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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구대간 남진 제6구간 - 진고개에서 대관령까지

by 범여(梵如) 2013. 8. 12.

☞산행일자:  2013년 8월 10일~11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초가을 날씨처럼 선선하고 바람까지 살랑살랑

산행거리: 도상거리 25.8km (GPS 23.5km)  / 9시간 20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30명과 함께

☞ 산행코스: 진고개-1,243봉-1,312봉-노인봉 갈림길-노인봉-노인봉 갈림길-노인봉대피소

                 안개자니 갈림길-소황병산-1,272봉-매봉-헬기장-1,100봉-동해전망대-1,142봉

                       곤신봉-대공산성 갈림길-늦은목이-선자령-새봉-강원항공 무선표시소-kt중계소

                기상관측소-대관령

 소 재 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도암면 /  강릉시 연곡면, 사천면, 성산면

 

 살다살다가 올해처럼 더위로 고생을 해보기는 처음이다.더워도 너무 덥다.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땀이 비오듯이 흘러 내리니...

그래도 백두대간을 비롯한 산행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범여는 이젠 매 주말 산행은 종교처럼 習에 젖어있는 느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인터넷에서 내일의 날씨를 확인하고 늦은밤인 11시에

베낭을 꾸려 탑승장소인 양재역으로 가기위에 집을 나서는데 쇼파에 앉아있는

마눌님은 소가 지붕위에 있는 닭쳐다보듯 한다... 늘상 하는 일이라 무심한가보다.

양재역에서 버스에 오르니 평소와는 달리 모르는 산꾼의 얼굴이 많이 보인다.

늘상 인원이 적어 고민하는 대장을 위해 김포패밀리의 오야지님이 동네 산꾼들을 모셔왔다.

버스는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횡성휴게소에서 30여분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

진부I.C를 빠져나와 월정사 앞을 지나 뱀처럼 꼬불꼬불한 도로로 오르는데

버스가 상당히 힘겨워하는 모습이다. 이윽고 02시 30분에 진고개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에는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가득하고 날씨는 약간의 한기가 들만큼 서늘하다.

오늘따라 우 대장님이 하지않던 스트레칭 체조까지 한다.

기념사진을 찍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산들바람까지 불어와 기분이 쿨~~~하다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와 지도

진고개~대관령 구간 3D 지도

진고개(02:40)

오늘 구간의 산행이 시작되는 진고개는 평창군 도암면 병내리와

강릉시 연곡면 삼산 4리 사이의 6번 국도상에 있는 고갯마루이다.

예전에 이 도로가 포장이 되기 전에 비만 오면 땅이 질어서 진고개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또 다른 설은 '긴' 하는 강릉 사투리가 '진'이어서 남쪽 비탈이

9km, 북쪽 비탈이 11km여서 도합 50리의 '긴 고개'란 뜻에서 진고개라 했다고도 한다

대관령의 보조역으로 개설된 도로이며, 강릉 이북의 해안지역에서는 이 길을 이용해

 내륙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리가 가깝다.

정상에는 산장과 휴게소가 있으며  ‘장현’ 또는 ‘이현’이라고도 불렀다.

진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듯 하다

이곳을 지나 노인봉가는 길이 세번째이건만 늘 국공파의 단속구간이라

3번 모두 어두운 밤길에만 걸어야만했기에 늘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딱 한번 대낮에 걸었던 기억은 10년도 넘었던 시절에 노인봉에서 소금강으로

빠지는 길은 낮에 걸었던 것 같다.

진고개 휴게소에서 빠져나와 능선으로 올라서니 예전엔 보이지 않던

시설을 잘해놔서 걷기에는 아주 좋다. 오늘구간이 백두대간중에 가장 좋은 길이다.

능선 안부에 오르니 우측으로 엄청나게  큰 밭에는 개망초를 비롯한 잡초만 가득하다

첫번째 이정표(02:55)

이정표를 지나니 4년전엔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많이 보이고 등로는 아주 좋아

편안하게 노인봉으로 향하는데 우측 황병산 군부대 불빛만 산꾼을 반긴다

노인봉 삼거리(03:45)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이 조금 넘어 노인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250m 떨어진 곳에 노인봉 정상이 있다.

노인봉은 백두대간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워낙 유명한 곳이라 삼거리에

베낭을 벗어놓고 노인봉으로 오른다.

노인봉(老人峰:1338m:03:50)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및 평창군 도암면에 걸쳐 있는 봉우리로

오대산국립공원권에 속하는 산으로 황병산과 오대산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산자락에 소금강 계곡을 거느리고 있으며 옛날 심마니가 산삼을 캐러 왔다가

선잠이 들었는데, 꿈에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 산삼 있는 곳을 일러주더라고 한다.

그래서 잠을 깬 심마니가 꿈에 노인이 일러준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어 많이 캤다고 한다.

그리하여 꿈에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 산삼이 있는 곳을 일러주었다고 하여

그 때부터 노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설은 멀리서 보면 노인봉 정상의 바위가

마치 머리가 하얀 노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노인봉이라 했다고도 한다.

 

노인봉 아래의 소금강은 1970년 우리나라 명승1호로 지정되었다.

 일부에서는 연곡 소금강, 오대산 소금강, 청학동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일컫는 '소금강'이란 이름은 율곡 이이가 청학동을 탐방하고 쓴

 

《청학산기》에서 유래되었으며 무릉계곡 바위에 아직 '소금강'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낙영폭포·만물상·구룡폭포·무릉계로 이어진다.

산의 정상에는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산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에서 발원한 청학천이

13km를 흘러내리며 이룬 소금강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소와 담, 폭포 등 30여 개가 넘는

 경관지를 빚어냈는데 특히 금강산의 그것과 흡사한 만물상·구룡연·상팔담 등이 볼 만하다.

 

노인봉에서 동해바다로 쳐다보니 주문진읍의 불빛과 바다의 고깃배가 아직도 새벽임을 알려준다.

다시 노인봉 삼거리로 돌아와서 베낭을 메고 내려서니 노인봉 휴게소와

홍수방지 감시탑이 보이고 우측 대간길에는 간이화장실 2개가 있다.

