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7월 6일~7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진행된 산행
☞ 산행거리: 도상거리 21.5km + 어프로치 1.4km / 9시간 4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20명과 함께
☞ 산행코스: 진동삼거리-조침령-756봉-옛조침령(쇠나들이 고개)-황이리 갈림길
1,061봉-연가리골 갈림길-1,020봉-968봉-왕승골 갈림길-1,016봉
갈전곡봉-갈전약수 갈림길-구룡령 옛길-1,066봉-1,121봉-1,100봉
구룡령
☞ 소 재 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 양양군 서면 / 홍천군 내면
요즘 우리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귀태(鬼胎)란 단어를
두산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①마음속에 두려움을 품는것 ②걱정하는 것
③ 본래는 귀신에게서 태어난 아이 또는 불구의 태아를 뜻한다’라교 적혀있다.
야당의 원내 대변인이라는 자가 국민들이 뽑아준 대통령에게 뱉은 말이다.
우리나라 정치하는 자들의 의식수준은 어찌된 건지 시정잡배만도 못한것 같다.
상대방에 대해 비난을 할 때에도 해야할 말과 하지말아야 말이 있는 즉
금도란 게 있는데 그런건 眼中에도 없는것 같다... 저래야 인기가 올라가나?
우리가 저런자들을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뽑았다니 한심스럽다.
저 자들은 정치에 무뢰한인 범여가 보기엔 하는 일이라곤 밥먹고 싸우는것
밖에 보이지 않으니... 사실이지 여의도 나리들 자기들 밥그릇 챙기는데
열심이었지. 요즘 최악의 삶을 살고있는 民草들의 삶을 알기는 알겠나?
자기 배부르고 등 따시니 그런걸 알리가 있겠나
하긴 그런자들에게 그걸 바라는 우리가 바보일지도 모르지...
청렴도 조사에서 부패순위 NO1을 한번도 뺏기지 않는 저 자들을 어떻게
정리하는 방법은 없을까. 우선 국회의원 수를 확 줄여 치열한 경쟁으로 일을하게 해야지
우리동네만 하더라도 구청장은 1명인데 국회의원이 2명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국민이 뭘 원하는지 어디가 가려운지 늘 民草만을 생각한 多山선생은
이 시대에는 정녕 없단 말인가... 착잡한 심정으로 비오는 날 대간길에 나선다.
설악산 구간의 대동여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조침령~구룡령구간 3D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양양읍지도(1872조선지도) - 조침령과 구룡령 구간의 옛지도
하루종일(6일) 주적주적 하염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다
내가 속해있는 포교사 연수회를 있어서 화계사에 들렸다가 부지런히
집에와서 대간길 준비를 하는데 비는 계속오고... 오늘도 어김없이 우중산행이겠구나.
화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연수회
인제 편의점(01:50)
오늘은 고속도로가 아닌 인제읍내에 들려 식사를 하려고하니 비가 많이오는
탓인지 읍내 어디에도 영업을 하는 식당이 없어서 할 수없이 편의점에 들려서
김밥과 라면을 먹는데 난 도시락을 하나를 골랐는데 오늘은 산악회 막내인 쾌도세무님이
얼른 도시락값을 지불하는 바람에 오늘도 공짜밥을 먹는데 왜그리 민망한지...
이곳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진동리 계곡을 향하는데 빗줄기는 자꾸만 굵어진다.
가는 곳곳에 도로가 무너져 우리를 태운 차량은 자꾸만 브레이크를 잡는다.
1시간이 넘게 걸린 다음에야 진동리 삼거리에 버스는 도착한다.
진동리 삼거리(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소재(03:45)
차에서 내려 산행을 준비하는데 자꾸만 빗줄기는 굵어지고 솔직한 심정이지
정말 우중산행은 하고 싶지않다. 그러나 그러 내색을 못하는 이유는 동료 산꾼들의
민증을 까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산악회에서 연장자중에 한사람인 내가 대포를
부르면 분위기를 해칠것 같고 또한 의욕적으로 산행대장노릇을 하고 있는 대장에게
예의가 아닐것 같아 가장 먼저 들머리로 접어들어 임도로 접어든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거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진동삼거리에서 조침령까지 접속 1.4km를 임도로 걸어가는데 임도에는 흙탕물이 가득하다.
잠깐사이에 비는 소강상태이고 동료산꾼들은 모두들 아무 말없이 걷는다.
