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섭존자가 행했던 頭陀行을 생각하며 불국토의 대간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3년 9월 28일~29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비, 가을비치고는 많은비가 내림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22명과 함께
☞ 산행코스: 백복령-832봉-859봉-987봉-1022봉(H)-862봉-원방재
상월산-이기령-898봉-너덜지대-1143봉-갈미봉-고적대
연칠령성-청옥산-문바우재-문바위-박달령-두타산-통골재(목통령)
1016봉-1028봉-1024봉-명주목이-934봉-햇댓등-산신각-댓재
☞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 정선군 임계면 / 동해시 달방동, 삼화동 / 삼척시 하장면, 미로면
지난 한 주는 완전히 술독에 빠졌다가 백두대간에 간 느낌이다.
월요일은 라이온스 회장 동우회 월례회에서 마시고 화요일은 백두대간 팀들과 자정이 다되도록 마시고,
수, 목욜은 현장에서 작업인부들과 금요일은 생일을 맞은 불알 친구인 바람친구 생일빵 한다고 마시고,
토욜은 내 바로 위 형님 회갑이라 가족끼리 식사를 하면서 마시는데 아무래도 저녁에 대간길을
가야하기에 조금 자제한 다음 집에오니 거의 10시이다.
얼른 샤워를 마친 다음에 베낭을 메고 탑승장소인 양재역에 도착하니 약 5분전이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얼마나 피곤한 지 깊은 잠에 빠지는데 버스가 평창 휴게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 아무것도 먹지 않고 화장실갔다가 다시 깊은 잠에 떨어진다.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어둠속에 백복령 오르는 꼬부랑 길을 도는데 버스가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
어둠속에 차창밖을 보니 가을에 아무 쓸모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잠시후 버스는 백복령에 멈추고
차에서 장비를 챙기고 우의를 입은 다음에 버스에서 내린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백복령에서 댓재까지 3D 지도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으로 복령(茯笭)이라 하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고 정선과 강릉을 가르는 마루금엔
'아리랑의 고장 정선'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또한 백복령은 삼척에서 정선 임계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는 가을비치고는 너무 많은 비가 내리는데 우중산행은 늘 힘들다.
더군더나 백두대간 코스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청옥, 두타구간은 맑은 날에도
거리도 멀고 고도차가 많아 바짝 긴장하고 가야만 코스라 은근히 겁도난다
NO225 송전탑(03:35)
늘 그렇듯이 너둠속에 볼 것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선두팀들은 평소에는
젊잖아 보이지만 능선만 올라서면 조급증(?) 환자처럼 달아나기 시작하는데
오늘도 범여는 몸에 땀이 나기 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초반에 힘이 부친다.
NO225 송전탑을 지나니 잠시 후 벤치 2개가 있는 능선을 만난다.
어둠속에 산죽과 철쭉나무가 어우러진 부드러운 능선을 비를 맞으며 걷는다.
첫번째 이정표(03:50)
백복령을 출발한 후 처음으로 이정표를 맞이한다.
그런데 이곳 이정표에는 ‘백복령’을 ‘백봉령’ 이라 기록을 해놨다.
표지판 하나라도 제대로 통일된 것은 보고 싶은게 대간길을 사랑하는 산꾼의 마음이다.
987봉 삼각점(△ 구정 467 2005 재설:04:40)
빗줄기는 자꾸만 굵어지는 가운데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능선을 치고 오르는데 좌측 풀속에 숨겨져 있는 삼각점을 보물 찾듯이
찿았는데 이곳이 지도상에 나타나는 987봉이다
987봉 바로 아래에 있는 이정표
1.022봉 (05:15)
어둠속에 1,022봉에 도착하니 빗줄기는 조금 가늘어진다.
걸으니 우의를 입어 그런지 옷이 홀랑 땀에 다 젖어 버린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똑같을 것 같아서 아예 우의를 벗고
비를 맞으면서 걷는데 그리 춥지는 않고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다
어둠과 짙은 운무에 휩싸인 1,022봉 헬기장
헬기장을 지나 고도차가 그리 크지 않은 능선을 지나가는데 이제 서서히
여명을 밝아오면서 좌측 능선 옆으로 멋진 암릉과 소나무가 나타나고 날이
밝으면 멋진 仙景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련만 오늘은 그림의 떡이다.
다시 고도를 낮춰 원방재로 내려서는데 이제 렌턴을 끄도 될 정도로
주위 사물이 보이는데 팔등신처럼 잘생긴 노송들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이윽고 원방재가 나오고 이곳에서 산행 후 오늘처음으로 동료산꾼들이 만나 휴식을 즐긴다.
원방재(740m:06:10)
원방재는 강원도 동해시 달방동 관촌마을과 가원도 정선군 가목리를 넘나 들던 고개로
옛날 삼척사람들이 정선에 소금을 팔러가면서 넘었던 고개란다
원방이란 '먼 지방' 또는 '먼곳'을 의미하며, 먼 거리 고개를 힘들게 넘나 들던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고개란 뜻이다.