이곳에서 길이 좋은 등로로는 소금강 내려가는 길이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간다

법을 어기면서...

이곳에서부터 매봉까지 10여km 멸종위기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출입을 금지한단다. 내가 보기에는 명분은 뚜렸한데 아둔한 내머리로는

국공파들의 설명이 정말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자기들의 편리를 위해 만든건 아닌지...

오늘도 법을 어겨가면서 禁道의 목책을 넘어서 대간길로 접어든다.

이곳은 단속구간이라는 이유로 진고개에서 노인봉까지 2~300m 단위로 서있던

이정목과 구호목은 온데간데 없고 내용을 알 수 없는  B-1에서 B-7까지의 표시판이

소황병산 직전까지 500m 단위로 나타나는데 이곳 역시 고도차가 별로없어 걷기는 편하다.

이곳이 평창군 도암면 안개자니 갈림길 정도로 여겨지는데 어둠속에다

우거진 숲때문에 더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면 묵묵히 求道者처럼 걷기만 한다

맷돌바위(04:58)

조금씩 고도를 치고 오르니 앞에서 산꾼들의 소리가 들린다.

김준길 대장님과, 아리송 아우, 솜낭자가 길을 걷고 있다.

어느 산꾼이 명명한 맷돌바위를 지나자마자  철조망이 나타나고 개구멍이 보인다.

개구멍(?)

맷돌바위를 지나니 삼양목장 초지로 들어가는 곳에 목책과 함께

철조망을 쳐놨는데 그렀다고 이 나라 대간꾼들이 안가겠는냐?

간단하게 개구멍을 통과하여 초지로 들어서니 대간꾼들에게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인 국공파 초소가 나오는데 다행히

이들은 현재 근무하지 않는다.

단속초소(05:05)

목책을 넘어 삼양목장 초지로 들어오니  국공파 단속초소가  있고  다행히

단속요원이 없어서 동료산꾼들과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한다

동료산꾼들과 휴식을 취하면서...(하늘마음님 사진 인용)

語不成說

오늘 산행구간에 노인봉 휴게소에서 매봉 까지 "오대산국립공원"이고, 그래서

이곳에 있는 희귀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곳을 강력하게 단속을 한단다 

그렇다면 앞에 보이는 "삼양축산대관령목장"은 국립공원 안에 있는 私設 목장이

분명한데,이렇게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며 국립공원을 개인에게 임차해 주어

기업 이윤을 창출 하도록 해주면서, 한편으로 자연보호를 하겠다고 국공파는

대간 산꾼을 단속을 하고 있어 힘없는 民草들만 범법자로 만드는 이 자태...

분명 어불성설이다...

휴식을 취한 다음에 초소에서 바라보이는 소황병산으로 향한다.

소황병산(小黃柄山:1,430m:05:20)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이라기 보다는 그냥 목장 가운데 여인네의 乳頭처럼 볼록 생긴 봉우리이다.

그렇지만 오늘 산행구간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정상은 대관령목장의 초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표지석과 함께 안내판이 서 있다.

황병산 정상은 대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황병산은 ‘누른(黃) 자루(柄)’처럼 길다랗게 생긴 산이라 붙여졌다.

소황병산은 황병산과 산허리를 맞대고 있어 같은 산이지만 높이가 조금 낮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청학동 소금강 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지만 내륙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고산 구릉지대다.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 완만한 구릉지를 모두 목장용 초지로 개발하여 지금은 수천 두의 소를

방목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목장이 되었다.

 

삼양식품 대관령목장과 한일목장, 그리고 농촌진흥청의 고랭지 시험장의 경작지도 이 지역에 있다.

소황병산 산에 서면 이후에 밟아야 할 매봉과 곤신봉, 선자령 등 대간 봉우리들이 시계방향으로

펼쳐지고 그 안에 드넓은 목초지가 그 주변 횡계리의 시골풍경도 아스라하게 내려다보인다.

소황병산 정상 초지속에 뭍혀있는 1등 삼각점(△연곡26 / 2005 재설)

소황병산 정상에서의 단체사진

황병지맥 가는 길

황병지맥(黃柄枝脈)이란?

백두대간 소황병산(1328m)에서 분기하여 황병산(1407m),용산(1028m).두타산(.박지산1394m).

상원산(1421.4m)과 옥갑산봉(1285m)을 거쳐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아우라지 까지의 도상거리 53km를 말한다.

특히 이 산줄기는 1.000m가 넘는 무명봉들이 부지기수로 연봉을 이루며 장쾌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천, 동쪽으로는 송천을 포함한 물줄기로 分水하여

한강(동강)의 水量을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소황병산에서 바라본 황병산의 모습

황병산(黃柄山, 1,407m) :정상에는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각 이동통신사들의

중계소가 있으며 민간인들의 접급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란다.서부전선을 지키는

해병대 청룡부대 수색대들이 겨울에 훈련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소황병산에서 바라본 대관령 삼양목장(大關嶺三養牧場)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과 대관령면에 걸쳐있는 동양 최대의 목장으로 삼양식품그룹의 계열사인

삼양축산(주)가 소유한 목초지, 소황병산(1,430m) 정상에서 대관령 쪽으로 이어진 해발고도

850~1,470m의 고산 유휴지를 개척하여 초지로 개발하였다.

목초지 면적은 동양 최대인 2000만㎡으로, 길이가 약 8km, 너비가 약 3km이다.

여의도 면적의 7.5배, 남한 넓이의 1/5,000에 이르는 드넓은 초원과 목가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있어 새로운 관광지로 떠올랐으며, 빼어난 경관을 배경으로 여러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하기도 하였다.

 

2001년 기업 홍보차원에서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총연장 약 22km 길이의 순환도로와 초지 곳곳에 난 도로까지 총 120km의 길이 나 있는데,

방문자들은 순환도로에서 자동차로 달리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남한에서 승용차로 오를 수 있는 최고(最高) 지점인 소황병산 정상에서는 주변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목장 북동쪽 끝에는 강릉 일대의 동해안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해전망대가 있다.