法을 구하러 길을 떠나는 求道者처럼... 15분여를 걸어 조침령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접어든다.
조침령 갈림길(03:58)
또다시 빗줄기는 굵어진다. 비가 너무 많이오는 바람에 평소에 쓰는 하이엔드 카메라는
차에두고 비오는 날 쓰는 똑닥이 방수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들머리를 촬영하는데
오랫만에 써서 기능을 잊어버렸는지 사진이 영 엉망이다. 몇번을 시도해도 원하는
사진이 나오질 않고 그 바람에 동료산꾼들은 어둠속에 도망(?)을 가버리고
밀어내기를 하려는 김포대님과 초반부터 맨 꼴찌로 처져버렸다.
초입에 만나는 데크목 계단을 지나 크고 작은 길을 초반부터 오르내린다.
사실 오늘구간은 21km를 넘는 구간이지만 산 정상 이름이 하나도 없는 곳이고
봉우리 이름도 숫자봉 이외는 갈전곡봉이 유일할 정도로 그냥 그저그런 구간이다.
백두대간길에 만나는 가장 오지구간으로 삼둔사가리가 있는 인제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을 거치는 구간으로 여름 산행에는 21km가 넘는 구간에 하늘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힐링구간이지만 그리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우선 꽤나 큰 봉우리만 20개 이상을 오르내려야 하고 코딱지만한 봉우리까지
합치면 40여개를 족히 오르내려야만 날머리인 구룡령에 도착한다.
들머리에서 산행시작 10분만에 어둠속에 Y자형 갈림길이 나오는데 산꾼 한명이 있다.
자세히보니 우리 일행은 아니고 조침령에서 우리보다 조금 먼저 출발한 천안에서 온
대간팀인데 일행들이 좌측인 양양군 서면 서림리쪽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초바부터 알바를 한 모양인데 리딩하는 삶은 참으로 난감하겠다.
쇠나드리 고개(04:35)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이곳을
요즘은 옛 조침령(鳥寢嶺)이라 부르는데 이곳이 오리지널 조침령이다
옛 조침령은 九折羊腸 먼 길이라 서림이나 쇠나들이에서 하룻 밤 유숙하여
이른 새벽길 나서야 해질 녁 목적지에 도착했을 험하고도 먼 길이었을 것이다.
쇠나들이 살고 있는 원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쇠나들이” 에 마방이 있었고 소금을
실은 우마차가 조침령을 넘나들었다고 하니 “쇠나들이”는 소(소를 “쇠”로 발음함)가
넘나들던 고개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소 풀이 많아서 그 풀을 뜯어먹기 위해 소가 나들이 나간다"는 뜻에서 ‘쇠나들이’로 부른다"고도 하며,
“높고 깊은 골짜기를 넘는 바람소리가 쇳소리가 나서 쇠나드리라고 한다” 하며, “강풍에 먼나들이를
떠나듯 황소(牛)도 바람에 날아 간다”는 뜻의 쇠나드리. 또는 새나드리, 바람불이, 우탄동(牛灘洞)으로도
불리는 쇠나드리는 가을날의 억새가 장관이라고 하는데 우린 칠흙같은 어둠속에 헤드렌턴에
몸뚱이를 의지한 채 묵묵히 김포대님과 길을 걷는데 벌써 우의를 입어서 그런지 몸뚱이는 땀으로 범벅이다.
쇠나드리 마을 갈림길(04:55)
이곳에서 우측으로 길은 뚜렸이 있는데 등로 아래에 있는 쇠나드리 마을가는 길이고
백두대간 길은 이곳에서 좌측 2시방향으로 치고 오르는데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황이리(黃耳里) 갈림길(05:28)
이곳에서 좌측으로 양양군 서면 황이리로 내려가는 길인데 양양군 서면에 있는
오지마을로 농사짓기가 어려운 마을이라 흉년이 들면 곡식이 누렇게 황(黃)이 들어
귀(耳)처럼 오그라 든다고 해서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산죽사이에 묻힌 이정표를 지나 직진으로 다시 올라서는데 자꾸만 카메라에
대한 아쉬움이 앞선다. 날이 밝아지기만 기다리는데 짙은 綠陰에다 폭우가
내리다보니 주변은 밝아질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아직도 어둠이 계속된다.