정선군 가목리에는 정선땅 아우라지로 흘러가는 부수베리(부싯돌을 생산하던 곳)
계곡과 삼척방향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드는 서학골 계곡이 흐른다.
부수베리라는 지명은 ‘부수’는 부싯돌,‘베리’ 는 벼랑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고개는 힘에 부칠 때 산객들이 탈출로로 많이 이용되는 곳이다.
원방재에서 휴식을 끝내고 다시 오르막길이 계속되는데 한참을 치고 오른
다음에 다시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다시 빗줄기가 강해져서 할 수 없이 다시
우의를 입는 사이에 동료 산꾼들은 다들 도망(?)을 가버린다.
몇번의 오르내림이 끝나고 평평한 안부 능선이 나오고 좌측에 멋진 암릉이 보인다.
잠시후에 낭떠러지 방지용 목책과 의자 2개가 있는곳에 상월산 이정표가 있다
상월산(上月山 ?:06:50)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상월산:970.3m’ 란 아크릴 간판을 붙혀 놨다.
하지만 지도상의 상월산은 이곳이 아닌 20여분을 더 가야만 만난다.
오늘은 비가 오는 탓인지 아무도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 내가 사진을 찍어 주기만 기다린다.
동료 산꾼들을 인증샷을 한사람씩 다 찍어주고 나니 이런 고얀지고...
사진을 찍은 동료 산꾼들은 하나같이 다들 도망가는 바람에 난 인증샷도 못남기고 만다.
하긴 당신네들이 인증 샷을 남긴 곳은 진짜 상월산이 아니야 ㅋㅋㅋ
졸지에 꼴찌가 되어 부지런히 동료산꾼을 쫒아가는 내 몰골이 우습기만 하다.
대간이 뭐길래... 그래도 산을 탈때가 가장 즐겁다.
부지런히 쫒아가니 동료 산꾼을 만나고 이윽고 헬기장이 나오고
상월산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이 지도상에 표기된 상월산이다.
상월산(上月山:970.3m:07:10)
강원도 동해시 달방동과 정선군 임계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동해시와 정선군의 그 어느 자료에도 상월산에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국어사전에서 “상월(上月)”은 지난달의 옛말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산이 아닐까 싶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삼각점이 있다. 이곳이 지도상 말하는 상월산이다
그런데 대간꾼들은 20여분전에 지나온 봉우리를 대다수가 상월산으로 알고 있다.
정확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상월산 정상 삼각점(△ 임계 423 2005 재설)
상월산 북쪽 사면은 설악산의 공룡능선만큼이나 경사가 급하여 마치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
정상은 헬기장으로도 쓰인다. 정상에 서면 남북으로 용처럼 꿈틀거리는 대간 줄기의 군봉들이
행진을 하듯 나열하고,집 한 채 보이지 않는 내륙의 하늘 아래에는 산봉우리들이 다도해의
섬 모양으로 떠 있는 광경이다
상월산은 ‘높은(上) 산’이라는 뜻으로 실제의 달(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월(月)은 우리말의 ‘달’인데 옛적에 이 말은 ‘달(達)’로 표기하면서 의미는 ‘산’이었다.
따라서 ‘월산(月山)’은 ‘산’의 겹쳐진 표현이며, 상월산은 ‘상산(上山)’, 즉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거나 ‘가장 빼어난 봉우리’인 것이다.
상월산 정상 헬기장
이곳에서 완만한 능선길을 비스듬히 내려가니 이기령이 나오는데 빗줄기는 더 굵어진다.
이곳에서 전체가 다 모여 식사를 하는데 비가 너무와서 비닐로 지붕을 만들고 식사를 한다
이기령(耳基嶺:810m:07:30)
동해시 관로동과 정선군 임계면 부수베리를 잇는 고개로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
“구리터”의 중간 자음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표기되었다 한다.
이곳이 이기령이 된 理由는 대강 이렇다.
"銅基" 의 순수한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된 고개명으로,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 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재'를 의미하는 '령'으로 넘어 가니 "이기령<耳基嶺>이 되었다.
이 고개는 강원도 삼척의해산물과 강원도 정선의 특산물을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 우마차가 넘나 들던 고개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기령은 백복령과 더불어 옛 북평읍에서 정선으로 통하게 되는 주요 관문구실을
하였으나, 백복령이 지방도로로 개통되면서 이기령은 고개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이제는 점점 잊혀져 가는 옛길로 밀려나 이제는 백두대간 산꾼들만 걷는 고개가 되어 버렸다.
이기령 옆으로 난 넓은 임도
비오는 날 이기령에서 아침 식사의 모습
대궐같은 집 나두고 강원도 골짝기에 와서 뭔 개고생이여 ㅋㅋㅋ
식사가 끝나고 비닐을 걷는사이에 선두팀들은 다들 도망을 가버린다
졸지에 혼자 호젓하게 오랫만에 노송길을 걷는데
쾌도세무님이 뒤따라 오는데 오늘따라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인다.
