨기 직전이 가장 춥다고 했던가
카메라 셧터를 누르려고 장갑을 벗는데
손가락이 빠져 나가는 것은 느낌이 들 정도로 손이 시리다.
1,062m봉(07:30)
1,062m봉 이정표
1,062m봉에서 큰재 내려가는 길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풍력발전기가 나온다.
4년전 북진길서는 없었던 시설물이다... 4년만에 다시걷는 대간길 자꾸만 생소하다.
구름사이로 해는 벌써 많이 올라와버렸다
내리막 능선길을 내려오니 저 아래 큰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큰재(07:40)
삼척시 하장면 숙암리 에서 동쪽의 귀네미 골로 넘어 가는 고개로써 대치재 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1062봉에서 lKm쯤 떨어진 곳에 귀네미마을에서 개간지로 넘어오는 임도와 대간로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이곳에는 오랫동안 이용하지 않아 희미해지긴 했지만 고무릉리 감나무골과 통하는 오솔길도 있다.
4년전 북진길 때는 보이지 않던 풍력발전기 때문인지 포장도로가 새로 신설되어 있다.
풍력발전단지가 새로 생기면서 대간길이 많이 변형되었다.
예전의 등로는 폐쇄되어 부득히 임도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큰재에서 바라본 삼척시 하장면 숙암리로 가는 길
임도에서 바라본 지나온 1,062m봉의 모습
예전의 대간길은 풍력발전단지에 빼앗기고 포장된 임도로 걸어간다.
해가 뜨면서 바람도 조금 잦아들고 기온이 올라가는지 그리 춥지는 않다.
번천국유임도(07:48)
임도를 따라서 편한길을 걸어간다.
댓재에서 너무 늦게 출발을 하였고 나홀로하는 독립군 산행이라 부지런히 걷는다
아니 길이 좋은 곳에는 뛰다시피 한다... 내가 왜이리 사는지 ㅋㅋㅋ
번천국유임도 길에서 만난 안내판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포스트 삼아 걷는다.
고랭지 채소밭가에는 멋진 나무 한그루가 있다.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 올라가는 길은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물탱크 봉우리(07:55)
수몰지구 이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귀네미마을 고랭지 채소밭
1985년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만들어 지면서 광동리-조탄리-숙암리에
살던 37가구 주민들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마을을 형성한 곳이
고랭지 배추가 주산물인 귀네미마을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산골로 이주하여 일군 민초들의 역경을 극복한 질긴 삶의 현장이다.
그들은 팍팍하고 가파른 산비알을 개간하여 전국 제일의 고랭지 배추밭을 일구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에게는 천혜의 행운도 따랐다고 한다.
그들이 성공하기까지는 자연조건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습기를 함유한 안개 상습지역이고 바람까지 거센 지역이라
고랭지 채소를 경작하기에는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란다.
큰재를 1.1km를 지나왔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좌측 능선을 따라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가야할 능선의 궤적
내리막길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쓰이는 구상나무를 많이 식재해놨다.
출하 시기를 놓쳤는지 아님 가격이 맞지않아 포기했는지는
몰라도 밭에서 버려진 고랭지 배추들이 많이 보인다.
등로를 내려서니 포장된 농로가 나오고...
이정표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귀네미골 고랭지 채소밭
넓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건너편 산사면 일대까지 귀네미골 35만평의
고랭지채소밭이 펼쳐져서 장관을 이루는 이 귀네미골(牛耳谷)은 삼척시 하장면의
광동댐을 만들 때 수몰지구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켜 정착시킨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거주민들은 고랭지 채소 재배가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이지만 고랭지 채소밭은
현대판 화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연 훼손 및 환경 오염을 가져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고도 대간꾼을 대간을 훼손하는 주범으로 꼽는 산림청의 태도가 못 마땅하다.
이정표(08:03)
이정표를 지나니 귀네미 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농로가
나오고 대간길은 농로를 버리고 좌측 숲으로 접어든다.
가야할 대간길의 궤적
숲에서 내려와 포장농로를 10m 정도 걸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눈이 많이 쌓여있고 바람이 다시 세차게 부니 상당히 춥다.
등로에서 바라본 귀네미(牛耳谷) 마을
태백시 하사미동 귀네미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았다하여 우이령(牛耳嶺)이라 부르는 데서 연루한 이름이며,
이 마을의 형성은 1985년 광동댐 건설로 수몰 실향민이 된 주민들이 산을 개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귀네미마을의 30여만 평(坪)에 조성된 고랭지 배추밭은, 태백시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
강릉 안반덕, 평창 600마지기에 이은 우리나라 4대 고랭지 배추밭으로 해마다
8월이면 이곳에서만 약 230만여 포기의 배추가 출하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예언서 중에서 <정감록>의 피난지로 알려진 곳으로 한 때는이북 사람들이 <정감록>을 믿고
이곳으로 집단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해서 살다가 해방 전후 다른 곳으로 떠나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1988년부터 광동 댐 수몰지역인 숙암리, 광동리,조탕리 사람들 37가구가 집단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우이(牛耳)는 '소귀'로 이두표기 이기에 우귀 곧 '어귀'의 한자표기다.