안부능선(05:35)
황이리 갈림길에서 능선을 올라섰다가 내려서니 대장을 비롯한 동료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산행후 약 2시간만에 동료산꾼들을 만나 내리는 비 때문에
서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능선으로 치고 올라선다.
안부 능선을 치고 오르는데 내린 비로 인하여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그러나 4년전 북진길에 없었던 로프들이 상당히 많이 설치하여 산꾼들을
배려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양양국유림사업소 측에 감사를 들인다.
그런데 오르막 등로 주위에는 山竹들이 빨갛게 말라죽은 이유를 모르겠다.
마치 시골에 잡초를 죽이기 위해 제초제를 사용한 것 처럼...
설마 이 청정지역에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았을 터인데... 지난겨울 추위 때문인가?
폭우속에 힘들게 산을 오르는 산꾼들
1,001봉(06:15)
안분 능선에서 힘들게 치고 오르니 봉 정상에는 이정표와 나무 의자들이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대간길을 이어가는데 빗줄기는 자꾸만 굵어진다.
2009년 12월6일 북진길 때의 1,001봉 정상사진1,001봉 이정표
뭔 청승인지?
점점 빗줄기는 강해져서 이젠 완전히 폭우로 변해버린다.
스마트폰을 보던 동료산꾼이 이곳에 재난 주의보가 발령되었다고 한다.
다들 완전히 맛이 갔구먼...ㅉㅉㅉ 백두대간이 뭐길래
그래도 다들 전혀 걱정을 하지않은 눈치이다... 하긴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입각하여 물을 거널 이유가 없으니 걱정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서서 휴식을 취하며 뒤에 처진 동료산꾼을 기다린다.
1,061봉(06:50)
그림이 자꾸만 엉망이 되어간다. 방수 카메라라곤 하지만 렌즈에 성애가 끼는건
어쩔수가 없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나 역시 안경을 벗어버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이런날은 안경을 낄수도 없고 불편하기가 이루말할 수가 없다.
빗줄기는 점점 강해지고 레인코트 위를 때리는 비는 아플정도이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좌측으로 오늘 처음 산능선이 빼꼼히 보인다
능선사이로 양양의 미천골이 처음올 고개를 내미는데 참으로 환상적이다.
2009년 12월 6일 북진때의 미천골의 모습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미천골은 설악
산국립공원 남쪽 미천골자연휴양림 안에 있는8㎞에 이르는 계곡으로 사람의
발길이 적어 아직까지도 산천어 등 희귀한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미천골 계곡에는 통일신라시대 법흥왕 때 창건했다는 선림원이라는 옛 절터가 있는데
한창 융성했던 시절에는 끼니 때마다 쌀뜨물이 내를 이루며 골짜기로 흘러 내렸다고 하며
미천골의 미천(米川)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림원은 지금은 흔적만이 있을 뿐이며 선림원지에는 높이 5m의
선림원지삼층석탑(보물 제444호)을 비롯해 선림원지석등(보물 제445호),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 선림원지부도(보물 제447호) 등 4개의 보물을 만날 수 있다.
미천골 자연휴양림에서 임도를 따라 약 4.8㎞를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에 위치해 있다는
불바라기 약수터도 가볼만한 명소로 꼽힌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자주 나오는 스타나무도 만나고...
아침식사를 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비가와도 너무오니
아침상을 펼칠 엄두가 나질 않는지 동료산꾼들은 계속해서 묵묵히
걷기만 하다가 조그만 능선에서 서서 아침식사를 행동식으로 한다.
동료산꾼이 서있던 장소는 너무 좁아서 나와 우대장과 원일님은
조금 지나서 966봉에서 밥상을 펼친다.
956봉(07:35)
오늘 비가 너무 온다는 예보 때문에 비박할 때 쓰는 타프를 가지고 온 것이
지고 올때는 무겁긴해도 여러 산꾼들이 비를 맞지않고 식사를 하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오랫만에 산악회 까페의 운영자이신 원일님과
우대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한다. 특히 원일님과는 호남정맥길 주릿재에서
같이 밥을 먹어보곤 처음이니 참으로 오랫만이다.
늘 까페의 일에 적극적이고 오늘도 우중산행에 동행하며 이정표에 거리표시를
하는 것을 만들어 오셔서 좋은일을 하신다. 늘 베푸시는 보시공덕 복받을깁니다.
