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인 弘益人間 을 생각하며 태백산의 능선을 걷다
☞ 산행일자: 2013년 10월 26일~27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약간 추운날씨에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24.5km / 9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7명과 함께
☞ 산행코스: 화방재-사길령-산령각-1,174봉-유일사쉼터-주목군락지
장군봉(장군단)-천왕단-하단-문수봉 갈림길-부소봉-깃대기봉-1174m봉
차돌배기삼거리-신선봉-헬기장-곰넘이재-고직령-구룡산-1256m봉
상금정갈림길-헬기장-920m봉-도래기재
☞ 소 재 지: 강원도 태백시 혈동,소도동 / 영월군 상동읍 / 경북 봉화군 석포면, 소천면, 춘양면
지난 10월 중순에 영남알프스 산행때 무리한 탓인지 그때부터 장염 증세로 고생을 하다가
조금 호전되는 듯 싶던 증세가 엊그제 감악지맥에서 마신 생맥주 때문에 증상이 도지는
바람에 다시 고생을 하여 오늘은 대간길이 조금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가야지...
토욜 저녁부터 내리는 비는 차를 타러가는 길에도 겨울 비치고는 많이온다.
버스에 오르니 오늘은 예전에 만났던 동료들이 많이 빠지는 바람에 적은 인원으로 출발을 하여
원주에 있는 중앙고속도로 치악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버스기사분이 내비게이션만
믿고 운행을 하다가 길을 잘못들어서 새벽 4시 40분경에 들머리인 화방재에 도착을 하니
다행히 비는 그치고 하늘엔 총명한 별이 보이기 시작하여 우중산행을 안하는데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강원도답게 차가운 바람이 세차기는 하지만 그래도 산행하기는 좋은 날씨이다.
장비를 점검하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04시 55분에 화방재에서 들머리로 접어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태백산 주변을 나타낸 대동여지도
천년병화 불입지지(千年兵禍 不入之地)라는 이상향, 태백 160리. 태백(太白)은 정감록에 '이상향'으로
지목될 만큼 첩첩산중의 고원에 자리잡은 곳으로, 사실 내륙지방에서 백두대간을 넘지 않고서는 그곳을 갈 수가 없다.
현재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탄광지대에서 화려한 카지노 업계를 유치하여 경제적 발전을 꾀하고자 애쓰는
태백과 사북, 고한, 정선 지역 주민들의 고난과 모순이 길거리에서도 역력하게 보인다.
태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제 1의 광도(鑛都)이다.
일제 무렵,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조선총독부 보유 탄전의 광업권을 인수하여 장성의 석탄을 캐낸 것이 탄광의 시작이다.
태백의 연감을 들추어보니 1981년의 광부 수가 무려 19,375명에 달했다 한다.
집계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치면 2만 명을 훨씬 웃돌았다. 1987년 태백의 석탄 생산량은 640만 톤이나 되어
전국 생산량의 30%에 이르렀다. ‘지나는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태백에 시가지가 형성되고 1981년 장성·황지읍이 삼척군에서 갈라져 나와 태백시로 승격된 것은 오로지 탄광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이제 흉물스럽게 버려진 탄광과 빈집을 뒤로 한 채 저마다 진폐를 쿨룩이며 대처로 떠난 광부들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또한 시내 중심부의 연화산 자락에 세워진 산업전사위령탑에는, 광산에서 일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광산노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화방재(花房嶺:936m:04:55)
'꽃방석 고개'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화방재(花房嶺)는 일명 '어평재(御平嶺)'라고도 하는데,
영월에서 태백으로 통하는 태백의 중요한 관문으로 고갯마루에는 어평주유소가 있고, 어평휴게소,
작은 식당 등이 한 건물에 연이어 있고, 2층엔 민박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대간꾼을 위한 휴게소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있는데 옛 이름은 어평재로 영월에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영혼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에 태백산 서쪽 기슭의 어평에 이르러 ‘이곳부터 내 땅(어평=御坪)’이라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지명이이란다.
고개 마루에 진달래, 철쭉이 무성하기에 화방재(花房嶺)라고 하였다.
화방재를 예전에는 정거리재라고도 했다. 31번 국도가 지나며 이곳 주민들은 어평재라 부른다.
화방재 들머리
비가 많이 온 탓이라 초반부터 옷이 젖을까 싶어서 등산화에 비닐을 감고 비를 맞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그건 기우였다. 넓은 등로라 아무런 걱정없이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산행을 시작한다.
4년전 북진길에는 배추밭 가운데로 지나간 기억이 있는데 하도 대간꾼들이
자기 밭 가운데로 다니니 쥔장이 양보를 했는지 아님 태백시에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배추밭 가운로 반듯한 길을 만들어서 미안한 감정없이 밭을 지나니 넓은 도로가 나온다.
백두대간 북진길때의 모습( 2009.09.06)
사길령(四吉嶺:05:05)
강원도 태백시 혈동과 영월군 상동읍을 넘는 태백산 북쪽 백두대간 등로에 위치한
옛날 경상도로 통하던 고갯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태백산 꼭대기로 나있는 천령(天嶺)
길을 통해 왕래하였으나 길이 높고 험하여 고려시대에 와서는 지금의 사길령으로 새로이
길을 내면서 새길령이라 했다. 사길령은 교통의 요지로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이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산령각을 짓고 태백산령께 제례를 올렸으며, 지금까지 매년 음력 4월15일이
되면 산령제를 통해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제사하고 있다.
사길령은 옛날 강원도와 경상도로 통하는 큰 길이 있었으나 길이 불편해서 고려시대 때
새로운 길을 뚫었다고 전해진다. 이름도 새로 길을 뚫었기 때문에 ‘새길’이라고 했다.
이곳 샛길재에서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장사하던 보부상들에 의하여 건립된 산령각에서
매년 제사를 지낸 것에서 유래됐다. 사길령 산령제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고갯마루에 도적이 성행, 범이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것도 비일비재하여 고갯마루에
산령각을 짓고 안전을 기원했던 곳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사길령 매표소
한반도 지도를 보면 백두산부터 남으로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은 태백에서 둥지를 틀 듯하면서 서쪽으로 꺾인다.