 

목장은 해발고도가 낮은 아래쪽 꽃밭재 일대인 1단지, 소황병산쪽 초지인 2단지로 나누어지며,

1단지에는 축사 16개동, 사무실, 사택, 연수원, 정자, 산책로, 숙박·편의시설, 휴식공간인 청연원 등

시설이 있고, 2단지는 축사 이외에는 거의가 초지이다.

주변에 오대산국립공원·월정사·용평리조트· 대관령박물관 등 관광지가 많다.

 

두산백과사전 인용

이젠 완연히 동이 트면서 엄청나게 넓은 대관령 목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조금후면 가야할 매봉, 곤신봉, 선자령은 물론이고 우측 서남쪽으로는

용평 스키장이 있는 발왕산이 보이고 좌측으론 제왕산과 다음구간인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이 한 눈에 들어올만큼 날씨가 좋다.

일기예보에는 강원도에 국지성 소나기가 온다고 해서 레인코트와

비옷바지,우산까지 가져왔는데 오늘도 기상청은 구라청이 되버렸네 

소황병산에서 동료산꾼들과 한참을 머문 다음에 대간길로 복귀를 한다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는 주문진항구 위로는 일출이 시작되려나 보다(05:28)

다시 대간길로 복귀를 하여 철조망과 목책이 처져있는 단속구간으로 접어든다.

이곳에 들어서니 진짜 단속해야 할 대상은 대간 산꾼이 아닌 멧돼지이다.

조금전에 그랬던 흔적으로 흙이 그대로 보이는데 엄청나게 넓은 면적의

산길을 마구 파헤쳐서 초토화를 시켜놨다... 엄마나 심한지 등로가 안 보인다.

산당귀의 유래와 효능

등로 주위에는 산당귀가 참으로 많이 보인다

산당귀의 유래를 보면

당귀’라는 이름은 중국의 옛 풍습에서 유래됐다. 옛날 중국의 부인들은 남편이 전쟁터에

나갈 때 당귀를 품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전쟁터에서 기력이 다해 죽게 되었을 때 당귀를 달여 먹으면 기운이 다시 회복돼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당귀는 대표적인 보혈제로 꼽히는데, 팔다리와 허리의 냉증, 생리불순이나 생리통, 히스테리,

갱년기 장애, 두통, 빈혈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자궁을 튼튼하게 하고 몸의

물질대사와 내분비 기능을 활발하게 해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 따라서 체질이 허약한 사람이나

임신이 잘 안 되는 사람,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 좋다. 건강한 사람도 차로 마시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안정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변비가 있는 사람이나 당뇨병의 혈당치를 낮추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약재로 쓰인다.

한약 특유의 향을 내는 한약재 중 하나로 당귀가 있다. 쌈 재료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는

당귀는 그 특유의 향 때문에 말린 뿌리를 삼계탕이나 여러 탕 종류에 한 두 조각 넣어

음식의 느끼한 맛을 줄이는 데 사용됐으며 뿌리는 말려 약재로 썼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그 이름에 약성과 특징을 담고 있는 데, 당귀의 경우 당(當)은 ‘당연하다’는

뜻이고 귀(歸)는 ‘돌아간다’는 뜻으로 ‘당연히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 몸속의 기(氣)와 혈(血)이 혼란해 병이 생겼을 때 이를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약성을 갖고 있는 식물이 바로 당귀다.

당귀는 특히 혈(血)과 관련된 질환에 두루 쓰였는데, 주로 부인과 질환인 월경불순이나

폐경에 쓰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또한 모든 질환이 혈(血)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당귀는 널리 쓰이는 한약재 25종중에서도 여덟 번째로 많이 쓰였다.

매봉까지 단속구간이라 국공파들이 나오기전에 매봉을 통과하려니 마음이

급한데 자꾸만 주위에 많이 보이는 당귀가 눈에 거슬리고 조금을 내려가니

김포오야지님이 수하들과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오이 한조각을

얻어먹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좌측 계곡에 꽤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아마 이곳이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인 개울이 대간길에선 아마 이곳이 처음일 것이다.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물을 건너지 않기 때문에... 개울에 수건을 적셔 땀을 닦는다

산당귀를 캐는 주원아빠

우리 산악회의 아이돌 키즈인 주원아빠와 같이 가면서 당귀를 가르쳐주니

장모님 갖다 드린다고 당귀를 캐는데 약관 30대에 백두대간을 타는걸 보니

참으로 신기하다. 요즘 젊은이들 얼마나 허약한가... 오늘 같이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참으로 많이 나누는데 정말 대견스럽다.

조금을 더 지나니 동료산꾼들이 아침밥상을 펼치고 식사를 한다.

아마 이곳에 철책을 보고 단속구간이 끝난줄 알고 밥상을 펼치는데

아직까지 단속구간인 매봉을 빠져 나가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나 역시 이곳에서 동료산꾼들과 어울려 아침 식사를 한다.

오늘처럼 07시 이전에 아침을 먹어보긴 처음이다. 날씨 하나는 정말 죽인다

(하늘마음님 사진 인용)

꽃말이 “원망”인 며느리 밥풀도 만나고...

홍수경보시스템(07:05)

지나온 소황병산과 황병산의 모습

가야할 매봉의 모습

삼양목장 목초지 끝부분을 거니는데 목초지 안에 목책을 쳐놓고

‘백두대간 훼손지 복원 사업중’이란 팻말이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는

복원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러려면 첨부터 허가를 하지 말아야지.

이런걸 두고 눈감고 아웅하는거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이곳은 바람이 엄청 센 모양이다. 목초지에 간간히

서있는 나무들이 한결같이 동쪽으로 가지가 뻗어있다. 

지나온 소황병산쪽의 모습

매봉까지 가는 길엔 국공파들의 경고판이 자주 보이고 저 멀리 지난구간을

걸었던 오대산구간과 그 너머 설악산 구간까지 보일 정도 날씨는 좋다.