우중에도 막걸리 3병을 간단하게 비우고 타프를 정리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연가리골 갈림길(08:10)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인 가리골 내려가는 길이다
연가리는 아침가리에 이어 연이어 있는 골짜기라 붙혀진 이름으로 담배를
만드는 연초를 많이 재배하였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난구간 북암령에서 이곳까지 설치되어 있는 이정목에는 지명과
경도.위도 표기가 되어있고 정작 산꾼에게 가장 필요한 거리표시가
안되어서 그걸보고 뭔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하늘마음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까페에 글을 올린것을 원일님께서 쾌히
스폰서하시어 오늘 산악회의 이름으로 표시 코팅지를 달았다.
방태천환주도 지도
삼둔사갈(三屯四耕)이란 조선시대의 예언서인 정감록에 “난리를 피해 숨을 만한
비장의 피난처로 지칭한 ‘삼둔사가리’를 일컫는 말로, 둔이란 강(江)이나 내(川)등
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물가의 둔덕진 곳(둔치)을 말하며, 가리(갈)란 사람이
살만한 터, 다시 말해 밭을 일굴 만한 평평한 산기슭의 터를 의미한다.
정감록에는 살둔이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 즉 물, 불, 바람. 달리 표현하면
흉년, 전염병, 전쟁의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복된 땅이라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높고 깊은 산세처럼 울창한 숲에서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를
만들어주니 전염병이 돌리 없고, 깊은 골짜기로 끊이지 않고 흐르는 물은 가뭄을 없애며,
산은 첩첩하고 골은 겹겹하여 들머리는 좁고 그 안은 넓어져 외부의 접근도 어려우니
피병지(避病地)라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게 말해 삼재가 들지 않는 복
된 땅이라고는 하지만 한번 들어가면 쉽게 돌아 나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삼둔이 홍천군 내면 쪽에 위치해 있는 반면 사갈은 인제군 기린면에 위치해 있다.
사갈 가운데 연가리는 진동리에 있고, 적가리와 아침가리, 명지가리는 모두 방동리에 속한다.
이 가운데 현재 사람이 사는 마을은 살둔, 월둔, 연가리, 아침가리 정도다.
삼둔 사가리의 전해오는 유래
강원 인제 땅에는 독특한 지명이 있다. 기린면이다. 말 그대로 기린(麒麟)이다.
기린이 우리 땅에 들어온 것은 일제시대 때 창경궁을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만들면서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명이 기린일까.
현지 향토사학자들은 진짜 기린이 아니라 사슴을 형용한 지명이라고 풀이한다.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인제에는 사슴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사람의 흉한 손길을 피해 사슴들이 몸을 피한 곳이다. 워낙 골이 깊고 산이 험하기 때문이다.
사슴 뿐 아니라 사람도 피했다. 기린면 인근의 방태산, 구룡덕봉 등에는 삼둔 오가리라는 땅이 있다.
정감록에는 나라에 난리가 나도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곳으로 기록돼있다.
예로부터 왕을 저버렸거나,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숨어 들어 살았다.
삼둔: 살둔(생둔), 월둔(달둔), 귀둔.
사가리: 아침가리,명지가리,연가리,곁가리.
여기서 둔이란 "둔덕"을 말하며 "가리"란 "거리"의 구개음화 현상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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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행정지도
강원 인제(麟蹄)는 한자로 ‘기린발굽’이란 뜻이다. 왜 하필 기린발굽일까.
인제군의 모양이 기린발굽을 닮아서일까? 하기야 고구려 땐 ‘돼지족발’을 뜻하는
저족현(猪足縣)이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제는 초식동물 발굽처럼 폭에 비해 남북이 길쭉한(72.1km) 장방형이다.
인제는 1000m 넘는 산이 무려 96개나 된다. 사방에 우뚝우뚝 기둥처럼 서 있다.
설악산 향로봉 점봉산 방태산 소뿔산 주억봉 구룡덕봉 가칠봉 한석산 매봉 안산 가리봉 가마봉….
그 아래로 800m 이상 봉우리 200여 개가 첩첩이 틈새를 메우고 있다.
마치 호리병 속에 꽉 갇혀 있는 모양이다.
