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5월 12일 (무박산행)
☞산행날씨: 맑음날씨에 박무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1 km(어프로치 0.5km 포함) / 10시간 25분 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와 함께
☞산행코스: 삼도봉 터널-부항령-팔각정-853m봉-선황당재-812m봉-폐광터-833m봉-덕산재
얼음골 약수터-대덕산-삼도봉(초점산)-수도지맥 분기점-농로-소사고개
오두재 갈림길(794봉)-삼봉산-금봉암삼거리-호절곡재-된새미골재
수정봉-빼재(신풍령)
참으로 챙피해서 얼굴을 못들겠다.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어찌 그렇게...
청화대 대변인이란 자가 국제적 나라망신을 다시키고...
요즘 염라대왕은 뭐하시는지 모르겠다... 저런자는 왜 안잡아가는지.
청와대 대변인이란 자리가 그리도 한가한 자리인지... 눈을 부릅뜨고
대통령을 보좌해도 될까말까 한데 호텔에서 술이나 마시고 자기 딸같은
애들한테 몹쓰짓을... 부디 매스컴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대통령께서도 인재를 뽑으실 때 능력도 중요하지만 人性을 가장 먼저
검증하시어 부디 성공한 대통령으로 聖君이 되시길 바란다.
토욜(5월11일)은 吉日인지 웬넘의 행사가 많은지...
대엿섯개의 행사가 한꺼번에 겹치니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초등학교 재경동창회, 강남구민체육대회, 학교 등산모임, 거기다가
예식장도 2군데나...결혼식은 봉투로 대신하고, 다른곳은 참석을
다 포기하고 점심을 먹고 다믕주 금요일(17일) 초파일에 앞서 하는
행사인 연등축제 진행요원을 맡아 동국대에서 종로를 거쳐서 조계사까지
행진하는 연등축제에 참석을 하여 일을 보다가 후배 포교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중간에 빠져나 얼른 집에와서 저녁먹고 샤워를 마친 다음에 무릎에쑥뜸을 뜬 다음에 탑승장소인 양재역으로 향한다 (22:40)
지난주 강화지맥길에서부터 무릎이 시큰거리며 통증이 심해 1주일내내
한의원에 다니면서 침을 맞고 뜸을 했는데도 별도 차도가 없어 고민스럽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연등축제 가는길에 학교정문에서
부모와 만나는 인연이 어렵고,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佛法)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이를 '맹구우목(盲龜遇木: 눈 먼 거북이가 무판자를 만난다는 고사. 눈 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 머리를 물 위로 내놓는데 구멍뚫린 나무판자를 만나 그곳에 목을 놓고 쉰다.그러나 판자를 못만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만큼 만나기 어렵다는 말)'에
비유하기도 한다.
어머님 뱃속에서부터 모태신앙이 불교이긴 했지만 내가 진정 佛法을 만나고 부처님의 제자로
귀의한 지는 2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 당신에는 初發心 하나로 처절하게 부처님에게
다가가려고 애를 썼는데 이젠 그 신심이 약해졌는지 자꾸만 등한시 하는 느낌이다.
동국대 정각원
포교사단에서 오늘 연등법회에 참석하여 봉사활동을 해야하는데
며칠전부터 무릎이 너무 아파 탑골공원 집합장소에 들려서 출석
체크하고 후배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오는데 학교에서 선배가
전화가 온다. 동문회에 제발 얼굴만이라도 비춰 달란다.
학교 정각원에 들려 부처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고 대불광장으로 향한다.
대불광장에 들렸다가 연등축제가 열리는 대운동장으로 향한다.
연등회가 열리는 대운동장에는 연등축제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동문들이 모여있는 코너에 들려 눈도장을 어영부영하다가 살짝 빠져 나온다.
후배동문들이 열심히 하는데 조금은 미안하지만 나 역시 예전에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졸업한 지가 벌써 15년이 지났으니 이젠 요령만 늘었다.
야단법석이 끝나고 제등행렬이 시작하는데 동문들과 학교에서 동대문을 거쳐
종로를 지나 조계사까지 하는 제등행렬에 끝까지 따라 갔다가는 아무래도
백두대간 길을 갈 수가 없기에 장충체육관을 지나 태극당 앞에서 행렬에서
이탈하여 저녁 8시에 지하철을 타고 집에와서 베낭을 꾸려 양재동으로 향한다.
