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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8구간 - 삽당령에서 백복령까지

by 범여(梵如) 2013. 9. 16.

 

인간의 오만과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가슴아픈 대간길을 걷다

 

☞산행일자:  2013년 9월 14일~15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18.6km / 7시간 4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25명과 함께

☞ 산행코스: 삽당령-780봉-866봉-산죽지대-두리봉-만덕지맥갈림길

                  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석병산 갈림길-석병산-일월문-입석대

                  일월문 갈림길-폐헬기장-상왕지미골 갈림길-성황뎅이갈림길-목원갈림길-헬기장

                 고뱅이재-900봉-931봉-강릉 서대굴-생계령-큰원피 삼거리-무명묘지-762봉-786봉

                       NO45 철탑-NO44 철탑-869봉- NO43 철탑-자병산-임도-백복령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옥계면 / 정선군 임계면/ 동해시

 

요즘에 모든게 의욕이 떨어지고 뭔가 하고 싶다는게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해야할 것도 없고 정신이 멍한 상태이다.

나이가 젊어서 가을을 타는 것도 아니고... 자꾸만 내 주위에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던 큰 스님과 친구들이 하나, 둘 이 세상을 하직한다.

 

지난주에는 내가 가장 존경하던 큰스님이신 무진장 큰 스님께서 圓寂하셨다.

그리고 객지에서 만났던 친구 한명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등진다.

하나, 둘 내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자꾸만 맘이 착잡하기만 하다.

사는거 참으로 별거 아닌데 왜이리 아둥바둥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세상사 사는게 諸行無常이요 諸法無我인데... 괜스레 허무함만 밀려온다.

 

사는 재미는 고사하고 자꾸만 힘들게 살아가는 내 자신이 처량해 보인다.

오늘은 대간 가는 날인데 그것조차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동료산꾼들과의 약속을 어길수도 없어서 늦은밤에 베낭을 메고 양재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 3D 지도와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대동여지도 (출처:규장각)

가을에 접어 들면서 자꾸만  큰 스님들께서 자꾸만 열반의 길로 접어든다

지난 주에는 지리산 칠불사 회주로 계시던 통광 큰 스님께서 圓寂하시더니만

이번 주에는 이 시대의 큰 스승이신 혜명당(慧命堂) 무진장(無盡藏)  대종사(大宗師)께서

원적하셨다는 연락이 포교사단 문자로 받았다...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큰스님의 대숙야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랫만에 조계사로 갔다.

 

참으로 이 시대의 큰 스승이셨고 학창시절, 금강경,육조단경과 대승기신론 강의에

명쾌한 해석으로 학생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가 있었던 큰 스님이셨는데...

그러면서 재가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시면서 출가자에게는 한없이 엄격하신 큰스님

 

강의시간 도중에도 출가자(스님)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신도들이 같다준 보시로 중노릇하면서 허튼 짓거리나 하려면 당장 중노릇 때려 치우라”

하면서 호통을 치시던 큰 스님... 오늘따라 당신이 왜이리 그리우신지? 

조계사 대웅전에 들려서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고 좌측에 설치된 큰스님의 영전에 예를 올린다.

평생 주지 한번 안하시고 사찰과 돈, 솜옷, 차 등 일곱 가지가 없는 청빈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칠무(七無)스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큰 스님

스님한테 동산불교대학에서 2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2년, 4년을 강의와 법문을 들으면서

큰 스님의 존경에 대한 마음... 이젠 누구에겐 의지해야 하나요?

오늘 대간길은 접속구간 관계로 거리가 짧은 20km도 안되는 그야말로

무박 산꾼들에게는 보너스 구간이라 일컽는 삽당령에서 백복령 구간이다.

4년전 북진길에는 당일 산행으로 진행했던 구간인데 무박으로 진행한다.

용인과 강릉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03시 45분에 삽답령에 도착하니

강원도답게 정상에는 비가 온 것처럼 모든게 이슬에 흠뻑 젖어있고 날씨도 쌀쌀하다.

정상에는 고랭지 채소를 싣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트럭 3대가 있고 길 건너

막걸리 파는 욕쟁이 할머니 주막은 고요함만 흐른다.

차량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하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다음에 04시05분에 산행을 시작한다

삽당령(揷唐嶺:680m:04:05)

삽당령을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짚고 넘었던 지팡이를 정상에 꽂아놓고 갔다하여

'꽂을 삽(揷)자를 써서 삽당령이 되었다는 지명 유래와 또다른 속설에 의하면

이 곳 지형이 삼지창 모습으로 세갈래로 갈라져 삽당령이라고도 하고, 고갯마루에

당집이 있어 당집 사이에 있는 고개란 뜻의 샅당령이 변해서 삽당령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 곳의 옛이름은 삽운령(揷雲嶺)인 것을 보면 백두대간의 마루금에서 수시로 변하는 기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첫번째 이정표(04:07)

들머리 나무 계단을 2분정도 오르니 넓은 임도가 나오면서 첫번째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에서 임도를 버리고 우측에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급경사를 치고 오른다

어둠을 헤치고 나무계단을 치고 오르는 동료산꾼들

두번째 이정표(04:12)

초반부터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심장이 터질것만 같은 통증이 온다.

아직도 몸이 예열되지 않았다는 증거인 모양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두리봉으로 향하는데 한참을 산죽길인

안부 능선을 걷다가 다시 나무계단을 한차례 치고 오른다

봉우리 직전 우측 능선 숲에 왕산 38호지’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지판이 나오고...

