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5월 25일~26일(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은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15.6km / 8시간 20분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34명과 함께
☞산행코스: 미시령-약수터-헬기장-상봉-화암재-헬기장-신선봉-화암재갈림길-낙타나무-969.5봉-대간령
암릉전망대-병풍바위봉-마산봉-알프스콘도-눈물고개-군부대-홀리마을-농로-임도-백두대간공원-진부령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토성면 / 인제군 북면
4년전 백두대간을 시작했을 때는 그저 산이좋아 산행을 했을 뿐인데 하면 할수록
백두대간에 대한 진한 갈증 때문에 또다시 백두대간 남진길에 나선다.
지난 3월에 이곳 진부령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이곳 시작구간인
설악산구간이 입산통제가 되는 바람에 편법으로 저 아랫녘인 경북지역 다섯구간을 끝내고
열흘전인 5월15일 입산통제가 풀리어 오늘에서야 다시 첫구간부터 시작을 한다.
백두대간!
엄연한 우리 산줄기 이름이건만 아직도 우리 후손들이 배우는 지리와 역사책에는
이 좋은 이름을 놔두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자원수탈을 위해서 만든 태백산맥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만 하다.
우리가 해방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아직도 우리의 교과서는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분노하지말고 정확한 현실을 직시하여 우리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가르키고 역사인식이 제대로 무장되야 미치광이같은
쪽바리 넘들을 제압할 텐데, 우리는 아직도 국.영,수에 매달려 역사공부를 등한시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이란 귀때기 새파란 놈의 망언에 흥분하지말고 제대로된 역사인식으로 무장된다면
저 놈들이 주둥일 함부로 못놀릴텐데...이 나라의 지도자와 교육자는 도대체 뭘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간길에 나서는 범여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백두대간 개념도
백두대간이라는 말의 사용은 10세기 초,『옥룡기』에 '우리 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이 등장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 있다.
이후 「고려사」, 「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 「산수고」와 「산경표」같은 문헌에서
백두대간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과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백두대간은 1000여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인식개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시대를 지나며 산맥론에 묻혀 잊혀졌다. 이후 1980년대에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가 헌책방에서
「산경표」를 발견하면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두대간을 미신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시민들에게도 친근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을 제정하여 백두대간의 실체를 법으로도 인정하였다.
현재 교과서에 삽입된 한반도 지도는 1903년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에 의해 정립된 산맥지도다.
고토 분지로는 이 논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백두대간을 함경·낭림·태백산맥으로 세 동강을
우리의 선조들이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명명한 한반도의 산맥줄기는 인간형상으로 창조된
태백산맥은 땅 속의 지질을 반영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선을 표현한
그런데 이러한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일본인들이 백두대간을 동강내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른바 창지개명(創地改名)인 것이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바꾼 산맥이름을 광복 반세기가 넘도록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민족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고토 분지로의 산맥지도를 토대로 만들어진 현행 교과서의 낭림·강남·적유령·묘향·차령·노령산맥 등
상당수의 산맥은 아예 실재하지 않거나 방향과 위치가 터무니없다는 것이 국토연구원 조사 결과 밝혀졌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강은 산을 뚫지 못한다'는 순리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2005년 국토연구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위성과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통해 재정립한 '새산맥지도'는
조선 후기의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30년에 걸친 산맥 답사 끝에 조선시대의 고지도를 집대성한
'대동여지도'와 여암 신경준 선생이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정립한 '산경표'의 산줄기체계와
일치할 뿐 아니라 이를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아직도 교과서 내의 한반도 지도는 종전의 것을 따르고 있으며, 새산맥지도에
대한 논란도 끊이질 않고 있다. 지질학계의 권위자로 자처하는 대학교수들의 뜨거운
찬·반 논란에 휩싸이게 되면서 결국은 새 산맥지도에 대한 새로운 명칭도 정하지
못한 채로 유야무야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범여의 텃밭
10평 남짓한 범여의 텃밭에 채소는 잘자라고 있다.
비료와 농약은 전혀 하지않고 퇴비만 썬 탓인지 흙속에
지렁이가 넘 많다. 땅이 건강하다는 얘기이다.
지난주에 현장이 바빴고, 목욜에는 전라도 광주에 조문을 갔다오고
주말에 예식장 3군데를 왔다리 갔다리 하고 일욜에 대학원 동기 딸래미
결혼식에는 모임 총무에게 봉투를 보낸다음, 오랜만에 텃밭에 들려서
물을 흠뻑주는데 목마른 야채들이 쥔장을 반긴다
내설악광장(02:50)
버스 탑승장소인 양재역에서 2주만에 만난 김포오야지 일행님과
반갑게 조우를 하고 오랫만에 만난 레인저 회장님과 인사를 나눈
다음에 버스에 올라 경춘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잠에 빠진다.
차가 가평휴게소에 도착하여 우 대장이 사준 떡라면 한그릇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올라 인제, 원통을 거쳐 한계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내설악 휴게소에 도착을 하여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이곳에서
만반의 준비를 한다.
준비를 끝내고 다시 버스는 미시령 터널을 지난 다음에 넓은 56번 국도를 버리고
속초를 넘어가는 구 56번 국도에 접어들어 미시령가기 400m 전에 버스에서 내려
헤드렌턴을 끈채로 국공파의 단속요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동태를 살핀다.
근데 갑자기 미시령쪽에서 서치라이트만큼 밝은 불빛이 우리를 비추는데 갑자기
긴장을 하고 아래로 피신을 하는데 나중에 안 탓이지만 국공파 단속요원은 퇴근을 하고
천안에서 온 대간꾼 4명이 길을 찾지못해 소리가 나는 우리를 보고 내려온 것이다.