이상향 무릉도원으로 가는 어귀에 있는 고개이자 골짜기라는 뜻이다.
'귀넘이'가 '귀네미'로 부르게 되는데 이 골짜기에는 과거 조선조 말엽부터 이상향을 찾아 이북 사람들이
이주하여 와서 살다가 떠나가곤 하였다. 귀네미 마을(牛耳谷)은 태백시로 부터 2007년도 대표모델 마을로
추천받은 고랭지 배추, 쌈채의 마을로써 주요농산물인 고랭지채소, 산더덕, 산나물(곰취, 곤드레, 나물취,
참나물, 산도라지, 산약초)등을 재배하고 있다.
귀네미마을은 해발 1100미터의 고산으로 유명한데 중국과 티벳을 연결하는 험한산길인 '차마고도'를
패러디한 '배추고도'로 2008년 9월에 방영한 KBS 1박2일에 방영된 이후 유명세를 타고 있다.
태백 매봉산, 강릉 안반덕, 평창 육백마지기와더불어 우리나라 4대 고랭지 배추밭으로 꼽히는 귀네미 마을의 정상은
태백시와 삼척시 경계에 솟은 삿갓봉(1185m)으로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저 나무는 자꾸만 꼬여만 가는 내 맘과 같은 것인가?
귀네미 마을을 바라보며 능선을 치고 오르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무명봉에 올라섰다가 다시 계단을 밟고 내려서니 자암재가 나온다.
자암재(08:30)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숙암리 귀네미 마을과 환선굴로 유명한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장암재라고도 부르는데
환선굴이 있는 대이리가 있는 곳에 장암목이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자암재는 고갯마루에 있는 바위들이 자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바위에는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자주색은 바위 속의 철분이 녹슬면서 나타나는 색이다.
무박산행을 하지않고 당일 산행을 하는 분들은 이곳으로 많이
내려가는지 환선굴 방향으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선답자들에 따르면 환선굴이 위치한 대이리 일대에는 석회석 동굴뿐만 아니라
너와집, 굴피 집 그리고 통방아 등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일부는 아직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조만간 기능은 다하게(死) 될 것이다.
그러나 주거 민속의 연구 대상과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生)은 지속하게 된다.
즉 너와집 굴피집 통방아 등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영위하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대간은 “죽음은 곧 삶이며 삶이 곧 죽음이다”는 동양철학의 일부를 강조하려 한듯하다.
生由於死 死由於生(삶은 죽음에서 그리고 죽음은 삶에서 시작된다) 불경(道典)에 나오는 말이다.
자암재 이정표
댓재에서 이곳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왔기에 사진을 찍어며
물한모금 마시는데 갑자기 산꾼들의 소리가 들린다.
북진을 하는 산꾼을 만나는데 익산 백두산악회에서 오신 분들이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한분과 인증샷을 남기고 헤어진다.
혹 가시다가 모자를 보면 줏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핸폰에 기록을
남기고 헤어지는데 피재에서 얼마나 일찍 출발을 했는지...
익산 백두산악회 한 분과 인증샷을 남기고 환선봉으로 향한다.
자암재에서 환선굴 가는 길
자암재에서 무명봉을 치고 오르니 정상에는 멋진 소나무 2그루가 있고
익산 백두산악회 2진 그룹들을 만나는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헬기장 (08:50)
헬기장 이정표
헬기장에서 환선봉 오르는 구간은 음지라서 그런지 눈이 꽤나 쌓여있고 길은 미끄럽다.
주위에는 편백나무들이 시원스레 보인다.
미끄러운 길을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로 조심스럽게 환선봉으로 오른다.
환선봉 정상가는 길에서 바라본 자암재 아래의 산세
귀네미골이 있는 태백쪽은 산세가 부드럽고 유하지만 반대편
환선굴이 있는 삼척쪽은 설악산 용화장성을 연상케 할만큼 멋지다.
지각산(환선봉) 정상 이정표
정상 아래에는 환선굴 입구가 보인다.
환선굴(幻仙堀)
처녀가 선녀로 환생하였다는 전설과, 스님들이 도를 닦기 위해 환선굴에 들어갔으나
되돌아 나온 스님은 없어서 이 스님 또한 환선하였다는 설이 있다.
환선굴 초입 대이리 골말에는 중요 민속 자료로 지정된 약 300년 된 굴피집이 있다.
이곳에서 동쪽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향하면 동해 바닷가 삼척시 근덕면에 살해치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 무시한 지명이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간성에서 2년간 귀양을 살다가
삼척으로 옮긴지 한달만에 이성계가 보낸 사람에게 목이 졸려 목숨을 잃었으며 근처 궁촌에 조성된
무덤은 가장 큰 것이 공양왕, 그 옆은 2 명의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 무덤이라고 전한다.
궁촌 또한 왕이 피신해 머물던 곳 이라는 지명이다.
공양왕 능은 이곳을 포함하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 금수리등 세곳이다.
