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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3구간 - 한계령에서 조침령까지

by 범여(梵如) 2013. 6. 24.

 

☞산행일자:  2013년 6월 12일~23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국지성 소나기, 흐림,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산행하기 좋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24.5km + 어프로치 1.4km / 10시간 20분소요

☞ 참석인원: 00산악회 25명과 함께

☞ 산행코스: 한계령-1,004지방도-1,003.6m봉(감시초소)-십이담계곡 갈림길-1,157.6m봉

                 망대암산-점봉산-홍포수막터-오색 삼거리-설피밭 삼거리(진동계곡)-854.5m봉

                 단목령-875m봉-1,020m봉-북암령-샘터안부-1,136m봉-양양 양수발전소 안부

                 1,018m봉-943m봉-900m봉-조침령-임도-진동리 삼거리

 소 재 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기린면 / 양양군 서면

 

지난주에는 지지난주 손을 다쳐서 마시지 못한 술마실 기회가 계속 생긴다.

화욜에는 비오날 저녁 친구와 광장시장 朴家네에서 녹두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수욜 저녁에는 개포동 마피아들과 한잔 거나하게 마시면서 거의다 건축계통의

일을 하다보니 이런저런 정보를 교환한다. 갈수록 악화되는 영업환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다들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범여도 예외가 아니라서...

토욜에 백두대간 무박산행을 하려면 몸을 만들어야 하기에 금욜에는

조신하게 술을 자제해야 하는데 오랫만에 바람친구와 민박사가 막걸리 집에

있다고 하면서 급하게 번개를 친다... 안가면 삐질것 같아 부랴부랴 막걸리 집으로 간다  

1년중에 낮이 가장 길다고 하는 夏至날 후덥지근한  더위를 피하고자 막걸리
5병을 나눠 마시고 스크린 골프를 한번 하자는 걸 억지로 도망나와 집으로 향한다.

술탓인지 자다가 몇번이나 깨고 지난 2주동안 연달아 30km 이상의 거리를 15시간

가량의 무리한 산행을 했더니만 다리에 자꾸만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다.

산행할 때는 모르겠는데 자다가 자꾸만 쥐가 나는데 미칠것만 같다.

쥐가나면 다리가 칼로 찌르는듯한 아픔을 느끼는데 그 휴유증이 낮에까지 계속된다.

아직 1년을 넘게 다녀야만 내가 설정한 목적 산행이 마무리가 되는데 걱정이다.

 

토욜에는 친구 아들 결혼식을 비롯해 2군데 예식장을 갔다와서 휴식을 취한

다음베낭을 챙겨서 탑승지인 양재역으로 가서 김포 오야지님 팀과 인사를 나누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는 예상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을 한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는데 버스는 설악휴게소에 도착한다.

설악산 구간의 대동여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설악휴게소(01:15)

설악휴게소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서 새벽에 허기를 면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는데 수풀림 아우님이 맛있는 황태 해장국을 사주는 바람에 오늘도

졸지에 빈대로 한끼를 해결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이곳에서 산행준비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서 들머리인 한계령으로 향한다.

한계령(漢溪嶺) - 2구간 때의 사진 인용

한계령이란 문헌상 최초의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소등라령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바드라재로 번역하였다.

그 뒤 조선 후기에는 오색령으로 부르다 현재는 한계령으로 불리고 있다.

이문구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에 등장하는 양양고을 관기(官妓)의 성명이 "所東羅"였다고 한다. 

한계령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3공수여단장으로 있었던 부대가

한계령 도로공사를 하면서부터 한계리의 이름을 따 한계령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계령 휴게소 위에 있는 설악루 - 2구간 때의 사진

雪嶽樓라는 편액은 당시 박 정희대통령이 내린 휘호라고 하며 그

설악루 옆에  김재규가 詩를 지어 세운 표시석 아직도 있다고 하는데

2구간 산행때 너무 힘들어 보지 못하고 내려왔는데 그 詩의 내용을 옮겨보면...

 

  바라보면 서기(瑞氣)어린  영봉(靈峯)과 영봉(靈峯)

 

  국토(國土)는 이렇게도 장엄(壯儼)하고나

 

  오늘은 산(山)을 뚫어  동서(東西)를 열고

 

  내일은 그 뜻으로 남북(南北)을 열리

 

  여기 그 뜻 기리어 樓(루)를 세우고

위대( 偉大)한 영도자(領導者)의 휘호(徽號)를 받다.
                                                 1971.12.27

 한계령 들머리(02:35)

한계령을 넘어서 양양으로 향하는 44번국도의 꼬부랑길에 들어서면서 버스는

라이트를 끄고 스몰라이트에 의지한 채 필례 약수터의 방향으로 향하는 1004번지방도로 들어선다.

이곳은 도로 확장공사를 하고있어 주위가 어지럽기만 하다.

3분정도를 간 다음에 좌측 철조망의 개구멍을 뚫고 재빨리 능선으로 침투(?)한다.

 

지난번 설악산구간과 마찬가지로 1968년 울진, 삼척지구에 침투한 남파공작

무장공비처럼 잽싸게 국공파가 단속초소를 비운 사이에 등로로 접어든다.

늘 대간길 단속구간에 접어들때마다 참으로 범죄자 아닌 범죄자 신분으로

참으로 많은 비애를 느낀다... 南進을 하면서 앞으로 몇번이나 이 짓거리를 더해야 하니...