밖으로 한 번 나가려 해도 진부령(529m) 미시령(826m) 한계령(935m) 곰배령(1164m)
단목령(760m) 북암령(925m) 조침령(770m) 같은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
‘하늘이 3000평’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산이 높으니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인제는 전국에서 두 번째(1위 홍천군)로 넓지만, 인구밀도는 km²당 20명으로 가장 낮다.
또다른 봉우리를 오른다. 이 구간에는 봉우리 정상마다 이정목과 나무의자가 있다.
크고작은 봉우리를 오르 내리는데 구룡령까지는 꽤나 먼 둘레길을 연상하지만
전망은 말그대로 Zero이다. 그냥 원시림에 가까운 숲길을 걷기만 한다.
대간 마루금 가운데 드물게 보는 비단길이다. 비오는 이런 날에
하서(河西)김인후(金麟厚) 선생의 “자연가” 란 詩가 생각난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山自然水自然 山水間亦自然)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 절로 절로 늙사오리
(已矣哉自然生來人生自然與然老)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김안국의 문인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 황과 학문을 닦았다.
박사(博士) · 설서(設書) ·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현종 때에 이
조판서를 지냈으며, 양관 대제학이 추증되었다. 을사사화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으로 내려가 자연을 벗삼고 지내며,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저서로 '하서집'등이 있다.
봉우리 정상에서 다시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나무가지를 내치는 소리가 자꾸만 커지고 등로로 흘러내리는 황토물이 많아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온 능선을 카메라에 담아보려 하지만 온 천지가 五里霧中이다
1,020봉(09:00)
강한 빗줄기속에 능선위를 오르니 조금 넓은 공터 좌측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삼각점만 덩그러니 정상을 지키고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채 숲만 무성하다
표식을 알 수 없는 1,020봉 삼각점
968봉(09:05)
968봉을 지나는데 이 폭우속에 30여명의 산꾼을 만나는데 서울에서 온 백두대간 북진팀이다.
참으로 우리나라 사람들 대간에 대한 집착은 대단한 것 같다.
968봉을 살짝 내려서 산죽길을 걷는데 이젠 비는 마치 양동이로 붓는 느낌이다.
서울와서 확인을 하니 우리가 걸었던 인제 산간지방의 강우량이 180mm이고
홍천 산간지방의 강우량이 230.5mm 라고 한다.
잠시후 또다른 대간 북진팀을 만나는데 포항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제 이 구간을
통과하여 조침령까지 가려면 상당히 늦을것 같아 걱정이다.
이 장대비에 산꾼들이 겁도없이 다들 미쳤어...
平海孫氏之墓(09:20)
4년전 눈속에 푹 파묻혀 있었는데 지금은 묘비는 그대로나 봉분은
후손들이 移葬을 했는지 봉분은 없다. 하긴 이곳에 후손들이
성묘를 오려면 정말 힘들것 같아 이해는 충분히 된다
대간 능선이 이젠 완전히 황토물이 콸콸 흐르는 도랑이 되어 버렸다.
왕승골 사거리(09:30)
강원도 양양군 서면 갈천리 왕승골과 인제군 기린면 조경동을 잇는 고개이다.
왕승골은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지역으로 농촌경제가 향상되지 못하였을 때
화전민의 생활이란 극히 궁한면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춘궁기에는 갈근(칡뿌리)으로 근근이 호구하여 오는 실정에서
전천이 갈분일색이었다고 하는데서 갈천 또는 속칭 “치래”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왕승골이 나오고 우측으론 조경동이 나온다.
인제에서 경작지는 “100평 200평…” 식으로 세지 않는다.
보통 ‘가리’나 ‘둔(屯)’을 쓴다. ‘가리’는 골짜기 곳곳의 ‘밭갈이할 만한 땅’을 말한다.
아침가리라는 이름은 높은 산봉우리에 묻혀 아침나절 잠깐 비치는 햇살에 밭을
간다고 해서 라기도 하고, 밭이 적어서 아침나절이면 다 갈수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한자로는 ‘朝耕洞(조경동)’이라고 한다. 연가리는 옛날 담배농사(연초)를 많이 했던 밭이다.
적가리는 가을에 단풍이 붉게 드는 곳이다.
4가리
아침가리 :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조경동(朝耕洞)
명지가리 :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구룡덕봉 남동쪽 기슭이며 아침가리 물길 최상단부다.
적가리 :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방태산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 곁가리라 하기도 한다.
연가리 :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봄.여름.가을. 겨울 산악회에서 붙여논 조침령 12.9km, 갈전곡봉 3.4km가 뚜렸하다.