헤드렌턴 불을 끈채 철조망의 개구멍을 찾아 능선으로 오르는데 그 와중에서도 숲에서
1,000원짜리 지폐 한장을 줍는 수확(?)을 얻는다.
이 구간의 길을 잘아는터라 렌턴을 켜지 않는 상태로 능선까지
올라서니 이마에 땀이 흐른다.
미시령에서 국공파를 피해서 등로롤 오르는 방법 - 우리는 3번 코스를 활용했다.
미시령(彌時嶺:826m:03:50)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와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56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이 고개는 인근의 다른 고개에 비해 높고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고개를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미시령(彌時嶺)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彌時坡嶺) · 연수령(延壽嶺) · 연수파령(連壽坡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미시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杆城郡)에는 미시파령이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바다 고을 동쪽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본조성종 때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은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고 여수파령(麗水坡嶺)이라고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에는 연수파령, 『택리지』에는 연수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간성군 관액조에는 미시령이 군 남쪽 팔십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에는
간성군 석파령(石破嶺) 남쪽에 미시령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토성면 원암리(元巖里)에 위치한 고개 지명으로 미시령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이름으로 연슈파 또는 큰영이라 기록되어 있다.
능선에 올라 바라본 속초시내의 야경(40:05)
샘터(04:35)
어둠속에 능선을 올라 상봉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떨어진다.
기상청의 예보만 믿고 우의를 챙기지 않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대장과 총무가 우의만 입으면 비는 그치는 징크스가 있으니...
잠시후에 4년전에 만났던 샘터에는 여전히 변치않고 물은 흐른다.
팻트병에 물을 담아 한잔을 마시고 5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상봉으로 향한다.
암봉전망대(04:50)
약수터에서 어둠속에 계속 오름길을 시작한다.
낮에오면 멋진 전망을 볼 수 있으련만 늘 이 구간은 밤에만
온 탓에 아쉽기만 하는 곳이다. 서서히 여명은 밝아오면서
주위 사물이 인식되고 저 아래 미시령 휴게소의 불빛과 황철봉이 보이고
우측의 속초시내 불빛도 보이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며 산꾼을 반긴다.
암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속초시내
지나온 암봉의 모습
헬기장(05:08)
암봉에서 상봉가는 길은 계속해서 너덜길을 만난다.
그리 흔하지 않은 하얀 철쭉을 만나고...
군부대 벙커도 만난다.
드디어 상봉으로 올라선다. 가야할 신선봉이 뚜렷이 보이고...
속초시내도 여명은 밝아오고...
상봉(上峰:1,241m:05:1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 전체가 암릉으로 되어있고 정상에는 커다란 돌탑 하나가 서있다.
오늘 구간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기도 하지만 금강산 일만이천봉중에 남한에
여섯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서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관리는
설악산국립관리공단에서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설악산권으로 생각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금강산 자락이다. 옛 우리 선조들은 미시령을 경계로 북쪽은
금강산, 남쪽은 설악산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이곳 상봉과 신선봉 사이의
좌측 능선아래에 있는 화암사 일주문 편액에는 “金剛山 禾巖寺”로 표기되어 있고
진부령 아래에 있는 유서깊은 사찰 건봉사 일주문에도 “金剛山乾鳳寺”로 적혀있다
상봉 정상에서 단체로 인증삿을 남기고...
개인 인증삿도 남긴다.
이젠 날이 훤히 밝아오고 가야할 신선봉과 너덜겅이도 보인다.
상봉에서 로프를 의지한 채 직벽에 가까운 안부로 내려서는데 다행히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게 내려선다. 4년전인 2009년 12월 13일에 어둠속에
이곳을 통과할 때 속좁은 국공파들이 로프를 없애버려 추위와 눈길에 엄청나게
고생한 기억이 생생한데 비탐방로이긴 하지만 누가 설치한 지 모르지만 고맙기만 하다.
로프를 타고 내려서 안부로 걸어간 다음에...
가야할 화암재와 신선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또다시 로프에 의지한 채 한번 더 꺽어져 내려서 직벽을 내려가는데
늘 많은 산꾼들을 배려해 주시는 김포오야지님께서 아래서 걱정스런
모습으로 안전하게 내려오는 걸 확인한다. 늘 큰 형님 역할을 해주시는게 고맙기만 하다.
오늘도 뒷풀이에 쓰라고 맛있는 돼지고기 30인분을 스폰서하시고...
암튼 복받을깁니다... 이 공덕 世世生生 누리시길.
안부에 내려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안부 넓은 공터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너덜길을 지나간다.
화암재 가는 길에서 만난 귀롱나무꽃
귀롱나무 꽃이 상쾌한 아침 인사를 받으며 내려서니 화암재가 나온다.
오늘은 김포대님이 해병대 복장이 아닌 미 육군 복장으로 극기 훈련을
하시는지 아님 다이어트를 하시는지는 몰라도 베낭도 없이 물한병 달랑들고
산꾼 범여와 동행을 하는데 내가 보기엔 범상치 않은 분 같다.
화암재(禾庵峙:05:40)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서 고성군 토성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아래 화암사에서 고개 이름을 따와서 화암재라고 부른다.
마장터는 고성과 양양(지금의 속초)사람들이 소금과 고등어, 이면수, 미역 등
내륙지역인 인제사람들이 좋아하는 해산물을 지게에 지고 올랐고 인제사람들은
감자와 콩, 팥 등 곡물을 지게에 지고 올라 농산물과 수산물을 교환하던 무역로였다.