오늘 산행길중 이곳에서 점봉산을 거쳐 단목령까지 자연 특별보호구라는 명목으로 영구 봉쇄된 지역이다.

太古의 植生을 간직한 국내 최고의 천연림 지대라나 어쨌다나...

말하자면 대간꾼들은 자연훼손의 주범이기 때문에 이들의 통행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법을 어기면서 까지 산행을 감행해야 하니 범법자라는 주장에는 異見이 없다.

그러나 자연 훼손의 주범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도선생도 도둑질은 대낮에는 잘 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같은 대간길 도둑들은 낮에 범법행위를 수시로 저지를 만큼 얼굴이 두껍지 않다.

 

이건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자기들의 행정편의주의 발상이 아니가 싶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난해 준정부기관 경영평가실적에서 B급밖에 되질 않는다.

제발 통제가 아닌 산꾼들과 상생을 하면서 봉사행정을 펼쳐 A등급 받기를 희망한다.

들머리 단속초소(02:40)

철조망을 침투하여 비에젖어 미끄러운 길을 5분정도 올라오니 단속초소가

나타나고 ‘지금은 순찰중입니다’라는 팻말과 함께 초소는 텅비어 있다.

내 나라 내 땅도 마음대로 밟을 수 없는 이 나라에 과연 언제까지 애국심을 발휘해야 하나?

저들은 언제까지 대간 산꾼을 적대시하면서 범죄자 취급을 할런지.

최근 영국에는 청량음료와 인스턴트 식품에 비만세까지 도입하면서 걷기를 비롯한

운동을 장려하고 있는 판에 이 나라는 걷겠다는 자들에게 죄인 취급을 하니...

民草들의 祿을 먹고 사는 자들의 저 오만방자한 의식전환은 언제쯤 이루어질런가.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걷고 또 걷는다. 잠시후에 직벽에 가까운 암릉구간이 나온다.

첫번째 암릉구간(03:00)

직벽에 가까운 암릉구간이 나타나고 국공파들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손가락보다도 더 가는 로프를 설치해놨다. 비가 온뒤라 그런지 암릉은 상당히 미끄럽다.

한사람씩 조심스럽게 암릉을 통과하다보니 의외로 시간이 많이 보인다.

두번째 암릉구간(03:15)

곧이어 두번째 암릉구간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국공파들이 로프를

제거해버려 대장이 가져온 로프를 설치하여 두번째 암릉구간을 통과한다.

이 바부들아 너그들이 아무리 막아봐야 이 구간을 가야할 산꾼들은 다 지나간다.

10명의 경찰이 1명의 도둑넘 막는거 봤냐.

소갈머리라곤 벤뎅이속보다 더 좁은 00들...

단속을 할려면 24시간 철저히 해서 아예 들어올 엄두를 못내게 산꾼들의 의지를 꺽어버리든지.

아님 입장료를 받고, 사전 예약제를 해서 당신네들이 안내하면서 자연훼손이 안되게 하던지...

단속이란 轉嫁의 寶刀를 휘들면서 산꾼들을 제발 괴롭히지 말고...

 세번째 암릉구간(03:55)

마지막 암릉구간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로프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로프를 설치한 다음에 안부로 내려와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서서히 주위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멋진 암릉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저 멋진 풍경을 3번씩이나 어둠속에 가야하는 이 아쉬움...

남설악에서 밀려오는 짙은 안개속에 일행은 아무 말없이 걷기만 한다

 

앞으로 남진길에서 계속 만나야할  신선암봉에서 조령산의 암릉길, 희양산 내림길

대야산구간과  속리산 구간의 밤티재 오름길,남덕유 할미봉 내림길

힘들게 로프를 잡아야 하는 구간을 위한 예행 연습이련가.

세차례의 하강로프를 잡은 후 왼쪽 십이담 계곡으로 이어지는

9부능선을 돌아 내리니 산죽밭이 이어지는 육산 내림길에 접어들면서 UFO 바위를 만난다.

UFO바위(04:40)

30분 이상을 걸었나보다...주위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리막길에서 만난 UFO 바위

ET가 타고와서 내린 바위인가, 자세히 보니 비행접시 닮기는 닮았다.

이곳에서 동료산꾼들이 인증샷을 남긴다.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갑자기 국지성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얼른 베낭 커버를 쒸우고 우의를 입는다.

안부 갈림길(05:25)

국지성 소나기는 계속 내리고 짙은 안개에다가 키 큰 조리대가 雨衣가걸리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짙은 안개는 계속되고... 넓은 안부에 도착하여 물한모금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아마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은 안부 갈림길 같은데 짙은 안개 때문에 주위 사물을 확인할 수 없어 확신이 서질 않고 感으로만 느낀다.

수풀림 아우님이 쑥떡을 하나 주는데 맛이있다. 계속해서 아우님이 먹을것을 줘서

범여의 입이 호강을 하긴 하지만 미안하다... 장거리 산행에선 힘들기에 베낭무게를

줄이려 무척이나 애쓰는데 얻어 먹기만 하니... 아우님 복받을겨.

비에 젖은 함박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님의『풀꽃』이란 詩에서

 계속해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그저께가 夏至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5시가 되지 않았는데 날이 훤이 밝았다.

풀섶을 스치는 빗줄기 소리는 커기만 하고 산꾼들은 말없이 걷는다.

저 건너 설악의 영봉들은 짙은 안개에 가려있고... 에공 오늘도 전망이 꽝인가?