풍수지리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날머리 화방재(花房)는 태백시 혈동(穴洞)에 속하는데 바로
백두대간의 혈(穴)에 속하는 곳이 태백산이다. 태백과 소백은 양백(兩白)이라 하여 신성한 순백색으로 표상되는
정신적인 정기의 합류처라고 한다. 경북 북부지방의 유교적 토양과 태백산 천제단으로 상징되는 도교의
융합이라고 할지. 그런데 유교와 도교가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으로 나타났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길령을 지나 태백산으로 오르는 길은 고속도로 수준의 길이다.
이곳은 겨울에 雪산행으로 유명한 곳이라 등로가 엄청넓다.
사길령에서 15분정도 짙은 안개가 자욱한 도로를 걸어 올라오니
조선시대 비운의 왕이였던 단종과 보부상의 哀歡이 서려있는 산령각을 만난다.
태백산 산령각(山靈閣:05:15)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하기로 유명하였지만 가장 가깝게
강원도로 들어올수 있는 곳이 기에 길손의 왕래가 많았고,특히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명씩 대열을 이루어 계수의 인솔하에 넘어 다녔다.산이 험하며 맹수와 산적등이 많이
출몰하기에 그들은 고갯길의 무사 안전을 위하여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5일 태백산신령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 영월 땅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대왕이 사후 그 혼령이 되어
태백산의 산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새길재(또는 사길령) 산령각의 신위는
다른 산령각의 신위와 다르게 단종대왕이라고 하여 산령각 내부에는 백마를
탄 어린 임금이 그려진 탱화가 안치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계회에 보관중인 천금록은 200여년 전 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태백산 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산령각 이정표
이정표에서 고속도로같은 넓은도로를 버리고 본격적인 대간길로 접어든다.
산 능선의 결절지는 문화와 역사를 구분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태백산권역을 기점으로 영동과 영서, 그리고 영남지방으로 나눠지는 것이다.
태백산과 화방재 사이에 있는 사갈령(치)이 영남과 영서를 구분하는 고갯길이다.
또한 피재(삼수령)는 낙동강 유역권과 한강 유역권, 영동의 동해안 유역권으로 나누는 지점이다
산 아래에는 불지 않던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짙은 안개가 밀려온다.
山竹길에 젖은 낙엽이 스펀지 역할을 하며 다리를 편하게 해주긴 하지만
상당히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걷는데 앞서 도망가던(?) 김포오야지님을 만난다.
늘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같은 느낌을 주는 김포오야지님...
항상 수하(?) 대여섯명과 산행을 하던 분이 요즘은 한두명씩 이탈을 하더니만
오늘 3명이나 이탈(?)을 하였다. 권력누수 현상이 생기는지 얼굴에 근심이 많아 보인다.
오야지님 너무 걱정하지마소... 세상사가 다 그런거 아니요 ㅋㅋㅋ
그래서 우두머리는 항상 힘들고 고독한 자리요.
유일사 갈림길(05:40)
어둠속 등로에서 만난 낙타등처럼 생긴 나무
유일사 쉼터(05:55)
다시 천제단으로 오르는 넓은 도로를 만나는데 이곳은 유일사 매표소에서
올라오는 길로서 이곳은 쉼터와 이통통신 중계기지 그리고 쉼터 우측 아래에
있는 유일사로 물자를 반입하는 곤도라가 설치되어 있다.
유일사 쉼터 이정표
유일사 무량수전(사진 - 펌)
유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로서 태백산의 백두대간 길
유일사 쉼터 아래에 있는 사찰로서 창건 유래를 보면 태백산 백단사에서 이소선이 백일기도중
사찰을 창건하라는 부처님의 현몽을 받고 1959년 4월에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유래는
더 이상 검색되지 않는다. 태백지역의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선두 그룹과 조우를 하여 물한금을 마시고 잠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선두들은 짙은 안개사이로 사라져 버리고 우리도 곧 출발한다
망경사 갈림길(06:30)
어둠속에 짙은 안개를 헤치며 30분정도를 올라오니 망경사 갈림길을 만난다.
해가 많이 짧아진 탓인지 아직도 날은 밝아오질 않고 바람만 세차게 분다.
망경사에서 올라오는 남.녀 대여섯명을 만나는데 등산복 차림에 베낭을
매긴 했지만 우리처럼 맛이 간(?) 대간꾼은 아닌것 같고 일반 등산객이
이른 새벽에 올라올 리는 만무한 걸로 보아 아마 태백산 정상에 기도하러
가는 무속인들처럼 보인다... 잠시후에 태백산 정상 장군봉에 도착한다
태백산 장군봉(太白山 將軍峰:1567m:06:40)
태백산의 정상인 장군봉 장군단에 도착하니 매서운 바람이 귓가를 때리며
상당히 춥다. 먼저온 동료산꾼들은 제단 안으로 추위를 피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료산꾼 노루님이 지리산까지 무사 안녕의 기원을 빌고있다.
장군봉 정상석 앞에서 어둠속에서 인증샷을 남기는데 똑딱이 카메라의
한계 때문에 사진다운 사진을 찍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천왕단으로 향한다
천제단 중 가장 위에 있는 장군봉의 장군단
장군단은 남쪽에 계단이 있는 석단으로 천왕단과 거의 비슷한데 천왕단 상부에 있는 4각 제단이나 비석 등은 없다.
천왕단 남쪽의 숲 속에 위치한 단은 특별히 지칭하는 이름이 없고 소박한 인상을 풍기는 단아한 제단이다.
제단을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족국가시대부터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시대까지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고 그 의식이 아직도 이어져 매년 개천절에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의 태평과 안정, 번영을 기원하는 동제의 장소로 이어지고 있다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장군(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백산은 신라의 삼산오악 중 북악에 속하는 산으로 신령시 하여 주산으로 삼고 왕들이
이 곳에 올라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 일대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산다는 주목 군락지다
태백산 정상 장군봉의 장군단의 모습(2009.09.06 :백두대간 북진 때)
천제단(天祭壇)은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3기의 제단 가운데 하나로, 장군단과
하단의 중간에 있는 해발 1,560m의 봉우리에 위치한 중심 제단이다. 천제단은 규모 면에서
여느 단과 달리 월등히 크며, 아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태백천왕당(太伯天王堂)·
신사(神祠)·태백산사(太白山祠)·천왕당(天王堂)·태백신사(太白神祠)·태백사(太白祠)·천왕사(天王祠)·
태백당(太白堂)·구령탑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태백천왕당·천왕당·천왕사·구령탑이라는 명칭은 모시는 신령(神靈)을 모두 천신(天神)·천왕(天王)으로 보는 호칭이며,
구령탑은 천(天)의 9개 분야(分野)인 구천(九天)에서 유래한다. 신사(神祠)·태백산사(太白山祠)·태백신사(太白神祠)·
태백사(太白祠)는 태백산의 신령을 위하는 사당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후대에 일부에서 부르는
마고탑은 태초(太初)에 천지를 이룩한 거인 할머니가 쌓은 탑이라는 의미로서 천지가 시작된 공간임을 암시한다.
