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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제14-1구간 - 죽령에서 국망봉까지(역산행)

by 범여(梵如) 2013. 12. 16.

매서운 소백산의 칼바람에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며 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3년 12월 14일~15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엄청나게 추웠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5.3km + 어프로치 8.1km / 11시간 30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5명과 함께

☞ 산행코스: 죽령-936m봉-1145m봉-제2연화봉-천체관측소-1383m봉-제1연화봉-1382m봉

                  1395m봉-1405m봉-주목감시초소-비로봉-1380m봉-국망봉-초암사-배점리주차장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순흥면 / 충북 단양군 단양읍, 가곡면

 

 요즘 하도 주위에 비상식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왠만해서 놀라지도 않는 모양이다.

저 북녘땅엔 천년만년 누릴것만 같았던 권력의 2인자인 장성택이 30도 안 된 처조카

김정은에게 총살을 당하지 않나?  만년 적자에 허덕이며 자기들은 챙길것 다 챙기면서

민초들을 상대로 급박하면서 파업을 일삼는 철도 노조... 정말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정치하는 자들이 집권하면 자기 사람들을 심기위해 낙하산 사장을

내려 보내는 것이 원인 제공이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 사는 기분같은 오늘에도 어김없이 베낭을 메고 대간길에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거리와 고도표

 오늘 산행구간의 거리와 고도표 

오늘 서울의 기온이 -8도를 기록할 정도로 날씨가 춥고 계속되는 한파와 눈으로 인해 오늘의

들머리인 고치령으로 가기 위해 좌석리에서 고칫재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장님에게 전화를 하니

이곳 소백산 구간에는 눈이 많이와서 좌석리에서 고치령까지 타고가야 하는 트럭을 운행 할 수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산행대장이 고심끝에 다음구간인 죽령에서 저수령 구간을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는 명산이 없기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러셀에 대한 문제가 있을것 같아

고심끝에 죽령에서 고치령까지 역산행을 하기로 하고 죽령으로 향한다.

중앙고속도로 단양I.C에 들려서 유부우동으로 이른 아침을 대신하고 동료산꾼들과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버스는 죽령으로 향하여 야심한 새벽 03시에 죽령에 도착한다.

도착하여 버스에 내리니 엄청난 바람에다 서울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추위가 엄습해와

다시 버스에 들어 오는데 갑자기 산행을 할 엄두가 나지않아 망설이다 차에서 완전무장을

한 다음 버스에 내려 이곳저곳을 두루 살핀다.

죽령(竹嶺:696m:03:00)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 경계의 소백산맥에 있는 고개로 5번국도가 통과한다. 

도솔봉(兜率峰:1,314m)·연화봉(蓮花峰:1,394m)·국망봉(國望峰:1,421m) 등

높이 1,400m 내외의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는 험한 지세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조령과 더불어 영풍-단양 간의 주요교통로로 기록상 으로 백두대간 분수령 두번째 열린 고갯길이다

첫번째 고개는 죽령보다 2년전인 계립령 지금의 하늘재다 죽령은 하늘재와 더불어 고구려

신라가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던곳이다

이곳에서 가까운 상월봉 아래 영춘의 온달산성에 그 흔적이 있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지팡이(竹)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 한다.

서쪽 사면은 충주호로 흘러드는 죽령천의 상류 하곡과 연결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이사금 5년(158) 3월 죽죽(竹竹)장군에 의하여 죽령 길이

개통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죽령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연륜이 1850년이 넘는 고개이다.

 

중앙선이 이 고개를 통과하기 위해 '또아리굴'이라 불리는 루프식 터널을 건설했다.

죽령에서 단양까지의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동쪽 사면인 풍기 쪽으로는 산림이 우거져 있다.

부근에 죽령 봉수와 보국사·희방사·죽죽사가 있으며, 중앙선을 따라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 간)가 있다.

옛날에는 죽령 고개를 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문경새재인 조령, 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3대 관문의 하나였던 죽령

또한 소백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북서~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단층선을 따라 양쪽으로

침식이 크게 이루어진 결과로 저지대를 이루게 됐다.

죽령은 이곳 양쪽의 저지대인 계곡을 따라 나란하게 길을 낸 고개다. 뿐만 아니라

지구온난화가 심해지기 전에 대나무 북방한계선이라고 해서 죽령이라 이름 붙여졌다 전한다. 

버스에서 내려 풍기쪽으로 넘어서니 야심한 새벽이기는 하지만 죽령주막에 불이켜져 있다.

4년전 북진길에서 걸쭉하게 파전에다가 동동주 한잔한 생각이 난다.

 

현재 고갯길은 5번 국도가 지나고 1942년 국내에서 두번째로 긴 4.5km 죽령터널이

뚫려 있으며 중앙선 열차가 다니기 시작 했고 2002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여

백두대간길이 4,6km직선의 죽령터널로 개통됐다

 

안동,풍기,순흥,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힘겹게 하던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 꼬박 하루가

걸렸던 죽령길을 승용차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날수 있다 그 바람에 5번 국도가 지나는

이 고개는 잊혀진 옛길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 단양땅에서 풍기장으로 갈 때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걸어 다녀야 했던 民草들을 생각하며...

주막앞에 있는 영남제일문

흔히들 영주하면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이 문이 선비의 고고함이 배여있는 곳이다.

대구·경북지역에는 문경시 새재 도립공원에 있는 영남 제1관문, 대구 망우공원 안의 영남 제1관,

김천시 영남제1문 등 영남 제1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문이 3곳이나 된다고 한다.

문경의 영남 제1관문은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새재에 쌓은 3개의 관문 중 1관문인 주흘관문을 일컫는 말이다.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통하는 고갯길로서 교통 및 군사상의 요충지였던 문경새재는 죽령·추풍령과 함께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던 세 고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인데 그 세 고개중의 하나인 이곳

죽령정상에도 영남 제일문이 있어서 조금은 헷갈린다

다시 풍기에서 버스가 서 있는 단양쪽으로 넘어서는데 잠깐 사진 몇커트

찍는 사이에 손가락은 빠져 나갈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손이 시리다

단양쪽 죽령 표시석 - 다자구야 할미의 전설

죽령의 도둑 퇴치한 할미에게 지금도 제사 죽령산성이 있는

용부원리에는 다자구할미의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죽령고개는 옛날부터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로 아흔아홉 구비의 험준한 고개였다.