780m봉(04:25)

능선에 올라오니 예전에 헬기장이었다가 용도가 폐기된 듯하다.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블럭과 정선 소방서에서 설치한 지점 좌표가 있다.

정선 소방서에서 설치한 지점좌표

이곳부터 어둠속에 편안한 안부 능선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걷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즐기지도 못하고

눈을 감고 걸어야 하니... 계속해서 山竹들이 나타나는 길을 걸어가는데

동료산꾼들은 뭣이도 그리 급한지 사정없이 내달린다.

아마 오늘도 선두에는 호화준족인 ‘노루’님인 모양이다.

어둠속에 빨리가는 산꾼들 너무 밉다...ㅋㅋㅋ 불쌍한 저 중생들은 누가 제도할꼬

어둠속에 12분을 정신없이 산죽길을 헤치고 올라서니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나온다.

866.4m봉 삼각점(04:37)

어둠속에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니 숫자를 인식하지 못할만큼 마모된

건설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이  등로 5m옆에 있는데 동료산꾼들은 관심조차

두질않고 어둠속에 뭐에 홀린듯이 계속해서 도망(?)을 간다.

어둠속에 만난 이정표(04:47)

866.4m봉에서 10분을 정신없이 걷다보니 이정표를 만나는데 삽답령과 두리봉의 중간쯤 된다

얼레지 안내 표지판(05:25)

새벽 5시 반이 다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둠속이다.

참으로 해가 많이 짧아졌다... 산은 벌써 가을 깊숙히 들어선 느낌이다.

어둠속에서도 능선사이 빼꼼히 보이는 봉우리에 黎明이 밝아오지만

아직까지 등로에는 나무숲 때문에 짙은 어둠은 계속된다

강릉 바우길 갈림길(05:27)

어둠속에 강릉 바우길이 나오고 직진으로 좋은 길이 있으나 좌측에 있는 바우길쪽엔

각종 시그널이 걸려있고 나무에는 두로봉 0.1km라는 표시판이 있어 20여m를 진행하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하여 빽하여 직진으로 올라서니 두리봉이 나온다.

강릉바우길 갈림길에 붙어있는 이정표

두리봉(斗里峰 1033mm:05:30)

강릉시 옥계면 북동리, 왕산면 목계리,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산꾼들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목재 테이블이 여러개 있고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있으며 이곳에서 우측으로 난 길이 만덕지맥 가는 길이다 

 

국토지리정보원과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 ‘두리봉(頭理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는 다르다.

 ‘두리’는 ‘둥글둥글하다’는 순 우리말로 ‘둥근 모습을 한 봉우리’다.

한자어 표기는 우리말 두리봉을 음차한 것에 불과하다.

두리봉 또는 두위봉(斗圍峯)으로 두리뭉실해서 두리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산줄기의 분기하는 가지줄기는 만덕봉에서 두 줄기로 나누어 진다.

한 줄기는 옥계로 보내고 다른 한 줄기는 칠성산으로 불리는 담정산을 지나 강릉으로

이어지는데 산자락 끝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인 굴산사가 있다.

 

담정산 골짜기(두리봉과 석병산사이)를 “담정골” 또는“담정계곡”으로 하는데 담정골에는

고려에 대한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 져 온다.

고려"우왕"이 제왕산에 제왕산성을 쌓고 유배시절을 보내다 피살당하고 고려가 멸망하자

우왕을 모시던 유신들은 우왕의 위패를 보시고 담정골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위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담정골의 이름을 “단경동(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해 져 온다.

 

이곳에서 동료산꾼들과 인증샷을 남기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선두로 내달리던

동료산꾼들이 뒤에서 헐떡거리면서 올라오는게 아닌가... 안봐도 비디오라고

아마 강릉바우길로 무작정 가다가 수입도 없는 알바를 한 모양이다.

무조건 빠른것이 좋은건 아녀... ‘느림의 美學’도 즐길줄 아셔야죠

두리봉 정상에서 오늘 처음으로 동료산꾼들이 다모여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음 석병산으로 향한다.

백두 만덕지맥이란?

백두대간 두리봉(1033m)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산줄기로(강릉시 왕산면과 옥계면, 정선군 임계면)

선목치(952m) 만덕봉(1,033.4m) 망기봉(755.2m)을 거쳐 파래산. 황학산. 괘장산. 봉화산과 함께

강릉시 강동면 임곡천 남쪽까지 30여km를 말한다.

어둠속에서 만난 표지판(05:45)

주위 능선에는 여명이 밝아오건만 등로에는 숲이 너무 우거져 아직도 한밤중이다

어둠속에 표식이 지워진 구조안내 표지판을 만나는데 기맥, 지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南陽州 金谷님이 시그널이 떨어졌는지 표지목에다 南陽州 金谷이란 글씨를

써놨는데 보기는 영 그렇다... 이런 행동은 진정한 행동이 아닌성 싶다.

진정한 산꾼은 아니온 듯이 왔다가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게 아닐까싶네요

폐헬기장(05:55)

두리봉을 출발한 지 17분정도 지나 폐헬기장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이정표(↑석병산 0.7km 백두대간 수목원 7km) 있고 우린 석병산을 향해 직진을 한다.

내 바로 앞에 우리 산방의 키즈인 주원아빠가 걷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대견스럽다.