공양왕이 교살된 후 신원 확인을 위해 목을 잘라 머리만 가져가고, 몸은 이곳에 묻었다는 설,
간성에 있는 무덤은 공양왕의 최 측근 홍문관 박사출신 함 부열이 왕의 시신을 수습해 간성으로
옮겨 묻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세종 실록에는 “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구절에 근거하여 고양시 원당의 능을 공식으로 인정 하고 있다.
환선봉(幻仙峰:1,180m:09:05)
강원도 태백시 하시미동과 삼척시 신기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일명 `찌걱산'이라 불리는 지각산(환선봉)은 산 동쪽 깎아지른 절벽에는
설패바위, 촛대바위,금강문 등 수많은 기암이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 선경을 이루는 별유천지이다.
건너편 미륵봉 밑에는 천연기념물 178호로 지정된 환선동굴이 있으며
황금색 종유석, 석순 폭포 등 기묘한 현상으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幻仙峰(지각산:地角山)은 공식적으로는 지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무명봉으로
이 지역에서는 지각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1990년대에 이 봉우리
아래의 환선굴(幻仙窟)이 관광명소로 개발되면서 이를 둘러싼 산줄기의 중양부에
가장 높게 솟구친 점을 감안하여 삼척시에서 임의로 환선봉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봉우리인데, 능선에서 바라보는 환선굴 입구의 대이리 협곡 풍광은
가히 경이롭다 할 수 있을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환선봉(지각산)이라 부르는 이유는 아래 환설굴이 있어 환선봉이라 한 것 같다.
환선봉 정상에서 삼각대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옛날 에는 지각산이라 부렀는데 환선굴이 발견 이후 개명 환선봉 이라 부른다고 한다
옛날 한스님이 산 아래 있는 동굴에 수도을 위해 동굴에 들어 갔는데
나오는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사람들은 스님이 신선이 되였다고 믿고는
이 스님을 환선이라 불렀으며 동굴 이름을 환선굴 이라 한다
환선봉 아래 환선굴은 천연기념물178호로 지정 동굴규모가 10.000여평으로
최대 천정높이30m이루며 길이는 6.9km 동양최대 동굴로써 동굴안에서 나오는
물은 입구에폭포을이루며 쏱아지고 동굴안에는 3000명 모을수있는 넓은 광장과
각양각색 종유석이 신비스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동굴온도는 17c유지하며
지층은 고생대 것으로 4~5억전에 이루워진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환선봉 정상에서 바라본 환선굴
덕항산 주변의 구글어스
환선굴의 유래와 전설
먼 옛날, 대이리 마을의 촛대바위 근처에 폭포와 소가 있어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나 멱을 감곤하였는데,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쫓아가자 지금의 환선굴 부근에서
천둥번개와 함께 커다란 바위더미 들이 쏟아져 나오고 여인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여인을 선녀가 환생한 것이라 하여 바위가 쏟아져 나온 곳을 환선굴이라
이름 짓고 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게 되었다.
여인이 사라진후 촛대바위 근처의 폭포는 물이 마르고 환선굴에서 물이 넘쳐나와 선녀폭포를 이루었다.
쏟아져 나온 바위는 지금의 환선굴 가는 길목에 남아있고 바위더미 위에는 산신당이 지어져 있다.
또한 한 스님이 도를 닦기 위해 환선굴로 들어갔으나 되돌아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사람들은 이 스님 또한 환선이라 하였다.
스님이 짚고 왔던 지팡이를 산싱당앞에 꽂아 두었는데 지금의 엄나무가 바로 그것이라고
전하며 환선굴내에는 스님이 기거하던 온돌터와 아궁이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삼척시 하장면 광동댐 부근엔 또 하나의 지각산(904m)이 있다.
이 산 이름은 원래 ‘찌걱산’이었던 것이 한자화하면서 지각산이 됐다.
‘찌걱’이란 삼척 지방 사투리로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나타내는 의성어이다.
지각산 자락이 Y자로 벌어져 있고, 그 계곡에서 남녀가 우연히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둘 사이에 꼭 사단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찌걱산이라 했다는데, 속된 이름인 찌걱산을
한자화하면서 고상하게 지각산이라 하게 됐다.
이곳 지각산(환선봉) 아래의 Y자 계곡도 보는 이에 따라서 그와 비슷하다
이곳의 지각산 역시 원래는 찌걱산이었던 것이 고상한 이름의
지각산이 됐고, 이후 더욱 근사한 환선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나온 태백풍력발전 단지와 귀내미골 고랭지 채소밭도 보이고...
환선봉에 조금 오래 머물렀더니만 너무 추워 서둘러 길을 떠난다.
환선봉에서 내려오니 조그만 고개가 나오고...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가 내려서니 예수원(골말)으로 내려가는 쉼터가 나온다.
.예수원 갈림길 쉼터(09:35)
예수원은 구부시령 입구에 ‘토지는 하나님의 것’ 이라고 믿는 수도 공동체
태백 예수원은 1965년도 설립되었다고 한다.