이 고개에는 대낮에도 도둑이 들끓어 지나는 행인들을 괴롭혔다.

관아에서도 도둑을 잡기 위해 군졸들을 풀었지만 수목이 꽉 들어차 울창하고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숨어버리므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둑들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겨 살기 힘들게

되었다며 웬 노파가 관아를 찾아와 도둑잡기를 자청하였다.

 

관원이 도둑잡을 방법을 물으니 자신이 도둑소굴로 들어가 동태를 살펴서 알려줄 테니

군졸들을 죽령고개 일대에 숨겨두었다가 “다자구야, 다자구야!”하고 소리를 치거든

급히 잡으러 오고, “들자구야, 들자구야.”하면 도둑이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이니

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두목의 생일을 맞아 실컷 술을 마신 도둑들이 모두

곯아떨어지자 할머니가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자 숨어 있던 관군이 달려 나가 모두 잡아버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다자구야 할미가 죽어서 죽령산신이 되었다고 믿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제사들이 모두 밤에 이루어지는데 비해 죽령산신제는 대낮에 행해지며 그 대상이

일반적인 산신령이 아니라 여성신이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다자구야 할미를

모시고 있는 죽령산신당은 지방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도 용부원리 마을의 부락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소백산 국립공원 탐방지원센터(03:20)

들머리 입구의 이정표

정말 난 추위를 싫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곳까지 왔으니 안 갈 수도 없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동료산꾼들과 함께 소백산 천문대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서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 입구에서 만난 시설물

이정표(03:55)

눈이 쌓여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되지 않는  길을 따라 法을 구하는 救道者의

심정으로 길을 걷는데 들리는 건 강한 바람소리와 동료산꾼의 발자국 소리 뿐... 

한참을 걷다보니 우측의 전망대에 올라서니 풍기읍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기읍 야경(04:15)

풍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풍기인삼과 소수서원이다 

풍기 인삼의 유래는 조선시대의 유학자 주세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역특산품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제도의 폐해가

심각해졌는데,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산삼의 인공재배를 장려하면서

인삼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삼이라면 산삼만 떠올리던 그 시절 주세붕은 전국의 토양을 조사한 뒤

풍기가 삼을 키우기에 알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풍기인삼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에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이 바로 인삼이다.

소수서원(사진  - 펌)

북 영주의 북편에 붙어 있는 풍기는 한때 조선의 중심을 자처했던 고장이다.

영남 사림파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바로 소수서원의 시초였다.

소수서원은 명종이 직접 현판을 내리고 노비와 전답을 지원한 최초의 서원이었으며,

1871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27개 사액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소수(紹修);"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닦게 하라"의 뜻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지어 올리고 명종이 윤허 한 것으로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1543)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처음에는 백운동서원으로 불렸으나,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을 공인화 하려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국가 지원을 조정에 건의 하여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명종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사액서원은, 나라로부터 , 토지, 노비등을 하사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이다.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로서 미국 하버드대학보다 93년 앞선다고 한다

소수서원 ‘敬’자 바위와 취한대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白雲洞)’은 퇴계의 글씨라고 전해온다.

그 아래 붉은색의 ‘경(敬)’ 자는 주세붕이 직접 써서 새긴 것이라 한다.

 ‘경(敬)’ 자와 관련해서는 세조 3년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이

 ‘정축지변’의 참화를 당한 뒤 이곳에서 밤마다 수장된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넋을 달래주기 위해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당시 참화를 당한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 리를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주세붕이 기존의 절을 허물고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창건하면서 불상을

소(沼)에 던져버려 밤마다 괴변이 일어나자 불상을 위로하기 위해 ‘경(敬)’ 자를 새겼다는 전설도 있다.

 

취한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敬자바위 윗부분에 터를 닦아 대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라 이름 한 것을 본 받아 1986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취한대;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사진 글 - 인용)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갈림길(1,297m)

반경 100km까지 100초 단위로 구름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기상관측소와 한강수위 통제소로

보내진다고 하는데 어두워서 카메라 앵글에 잡을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좌측 도로를

따라서 조금가니 야심한 새벽에 제2연화봉 표시석이 산꾼을 반긴다.

 제2연화봉(第2蓮花峰: 1,357m:04:45)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와 충북 단양군 단양읍 사이에 위치한 봉으로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순흥읍지』에서 희방용추를 설명하는 내용에 연화봉(蓮花峰)이 나온다. 또 『조선지형도』에는 현재의

제1연화봉이 해당하는 곳에만 연화봉이 적혀 있고, 일본어로 한글 발음이 병기되어 있다이런 식의 이름은

전국의 곳곳에 산재한다. 이들 지명은 거의 모두가 연꽃처럼 생긴 산의 생김새에서 유래하고 있다.

 

제2연화봉에서 비로봉에서 이르는 일대는 아고산(亞高山) 지대로서 키작은 나무와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육산(陸山)이기 때문에 산세가 완만하고 산의 모양은 둥그스름하다. 그 모습은 못 위에 솟아 있는 연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의 모습과 흡사하다. 지명은 풍수지리의 형국론이나 불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2연화봉 정상은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에 내어주고 자기 자리도 아닌

엉뚱한 곳에 표시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광장(04:55)

제2연화봉 표시석에서 10분정도 에둘러 돌아 걸어가니 어둠속에 넓은 광장이 나오고

단양읍의 야경이 산꾼을 반기고 하늘에는 동짓달 열사흘날의 하현달이 청명하게 보인다.