꿀맛같은 주말에 한참 색시를 껴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나이에 백두대간이라니

보면 볼수록 이쁘기만 하다... 우리 아들과 비슷한 나인데 우리 아들은 아직 어린앤데.

그래 10년후에 이곳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대장 함 해봐야지

그때 내가 꼭 다시한번 걸어주마... 아니 잠깐 그때 내나이가 몇이지 ㅎㅎㅎ

날이 밝아오고 등로 숲사이로 멋진 석병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명성 그대로 암릉이 병풍을 친 느낌이다... 빨리 보고픈 마음에 괜스레 맘이 급하다.

석병산 갈림길(06:15)

석병산 전위봉에 있는 깨진 삼각점

석병산 전위봉에서 바라본 민둥산쪽의 雲海

석병산 전위봉에서 오랫만에 같이 걸은 보스아우님과 제주도 비바리(수선화님)

산나물과 약초에 일가견이 있는 까치샘님과 멋진 포즈를 취하고...

북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노추산과 가리왕산, 지나온 안반데기와

고루포기산, 그 뒤로 선자령과 대관령목장의 풍력발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석병산 정상에 서있는 동료산꾼들모습

석병산 가는 길에서 만난 구절초

상황지미골 갈림길

강릉시 옥계면에 있는 마을로서 상,하황지미가 있다.  

황지미(凰池洞)란 동네 이름 유래... 
학림동(서낭뎅이)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 골, 골입구에 효자각이 있고

골안에는 범바위, 상황지미, 하황지미 3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골 안쪽에 들어가면 두 골로 갈라지는데 왼쪽 골 끝이 선목이가되고 오른쪽 골끝이 곰덫이 된다.

선목이를 넘으면 왕산면 목계리가 되고, 곰덫을 넘으면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이 된다.
옛날 沈來助(號 : 四一居士)라는 분이 무릉도원을 찾아가다가 이곳에 와서 이곳이 무릉도원과

비슷하여 냇가 바위에 訪桃溪라 글씨를 써놓고, 그 옆에다 봉황이 많이 날라오는 곳이라

鳳來亭(나중엔 迎鳳亭으로 고침)을 짓고 살았다. 지금도 마을 입구 서낭 옆 냇가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지미란 봉황이 날라오는 연당에 못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석병산(石屛山:1055m:06:25)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아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석병(石屛)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정상에 서면 강릉시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찍이 동해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광경이 일품이다.

동쪽과 북쪽의 급사면에서는 주수천(珠樹川)의 지류가 발원하고, 서쪽의 완사면에서는 임계천의 지류가 발원한다.

남동쪽 비탈면에 옥계석화동굴이 있고, 생계령 기슭에는 임계 카르스트지형이 있다.

서쪽 기슭으로는 강릉~태백 국도가, 남쪽 기슭으로는 정선~동해 국도가 각각 지난다.

석병산에는 바위 한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린 일월문과 철쭉꽃 군락지가 있다.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 삽운령 동북쪽 줄기 상에 있는 큰산으로 “담정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산이 석병산이다.

이러한 표기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등에도 나타나는데 석병산이란 이름을 기암괴석들이 바위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돌 병풍처럼 보인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석병(石屛)산”으로 불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담정산이란 지명은 남대천이 발원하는 석병산과 두리봉 사이의 골짜기를 “담정골” 또는“담정계곡”으로

불리던 것이 구전된 것으로 보이며 담정골에는 고려에 대한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져 온다.

 

고려 "우왕"은 전란을 피해 대관령 근처 제왕산에 제왕산성을 쌓고 피난시절을 보냈는데

이 때 성 안에서 우왕을 모시던 유신들은 고려가 멸망하자 우왕의 위패를 모시고 담정골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위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곳이라는 의미로 담정골의 이름을

“단경동(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석병산의 멋진 仙京에 취하여 인증샷을 남기고 산을 내려와 약간 밑에 있는 일월문으로 향한다

석병산 일월문

맞은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와 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석병산 일월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추면 장관이라고 한다.

조금전에 지나온 두리봉도 보이고...

석병산 일월봉의 모습

멀리 동해바다에 日出은 시작되고...(06:35)

북쪽 만덕지맥 능선을 살펴보다가 약간의 바람이 불긴해도 맑은 하늘이 보여주는 강릉쪽 정경이 가깝다.

만덕봉 지나 칠성산 너머로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섬겨지는 학산마을 굴산사도 있으리니...

주수천(珠樹川) 아래 강릉 저수지만 아련히 보일락말락 한다.

어제 서울은 가을비 치고는 엄청나게 많이와 오늘 산행에 대한 걱정을 참으로

많이 했는데 그건 杞憂에 불과했다... 날씨치고는 너무나 좋다.

석병산 정상에서 바라본 만덕지맥의 주봉인 만덕봉의 모습

 만덕봉(萬德峰:1,035m) 자락 아래에 단경골 계곡이 있다.

한때 동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탈출로로 이용된 적이 있을 만큼 계곡이 깊다.

계곡 이름은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 몸을 숨긴 최문한·김중한·이장밀·김경 등의 고려

유신들이 뒷산인 석병산(石屛山:1,055m)에 우왕의 사패를 모시고 개동명왈단경

(改洞名曰檀京)이라 한 뒤 각자 흩어진 데서 유래한다고도 하고,

주변에 박달나무가 많아 단경(檀景)이라 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계곡 근처에는 이이(李珥)의 위패를 모신 송담서원(松潭書院:강원유형무화재 44)과

정동진해수욕장·경포도립공원 등 유적지와 관광지가 많다.