2002년 84세로 영면에 든 대천득 성공회 신부(본명: 뢰벤아처 토리3세)가세운
예수원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이들의 공동체이다.
골말마을(예수원) 갈림길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골말 일대는 6·25 한국전쟁 조차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주변에는 너와집, 굴피집, 통방아 등 많은 민속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모두 강원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전통가옥이라곤 기와집이나 초가 정도만 봐왔던 사람들은 너와집이나 굴피집의
여기저기 물 샐 것 같은 지붕과 바람 드나드는 허술한 판자벽을 보곤 의아해 한다.
그러나 맑은 날 조금씩 틈이 벌어져 있던 지붕은 습기를 머금게 되면 부풀어서
물샐 틈 없는 완벽한 지붕이 되고, 겨울엔 눈이 덮이면서 그 무게에 눌려 틈이 없어진다.
허술한 판자벽도 겨울철엔 땔감으로 쓰는 장작을 뱅 돌아가며 쌓아놓으니 걱정할 게 없다.
굴참나무 껍질을 지붕에 차례로 포갠 굴피집은 물이 잘 빠지고 건조가 잘 되거니와
보기와 달리 수명이 길어 흔히 ‘굴피 천년’이라 한다.
보통 굴피는 더위가 한풀 꺾이는 처서 전에 벗긴다.
그 이후엔 나무의 수분이 말라서 잘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붕을 덮은 후 몇 년 지나면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쓴다.
보통 3년 주기로 썩은 조각들을 교체한다.
(자료 - 펌)
덕항산 정상 이정표
덕항산(德項山:1,072.5m:09:45)
태백시 하사미동과 삼척시 신기면과 경계에 솟아 오른 산으로 옛날에는 덕매기산 이라 불렀다고 한다
덕항산은 산 전체가 석회암 으로 되여 있고 산 아래 삼척쪽에 유명한 한선굴이 있으며
그 밖에도 동굴이 54개에 이른다고 한다 산의 동쪽은 험한 벼랑 이며 서쪽은 완만한 경사로 이루워진 산 이다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소재한 대이리군립공원에 소재하고 있으며 약 12km 길이의
무릉천이 덕항산에서 동으로 계곡을 따라 흘러 五十川에 합친다.
산세가 수려하고 동남으로 펼쳐지는 병풍암,거대한 암벽,칼로 벤 듯한
암면,우뚝 솟은 촛대봉 등 특이한 절경을 이룬다.
덕항산은 산보다도 '환선굴'로 더 유명하다.
덕항산은 능선으로 지각산과 나란히 하고 있으며 이 2산의 가운데 해발 840m에
환선굴이 있으며 5억3천만년 전부터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종유석의
아름다움 보다도 큐모가 크고 웅대하다.
총연장 6.5km, 높이 30m , 폭 100m로 동양 최대를 자랑한다.
환선굴은 97년 10월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며 총연장 6.5km 주굴 3.2km로 6개의
동굴군중 가장 규모가 큰 굴로 내부에는 기암괴석이 항아리,소,사람 등 다양한 형태의
석수와 종유석이 형성돼 있어 석회동굴의 아름다움을 고루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동굴내 지형지물과 동,식물 집단 서식지의 보호를 위해 전체
6.5km중 1.6km만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덕메기(산)'이었다고 한다. "저 너머에 화전하기
좋은 더기(고원)가 있는 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것이 '덕목이'로 변하고 덕항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삼척사람들이 화전밭을 일구기 위해 태백(하사미)으로 넘어 오던 산이라 하여
"덕메기산"으로 불렸으나 이두문자 표기로 덕항산(메기=목덜미(項)으로 바뀌었다.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전해지는 이름이다.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덕항산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
경동지괴(傾動地傀)의 표본을 이루는 곳으로 환선봉과 나란히 하여 양쪽사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삼척쪽 동쪽의 대이리 방향은 깎아지른 석회암 사면으로촛대봉, 사다리 바위, 나한봉, 수리봉, 금강봉,
미륵봉 같은 기암들이 즐비하고, 계곡의 초입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환선굴,관음굴,사다리바위굴,
양터목세굴,덕밭세굴,큰재세굴)등이 있다
태백쪽 서쪽은 1000m 전후의 화전을 일구어도 될만한 고위평탄면을 이룬다.
아홉마리 용이 아홉 늪에서 놀고 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으로 꼽히기도 한 곳이다
덕항산 정상 유래의 안내판
어느 산꾼이 "우리나라에서 그랜드캐년을 닮은 곳이 있다면
거기는 바로 덕항산 자암골"이라고 설파했던 기경(奇景)의 산이다.
북쪽에 두타산(頭陀山:1,353m), 남동쪽에 응봉산(鷹峰山:1,303m)이 있고
지극산과 능선을 나란히 하고 있다. 동쪽 비탈면은 경사가 가파르나
서쪽 비탈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경동지괴(傾動地塊)의 표본을 이루는 곳으로 동쪽은 깎아지른 석회암 사면, 서쪽은
1000미터 전후의 고위평탄면을 이룬다. 석회암 사면에는 환선굴, 바람굴, 관음굴 같은
동굴들과 촛대봉, 사다리바위, 나한봉, 수리봉, 금강봉, 미륵봉 같은 기암들이 즐비하다.