잠깐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자꾸만 옷깃을 추스리게 만든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자꾸만 적설량은 많아진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넓은 도로를 걸어가는 것이다

소백산 천문대 이정표(05:28)

우리나라 천문대 1호인 소백산천문대는 1978년 준공과 함께 관측활동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직경 60㎝가 넘는 반사 망원경을 최초로 설치해 우리나라 천문학의 신기원을 연 곳이기도 하다.
소백산 천문대는 대전의 대덕전파 천문대와 영천에 있는 보현산 천문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천문대이다

어둠속에 천문대를 잡아보려 했지만 똑닥이 카메라의 한계를 절감한다

소백산 천문대( 사진 인용) 

2009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천문의 해다. 갈릴레이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지 400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것이다.

천문은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통로이자 문명을 이끄는 첨병이었다. 우리 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라와 고구려에 이미 첨성대가 있었고 일본에서 7세기까지 활약한 천문가의 상당수는 백제인이었다.

이런 전통은 고려의 서운관과 조선의 관상감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오늘날 1만원권 지폐에 새겨진 혼천의와 천체망원경은 천문인들의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의 천문학은 과거의 영화를 떠올리기 민망할 만큼 뒤처져 있다.

소백산 천문대는 한국 천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물이기도 하다.

1978년 준공된 이 천문대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였던 주경 61㎝ 크기의 천체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미국·이탈리아·스페인·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망원경이 10m를 넘어선 지금까지도 한국 천문인들은

이 골동품으로 밤하늘의 별을 찾고 있다.

희방사 갈림길(05:35)

천문대 갈림길에서 조금 더 올라오니 연화봉을 우측에 두고 비로봉 가는길과 희방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어둠속에 연화봉을 거치지 않고 좌측으로 가는 길이있어 대부분 산꾼들은 좌측

비로봉으로 향하는데 연화봉을 들렸다가 비로봉가는 길이 있어서 어둠속에 비로봉으로 향한다.

희방사 대웅보전

희방사는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 여왕 12년(643)에 두운(杜雲)이 지었다고 하며,

희방사는 누구에게 쉽게 모습을 나타나지 않는 외진 곳에 숨어 있다.
병풍처럼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자연과의 균형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짓고,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햇빛만 잠깐 받아들일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희방사는 조선시대 훈민정음 원판과 월인석보를 보관하면서

유명해졌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희방사 창건 설화

두운 대사는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에서 소백산 연화봉 아래로 와서 동굴을 집 삼아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느 겨울밤 갑자기 호랑이가 굴 안으로 뛰어 들어와 고개를 흔들며 고통을 호소하였다.

대사가 가만히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꽂혀 있었다. 불쌍히 여겨 비녀를 뽑아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뒤, 굴 앞에 인기척이 있어 나가보니, 웬 여인이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정성껏 보살피니 곧 정신이 들었다. 사연을 들으니 여인은 호장(戶長) 유석(留石)이라는 사람의 무남독녀로서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었는데 별안간 눈앞에 불이 번쩍한 뒤로 의식을 잃었다고 하였다.

 

영물인 호랑이가 지난번 자기를 살려준 데 대한 은혜를 이렇게 갚고자 했던 것이다.

때는 한겨울이라 깊은 산중이 눈에 덮여 길조차 막혀 있었다.

여인을 귀가시키려면 겨울이 지나야만 했다.

대사는 동굴 안에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함께 겨울을 지낸 뒤 여인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여인의 아버지는 실종된 딸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기뻐하면서 대사의 은혜를 갚고자

동굴 앞에 전각을 짓고 농토를 희사하였다. 또한 계곡에 무쇠로 다리를 놓아 대사의 수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늘날 절이 위치한 행정구역인 수철리(水鐵里)는 곧 이 다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희방사라는 절 이름은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와 두운 대사의 참선방이라는

의미의 ‘방(方)’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

연화봉(蓮花峰:1,394m:05:45)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단양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단양군이 1987년 5월 31일 제5회 소백산 철쭉제를 기념하며 세운 표시석이

어둠속에서 산꾼을 반긴다. 저 아래의 풍기읍내의 불빛은 아직도 밤을 알리고

세차게 불어오는 北風寒雪은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 정도이다.

 

연화(蓮花)란 불교의 연화장 세계에서 가져온 용어로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연화장 세계를 일러 화장세계, 연화장장엄세계라고도 부른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세계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광대장엄을 갖춘 불국토이다.

『화엄경』에서는 연화장 세계가 삼신불, 그 가운데서도 노사나불의 서원과

수행에 의하여 현출된 이상적인 세계라 정의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으며, 이 향수의 바다 속에

한 송이의 큰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 속에 있는 세계를 일러 연화장 세계라 한다.

 

이곳을 연화봉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소백산 철쭉을 유명한 곳인데

철쭉이 피었을 때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하여 연화봉으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동료산꾼 김포오야지님 사진 인용

스마트폰에서 가리키는 연화봉 정상의 온도계가 -16.7도를 가리키니 체감온도는 족히

-25도는 될듯 싶어 정상에 2분도 서있지 못하고 서둘러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은 눈이 무릎위로 까지 빠지는데 잠시후에 눈 위에서 비박하는 텐트를 만나는데

정말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무 인기척이 없어 걱정스럽기도 하고... 

제1연화봉(1,394m:06:30)

죽령에서 연화봉까지는 천문대 도로를 따라오니 힘드는 줄 못랐으나 연화봉부터

이곳 제1연화봉까지 오는데는 무릎까지 빠져오는 눈으로 인해 시간은 지체되고

체력은 고갈되면서 허기가 지기 시작하나 추워도 너무 추워서 베낭을 벗고 휴식을 취할

엄두도 내지 못한 상태에서 이곳까지 왔다.

서면 추우니까 눈이 철쭉 나무에 걸려 터널을 이룬 대간길을 걷고 또 걷는다

 

백두대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식물인 신갈나무와 철쭉 중에

소백산 철쭉은 그중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월 말~6월 초의 늦봄에 연화봉~비로봉~국망봉 일대의 광활한 초원지대는

그야말로 연분홍 철쭉꽃이 만발하면서 천상화원으로 변한다.