망대암산 오르기 직전에 좌측능선의 암릉은 예술작품을 연상케 할 만큼 멋있다.

망대암산 오르기 직전에 안부에서 또다시 휴식을 취한다.

이제 국지성 소나기는 그치는듯 싶어 거추장스러운 우의는 벗어 버린다.

잠시 후 망대암산 오르는 좌측길이 나오고 우린 능선으로 오른다.

망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북능선의 모습

구름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설악의 秘境이 조금씩 보이고...

자꾸만 선명해지는 설악산 주전골의 모습

 

설악산의 단풍 명소 세곳 중의 한 곳이라는

오색약수터 뒷편에 있는 주전골은..

걷기 편하게 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산행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산책하듯 쉽게 걸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살악산의 3대 단풍명소는

외설악의 천불동 계곡과...

내설악의 가야동

그리고 남설악의 주전골이라고 한다..

 

주전골은 예전에 도적들이

위조 엽전을 만들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용소폭포 앞에 시루떡 처럼 생긴 바위가 엽전을 쌓아둔 것처럼 보여서

주전골이라고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망대암산 정상의 암릉은 상당히 미끄럽다.

이곳에 서니 남설악이 한 눈에 보이는데 위조엽전을 만드는 도적들이

이곳에서 망을 본 이유를 알것만 같다...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망대암산 암릉에서 바라본 주전(鑄錢)골의 모습(05:55)

주전(鑄錢)골은 남설악 오색지구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조선중엽 승려를 가장한 도적떼들이 화폐(私錢)를

주조하다가 관가에 발각되어 절은 불태워지고 도적들은 모두 잡아들였다는 전설에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엽전을 주조할 정도로 계곡이 깊고 은밀한 곳이다.

 

남설악 점봉산(1,424m) 북쪽 기슭을 가로질러 입구에서부터 병풍처럼 계곡을 둘러싸고있는 기암괴석과

하늘로 치솟은 암벽에 걸친 노송들이빚어내는 비경은 바위 사이를 흐르는 수정같은 물줄기와 폭포와

담소(潭沼) 등으로 눈길을 사로 잡으며 용소폭포와 12폭포로 갈라져 점봉산 설악산으로 기어오르기 까지

4km 정도의 깊은 골짜기를 이룬다.

조금전만해도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던 구름이 지나가면서

설악의 신비로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데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이다.

그러다가 2분도 채 안되어 다시 구름이 가려지면서 마치 고려시대에

개성의 뭇 한량들의 애간장을 다 녹였던 황진이의 치마자락처럼 보일락말락

하면서 산꾼 범여의 애간장을 다 녹이는데 사진 한장 얻으려고 기다리는 사이에

동료 산꾼들은 안개가 자욱한 점봉산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오늘도 꼴찌이다.

다시 2분도 채 안되어 설악은 안개속으로 숨어 버린다

남설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전골과 오색약수도 보이고...

오색약수(五色藥水)  - 사진 펌 

 강원도 양양군 서면(西面) 오색리(五色里)에 있는 약수터로  조선중기인 1500년경 성국사(城國寺)의

승려가 반석에서 용출하는 천맥을 발견하여 약수로 판명되었고, 오색약수라는 이름은 당시 성국사

후원에 특이한 오색화가 있어 명명한 것이라 한다.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大靑峰)과 그 남쪽 점봉산(點鳳山)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

오색천(양양남대천의 지류) 개울가의 한 너럭바위 암반에서 약수가 솟는다.

 3개의 구멍에서 솟는데, 위쪽의 약수는 철분이 많고 아래쪽 2개의 구멍은 탄산질이 많다.

 하루 용출량은 1,500ℓ 정도이고, 수량과 수온이 항상 일정하다고 한다. 물맛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하며, 위장병,신경통, ·피부병 ·빈혈, 신경쇠약, 기생충구제 등에 효력이 있고

특히 메밀꽃 피는 가을철에 탁효가 있다고 한다.

짙은 안개속에 진한 향기를 내뿜는 털개홰나무꽃 

잠시후에 가야할 점봉산의 모습 

망대암산(望對巖山:1236m:06:05)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과 양양군 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 이곳 주전골에서 엽전을

위조하여 만드는 이들의 소굴이었는데 작업을 할때마다 관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망을 보는것이

유래가 되어 망대암산이라 부른다 한다.

또한 망대암산(望對巖山)은 설악산의 봉우리들과 한계령 주위에 있는 바위들을 조망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 모양인데, 한자의 뜻이 '바위산을 마주하고 바라본다'는 뜻이라고 한다

망대암산에서의 아쉬운 마음을 접고 점봉산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설악의 멋진 풍경이 자꾸만 산꾼의 발길을 붙잡는다... 봐도봐도 질리지 않을만큼

지나온 능선의 멋있는 풍경

어둠속에 안개를 헤치면 올라온 길을 한번 뒤돌아 보고...

백두대간의 이 구간을 3번째 오르지만 이렇게 멋진 仙景은 처음이다.

흔히들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산 대청봉에서 멋진 선경을 감상하려면

3代가 德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고 했거늘... 거기보다 멋진 선경을 더 보기가

힘들다는 점봉산 오름길에 이 사치를 누린다는 건 아마도 범여의 덕이라기 보다는

불쌍한 衆生 梵如를 애처럽게 본 부처님께서 가피를 베푸신게 아닐까,

아니면 우리 산행대장의 덕이겠지.