마장터란 이름도 마방과 주막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장터가 왕성했던 시절에는 농산물이 수산물보다 귀해 인제사람들의 수입이 짭짤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지런했던 일부 고성과 속초사람들은 수산물값을 한푼이라도 더 받기위해 멀리있는
원통장까지 왕래하다보니 마장터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마장터는 산속에도 불구하고 30가구 이상
살았던 마을로 변창했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샛령정상 성황당에서
성황제를 올렸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그러나 지난 70년대 화전정리가 시작되고 진부령과 미시령이
생기면서 마장터는 옛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한 전설의 고향이 됐다.
화암사(禾巖寺) 일주문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번째로 손꼽히는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위치한 화암사(禾巖寺)는
전통사찰 제27호로 신라 혜공왕 5년(769)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비구니 도량으로 창건하였다.
진표율사는 법상종의 개조(開祖)로서 법상종은 참회불교의 자리매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으로부터 359년 전인 인조 11년(1633)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선생이 간성군수로
있을 때 썼다는 간성지 화암사조에 의하면, 「천후산 미시파령(天吼山 彌時坡嶺=미시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화암사라 했다.
이절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이는 영랑호, 멀리는 창해에 임해있고 양양, 간성의
모든 산과 평원심곡이 눈 아래 보이고 넓고 아름다운 경치는 절이 토해 놓은 것 같다
진표율사는 금강산 동쪽에 발연사를 창건하였고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하면서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화엄사(華嚴寺)라 불렀는데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면서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다. 그러면서 기도중에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하고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조선조 정조 18년(1794)에는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이 되었으며, 미타암의 화응전이
정조의 원당이 되면서 관음보살상과 정조친필병풍 8폭이 하사되기도 한 곳이다.
화암사 대웅전
화암사의 본당으로 1919년 7월에 완공되었으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모셨으며, 정면3칸과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정면 창호의 어간과 협간에 모두 꽃창살을 달았으며
정면 2칸은 잔잔하지만 바깥쪽 2칸은 시원스런 꽃문양으로 장식되었다.
화암사에 대한 전설
간성군 남쪽 70리되는 곳에 있는 산으로서 석굴이 많고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나온다 하여 천후산이라 부른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양양과 간성 사이에 큰 바람이 많은 것도 이 까닭이라 한다.
뛰어난 성인대가 있는데 돌모양이 불상과 흡사해서 성인대라 하였다.
그옆에 또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곡식을 쌓아둔 둥근 곳집같이 보인다하여 세속에서 화암(禾岩)이라 부른다.
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서 적과 싸울때 짚으로 만든거적으로 이 바위를 둘러싸서
마치 벼가리같이 보이게 하여 적을 물리쳤다하여 화암(禾岩)이라 했다.
화암사는 창건 이래 고종 원년까지 1096년간 화재가 5번이나 낫는데 이것은 화암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나 화자를 쓰지 않도록 하고 화재대신 수자로 쓰자는 것이다.
풍수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수극화(水克火)로 물은 불을 이긴다하여 물 수(水)자를 써야겠는데
수(水)자를 쓰자하니 절이름에 대한 역사적의의가 없어진다해서 수(水)대신 수(穗)자를 쓰면
음(音)은 수(水)와 같고 뜻은 화(禾)와 같으니 수암(穗岩)이라 했으나 또 화재가 생겨
1912년에 화암(禾岩)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간에서는이 바위를 ‘수바위(穗岩)’로
부르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수(穗)자는 좀 어려운 한자여서 아는 사람이 적고 바위경치가
아름답다해서 수바위(秀岩)라고 세속에서 쓰기도 한다.
수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벼(禾)에 얽히 이야기가 많다.
화암사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계란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어 초행길에도 찾기 쉬운 목표물이기도 하다.
바위위에 왕관모양의 바위가 또 하나 있는가하면 직경 1m 주위 5m가량되는 웅덩이가 항상 물이 고여 있고
가뭄이 심할때 이물을 주위에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고 옛날에는 스님들의 수도장으로 사용했다 한다.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신선봉으로 향하는데 비탐방로 치곤 길이 너무 좋다.
여느 산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커먼 꽃이 달려있어 집에와서
야생화 도감을 찾아보니 검종덩굴이란 야생화다... 이곳에서 많이 보인다.
조금전에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신선봉 가는 길에서
화암재에서 신선봉 오르는 길에는 수리취와 떡취가 자주 보인다.
보라색 벌깨덩굴꽃이 이른 아침에 대간길을 걷는 산꾼을 반긴다
신선봉 아래에 있는 헬기장에 도착하니 이곳에서 비박을 하고 있는 산꾼 2명을
만나는데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난 언제 저런 여유를 즐겨보나.
자구만 세월은 흘러만 가는데...
신선봉(神仙峰:1,204m)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우리나라에는 신선봉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40여곳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북설악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선봉이 가장 빼어나고 아름답다고 한다.
정상부근은 완전히 너덜지대로 구성되어 있고 그 너덜의 바위로 이루어진
돌들이 신선봉이라 할 수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시작이 되는 봉우리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중 남한에 있는 여섯 봉우리(향로봉, 칠절봉, 둥글봉, 낙타봉, 신선봉, 상봉)중 하나이다
산 중의 산, 절경 중의 절경이며 일만이천 봉이 위용을 자랑한다는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에
발원한 신선봉에서 시작되니 이 신선봉이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첫 번째 봉우리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미시령을 넘다 보면 양측으로 장관처럼 펼쳐지는 산이 있으니 우측의 산이 설악산이며 좌측의 산들이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자락이다. 그러기에 금강산은 결코 휴전선 이북에만 있는 금기의 땅이었던
그 명산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보았고 디뎠던 그 산에서 시작된다
신선봉은 뒤늦게나마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지난 2003년 8월26일 설악산 국립공원에 편입됐다.