그 명성은 조선시대 퇴계 선생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 일대 철쭉꽃 화원은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출이 시작되기 직전 (06:50)

일출을 준비하고 있는가 보다. 동녘하늘이 벌겋게 물들고 있다

그리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춥다고 했던가? 사진 한 컷 찍으려고 장갑을

벗는 사이에 손가락이 빠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주위의 사물들이 보이면서 가야할 비로봉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제1연화봉을 거쳐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유럽의 평원을 연상시킬만큼

멋진 광경의 설원이 연출되는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아고산대 식물들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 단양과 풍기 땅을 시원하게 굽어볼 수 있다.

흔히 소백산을 가리켜 남성성이 강한 산으로 평하는데, 이 능선에 서면 그 이유를 체감할 수 있다.

여명이 밝아 오면서 소백산 능선의 멋진 설경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전통지리에서 이 땅의 등뼈가 되는 대간 길을 정할 때 마루금이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느냐(지금의 태백시 북쪽 피재 부근에서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선) 아니면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지금의 대간 즉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한 데에는 속리산과 더불어

소백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땅의 대간이 '山太極(산태극) 水太極(수태극)', '음양이론',

'대간과 10대강의 발원지' 그리고 '산자분수령' 등의 철학과 원칙을 견지하며

아름답게 자리잡는 데에는 소백산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그 이름이 小白山이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소백산이란 이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上白山 혹은 主白山으로 불려지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작을 小(소)를 앞세운 소백산이라 불려지는 것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군자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소백산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을 가르치고 있다.

“달은 수줍음을 타는 듯 자주 구름 속에 숨는다.
수행하는 사람도 달처럼 수줍어하며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라”

‘나를 드러내려 하지 말고, 뽐내려 하지 말고, 한없이 낮추고 또 낮추라’는 뜻으로서

불교경전「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말이지만 바로 오늘 소백산의 모습이다.

1,405m봉의 日出(07:25)

천동리 갈림길(07:35)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단양읍 천동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오고

다시 비로봉을 바라보면 걷는데 매서운 칼바람은 여전하다.

잠시 능선을 오르니 4년전에 보이지 않던 조그만 건물이 보인다.

저 안에서 아침상을 펼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그쪽으로 향한다.

주목감시초소(07:38)

태백산. 함백산과 함께 유명한 소백산 주목을 보호하기 위한 주목 감시초소가 있다.

이곳 안으로 들어서니 이곳에서 어젯밤에 비박을 한 2팀이 있는데 15명이 우루루

들어가니 혼비백산을 하여 텐트를 걷으면서 자리를 비켜주려고 부산을 떤다.

잠시후에 이곳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바깥은 추워도 너무 춥다.

사진 -  김포오야지님 인용

각자 가져온 아침상을 펼쳐 1시간 이상의 여유로운 식사를 마치고 비로봉으로 향한다

주목감시초소 데크목 광장에서 동료산꾼들과 비로봉을 배경으로...

 

이곳은 해발1300m이상인 소백산의 아고라지대로 바람이 세고 비와 눈이 자주 내린 곳 으로

습기가많고 키가 큰나무가 잘 자랄수가 없는지대이다 아고라 지대는 아한대 기후지대로

신갈나무 철쭉 등,바람과 추위을 잘,이겨내는 야생식물이 자연과 균형을이루며 살고있다

백두대간은 강원도를 지나면서부터 우락부락한 악산(嶽山)에서

완연히 높이를 낮추는 육산(陸産)으로 확연히 변한다.

소백산의 가장 큰 특징은 지리산의 세석평전과 덕유산의 덕유평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릉이 광활하게 펼쳐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郞)가 지형에 따라

한반도의 산지체계를 분류한 산맥 개념이 나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우리 전통의 산지 체계인 백두대간은 산의 흐름, 즉 능선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줄기로 나눠 이름 붙였지만 산맥은 지형지질에 따라 체계를 달리했다.

지질이 유사한 지형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산맥은 산줄기가 사라진 강으로도 연결돼 산의 맥이 가끔 끊어지기도 한다.

소백산맥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 

 

중부권의 대표적인 육산인 소백산은 지형적으로는 온화한 평원을 이루고 있지만

바람과 눈(雪)에 있어선 어느 산보다 세차고 적설량이 많다.

이는 소백산이 위치한 지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발원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이때 내륙 깊숙이 진입한 대기는 소백산맥의 높은 장벽에 부딪혀 강제 상승한다.

수증기를 머금은 대기는 산사면을 타고 오르면서 단열팽창으로 냉각돼 눈으로 변해 내린다.

바로 동서로 길게 소백산 줄기가 바람을 가로 막으며 커다란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세찬 바람에 휘몰아치는 눈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일종의 ‘푄(Föhn)현상’이다.

소백산이 설악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제일 설경(雪景) 명산으로 꼽히는 이유다.

 

이로 인해 소백산의 북쪽인 단양·제천은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차갑고

강한 바람이 부는 데 반해 남쪽의 영주 지방은 기온이 더 높게 나타난다.

반면 여름철의 경우 기온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백산이 날씨와 기온조절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 주목 군락지

비로봉 바로 아래는 천념기념물 제244호인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일반인 통제구역이다.

옛날 통제하지 않던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망봉과 비로봉~연화봉 능선을 따라

3만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안내판에 적어 놓았다.

주목뿐만 아니라 왜솜다리, 모데미풀 등 희귀식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목은 한국, 중국 북동부, 일본 등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높은 산악지대나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주목(朱木)'이란 이름은 나무의 껍질이 붉은 색을 띠고 목재도 붉은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이가 오래가고,

목재가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소백산의 주목군락은 소백산의 정상인 비로봉과 제1연화봉 사이에

주목 3,798그루(2007년 기준)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는 곳으로,

 특히 비로봉 아래쪽 주목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을 울타리를 설치해 보호하고 있다.

소백산의 주목은 고지대의 입지 특성 때문에 강한 바람과 겨울철 강설(强雪)로 인해서

대부분의 줄기가 비틀리고, 가지가 휘어져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대부분 나무의 높이는

 7m 정도이고, 둘레는 일정치 않으나 2m 정도에서 밑으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다.