이곳에서 코팅지가 달려있는 걸 보면서 후미에 가던 우대장, 원일님, 길빛님과 함께
곰치로 만든 짱아찌에다가 선 채로 막걸리 한병을 비우고 능선을 올라선다.
등로가 마치 개울처럼 물이 많이 흐른다.
山自分水嶺에 위배는 아닌지 ㅋㅋㅋ
빗속에서도 인증샷을 남기고...
등로 오름길에 꿩의 다리가 산꾼을 유혹하고...
무명봉(09:55)
1,016봉(10:07)
정상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고 4등 삼각점이 있다.
1,016봉 삼각점(△현리 426 / 2005재설)
가야할 능선이 조망되고...
크고작은 봉우리를 아무런 생각없이 걷기는 하지만 한참동안
오르내림을 해야하는 흔히들 산꾼들이 얘기하는 빨래판 구간이다.
이젠 옷이고 신발이고 다 젖어버려 젖을것이 더 없는데도 빗줄기는 세차기만 하다.
그래 원없이 비한번 맞아보자 그래봤자 뺏속까지야 물이 들어가겠나...
나뭇사이로 다른 나무가 기생을 하고... 한참의 오르내림을 계속한 다음에야
오늘 봉우리중에 이름이 있고 봉우리가 가장 높은 갈전곡봉에 도착하는데
먼저가던 동료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갈전곡봉 가는 길에서 빗속에 만난 동자꽃
옛날 깊은 산속 작은 암자에 스님과 동자승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겨울이 다가오자 스님은 동자승을 홀로 암자에 남겨두고
겨울나기 준비를 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설이 내려 스님은 도저히 암자로 돌아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발을 동동구르며 눈이 녹기만을 기다리던 스님은
어쩔 수 없이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겨우 암자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동자승은 아랫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위에 앉은 채로 얼어 죽어있었답니다.
스님을 기다리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채로.....
스님은 동자승을 바위아래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고
그 해 여름,동자승이 묻힌 무덤가에는 동자승의 발그스레한 얼굴을 닮은 꽃들이
피어 났는데 사람들은 이 꽃을 '동자꽃'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전곡봉(葛田谷峯:1,240m:11:25)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인제군 기린면 그리고 홍천군 내면에 3郡과 3面이
만나는 봉우리로 원래 지명은 “치밭골봉“이며 "치밭“은 ”칡밭”의 변음으로
이두문자인 갈전(葛田)으로 표기하고 “谷“은 골짜기를 말하고 ”溪”로 나타낸다
소양강의 지류인 방대천(芳臺川)을 비롯하여 계방천(桂芳川), 내린천(內麟川)
등의 발원지이기도 한 봉우리로 이 지역사람들은 ‘치밭골’이라 부르는데
아마도 예전에 이곳에 칡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산행 코스중 가장 높은 봉우리이면서 유일하게 이름이 붙은 봉우리이다.
그리고 산 이름이 하나도 없는 코스가 오늘 대간길이다.
정상에는 갈전곡봉 안내판 이정목이 서있고 나무로 만든 의자가 산꾼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능선으로 우측으로는 가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고 그 끝에는 방태산이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조침령에서부터 갈전곡봉까지 같이 걸었던 인제군 기린면과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홍천군 내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갈전곡봉에서 빗속에서도 인증샷을 남기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방태산이 나오는데 방태산보다는
그 아래로 흐르는 내린천(內麟川)이 더 유명하다.
남한 지역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계곡 제1순위로 꼽히면서 여름철에는 가히 북새통을 이룬다.
점봉산에서 시작한 방태천이 북에서 내려오고, 오대산에서 발원한 계방천과 자운천이 남쪽을
휘감으며 서로 합하여 북류하다가 마침내 소양강이 된다.
“내린천”이란 이름은 홍천군 내면의 내(內)자와 인제군 기린면의 린(麟)자를 합쳐 지어졌으며,
옛날 이 물길로 벌목된 나무들이 뗏목으로 만들어져 한양 마포나루까지 운반되었다고 하는데
그 물길은 우리같은 마루금파들에게는 어렵지않게 그려진다. 내린천 물은 소양강이 되고,
소양강은 북한강이 되었다가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비로소 한강이 된다.