매봉가는 임도에서 바라본 지나온 소황병산의 모습

매봉가는 임도를 따라가다가 좌측 오르막으로 올라서야만 매봉 정상으로 오르는데

대부분의 산꾼들은 이곳에서 직진하여 그냥 임도로 걸어가 버리는 경향이 있다.

4년전 백두대간 북진때 임도로 가서 만났던 매봉의 표시석 (2009. 8. 23)

가시거리 확보로 인하여 오늘 지나온 소황병산과 노인봉이 보이고 그 너머

오대산군과 좌측으로 뻗어진 한강기맥길의 상왕봉, 비로봉, 호령봉과 계방산이 보인다

또다시 눈을 돌리니 지나온 설악산의 능선들이 산꾼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곳 임도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매봉 정상으로 오른다

능선 안부에 오르니 다시 잡풀이 가득한 임도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매봉으로

오르니 아예 길이 없는데 아이돌 키즈인 길빛님과 주원아빠가 따라나서는데

숲을 마구 헤치면서 매봉을 찾아 나서는 범여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이다.

세상사 쉬운게 어디 있드냐... 기맥과 지맥길은 60% 이상이 이런 곳인데 ㅋㅋㅋ

매봉(膺峰:1173m:07:35)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경계에 있는 높이 1,173m의 사천면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옛날 미데기(바닷물)가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 매 한 마리가 겨우 앉을 자리만 남기고 이 봉 꼭대기까지 바닷물이

가득찼다고 해서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 불러오고 있으며 매 응(膺)자와 봉우리 봉(峰)자를 쓴다.

정상에는 건물이 부서진 흔적이 보이면 3등 삼각점이 있다

매봉 정상 삼각점(△연곡 320 / 1985 복구)

대간 능선을 경계로 하는 드넓은 목장은 매봉을 지나면서도 계속된다.

정상 부근에는 기상관측 시설이 있다. 독수리의 둥지가 있었거나 봉우리가

독수리의 형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모양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런 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목초지 개발과정에서 평탄 작업을 하고

주변에 키 큰 나무도 모두 뽑혀나가는 등 이름 붙여진 때와는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매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매봉 정상을 우리만 밟았다는 짜릿한 희열을 느끼면서 다시 임도로 복귀하는데

임도로 복귀해서 보니 오늘도 1L짜리 날진 수통을 잊어 버린다

다행히 같이 매봉까지 갔던 길빛님이 물한통을 주기도 했지만 날씨가 덥지않아 다행이다

잠시후 단속구간인 매봉 헬기장을 벗어나 지긋지긋한 국공파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매봉 헬기장(07:45)

이곳이 매봉 정상은 아니지만 대간 산꾼들은 이곳을 매봉인줄 알고있다.

국공파의 단속 팻말에 매봉이라고 써놨고, 조그만 돌에다가 어느 산꾼이

메직으로 매봉이라고 써 놓은 것이 안쓰럽게 보인다.

노인봉대피소"에서 부터 이곳까지 "매봉 헬기장"까지라고 단속구간이라 알려 준다.

목적이 "야생 동식물 서식지 보호"라고 명시해 놓았는데 정작 이 지역엔 나무를 거의

전부 베어내고 목초지를 만들어 목장을 만들었고, 목장 관리를 위해 수많은 트렉터 등

차량들이 운행 되고 있으며 "야생 동식물 서식지 보호"가 목적인지, "목장 보호"가 목적인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철조망을 쳐놓고 ‘식생 복후 철거예정’ 팻말까지 붙혀 놓았다.

제발이지 지금이라도 산꾼들을 惑世誣民하시지 마시길...

매봉 헬기장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초지로 내려간다.

초지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진짜 매봉의 모습

이별을 준비하는 동자꽃의 모습

선자령 가는 길

매봉을 돌아 내려오니 선자령까지 (도상거리 약 8km) 풍력발전기와 동행하게 되는데

날개의 반지름이 무려 40m라고 하는데 위윙거리는 날개소리가 산꾼을 겁박한다.

에너지가 부족한 이 땅에서 풍력이라는 천연자연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고자 설치한 장치라고 한다.

수력 및 화력 발전소를 건설하자면 인근 주민들로부터 많은 민원이 제기되고 자연 파괴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택한 방법이라고도 한다. 요즘 한창 회자되는 신재생에너지, 지속성장이 

가능한 에너지, 脫(탈)석유 에너지, 녹색에너지인 셈이다.

풍력 발전기가 2008년 기준으로 49개라고 하는데 자세히 세어보진

못했지만 지금은 그 보다도 훨씬 많아보이고 이곳을 지나노라면

풍력발전이 아주 발달된 덴마크나 노르웨이에 온 기분이다.

매봉에서 남쪽을 향해 초지 가장자리 오솔길로 20여분 내려가면  차도로 진행하게 되는데

오른편은 광활한 대관령삼양목장 초지가 펼쳐진다.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차도가 지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관광객을 위해 대간 능선이

차도로 변하고 있으니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백두대간이 만신창이가 돼 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소황병산에서 부터 대관령에 이르기까지 햇볕을 가려 줄만한

숲이 없으므로 온몸에 햇볕을 받고 걸어가야 한다.

풍력발전 예찬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높이가 수십미터나 되는 몸통에다가 직경이 40m나 되는 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니 건축기술에 도움을 가져오며, 발전을 하는 기계장치 및

부품개발에도 적지 않은 파급효과를 가져온다는 논리이다.

풍력발전기가 이토록 유용하니 이 땅의 수호신이라고 불리어져야 한다는 생각 마져든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전력대란에 비상이 걸려있는 이 싯점에 풍력발전기는 많이 건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조물을 보면 왜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걸까. 그리고 왜 수호신이라기보다는

괴물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까.

난 사실 이 많은 풍력발전기들이 얼마나 많은 전력을 생산해내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생산된 전력은 어디에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보호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늘 구간(특히 풍력 발전기가 서 있는 구간)에는 임도가 거미줄처럼 사통팔달로 얽혀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임도가 목장 운영에 필요해서 예전부터 존재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풍력발전기를 연결하는 도로로 이용된다.