 

주목감시초소를 나와서 비로봉으로 향한다. 소백산의 바람은 정말 무섭다.

악천고투 끝에  소백산의 정상인 비로봉에 도착을 한다.

비로봉 정상 이정표

비로봉에 서니 조망도 조망이지만 피할 수 없는 불청객 ‘바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백산에서의 바람은 일종의 붙박이다. 사시사철 불어댄다.

그러다가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면 바람이 자는 날 소백산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로봉에서의 바람은 절대 쉬어가는 법이 없다.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은 한여름에라도 비로봉에는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바람과 스킨십을 하고 있는 비로봉을 보면

待人春風 持己秋霜(대인춘풍, 지기추상)이라는 성어가 생각난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대하고,

스스로를 대할 때에는 가을 서리처럼 엄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논어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은 엄하게 하고 남에 대한 책망은 가볍게 하면(躬自厚而薄責於人)

원망은 멀어진다(則遠怨矣)라고 하고...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君子求諸己)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小人求諸人)라고도 했다.

비로봉에게 칼바람은 가을 서리와 같은 존재라면,

비로봉은 군자 같은 모습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평하면서도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전후사정을 사정을 내세워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기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타인의 사정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경향은 시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최소한의 형평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 비로봉을 비롯한 소백산은 겸손을 가르치고 있지만

비로봉이 몸소 보여주는 ‘待人春風 持己秋霜’이 더욱 당면한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비로봉이 오늘로 여섯번째 산행이건만 한번도 바람을 피하지 못했으니...

오늘이 가장 심한 것 같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이니 말이다.

잠시동안 사진 몇커트 카메라 앵글에 담는 사이에 손이 완전히 굳어 버린다.

스마트폰에 표시된 온도계에선 현재 기온이 -19도를 가리킨는데

바람의 세기를 감안하면 체감온도는 -30도는 될듯 싶다.

비로봉(毘盧峰:1439m:09:05)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순흥면의 경계에 있는

소백산의 최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비로봉은 부처를 의미하는 산이다.

비로(毘盧)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본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법(法)이 세상에 몸을 입어(身) 드러난 법신불(法身佛)로

'공(空)의 인격화된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비로봉은 그 이름만으로도 부처의 산이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많다.

주로 큰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이 이름을 지니고 있다.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과 소백산의 비로봉이다. 모두 부처의 산이다.

부처의 법을 드러내어 사방팔방으로 온 누리에 퍼지게 하는 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름이 '비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의 빛이 막힘없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산이니 말이다.

산봉우리를 영험하게 여겨 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비로봉 정상에는 이정표와 표지석, 산행객들이 쌓아놓은 돌탑,

그리고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다.

표지석 뒤에는 서거정(徐居正)의 시 한편이 새겨져 있다.

정상석 뒤면 정상석 후면에는 조선시대 대학자인

서거정의 시 "소백산"이 음각되어 있다.

小白山連太白山 (소백산연태백산)
逶迤百里揷雲間 (위이백리삽운간)
分明劃盡東南界 (분명획진동남계)
地設天成鬼破慳 (지설천성귀파간)

소백산 태백산에 이어져
구불구불 백리길 구름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비로봉에서 바라본 영주시 순흥면의 산그리메

비로봉에서 내려서면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진 순흥면이다.

안향 선생의 후손으로 알려진 순흥 안씨 문중은 1454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몰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단종은 인근 영월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에 유배돼 있었는데,

 순흥 안씨의 사대부들은 둘 사이를 오가며 거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소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하루 수십 명씩 사대부들의 목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피비린내 속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들도 오랜 세월 안씨 성을 버리고 숨어 살아야 했다.

핏물은 죽계천 물을 따라 흘러 20리 밖에서야 멈췄으니 그 마을 이름이 ‘피끝’이다.

피끝마을 사람들은 논바닥에 우뚝 선 소나무 밑에 형 수양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금성의 주검이 묻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순흥 안씨 문중은 음력 10월 초하루면 그때 그 자리에 모여 제를 올린다.

비로봉에서 국망봉 가는 길 (2009년 7월 26일 북진때의 사진) 

 

작은 백산에서 유래한 소백산

소백산의 ‘백산’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



’에서 유래한 것인데,

소백산은 여러 백산 가운데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어온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 3국의

국경을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으며,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이라서 많은 사람을 살릴 산이다.

 

” 조선 중종 때의 천문지리학자인 남사고가 이렇게 말한 소백산(小白山)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1568미터)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대간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440미터에 이르며, 북동쪽에 국망봉(1421미터)이 있어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이른바 고위평탄면을 이루며,

그 위를 국망천이 흘러 남한강에 유입된다. 동남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급하다.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이 발원한다.

소백산 일대는 예로부터 산삼을 비롯하여 많은 약초가 자라 지금도 약초 채취가 활발하며,

풍기는 이들 약초의 집산지이자 풍기 인삼으로 이름난 곳이다.

 

소백산 일대는 웅장한 산악 경관과 천연의 삼림, 사찰, 폭포가 많으며 주변에

부석사나 온달산성 등의 명승고적이 많아 1987년 12월에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 면적이 320.5제곱킬로미터로 경상북도 영주시ㆍ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다.

공원 내에는 희방사ㆍ부석사ㆍ보국사ㆍ초암사ㆍ구인사ㆍ비로사ㆍ성혈사 등 여러 사찰과 암자가 있다.

특히 나라 안에 제일가는 절로 평가받는 부석사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소백산 기슭에 자리한 희방폭포는 소백산의 정봉인 비로봉으로 등정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높이 28미터로 내륙에서는 가장 큰 규모인 희방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에는 숲과 그늘과

 괴암이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폭포 바로 위에는 선덕여왕 12년에 두운대사이

 창건한 희방사가 자리한다. 다음은 『택리지』의 기록이다.

비로봉 정상에서 사진 몇커트를 카메라를 담느라 오른쪽  장갑을 벗었더니만

손이 그냥 굳어 버렸다... 그 사이 동료 산꾼들은 국망봉으로 가버리고...