다시 석병산 갈림길(06:45)

석병산에 대한 아쉬움을 가슴속에 묻고 다시 베낭을 벗어둔 갈림길로

돌아와서  백복령으로 걸음을 옮긴다.

석병산 갈림길에 있는 석병산 안내판

폐헬기장(06:47)

이 폐헬기장은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폐헬기장에서 설치된 좌표

헬기장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미역줄기 나무들은 벌써 가을로 접어든다

성황뎅이 갈림길(06:50)

등로의 숲사이로 보이는 황지미골의 모습

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06:55)

백두대간 수목원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곳에는 무명묘지가 1기가

있는 곳에서 선두로 가던 동료산꾼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후미로 가던 우리도 이곳에서 아침 밥상을 펼친다.

이젠 산에는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서 버너에다 라면 하나를 끓여

막걸리 한잔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걸으니 산죽밭이 나오는데 석병산의 멋진 선경과는 달리

이곳은 능선아래 안부에서 밀려오는 짙은 안개와 비처럼 내린 이슬 때문에 옷이

흠뻑 젖어 버린다. 그래도 이곳이야  숲속이라 아무것도 조망이 안되어 천만 다행이다.

이제 백두대간 길 어딜가나 볼 수 있는 멧돼지의 놀이터(?) 이 넘도 환경파괴자인가.

멧돼지의 횡포로 망가진 등로를 지나니 돌계단을 올라간다.

908m봉(07:55)

908m봉 정상은 헬기장으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고 이정표(일월봉 소요시간 1시간 15분

고뱅이재(소요시간 10분)와 구조 이정표가 덩그러니 서있다.

908m봉 정상에 달린 시그널

908m봉을 조금 지나니 벌개미취가 군락을 이루고...

얼레지 군락지 표지판을 지나고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미역줄기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산꾼들을 괴롭히는데 그렇다고 안가나...

산박하꽃

가을의 야생화의 맑고 화사한 웃음을 맛본다. 저리 가만히 놔두면 잘 자라고 밝은 우리네 

인간사일진대 뭐가 그리 불안하고  안타까워 그리도 안달하며 볶아대는 세상으로 변했을까

결국 스스로 만든 이념들의 틀 속에서 완전치 못한 규범들에 얽매이며, 작은 우물 같은

동굴 속으로 자꾸만 기어들었던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

 

요즘 야당 대표란 자는 멀쩡한 여의도의 호화궁전(?)을 나눠고 서울시청 앞 천막에서

투쟁이나 하고... 여당의 대표라는 자는 또한 뭐하는지 존재감 조차도 안보이니...

여.야의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어케하면 民草들이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고 자기들의 당리당락에 따라 이익을 챙기려는 무리들...

당신네 책상에 쌓여있는 의제나 법안들을 한번이라도 들춰본 적이 있는가?

말장난 같은 가설들로 민초들을 괴롭히는 정객들...민초들을 제발 봉으로만 보지말라

진실을 숨긴 채 투쟁의 승리만을 위한 정치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民心은 天心이라 했거늘, 고려,조선의 왕조시대에도 민심을 거스려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아직도 저들은 자기 배부르니 민초들을 우습게하나... 고얀자들

원시림을 방불케하는 등로를 지나니 고뱅이재가 나타난다.

고병이재(08:05)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큰골의 동서로 잇는 고개로

석화동굴(石花洞窟)은 강릉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동굴로 절골에 있어 절골굴이라고도 한다.

만덕봉·두리봉·석병산 일대는 약 10만 년 전 고생대에 생성된 석회암지대로 곳곳에 많은 석회동굴이

발달해 있는데,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총연장 1,400m에 이르는 거대한 동굴이라 한다.

번지수를 잘못찾은 안내판

‘백두대간과 석병산’이란 안내판이 석병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곳 고뱅이재에 있다.

청순한 꽃 -  흰진범의 모습(꽃말은 용사의 모자란다)

죽고 못사는 나무 너무나 다정해 보인다.

오르막길 나무에서 만난 노루궁뎅이 버섯

앞에가던 어느 산꾼이 의심스러워 스틱으로 치듯한 노루궁뎅이 버섯을 만나는데

가까이 가서보니 향이 정말 좋다... 얼른따서 산방에 키즈인 주원아빠를 준다.

나중에 알고보니 앞서가던 까치샘이 그랬다고 한다... 조금전 아침에 높은하늘님이

따온 노루궁뎅이 버섯을 넣어 라면을 끓였더니 맛이 기막히던데...

여인들에게 좋다는 일엽초도 만나고...

쓰러진 나무를 지나 오르막에 오르니 900m봉이 나타난다.

900m봉(08:25)

900m봉 삼각점(△434 재설 / 77 건설부)

900m봉 정상에 서있는 안내판과 구조목

산비장이(꽃말: 추억)

투구꽃의 모습

산박하꽃도 산꾼을 반긴다

흰목이 버섯(식용가능)

931m봉(08:55)

900m봉에서 여유로운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어오니 뾰족한 암릉이 나오는데 이곳이 931m봉이다.

이곳에 오르니 조금전의 짙은  안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온 사방이 一望無際이다.