골짜기는 거의 언제나 안개에 차있고 그 사이로 언뜻언뜻 험산과 기암이 드러나는 환상적인 풍경이다.
원래 이름은 덕메기[산]이었다. 삼척쪽에서 부르던 것으로 "저 너머(태백 하사미)에 화전하기
좋은 더기(고원)가 있는 뫼"라는 뜻이라고 한다.그것이 덕목이로 변해 '목 항'(메기=목덜미(項)자
덕항산으로 표기된 듯하다. 그 더기는 지금 광동댐 수몰민들의 고랭지채소밭이 되어 있다.
덕항산 정상의 이정표와 표시석
덕항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갈 길이 멀어 서둘러 길을 떠난다
덕항산 내려오는 길에 속초에서 왔다는 대간 북진팀을 만난다.
오늘따라 익산 백두산악회, 대구의 백마산악회 등 3팀의 북진팀을 만났다.
덕항산을 내려오니 멋진 상고대가 연출된 나무들을 만난다.
새목이(09:55)
새목이 이정표
1,007m봉(10:00)
새목이재에서 올라서니 1,007m봉이 나오고 우측으로
조금 꺽어지니 박복한 여인의 恨맺힌 구부시령이 나온다
구부시령(九夫侍嶺:10:05)
태백시 하사미동의(푯대봉 뒤쪽마을) 외나무 골에서 삼척 도계읍 한내리로
넘어 가는 고개로 옛날 한내리 땅에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박복한 여인이 살았는데
서방만 얻으면 죽고 또 죽어 무려 아홉 서방을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구부시령(九夫侍嶺)이라고 한다
아홉 지아비를 차례로 섬겨야 했던긴 동쪽 대기리 주막집 여인은 어느 새 사라지고 ,그 숫자와는
상관없이 이 땅 어두웠던 세대 그늘진 곳에서 恨 많은 삶을 살다 간 예쁜 女人을 생각하며 한 점씩
돌을 쌓으며 이 길을 쉬어 가던 로맨티스트 방랑객의 낭만이 돋아 나온다.
그는 아홉중에도 속하지 못했으리라..바로 옆에 떨어진 돌 한 점 들어 맨 위에 놓아 본다.
구부시령에는 넓은 공터와 이정표
그리고 구부시령 안내판이 있고 그 옆에는
박복한 여인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려는지 돌탑하나가 고개 정상을 지키고 있다.
구부시령에서 고도차가 별로없는 능선으로 오르니 약간의 우회길을 만들어 놨고
산꾼을 배려한 로프 기둥을 만들어져 있지만 자꾸만 인공적인 냄새가 나서 싫은 느낌이다
다시 등로로 내려서니 넓은 평전이 나오고 이곳은 자연보호란 이유로
백두대간 길을 많이 돌려논 느낌이다... 대간길은 그대로 뒀으면 한다.
4년전 북진길이 아닌 약간의 우회길로 능선을 치고 오르는데 주위에 상고대가 만발하였다.
아들과 대간길을 같이하는 아빠의 시그널 - 참으로 부럽다
1,055m봉(10:20)
1,055m봉에서 조금 내려왔다가 안부 능선을 20분 정도 지나니...1017m봉에 도착한다.
1,017m봉(10:40)
1,017m봉을 내려서서 안부 능선을 걸어가는데 주위의 갈참나무에 겨우사리가 참으로 많다.
그런데 이곳의 갈참나무는 생각보다 그리 높지않아 욕심을 부리면 조금은 수확이
가능하지만 오늘 거리가 만만찮은데다가 나홀로 걸어가는 독립군 산행이라 서울로
가는 차량시간 때문에 모든걸 포기하고 부지런히 걸어간다
이정표
980m봉(11:15)
급하게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우측 태백지역에는 4년전에 보이지 않던 목장이 보인다.
내리막길 좌측에는 뿌러진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한내령(11:20)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한내리에서 태백시 상사미동 삼밭골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태백쪽에는 굉장히 큰 목장이 들어서 있어 철조망이 처져있고 삼척쪽은 희미한
고개길이 보이지만 고개의 역할은 다끝나 버린 곳이다
한내령 우측에 새로생긴 목장 때문에 대간길은 좌측을 한참을 돌아서 올라가는데
산꾼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산림청은 도대체 뭐하는지?
사유재산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 셈인가... 산림청이나 국립공단은 산꾼에게는
한없이 엄격하고 죄인 취급하면서 대간길을 파괴하는 자들은 왜이리 자애로운지 ㅉㅉㅉ
961m봉(11:30)
961m봉 정상 이정표
이른 새벽에 아침을 먹은 탓인지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점심상을 펼친다.
점심이래야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검은 콩가루에 버무린 쌀떡과 우유하나 밀감3개가 전부다
10분정도 등로에 앉아서 먹은 다음에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능선에서 바라본 태백쪽의 목장
무명봉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넓은 평지가 나온다
넓은 평지에서 오르막을 오르는데 또다시 북진을 하는 산꾼 2명을 만난다.