버스가 예정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하여 부항령으로 향하는데 지난번
몸이 불편하여 삼도봉에서 탈출한 2명의 산꾼이 삼도봉에서 출발한다고
하여 무주I.C에서 빠져나와 무주군 설천면 미천리 중미마을에 내려주고
부항령으로 향하는 바람에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부항령에 도착한다.
삼도봉 터널 입구에는 부항령표시석이 있는데 부항령은 이곳에서 500m 위에 있다.
김천쪽의 가매실 마을쪽은 불빛이 환하다.... 가목(부항:釜項)마을의 유래를 보면
마을이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하다가 지금은 한자로 부항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가목이라 하는데, 이는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가목재에서 감내(甘川)의 큰 줄기 샘이 발원한다. 마을이름의 기원으로는 가마-가미-거무(거미)-거북의
의미 상통함으로써 농경사회에서의 숭배대상인 거북 신앙 곧 물신앙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도봉 터널(04:05)
1999년 12월 6일 삼도봉터널(391m : 경북 151m, 전북 240m) 개통으로 무주로 가는 길이
개통되어 영.호남인이 더욱더 가까워졌으며, 삼도봉 터널 앞 소공원은 영호남인의 화합과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교통량이 거의 없어 여름이면 500m 터널 양쪽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길이 없을 만큼 돗자리를 펴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하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속도를 줄이거나 함께 피서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도봉터널 준공 표시석
터널입구에서 오늘은 인원이 적어 조촐하게 인증샷을 남기고 길을 나선다.
삼도봉 터널에서 편한 임도를 따라서 10분 정도를 올라오니 부항령을 만난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오지답게 공기가 너무 좋은지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고
하늘의 떠있는 별은 얼마나 밝은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거기다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微風이 산꾼의 어깨를 가볍게 해준다.
부항령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으며 숨한번 몰아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부항령(釜項嶺:680m:04:15)
부항령은 경상북도 김천시와 전라북도 무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봉과 대덕산 사이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고개로 경북, 충북, 전북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봉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천천히 낮아져 부항령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덕산재에서는 약 650m로 낮아지고 덕산재를 지나면서 급격하게
높아져 대덕산에서는 약 1,290m로 높아진다.
가목마을에 있는 고개여서 마을 이름을 따서 가목령 또는 부항령(釜項嶺)이라 하였다.
가목은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아서 가매실·가매목이라 하던 것이 줄어든 이름이다.
한자로는 ‘부항’으로 표기한다. ‘가목’을 다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면목(面目)’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부항령 동쪽 비탈면에 있는 하곡은 김천시를 지나는 감천의 지류 하천인 부항천의 최상류에 해당하며
부항령 일대의 지질은 선캄브리아기 흑운모 편마암으로 이 암석은 김천시
서부와 남부에서 대체로 고도가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부항령은 예부터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연결하는 통행로 구실을 했던 곳이다.
고개로서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다가 지방도 1089호선이 개설된 뒤 국도 30호선이 지나는
덕산재와 함께 소백산맥을 넘어 김천시와 무주군을 잇는 고개 기능을 수행하였다.
헬기장(04:20)
부항령에서 5분정도를 올라오니 어둠속에 폐헬기장이 나타난다.
능선에 오른 다음 조금씩 고도를 높혀 가면서 안부 능선을 걷는데 이정표를 만난다.
04시 30분정도 되었는데 벌써 조금씩 주위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여명이 밝아온다.
853.2m봉(04:45)
봉우리 정상에는 이정표가 서있고 삼각점이 있다.
853.2m봉 4등삼각점(무풍 413. 1980 재설)
어둠속에서 만난 홀아비꽃대
조그만 안부를 오르내리면서 편안 길을 걷는다.
오늘은 식구들이 단촐한데 벌써 선두들은 도망을 가버린다.
거기다가 평소에 후미 팀이던 하늘마음님과 수선화님도 배신(?)을
하고 선두에 붙어버리는데 그 대신 꿩대신 닭이라고 김포 오야지님이
자기 수하들을 삼도봉에 보내고 맘이 편치 않은지 자꾸만 뒤로
돌아보면서 맨뒤로 쳐지는 바람에 오늘도 멋진 후미의 드림팀을 이룬다
850m봉(05:04)
멋진 소나무를 지나는데 2주전과는 달리 이곳은 철쭉이 만발했다.