서둘러 나도 눈이 너무 쌓여 구분이 안되는 계단을 따라 가는데 바람에

몸뚱아리가 밀려서  걸을 수가 없다... 계단 아래로 내려서는데 먼저가던

노루님이 내 코에 고드름이 달렸다고 하여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는데

진짜 내 코에 고드름이 달려 있고 코가 노랗게 되어 버렸다.

노루님이 준 마스크를 쓰고 걷는데 코는 자꾸만 부어 오르는 느낌이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대간길을 러셀을 하면서 걸으니 시간은 지체되고...

뒤돌아 본 비로봉의 모습

울 산악회의 아이돌 키즈 - 주원아빠

참으로 보면 볼수록 기특하기만 하다

가야할 국망봉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멋진 상고대 사이로 대간길을 이어가는데 남이 보면 정말 멋진 설경이지만

지금 이곳을 걷는 동료 산꾼들은 추위와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바람의 영향으로 눈이 능선으로 몰리면서 많이 쌓인곳은 숏다리인 범여에겐

허리까지 차오르는 곳도 있는데 북진 때는 물론 여름이긴 했지만 국망봉까지

3.1km를 1시간이 채 걸리질 않았는데 지금은 1km를 1시간도 더 걸리고 있다.

어의곡리 갈림길(10:15)

 

대간 등로는 전혀 보이질 않고... 비로봉에서 부터는 아예 누구도 가질 않아서

우리팀들이 러셀을 하면서 걸어야하니 시간은 자꾸만 지체되어 맘이 급해진다.

선두에 대장과 노루님이 러셀을 하는 길을 따라가기 미안해 내가 잠시

선두에 서서 러셀을 하는데 어떤곳은 허리까지 빠지는 바람에 숏다리의

비애를 느끼면서 뒤따라오는 노루님에게 양보를 하는데 상당히 미안하다.

러셀의 어려움을 알기에... 노루님 복받을 겨

개척자의 심정으로 힘들게 등로를 개척해서 걸어간다.

소백산 비로폭포 계곡의 모습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백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로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이르는 소백산은 총 면적이 320.5km에 달하는

큰 산맥을 이루며 1000m 고봉이 줄지어 있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소백산은 봄에는 철쭉꽃이 만개하는 5월말에서 6월초까지 온 산이

천상의 화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연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겨울철에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은 지역이라 은백의 능선에 정신줄을 놓을 정도다.

소백산은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 볼거리도 많은 지역이다.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인 영주시 방면에는 부석사를 비롯하여 소수서원,비로사,희방사 등이 있고,

서쪽과 북쪽에는 고수동굴,노동굴,천동굴과 구인사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던 온달성이 잡고 있다.

비로봉 정상에서 서북쪽 기슭에는 살아 천년,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된 주목군락이 자리잡고 있다.

 

이중환의 “방사 남사고(南師古,조선 명종때 학자, 호;격암)가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절하며 말하기를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라고 말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이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소백산을 오른 기록이 상세하게 산행 일정을 전하고 있다.

퇴계의 전임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周世鵬)도 소백산을 올랐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은 순흥의 백운동서원(신재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서원으로 뒤에 퇴계가 명종으로부터 백운동서원이란 액자를 받았다)을 출발하여

지금의 배점리를 거쳐 죽계계곡을 따라 석륜사,중백운암을 경유하여 국망봉에 올랐다.

국망봉 위에서 술 석잔을 마시고 시 일곱장을 쓰고 나서 해가 기울어 중백운암에서 묵고 다음날 하산하였다고 한다.

 

소백산 북릉인 신선봉(1272m)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려간 능선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며 아홉개의 능선에 여덟 골짜기를 만들어 낸 곳을 구봉팔문이라 부른다.

제 3관문봉과 제4관문봉 사이 골짜기인 여생이문 안 아래쪽에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의 산행 들머리는 일곱군데로 단양 방면에는 구인사코스,어의곡리코스,천동리코스가

있으며,영주시 방면에는 죽령코스와 희방사코스,비로사코스,배점리코스가 있다.

비로봉 넘어 국망봉도 쉬어가며 역사의 무상함을 돌아볼 만한 봉우리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이곳에 올라 옛 도읍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백순’이라는 대장장이가 이곳에서

선조 임금과 퇴계 이황 선생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내가 조금전 걸었던 비로봉을 뒤돌아보니 설경은 환상 그 자체이다.

우측에 멋진 암릉을 끼고 올라서니 초암사 갈림길이 나온다.

초암사 갈림길 이정표(11:25)

비로봉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정상적인 산행으로 하면 1시간정도 걸리는데

폭설로 인하여 2시간 30분이 넘게 걸리는 바람에 이곳에서 고치령까지 남은 거리가

11.4km 거기다가 고치령에서 좌석리까지 6여km... 더 이상 산행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산행대장이 국망봉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초암사 방면으로

탈출을 하자고 한다... 백번 잘한 결정이다. 오늘같이 추운 날에는 15시 이전에

산행을 완료해야 하는데 현재 상태라면 남은 거리를 10시간 이내 가기 힘이들 것 같다.

그래도 국망봉을 들렸다가 되돌아 오기로 하고 0.3km 지점에 있는 국망봉으로 향한다.

국망봉(國望峰·1,420.8m:11:40)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걸쳐 있으며, 비로봉 다음으로

높은 고봉이며 남서쪽으로 연화봉, 북동쪽으로는 형제봉에 이어진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왕건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허사로 끝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 벌만을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이름)으로 들어갔다 한다.

개골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국망봉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국망봉과 제2 연화봉 주변 외진 곳에서 희귀식물인

복주머니란이 몸을 감추고 자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지도서』(영춘)에 의하면, "소백산 이현의 동면 40리에 있으며, 강원도 강릉부

오대산에 이르고, 경상도 순흥과 접해 있으며, 국망봉이 소백의 최정상이다."고 수록하고 있다.