풍력 발전을 위해 마루금의 도로를 더욱 확장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풍력발전기가 고장이라도 나면 차를 몰고 와야 하니 임도가 필요할 것이다.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보호한다는 풍력발전기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오늘 구간은, 입으로는 ‘자연보호’ 실제로는 ‘자연파괴’라는 생태정신 분열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나무라고 있다.

저멀리 용평스키장이 있는 발왕산도 아련히 보인다

이름모를 야생화가 산꾼을 반기고...

단속구간이 끝나는 매봉이 지나서도 단속 표지판을 만나니 짜증이 난다

목장 초지의 고도가 800에서 1,470에 이르지만 초지로 걷다보니

그냥 임도로 둘레길 트레킹하는 느낌이 든다.

잠시후에 만나야 할 동해전망대의 모습

1100고지(08:15)

1,100고지에서 동해전망대 가는 길은 자갈길 임도에다가 햇빛을

가릴만한 그 어느 구조물도 보이질 않아 더워서 미칠지경이지만

이곳 날씨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초가을을 연상케한다

몇년전  갔었던 일본 홋카이도의 여름날씨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표시판도 자주 보이고...

동해전망대(1,140m:08:30)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과 평창군 도암면 경계 능선에 있는 전망대로

4년전에 없었던 멋진 데크목 전망대를 만들었는데 전망대에 올라서니

주문진과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해전망대는 등산객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삼양목장 측에서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

그래서 전망대 오른편엔 관광객을 위한 넓은 주차장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주문진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아침의 일출을 보기에 좋은 곳이라고 하며 사방으로 전망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라면을 생산한 삼양식품 전윤중 회장을 기리면서 만든 전망대가 오히려 흉물로 변해있다.

아랫것들이 했다면 그 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대간 능선을 원상복귀를 했으면 하는 것이 범여의 생각이다.

동해 전망대에서 바라본 주문진의 산그리메

오늘 이곳까지 계속 같이온 산악회 키즈들과 신발을 벗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시화님 사진인용)

전망대 데크 바로옆에는 이런 표지판도 있고...

삼양라면 전망대라고 만든 FRP  전망대는 흉물처럼 방치되어 있고 그 속엔 쓰레기만 가득하다.

4년전 이곳 산행을 할땐 너무 바람이 세서 이곳 안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바람의 언덕 삼거리(08:40)

전망대에서 400m 정도 차도를 따라 남진하면 삼거리를 만난다.

거기 삼거리 표지판에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지'라 표기돼 있고,

이정표에 '(동쪽)선자령 4km, (북쪽)동해전망대 0.4km, (서쪽)정문 3.6km'라 적혀 있다.

여기서 정문이란 양떼목장 초입에 있는 아마 관광목장 정문인 것 같다.

그리고 길옆 목초지에 '목초는 우유와 고기입니다, 해발 1,150m'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면적이 600만평, 여의도의 7.5배이며,

동양최대의 목초지라고 하는데 소는 보이지 않는다.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공중화장실이 있고 바람의 언덕이라는 조형물을

따라서 조지 가운데의 임도를 따라서 걸어간다

삼양목장 안내판

‘바람의 언덕’ 표지판 뒷쪽은 ‘동해전망대’라고 써놨다 

잠시후에 관광객을 태우고 버스 한대가 이곳에 도착한다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형성된 대간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지리학의 개념과 이론을

제공하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신앙이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우리민족의 精氣를 말살하기 위해 대간 마루금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워낙 많이 박았기에 아직도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엔 또다른 쇠말뚝이 박혀 있으니...

풍력발전기를 세우려면 쇠말뚝이 아니라 이 보다 몇 백배 더한 파일을 대간 마루금에 박아야 한다.

대간 마루금에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아 우리 정기를 말살하면 안 되고 우리가 파일을 박아

스스로 정기를 파괴해도 된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지 자꾸만 망가지는 대간길이 안쓰럽기만 하다 

가야할 선자령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와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계속해서 풍력발전기가 대간길에서 만나는데 오늘은 바람이 그리세지 않아서

그런지 윙윙하는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눈에 거슬린다

1,140봉(08:50)

이곳에서 닫혀진 차단기 사이로 좌측 임도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임도에서 바라보니 저멀리 발왕산이 아련히 보이고...

임도에서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겠다고... 웃기지 마소

곤신봉 (坤申峰:1127m:09:15)

곤신봉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강릉시사」에 의하면 곤신봉은 강릉부에서 볼 때 거의 서쪽에 있는데

전통적 방위 용어로 곤신(坤申)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황병산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강릉 七事堂 서북에서 제일 높고 방위가

坤申方이라 해선 곤신봉이라 한다고 한다.

 

이 능선의 줄기에 명당이 많아 묘자리로 많이 쓰이는데 이곳에서 부는 바람이

세차서 곤신봉을 향해 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곤신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능선부에 대공산성(大公山城)이 있고

거기서 더 내려오면 성산면 보광리에는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이 있다.

대공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주군왕릉은 강릉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묘이다 

자갈길 임도를 따라서 300m 정도를 내려가니 대공산성 갈림길이 나온다.

대공산성 갈림길(09:20)

곤신봉에서 300여m 정도를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오고 풍력발전기를 만나는데 임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정표에 '곤신봉 0.3km,  대공산성 1.3km, 선자령 2.2km, 보현사 3.4km'라 적혀 있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은 일명 보현산성 혹은 대궁산성이라고도 하는데, 발해 왕 대조영(大祚榮)이

쌓았다고도 하고, 고구려 유민이 쌓았다고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대공산성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오니 풍력 발전기 그늘에서 동료산꾼들과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을 나눠 먹고 10분정도 쉬었다가 선자령으로 향한다.

나즈목이(09:50)

목장도로에서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로 내려가는 고개로

‘낮은 목’. 강릉 사투리로 ‘안부’라는 뜻이다.

낮으목이를 지나 조금가다가 임도를 버리고 숲속으로 향한다.

우측 임도로 가도 잠시후에 다시 만난다.