아마 오늘 산행중에 온 사방을 다 볼수 있는 곳은 이곳이 마지막이다.

동료산꾼들과 음료수를 나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 다음 급경사로 떨어진다.

931m봉에서 바라본 강릉지역의 산그리메

조금전 지나온 능선의 모습.

931m봉에서 고도를 200이상을 낮춰면서 급경사로 내려가는데 지난 이틀동안에

내린 비로 인하여m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이런데는 비에젖은 나무뿌리를  조심해야 한다.

922m봉(09:15)

약 18분 가량을 미끄러운 급경사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922m봉이 나온다.

여기서 완만한 안부 능선을 타고 가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오르막을 올라서는데 지난 이틀동안 비가 온 탓인지 싸리버섯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능선에 올라 편한 안부을 좌측으로 갔다가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이곳은

가지많은 낙락장송이 많이 보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나 적용되는 속담이다. 저렇게 수백년 의연한

소나무는 산바람이 일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산과 바람이 부여한 악조건을 이유없이 저항없이 다 받아들여도 저렇게 수려한 모습으로 정정해 있다.

지금처럼 모든걸 훌훌 던져 버리고 山河를 따라 평생 오르 내리다가 온 천지가 白雪로

만곤건(滿坤乾) 할 때 세상에서 저 나무처럼 천갈래 만갈래 뻗어가며

독야청청(獨也靑靑) 낙락장송(落落長松) 금강적송(金鋼赤松)이라도 될까나?

가지많은 나무가 있는 곳을 지나니 우측으론 멋진 금강송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이런 곳에는 송이버섯이 있을법도 한데 시간이 없어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멋진 소나무를 보면 왠지 가슴이 뻥뚫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다.

829m봉(09:30)

금강송 군락지에서 조금치고 오르니 쓰러진 구조목이 서있는데 이곳이 829m봉이다.

이곳에서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서 생계령을 가기위해 고도를 낮춘다.

강릉 서대굴(강원도 기념물 제36호:09:35)

하부고생대 오르도비스기(약 4억8천만년 전)에 퇴적된 조선누층군 석병산층 석회암 내에 형성되어 있다

석병산 석회암층(石屛山石灰岩層) 내에 형성된 수직동굴(垂直洞窟)이다. 일명 ‘범록굴’이라고도 한다. 

주굴의 길이는 약 800m이고, 총 연장은 1,500m이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석병산 중복벼랑에 위치한다.

서대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로, 약 250m까지는 탐사되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동굴은 세로로 땅 속 깊이 뻗어 있으며 주변의 동대굴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동굴 안에는 작은 공간들이 발달해 있으며 옆면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그리고 꽃모양의 석화(石花) 등이 둘러싸여 있어 매우 아름답다.

서대굴이 위치하고 있는 산계리 지역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들이 모여 있는 동굴지대로서 동굴들의 형태가 모두 같다.

강릉 서대굴은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절굿대

산부추

생계령(生溪嶺:640m:09:50)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큰피원을 잇는 고개이다.

옥계면 산계리 사람들이 정선 임계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개로 산계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고개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이 고개에서 도토리 열매를 채취했다

생계령은 거기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생계령은 동쪽 산계리에서, 또는 산계리쪽으로 넘나드는 고개라 하여 ‘산계령’이라

일컫던  것이 변음(變音)되어 생계령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다르게 쌍계령 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산계령이 경음화 된 것으로 보인다.

생계령에서의 인증샷

생계령 아래에 있는 고랭지 채소밭

이곳 생계령에 도착하니 선두로 가던 동료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후미팀인 우리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다시 백복령으로 향한다.

우린 이곳에서 느긋하게 과일과 음료를 나눠 마신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등로에서 바라본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철저하게 망가진 자병산의 모습.

석회석 채취 현장에서 서면 “자주 빛 병풍은 옛말” 운운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병산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진행한 구간 일대는 카르스트지형이다.

시멘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산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자병산은 마루금에서 사라진 대신 생태보전 관련 매스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산으로 변해버렸다.

생계령에 도착할 무렵 눈에 뒤 덮힌 듯하기도 하고 스키장이기도 한 듯한 산이 멀리에서 시야에 들어온다.

자병산이다. 눈인 듯 보이는 것은 석회석 채취 때문이고, 스키장인 듯 한 것은

 정상부를 슬로프처럼 깍아내었기 때문이다.

산의 형태가 변했으니 병풍은 있을 리 없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서

자주빛 병풍이라는 말은 옛말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무명묘지(10:30)

숲사이로 바라보는 자병산의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프다.

잠시후 능선을 치고 오르니 봉분이 거의 없는 무명묘지를 만나고 다시 오름길이 나온다.

우리들은 세상을 얼마나 더 뜯어고쳐야 평안을 얻을까.

산천을 막무가내로 뜯어고치는 건설의 포크레인 소리,

여기저기 엄청나게 파 뒤지어 쌓아놓은 흙더미, 아! 아! 하루라도 좋다.

건설 없는 평화로움 속을 나는 거닐고 싶다. 정말 우린 왜 사는가?

뜯어고쳐야 할 세상을 두고 사람들은 강과 산을 뜯어 고친다”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님이 읊은 「세한도」의 일부이다.

 

일요일인 오늘도  탐욕은 계속되는가 보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기계소음이 진동을 한다.

능선에 올라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자병산이 가까워지면서 대간길이

예전에 많이 변해 버렸다. 자병산을 파먹는 것도 모자라서 대간길마져 변칙으로 해놨다.