어둠속에 고도차가 그리크지 않은 봉우리를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이젠 완전히 어둠은 걷히고 동이트기 시작한다.
날이 밝아지면서 주위의 사물이 보이는데 등로 주위에는
참취를 비롯하여 떡취등이 많이 보이는데 후미팀들은
취나물 채취에 정신이 팔려서 나물 채취에 여념이 없다.
잠시후에 멋진 데크목 계단이 나타나고...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대덕산과 삼도봉(초점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귀속되고, 1914년에 소태를 병합하여 연화리라 칭하고 김천군 대덕면에 편입되 었으며
1960년에 연화리에서 나누어져 분동하여 연화 1리가 되었다. 마을의 북쪽과 남쪽은 산으로
되어 있고 덕산 1리와 감주에서 발원된 덕산천과 감주천이 마을 동쪽에서 합류하여 동으로
흐르고 두 냇물의 양안에 비교적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면 소재지와는 30번 국도로 2.5km 거리이며 마을 앞에서 내감으로 가는 지방도가 남으로 갈라진다.
동은 관기1리, 서는 연화 2리와 들로 연결되고 남은 외감리, 북은 관리 3 리와 산 으로 접경하고 있다.
지나온 850m봉의 모습
데크목 계단 우측의 버들강아지는 벌써 노년에 접어들었다.
철쭉을 삼국유사에 "如屛臨海 高千丈 上有花盛開(여병림해 고천장 상유척촉화성개)"라고 나온다.
철쭉 척(躑)자는 머뭇거린다는 뜻이고 촉(躅)자도 머뭇거린다는 뜻이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머뭇거린다는 뜻이다.
벌이 철쭉 꿀을 빨면 기절을 한다고 했던가? 양도 먹지 않고 피해간다는 철쭉은
초식동물이 먹지 않아 산 정상에 그렇게 넓게 퍼질 수 있었다고 한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어 참꽃이고 철쭉은 못 먹는다고 개꽃이다. 철쭉은 진달래보다
색이 연하다고 연달래, 진달래 다음에 연달아 핀다고 연달래라고 부른다.
성황당재(05:38)
전북 무주군 무풍면 부평마을과 동북쪽으로 경북 부항면 어전리를 연결 하는 재로서
그저 평평한 안부로 헬기장만한 넓은 공터가 있고 아무런 표식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폐광터 데크목(05:42)
멋진 데크목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 예전에 이곳이 철광석 탄광이 있었던 곳이란다.
데크목 너머로 아침해가 벌써 많이 올라와 버렸다. 오늘 처음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물한모금 마시려고 베낭을 내려 놓는데 데크목 옆에 먹기좋게 크버린 두릅이 많이 보인다.
두릅을 좀 따서 베낭에 넣는데 주위에는 취나물이 많아서 그것도 전리품으로 챙기고...
다시 베낭을 메고 덕산재로 향한다.
둥글레 군락지를 지나고... 묘지 옆에는 둥글레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둥글레는 백합과(百合科 Lili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땅속줄기에서 줄기가 나와 60㎝ 가량 자란다.
잎은 줄기 한쪽에 치우쳐서 어긋난다.
꽃말은 “고귀한 봉사”이며 잎자루는 거의 없으며 잎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꽃은 6~7월에 잎겨드랑이에서 1~2송이씩 피는데, 긴 대롱처럼 생겼으며
꽃부리 쪽은 담녹색이나 꽃자루 쪽은 흰색이다. 꽃부리는 6갈래로 조금 갈라져 있다.
열매는 장과(漿果)로 가을에 검은색으로 익는다.
이른봄 어린잎과 뿌리줄기를 캐서 어린잎은 물에 오래 담가 우려낸 다음 나물로 먹으며,
뿌리줄기는 삶거나 구워먹거나 녹말을 만들기도 한다. 쓴맛이 없고 단맛이 조금 도는 뿌리줄기를
가을에 캐서 그늘에 말린 것을 위수 또는 위유라고 하는데 한방에서는 자양·강장·해열 등에 쓴다.
뿌리줄기를 가루로 만들어 타박상에 바르기도 한다.