조금 전 우측에 있던 이기령 임도를 이곳에서 잠깐 다시 만났다가 헤어진다
임도에 서 있는 이정표(08:15)
이기령에서 완만한 능선길을 걸어오는데 비맞은 소나무에서
뿜어내는 짙은 솔향기가 산꾼 범여의 머리를 맑게 해주는 느낌이다.
잠시 후 이기령에서 1.1km를 지나왔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다시
우측으로 접어드는데 바닥에 돌을 깔아놓아 걷기는 편하나 무릎에는 무리가 간다.
잠시 고도를 조금 높이니 조그만 샘터 하나가 나온다.
샘터(08:40)
샘터에는 물이 조금씩 흐르나 식수로 받을만큼 물은 아니고 조금은
지저분하여 산행기에 샘터 계산하고 식수를 이곳에서 보충하려면
낭패를 볼 것 같다.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이곳에서 자작나무를 식재한
곳이 보이고 1,143봉 정상이나 이곳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 옆사면으로
대간길을 돌려놨다. 자꾸만 대간길도 원형을 잊어 버리고 편한길만 선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지만 비가 많이오고 너덜길에다가 동료산꾼과 산행
간격을 맞추기 위해서는 정상이 아닌 옆사면길을 택한다,
1,143봉에서 정상을 오르지 않고 우측 너덜길을 한참동안 걷는데 너덜길
바닥은 미끄럽고 다리는 빠지고 걷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혼자서 호젓하게 30분 이상을 걷는데 기분이 참으로 좋다.
주위에는 서서히 산이 가을모드로 접어드는 모양이다... 파란 색깔이 붉게 변한다
가을 오는 소리가 들리나요?
너덜길이 끝나면서 전망좋은 암릉이 나타나는데 그 아래에 있는 무릉계곡은
엄청나게 짙은 안개로 10m앞도 안보이는게 마치 하얀 도화지로 가려놓은 모습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능선을 20여분을 걸어가니 갈미봉 이정표가 나온다
갈미봉(葛味峰 1,260m:09:35)
동해시 삼화동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인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갈(葛)”은 나누다(分)와 “미(味)”는 山을 뜻하니 두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갈미봉'이란 순수한 우리말로서 봉우리가 두 개로 갈라져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
높은 봉우리에 갈미봉이라 붙였고 괘병산(수병산)과 함께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룬다고 한다.
한자로 칡“갈(葛)”자를 써서 칡이 많은 산인줄 알았는데 이곳은 칡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갈참나무 잡목만 우거졌고 동료 산꾼들과 인증샷을 남긴 후 고적대로 향한다
갈미봉 정상에서
갈미봉 삼거리의 모습
서서히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만드는 대간길
멋진 암릉은 가을비와 짙은 안개로 멋진 조망을 망쳐버렸다
백두대간 북진때 본 무릉계곡(武陵溪谷)의 모습(2009.10.17)
얼마나 대단한 경치면 감히 "무릉도원은 바로 여기"라고 내세웠다.
두타산과 청옥산, 고적대, 갈미봉, 1243봉으로 둘러싸인 반석계곡이다.
무릉계 남쪽 울타리를 이루는 청옥산과 두타산은 언제나 쌍둥이처럼 붙어 다닌다.
무릉계라는 보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김새는 사뭇 달라 청옥은 듬직한 육산(肉山)인 반면
두타는 울끈불끈 골산(骨山)으로 되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옥'이라는 이름은 바위산에 어울리는 듯하며, 집착을 버리고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는 '두타'는
저 요란한 무릉계곡을 지긋이 굽어보고 있는 후덕한 봉우리에 어울리는 듯하다.
하지만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분명 남쪽 것이 두타라고 나와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77호로 지정됐고, 강원 동해시 삼화동에 소재한 약 2-3km의 계곡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품어서 이 두 산의 상징이 된 무릉계곡은 고려 충렬왕 때 이 곳에 들어 은둔생활을 했던
이승휴가 중국의 무릉도원 같은 선경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 짓고 극찬했다는 골짜기다
(삼척부사 김휴원이 지었다는 설도 있음).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이승휴는 과거에 급제하였건만 두타산이 너무 좋아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였다.
후에 조정에 복귀, 승지까지 지낸 후 다시금 이곳에서 은거하며 <제왕운기> <동안거사집>을 저술하였다.
청옥산, 두타산 고적대, 갈미봉이 에워싼 계곡에는 태암, 미륵암, 반학대, 능암, 쌍현암, 용추폭포,
기암괴석과 시인, 묵객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무릉반석(武陵盤石) 과 금란정(金蘭亭)이 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말로, 중국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 굴속에서 진(秦)나라의
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도 살기 좋아 그동안 바같세상의 변천과 많은 세월이 지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
고적대 삼거리(10:10)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무릉계곡이 나오고 유명한 천년고찰 삼화사가 있다.
청옥산과 두타산 사이에 있는 무릉계곡은 정말 멋진 곳이라고 한다.