신선봉에서 남긴 인증샷
신선봉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울산바위의 유래를 보면 옛날에 조화옹(조물주를 지칭)이 세상을 만들적에 가장 먼저
금강산 1만2천봉우리를 만들기 위해 방방곳곳에 있는 산과 바위를 금강산으로 불러 모았다
이때 경상도 울산에서 큰 바위산 하나가 부리나케 금강산으로 달려가던 도중 1만2천봉우리가
모두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 낙심하여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설악산 울산바위다.
조선시대, 이 이야기를 들은 울산 고을 수령이 울산바위가 본래 자기고을의 바위라 하여 해마다
신흥사 주지에게 세금을 받아갔다. 신흥사 주지는 매우 속상한 일이었지만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해마다 억울한 세금을 내곤했다.
그때 절의 한 동자승이 꾀를 내어 세금을 받으러 온 울산고을 수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또 저 바위가 본래 울산고을의 바위라는데 우린 이제 필요가 없으니 그만 도로 가져가시지요”
동자승의 맹랑한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던 수령은 “음 바위가 하도 커서 그냥은 가져갈수 없으니
재로 꼰 새끼로 묶어다오”하고 맞장구를 쳤다. 동자승은 “네, 그거야 아주 쉬운일이지요”라고 선뜻 대답했다.
얼마 후 동자승은 속초지방에 흔히 자라는 속새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맨 다음 불을 질러 태웠다.
그러자 울산 고을 수령도 더는 억지를 부리지 못하고 울산바위에 대한 세금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구간에 가야할 황철봉과 조금전 지나온 상봉의 모습
신선봉에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긴 다음에 너덜겅을 지나 진부령으로 향한다
신선봉에서 너널겅을 지나 등로로 내려오니 등로 옆의 갈참나무들은 한결같이
앉은뱅이들이다...
아마 이곳은 겨울에 바람이 너무 드세어 바람을 이기려고 이런
모습인 모양인데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보다도
훠씬 더 지혜로운 느낌이다... 참으로 배울게 많다
화암재 갈림길(06:15)
우측에는 군부대 시설물에 철조망이 처져있고 접근금지라는 팻말이 있고
이곳을 넘어서니 멋진 암릉이 나온다.
누가 조금만 밀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바위를 지나 이곳에서 모두 모여
휴식을 취하면서 가져온 막걸리와 과일을 나눠 먹으면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너덜겅이를 지나는데 또다시 멋진 암릉이 나온다
조금전에 지나온 신선봉의 모습
너덜겅이를 지나니...
이곳 역시 자연에 순응한 갈참나무들을 만나고...
넓은 안부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의 내리막을 향한다.
낙타나무(06:50)
낙타처럼 굽은 나무를 만나는데 누군가가 돌에다가 낙타나무라고 써놨다
대간령 가는 길에는 핑크빛의 매혹적인 큰앵초를 많이 만난다.
앵초는 앵초과(櫻草科 Primul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꽃말은 ‘어린시절의 슬픔’이다
키가 15㎝ 정도로 타원형의 잎은 뿌리에서 모여나는데 위에 잔주름이 져 있으며,
조그만 털이 있고 잎가장자리에 톱니들이 있다. 연한 붉은색의 꽃이 4월경 잎 사이에서
길게 자란 꽃줄기 위에 산형(傘形)꽃차례를 이루며 핀다. 통꽃이지만 꽃부리는 5갈래로
나누어져 있으며, 나누어진 조각들은 뒤로 젖혀진다. 열매는 둥근 삭과(蒴果)로 익는다.
꽃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여러 원예품종들이 만들어져 있으나
꽃의 생김새가 벚나무[櫻]와 비슷하여 앵초라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그늘지고
공기 중에 수분이 많은 곳에 잘 자란다. 뿌리는 한방에서 거담에 사용하기도 한다.
큰앵초(P. jesoana)의 잎은 단풍나무의 잎처럼 생겼으며 이른봄에 어린순을 가지고
나물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앵초보다 흔하다.
빨간 병꽃도 만나고...
철쭉은 이별을 준비하고...
869.5봉(07:10)
869.5봉 삼각점(설악415 2007 재설)
헬기장이 있는 869.5봉으로 내려서니 주위에는 군 교통호가 설치되어 있고
가야할 병풍바위봉과 마산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군 교통호를 지나서 대간령으로 내려서는데 총무인 진주댁이 연달아 2번이나
넘어지는데 뒤에 가던 우대장 曰 오늘 수입이 많아서 총무가 자꾸 땅을 산다고 하는데
처음에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 의미를 알고 拍掌大笑를 한다
가야할 능선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대간령가는 길에서 만난 졸방제비꽃
미시령에서 이곳 대간령까지 단속구간에 걸리지 않으려고 3시간 40분동안 부지런히
온 탓에 드디어 가슴 졸이지 않고 마음 편히 걸을수가 있다.
내나라 내 땅을 걷는데 늘 가슴 졸이며 걸어야 하는 이 서글픔 언제까지 지속해야 하는가?