1736년에 쓴 이인상(李麟祥)의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에 당시 태백산 천왕당(天王堂)에 대하여 소개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신앙사전(마을신앙 편) 인용
천제단 천왕단(天祭壇 天王壇:06:50)
태백산 정상 천제단 천왕단에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 이란다
태백산 천제단에 붉은 글씨로 씌어있는 한배검은 단군의 다른 말이다
《삼국사기》에 왕이 직접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때
오악(五嶽) 중 북악인 태백산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때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고,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군들이 제사를 지낸 역사적인 장소로,
1991년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태백시에서는 매년 개천절에 태백제를 개최하고, 천제를 올리고 있다.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3기의 제단이다.
태백산은『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신산(神山)으로 섬겨져 제천의식의 장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천제단 역시 이런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 약 300m 떨어진 곳에 장군단과 남쪽 아래에 있는
이름없는 제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상에 배열되어 있다.
천왕단은 2m 남짓한 높이로 자연석을 쌓아 남쪽으로 계단을 조성한 원형제단이다.
그 위에 4각 시멘트제단과 대종교에서 단군을 모신 장소로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세운 것으로 알려진 비석이 있다.
1949년 조사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석단이 9층을 이루었기 때문에 ‘구단탑’이라고 하였으며
중앙에 태극기를 꽂고, 그 주위에 무속신들을 상징하는 각종 기를 세웠다고 한다.
이 세 개의 단이 삼제사상에 기초해 있으며 즉 하늘의 뜻을 받들고 땅(자연)을 경외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태백산은 백두대간이 상징하고 있는
생명사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생과 조화로운 삶을 향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이다
2009년 9월 6일 백두대간 북진때의 사진-술한잔 부어놓고 예를 올렸다.
우리 산악회의 가장 막내인 주원아빠가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가슴으로 와닿는다... 우리 아들뻘 되는 친구. 지금쯤 색시의 팔베개를
배고 깊은 잠에 빠져있을 나이에 같이 대간길을 걷고 있다는 자체가
범여에게는 정말 기특하고 장하게만 보인다.
요즘 젊은이들! 정말 얄미울 정도로 영악하고 이기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산을 닮아가서 그런지 늘 예의 바르고 성실한 모습, 요즘 젊은이와 확연히 구분된다.
그래 산만큼 훌륭한 스승은 없다네... 항시 남을 배려하고 포용할 수 있는
무한의 힘을 가진 어머님의 가슴만큼이나 포근한 게 산이라네.
부디 건강하고 내년엔 그대가 원하는 모든게 이뤄지길 범여도 기도해 주겠네그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氣가 센 곳이니 많은 기를 받고 가시게나
태백산(太白山)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에 있는 산으로 주봉은 장군봉(1,567m)이다.
태백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태초에 하늘나라 환인의 아들인 환웅천황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척부 서쪽 120리에 있다.
신라 때는 북악(北岳)이라 하여 중사(中祀)에 기재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
태백산을 비롯하여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중앙의 팔공산이 오악(五岳)에 해당한다.
태백산은 백두산으로부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그리고 청옥산과 두타산을 지나며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의 맥이 크게 용트림한 산으로 다른 산들과 달리 태백산의 주능선 일대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평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부드러운 능선으로
마치 하늘과 자연과 사람의 조화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부드러움과 조화로움이 흐르는 영봉 정상의 한 가운데 천제단(天際檀)이 있으며
이곳에서 우리 민족은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은 "태백산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은 우리 민족의 이름이 된 산으로 태백산(太白山)은 '크게 밝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크게 밝은 산'의 순우리말은 '한밝뫼' 또는 '한밝달'로 '한밝달'이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 지내던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고
부르며 숭앙했는데. '밝은 산' 중에서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이다.
망경사와 용정으로 가는 길(06:55)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망경사와 물맛 좋기로 유명한 용정(龍井)과
단종비각과 석탄박물관이 있는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로서 겨울산행
길의 단골코스이기도 한곳이다... 두어번 걸었던 길이다.
만경사 가는 지도
만경사(사진 - 펌)
만경사는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 아래에 있는 산으로
태백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일자형으로 지어진 산사가 독특하며 신라 진덕여왕 6년 태백산 정암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석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암자로서
사찰 앞에는 물맛 좋기로 유명한 용정과 그 옆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용정(龍井: 사진 펌 )
하늘아래 첫 샘물 "태백산 용정(太白山 龍井)"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샘물이자 가장 맛있는 물로 명성이 나있는 명수다.
땅속에서 쉬고 있던 용이 하늘로 오른 자리에 물이 솟았다하여 용정이라 하고
이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태백산 천제단 바로 밑 9부 능선인 해발 1470m에서 솟는 용정은 가뭄, 홍수 등
기상여건이나 계절 변화에도 수량이 변하지 않는 신비한 샘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동해 바닷물과 연결된 성스러운 물길로 용왕국과 연결돼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용정의 물은 매년 10월 3일 개천절이면 천제단(天祭壇)에서 지내는
천제(天祭)의 제수(祭水)로 이 물을 올리고 있다.
샘에다 용각(龍閣)을 짓고 용신(龍神)에 제(祭) 올리어 용정(龍井)이라 부른다
단종비각(端宗碑閣)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열일곱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은 조선 6대왕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각 안 비석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고 적혀 있다.
단종이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옆에는 ‘단종애사(端宗哀史)’를 기억하게 하는 ‘단종비각’이 세워져 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은 조선 6대왕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각 안 비석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고 적혀 있다.