오늘 가장 오늘 가장 높은곳에 오른 기념으로 원일 어르신(?)이 하사한 영지술에다
우리 산악회를 이끌고 있는 여성산꾼들이 내놓은 과일에다 초코파이로
원기르 보충하고 휴식을 취하는데 여태껏 퍼부었던 하늘도 미안했던지
비는 멈추고 갈전곡봉에서 내려오니 잠깐동안 햇빛도 보여준다.
갈전약수 갈림길(11:50)
이곳에서 좌측으로 2.1km만 가면 갈전약수가 나온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오늘 구간 주변에는 유명한 약수가 유난히도 많은 곳이다
갈천약수에서 흘러내린 물은 동해바다로 들어가지만 삼봉약수와 방동약수에서
흘러내린 물은 내린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까 서울에 사는 사람이나 홍천 ․ 인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물(氵)을 같이(同) 사용하는 한동(洞)네 이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행정단위의 洞 또한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해본다.
등로에서 바라본 홍천군 내면의 산그리메
삼둔사가리중에 사가리는 인제군 기린면에 있지만 삼둔(三屯)은 홍천군
내면에 있는데 이곳 내면의 면적은 어찌나 큰지 왠만한 郡의 전체 면적과 맞먹는다.
'삼둔'은 홍천군 내면의 살(생)둔, 월둔, 달둔으로
살둔(生屯) : 홍천군 내면 율전2리. 원당초등학교 생둔분교(폐교 후 수련원)
월둔(月屯) : 홍천군 내면 광원2리. 내린천 상류와 자운천 하류가 만나는 합수부
달둔(達屯) : 홍천군 내면 광원1리. (계방산 북쪽 소대산에서 내려온 계곡)
‘살둔’이란 이름은 “이곳에 오면 산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에도 난리를
겪지 않을 정도로 오지(奧地)여서 단 한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는데서 유래했으며
조선시대 세조집권을 반대하며 단종 복위에 가담했던 사람의 일부가 훗날을 기약하면서
내린천을 거슬러 올라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비는 그치고 5분도 안되게 햇빛이 비치더니만 이내 안개가 산을
휘감으며 강원도의 최오지답게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구룡령 옛길 표지판이 나온다.
구룡령 옛길 이정목(12:20)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의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옛길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있는 길로 꼽힌다.
구룡령의 옛길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72년경으로 임산물과
자철광을 운반하기 위해 개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동과 영서 사람들이 설악산·점봉산·오대산 등 백두대간 장벽으로 나뉘어 산지와
해안 지역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 두 지역을 연결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대부분이 구룡령 하면 지금 차가 다니는 56번 국도가 넘나드는 고개를 원래의 구룡령길이라 생각한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구룡령 고개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가 지난 1994년 포장된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의 구룡령의
위치가 아닌, 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사람들은 구룡령의 위치를 잘못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 차가 다니는 지점으로 정리됐다.
백두대간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정부나 민간단체, 학자들조차 구룡령길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한겨레21 / 2006년11월10일 제634호)
자상한 할아버지와 귀여운 손녀딸같은 다정한 모습
마지막 구룡령 옛길 구간에 부드러운 길을 걷는데 특이하게
생긴 바위틈 사이로 일엽초가 많이 보인다
1,121봉(12:35)
정상에 오르니 좌측으로 양양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고 길 가운데에
군부대 관측소의 표지판이 있는데 이곳 정상에서 후미팀 단합대회(?)
를 하면서 마지막 베낭털이를 한다. 원일님이 소주 한병을 꺼내고
내 베낭에 과일과 빵, 그리고 오늘 처음오신 닉이 ‘하이드라코’님께서
커다란 1.6L짜리 시원한 맥주 한병을 꺼내 놓으신다.
이 무거운것을 여기까지 가져오시다니... 고맙긴 하지만 얻어먹긴
조금은 미안하다. 그래도 먹어야지 ㅋㅋㅋ 소주에다 맥주를 말아서
시원하게 2잔을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구룡령 옛길정상(13:00)
구룡령 옛길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길을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영서와 영동을 차로 넘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험한 지형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런 급경사의 산지에서 말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보면 구룡령 옛길에서 노새와 조랑말 등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옛길은 힘겨운 고개를 가장 힘이 덜 드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비탈길이어도 최대한 경사를 누인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누군지도 모를 옛사람들의
지혜가 세월과 함께 쌓인 덕분이다. 어떤 빼어난 등산로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연 속에
파고드는 절묘한 흐름이 길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옛사람들은 요즘 일부 등산꾼들처럼 싸우는 듯이 산길을 걷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갈 길이니 최대한 여유 있고 천천히 걸음이 이어지도록 길을 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숲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다니기에 편안한 길이 되었다.