점봉산 오름길은 살아천년, 죽어천년을 지향하는 朱木 한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이곳 점봉산은 식물자원의 보고로서, 자생식물이 850 ~ 950여종이나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전체 식물종수의 20여%나 된다고 하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보존구역이다.

2026년까지 통행이 금지된구역으로 이름모를 야생화와 풀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남설악 만물상 전경

우측 가운데 암릉이 등선대이며 좌측 칠형제봉 사이가 흘림골이며 등선대 우측이 주전골이다 

뒤쪽에 구름이 얹혀있는 설악산 정상 대청봉 과 중청, 끝청이 보인다.

분홍색 털개홰나무꽃이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유혹을 하건만 갈길이 멀어 사양한다. 

한계령에서 양양으로 이어지는 44번 국도가 뚜렸이 보인다.

 

강원도 양양군( 襄陽郡) 의 지도

강원도의 동해안 중부에 위치한 군으로 북서쪽에 설악산이 있다.

광복 이후 군의 일부 지역이 북한에 속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수복되었다.

양양읍, 서면, 손양면, 현북면, 현남면, 강현면의 1읍 5면을 관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익현현(翼峴縣) 혹은 이문현(伊文縣)을 신라 경덕왕(757년) 때에

익령현(翼嶺縣)으로 고쳤다."는 관련 기록이 처음 수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221년(고종 8)에 거란 군사를 격퇴시킨 공으로 양주(襄州)로승격되고 방어사가 임명되었다.

(중략)

조선에 이르러 태조의 외향(外鄕)이므로 1397년(태조 6)에 부(府)로 승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실록』에 "1416년(태종 16)에이조(吏曹)에서 음이 서로 비슷한 고을의 명칭을 고치면서

양주(襄州)를 양양(襄陽)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어 이때 양양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양양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에도 있으며 이곳을 흐르는 '한수(漢水, 일명 남대천(南大川)'라는

지명도 중국 양양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해진다. 1895년(고종 32) 부제가 실시되어 강릉부 양양군이

되었고, 1896년(건양 1) 도제가 실시되면서강원도 양양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점봉산 정상 아래서 바라본  인제지역의 산그리메

산악회의 막내인 쾌도세무님이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컷을 찍어주고...고마우이

점봉산 정상에 올라서니 온 사방이 다 시야에 들어온다. 북쪽으론 설악산 대청봉이 보이고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양양 앞바다인 동해가 아련히 보인고, 서쪽으론 저 멀리 가칠봉이

보이고 바로 코 앞에는 작은 점봉산과 천상의 화원이라는 곰배령이 손에 잡힐듯 보인다.

남쪽으로는 가야할 단목령과 북암령 그리고 양양 양수발전소가 시야에 들어온다.

점봉산(點峰山:1,420m:06:30)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과 양양군 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산골짜기에서

어떤 사람이 몰래 엽전을 만들다가 들켰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근처에서는 꽹과리 소리를

가리켜 ‘덤붕산 돈 닷 돈, 덤붕산 돈 닷 돈’ 한다고 한다.

 

한자로는 점봉산(點峰山)이라고 하지만, 원래 둠 계통의 산이름인 덤붕이다.

아마도 다른 산에 비해 그리 험하지 않고 산머리가 둥글게 보여 이런 이름이 나왔으리라고 본다.

, 점봉산은 둥금()의 뜻인 둠을 취했음을 그 산세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선인지 덤붕산이나 둠붕산이란 이름이 그 산모습에 아주 잘 어울린다. 누군가는 말했다.

 

설악이 화려한 재주와 마력을 두루 갖춘 대부쯤 된다고 보면 점봉은 속 깊고 온화한 여인의 품이라고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굳이 국어 학자가 아니라도 덤붕산이 한자로 점봉산으로 소리 옮김되었을 것이라는데는 그리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

+() = 덤붕 > 점붕(+) → 점봉산ㄷ의 음은 ㅈ으로 잘 변한다. 말에서뿐만 아니라 지명에서도 마찬가지다.

대개 구개음화(口蓋音化)에 의한 것이다. 덤붕산의 남서쪽 비탈 기슭에 있는 마을인 인제읍  귀둔리 역시 둠 계열의 이름이다.

그 서쪽 하추리의 더디밋재 역시 같은 계열의 땅이름이다. (출처: 배우리 한국 땅 이름 학회 명예회장)

점봉산 정상 삼각점(설악 26 / 04 재설)

오늘 내가 걸야가야 할 능선의 모습

점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작은 점봉산과 곰배령의 모습

곰배령은 점봉산에 있는 해발 1164m 높이의 고개이다.

‘곰이 배를 벌떡 뒤집고 누워 있는 모습’이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퉁퉁한 아빠곰 뱃살처럼 평평하고 완만하다.

옛날 인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동해안의 양양시장을 오갔다.

인제의 산채 약초 감자 등을 그곳에서 쌀 소금 미역으로 바꿔 돌아왔다.

봄여름 가을1652.90m² (500여 평) 넓이의 둔덕에 850여 종의 온갖 들꽃이 피었다가 진다.

 

한계령 북쪽이 설악산이고 그 남쪽이 점봉산이다. 점봉산은 후덕한 육산(土山)이다.

참나무 등 활엽수가 울창하다. 더덕 참나물 두릅 곰취 고비 송이버섯 느타리버섯

석이버섯 산양삼 토종꿀 등 없는 게 없는 보물 숲이다.