이곳에선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단종이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영월에 유배오자 호장이 태백산의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하였는데
어느 날 진상차 영월로 가는 도중 곤룡포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자 나는 태백산으로 가느니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호장이 영월 땅에 도착해 보니 단종이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부터 단종이 승하한 뒤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해지게 되었고 그 후 주민들이 의논하여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산신령으로 모시기로 하여 매년 음력 9월3일 제를 지내고 있다.
비각 내에 안치된 비석의 전면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 각자하였다.
비각의 전면에는 “단종비각”(端宗碑閣)이라 쓴 현판이 걸렸으며 탄허스님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태백산 정상에서 어둠속에서 이곳 저곳을 두루보고 나니
너무추워 더 이상 머물기가 힘이들어 서둘러 부소봉으로 내려간다.
잠시후에 천제단 하단(下壇)에 도착한다.
천제단 하단(下壇:07:00)
천제단의 중심인 천왕단에서 300m 정도 아래에 있으며 땅(地神)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는데 장군단과 천왕단보다는 규모가 보잘것 없다.
장군단,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을 통틀어 “천제단”이라 한다
하단 바로 아래에는 통정대부 병조참판을 지낸 밀양박공의 묘소가 있고...
문수봉 갈림길(07:05)
옛 지도에는 이 갈림길 위에 있는 부소봉이 당연히 대간길에 있건만
어찌된 건지 이곳 이정표에는 대간을 부소봉으로 향하지 않고 능선
옆사면 우측으로 만들어 놓아 동료 산꾼들은 다들 우측으로 가버렸다.
마지막으로 가는 일행이 부소봉으로 가겠다고 좌측 문수봉으로 향하니
같이 동행한 대장이 엄청나게 눈치를 주는데 봐야 할 것은 보는게
이 범여의 특성을 아는터라 대장이 강력하게 제지는 못하고 “행님아!
선두들이 아침밥 먹는데 그냥 우측으로 가자”는 하지만 한사코 가버리니
똥밟은 기분으로 내를 따라 오는데 조금은 미안하다.
국내 최대 주목 군락지(07:08)
민족의 영산 태백산(해발 1567m)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목 군락지다
아름다운 설경을 배경으로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 제자리를 지킨다는 주목(朱木)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벅찬 감동이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2800여 그루의 주목이 서식하는 곳이다.
주목 군락지에 올라서면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장관이 펼쳐지는 곳인데
오늘은 짙은 어둠과 박무로 인해 제대로 보지 못하고 태백산을 떠나는게 두고두고 아쉽다.
짙은 박무속에 일출이 보이다가 금방 안개에 가려 버린다.
거기다가 문수봉이 울님의 젖꼭지처럼 보이기에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에 안개에 가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참으로 높은 산이라 변화무쌍한 날씨에 아쉬움과 두려운 마음이다.
태백산은 특히 우리 생활과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단군신화에 대한 시원이 된 영산(靈山)이 바로 태백산이다. 태백산 정상의 천제단은
고대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지금도 매년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장소적으로도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가 있으며, 생활공간을 구분하는
정신·문화사적으로 나뉘는 권역이기 때문이다.
설악산 권역의 고산 위력을 일정 부분 이어받은 태백산 권역은 북방계 식물 가운데
특별히 귀한 종들이 이곳까지 내려와 서식하는 특징도 보인다.
금대봉까지 내려와 자라는 대성쓴풀과 개병풍, 함백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분홍바늘꽃과
노랑투구꽃, 태백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좀미역고사리, 찝빵나무, 숲바람꽃, 한계령풀 등이
태백산 권역을 중심으로 분포의 남방한계를 이루는 식물들이다.
태백산에는 천연기념물 주목 외에도 분비나무, 잣나무 등 고산성 침엽수가 분포하고 있다.
이런 침엽수들은 해발 1,400m 이상의 고지대에 주로 자란다. 군데군데 자라는 이런 침엽수
사이에 사스래나무, 신갈나무, 마가목, 함박꽃나무 같은 큰키나무들이 섞여 있다.
무수봉 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으로 오르니 헬기장이 나온다.
부소봉(扶蘇峰:1546.5m:07:15)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과 경북 봉화군 석포면 경계에 있으며
천재단이 있는 태백산 정상과 문수봉사이의 가운데 있는 봉우리로
이곳부터 좌측은 진부령에서부터 6개월을 같이 걸어온 강원도를 벗어나
경북 봉화군으로 접어 들지만 우측은 아직도 강원도 영월땅이다.
정상석은 부쇠봉으로 되어 있는데 봉우리 근처에 차돌이 많이 있어
부싯돌(부쇳돌)을 사용한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도있다.
단군의 둘째 아들인 부소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천제단이 단군을 제를
지내는 장소라면 그 아래 산봉우리가 아들의 것일 것이고 전하는 말에는
부소왕(扶蘇王)이 구령탑을 쌓은 곳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부소. 부싯돌의 어원이 扶蘇石이니 火(석탄)山인 태백산에 부소봉이
있는 것은 참으로 절묘한 이치이긴 하지만 부소 또한 단군의 둘째 아들이라는 점에 더욱 관심이 간다.
부소 또한 천제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부소봉 정상 삼각점(△ 태백 24. 2004 복구)
백두대간 북진 때 부소봉에서 바라본 천제단의 사진(2009.09.06)
부소봉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니 태백산의 정상부의 모습에 신성함을 느낄 수 있다.
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다)! 사방에 막힘이 없으니 민초들이 충분히
신성시할 만한 地德을 품고 있는 자태이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태백산을 일러...기이한 곳...가끔 선인들의 이상한 유적이 전해온다”라고 하여
태백산의 신성함을 언급한 적이 있으며, 고려 시대 유명한 산꾼 安軸도 ‘태백산에 올라(登太白山)’를 통해
“...몸이 구름을 쫓아가니 내가 학을 탄 것인가(身逐飛雲疑駕鶴)” 라고 노래하면서
태백산의 신비함을 힘주어 강조한 적이 있다.
천제단과 장군봉은 영락없는 어머니의 두 가슴이었고,두 봉우리에 쌓은 제단은 영락없는 젖꼭지였다.
태백산은 두 가슴으로 배달민족을 길러냈던 것이다.
태백산의 높고 거룩한 기운을 품고 다시 억센 세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4년전에 없던 데크목 전망대도 새로 생기고...