786m봉(10:50)

구조목 이정표가 있는 786m봉을 지나면서 우측으로 빠져나오니 RV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도로를 따라서 백복령으로 간다.

황토로 된 트레킹 코스같은 편안길을 계속 걸어간다.

조금을 더 걸어가니 함몰지역이니 조심하라니 문구가 붙어있다.

카르스트지형(11:05)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카르스트지형으로 움푹움푹 웅덩이처럼 들어간 곳

(일명 둘리네 또는 쇠곳 이라고도 함)으로 정신 없이 돌고 돌아가는 곳이다.

안개 상습지역이라 날씨가 좋지 못하면 운행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지만

특히 미끄러움이 많은 지역이라 비라도 올 때는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구간이기도 하다.

돌리네, 일명 쇠곳. 돌리네(Doline)

빗물이나 지하수에 의해 용해되거나 지반의 함몰로 생간 우묵한 타원형의 지형이다.

이곳의 토양은 붉은 색을 띄는데 이는 석회암에서 탄산칼슘이 용해된 후 철 등 불순물이

남아 산화된 것으로 이러한 토양을 테라로사라 한다.

 

* 돌리네 : 석회암 지대에서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물에 녹으면서 깔때기 모양으로 패인

웅덩이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와지 안에서 경작할 수 있는 크기를 돌리네라 부른다.

테라로사라 불리는 토양이 발달하며, 돌리네가 연결된 경우 우발레라 한다.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틈으로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빗물이 스며들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녹아서 깔때기 모양 또는 작은 양념절구 모양의 오목하게 패인 웅덩이를 형성한다.

 

크기는 지름 1m 내외에서 100m에 이르는 등 다양하나, 최근의 국제적인 정의(定義)에 따르면

그 와지 저면(底面)에서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이 발달할 정도의 크기를 돌리네라고 하기로 하였다.

돌리네의 저면에는 테라로사(terra rossa)라고 불리는 토양이 발달된 곳이 많으며,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돌리네가 더욱 용식(溶蝕)되어 인접된 돌리네와 연결되어 좁고 긴 와지를 이루는 경우를 우발레(uvale)라고 한다.

아드리아해(海) 동안의 카르스트 지방,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 아키요시다이[秋吉臺]가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의 충북 단양(丹陽) 일대에도 매포(梅浦)를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방아풀꽃

카르스트지형을 지나니 야생화가 만발하여 산꾼을 반기건만 자병산의

슬픈 아픔을 보고 걷는 산꾼의 마음은 그리 편치만은 않다.

다시 고도를 높이니 잘 가꾸어진 나무 계단이 나타난다.

나무계단을 올라서는데 계단과 그 주위에는 조그만 싸리버섯이 많이 보이는데

담주 쯤에는 싸리버섯을 꽤나 딸 수 있을것 같은데 이곳에 버섯이나 따러올까?.

다시 편안 능선길을 올라가니 우측으로 넓은 임도가 연결이 되는데

아마 토속 음식점쪽으로 연결되는 임도인 모양이다.

오늘은 더덕을 한뿌리도 캐지 못하여 앞서가는 까치샘님에게

더덕을 캐라고 하니 고분고분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사이

누가 숲을 헤집고 간 흔적이 나타나  포기하고 다시 돌아 나온다.

NO45 송전탑(11:20)

NO 45송전탑을 지나 조금을 진행하니 우측 아래에 NO44 송전탑이 나타난다.

 

44번 송전탑을 지나 좌측으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869m봉으로 가야하나

이곳도 우측으로 넓은 임도로 만들어 놓고 대간길을 우회하게 만들어 놨다.

한라시멘트 라는 회사 해도해도 너무 하구먼...대간길도 자기 맘대로 만들다니...

참으로 나쁜 회사이다.

869m봉(11:23)

아무 산꾼도 봐주지 않은 869m봉... 그래 명색이 정통을 자처하는 범여가

너를 봐주지 않으면 누가 봐주랴. 우회 임도에다 베낭을 벗어놓고

망가진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869m봉에 올라서니 처참하게 망가진

자병산이 한 눈에 보인다... 참으로 해도해도 너무하는 인간들이 밉다.

869m봉에서 바라본 자병산

석회석 채취 현장에서 서면 “자주 빛 병풍은 옛말” 운운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병산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진행한 구간 일대는 카르스트지형이다.

시멘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자병산은 원래 백두대간에 포함된 산으로, 1994년 이전에는 자병산이 있어

대간 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쳐 갔으나, 그 뒤 한라시멘트에서 시멘트 재료인

석회석을  채취하기 위해 대간길을 완전히 기형아로 만들어 버렸다

869m봉에서 바라본 자병산의 아픔을 안고 베낭을 벗어둔 임도 삼거리로 되돌아 오니

소나무에산림생태계 걷기대회란  프랑카드가 걸려 있는데 정말 웃긴다.

망가진 생태계 걷기 대회라면 몰라도... 산꾼들을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나...

NO43 송전탑(11:30)

Y자의 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다시 임도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좌측에 자병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반갑습니다

자병산(紫屛山 :872.5m)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려한 경관의 산계8경에 속하는 자병산이 있었으나 시멘트 재료 채취로 형태마저 없어졌다

자병산은 강원도를 동서로 가로 질으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경계로 자리 잡고 있고

수병산, 괘병산,석병산 등과 함께 아름다운 산군을 형성 하였다.