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입산이 금지돼 있지만 곰배령 오르는 길은 허용된다.

 

가고픈 마음은 정말 꿀떡같지만 가야할 길이 너무 멀기에 아쉬움만  남기고 단목령으로 향한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설악산과 점봉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남대천이 보이고

그 너머로 양양의 산그리메와  동해바다가 안개에 휩싸여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남쪽으론 단목령과 북암령이 손에 잡힐듯 다가온다.

점봉산 정상에서 10분정도 머물면서 오랫만에 눈이 호사를 누린다.

언제 내 이곳을 올지 모르나 3번째 산행에서야 멋진 仙景을 감상하고

오랫 머물렀더니 약간의 奧寒이 느낄정도의 추위가 느껴져 서둘러 단목령으로 향한다.

점봉산에서 단목령까지의 거리가 6.2km인데 과연 국공파가 초소를 출근하기 전인

08시 이전까지 단목령 초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지금 시간이 06시 50분... 거금 10만원을 국공파에 뺏기지 않으려면 0알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뛰어야 한다. 내리막길에 비가 온 탓인지 길은 미끄럽고, 마음은 급해지고...

홍포수막터(07:00)

옛날 홍씨 성을 가진 사냥꾼이 살았다고 하여 홍포수막터로 불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포수의 수발을 들던 수하가 홍포수 행세를 하며 마을에 들락거리자 사람들이 그를 포수로

착각하여 "홍포수"라고 부른데서 연유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점봉산에서 단목령가는 길은 부드러운 육산(土山)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랜 풍상을 겪은 노거수들의 널부러진 모습에서 노련한 완숙미를 

엿보며 안개을 배경으로 녹빛 침엽수의 강인함 마저 느낀다.

너른이골과 오색리 갈림길(07:15)

오색리지금의 성국사 옛터 절에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五色寺'라고 불렀다고 하며 지금의 오색리라는 마을명도 이곳에서 유래 하였다고 하며

다른 전설에는 주전골에 햇살이 비치면 바위의 색갈이 다섯 가지로 비춘다고 하여

오색이라고 하였으며 약수의 맛이 다섯 가지라고 하여 오색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름모를 버섯이 나무에 붙어있다.

진동계곡 갈림길(07:30)

상당히 빠른 속도로 속력을 내지만 지난구간 설악산의 힘든구간의 학습효과(?)

때문인지 그리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요즘 밤에 자다가 계속 쥐가나서

고생을 한 경험 때문에 다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서 동료산꾼들에게 민폐가 되진

않을까 싶어 勞心焦思하면서 걷기 하지만 아직까지는 걸을만하다.

고도차가 거의 없는 능선을 걷는데 8시 이전까지 통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걸음은 자꾸 빨라지는데 나 역시 국공파에 겁을 먹고있는 모양이다. 

856m봉(08:10)

등로 가운데에 856m봉 삼각점(설악458 / 2005복구) 있고 국토지리원에서 설치한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급하게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통나무 계단을 설치해놨는데 발목이 상당히 아프다.

200m 만 가면 단목령 단속초소가 있어서 조심스럽게 산죽밭에 숨어서 국공파가 없음을 확인을

한 다음에 재빨리 금도(禁道)를 넘어서 한계령에서 이곳까지 15.2km의 단속구간을 지난다.

단목령 단속구간을 지나다 (08:15)

백두대간 남진길에 단속에 걸렸으면 벌써 산행전과 3범으로 별을 3개나 달았을

법하지만 아직까지 현행범으로 걸리진 않아 벌금도 물지않고 별도 달지 않았다.

운이 좋은지는 몰라도 꼭 법을 어기지는 않을망정 오늘처럼 꼭 걸어야 길이라면

또다시 이렇게 내게 운명처럼 다가오면 오늘처럼 법을 어겨서라도 걸으리라...

오늘 산행구간중 15.2km의 禁道를 넘어온 기념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간이 배밖에 나온 행동을 감행하는데 진정한 용기인지, 蠻勇인지 모르겠다.

백두대간 산꾼들에겐 저승사자 같은 국립공원 관리공단 단목령 단속초소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온 탓인지 오전 8시가 15분이나 지났는데도 단속요원은 보이지 않는다.

이거 직무유기인지, 근무태만인지 모르겠으나 우린 참으로 운이 좋다고나 할까.

특히 점봉산 구간의 단속요원은 융통성 없기로 알아주는 국공파이라 반짝 긴장을 했는데 ㅋㅋㅋ

단목령(檀木嶺:770m:08:15) - 2009년 7월20일 백두대간 북진때의 사진

점봉산과 북악령 사이의 안부로 인제군 진동리와 양양군 오색을 넘나들던 고개로

1217년(고려고종4년)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제천과 원주에서 추격하여 이 곳에서

격퇴한 곳으로 전해 져 오지만 김취려장군이 거란군을 격퇴한 장소는 제천의 박달령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朴達嶺)"이라

하는 것 같으며 박달나무 단(檀)과 나무 목(木)을 써 단목령이라  지명한 것으로 보인다.

 

단(檀)이란 이 땅의 시조 단군왕검 이래로 큰 의미를 가진다.

박달-밝은 산-白山-태백산 임금으로 이어지는 큰 의미를 한 글자로 함축한 것이다.