이 분들은 아침 늦게 피재에서 출발을 하였다고 한다.
다시 푯대봉 삼거리 오르막을 오르는데 이곳도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대간길을
많이 우회를 시켜서 푯대봉을 오르게 해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자암재에서 만난 익산 백두산악회 분 한테서 전화가 온다.
‘독립군이죠’ 모자를 줏어으니 택배로 부쳐 주시겠단다. 감사합니다
왜 독립군이냐고요 그 분이 혼자 왔냐고 물어보길래 독립군이라 대답한 바람에 독립군이 되었다.
푯대봉 오르는 길은 ...
많이 우회를 시켜놨다
푯대봉 삼거리(12:05)
요즘 산에서 많이 만나는 알 수 없는 물체(?)
푯대봉 삼거리에서 100m 떨어진 푯대봉으로 향한다
푯대봉(11009.2m:12:10)
삼척시 도계읍과 태백시 상사미동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일제 강점기에 자원수탈을 위해 측량을 하면서 측량 깃발을
표시하여 세웠다고 해서 푯대봉이라고 부른단다.
우리가 산행을 하면서 많이 만나는 깃대봉과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정상에는 정상석과 산불감시 무인카메라와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정상은 대간에서 살짝 비껴 있다. 전망이 좋고 푯대봉
사먹리에서 불과 50m 거리이므로 다녀가는 것이 좋다.
이곳 대간 능선은 오히려 서쪽의 대간이 아닌 산군보다 해발 고도가 낮다.
동쪽의 은선과 계곡으로 어지럽게 흩어지는 임도가 마치 나무부리처럼 얽혀져 있다.
임도는 구릉지 언덕의 산채(나물)와 채소를 가꾸는 농경지로 연결된다.
깨어진 푯대봉 정상 삼각점
산불무인 감시카메라 철조망에 걸린 선답자들의 시그널
취나물 씨방
표대봉에 들렸다가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서 건의령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을 편한 걸음으로 빠르게 내려온다
오늘 구간은 강원도 산길이고 고도가 평균 1,000m가 넘는 곳이긴 하지만
고도 편차가 그리없고 거의가 육산(陸山)이라 마치 둘레길 걷는 기분이다.
좌.우로 식재된 편백나무 숲길을 한가로이 걸어 내려오니 건의령이 보인다
건의령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예전에 보이지 않던 목책이 처져있다.
건의령(巾衣嶺:840m:12:25)
강원도 태백시 상사미ehd에서 삼척시 도계읍을 넘는 고개로 상사미 마을 사람들이
백두대간을 넘어 오십천 상류에 있는 도계나 고사리에서 서는 장을 보러갈 때 넘는
지름길로 내륙에서 해안으로 연결하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고려말 때 삼척 육배산으로
유배 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고갯마루에
관모와 곤복을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며 고개를 넘어 태백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고개로 두문불출’하던 두문동재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관모와 관복을 벗어 걸었다고 하여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의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적혀있다.
건의령의 지명을 살펴보면 5만분의 1 지형도에는 한글로 ‘한의령’ 이라 쓰고 ‘寒衣嶺’이라
적혀 있지만 이 지명은 명백한 오류로 보인다.
여지도서(建衣嶺), 문헌비고 여지고와 산경표(建儀嶺), 대동지지(巾衣嶺), 1/50,000지도
한의령(寒衣嶺)에는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백두대간 족보격인 조선광문회에서 발행한 “산경표”에는 건의령(建儀嶺)으로 기록되어 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건의령(巾衣嶺)’으로 표기돼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건의령(巾儀嶺)이라고 한다
선조들의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인 건의령 아래로는 도계와 상사미동을 잇는
건의령 터널이 지나가고 있고 좌측에는 예전에 백인교군자당으로 쓰였다는 산신각이 있다.
백인교군자당(百人敎君子堂)
口傳에 의하면 고려말기 한 재상이 이 고개마루에서 100 사람에게 글을
가르쳐 마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기리고자 백인교군자당을 세웠다고 한다
유배되었던 공양왕을 배알하고 돌아가던 충신들 중 한명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2000년까지도 사당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허름한 함석에다가 판자떼기로 만들어진
전각에 山神閣이라 부쳐진 현판에 아마 굿을하는 무당의 소유인지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백인교군자당 옆에 있는 서낭당의 모습
서낭당이란?
서낭당의 형태는 돌무더기만 쌓인 것이 있는가 하면 당집이 마련돼 있는 경우,
마을에서 섬기는 신목(神木) 하나만 뎅그러니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전남에선 할미당으로, 경북에선 천왕당(天王堂), 평안도에선 국사당(國師堂),
함경남도에선 국시당으로 불리는데, 강원도에선 경기도 황해도와 함께 주로 서낭당이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서낭님께 성공과 바람을 기탁하여 당집에 시루나 흰 실,
혹은 한지를 접어놓거나 비단을 걸어 놓는데, 시루는 풍요로운 생산을,
흰 실타래는 무병장수를, 한지나 비단은 신에게 드리는 예단이다
우리의 서낭신이 단지 미신이고 미천한 것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
민초들의 작은 바람과 뜻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구심체 역할을 담당했던
역사적 사실을 이해 했으면 한다.