편안한 안부 능선을 총무님과 김포 오야지님, 그리고 지금도 군번과 총기번호까지
달달 외우신다는 군인정신이 초개같이 살아있는 김포대님과 세상사를 얘기 하면서
대간 산꾼이 아닌 일반 등산객처럼 여유롭게 산행을 한다.
이른 아침에 등로 옆에는 아기나리가 수줍은 새색씨처럼 다소곳이 피어있다.
신의터재에서 부터 계속 만나온 개인택시 광고.
팬백나무 숲속을 여유롭게 걷는다... 이게 힐링(Healing)이라는 거야
쇠뜨기(뱀밥)도 이쁘게...
덕산재(德山峙:644m:06:10)
전북 무주군 무풍면과 경북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30번 국도가 지나가지만 도로는 의외로 한가하다.
삼도봉과 대덕산 사이의 고개로 예전부터 전북과 경북의 서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였다.
지금은 무주에서 성주를 잇는 30번 국도가 지나간다.
덕산재 동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이 덕산리·연화리를 거쳐 관기리에서
수도산에서 발원한 감천(甘川) 상류로 흘러들고
덕산재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금평천(金坪川)이 무주 남대천을 이룬다.
덕산재는 달리 주치령(走峙嶺) 또는 주티령이라고도 한다.
과거 고개를 넘어갈 때 산적이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 만약 고개에서 산적이
나타나면 고개 아랫마을로 빨리 달려와야 살 수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주치령 아래에 있는 주치마을은 달리 옴배미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이 대덕산(大德山)[1,290.9m], 주치령, 국사봉(國士峰)에 둘러싸여
유난히 포근한 곳이므로 ‘따뜻할 온(溫)’와 일정한 면적의 땅을 뜻하는
사투리인 ‘배미’를 합하여 온배미라 한 것이 변한 이름이다.
예전에 휴게소로로 사용되는 건물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조그만 암자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덕산재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덕산재 - 김천 대덕면쪽의 모습
신라시대에는 지품천현(智品川縣)에 속하였다가 757년에 개령군 지례현에 귀속되고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성주 경산부 지례현에 이속되었다. 조선시대는 지례현 면이라고
불려졌다가 1895년에 상남·하남·외남의 3개면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에 3개면을 통합하여 대덕산의 이름을 따서 대덕면이라 칭하여 김천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32개 동을 화전 · 문의 · 대리 · 연화 · 덕산 · 내감 · 외감 · 가례 · 조룡 · 중산 · 추량관기의
12리로 통합 개편했다. 1949년에 김천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금릉군 관내가 되었다
1960년에 12개 리를 21개 리로 분할 개편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김천의 남쪽 끝에 자리를 잡아 경북·경남·전북의 삼도 접경 지대에 위치하여 김천시청에서
면소재지까지는 32km로 서로는 전북 무주군, 남으로는 경남 거창군과 접경하고,
북으로는 지례면과 부항면, 동으로는 증산면과 인접하고 있다
덕산재 - 무주군 무풍쪽의 모습덕산재 광장에 서있는 무주군 관광안내도
무풍면은 전라도 무주와 충청도 영동 그리고 경상도 거창으로 갈라지는 곳이라며 그래서 '무풍 지경(地境)이'라고 부른다.
무풍은 소사동에서 발원한 남대천을 끼고 터전을 잡은 고을로, ‘무풍’이라는 이름은 이미 통일신라 때 지어졌다고 한다.
봉황을 닮은 대덕산 아래에 위치하여서인지(대덕산의 서북쪽) ‘정감록’은 전쟁 등 큰 재앙이 발생시 우리가
숨어야할 안전한 피난처 즉 三災不入之地(전쟁과 질병이 없고 흉년이 들지 않는 살기가 좋은 곳) 으로
십승지(十勝地)를 말하고 있다. 무풍은 피난하기 좋은 십승지 중의 한 곳일 뿐만 아니라 ‘三豊’ 중의 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같은 큰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 곳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 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지금도 무주군의 대표적인 성 씨인 밀양 박 씨, 안동 권 씨, 문화 유 씨 등으로 살고 있다.