단단하기로 이름난 박달나무에 그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땅의 강인한 영혼을 접목한 것이 아닐까

4년전에 있었던 2개의 장승중에 백두대간여장군의 장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목령에서 후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단목령을 조금

지나 우측 계곡 아래로 내려서서 30분이상 느긋하게 아침만찬을 즐긴 다음 조침령으로 향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하여 길을 걷는데 오늘 새로오신 여성산꾼이

더덕을 발견하여 내가 캐보니 꽤나 씨알이 굵다. 하산후에 소주에 타서 마셔야징

부드러운 육산이 계속되고 해발 770에서 1,100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800으로 떨어지는

반복을 계속한 끝에 북암령까지 계속된다. 같이가던 수선화님의 다리에 멍이 시퍼렇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새벽 암릉길에 하늘마음님이 썩은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뿌러지는

바람에 굴렀다가 수선화님의 다리에 걸려 그렇게 되었단다.

여인의 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으로 보아 전치6주 정도의 진단이 나올것 같다. ㅋㅋㅋ

내가봐도 상당히 아플것 같은 베낭에서 스프레이 파스를 뿌려준다... 낼쯤이면 무지 아플텐데.

북암령(北巖嶺:940m:10:05)

강원도 양양군 서면 북암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삼거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북암리와 미천골의 선림원지 북쪽에 있는 암자의 이름에서 유래 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북애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로 알려진 곳이며

양양의 소금장수들이 들락거리던 길이었다 한다.

이곳에서 평소에 후미에서 자주 어울리던 역전의 용사(?)들이 다 모였다.

오늘 새로오신 여성산꾼(닉을 모름) 한 분과, 하늘마음, 길빛, 수선화,막내인 쾌도세무님까지...

특히 길빛님은 오늘 먹을것을 바리바리 싸온 바람에 빈대붙은 범여의 입이 호강을 한다.

이곳에서 황도 통조림과 파인애플을 얻어먹고 물한모금 마신 다음에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오늘 새로오신 김포오야지 친구분이 굉장히 힘들어 하면서 오는데 같이 동행하는 대장이

친구를 버리고 도망간(?) 김포오야지님 대신 엄청나게 고생을 한다... 원래 대장은 힘드는 모양이다

멧돼지의 횡포로 난도질 당한 대간길.

대간을 하면서 등산로보다 자연을 더욱 훼손하는 곳을 많이 보아왔다.

금산 및 고모치 부근 채석장이 그렇고 강원도 구간에 빽빽이 들어선 고랭지 채소밭도 그렇다.

한달후면 대관령구간과 닭목령, 그리고 가을쯤 매봉산에서 만날 녹색 버블 풍차도 주범 가운데 하나일 게다.

이들에 비하면 대간 산꾼들은 從犯(종범)도 아닌 잡범(雜犯) 수준에 불과하다.

특히 오늘 구간에서 자연 파괴의 주범은 따로 있는 듯하다. 멧돼지들이다.

이들을 욕할 생각은 없지만 이들로 인한 태고의 식생들이 사라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대간꾼들을 무조건 틀어막는 데 에만 골몰하지 마라. 어떻게 하면 자연을 제대로 알게하고 나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라.

그래야만 자연이 살아나고 대간도 살아날게 아닌가”

숲이 무성한 오늘 구간에 서니 이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북암령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편안한 안부가 나타나는게 이곳은

박새어린잎의 꽃들이 참으로 화사하고 고풍스럽게 많이들 피어있다.

단목령에서 조침령, 그리고 진동리까지 약 12km 숲이 너무 우거지고 하다못해

바위하나도 없는 전통적인 육산에다 워킹코스로 마치

여기는 강원도가 아니고 제주도 올레길 걷는 느낌이다.

이 코스는 단점이 시작부터 끝까지 전망은 제로. 숲이 너무 우거져 주위

풍경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면 아쉬움이랄까.

1,136m봉(10:45)

1,136m봉 2등 삼각점(△속초24 / 1992 재설)

부드러운 육산에다가 낙엽까지 등로에 쌓여있어 편한 길을 걷는다.

오늘은 계속 동료산꾼 하늘마음님과 같이 길을 걷는데 대간길은 처음인

모양인데 열공하는 모습이 참으로 진지하다... 4년전에 내가 저랬으면 지금 남진길 안가도 되는데...

산이란 타고나면 늘 아쉬움이 남는 법인 모양이다.

특이 형태의 이정목(11:15)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하여 등로에서 이탈하여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이에 동료 산꾼들은 도망을 가버리고 0알에 요령소리 나도록 뛰어가니 대장이 오야지님

친구분 모시고 힘겹게 가고 있다. 어차피 같이가지 못할것 같아 추월하여 동료 산꾼을 만난다.

혹 곰취라도 만날것 같아 등로 주위를 아무리 뒤져봐도 곰치 한잎을 구경하지 못한다.

가끔 떡취와 수리취는 보이지만 그런것을 베낭에 담고 싶지는 않다.

바람이 부는  곳에 더덕 냄새가 진동을 하여 주위를 살피니 조금만 더덕이 있는데

너무 적어서 다시 묻어두고 잎새 순만 조금 잘라서 뱃속으로 집어 넣는다.

양양 양수발전소 상부댐의 경고문(11:22)

양수발전(揚水發電)이란 ‘남는 전기를 사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전력소모가 비교적 적은 밤 시간에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잉여전기를 이용해

하부 댐의 물을 상부댐으로 올렸다가 전기의 사용량이 최대로 오르는 낮 시간에 발전을 하는 방식이다.