다시 만난 백두대간 능선(07:20)
산꾼들도 이젠 편한 길을 원하는지 부소봉을 오르지 않고 옆사면길로 대간길을
이용하면서 부소봉이 대간이 아니라고 우기는 산꾼이 있을 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엄연한 대간이다. 동료 산꾼들보다 늦긴 했지만 부소봉을 보고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먼저 도착한 동료산꾼들이 넓은 공터에서 아침밥상을 펼치고 있다.
나도 이곳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오늘따라 동료산꾼들의 밥상이 진수성찬이다.
나도 가지고 온 올뱅이 국물을 끓여서 수제비 넣고 날씨가 추워 독한 진도홍주 한잔을
하고나니 속이 얼얼하니 추위가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다.
거기다가 모닝커피까지 먹은 다음 후미끼리 단체 사진을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난다.
후미팀들의 단체사진(동료산꾼 -수풀림님의 사진인용)
젖은 낙엽에다 산죽이 섞인 등로를 걷는데 이런 길을 걷다보면
누구나 시인이 될듯한 법인 호젓한 대간길이 너무 좋다.
4년전 북진길에 이곳은 휘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는데...
예전에 본 기억이 없는 데크목 광장 쉼터도 설치되어 있고...
이곳을 깃대배기봉 숲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다시 호젓한 능선을 조금 더 지나가니 깃대배기봉 이정석이 서있다.
깃대배기봉(1,368m:08:40)
우리나라 산길을 걷다보면 ‘깃대봉’이란봉우리를 참으로 많이 만난다.
이것이 어쩌면 일제의 잔재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깃대봉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의 자본을 수탈하기 위해 측량을 하면서 깃대를 꽂아논 봉우리를 의미한다.
산림청에서 설치한 정상석이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난 등로는 봉화의 청옥산으로
향하는데 최근에 산꾼들이 이 구간을 백두 청옥지맥이라 부른다.
백두청옥지맥이란?
깃대배기봉(1374)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두리봉(1353)-靑玉山(△1276.5,)에서 남쪽으로
백연봉(白煙峰:781.4)에서 동진하여 31번국도 늦재를 지나 1019봉-솔개밭목이봉으로 남진하여 1029봉-
비룡산(飛龍山(1129.4)에서 비룡산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서남진하여 임도로 내려선 다음 902.5봉-864.5봉-
602.4봉-565봉-임도-현동터널을 지나 봉화군 소천면현동리 백두대간 깃대배기봉이 발원지인 현동천이 낙동강을
만나는 0.7km전 현동천변에서끝이나는 약 29.2km의 산줄기를 말한다(우리 산줄기 이야기 신경수님의 자료인용)
또다른 깃대배기봉(08:45)
산림청에서 설치한 깃대배기봉 정상에서 5분정도를 내려오니 이름이 똑같은 정상석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태백시 한얼뫼오름회에서 세워놓은 정상석이 또 있다. 그리고 한참 위에 있는 산림청
정상석의 높이가1.368m인데 이곳은 한참 고도가 낮은 곳인데1,370m라 어느게 맞는건지...
동료산꾼들과...
응원메시지... 고맙소.
부소봉에서부터 계속해서 고도를 낮춰서 내려가는데 주위에는 신갈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들이 많은데 주위의 조망을 전혀 볼 수가 없다.
나무사이로 바라본 경북 봉화군 소천면의 산그리메
게으름뱅이 개당귀꽃 꺽이고 넘어지고...
계속 내리막길을 내려서다가 올라선 봉우리
이곳에서 직진길이 뚜렸하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보이는데 알바하기 쉽상이다.
우측으로 꺽어져야 대간길이다.
우측 능선으로 내려오니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잘 계시죠?
잠시후 이곳의 나무에는 벌써부터 겨우사리가 참으로 많이 보이는데 많은 산을 다니면서
이렇게 많은 겨우사리는 처음본다... 구미가 확 당기는데 그림의 떡이다
계속해서 엄청나게 많은 겨우사리를 만나지만 입맛만 다시고 간다.
하긴 아직은 좀 이르고... 작년에 수확한 겨우사리를 아직 먹고 있으니...
안부쉼터(09:20)
이정표(09:35)
이곳부터는 능선을 타지않고 계속해서 옆사면으로 길을 만들어놔서 편하게
가긴 하지만 마루금 산행을 원칙으로 하는 정통산꾼들은 아쉬움이 많은 곳이다.
계속해서 고속도로같은 옆사면을 걸어간다.
각화지맥 갈림길(09:45)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각화지맥의 주봉인 각화산(覺華山, 1176m)이 있다.
각화산 기슭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사고지(史庫址)가 있다.
조선 사고(史庫)는 초기에 서울 충주 성주 전주에 있다가
임진왜란 후에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 네 군데로 바뀌었다.
각화지맥 (覺華枝脈) 개념도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구룡산으로 가면서 깃대배기봉(1350)에서 동쪽으로 백두청옥지맥을 분기하고 남진하여
차돌배기(1210)에서 대간은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한줄기를 남쪽으로 분기하여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의 경계를 따라
1242봉-△1172.2봉-1182봉-覺華山(△1176.7, 5.2)- 王頭山(△1045.6, 2/7.2)-兄弟峰(930, 2.7/9.9)-큰재(750)-
살피재임도(630, 3.5/13.4)-아홉사리봉(△742.3, 0.7/14.1)-아홉사리재를 지나 華獐산(△859.4, 2/16.1)으로 올라
터널이 뚫려 지금은 한가한 도로로 변해버린 구 35, 36번국도 노루재도로(630, 1.2/17.3)로 내려와 △682.7봉을 지나
31번국도 임기고개(봉우재?, 450, 3.4/20.7)로 내려선다
임기기차굴(470)-방고개마을(470)-月岩산(△608.3, 3/23.7)-마너무임도(510)-고늘미임도-35번국도 개노리재(390, 3.6/27.3)-472.8봉-황새마을임도(410, 3/30.3)-△517.0봉을 지나 35번국도(△447.1, 3/33.3)에 이른다
참나무재도로(350)을 지나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도천교 바로 동측 백두대간 구룡산이 발원지인 운곡천이 낙동강을 만나는 곳(210, 2.4/35.7)에서 끝이나는 약35.7km의 산줄기에 이름이 없다
그래서 그 산줄기에서 이름있는 산중 제일 높고 각화사라는 명찰을 품고 있으며 특히 예전의 우리나라 4대서고가 있었던 각화산의 이름을 빌어 30km 이상 100km 미만의 산줄기이며 백두대간에서 직접 분기하였으므로
백두각화지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차돌배기 삼거리(09:48)
예전에 이곳에 차돌이 많이 박혀 있어서 차돌배기라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위 차돌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구간을 걷다보면
등로에서 차돌을 가끔씩 만나고 지나온 부쇠봉이라 불리우는 부싯돌도
불을 일으키는 차돌이고 보면 이해가 된다
갑장인 원일님은 내 전문찍사인가?