백두대간 걷는게 그리도 잘못이란 말인가
늘 전과자(?) 신분을 의식해야 하는지... 산꾼들이 진정 자연 파괴범이더냐.
아님 민초들의 녹을 먹으면서 자기들의 편안함을 영위하기 위해서 행정 편의주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더냐 만약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대간,정맥, 기맥, 지맥 산꾼만큼 산을 아끼는 사람들 그리 흔치 않으리라.
온 산을 피헤치며 자연을 훼손하는 멧돼지는 자연보호 대상이고
불과 50cm 폭의 능선 길을 걷는 산꾼들은 자연파괴범으로 죄인시하는
그 발상부터 버리시길, 정 단속하려면 제대로 하던지 아님 인원제한을
하면서 개방하여 전과자 그만 만들고 대간길 개방하소
비법정탐방로라 단속한다는 팻말을 넘어서 대간령을 발을 들여 놓는다.
대간령(大間嶺:07:30)
샛령 혹은 새이령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진부령과 미시령의
사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샛령·새이령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間嶺)이 되었고, 큰 샛령(새이령)과
작은 샛령(새이령)으로 구분하여 대간령·소간령이 되었다.
그 옛날 인간이 네발(자동차)이 아닌 두발로 다닐때강원도로 가는 유일한 길이 이곳 대간령이란다
미시령과 진부령이 생기기전에 영동과 영서는 잇는 중요한 고개로
속초와 고성에서 해산물을 싣고 원통과 인제로 넘나들었다 한다.
대간을 순 우리말로는 사이이다. 그래서 "새이령"이라고도 한다.
대간령보다는 샛령으로 부르는 원주민들에 의하면 고갯마루(샛령)에는
산신각과 원터(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아직도 고갯마루에서는 돌담과 집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간령은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옛길로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부령과 미시령보다도 사람들의 왕래가 더 빈번했던 고개였다.경사가 완만한 데다
거리도 지금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던 탓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파령(石坡嶺)이라고도 했고,한때 사자원(獅子院)이 있어서 원기령(院基嶺)
이라고도 했다는 대간령,지금은 대간꾼 외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다.
석파령(石坡嶺)은 신선봉의 너널지대에 온 이름으로 보인다
소간령(小間嶺 작은샛령)은 진부령 아래서 샛령을 향해 골짜기를 거스르다
만나는 고개인데 오름길이 된비알이라 이곳 사람들은 "된박재"라 부른다.
옛날 주막이었던 자리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정상 성황당에서는 매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성황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돌무더기는 여기저기 돌담을 짓느라 흩어져 있었다.
이곳 돌무더기 있는 곳이 예전에 이곳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한 주막이란다.
대간령 유래 안내판
즐거운 아침만찬
동료산꾼들이 모여서 각자 싸가지고 온 밥과 반찬을 꺼내 놓으니
즉석부페가 형성되고 아침 반주로 소주와 동동주 몇잔을 마시니
기분이 정말 쿨하다... 대간꾼답지 않게 30분간의 만찬을 즐기고 다시 길을 나선다
대간령에서 도원리 가는길
고개 내리막길에는 노란 괴불주머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대간령에서 마산봉으로 향하는 나무에는 누군가 국자를 걸어놨다.
마산봉가는 오름길에서 만난 졸방제비꽃
꽃말이 ‘순결, 다시찾은 행복 ’인 은방울꽃도 만나고...
아름다운 이름처럼 이 꽃은 사넬같은 고급 향수회사의 재료로 쓰인단다.
한방에서는 강심과 이뇨작용에 효과가 있어 심장쇠약, 부종,타박상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하기도 하고...
쥐오줌풀꽃도 만나고...
들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다가 눈앞에 암릉을 만나는데
이곳에서 오르지 않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대간길을 이어간다.
가야할 마산봉과 병풍바위봉은 점점 가까워지고...
인제군 북면으로 연결되는 소간령쪽은 어딜봐도 산밖에 보이질 않는다.
암릉구간을 올라서니 가야할 마산봉과 지나온 신선봉이 한 눈에 보인다.
오늘 베낭을 가지고 오지않은 김포대님이 수선화님의 베낭을 메고가는 셀파역할을 한다.
멋진 장관을 연출하는 암릉봉의 모습
다시 너덜겅이 가운데로 지나간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나무들
암릉사이에서 주운 탄피
880봉(08:40)
가야할 병풍바위봉의 모습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완만한 능선을 따라 고도를 높인다
풀솜대(지장보살)
잎모양은 둥글레와 비슷했고 흰색꽃은 자그마하니 마치 군에서
주는 건빵에 들어있는 별사탕 모양을 한 풀솜대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고 나서
자신도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하신 보살
옛날 가뭄이나 전쟁 춘궁기가 오면
굶어죽는 백성들이 생겨났고
이런 백성들을 위해
절에서 풀솜대와
약간의 곡식을 섞어
죽을 쑤어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데서
지장보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둥글레나 두루미꽃과 유사한 이 꽃은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
녹약이라하여
사지마비 생리불순 타박상 등에 쓰이는
참 대단한 이름을 가진 들꽃이다.
병풍바위 갈림길(09:23)
병풍바위봉(1,058m:09:25)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간성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토성면쪽에서 보면 부드러운 육산으로 보이지만 간성읍쪽에서 보면 바위로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보여서 병풍바위봉으로 불리는듯 하는데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가야할 진부령과 홀리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
내 나라 내땅이지만 비무장지대라는 이유로 밟지 못하는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대간 능선인 칠절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서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인제쪽은
그 어디에도 민가 하나 보이지 않고 산만이 보인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중에 홍천 다음으로 넓은 인제군의 면적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난다.