한번 발전을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원자력발전소의 잉여전기를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 양수발전소인 셈이다.

따라서 허비전력을 저장이 가능한 물리적 에너지 형태로 바꿔 두는 것이어서 일단 건설만 하면

가동비용이 아주 적게 들고 오염물질 배출이 없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양수발전소 중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발전소가 바로 이곳에 있는 양수발전소로서 전력생산이 100만kw이고,

이는 소양댐(20만kw)의 5배, 원자력 발전기 1기와 맞먹는 규모 이다.

 

4년전에는 지금만큼 숲이 우거지지 않아 댐까지 내려 가봤는데 오늘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

계속해서 양수발전소 표지판을 만나고...

멋진 이정표

기왕에 할것이면 거리도 정확하게 기재해 주었으면 좋으련만...2%가 부족하구먼.

호젓길을 따라 조침령을 가는데 오늘따라 김포 패밀리의 다영이 아빠가 자꾸만 쳐진다.

지난주중에 주님을 열심히 모신 모양이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셔요. 다영이를 생각해서.

아직도 조침령까지 3.1km나 남았건만 서서히 다리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1,018m봉(11:55)

이곳의 숲은 인간의 발길이 뜸한 탓인지 참으로 건강해 보인다.

단목령에서 출발하여 처음으로 주위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을 만난다.

저 건너에는 미천골 휴양림이 보이고 양양에서 구룡령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보인다.

900m봉(12:25)

900m봉 삼각점(속초 308 / 1992 재설)

지나온 능선들이 보이고 그리고 작은 소나무 터널을 통해 조침령으로 향하는데

서울에서 왔다는 일반 등산객들을 만나는데 곰배령에서 오는 중이란다.

그런 여성분이 나물이라고 뜯은것을 보니 나물같은 별로없고 수리취와 떡취만

조금 있는데 무조건 줄기에다 뿌리채 뽑아서 담았다.

 

나물을 채취할 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잎은 반드시 남겨두는게 예의이거늘

거기다가 뿌리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게 불문율인데... 침으로 예의가 없다.

마지막 이정목(11:45)

거리가 얼마남지 않았는지 다리가 자꾸만 무거워진다.

힘들게 작은 능선을 치고 오르니 마지막 이정목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데크목 전망대가 나타난다.

데크목 전망대(12:50)

전망대에 도착하여 동료산꾼들과 베낭털기를 한다.

캔맥주와 과일, 떡과 박카스를 나눠 마시고 20분 가량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조침령으로 향한다.

데크목 전망대에서 바라본 56번 국도와 미천골 휴양림

마지막 구조목 표지판

용도를 알 수 없는 삼각점도 만나고...

조침령 임도로 내려서는 길에는 데크목이 깔려있고...

조침령(曺寢嶺:750m:13:20)

조침령(옛길과 현재의 조침령)은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조침령은 所冬羅嶺(曺枕嶺兄弟峴) 소동라령(한계령,오색령)과 함께 성종24년 미시령길이 열리기 전

서울로 가던 중요역할을 하였으나 미시령이 개통되면서 오색령(所冬羅嶺,寒溪嶺)과 함께 폐쇄되었다.

曺沈嶺-阻沈嶺-鳥寢嶺(曺沈嶺-阻沈嶺은 옛 조침령을 말하고鳥寢嶺은 군부대가 개설한 도로를 말 하나

 그 아래 터널이 뚫려 鳥寢嶺도 옛길이 되고 말았다)등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깊이 있게 들어가 보면 국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나 뜻이 전하는 것이 같은 것 같으면서 전혀 다르다.

산경표에 “曺寢嶺”으로 표기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는 阻沈嶺으로, 현재의

이정표에는 새조(鳥)자를 써 鳥寢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고개는 예로부터 영서와 영동을 이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던 고개로 한계령(산경표에는 오색령으로 표기되어 있음)과 함께 중요한 길목으로

여겨 형제현(兄弟峴)이라 하였다. 오색령을 넘어왔던 사람들과 흘리령을 넘어 온 사람들이 만나

내린천을 따라 한양으로 넘나들이 하던 길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루트였던 것이다.

옛조침령에는 우마차가 지날정도로 넓었던 길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1. 산경표나 중보문헌비고에 나타나는 조침령(曺寢嶺)은 무리조(曺),잘침(寢)재령(嶺)이다.

    무리지어 자고 넘는 다는 뜻이고.

2. 고지도에 나타나는 조침령(阻沈嶺)은 막힐조(阻),베개침(沈)재(嶺)이다.

    험한 고개가 가로막고 있으니 하룻 밤 유숙하여 넘어가는고개라는 뜻

3.정상석에 쓰여 있는 조침령(鳥寢嶺)은 새조(鳥)잘침(寢) 재령(嶺)이다.

  고개가 험하여 새(鳥)들도 자고 넘는 다는 뜻이다

 

본래 1과2는 같은곳에 위치하고 3의 위치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1과 2는 쇠나드리에서 윗서림으로 넘어가던 길이었고(이 길은 현재의 조침령에서

  구룡령방향1.5km지점에 위치한다)

3.은(김재규의 사단장 재직시 3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개설되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한다)

  현재의 조침령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지명은 "반편고개" 또는 "반부득고개((서림에서 조침령으로

  넘어가는 중턱에 대략 5만여평 되는 소반처럼 넓은 평지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라 하였다.