춘양면 석문동은 마을 입구 양쪽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있어 그 사이로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석문역할을 했다고 해서 석문동이라 했다고 한다.
예전에 천연요새의 역할을 하여 전쟁시 피난처였던 곳이라고 한다.
정감록의 전국 십승지중에 한 곳이라고 하며 자개동 석문에서 석문동이라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서있는 안내판에 지도만 보고 잘못 해석하면 대형 알바를 할 곳이다.
안내판을 보면 직진으로 신선봉쪽을 표시가 되어있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보이는데 이곳은 봉화 석문동가는 길이다. 오늘 실제로 동료산꾼 한명이
대형 알바를 한 곳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에 시그널이 많은 곳으로 가야한다.
북진하는 산꾼은 알바할 일 없겠지만 남진팀은 신경을 써야할 구간이다.
차돌배기 삼거리에서 동료산꾼들과 소주 한잔을 나눠먹고 신선봉으로 향한다.
남동쪽으로 두리봉이 아련히 보이고...
차돌배기 삼거리에서 부드러운 능선을 하나 넘은 뒤에 신선봉 오름길은 꽤나 힘이든다.
힘들게 치고 오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산꾼을 반기고...
정상에는 4년전에 만났던 慶州 孫公의 묘비가 산꾼을 반긴다.
신선봉(神仙峰:1,280m:10:30)
차돌배기 삼거리에서 출발하여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신선이 살기에는
그저 평범한 봉우리이건만 그냥 풀숲에 무덤 하나 정상을 지킨다
處士 慶州 孫公 永虎之墓란 비석이 있는 무덤...벼슬 없는 ‘處士’라서 친숙한 느낌이 온다.
짐승도 다니기 어려운 이 곳에 묘지를 쓴 자손들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아마 생전에 백두대간을 타는 산꾼이 아니였을까. (범여의 생각 中에서)
神仙이란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자연과 벗하며 사는 상상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원래 降神을 잘하는 무당이 산에서 수행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신선이란 능력있는 神官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산을 신성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산은 하늘을 맞닿아 있는 곳이자 속세와 가장 떨어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높이에 초월적인 신성을 느끼고 하늘에 절대적인 신을 감지했는데 이러한 신이 至高神이다.
지고신의 아들이 인간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인격화되어 땅으로 내려온다.
땅으로 내려온 지점이 바로 태백산 천제단이다.
신성한 동물(용)은 산줄기를 타고 천제단으로 모이고, 제관들은 곰넘이재를 통해
천제단으로 모이며, 신관(신선)들은 接神(신맞이) 준비에 분주하다.
그래서 이곳을 신선봉이라고 칭했는지도 모르겠다.
신선봉 정상에서
신선봉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곡차 한잔이 간절하지만 내가 가지고 술은
아침 해장에 비웠고, 갑장인 원일님 것은 차돌배기에서 바닥이 나버렸는데
술가진 수풀림 아우와 물찬제비님은 선두로 도망가 버렸으니 그저 과일만
먹으며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곰넘이재로 향한다.
4년전 북진길에 동료산꾼 도리깨님과 찌그러진 양푼이잔으로 술마신 그때가 좋았는데...
앞으로 각자 술 2병은 챙겨 오시길...
지나온 태백산은 나무사이로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신선봉에서 급한 내림길로 내려오니 새파란 산죽길로 접어든다.
우측에 무명묘지 한 기를 만나면서 이곳부터 곰넘이재까지는
고속도로같은 넓은 임도가 1시간가량 계속 진행이 된다.
넓은 임도를 걸어가다가 잠시후 임도 옆에 헬기장이 나타나고 다시 임도로 간다.
지나온 신선봉을 바라보면서 내리막 임도로 내려서니 곰넘이재가 나오고
이곳에는 당일 산행을 하는 산악회 회원들이 점심식사를 한다.
대충 잡아서 40여명 정도는 되어 보인다.
곰넘이재(11:25)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상천평에서 경북 봉화군 소천면 참새골로 넘던 고개로
먼 옛날 천제를 지내기 위해 태백산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넘던 고개요,
영남에서 강원도를 오고 가던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이다.
"곰"은 "검"에서 온 말로 "신"을 의미하고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행렬을 이루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이라 불렀다. 즉, 웅현(熊峴)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검재"이니
다른말로 "신령(神嶺)이다. 일설에는 "곰"을 "고개"로 해석하고 "님이"를 "넘이"로
봐서 "곰님이"는 "고개넘이"로 본다. 참새골은,동이정, 장부골, 석문동, 참새골 등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애당2리를 통칭하여 "참새골"이라 하는데, 참새가 날아가는 형세를
갖춘 산이 북쪽에 있다고 하여 "참새골", 또는 약수가 나오는 "참샘"이 있다고 하여
"참새골"로 불리는데 "정감록"에 의하면 십승지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참새골과 석문동을 이 고장 사람들은 열두 도심이라 한다.
열 두골짜기로 이루어진 참새골과 석문동은 시루봉 능선을 따라 구룡산에서
고직령. 신선봉. 차돌배기의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각화산으로 가지를
내리는 산줄기의 내경에 속하는 계곡으로 행정상 애당리로 표현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열두 도심이라 이르고 그 뜻은 골이 깊어 들어 갈 때와
나올 때의 길이 다르다 하여 이른 말이라 한다.
곰넘이재 사거리
곰넘이재에서 방화선 임도를 따라서 고직령으로 향한다.
고직령(高直嶺:12:05)
고직령에 대해 옛 문헌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곰님이골로 들어가서 산사나무골 어귀를 지나쳐 좀더 가서
오른쪽으로 갈라진 골짜기를 올라가면 서벽과 애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높고 곧은 고개라고 고직령이라 한다.