전각 옆에는 조그만 돌탑 하나가 앙증맞게 서있다
건의령을 뒤로하고 피재를 향해서 올라가는 길에는 목재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옛날 산성터의 흔적같은 돌무더기가 있고 그 사이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바라본 태백시 상사미동(上士美洞)의 모습
피재에서 삼척시 하장면소재지로 연결되는 35번 국도와
도로 옆으로 흐르는 골지천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가덕산이 보인다.
태백시 하사미동, 상사미동을 거쳐 삼수재(피재)를 넘으면 태백 시내에 이른다.
사미란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 하지만,
옛날 이 지방에서는 삼공蔘貢(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많이 하여서 삼 또는 사미라고 한데서
기인한 것이며 또 다른 이야기는 상사미의 고직대 밑에 맑은 샘이 있어서 새미, 사미로 불렸다는 설,
이 골짜기에서 삼(麻)을 많이 길러서 사미로 변형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안내판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등로 우측에 무명묘지 1기를 만나고...
넓은 임도(12:35)
이 고개는 태백시 상사미 마을 주민들이 백두대간을 넘어 삼척 오십천 상류의 도계나
고사리 에서는 장 을 보러 갈때 이용 하던 지름길 이며 내륙과 해안을 이어 주는 고갯길이다
건의령 옛길을 가로 질러 올라서니 또다시 무명묘지 1기를 만나고 능선으로 오르는데 바람이 세차다
능선 좌측으로는 금강송 군락지를 조성해놨는지 쭉쭉뻗은 황장목이 많이 보인다.
이정표를 만나 직진을 하다가 우측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송전탑이 지나가는 자작나무 군락지를 조금가니 새목이재가 나온다
새목이재(鳥項:1850m:3:20)
새목이재는 넘나드는 고개가 아닌 능선의 V선을 이루는 곳으로
풍수지리에서 새의 목과 닮은 산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건의령 3.0km →삼수령3.5km의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도계읍쪽에서 지나오는 엄청나게 큰 송전탑들을 만난다
송전탑을 안내하는 이정표도 보이고...
아침에 이어 또다시 만난 산죽길
산죽길을 지나 내리막을 넓은 平田이 나오고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960m봉(13:50)
960m봉 삼각점(△ 태백423 / 2004복구)
등로 아래의 도계 방향쪽에는 커다란 목장이 보인다
오늘 산행구간의 마지막 봉우리인 940m봉 오르는 길은 이제 서서히
지쳐오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고 무거운데다가 음지의 눈 때문에 힘이든다
무던히도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25km 가까이의 산길을 8시간이 안 걸렸으니...
940m봉(14:00)
노루매기(獐項:14:05)
노루가 눈을 들어 산봉우리를 쳐다본다는 주장봉망형지(走杖峰望形地)로
일명 노루목이라고 하고 노루가 많았던 지역에 마을이 생기면서
노루메기라 부르며 마을의 지형도 마치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고 한다.
땅 모양이 노루목처럼 생겼다면 노루가 많아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생긴
모양을 따라 노루모가지->노루메기로 변한 건 아닌지 그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한자로는 노루장(獐) 목덜미항(項)으로 쓰며 풍수지리산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노루메기(노루가 지나다니는 길목 또는 산이 막히는 막다른 곳)라 한다.
이러한 지명을 전국에 걸쳐 어려 곳이 있으나 대부분의 표기는 “노루목”이나 “노루목이”
또는 장항(獐項)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노루메기(이 지방 사투리로 보임)로 표기하고 있다.
노루매기에 내려서니 예전에 없었던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설치되어 있고
좌측 도계방향으로 조금전 능선에서 바라본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생긴 모양이다.
이곳에서 능선을 버리고 5분정도를 목장도로를 따라 피재로 향한다.
노루매기에서 5분을 걸은 다음에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 임도로 접어든다
이정표(14:10)
피재(삼수령)까지 4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면서 편안 임도를 걷는다.
4년전 낙동정맥 길 걸을때 첫구간 코스인 유령산과 구봉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통리고개 위에 우뚝솟은 백병산이 반가움을 표시한다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인 피재 능선에 도착을 한다.
능선 위에는 삼수정이라는 팔각정과 이동통신 중계탑
그리고 삼수령 조령물과 휴식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다.
피재 능선에서 바라본 매봉산 바람의 언덕 풍력발전기
현판이 떨어져 나간 三水亭
참으로 보기가 안좋다. 태백시장 나리! 만드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관리가 중요하요
요즘 시장나리! 애물단지 O2 리조트 때문에 머리가 많이 아프시겠지만 직원들 시켜 좀 고치소.