무풍은 백제와의 사이에 나제통문을 경계로 예전에는 신라 땅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으나
언어와 풍습, 생활은 경상도,즉 김천과 거창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신라 땅이었던 무풍은 본디 무산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져서 지금의
김천인 개령군에 속하게 됐다고 한다. 그 뒤 1414년(조선 태종 14)에 무주현으로 편입됐고,
1914년부터 무주군 무풍면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인위적인 행정 구역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산줄기로 갈라지지 않은 한에는 한 마을
정서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왕조의 절대 권위보다 더 큰 산의 영향력이다.
이것이 백두대간의 진실이다.
덕산재의 이곳저곳을 두루 살펴보고 다시 대덕산으로 향한다
낙엽속에서 피어나고 있는 하얀 제비꽃
물뿌레나무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쉬어가는 곳(06:25)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다리도 생겼고...
병꽃나무도 자기도 함봐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무명묘지를 지나니...
구조 안내 표시목을 만나고...(06:43)
공룡알처럼 생긴 바위(범여의 생각中에서)도 만나고...
김해의 어느 산악회 시그널... 왠지 반갑기만 하다.
근데 김해 백두산악회 홍길동 아우님의 흔적은 보이지 않네
얼음폭포(06:55)
대간 능선에서 10m 떨어진 좌측에 무주군에서 조성한 얼음폭포가 나온다.
4년전 북진길에서는 만나지 못한것 같은데 말이다.
대덕산에서 흘러 내리는 조그만 폭포의 맑은물은 그야말로 甘露水다.
연거푸 플라스틱 바가지로 2잔을 마시고나시 속이 시원하다.
덕산재에서 대덕산 오름길은 지그재그로 올라가는데 은근히 사람의 진을 뺀다.
호젓한 산죽길을 걷는데도 자꾸만 힘이 부치고 다리에 통증이 시작된다.
요즘들어 부쩍이나 자주 다리의 통증을 느껴... 이 길을 걸어야하나 하는 혼란이 온다.
얼음골 약수터(07:28)
4년전 북진때는 가뭄에 물이 말라 버렸는데 오늘은 그래도 먹을만큼 물이있다.
얼음골 약수의 멋진 문구에 홀려서 물한모금을 마시고 대덕산으로 향한다.
고비나물
고비과(―科 Osmundaceae)의 한 속으로 고사리잎은 갈라져 있고 키가 1.5m까지 자란다.
이 속에 속하는 식물들은 곳곳에서 자라며 실 모양의 뿌리는 무더기로 자라나는데
이를 고비섬유(osmunda fibre/osmundine)라 한다.
이 섬유를 뜯어낸 다음 배지(培地)를 만들어 난과식물 중 착생(着生)생활을 하는 종류들의 뿌리가 자라게 한다.
그래서 난토탄(蘭土炭)이라고도 하며 착생식물들은 배지에서 살면서 공기 중에 있는 물과 양분을 흡수한다.
우리나라에는 3종의 고비속 식물들이 자란다. 이중 다년생인 고비(O. japonica)는 숲가장자리나 냇가
근처에서 흔히 자라고 있으며, 꿩고비(O. cinnamomeavar. fokiensis)와
음양고비(O. claytoniana)는 어린순을 먹기도 한다.
고비는 고사리와 함께 대표적인 식용 산채로서 봄철 어린 순을 채취하여 삶아서 말렸다가 나물로 식용하며
고기찜, 튀김 등의 요리로 사용된다. 양질의 단백질, 비타민A, B2,C, 펜토산, 카로틴, 니코틴산을 함유 하고 영양가가 높다.
대덕산으로 오르는 8부 능선에는 이제서야 봄이 오는 모양이다
8부능선에 오르니 이곳의 나무들은 아직도 겨울잠도 덜 깬 모양이다.
그러나 땅바닥에는 고비나물과, 곰취, 떡취를 비롯한 취나물과 고사리들이
꽤나 보이는데 선두로 가는 동료산꾼들은 알고도 안뜯었는지, 모르고
그냥 간지는 모르지만 오늘 진주댁 총무만 나물 뜯기에 여념이 없다.
김포 오야지님은 자기 식구들이 이제 부항령을 통과했다는 말에
근심이 많은지 자꾸만 능선 전망대 바위에서 뒤로만 쳐다본다.
능선 안부에 올라서니 대덕산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서 김천쪽을 바라본다.