자병유화로 불리기도 하는 자병산(자주빛 병풍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운 산이란 뜻)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생겨 난 말이며 가뭄 때 자병산 산자락에 있는 닭목병대(닭목대)에서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러한 기우제는 80년대초 까지 이어 지다가 자병산이 헐리기 시작하면서

오랫 동안 전해져 오던 풍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紫屛油花 또는 紫屛血花“란 닭의 피를 뿌릴 때 나타나는 모습이 ”혈화”처럼 보였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낼 때 혈화(닭의 피꽃)가 피면 비가 내린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다.

자연은 스스로를 조절할 뿐 파괴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문명이라는 탈을 쓰고 자연을 허물고 더럽힌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상으로 많은 것을 베풀지만 인간은 자연의 고마움을 모른다. 자연은 그냥 있는 땅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친 삶의 터전이지만 인간은 자연을 현재의 자산가치로만 본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가 아니라 공생의 관계라는 것을...

잠시후에 자병산 석회 채취현장의 도로를 건너서 백복령으로 향한다.

도로를 건너자마자 좌측 등로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곳도 대간길을

자기들 맘대로 돌려놨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노란줄을 쳐놓고 출입금지 표지판을 붙혀놨다.

정말 웃긴다. 이 나라 등뼈인 대간길을 자기들의 사유물처럼 마구 홰손한 죄

치도곤으로 다스려야 할듯 싶다... 4년전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저 능선위에 자연 복원현장도 있었는데... 

 

자연 복원현장 - 자병산의 파괴현장 바로옆에 어이없게도 생태보전 특별구역을 정해놓고 있다.

4년전 저 능선위에 자연 복원현장이란걸 설치해놔 그나마 일말의 양심이란 걸 있는줄 알았는데

이제 그마저도 보지 못하게 못가게 해놓은 놀부같은 심보..

옆사면 고속도로 같은 길로 내려오니 예전에 올랐던  능선위의 이동통신 중계탑과

철탑은 그대로 있건만 왜 가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대한민국 백두대간”이란 커다란 표지판을 세워 놨는데 저런거 돈들여서

하지말고 대간길 원상회복부터 하심이 어떨런지...

아리랑은 지역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으며 남과 북을 합쳐 3,600여 수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의 진도 아리랑, 경남의 밀양 아리랑이 3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타관객리 외로히 난 사람 괄시를 마라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떨치고 청려에 의지하여 지향하여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달라 만물이 소연한데

 

해저무는 저녁노을 무심히 바라보며

옛일을 추억하고 시름없이 있노라니

눈앞에 왼갖것이 모두시름 뿐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태산준령 험한고개 칡넝쿨 얽크러진 

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구비치는 골짜기

휘돌아서 불원천리 허덕지덕 허위단심

그대를 찾아 왔건만 보고도 본체만체 돈담무심

 

- 정선 아리랑 가사중 일부-

 

 

   




고려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던 선비72명이 송도(松都)에서 두문동에 은신 하다가 그 중 7명 (전오륜, 김충한,고천우,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입지 시절의 회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心情)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정선 아리앙의 유래

고려왕조가 망한뒤 고려유신 72명은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하여 세상 미련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송도(개성) 두문동에 은거하여 살았다. 여기서 유래 된것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이성계일파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응하지 않자 역적을 살려둘수 없다 하여 두문동을 불바다로 만든다.

거기서 나온다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한사람도 나오지 않고 그곳에 있던 유신은 모두다 불타 죽었다.

그때 비명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민족사에 이처럼 불행한 역사가 또 있었을까.

한나라의 인재가 모두 몰살 되는 순간이었다.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는 그과정에서도 처절하고 눈물겨워다고 하며

집뒤에다 정사를 짓고 공자와 주자를 진상을 모셔놓고 얼마나 정성을 드렸는지

몇년후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는데 바로 목은 이색이다. 

목은 이색 문하에서 배운  뛰어난 인재들(정도전,정몽주,길재,등..)과

고려왕조 중책에 진출해 있던 성리학 인재들이었다.

 

모두 불타 죽기전 두문동에서 나온 단 한사람이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이다.

그 황희와 맹사성은 세종을 도와 조선을 반석위에 올려놓게 된다.

정선아리랑은 두문동에서 강원도 정선이라는 유배간 전오륜(형조판서)외 선비들이

망국의 한과 고향의 그리움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마을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오늘날 정선아리랑 이라 한다.

 

       

 

 

정선군(旌善郡)은 강원도 동남부에 위치한 군으로 정선군 북면의 아우라지는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골지천과 송천이 합쳐져 한강이 되는 곳이다.정

선은 한국 민요 아리랑의 발상지로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과 함께 3대 아리랑중의 하나이다.

'아라리'라고도 불리는 민요 정선 아리랑은 고려시대 말부터 불려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선 아리랑은 한강 뗏목을 타고 강원도의 다른 지역은 물론 서울까지 전해져, 이후에 전국

각지에서 각기 독특한 아리랑이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정선은 20세기 후반 석탄 산업으로 발달하였다. 정선에는 자연발생 경승지 35개소, 문화유적지 69개소 등

관광 명소가 많다.태백시와 인접한 사북읍에는 강원랜드가 조성되었다 고구려의 잉패현(仍貝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행정구역을 9주로 확정함에 따라명주(溟州:강릉)의 영현(領縣)인 정선현으로 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 혹은 1012년에 정선현을 정선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 98호(1895.5.26 공포)에 의거 강릉부 정선군이 충주부 정선군으로 되었다가,

1896년 8월 16일 칙령 제 36호(1896.8.4 공포)에 의한 13도제 실시로 다시 강원도 정선군이 되었다.