국망봉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해동지도』에는 영춘현 남쪽 남천의 상류에 소백산,

남천사(南川寺)와 함께 '국망산(國望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단양군의

가곡면과 영주군의 순흥면에 걸쳐 있는 국망봉(1,420m)으로 수록되어 있다.

국망봉 정상에서 알카에다(?) 모습의 범여

4년전 국망봉의 여름 모습

국망봉에서 바라본 상월봉의 모습

더 이상을 대간길을 진행할 수 없어 맞은편 상월봉을 바라보며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초암사 삼거리로 철수(?)를 한다

국망봉에서 초암사 갈림길로 되돌아가는 동료 산꾼들

아쉬움 마음을 접고 초암사 갈림길 삼거리로 내려와 초암사로 향하는데

오늘 처음 신고온 등산화가 속이 썩이는 바람에 발목이 아파 미치겠다.

이래저래 범여의 몸뚱아리는 쥔장 잘못만난 탓에 수난을 당하는구나

초암사 삼거리 갈림길의 소백산 안내판

소백산은 1987년 12월 14일, 우리나라의 1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초암사 갈림길에서 초암사를 지나 주차장까지는 8km가 넘는 거리라 탈출도 만만찮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길은 상당히 미끄럽고

더군더나 등산화의 아픈 부위가 오르막은 모르겠는데 내리막은 상당히 아프다.

초암사 갈림길에서 900m 를 내려오니 돼지바위를 만난다.

돼지바위(12:25)

돼지바위 유래

국망봉 아래 초암사 내려가는 길에는 소백산을  지켜주는 산신령과 같이 환하게 웃는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높이 3m,길이 5m,폭 2m 크기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마치 돼지형사을 하고 있다고 하여 '돼지바위' 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바위를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모든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네들이 와서 소원을 빌어 자식을 얻는다는 입소문이 퍼져서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입시철이 되면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이 많이 찾아와서

자녀들의 일류대학을 기원하는 행렬이 줄을  잇기도 한다.

또한 새해 첫날에는 한 해의 운수대통을 기원하는 사람들은 꼭 이 돼지바위를 찾아와서

소원을 비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돼지해에 돼지띠 사람들이 이 바위를 찾아와서 소원을  빌면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봉바위(鳳岩:12:25)

봉바위의 유래

국망봉 아래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석륜암 터 바로 뒤편에 하늘을 날려고 하는

높이 18m 크기의 기이한 바위가 있는데,이 바위가 마치 거대한 봉황(鳳凰)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하여 '봉바위'라 불러 오고 있다.

예로부터 봉황은 신성시 했던 상상의 새로서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성서롭고 아름다운 새로 알려져 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바위 아래 신라시대 석륜암이;라는 고찰이 있어 절을 찾아온 신도들이 신성시하는

봉바위 앞에서 정성을 다하여 주야 기도를 하면 바라는 소원이 꼭 이루어졌다고 한다.

근래에 와서는 국망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이 바위를 찾아 옛 전설을 생각하며

소망을 기원하는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이 바위 아래에 솟아나는 샘물로

목을 축이며 잠시 진친 다리를 쉬어가기도 한다.

석륜암 寺地 바로 옆에는 소백산 낙동강 발원지라는 표시석이서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죽계천 발원지가 맞을듯 싶다

석륜암터 사지 이정표

죽계천의 물길이 시작되는 곳

8km가 넘는 계곡을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아픈 부위가 퉁퉁 부어올라 그냥

주저안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동료산꾼들에게 민폐를 끼칠것 같아 이를 악물고 걷는다

초암사 0.3km가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멋진 詩가 서각되어 있는 표지판을 지나니 담장이 없는 초암사가 나온다.

초암사 대적광전(13:50)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세우고자 산수 좋은 이 곳에 초막을 지어서 거처를 정하고

명당자리를 골라 부석사를 세운 뒤 초막을 지었던 곳에 절을 지어 초암사라 했다.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6.25사변 후 다시 지어

현재 경상붇도 유형문화재인 3층석탑과 동부도, 서부도 등을 소장하고 있다.

 

초암사는 6.25의 병화를 맞아 쇠락해 있던 것을 이보은 스님의 각고의 노력끝에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도유형문화재인 3층석탑 등이 있다.

초암사는 소백산의 그윽한 정취 속에 깃든 청정도량으로,

세속의 잡다한 생각을 버리게 하고 고요한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초암사(草庵寺) 전경

초암사의 가람 형태는 좀 특이하다.

대체적으로 주불을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곳은 대웅전이고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곳은 대적광전인데 이곳은 가람의 맨 윗쪽에는

대적광전이 있고 조금 아래에는 대웅전이 있다.

이 가람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의상대사 창건한 화엄십찰에는

한결같이 대적광전에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셔져 있는데 이곳은 대웅전이

따로 있는 형태가 좀 특이하다... 나중에 시간나면 알아봐야겠다.

초암사 대웅전

초암사 대웅전내 석가모니불

초암사 삼층석탑(경상북도 도문화재 제126호)

초암사 서부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

서부도(西浮屠)는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요사 앞에 있다.

높이 200㎝로 1979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상중하의 세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 위로 탑신을 올렸는데,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지대석을 제외한 각 부분이 전부 팔각형을 이룬다.

지대석과 같은 돌로 이루어진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팔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각 면마다 안상(眼像)을 새겼다.

 

상대석은 아래와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둘러 장식하여 놓았다.

탑신석은 팔각형 기둥 모양이고, 옥개석은 밑면에 얕고 넓은 홈을 두었으며,

각 면 모서리의 치켜 올림이 경쾌하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꽃봉오리 모양을 얹었다.

고려시대의 부도로 보이지만,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동부도보다 나중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초암사 동부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요사 앞에 있는 동부도(東浮屠)는 1979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부도에 아무런 명문이 없고 탑비도 없어 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없으나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상중하의 세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 위로 탑신을 올렸는데, 지대석을 제외한 각 부재가 전부 팔각이다.