평소 같으면 저 멀리 금오산까지 보일 수 있는 곳이지만 오늘은 오리무중이다.
여기는 이제사 철쭉이 기지개를 켠다.
삼도봉에서 오는 다영아빠님과 노루님 땜에 오야지님의 근심은 깊어지고...
대덕산 이정표(08:05)
덕산재에서 출발한 지 1시간 40분만에 대덕산 정상에 도착한다.
이곳은 새벽과는 달리 바람이 불지않고 따가운 햇빛에 산행속도가
상당히 더디게 온 탓에 예상시간보다 30분이상 지체가 된 다음에야 도착한다.
대덕산( 大德山:1,290m)예로부터 산의 모양새가 좋으면 그 주변에 흉한 일이나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
(山形吉者 無凶災)라고 했으니 대덕산이야말로 산의 모양새가 잘 생겨서 주변에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다.
특히 대덕산 서쪽의 무풍은 대덕산을 배경으로 하고, 금강 상류를 앞에 품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여서 예로부터 충청도의 연풍, 경상도의 풍기와 더불어 살기 좋은
三豊 가운데 하나라고 하던 곳이어서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이 또한 대덕산과 무관하지 않으니 덕이 많은 산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대덕산은 부드러운 육산이지마는 규모가 커서 마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인심이 너그러운 종가 댁을 연상케 하는 산이다.
옛날에는 다락산(多樂山), 다악산(多惡山)으로 불리웠고, 정상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한다.
부드러운 육산이면서 우직한 남성다운 산으로 옛부터 수많은 인걸을 배출했고
이 산 아래에 있는 무주 무풍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도사인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는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로 하나로 꼽힌 곳으로 내년 8월에 백두대간 남진이 끝나고
십승지 산행에 한번 더 와야 하는곳이기도 하다.
또 영.호남지역의 분수령으로 금강의 지류인 무풍천과 낙동강 지류인 감천(甘川)이
각각 동.서 사면에서 발원하며, 서쪽은 덕유산, 남동쪽은 가야산국립공원이 있다.
산 정상에는 2등 삼각점(무풍 24. 1988재설)이 있고 넓은 헬기장이 있는데
각종 시설물들이 하나같이 밑둥치를 드러내놓고 있고 쓰러져 있어 보기가 좋질않다.
대덕산 너머 지나온 삼도봉 우측으로 석기봉, 민주지산,각호산으로 이어지는 각호지맥의산상파티
동료산꾼들과 가지고 온 음식으로 아침만찬으로 산상파티를 벌인다.
김포대님이 가지고 온 순대국에다가 범여 텃밭에서 처음으로 수확한
쌈에다가 참치를 싸먹으니 그야말로 天下一味이다.
느긋하게 만찬을 즐기고 후식으로 과일에다 헤이즐렛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낀 다음, 단체 인증샷을 하고 베낭을 챙기는 사이에 조급증
환자같은(?) 선두팀은 어느새 초점산으로 향하고 오늘도 범여는 꼴찌다 .
거기다가 늘 후미를 같이한 하늘마음님과 수선화님도 배신(?)을 때린다 ㅋㅋㅋ
헐레벌떡 베낭을 챙기고 총무님, 김포대님과 김포 오야지님 범여는 여유롭게
주위의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즐기면서 초점산으로 향한다.
대덕산 아래 헬기장에서 만난 할미꽃
조금후에 걸어야 할 능선의 모습
전북 무주군 무풍면(茂豊面)은 무릉도원십승지지(茂陵挑原十勝之地)중의 하나로 조선후기에
참위설(讒緯說)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신봉하던 술가(術家)들이 복지(卜地)로
선망하던 곳인데 임진왜란때는 난리를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어 온 곳이도 하다.
천재로 인해 변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으로의 열군데인 십승지는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영주의 춘양면, 보은, 상주의 속리산아래 우복동
남원 운봉의 두류산, 예천의 금당동, 공주의 유구와 마곡, 영월의 정동상류
무주의 무풍면, 부안의 변산과 성주의 만수동을 일컫는다.