다시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지나온 상봉과 신선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동쪽으로는 잠시후에 가야할 마산봉이 우릴 기다리고 있고...
가야할 홀리마을도 아련히 보이고...
병풍바위봉 정상에서 동료산꾼들과 시원한 맥주와 과일을 나눠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다.
닉이 보스인 보스아우님은 ‘BOSS’라고 불러 달라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보스 아우님과 같이 온 ‘손칸’이란 젊은 산꾼이 베낭에서 시원한 맥주 6개를 내놓는다.
아이싱을 했는지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 난 맥주 2캔을 가지고 다니는데도
힘에 부치는데 참으로 젊음이 좋긴 좋구나... 정말 부럽기만 하다.
‘칸’ 은 족장을 뜻한단다. 또다른 산꾼 ‘대부’ 님은 참외 대엿개가 들은 봉지를 꺼내서
나눠 먹는다. 대간팀 5기의 꽃인 진주댁과 수선화님, 그리고 대간길을 같이 걸으면서
처음으로 같이 산행을 한 육부능선님... 준족이라 한번도 따라 가보질 못했는데
오늘은 처음오신 친구분 때문에 후미에 동참하였고,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하면서도
엄청난 열공모드인 하늘마음님... 지난구간 배신(?)을 때려 섭했는데 오늘은 마음을 맞춰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마산봉으로 향한다.
병풍바위 갈림길에서 만난 반가운 시그널
병풍바위봉을 내려오니 부드러운 등로가 나오고 주위에는 멋진 노거수가 많이 보인다.
주위에는 연령초와 홀아비바람꽃이 많이 보이고 잎이 넓은 박새 어린잎도 꽃을 튀우려고 준비한다.
낮은 산에서는 잘보이지 않는 산당귀도 자주 눈에 보인다.
갑자기 숲에서 으스럭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조그만 독사 한마리가 도망을 간다
부드러운 육산을 걷는데 늘 분위기 메이커인 BOSS 아우님의 걸쭉한 입담에 모두들
즐겁게 산행을 하면서 잠시후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마산봉 갈림길이 나온다.
어차피 한번오면 한번은 가야하거늘 ... 너무 서러워 마소
마산봉 갈림길(09:55)
마산봉 갈림길에 올라서니 이벤트팀으로 오신 레인저회장님과 솜다리님이 계신다.
아마 알프스리조트에서 올라오신 모양이다. 반갑기만 하다.
길림길에서 100여m 떨어진 우측에 있는 마산봉으로 향한다.
마산봉(馬山峰:1,052m:10:00)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과 토성면에 경계를 이룬 봉우리로 산세가 말과 같이 생겨
마산(馬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전해지며 마산봉(馬山峰)으로 불리기도 한다.
1911년에 발간된「조선지지」자료에는 간성군 대대면 죽포리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두 곳의 마산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이곳의 마산은 토성면 원암리의 마산이다.
「해동지도」를 비롯한 고지도와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마산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금강산 1만2천봉 가운데 하나로 설경이 뛰어나 건봉사(乾鳳寺), 천학정(天鶴亭)
화진포(花津浦) 등과 함께 고성 8경의 하나에 꼽힌다.
금강산 1만2천봉의 남한 제2봉인 해발 1,052m의 마산봉은 백두대간 준령의 알프스스키장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봉우리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절경과 함께 겨울철 설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연의 위용과 위엄을 함께 느끼게 한다
마산봉은 봄철 등산코스로도 이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마산봉을 정점으로 서쪽 방향으로 수개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을 중심으로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남한쪽의 백두대간 최북단에 위치하며
신선봉과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등산코스이다.
마산봉 정상에서 60년이 넘게 한반도가 두동강이 나있어 가지 못하는 북녘땅의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보수가 뭐며 진보가 뭣인가? 좌.우의 대립속에 전세계에 유일무이하게
두동강이 나버린 이 山河...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어 버렸단 말인가.
정치적 이데오르기에 희생되어 갈라진 이 疆土. 내 생애에 통일이 되어 백두산까지 걸을수 있을런지...
봉우리 아래로는 대한민국 최북단인 간성읍의 山河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성군은 강원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동경 128˚ 35' 18"로 부터 동경 128˚ 13' 41"까지 동서간 32.17㎞이며,
북위 38˚ 11' 06" 로부터 38˚ 36' 38"까지 남북간 48.13㎞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북으로 세계적인
명산인 금강산을 경계로 통천군(通川郡) 과 접하고, 동쪽은 동해(東海), 서쪽은 향로봉을 경계로 하여
인제군(麟蹄郡)에 접하였으며 남으로는 속초시 장사동(章沙洞) 을 경계로 하고 있다.
마산봉 정상에 있는 1등 삼각점(△ 간성24 2004 이설)
마산봉 정상에서 동료산꾼들과 사진도 찍고 서서 휴식을 취한 다음 진부령으로 향한다.
갈림길에서 베낭털이를 하려 했는데 이곳은 파리가 많아서 조금을 더 내려간다.
홀리마을에서 마산봉 오르는 길에는 인부들이 등로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있다.
조금을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이곳에서 베낭털이를 한다.
맥주와 소주 그리고 레인저회장님이 하사하신 참외10개를 나눠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한참을 편한길을 내려가다가 급경사로 내려서니 부도가 나서
폐허가 되다시피한 알프스 리조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알프스리조트와 간성읍 홀리마을 전경
알프스 스키장은 1971년 북설악 스키장으로 개설, 진부령 스키장으로 불리다가
1984년 겨울부터 알프스 스키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500~1,000m 되는
슬로프 3개와 리프트 시설 등 현대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 상태가 엉망인것을 보아 암 부도가 난 모양이다.