1906년 10월 1일 강릉군으로부터 임계면과 도암면이,평창군으로부터 신동면이 편입(8면) 되었다

 

정선군은 화암팔경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경관이 풍부한 ‘정선아리랑’(강원무형문화재 1)의 고장이다.

천혜의 경승지 35개소는 물론, 석회동굴 37개소,가리왕산, 함백산,민둥산 노추산·두위봉·백석봉 등

1,000m 이상의 명산 22개소 등이 산재한다정선의 인물로는 유학자 이 규복과, 조선시대 후기의

의병장인 김 시중, 축구선수 설기현과영화배우 원빈이 정선 출신이다 (위키백과 인용) 

20여km도 안되는 편안한 산행을 12시도 안되어 스틱을 접는다.

먼저 온 동료산꾼들이 메밀 부침개에다가 소.맥주 말아서 연거푸  2잔을

션하게 마신 다음  그루터기집 매점뒤에 있는 약수물에서 시원하게 씻은 옷을 갈아

입고나니 조금은 살 것만 같다. 그루터기집 매점에 들리니 오늘 처음 오신분이

동동주를 권한다... 이곳에서 동동주 2잔을 마신다.

근데 4년전에 비해 매점의 분위가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백복령 표시석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스틱을 접는다.

백복령의 유래

백복령은 읍지류 삼척부에 기록하기를 白福嶺俗呼希福嶺西五十里通旌善最高險

(백복령은 속칭희복령이며 서쪽 50리에 있으며 정선으로 가는 길이며 최고로 험한 길이다)이라 하였다.

지금의 2차선 포장도로가 뚫리기전 산간오지의 대표적인 험한 길이었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에도 수 많은 이름표를 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百復嶺 , 百腹嶺,白鳳嶺,百伏嶺 등이 있으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업드릴 복(伏)자를 쓰는 “百伏嶺”이 될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근세 한국 50.000분의1지도와 그것을 모태로 하여

1963년 국립건설연구소에서 편집하여 초판한 50.000/1지형도 그리고 각 종 사전이나

한국지명총람등에도 그대로 답습하여 百伏嶺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백복령(百卜嶺:780m:11:50)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정선군 임계면과 동해시 신흥동. 삼흥동의 경계에

잇는 고개로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는 길이다.

고개 정상에는 백두대간 표시석과 정선 아리랑 표시석이 있고 좌측 옥계쪽은  매점이 있다.

백복령은 석회암지대로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으로 복령(茯笭)이라 하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또한 백복령은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택리지』에는 백봉령(百福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이는 등 명확하지는 않다.

 

고갯길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백복령을 ‘뱃복이재’라고 부른다.

고갯마루에서 북쪽 산등성이에 올라가게 되면 둘레가 300-400m 쯤 되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가 여자들 배꼽에 뜸을 뜬 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뱃복이라

부른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을 옮기고 있다. ‘뱃복’은 배꼽의 옛말이다.

카르스트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의 움푹 파인 웅덩이가 신체의 배꼽처럼 보인다는 데

서 유래한 지명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한자다.

한자로 쓰였던 지명은 앞에서 본 것처럼 제법 복잡 하지만 현재에 널리 쓰이는 백복령(白伏領)은

일제 때 지도 제작에 의해 고의든 실수든 잘못 기록되면서 전해 온 것이다.

백두대간보전회에서는 백복령(白福領) 보다는 주민 정서에서도 좋고

리지에 근거가 있는 흰 봉황의 뜻인 백복령(白鳳領)으로 부르기를 홍보하고  있다.

백복령 정상에서 동동주 2잔을 마시고 임계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토속 음식점으로

와서 메밀전병에다가 소주+맥주를  동료 산꾼들이 주는대로 주책없이 받아 마셨다.

거기다가 감자 옹심이로 점심을 먹었다. 근데 오늘 식대는 오랫만에 온 보스 아우님이

스폰서를 했다는데 먹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본인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텐데.

사실 이런건 좀 자제했으면 한다. 추가분은 각자 1/N 로 하는게 좋은데...

 

보스 아우님 잘 먹긴 했는데 좀 미안하이! 그렇다고 다음번 안 나오면 안되

또 쓴만큼 주머니에 또 차겠지... 세상 이치가 다 그런거 아닌감... 복받을겨

정선 토속 음식점 전경

백복령에서 식사를 마치고 정동진으로 들렸다가 서울로 가는데

난 백복령에서 맛이 간 바람에 정동진가는 버스에서 골아 떨어진다.

정동진

궁궐(경복궁)이 있는 한양에서 정동쪽에 있는 바닷가라고 해서 정동진이란다.

정동진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으며 1994년 방영되었던

SBS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으로 방영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곳으로 매일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역 간

해돋이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술이 덜깨어 바닷가에 나가지 않고 차창밖으로 찍은 사진이다

정동진 해변

정동진을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평일보다 차가 없어서 저녁 7시에

집에 도착하여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가 새벽 1시에 깬다.

오늘의 전리품 싸리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