무릉반석(武陵盤石 - 사진 불교카페에서 인용)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조선의 4대명필 양사언(楊士彦)이 이곳에 왔다가 그 풍광을 칭송하여 남긴 글인데,
관동의 제일가는 명작으로 꼽히며, 이 글씨를 썼을때 그 필력에 감응하여
산천이 사흘동안 흔들렸다고 전해진다.
그 의미를 해석하면, `여기는 신선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라, 물과 돌이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 열리네.`라는 뜻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어머니에게 바친 詩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은 삼척부사를 지내면서 이곳의 풍광을 시조로 노래한 글이란다
무릉계 반석은 1000평이 넘는 대반석이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고 쓴 글은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하며
일중 김충현이 고증하여 새로이 양각한 것이다. 원래의 글씨는 무릉계 반석 왼쪽 아래쪽에 남아 있으나
세월의 풍상과 계류에 휩쓸려 내려온돌과 모래의 힘으로 거의 마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시피 한 것을
재현하여 옛사람이 감동한 두타산 무릉계의 빼어남을 기린 문장을 전승하려 한 것이다.
석장암(石場岩)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던 이곳 무릉반석은 5,000m²나 되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천하절경을 이룬다.
반석위에는 이곳을 찾는 명필가와 묵객 등이 음각하여 놓은 여러 종류의 글씨가 있다.
이들 중 백미는 무릉도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초서체로 크게 새긴 제자(題字)로 현세와 이상향을 넘나드는 옛 선인들의 기계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삼화사 일주문(사진: 불교 카페에서 인용)
“頭陀山三和寺” 현판은 탄허스님께서 쓰신 것이란다.
삼화사(三和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서
오대산에 성지를 열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자장율사가 두타산의 산세에
반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고 흑련대(黑蓮臺)라 부른데서 기원하였다.
당시 자장율사에게 한을 품고 악신이 된 3명의 여신(女神)을 감화시켜 이들의 도움으로
절을 짓게 되었는데 이 3명의 여신이 화합 발심하여 창건한 절이라 하여 나중에 절 이름을
삼화(三和)라 하고 마을 이름을 삼화동이라 한다
또다른 설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또 하나는 신라말에 3명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모의하였다고 한다.그들이 떠난 후 마을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불렀으며
그후 얼마 뒤 사굴산문(闍堀山門)의 개산조인 범일(梵日)국사가이곳에 들러 절을 창건하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
고려말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이승휴(李承休)가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저술하였으며 이곳에서 10여년간 삼화사에 있는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면서 간장암(看藏庵)이란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두타산과 청옥산 입구에 살며시 위치한 천혜의 삼화사(사진.글: 불교카페에서 인용)
삼화사를 말할 때 수륙재를 빼놓을 수 없다.
삼화사에서는 조선시대(태조 4년) 최초로 국행수륙대재가 설행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고 친고려 성향의 세력들을 포용하여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동해의 삼화사와 강화도의 관음굴, 거제도의 견암사에서
국행수륙대재를 설행햐였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수륙재의 시작이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재는 하늘과 땅(天地) , 죽은자와 산자( 冥陽 ), 사성과 육범(水陸)의 모든 존재가
서로 소통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대가 설행된 배경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가 두 아들이 삼척에서 교살되었기 때문이며, 이들 왕씨 일가의 영혼을 달래어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기 위하야 매년 봄과 가을에 왕실에서 주관하여 설행한 의례였다.
고적대 삼거리에서 무릉계곡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접고 고적대로 향한다
거창 기백산에서 만났던 책바위처럼 생긴 암릉을 지난다
고적대 삼거리에서 고적대까지 0.8km인데 8km처럼 느껴진다.
이젠 등산화가 다 젖어버려 신발도 미끄럽고 옷도 비에젖고 땀에젖어 베낭멜빵에
걸리는 겨드랑이가 자꾸만 쓰려 아프기 시작한다... 아직도 갈길이 먼데 걱정이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힘을 쏟은 다음에야 고적대에 도착한다.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고적대는 동쪽으로 뻗혀진 청옥산, 두타산이 아울러 해동삼봉(海東三峰)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내려와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전천(箭川)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임계천(臨溪川)으로, 남서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골지천(骨只川)으로
각각 흐르는데, 동쪽 비탈면은 급경사를 이루나 국민관광지 제1호로로 지정된
무릉계곡으로 이어져 경관이 수려하고, 서쪽 비탈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다.
고적대 삼각점(△ 임계 306 2005 재설)
북진때 정말 환상적인 선경에 반한 모습으로 올라왔지만 전망을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다.
오랫만에 동행한 원일님과 정상주 한 잔을 하려고 베낭에서 독한 진도 홍주 한병을 꺼내
마시려는데 표시석 바로옆에 어떤 새끼가 엄청나게 많은 똥을 싸놨다.갑자기 기분이 확 잡친다.
정말 이 넘이 산꾼맞어? 넓고 넓은게 산의 화장실인데 어디 쌀데가 없어서 의상대사도 탄복한
이 성스러운 곳에다가... 정말 호로새끼다.