등로에서 만난 모싯대

늦으목이 조금지나 헤어졌던 임도길을 다시만나 선자령으로 향한다

안부에 올라서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서 선자령으로 향한다

선자령 정상에 있는 이정표

임도에서 300m 를 올라오니 넓은 공터의 선자령이 나온다.

선자령 정상에 있는 기상관측장비

선자령(仙子嶺:1157m:10:20)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우뚝 솟아 있다.

산 이름을 '산'이나 '봉'이 아닌 선자령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기록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경표(山經表)〉에는 '대관산(大關山)'이라 하고.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그 아래 보현사의 이름에 따라

'보현산(普賢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太古寺法)〉에는

 '만월산(滿月山)'으로 적혀 있다.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자령은 해발 840m인 대관령의 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대관령에서 약 6km밖에 되지 않아 산행이 힘들지 않고

겨울철 적설 등반지로 적합하다. 대관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오솔길이었으나, 이 고갯길을 조선조 중종때

이 지방 사람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따라서 거의 평지길이나 다름없는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되므로 산길은 매우 완만하다.

이 능선길은 적설기와 신록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적설기에는 많은 눈에 덮여 은세계를 이루어 황홀하고,

신록기에는 새로 자라난 연녹색의 초원에 야생화가 만발하여 화원을 이루고 있다

선자령 표시석 뒷면

대부분 산의 봉우리는 "산","봉","대"로 불리고 고개는 "령","재","치","현"으로 불린다.

그런데 선자령은 산의 봉우리인데 "령"으로 이름지어져 있다.

이 지역의 지형이 완만하고 다른 길과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 같다.

정상석의 뒷쪽을 보면 선자령은 옛날부터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을 있는 고갯길이었고,

대관산(산경표), 보현산(동국여지지도와 사탑고적고 기록), 만월산(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 기록으로,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됨)

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선자령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선녀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와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선자령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앙증맞은 작은 표시석

선자령에는 표시석이 2개나 있는데 커다란 표시석은 동해전망대와 곤신봉에서도

보일만큼 너무 크고 능선위로 툭 튀어나와 자연과의 부조화에 눈에 거슬렸는데

그 옆에 산꾼들의 눈길도 주지않는 앙증맞은 표시석이 더 정감나게 보인다

선자령 정상 1등 삼각점(△ 도암 23 / 1991 복구)

선자령 정상에서 8분정도 머무르다 오늘의 날머리인 대관령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에는 남쪽으로 바라보니 다음구간 능선인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이 보이고

능경봉 좌측에는 고려시대 말기 힘없던 임금 우왕의 恨이 서린 제왕산도 보인다 

남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용평스키장이 있는 발왕산이 보이고 그 앞으론

2018년 동계 올림픽이 열릴 평창 알펜시아와 횡계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선자령에서 대관령까지의 등로는 완전히 둘레길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편한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선조였던 고형산이란 분의 노고 때문이 아닐까

 

대관령 개척의 선구자, 고형산

강릉대 교수 장정룡이 쓴 『대관령문화사』(동해안발전연구회, 1996)는 대관령의 역사와 개척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그의 글에 따르면, '중종 6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민력을 동원하지 않고 몇 달만에 대관령을 개척하여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청군이 이 길로 한양을 쉽게 침범하였으므로 인조가 대노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고

이른바 부관참시했다'는 종래의 전설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고형산은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축출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훗날 그의 부관참시는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뿌리를 둔 사건일 뿐, 대관령 개척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병자호란의

공간적 배경과 대관령 역시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어려웠던 시절에 도로를 개척한 공로를

일관되게 부정적 측면으로 폄하한 이유 또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고형산이 대관령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장정룡의 글은, 고형산을 대관령 개척으로 동서 교류의 새 역사를 이룩한 인물로 결론짓는다 (펌글)

선자령에서 대관령 내려가는 길은 흔히 산꾼들이 말하는 고속도로다

오지산행만 하던 범여의 두 발이 오랫만에 호사를 누린다

가야할 항공무선 표시소도 보이고...

다시 숲길로 걷는데 우리동네 뒷산인 대모산을 걷는 느낌이다.

이윽고 삼거리가 나오는데 양쪽 다 대관령 가는길이지만 대간길은 좌측이다

삼거리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치고 오르니 새봉이 나타난다.

새봉(11:10)

정상에는 기상예방 시스템  장비가 설치되어 있고 예전에 없었던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강릉으로 연결되는 영동고속도로가 보이고 강릉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새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릉시내와 영동고속도로

고추잠자리를 잡으려고 애쓰는 보라 아우님

강릉시 지도

 

강릉의 지명유래

 강릉시는 옛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기원전 129년에는 위만조선에 영속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벌하고 한나라에 귀속,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랑 또는 하슬라라고 불리었다.

 

그 후 신라 진흥왕 11년(550년)에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라 하였고, 고려 충열왕 34년(1308년)에 강릉부로 개칭 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있어 북쪽으로원산에서 남쪽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 태조 4년(1395년)에강원도로 개칭하였고, 고종 33년(1896년)에 강릉군으로 되어 21개면을 관할하였다.

 

일제 시대인 1931년에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5년에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로 승격과 동시에 강릉군을 명주군으로 개칭 분리 하였다가,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군을 통합하여 통합강릉시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릉출신의 역사적 인물로는 조선초기  문신인  함부림. 최치운. 최수성  금오신화의  김시습 ,최초의 한문소설 (홍길동전)의

허균과  그의 누나이자 시인였던  허난설헌  그리고  한국 어머니의 표상이었던 신사임당이 있다

비행기의 등대역할을 하는 항공무선 표시소

전망대 바위(11:15)

전망대 바위에 서니 kt 송신소가 보이고 그 너머 능경봉과 제왕산이 보인다

제왕산 정상에서 (2012.7.15)

제왕산은 고려 제32대 왕인 우왕이 이성계에 의해 유배 길에 올라 두달 동안 강릉에 머물렀는데

이때 제왕산 정상에 산성(제왕산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고 전해온다. 전설처럼 구전돼 오는

설화의 한 토막이지만 현지에는 실제 허물어진 산성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산성 주변에는 깨진

기왓장까지 발견되면서 역사가들은 우왕에 얽힌 얘기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유배길에 오른 우왕은 원주와 고성, 강릉에 머물다 지금의 삼척 살해재에서 살해됐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우왕이 머물던 곳은 지금 지명으로 남아 있다. 강릉 구정면 학산의 왕고개는 왕이 머물렀던 곳이고,

인근의 왕산리 큰골은 큰 어른(왕)이 살았던 곳이고, 살해재는 왕이 살해된 곳이라 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불려지고 있다.