선조의 경험과학이 녹록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룡령 옛길에는 굽이굽이 민중들의 꿈과 희망, 아픔과 좌절도 녹아 있다.
특히 일제시대 때 숯을 구웠던 재탄장과 함께 철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철기문화가 열리면서 양양 일원으로 공급한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원재료를 구룡령의 옛길 한쪽에서 생산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철을 캐던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산이 일제 강제수탈의 현장이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된다.
숲으로 펼쳐진 구룡령 옛길의 또 다른 상징은 금강소나무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은 금강소나무가 베어진 뒤 국내에는
금강소나무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무리를 이룬 200~300년 된
금강소나무들의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어 있다. 굵은 금강소나무의
표본인 곳이라 해 ‘솔반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젊은 청년 죽은 터는 ‘묘반쟁이’, 장례식의 하관 때 회다짐을 하기 위해 쓰던
횟가루를 생산한 곳이라는 뜻의 ‘횟돌반쟁이’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구룡령 옛길정상 이정표
한동안 잊힌 이름, 구룡령이 다시 주목을 받은 건 '구룡령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가 된 다음부터다.
문화재청은 2007년 12월 구룡령 옛길 2.76㎞ 구간을 명승 29호로 지정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구룡령 옛길을 포함해 죽령·토끼비리·문경새재·하늘재·
대관령 옛길 등 6개 문화재 길이 있는데, 이 중에서 구룡령 옛길이 가장 먼저
문화재로 지정됐으며 이 일대는 심마니가 특히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1,100봉 쪽에서 바라본 다음구간인 약수산의 모습
마지막 이정표(13:22)
마지막 이정표에서 미끄러운 급경사를 내려와 데크목 끝자락에서 우중산행의
마침표를 찍는 스틱을 접는다... 이번 산행은 우중 산행으로 고생했고
4년전 북진길에는 엄청나게 내린 눈과 추운날씨와 사투를 벌인 기억이 주마등처럼
밀려온다. 이래저래 기억이 남는 구간이다.
구룡령(九龍嶺:1,013m:13:25)
강원도 양양군 서면에서 홍천군 내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강원도를 있는 5개의 嶺(진부령, 미시령,한계령, 구룡령, 대관령)중에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고개로 56번 국도가 지나는데 원래 지명은 장구목이다.
도로가 나기 전 강원도 홍천에서 속초로 넘어가던 고개이다.
일만 골짜기와 일천 봉우리가 일백 이십 여리 고길을 이룬 모습이 마치
아홉 마리 용이 지난듯하다 하여 구룡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지금 구룡령이라고 알고 있는 56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는 원래의 구룡령이 아니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원래의 구룡령 고개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이다. 그 후 1994년 이 도로를 포장하여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 구룡령의 위치를 표기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위치가 잘못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19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의 고개로 표시되었으니
원래의 구룡령을 찾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동료산꾼들과 찍은 단체사진
여유롭게 인증샷도 남기고...
스틱을 접고 도로옆에 있는 개울로 들어가 비에젖은 우의와 신발을 씻고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동료산꾼들과 단체사진을 찍고 내면 명개리에 있는
식당으로가는 잠깐 사이에 깊은 잠에 빠진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의 음식점
원일 어르신의 단골인 토종백숙집에 도착하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도착을 하여 미박을 하는 방안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샤워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원일 어르신이 스폰서한 토종백숙에다가 술한잔 카~아
참으로 세상 부러울게 없구나. 이 맛에 4년반을 매주 산을 찾아 헤매노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산에 간다고 친구넘이들이 이 범여를 맛이 간 넘으로
취급하는 이 넘들아! 뉘들이 게맛을 알어.
맑은 공기에 깔끔하고 맛있는 음식을 스폰서한 원일님 넘넘 고맙고요.
이 음식을 베푸신 布施功德 世世生生 복받을깁니다...
3주만에 만난 동료산꾼들과 우중산행의 회포를 풀고 서울로 향한다.
음식점 앞에 폭우로 불어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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