기분이 잡치기도 하고 추워서 바람을 피해 서둘러 고적대를 내려간다.
백두대간 북진길에 고적대 정상에서
고적대에서 내려가는 암릉구간은 예전과는 달리 안전시설이 참으로 잘되어 있다.
빗길에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조심조심해서 내려간다.
비에 젖은 쑥부쟁이
고적대에서 잡친 기분 때문에 술맛이 확 가시는 바람에 한참을 내려와 조그만
평지에서 비를 맞으면서 베낭을 벗고 원일님과 홍주 한잔을 마시고 연칠성령으로 향한다 .
이곳에서부터는 엄청난 급경이다. 빗길이 정말 미끄럽다.
오래된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연칠성령 가기전에 작은 돌탑이 하나있어 조선 인조때
명재상이었던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은퇴하여 중봉산(中峰山) 단교암(斷橋庵)에 기거할 때
이곳에 올라 임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해서 망군대(望君臺)라고 불렀다는 작은 돌탑이
하나 있는 망군대가 있다고 하는데 어찌 된 건지 지금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연칠성령 안내판
연칠령성(連七星嶺:1244m:11:15)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을 이어주는 고개로,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에
자리한 해발 1283.5m인 중봉산(中峰山)에 걸쳐 있다.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자리한 무릉계곡에서 문간재(신선봉 갈림길)를 넘고
호계를 지나 막다른 골짜기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넘나 들기가
험난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고도 불려 왔다.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봉우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정상에는 엉성하게 쌓아 올린 돌탑과 이정목이 서 있고 좌측으로 무릉계곡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대간꾼들이 이곳에서 한구간 끊고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다
연칠령성 정상을 望京臺라고도 하는데...
조선조 16대 임금인 인조 원년(1623년) 때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낙향하여
중봉산(삼척시 하장면 소재 ) 단교암에 기거할 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사모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해서 망경대(望京臺)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서울에 계신 임금을 바라 보았다" 하여 망군대(望君臺)라고도 부른다.
연칠령성 돌탑산행을 하기위해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많이 읽고 실제 지도상에도 망군대와
연칠령성이 별도로 표기가 되어있는데 실제 산행을 해보면 그 어디에도 대간길에는
작은 돌탑이 있다는 망군대(望君臺)를 찾을 길이 없고 연칠성령 이정표 밑에 엉성한
돌탑이 하나 있는데 이곳을 망군대가 아닌지 하는 생각은 들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다른 여러 산행기에는 이곳을 망군대라 칭하는 곳도 많이 보인다.
백두대간 북진길 사진에서 퍼온 고적대의 모습(2009.10.17)
연칠성령 이정표
연칠성령에서 청옥산가는 길은 빗줄기가 약간 가늘어지지만 카메라 렌즈에
성애가 끼어서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수가 없다, 이 좋은 구간이 자꾸만 아쉽기만 하다.
고목이 된 갈참나무가 자주 보이고 살아천년, 죽어천년이라는 멋진 주목도 간간히 보이며
4년전에는 없던 없던 안전장치 로프가 많이 설치되어 있어 완전히 대간길을 도전하는길이
아닌 트레킹 수준의 고속도로(?)로 만들어 놨다.
1.3주에 기맥, 지맥길을 타는데 그곳은 정말 때가 묻지않아 情이 가는데 이젠 대간길은 별 감흥이 오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마치긴 해야겠지만...
오늘은 갑장 원일님과 같이가는데 제주도 비바리 출신 수선화 총무님이 워낙 다람쥐라
이해가 되지만 오늘 후미에서 헉헉거리던 길빛 아우님과 쾌도세무님이 완전히 나른다.
이제 설설 백두대간의 맛을 알아가는 모양이다.
잠시후 힘들게 한바탕을 치고 오르니 청옥산 정상이 나타난다.
청옥산에 들어서니 이정표가 산꾼을 반겨주고...
청옥산은 오늘 산행코스 중에 가장 높은 곳이긴 하지만 전망은 전혀없다.
정상에는 정상 표시석과 2개의 이정표, 군 시설물이 보이고 4등 삼각점이 있다.
청옥산 (淸玉山:1,403.7m:11:55)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타산, 고적대와 함께 '해동삼봉'으로 불리는 산이다.
청옥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청옥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청옥'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보석이다. 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 가지 보석중 하나로 일곱 가지 보석은 금, 은, 수정, 적진주, 마노, 호박 그리고 청옥이다.
그러니 청옥산은 곧 극락이다. 이 땅에 있는 극락의 세상이다. 한 정진의 길, 수행의 길…,
하지만 이 길은 또한 역사의 피비린내를 맡아야 하는 아픔의 길이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와 여암 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두타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지금의 두타산보다 50m 높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보석 중 하나인 청옥에서 온 지명이라 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의병들의
정신이 죽지 안했다는 뜻으로 “청옥산”이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동해시 쪽에서 바라보는 산세가 “푸르다”:고
하여 청옥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옥산 주봉에 있던 소나무는 임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 하기
위한 대들보용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산 아래 샘이 있고 정상부는 넓은 공터가 있어 고적대와 함께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청옥과 두타를 걷다보면 ‘李承休’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약 700여 년전인 고려 충렬왕 때 直言과 罷職(파직)을
거듭하면서 帝王韻紀(제왕운기)를 집필한 인물이다.