15분전에 헤어졌던 대관령 우회로와 만나고...

항공무선 표시소 갈림길(11:20)

항공무선표시소 정문에서 포장도로를 따라서 대관령으로 향한다

kt 송신소(11:30)

 kt송신소 직전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강릉단오제의

전설과 인물이 모셔져 있는 국사성황당을 구경하기 위해 내려간다

대관령 산신당(11:35)

대관령 산신당에는 무속인들의 걸쭉한 굿판이 벌어지고 있고 산신당 안에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장군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유신이 대관령 산신으로 추앙받는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을 왔는데 그 재주가 특출해서 검술을 산신에게 가르쳤을 정도였다.

김유신가진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90일 만에 만들었는데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은 이 칼로 생전에 말갈족을 평정하고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좀 더 자세한 것을 찍으려고 산신당 안에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무당들이 제지하는데 하는 수 없이

아쉬움을 접고 산산당 뒤로 올라서니 용왕당이 나타나고 이곳에서도무당들의 걸쭉한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은 요사채와 산신당, 성황사, 대관사로 국사성황당을 이루고 있다.

 

강릉 단오제의 유래와 전설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①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인 굴산사지 부도. ② 김도연 작가가 범일국사가 창건한 굴산사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인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둘러보고 있다. ③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당. ④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신복사지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⑤ 범일국사를 잉태하게 한 우물로 전해지는 석천 우물 (강원도민일보 사진과 기사인용)

강릉단오제에 얽힌 인물과 전설

강릉단오제는 세 신, 즉 대관령 국사 성황신, 대관령 국사 여성황신, 대관령 산신을 모셔와

축제를 치르고 다시 이 신들을 돌려보내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은 범일,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은 정씨 여인,

대관령 산신은 김유신 장군이 각각 신격화된 존재인 것이다.

먼저 대관령국사 성황신이 된 범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옛날 학산에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우물가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속에 해가 떠 있었다 한다.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물을 마신 처녀의 몸에는 이상이 생기고 마침내달이 차서 1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맹물 먹고 아이가 선’ 처녀는부모님의 노여움이 두려워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뒷산 학바위에 갖다 버렸다.

 자식을 버렸지만 마음이 편했을 리 없는 처녀는 사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 학바위로 올라갔다.

갓난아기는 포대기에 싸인 채 고이 잠을 자고 있었고, 잠시 후 학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감싸고

단실 3개를 먹여주곤 날아갔다.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처녀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웠다.

이 아이가 곧 범일이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으며 자라던 범일은 7세가 되어 어머니에게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듣고 난 후 경주로 공부하러 떠났다.
공부를 하여 국사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영화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굴산사를 짓고 포교를 하였다.

이때 왜구가 쳐들어왔는데 범일이 술법을 써서 왜구를 물리쳤다.

도력으로 강릉을 지켜낸 범일죽은 다음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되어서 이 지역을 돌보게 되었다.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은 정씨 여인 신격화된 존재다.옛날 경방초계정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과년한 딸이 있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 딸이 노란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대관령 서낭님이 보낸 호랑이에게 붙잡혀갔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딸의 방에 가 보니 딸이 보이질 않았다.

집 주위를 살펴도 보이지 않아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간밤에 호랑이가 업고 가더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버지는 얼마 전 꾼 꿈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딸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서낭신을 사위로 삼을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급히 대관령 서낭당에 가 보니 딸이 서낭신과 함께 있는데 벌써 비석처럼 굳어 있었다.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려 세우니 시신이 떨어졌다. 국사서낭과 처녀가 혼배한 날이 4월 15일이다.

그 뒤로 정씨 집안의 딸은 여성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독특하게도 김유신 장군은 역사적인 위인으로서 산신의 대우를 받게 된 경우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을 왔는데 그 재주가 특출해서 검술을 산신에게 가르쳤을 정도였다.

김유신이 가진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90일 만에 만들었는데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은 이 칼로 생전에 말갈족을 평정하고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

이 세 사람은 시대는 다르지만 모두 실존인물(또는 실존인물로 전해지는 인물)인데 범일

정씨 여인강릉 출신이고, 김유신은 이 지방에 머물렀다.

범일(810년 신라 헌덕왕 3-889년 진성여왕 3)은 신라 때 강릉 지역의 지배세력이던

강릉김씨술원(述元)의 손이고, 어머니는 문씨다. 술원은 명주도독겸평찰(溟州都督兼平察)을

역임한 강릉의 토호였고, 범일의 외가는 여러 대를 강릉 지방에서 살아온 호족이다.

범일은 15세 때 승려가 되어 흥덕왕 4년(829)에 경주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나라에 가서

제안대사(濟安大師)에게 사사하며 6년 동안 수도하고 귀국했다. 귀국하여서 고향 강릉으로 돌아

굴산사에서 40여년을 보내는 동안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으로부터 국사가 되어달라는 청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굴산사에 머물며 선문에 매진했다.

정씨 여인초계정씨의 시조인 정배걸(鄭倍傑)의 21대 손 정완주(鄭完柱; 조선 숙종 때 사람)와

어머니 안동권씨의 외동딸로, 정현덕(鄭顯德)의 5대조 고모가 된다. 정현덕은 대원군 때 동래부사를

지낸 분으로 정씨 여인이 호랑이에게 잡혀갔다는 집의 주인이다.

정씨 여인은 창원 사람 황수징(黃壽徵)과 혼례를 올리고 난 후 시댁이 멀리 있어 알묘를 하지 못한

친정 경방(經方)에 머물고 있었는데 5월 단오날 집에서 국사 성황행차를 구경하다가 호랑이에게 업혀갔다.