피재(935m:14:15)
태백에서 삼척 하장면과 도계읍을 잇는 35번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옛날 난리가 나면
태백으로 피난하던 재라 하여 피재 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고 피재에 떨어진 빗물이
북쪽 으로 흘러 한강 물 따라 서해로 동쪽으로 삼척 오십천 따라 동해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 따라 남해로 흐르는 분수령이라 하여 삼수령 이라 부른다
삼수령에서 광동호에 이르는 지역의 행정지명도 사조동에서 삼수동으로 바뀌었다.
본디 삼척시 하장면의 일부였으나, 1994년 태백시에 편입됐다고 한다
피재라는 지명이 붙기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고독한 산이란 뜻에서 고적령(孤跡嶺)이라 했다.
삼수령 조형물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삼수령 표시석 앞에 내려와 스틱을 접고 옷을 갈아입을 다음에 휴게소에 들려
두유 하나를 사서 먹은 다음에 지나가는 차량들을 대상으로 히치 하이킹을 시도한다
그런데 단박에 지나가는 자가용 한대가 서더니만 어디 가냐고 묻길래 버스 터미널
간다고 하니까 타라고 한다... 차에 올라 태백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만 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태백 중앙로로 오라고 하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차 주인이 내 친구를 잘 안다고 한다.
덕분에 무사히 친구 가계를 왔는데 하필이면 지난번 안 좋은 추억을 가졌던 닭갈비집 앞이 아닌가?
태워 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복받을 겨
친구가 운영하는 태백시 복권방
20여년만에 만난 태백친구
맨 처음 서울에 와서 만났던 친구인데 이 친구는 서울생활을 10년만에 접고
고향인 태백으로 가서 태백 축협에 근무하다가 직장 생활을 접고 복권방과
담배가게를 운영하면서 생활을 하는데 지난해 7월에 부인이 암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사별을 하고 혼자서 살고 있다... 시골에서 수입은 괜찮으나
혼자서 사는게 괜스레 안쓰럽게만 보인다
오랫만에 만나 근처에 있는 맛있는 한우고기를 사주는 바람에
몸 보신하고 막걸리 2병까지 잘 마신 다음에 태백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친구는 예전에 술고래였는데 사별의 아픔 때문인지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야! 용기를 잃지않고 건강해야돼
태백버스 터미널앞의 풍경
태백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16시가 조금 넘었다.
16시 30분 차가 있는데 이 차는 고한과 영월을 거치는 바람에
늦다고 하여 16시50분발 직통버스표를 끊어서 기다린다.
태백발 동서울행 버스표
16시 50분 태백발 서울행 버스
버스버스에 오르자마자 평소처럼 술 기운을 이용해서 깊은 잠에 빠진다.
사실 태백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타질 않고 강원랜드 카지노가 있는고한에서 사람들이 많이 타는데
40이 조금 넘어 보이는 여편네 2명이타고서 술이 취했는지 아님 카지노에서 주머니가 홀랑 털렸는지는
몰라도 계속 전화질과 시끄럽게 대화를 해대는데 버스기사가 다른 손님들에게 민폐이니 조심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이다...오히려 기사를 급박하며 내릴테니 환불을 해달란다... 망할 년들
참다못한 30대 중반의 여자분이 내가 대신 환불해줄테니 내리라고 돈을 건네니 그때사 잠잠하다...
이래저래 여인들 때문에 수난을 당한다.서울에 도착하니 20시 30분... 땜방을 잘하고 왔다.
서울에서 댓재가는 교통편
열차(하행) : 청량리 → 태백 → 동해 → 강릉
1673 22:00 02:37 04:04 04:56
1635 23:30 **** 06:25 07:21
. 동서울-동해 : 07:00-18:50까지 2시간 30분 간격 운행, 3시간 40분 소요
. 동서울-삼척 : 07:10-18:50까지 2시간 30분 간격운행, 3시간 소요(동해 경유)
. 삼척 고속터미널 : 033-573-9444
. 삼척 종합터미널 : 033-572-2085
. 하장 버스터미널 : 033-552-0553
. 댓재 대중교통(시외버스) : 삼척→하장 : 07:30, 13:30, 16:30, 댓재까지 40분 소요
하장→삼척 : 08:30, 14:50, 18:30, 댓재까지 10분 소요
. 삼척택시 : 033-573-5000
. 동해개인택시 : 011-9901-1222
. 동해-댓재 : 택시 30분 소요, 26,000원
. 댓재휴게소(민박) : 033-554-1123, 20,000~25,000원.
피재에서 서울오는길
. 택시요금 : 4,000원
. 하장-태백(버스) : 06:25-18:25까지 1시간 간격운행 (11:00, 12:50, 15:05. 17:40)
. 열차(상행) : 강릉 → 동해 → 태백 → 청량리
1670 **** **** 13:01 17:47
1672 14:00 14:52 16:27 21:12
1674 16:00 16:53 18:18 22:50
. 태백-동서울(시외버스) : 13:00, 13:30(무), 14:45, 15:00(무),
. 태백-수원 : 12:00(우등)
. 태백시외버스 터미널 : 033-552-3100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2차 남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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