상, 하권으로 구성된 제왕운기는 상편은 帝를, 하편은 王을 언급하고 있다.
帝는 중국의 황제, 王은 고려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니 상편은 곧 세계사이며 하편은 국사인 셈이다.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구분되는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승휴는 하편에서 우리 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신화로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특히 발해를 최초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만주 일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영토회복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이 최근에 이르러 동북공정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마저도 자기들 역사라고 우기지만 이미 700여 년 전에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이승휴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대간 관점에서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백두와 지리를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하나 이승휴는 親家가 경상도 경산임에도 外家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했다는 점이다.
이승휴의 외가가 강원도 삼척이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 여기 청옥-두타 아래 흐르는 무릉계곡이다.
청옥-두타가 대간의 중요 부분임을 감안하면 이승휴가 여기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것이 예사롭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비는 이제 아침보다는 적게 오지만 그래도 간간히 내리는 비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이곳에서 원일님과, 키키,총무, 길빛,쾌도세무님과 함께 원일님이 가져오신 막걸리와
과일을 나눠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데 다영아빠와 깔끄막님이 도착한다.
잠깐 휴식을 취하는데 추위가 엄습해와서 서둘러 두타산으로 향한다.
동료산꾼들과 함께
박달재가는 길에서 만난 뽕나무 버섯
조그만 능선이 하나 나오는데 이곳이 학등이란다.
멀리서 이곳을 보면 학(鶴)의 등처럼 보인다고 해서 학등이라 부른다.
두타산 가는 내리막길에 응원 간판이 있는데 아마 이건 북진팀을 위해서 해 논 모양이다.
이곳에 무명묘지 1기가 있는데 아마 이 분은 전생에 백두대간 종주팀 일원인가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해발 1,400여m)에 산소가 있을리가 없을거지...
후손들이 이곳에 성묘를 오려면 어느 곳에서 오던지 왕복 8시간은 걸리는 곳인데 말이다.
문바위재 내림길에 갑자기 배가 아파온다.
등로에서 30m 정도 들어가서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고적대에서 똥쌌는 넘처럼 욕먹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한다.
그래야 나무도 좋고 나도 좋고 이런걸 불교에서는 自利利他라고 하지.
쉬운 말로는 누이좋고 매부좋고... ㅋㅋㅋ
문바위재(12:40)
문바위
박달령(朴達嶺:12:45)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밝달”에서 온 말로 “밝”은 광명을 비추는 높고 큰 산을 의미하고 “달”은 산과 들을 뜻하는 말로
청옥산과 두타산을 향하여 광명을 주는 맑고 큰 산이라 하여 두 산을 연결하는 안부를 박달령으로
부른 것이라 하는데 정확치 않다.청옥산과 두타산의 중간에 위치하며,
무릉계곡의 박달폭포로 내려서는 분기점이다.
삼거리에는 너른 쉼터가 있고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
박달골과 박달폭포의 뒤편 고개를 뜻한다.
박달고댕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댕이'는 '고개'의 강원도 방언이다.
박달령에서 무릉계곡 가는길
박달재에서 조금 올라서니 키작은 산죽들이 비에 젖어 있지만 등로는 완만하다.
편한 길을 걷는데 다시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진다
좌측 아래는 신선이 살았다는 무릉계곡이건만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의가등(衣架嶝)
청옥산에서 두타산까지는 3.7km이고, 이 두산을 잇는 의가등(衣架嶝)의 중간지점 쯤에 박달재가 있다.
의가등이란 명칭은 두 산을 잇는 능선이 마치 옷걸이 모양을 하는데서 연유한다.
청옥산에서 박달재 가는 초입은 심한 내리막이다.
이곳은 똑같은 구조목 표지판이 2개가 달려 있는데 구태여 2개를 단 이유를 모르겠다.
저것도 민초들의 세금으로 만든걸텐데... 내것처럼 좀 아껴야 되지 않을까?
갑장인 원일님이 힘이 드시는가 보다
신비한 운무속에 휩싸인 청옥산의 모습
힘들게 두타산 정상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니 오늘 처음으로 하늘문이
열리면서 지나온 청옥산이 신비스럽게 산꾼 범여에게 다가온다.
이곳 구간인 청옥산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七寶에 포함된 靑玉
그리고 지금 오르는 두타산(頭陀山)은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상수제자인 頭陀行의 가섭존자를 호칭하는 단어라 그런지 아님
멋진 풍광을 즐기지 못한 범여를 어여삐 여긴 부처님의 가피력인지...
두타산 정상에서 한동안 황홀경에 빠져든다.