일설에는 고개 북쪽에 사창(社倉)이 있어 고직(庫直)이가 지키고 있어서
고직령이라고도 한다.
김정호(金正浩)의《대동지지》의 삼척 산천조에 보면
고석령(孤石嶺)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고석령은 서쪽 1백 10리에 있는데 길이 좁고 매우 험하다.
안동땅으로 통하는 길인데 춘양 서쪽이 되며 영천[영주] 예불령[예배령]의
북쪽이다"라고 하였다.《영가지》에는 고적현(高適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부터 이 고갯길은 영남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이었고
특히 고개 넘어 경상도 땅의 도심리(道深里) 에는 도심역(道深驛)이 있어서
태백산 천제를 지내러 오는 관리들을 묵게 하였고
천제를 지내러 오는 사람들의 발 길이 끊어지지 않던 고갯길이었다.
곶적령(串積嶺)이라고 기록한 곳도 있다
조선시대에 보부상들이 봉화와 영월을 오가면서 호환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었다는
산신각이 100m 아래에 있다고 하는데 주위를 아무리 봐도 산신각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편안히 걷고있는 이 고개도 民草들이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고직령 정상에서
10여분간의 취한후 다시 길을 나서는데 구룡산 향하는 길은 완만하긴 하지만 3일전에
감악지맥의 마지막 구간 약 27km를 무리하게 걸었던 탓인지 평소에 좋지 않던 오른쪽
무릎에 서서히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하는지 통증이 시작되어 아스피린 한 알을 먹었지만
통증을 멈출 줄 모르니 미치겠다... 아직 6km도 더 남았는데...
고직령에서 원일님이 찍어준 사진
지금 걷고 있는 이 곳이 정감록에 나오는 난세에 최적의 피난처인 십승지 중에 하나이다.
내년 8월이면 끝나는 백두대간 남진을 마치고 이제 무박에 빠른 산행을 그만두고
비박으로 여유작작거리며 십승지(十勝地)를 한번 걸어볼 생각이다.
정감록 비결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게 되었던 국가운명과 살아있는 백성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예언서로
그 당시 이담이라는 사람이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이란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고 전하며,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펴낸 것이라 한다.
이 책은 조선 5백년을 통하여 현재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가장 큰 지배를 했던 문헌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이 문헌과 이중환의 택리지에 술가들이 말하는 굶주림과 싸움 등의 염려가 없어 난세를 피할 수 있는 조선의 십승지는
풍기의 금계촌에 이어 봉화의 춘양면, 보은의 속리산 운봉의 두류산(지리산), 예천의 금당동, 공주의 유구와 마곡,
영월의 정동 상류, 무주의 무풍동, 부안의 변산, 성주의 만수동 순으로 가리킨다.
십승지란, 원래 산이 깊고 물이 풍부하여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십승지 가운데 봉화군 춘양면 일대를 표기한 원문을 보면 풍기의 금계촌에 이어
두 번째로 화산북거 소라고기 내성현동 태백양면(花山北去 召羅古基 奈城縣東 太白陽面)’이라 했다.
그곳이 지금 내가 걷고있는 이 일대이다.
조금전 오름길인 신선봉 오름구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나
통증이 그칠 줄을 몰라 자꾸만 일행들에 뒤처져진다. 능선에 올라
좌측으로 꺽어지니 구룡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북진땐 어둠속에 걸어 기억이 안난다.
구룡산 정상 주변의 식물분포도는 신갈나무 군락지처럼 보인다.
구룡산(구龍山:1345.7m:12:40)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구룡산은 태백산과 옥돌봉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이루는 산이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남북으로 흘러서 각각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진다.
이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여 구룡산이라 하는데, 용이 승천할 때 어느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뱀 봐라’하면서 꼬리를 잡아당겨 용이 뱀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牽强附會(경강부회 :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대는 것)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설이야 모두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구룡산 아낙 관련 전설은 산 이름이 먼저 생기고 난 후에
무리하 꾸며진 전설을 가져다 붙인 듯하여 전혀 개성이 없다.
‘구(九)’는 본디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구룡이라고 하면 용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용은? 산은 천만가지 형상을 가져서 크다가도 작아지고 일어나다가도
엎드리고 숨다가도 나타나는 등 변화무쌍하니 마치 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통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를 龍脈 또는 來龍이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결국 구룡이라는 뜻은 산줄기가 많다는 뜻이다.
실제 이곳 구룡산에 올라서면 수많은 산줄기가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구룡산이라고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상에 서니
오늘 처음으로 주위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지나온 태백산과 지나구간의
함백산 그리고 신성한 태백산 아래에 있는 공군 폭격기 훈련장, 그리고 동쪽으론
두리봉과 각화산이 보이고, 서남쪽엔 다음구간에 가야할 옥돌봉과 문수지맥 능선들...
여태껏 나무 숲터널을 지나면서 답답한 마음을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다.
구룡산 정상에서
구룡산 정상에서 동료산꾼들과...
야심한 새벽에 지나온 태백산의 능선들이 시원스럽게 보이는데 그 아래에
이 신성한 산 아래에 공군 폭격장이라니... 국간안보를 위해 추호의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기에 허나 장소가 문제다.
태백산 천제단이 있는 天坪 계곡 아래의 폭격소리에 國祖이신 단군께서 노하시진 않을지...
구룡산 정상에서 필승 폭격장을 바라보는 범여의 마음은 그리 편치는 않다.
필승사격장은 1981년 한국이 부지를 주고 미국이 장비와 기술을 제공해 건설했다.
행정구역상으로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와 태백시 혈동,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등 3개 지역 1800만평에 걸쳐 있다.
오늘 내가 걸었던 능선이 한꺼번에 다 보인다. ⊃ 형태로 태백산에서 여기까지 왔다
구룡산 북쪽으로 펼쳐지는 춘양 십승지의 길이 보인다.
요즘 산꾼들이 십승지 산행을 많이 하나보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구룡산 정상 삼각점(△태백 26 1995 재설)
구룡산 정상에서 도래기재 내림길은 급경사의 연속이다.
아무래도 무릎이 너무 아파 동료들보다 먼저 출발을 하지만 자꾸만 쳐진다.