오래전에 건봉사 성지순례길에 콘도에 한번 잔 적이 있는데 난방이 제대로
안되어서 상당히 고생한 기억을 같고 있는 곳이다
을씨년스러운 알프스리조트 뒷길을 내려가는데 상당히 미끄럽다.
마사토 길을 내려가는데 자꾸만 미끄러워 지고 힘이든다
갑자기 핸드폰에서 반야심경이 울린다. 왜냐고요 내 핸폰의
컬러링이 반야심경이거든요... 개포동사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온다.
‘김교수 딸래미 결혼식에 같이 가잔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난 지금 현장에 있다고 둘러대면서 잘 갔다오라고 하니
옆에있는 동료산꾼이 웃는다. 작업현장 맞긴 맞잖어.
이런 산행도 노동중에 상노동이니까 ㅋㅋㅋ
멈춰진 지 오래된 리프트를 지나니...
호젓한 등로가 나오고...
편백나무 숲을 지나서 펜스가 쳐진 가건물을 만난다.
펜스에는 백두대간 산꾼들의 시그널이 마치 희말라야라도 온 느낌이다.
지나간 자들의 족적이 뚜렸한데 범여는 저런 흔적은 남기고 싶진 않다.
그저 물처럼 바람처럼 생긴 그대로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시그널이 즐비한 펜스를 지나서 내려오니 8년만에 백두대간을 완주한
아크릴판이 보이는데 느림의 美學을 아시는 분께 박수를 보낸다. ㅉㅉㅉ
아예 백두대간을 휴전선 치듯 꽉막아 버리시지 그래!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장 나리 당신들이 하는 일은 도대체 뭐요?
마산봉 능선을 내려와서 부도가 난체 모든게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있는 알프스콘도 마당을 지나서 눈물고개로 향한다.
부도난 알프스 콘도마당을 지나...
나무숲을 넘어서니...
눈물고개(11:10)
이곳부터 진부령까지 약 4km가까이는 임도와 농로 군부대를 끼고 그냥
산보하듯이 걷는데 이정표는 아주 잘되어 있어 걱정할 게 없는데
다만 따가운 햇빛이 산꾼을 힘들게 한다.
눈물고개에서 진부령가는 세밀도
등로 주위에는 쥐오줌풀이 많이 피어있고 바람둥이꽃 민들레도 많이 보인다.
농로를 지나 축산분뇨를 쌓아놓은 곳을 지나는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정표를 지나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조그만 저수지에는 물이 말라있고...
넓은 공터를 지나 군부대로 향한다
원대간 길은 군부대가 점령을 하고 있어서 좌측으로 우회를 하는데
이곳 부대는 이전하고 시설물은 그대로 방치가 되어 있는데
이 참에 대간길을 예전처럼 복원되었으면 한다.
군부대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지 인기척도 없고
건물들은 인근 알프스리조트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군부대를 지나서 홀리마을로 가는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가다가...
200m 직전에 우측으로 꺽어진다
철조망을 따라 올라가니...
철조망 옆으로 호젓한 길이 나오고...
야트막한 야산을 지나니 이내 홀리마을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나온다
←진부령 2.9km ↑ 마산봉2.5km →홀리마을 0.1km 이정표를 만나서
마산봉으로 가는 콘크리트 도로를 걸어가는데 따가운 햇빛이 장난이 아니다.
흘리(屹里)마을은
산림이 울창하고 산이 높다하여 흘리(屹里)라 불렀고 속칭 밖(外)흘리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마을의 면적이 광활하여 지역별로 구분할때 칭하던 이름으로 현재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홀리의 행정구역은 고성군 간성읍에 속해 있으나 읍 소재지에서 워낙 먼 거리에 있고
백두대간 준령 최북단에 있는 오지중에 오지로서 예전엔 감자와 옥수수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화전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나 이곳에 알프스 리조트가 생기면서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은 피망과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면서 부농의 꿈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양쪽으로 비닐하우스를 끼고 북쪽으로 1km 정도를 걸어가다가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이곳은 대간길답게 이정표가 아주 잘 설치되어 있어 알바할 일은 없다.
민가 한채를 만나서 민가를 끼고 돈 다음에 민가 뒷쪽 좌측으로 꺽어진다
진부령 정상 1.6km. 마산봉 3.8km가 있는 이정목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 걸어간다.
오늘도 BOSS아우님과 代父님이 같이 걸어가는데 진부령에서
향로봉까지 가고 싶다고 하니까. 오지랍 넓은 보스 아우님이
자기가 근혜누님과 정은이 조카한테 이야기해서 가게 해주겠단다.
그러면서 갑자기 전화를 하더니만 정은이를 바꾸란다.
나중에 알고보니 자기 동생 딸래미가 정은이란다.
처음엔 영문도 모르고 의아해하다가 배꼽을 잡고 웃는다
임도길을 계속 걸어간다
또다른 민가가 나오고 다시 우측 임도로 계속 걸어간다.
임도 옆에는 토종닭 사육장이 있는데 개쉬끼 2마리가 산꾼을 잡아먹을듯이 짓는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S자 형태로 걸어 내려가다가 우측 임도로 접어든다.
송전탑을 지나니 마지막 이정표가 나타나면서 편안한 숲속을 걷는다.