옛 조침령은 九折羊腸 먼 길이라 서림이나 쇠나들이에서 하룻 밤 유숙하여 이른 새벽길 나서야

해질 녁 목적지에 도착했을 험하고도 먼 길이었을 것이다. 쇠나들이 살고 있는 원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쇠나들이” 에 마방이 있었고 소금을 싫은 우마차가 조침령을 넘나들었다고 하니

 “쇠나들이”는 소(소를 “쇠”로 발음함)가 넘나들던 고개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어떤 이는 조침령의 바람이 소도 날려 버릴 만큼 거센 바람이 분다하여 "쇠나들이"라 한다

 

오늘 산행의 종점인 조침령에 도착하니 鳥寢嶺이라고 적힌 대규모 새로운 표지석이 서 있다.

산이 너무 높아 새도 자고 간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옛 문헌 어디에도 鳥寢嶺이라는 용어는 찾아볼 수 없다.

산경표에서도 曺枕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개가 높아 무리들이 쉬어간다는 뜻이다.

조침령이라는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아 표지석의 터(풍수)가 제대로 잡혔을 리가 없다.

김재규가 3공수 사단장 시절에 닦았다는 임도를 따라 진동리로 향한다.

바람둥이꽃 민들레도  만나고...

군부대에서 도로개통을 기념하는 비를 지나서...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한 다음에 임도를 따라서 1.4km를 걸어서 진동리 삼거리로 온다.

진동리 삼거리로 내려오니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보이면서 26km의 오늘 대간길

산행을 마무리하는 스틱을 접는다. 근데 창원에서 왔다는 산악회에서 소+맥주를

말아서 찌지미(부침개의 경상도 사투리)를 부쳐서 먹고 있는데 김 준길 대장님이

맥주를 한 잔 얻어 주신다. 시원하게 한 잔 얻어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고향사람으로 우리 매형의 조카뻘되는 사람으로 파악이 되서 더 이상 말을 안했다.

 

조침령 터널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와 양양군 서면 서림리를 연결하는 터널로

418번 지방도라 지나가는 곳에 조침령터널(1,145m)을 2007년에 개통하였다.

터널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면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곰배령으로 연결된다

愛馬를 세워둔 도로아래의 진동계곡에서 알탕을 하는데 4년전에 비해선

비교가 안될만큼 오염이 되어있고 돌에는 이끼가 가득한 걸로 보아 이곳

상류에 인간들을 위한 펜션을 비롯한 시설물이 많이 들어섰는가 보다.

아쉬운대로 알탕을 하고나니 그래도 개운한 느낌이다

4년전 진동계곡에서 알탕하는 모습 

조선시대 협객 武士 백동수가 살던 진동계곡

얼마전에 TV 드라마에 나왔던 조선시대의 협객 백동수가 살았던 곳이 진동계곡이다.

조선의 협객’ 백동수(1742∼1815)는 1771년 무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서자 출신이라 좀처럼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다. 자

연히 하루 입에 풀칠하기에도 힘들었다. 그러자 백동수는 1773년 미련 없이 늙은 부모를

비롯한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첩첩산중으로 들어갔다. 단칼에 구차한 ‘한양살이’를 접어버린 것이다.

역시 그의 호 ‘야뇌(野뇌)’답다. 야뇌란 ‘황야의 굶주린 늑대’ 정도의 뜻으로 풀이하면 될것 같다.

백동수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송아지를 짊어지고 들어가 키워서 밭을 갈고, 소금 된장이 없는지라

산아가위와 돌배로 장을 담가 먹으며’ 살았다. 백동수가 정착했던 곳이 바로 인제군

기린골(현 기린면 진동계곡)이다. 당시 ‘그곳은 큰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문밖을 나서면 ‘열 손가락에 못이 박인 나무꾼과 봉두난발의

광부들만이 화롯불을 앞에 두고 빙 둘러앉아 있고, 밤이 되면 바람이 쏴아 불어 집을 스쳐

돌아가고, 슬픈 짐승들이 끊임없이 울부짖는 그런 곳’이었다.

백동수의 친구들은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당시 조선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책상머리에서 시나 짓고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먹물이었다.

그렇다고 백동수는 그의 나약한 젊은 벗들을 비웃지 않았다. 껄껄 웃으며 모두 품에 안았다.

젊은 날, 그의 가난뱅이 먹물들이 한양 도성 주위에서 무위도식하며 맴돌 때 백동수는 주저 없이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강원도 산골짜기에 들어가 온몸을 부리며 살았던 것이다.

요즘 진동계곡에는 산사람, 귀농인, 은퇴자, 화가, 환경운동가, 공동체생활자, 시인, 소설가,

수행자, 병 치료자, 은둔자 등 온갖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하나둘씩 스며들어 살고 있다.

모두가 ‘독립특행(獨立特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각자가 ‘하나의 왕국이고 하나의 세계’이다.

도회지살이의 고단함, 번잡함 그리고 밥벌이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4년전에 비해 진동계곡엔 민박집(펜션)이 너무 많이 생겼다.

계곡물도 예전만큼 깨끗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땅도 사람이 들끓으면 언젠간 망친다.

이제라도 땅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진동리에서 출발하여 30분정도 깊은 계곡을 빠져나와 기린면에

있는 민물매운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로 오는데

길이 얼마나 밀리는지 5시간이 넘게걸려 집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