 

지대석은 각 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하대석은 팔면의 각 면마다 연꽃무늬를 조각하였고, 윗면에 3단의 괴임을 두어 윗돌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팔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둥글넓적한 상대석에는 연꽃무늬를 둘러 장식하였다.

탑신석은 8면 중 4곳에 문비(門扉)를 새겼고, 그 안에 자물쇠를 돋을새김 하였다.

옥개석은 경사면 끝을 따라 선을 조각했고, 윗면에 연꽃잎을 둘러 새겼다. 현재 높이는 200㎝이다.

죽계1교(14:00)

초암사를 이리저리 둘러본 다음에 신발을 벗기 싫어서 가람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죽계1교 다리를 건너니 앞선가던 동료산꾼들이 나를 기다린다.

이곳에서부터 포장도로에다가 눈이 없어서 아이젠을 벗고 스틱을 접은 다음

과일과 빵 한조각으로 허기를 면한 다음에 다시 4km 가까이나 되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詩가 서각되어 있는 표지판을 지나고...

죽계구곡(竹溪九曲)

경북 영주시 순흥리 배점리 초암사 인근에서 부터 시작되는 계곡으로

고려후기의 명현이자,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이며,

이퇴계와 주세붕 등 조선시대 유현들이 유상하던 자취들이있어 잘 알려진 계곡이다.

 

죽계구곡은 초암사 앞에서 제1곡으로 시작되어, 시냇물을 따라내려 삼괴정을

못미쳐있는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5리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이 죽계구곡은 영조초에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가 처음 정한 바인데

옛 초암법당 앞 바위벽에 “죽계1곡(竹溪一曲)”이라 커다랗게 새겨있고,

시냇물이 넓게 고여 흐르는 물밑 반석에 행서로 세겨진 “제일수석(第一水石)”

4자는 아주 힘차고 활달한 글씨인데 오랜 세월에 갈려 겨우 알아볼 지경이다.

 

계곡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 울창한 푸르른 숲, 그사이로 보이는 하얀 바위들,

이들이 모여 빚어놓은 죽계구곡은 어느지점에서든지 주저앉아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중국 주자학의 창시자 주자에게 무이산이 있다면,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에게는 죽계천이 있다.

그래서 조선의 많은 선비들은 소수서원과 죽계구곡이 있는 이곳을 성리학의 성지처럼 여겼다고 한다.

 

경북 풍기 쪽에 있는 국립공원 소백산에 고려말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

음 도입한 안향(安珦)선생의 호를 따서 붙인 죽계(竹溪)계곡이 흐른다.

소백산 죽계계곡은 국망봉 아래의 석륜암(石崙庵)골과 비로봉 아래의

하가동(下伽洞) 달밭골이 초암사(草庵寺) 지점에서 합류하여

아홉 곳의 비경을 만들면서 소수서원 백운동계곡까지 흘러내린다.

죽계구곡은 고려시대 안축(安軸) 선생이 읊은 경기체가《죽계별곡》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 선생도 노리었다.

죽계구곡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여러 말이 있지만 조선 명종 때 풍기군수로 와 있던

퇴계(退溪) 이황(李愰) 선생이 붙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초암골에서 흘러내리는 수정 같이 맑은 계곡물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하게

 생긴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을 감아돌며 우당탕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굽이쳐 흘러내린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의 으슥한 산굽이마다 낮은 높이의 단안(斷岸)이 있어서

흐르던 물들이 이곳에서 작은 폭포를 이르며 떨어진다.

 

그리고 폭포의 물줄기가 밑의 용소(龍沼)로 떨어질 때면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보라가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무지개를 피워낸다.

퇴계 선생은 이러한 죽계계곡의 아름다움을 중국 남송(南宋) 때 주자(朱子)가

붙였다고 하는 푸젠성(福建省)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비유하여 죽계구곡의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배순(裵純)의 대장간이 있었던 자리

배순이란 분은 500여년 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 와서  대장간을 차려놓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 양심적으로 수요자에게 공급하였으며 행실이 착하고 특히

어버이에게 효도가 지극하였고 조상을 모시는 정성도 지극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이 근방에 소수서원을 창건할 때이라 모든 철물을 이 분이 정성껏

공급하므로 상인들이나 유림사회에서 칭찬이 자자해서 퇴계 선생이

이 사람을 직접 불러  격려를 하엿다고 한다

퇴계선생이 돌아 가시니 쇳곳으로  상을 만들어 삼년복을 입었으며 

선조대왕이 붕어(崩御)하시자 매삭망(每朔望)에 정성껏  장만한

음식으로 뒷산에 올라 북쪽 궁성을 향해  곡제사를 3년동안 지냈다고 한다. 

 

그 슬픈 소리가 궁안까지 들리어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고 하며

그가 음식을 들고 산에 오를때 밟은 바위에 아직도 나막신 자국이 남아 있으며

궁성을 향해서 곡(哭)을 했다는 봉우리를 국망봉이라 불렀다.

또 배순의 대장간이 있었던 이곳은 관명(官名)이 평장동이었으나

모두들 배점(裵店)이라 부르는 바람에 지금은 이 마을 이름이 배점리이다.

배순의 대장간이 있었다는 배점리 마을의 모습(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재)

잠시후에 배점리 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배점리 주차장(14:50)

이곳 주차장에서 지난번 샤워를 했던 부석사 입구 목욕탕에서 육부능선님이

동료산꾼 전체를 목욕시켜주는 바람에 깔끔하고 목욕을 하고 식당으로 향한다

오늘의 산행 기록(육부능선님 자료 인용)

순흥면 묵밥집

기사분이 추천한 묵밥집에 들려서 묵밥에다가  동동주 한잔에 힘든 산행의

모든것을  씻어 내리는데 이곳 식대는 대간길에 2번 참석하신 광효님께서

스폰서 하시겠단다... 육부능선님. 광효님 고맙습니다

2분의 스폰서 해준 덕분에 의관정제하고 식사를 마친 다음에 서울오는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문막 휴게소에서 잠을 깬다.

그리고 또다시 양재지맥에서 멤버들과 생맥주 500cc 3잔씩 마시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