숲이 우거진 등로를 걸으니 기분이 상당히 상쾌하다
잠시후에 나무 계단이 나타나고 이내 홀리마을과 진부령을 연결하는
왕복2차선 포장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따라 계속 내려간다.
도로를 따라서 200여m 정도를 내려가니 백두대간종주 기념공원이 나온다.
인증샷
백두대간 종주기념공원(12:10)
백두대간기념종주공원은 한전KPS라는 회사에서 운영하는데
백두대간을 종주한 산악회에서 기념비를 세워논 곳이다
백두대간종주기념공원을 두루 살핀 다음에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북녘땅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 길이 자꾸만 눈앞을 가로 막는다.
도로 우측을 가로질러 내려오니...
군벙커가 나오면서...
진부령 비석이 보이면서 한구간을 마무리하는 스틱을 접는다.
먼저 내려온 동료 산꾼들이 기원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늦게 내려온 게 조금은 미안하다... 그러나 어찌하리오
숏다리라 아무리 따라가려해도 갈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진부령(陳富嶺:520m:12:20)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 사이에 있는 고개로 칠절봉 (七節峰:1,172m)과
마산봉(馬山峰:1,052m)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으며, 오래전부터 관동지방과 영서지방의
중요한 교통로가 되고 있다. 남쪽의 대관령, 북쪽의 추가령과 함께 3대 영(嶺)으로 불린다.
고개길이는 약 60㎞이다. 이곳에 나 있는 도로는 1981년 국도로 승격되고,
1984년 10월에 2차선으로 확장 및 포장공사가 완료되었다.
고갯길 구비구비에서 바라다보이는 동해의 모습이 장관이며, 이곳에 안개가 감돌아
봉우리를 덮게 되면 대자연의 장엄한 모습이 연출된다.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에는 강설량이 매우 많다.
그 옛날 동서를 잇는 오솔길이었던 진부령은 "1632년 간성 현감이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해 좁은 길을 넓혔으며,1930년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1987년 2차선 도로로 넓혔다."는 고개마루 빗돌의 글은
진부령의 유래를 어렴풋이 전해주지만,정작 진부(陣富)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부령(520m)은 한계령(1,004m),미시령(770m)과 더불어 설악산을 대표하는 고개다.
그러나 두 고개와 달리 진부령은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다.
고갯마루에 주차장이 있는가 하면 가게들이 마을을 이루어 백두대간의 고개로는
통 믿기지 않는다.고갯마루가 마을을 이루었으니 예로부터 부르기를 ’조쟁이’라 하였다.
지난날,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곡물이 마주 올라와 ’이른 아침부터 장이 선다.’는 뜻으로 얻은 이름이다.
요즈음 부르는 이름으로 흘3리(屹三里)이며 고성군 간성읍을 따른다.
고성과 간성이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그만 남북으로 갈라졌다.
고성은 북녘 땅이 되고 간성은 남녘 땅이 되고,남녘 땅에 붙여진 고성군의 명칭은
창졸간에 코앞의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향수를 달래는 이름이다.
진부령 길은 이제 46번 국도로 바뀌어 제법 오가는 이의 발길이 늘었지만,알고 보면
마치 몸뚱이의 절반을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운명처럼 아주 가엽고 애처로운 길이다.
백두대간 남진의 무사산행을 기원하는 기원제
산행이 끝난후 진부령 표시석에서 백두대간의 무사완주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여법하게 올린다. 이곳 진부령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도상거리 총 675.9km (산림청 672km , 실거리 1,240km)를
1년 6개월에 걸쳐 36번에 걷는 출정식의 기원제 여법하게 진행을 한다.
산행대장이 백두대간상 산왕대신들은 모시는 강신과 초헌을 시작으로
모든 산꾼들이 합심하여 엄숙하게 진행 되었고 십시일반으로 물품을 찬조하였다.
뒷풀이도 압권이었다. 시루떡에다가 각종 음식물, 특히 김포오야지님이
가져오신 돼지고기, 그것을 맛있게 삶아 산꾼들에게 봉사해주신 유성님과 베니님
그리고 늘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참이슬 아우님... 복받을겨.
또 신사임당(5만원)을 아낌없이 시루떡 위에 올린 시칠리아 마피아 패밀리들도...
다들 고생했습니다.... 글고 오늘 원일 어르신 생신... 정말 감축 드립니다.
배가 터지도록 잘먹고 난 다음에 기념 사진을 남긴다.
4년전 후배산꾼들의 축하를 받으며 북진 완주를 마치고...
그리고 길건너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가 있는 또다른 이정석에서
하늘마음님과 둘이서 인증샷을 남긴다. 이곳에는 4년에는 없었던
진부령미술관이 들어선 바람에 주위 경관이 많이 망가져있다.
또하나 가관인 것은 미술관에 있는 개방형 화장실에 들려서
땀냄새를 없애려고 세수를 하고 수건을 물에 적셔 조금 씻는데
미술관측 인사인듯한 60도 넘은 남자분이 입에 게거품을 품고
날리부르스를 치는데 가관이 아니다... 나이값을 해야지
개방형이란 말 그대로 지자체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곳인데 자기들 관리가 힘들다고 저리할까.
그럼 지원을 받지말고 개방을 말든지...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향로봉지구 전투전적비
아! 진부령
백두대간 남한지역의 최북단으로 남진의 시발점이자 북진의 종착지이기도 한곳이다.
물론 그 북쪽에 향로봉(1,296.3m)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군사통제지역으로 모든 대간꾼들이 이곳 진부령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진부령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용대리 다리밑에서 알탕을 한 다음에
서울오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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