무릎의 통증땐 오르막은 그런대로 참을만하지만 내리막은 정말 힘이 드는데
자꾸만 양 손에 스틱에 힘이 들어간다. 커다란 멋진 금강송 2그루 있는 곳에서
그만 주저 앉아 버린다. 뒤따라 오던 갑장 원일님이 왜그러냐고 묻길래
걱정할까봐 볼일을 보겠다고 거짓말을 하곤 원일님이 지나간 다음에 금강송
아래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통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1주일동안 60여km 를 걸었던게 아무래도 무리를 한 모양이다.
구룡산 내림길에서 만난 금강송(원일님 사진인용)
안부 쉼터(13:00)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내리막을 내려오니 안부 쉼터가 나온다.
그렇다고 여기서 쉬어갈 수는 없다... 먼저간 동료산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선...
힘들게 안부 능선을 따라 내려오니 데크목 계단이 나오고 임도로 내려서는데
이곳이 상금정 갈림길이란다.
상금정(上金井) 쉼터 갈림길(13:25)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향이동을 연결하는 임도로 4륜차가
다닐만큼 넓다. 임도에는 쉼터인 팔각정자와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
그리고 산림청에서 만든 구룡산의 유래가 적힌 표지판이 서있다.
우구치리(宇龜峙里)는 강원도(영월)와 경상북도의 경계에 있는 자연마을로는
새터, 상금정, 상시장, 사호, 하금정, 샘골, 와흥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금광이 개발되면서 크게 번성했으나, 이후 1970년대 폐광되면서
마을 역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직도 이곳은 일제시대의 ‘금정’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이는 당시 금광에 물이 많이 차있어서 마치 우물 속에서 금을 캐는 것 같다 하여
금정(金井)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영월 상동은 세계적인 텅스텐 광산이 있다.
금정 쉼터에 서있는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와 구룡산 유래 표지판
이곳에 내려서니 자꾸만 머리속에 탈출이란 단어가 범여를 괴롭힌다.
약 4km밖에 남지 않는 길을 이곳에서 포기해야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임도 역시 만만찮은 거리라 포기하고 부지런히 도래기재로 향한다.
헬기장(1.021m:13:45)
헬기장에 도착을 하니 먼저가던 김포패밀리와 나와 동행하다 먼저 간
우 대장님이 나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어서 이곳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에 도래기재로 향한다.
아직도 도래기재까지는 3km가 남았다는 구조목 표지판을 만나고...
안부쉼터(14:08)
임도(14:15)
또다시 상금정으로 이어지는 또다른 임도 내림길의 나무 계단에 다다르니
그냥 주저 않고싶은 마음이지만 내 산행일정에 탈출이란 오점을
남기지 않기위해 약 2km 남은 거리를 이를 악물고 걷는다
임도 안부에 서있는 이정표
드디어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오늘의 날머리인 도래기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래기재로 내려서는 길목의 모습
도래기재 내리막길 철재 휀스에 걸려있는 시그널
동료 산꾼 원일님이 인증샷을 남겨주시고...
도래기재(14:45)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도래기마을에서 우구치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경북 봉화에서 강원도 영월군을 지나가는 88번도로가 있는 고개로
도래기재의 유래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어 “도역리(道驛里)”로 부르다
이것이 변음(變音)되어 “도래기“로 부르는 마을 이름에서 빌려온 도래기재
강원도 영월과 경북의 봉화로 나누어지는 도래기재를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소의 입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우구치(牛口峙)”로 불리는 계곡을 따라 옥동천의
상류인 내리계곡이 형성되고 남쪽에는 “도래기”에서 금당계곡을 따라 운곡천이 發源된다
역은 당시 주요 교통수단인 말(馬)을 관리하는 곳으로 사람과 말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이다
도래기재의 행정구역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속해 있다
춘양하면 대체적으로 ‘억지춘향’ 을 많이 떠올리는데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그 뜻은 ‘일을 순리대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우겨
겨우 이루어지는 것을 일컽는 말’로서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춘향으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려고 핍팍 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봉화사람들은 그 뜻이 이곳 춘양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경북 영주에서 강원도 철암으로 연결되는 영암선(현 영동선)중 이 구간의
철도가 직선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춘양면 소재지를 곡선으로 한바퀴 휘감고 간다.
1950년대 후반에 당시 직선으로 90%이상 철로공사가 진행됐는데 춘양면 서벽리에
고향을 둔 자유당 원내총무를 지낸 정문흠의원(2대~4대)이 억지로 철도를
우회하게 했다고 해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한다.
등로는 그리 험하지 않았지만 몸이 말을 안들어 상당한 고통속에 한 구간을 마친다.
쥔장 잘못만난 내 다리(足)여! ... 부디 내년 8월까지만 버텨주라. 그땐 쉬게 해주마.
먼저 내려온 동료산꾼들이 산행을 마무리하고 술한잔으로 피로를 풀고있다.
오늘은 해산물로 입이 호강을 한다. 동료산꾼 하늘마음님이 서천에서 바다낚시로
잡아온 싱싱한 광어로 입이 호강을 했는데 내려오니 4년전 대간 북진을 같이 한
수풀림 아우가 울진에서 20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공수해 온 문어로 포식을 한다.
수풀림 아우가 가져온 문어
다음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경북 봉화하면 지금도 ‘청정 오지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중에서도 봉화군 중북부에 위치한 춘양면의 ‘서벽권역’은 높은 산들이
동서남북에서 팔을 벌려 감싸고 있는 대표적인 ‘청정 벨트’이다.
실제로 봉화군 춘양면은 조선 정감록에 나오는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 중 하나다.
봉화군 관계자는 “봉화 춘양면 십승지는 좁게는 애당리 석문동을 일컫지만,
서벽권역 입구 쪽에 ‘석문동천’이란 글귀가 적힌 바위가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춘양면 십승지는 아마도 서벽권역 전체를 지칭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십승지란 경치가 뛰어나고 지형이 좋아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면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바로 전원명당이다.
춘양면 서벽권역은 외부로의 통로가 남북을 가로지르는 88번 도로 뿐이다.
면적의 80% 이상이 임야로서 춘양목(금강송)이 생산되는 등 산림자원이 풍부하다
문어에다 술한잔을 하고 영주시 들어와서 소머리 국밥에다가 소주 한잔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알콜 기운으로 통증을 이겨내며 서울로 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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