힘들게 두타산 정상 이정표
두타(頭陀:dhota)란 佛家에선 번뇌의 때를 벗고 의.식.주에 탐욕을 갖지않고 심신을 단련하는
수행을 말하며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투타행의 제1인 가섭존자를 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頭陀(dhuta)라..모든 번뇌와 티끌을 털고 이 곳에서 내려갈 때는 가벼운 걸음 만이 남기를..
잠시 세속에서 멀리 떠나 이곳 阿蘭若處 頭陀洞川(무릉계곡)에 머물며,험한 옷 입고
험한 음식으로 수행하던 許穆(1595-1661)의 영혼이 쉰음산 두타산성 능선을 타고 올라온다.
짧은 인생 好衣好食하며 살기도 모자랄...
오늘날에, 내가 두고 가야할 모든 것과 내가 간직해야 할 그 무엇을 위해
오늘 나는 이 먼 길을 작은 수행으로 삼아 걸어 가는 것일까...
온갖 생각을 떨쳐 버리고 어둠속에 급한 내림길에 스틱에 온 몸을 의지한 채 길을 걷는다.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에서 두타와 청옥의 이름이 지금의 두 위치와 바뀌어 나타나니,
분명 가장 큰 봉우리는 두타임에 틀림 없으련만,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뒤바뀐 두 봉우리가 20리 남북으로 큰 능선을 이어가고 있다.
두타산(頭陀山:1353m:13:40)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동해 에서 30리 떨어저 있는 산이다
북쪽으로 청옥산과 무릉계곡이 동쪽 으로 고천계곡 남쪽으로 태백산군
서쪽 으로 중봉산 12당골을 거느린 산이다
두타산에서 산줄기는 둘로 나뉜다 서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백두대간 분수령이요
동북으로 갈라진 산줄기는 두타산성과 쉰움산으로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지맥 이다
임진왜란때왜군 5,000명이 백두대간을넘어 강릉거쳐 이 지방 까지 쳐들어 왔을때
바닷가 사람들이 두타산성으로 피난 하고 의병을 조직 왜군과 싸운 전적이 있는 산이다
이곳 두타산 정상에서 산줄기는 둘로
나뉘는데 서북쪽으로 갈라진 산줄기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두타산성과 쉰움산을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청옥산과 쌍둥이처럼 서있는 두타산은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처럼 보이는데 부처의 모든게 아련히 베어있는 이 능선길을 걷는 즐거움
수도자가 두타행의 즐거움을 얻는 그 기분과 같을까?
두타산은 인도 초기불교의 두타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타(頭陀)라는 말은 범어(梵語:산크리스트어)인 “dhuta” 를
소리나는대로 음역한 것으로 버리다, 씻다, 닦다 등의 뜻으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심신을 수련하는 행위, 즉 스님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佛道를 닦는 수행을 뜻하는데 오늘 청옥산을 지나
두타산을 걷는 오늘 대간길은 세속의 길을 벗어나 정진의 길을 걷는 두타행이다.
어찌 함부로 걸을 수 있는 만만한 길이겠는가?
조선중기에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은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서, ‘천하에 산수가 빼어난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고을은 영동만한 데가 없으며, 영동의 산수 중 최고는 금강산이고 그 다음이 두타산이다‘고 기록하였다.
가섭존자(迦葉尊者)
불교에서 두타(頭陀)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 인도의 수행자들은 수행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 열두 가지 두타행을 실천으로 삼았다.
인가(人家)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물면서 수행을 하고 항상 걸식을 하며 걸식할 때는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으며 하루에 단 한번만 음식을 먹고 과식하지 않고 점심 이후에는
과실즙이나 꿀 등도 먹지 않고, 헌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으며 삼의(三衣)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또한 무상관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 곁에 머물고 나무 밑에 거주하거나
지붕이 없는 곳에 앉고 단정하게 앉아 눕지 않는다.
수행자들은 불교 초기에는 잘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산이나 들,
세상을 편력하며 고행하고 수행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는데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칭송되었다.
넓은 두타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이곳 저곳을 둘러보지만 아무래도
청옥산의 신비스러운 仙京이 아무래도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좌측 능선인 무릉계곡과 쉰음산쪽은 모든 산악회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하지만
댓재 방향은 일반 등산객이 아닌 백두대간 산꾼들만 다니는 곳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삼각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삼각점처럼 보이는 대리석만 덩그러니 있다.
두타산에서 10분이란 오랜시간을 머물면서 이것 저것을 구경한 다음 댓재로 향한다.
댓재로 향하는 길에서 뒤돌아보니 아직도 청옥산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다시 인증샷 하나를 남기고...
댓재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1,242봉 갈림길(14:10)
두타산에서 내려오면서 처음맞는 1,242봉은 에전과 달리 많이 변해있다.
이젠 대간꾼들도 왠만한 곳은 정상에 오르지 않고 옆사면으로 가버린다.
이곳도 1,242봉으로 오르는 사람은 별로없고 거의 다 옆사면으로 간다.