가족들이 대관령 국사성황당에 찾아가니 이미 시신이 되어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여 친정어머니 산소 앞에

안장했는데 지금도 정씨 여인의 묘가 강릉교도소 서쪽 산 능선(맴소)에 있다. 정씨 여인은 사후에 국사성황과

혼배를 하고, 국사여성황으로 추앙되었다.

김유신(595, 신라 진평왕17-673, 문무왕13)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심신을 수련했고, 장수가 되어 강릉 지역에 주둔하면서

말갈족을 물리치고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범일국사를 모셔놓은 성황사(城隍祠)

‘매년 음력 4월15일에 봉행되는 대관령국사성황제는 통일신라시대에 국사로 추앙된 범일국사가

사후에 대관령 성황신이 되었다는 제를 지내는  의식으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의하면

매년 음력 4월15일에 강릉부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 위에 있는 한칸의 산사에

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하여 나무에  신이내려

흔들리면 기운 센 사람들이 들고오게 한다’고 하였다

 

이 행차를 국사(國師)의 행차라고 하였는데 날나리를 부르는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고

무당들이 징을치고 북을 울리면서 따르고 호장이 대창역마를 타고 그 뒤를 따른다고 하였다.

이때 도로가에 도로가에 담을 쌓은것과 같이 종이나 천을 신목에 걸고 기원하거나

음식을 장만하여 무당들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대관령에서 내려와 저녁에 강릉부 관사에 이르면 횃불이 들판을 메우는데 하급관노들이

신목을 맞이하여 성황사 안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성황사에 내에 있는 범일국사

신라 말 입당 구법승 가운데 굴산산문(堀山山門 혹은 사굴산문)을 일으킨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는

현재 가장 한국적으로 변신한 모습으로 강릉 일대에서 섬겨진다.

이는 범일국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릉단오제, ‘강릉대관령국사성황제’의

주신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나라

유학

후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온 보답을 톡톡히 받고 있다.

그는 해마다 5월 단오제에 주신으로 모셔져 민중의 친근한 존재임을 과시한다.

 

한국에서 오늘날 범일국사가 전통 마을 굿, 무속 굿의 형태로 진행되는 단오제의 주신으로

섬겨지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범일국사는 무불습합의 역행인 불무습합(佛巫褶合)의 전형적인 예이다.

범일국사는 선승에서 무신(巫神)으로 반본한 셈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불교의 선종(禪宗)은 말을 부정적으로 보는,불립문자(不立文字)의

한자문화권의 혁명적 불교이다. 선종은 직관을 중시한다. 직관은 선종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그 이전의 샤머니즘과 통한다. 샤머니즘이야말로 만물과의 기통(氣通)을 전제한 것이다.

샤머니즘이야말로 자연의 소리, 자연의 실상을 듣는 원시종교로서 종교의 원형이다.

샤머니즘에선 자연이 경전이다. 만물은 스스로를 대상화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명인은 자연을 대상화하는 바람에 교감을 중단당한다.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의

소통을 막고 끝내 불임을 강요한다.

성황사 옆에는 대관사(大關寺)라는 절이 있고 부처님을 모셔놨지만

산신당과 성황사에 비해 훨씬 초라해 보인다.

나혼자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사이에 동료산꾼들은 별 관심이 없었는지

다들 가버리는 바람에 나혼자 다시 kt송신소가 있는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갈림길(11:50)

군사시설을 철거하고 백두대간을 원상복구 했다는 제3벙커터를 지나고...

헬기장이 나타나고 코 앞에 제왕산과 능경봉이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대관령으로 향한다

내려서서 조금을 내려가니...

편한 계단길로 대관령 기후 관측소가 나오고...

대관령국사성황당 입구(12:00)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예전에 구비구비 올라온 영동고속도로였는데 지금은

아래로 뚫어진 4차선 영동고속도로에 모든 영화를 빼앗긴 채 한가한 도로를

지나서 대관령 표시석이 있는 곳으로 간다. 

대관령(大關嶺:832m:12:02)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서울과 영동을 잇는

백두대간의 관문이면서 영동고속도로가 지났으나 2002년 11월 횡계-강릉 구간이 터널로 바뀌었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이 변해 대관령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지방에서 오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 유래되었다 한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으로 흐르는 五十川은 강릉을 지나 東海로 흐르며,

西쪽은 松川지류가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흐른다. 대관령 일대는 선자령,발왕산,황병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평탄면 지형이다. 北쪽으로는 오대산국립공원이 가까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약 16.1도로 봄,가을이 짧다. 여름은 서늘하며 무상기일이 짧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9월에 서리가 내리고 첫 얼음이 언다.

서늘한 기후에 적합한 고랭지 채소,씨감자,홉의 주산지이며 목축업이 활발하다.

대관령은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스키장을 건설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

조선 중종 때 강원도관찰사인 高荊山이 수레를 이용하여 대관령의 길을 넓혔는데

그 후 병자호란 때 청군이 대관령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진군했다고 하여

죽은 고형산의 묘를 파헤쳐 部棺斬屍했다고 한다.

대관령은 1917년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강릉과 이천 사이의

도로 확장 공사를 한 이래 길이 많이 넓어졌다.

오늘은 흔히 속된말로 날로 먹은 구간이다.

서울은 폭염속에 죽을 맛이라고 아우성인데 초가을 날씨처럼

시원한 날씨에  마치 둘레길 같은 대간길 한 구간을 마치고 버스쪽으로 간다

다음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버스가 기다리는 휴게소로 가니 수선화님이 가져온

시원한 수박 한조각이 어찌나 맛이 있던지... 복받을겨

휴게소를 출발하여 456번 지방도를 타고 횡계를 지나 도로옆에 있는 냇가에서

여유있는 알탕을 즐기고 지난구간에 들렸던 진부에 있는 산채정식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오늘은 5기 대간팀에 지주 역할을 하는 김준길 대장이

식사를 쏘신단다... 불경기에 어려우실텐데. 암튼 잘 먹었심더.

 

14시20분에 진부를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6시가 조금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