나 역시 동료산꾼들과 옆사면으로 가는데 대부분의 시그널이 이곳에 달려있다
1,242봉 정상을 오르지 않고 편한 옆사면을 지나오니 다시 1,242봉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곳에 두타산 1.3km ← 통골0.9km → 이정표를 만나면서 급경사가 나온다.
가드레일 형식으로 만든 로프를 잡고 한참동안 고도를 낮춘다.
지루할 정도로 고도를 낮추면서 내리막길을 내려온다.
통골재(木桶嶺:980m:14:40)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두타산과 댓재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목통령이라고도 부르며 두타산 남쪽 허리가 잘록한 노루목으로 거무소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허나 삼척시 미로면으로 내려서는 길은 없다. 따라서 넘나드는 고개는 아니고 단순한 허리부분이다.
목통령은 원래 순수한 우리말로 동물의 '목'에 해당하는 '목통'이다.
한자어로 표기하는 '木桶嶺'은 적당히 음차한 것이다.
이곳부터 고도차가 그리크지 않는 등로를 걷는데 두타산 아래와는 달리
누런 창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황장송(黃腸松)이라 부르는 멋진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다음 구간 초반에 만나는 황장산이 이곳의 소나무 때문에 생긴 지명일까?
상큼하고 깔끔한 공기와 피톤치드의 향기에 같이 동행한 갑장인 원일님께서
연일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나 역시 기분이 너무 상쾌하다
강원도를 왜 청정지역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1,028봉 오르는 길에서 등로사이로 보이는 1,242봉의 모습
계속해서 멋진 소나무를 만나고...
1,028봉(15:10)
정상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건설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이 있다.
지나온 두타산의 신비로움이 마치 히말라야의 메리 설산처럼 활홀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원일님과 비바리. 쾌도세무님과 마지막 베낭털이를 하여 간식을
겸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댓재로 향한다.
1,028봉 정상 건설부 삼각점(△ 443 재설 776 건설부)
1,028봉에서 바라본 두타산의 모습
1,028봉에서 바라본 삼척시 미로면의 산그리메
로보캅처럼 생긴 암릉을 지나고...
명주목이(15:45)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에서 하장면 번천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
이곳부터 남진하는 산꾼들은 대부분이 이곳에서 햇댓등을 지나 산신각으로
내려오지 우회로 내려가는데 박달령부터 발가락에 물집이 생긴 범여도 우회길로 향하지만
북진때의 사진으로 편집을 하여 후답자들이 산행하기 위한 바른길로 인도한다
햇댓등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유래를 보면
횟대는 경상도와 이북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되는 사투리로
"햇댓"은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 나온(岬이나 臺)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 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래도 이 햇댓등은 조금 더 가면 만나는 댓재 부근에 있는
산신각 때문에 생긴 지명인듯 싶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山神이 강신하기 가장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山神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生竹)를 말하며,
두 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었다.
햇댓등에서 산신각 마당 앞을 지나 댓재로 향한다.
산신각(15:57)
댓재 광장 바로있는 산신각은 “頭陀山 山神閣”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산신각은 쉰음산에 있던 것을 고갯마루로 옮겨 왔다고 한다
산신각 내부를 구경하고 싶지만 자물쇠를 잠가놓아 내부를 볼 수가 없다
드디어 댓재로 내려서며 30여km를 12시간 30분간의 대장정...
그것도 힘든우중산행으로 마쳤다는 강한 희열감을 맛보면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지리산 종주보다 힘들다는 덕유산 종주, 덕유 종주도 미치지 못한다는 백복령에서 청옥·두타-댓재 구간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을 생각하게 하는 고마운 길이다. 특히 오늘 구간처럼 내가 발걸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이 나를 이끌 때 자연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신체의 살가움과 고마움도 함께 깨달을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자연과 소통방법을 배우는 데에는 백두대간 만한 대상이 없다'
댓재(810m:16:00)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 위치하며 두타산과 황장산을 잇는 백두대간상의
고개로 삼척의 진산인 두타산 산행은 댓재에서 부터 시작이 된다.
큰 산줄기를 넘어가는 고개의 의미인 “대고개”가 변음 되었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山經表에는 죽현(竹峴), 고산자 김 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죽령(竹嶺)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며 조릿대(산죽)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죽현,
죽치령이라고도 불리며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을 잇는 옛 고갯길로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고개인데 1984년 10월 이곳으로 424번 지방도가
개통되면서 지금의 댓재가 되었다.
댓재 도로개통 기념비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백두대간 댓재 표시석댓재 도로옆에 있는 공용수도에서 깔끔하게 씻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커다란 컵에 소주 한잔을 마신다.
그리고 다음구간에는 불알친구 아들 결혼식 때문에 댓재에서 피재까지는
나홀로 산행을 해야 하기에 건너편 댓재 휴게소 전화번호를 적은 다음에
버스에 올라 민둥산 아래에 있는 음식점으로 가서 산채 비빔밥 한그릇 먹고
서울로 귀경한다
다음 구간에 나홀로 산행때 묵어야 할 민박집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백두대간 2차 남진(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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