북한의 삼수갑산과 남한의 무주구천동은 오지의 대명사라 세상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구천동에서 왔느냐고 할 정도로 속세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왔지만
정감록 등 비결서는 무주에서 가장 오지인 구천동을 제쳐두고 무풍면을 십승지로
꼽았는데 이는 무풍이 단순히 피란지로서 십승지가 아니라 예로부터 삼풍에서
인재를 구하라고 했듯이, 연풍, 현풍과 함께 삼풍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야할 초점산(삼도봉)의 모습
대덕산에서 고도를 170m가량을 낮춘 다음 안부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150m가량을 치고 오르는데 식사를 하고 난 다음이라 힘이든다.
안부(09:15)
안부에 내려오니 대덕산 농장의 경고문이 있고 고도를 높혀 삼도봉으로 향한다.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능선 옆에는 ‘바람난 여인, 질투’라는 꽃말을 가진
얼레지가 산꾼 범여를 유혹한다.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하는데 그냥 갈 수 있나.
모른척하고 유혹에 넘어간다... 요염하고 아름다운 자태, 너무도 이쁘다.
얼레지는 가재무릇이라고도 한다. 높은 지대의 비옥한 땅에서 자라지만 산골짜기에서 자라는 것도 있다.
비늘줄기는 바소꼴로 땅속 깊이 들어 있고 위에서 2개의 잎이 나와서 수평으로 퍼진다. 잎은 달걀 모양 또는
타원형으로 녹색 바탕에 자주색 무늬가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몸은 긴 타원형이다.
꽃줄기는 잎 사이에서 나와 끝에 1개의 꽃이 밑을 향하여 달린다. 꽃잎은 바소꼴이고 6개이며 뒤로 말리고
자주색이지만 밑부분에 W형의 무늬가 있다. 6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있다. 꽃밥은 진한 자색이고 선형이다.
씨방은 삼각모양의 달걀 모양이다. 열매는 7∼8월에 결실하며 삭과(蒴果)로 넓은 타원형 또는 구형이며 3개의
능선이 있다. 잎을 나물로 하고 비늘줄기를 약용한다.
얼레지란 이름은 잎과 꽃에 마치 피부병의 일종인 ‘어루러기’에 걸린 것처럼
알록달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꽃말은 '바람난 여인' ‘질투’이다. 한국·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꽃말과 곷의 생김새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꽃은 보기 드물다.
질투의 요정 얼레지
봄 야생화 중에서도 백합과 다년초인 얼레지는 가장 화려하고 요염한 꽃이다
단 2장의 얼룩얼룩한 무늬의 넓은 잎에 한 송이의 꽃을 피웁니다, 2장의 잎으로
1년 동안 영양분을 섭취하고 덩이 뿌리에 영양을 저장하는 식물인데
어린 잎을 산나물로 채취하면 얼레지에게는 치명적이라 한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봄부터 소쩍새는 그리 슬피 울었나 보다...라고 시인은
노래 했지만,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역경 정도는 이 얼레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얼레지 씨앗이 싹 터서 꽃을 피우기 까지는 적어도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하니까.
얼레지가 꽃 피는 산은 적어도 7년이상 파헤쳐지지 않은 건강한 숲으로 볼 수가 있고 그런 데서만 얼레지는 자란다
얼레지의 꽃은 하루에 세 번 변신을 한다고 한다.
햇볕이 들기 전에 고개를 푹 숙이고 꽃잎을 오므린 모습은 수줍은 시골처녀 같고,
이윽고 꽃잎이 활짝 펴지면 범접 할 수 없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지만 다소곳한 모습이다.
그러나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 꽃잎이 뒤로 말려서 젖혀지면 도도하고 콧대 높은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고려시대에 송도에서 뭇남자들의 애간장을 다 태운 황진이처럼...
얼레지의 유혹을 힘들게 뿌리치고 건너편 삼봉산의 응원을 받으며 삼도봉으로 오른다.
삼도봉(초점산) 이정표
초점산(草岾山:1,249m:09:30)
경북 김천시 대덕면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이 만나는
삼도봉으로 일명 초점산(草岾山)이라고도 하는 삼도봉 정상 일대엔 억새가
뒤덮여 있어서 그런 별칭을 얻은 듯하다. 정상엔 깨진 표지석이 있고,
시야가 열려 있어서 서쪽으로 소사동 일대가 잘 내려다보이며, 삼봉산이 가깝게 있다.
이 삼도봉에서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수도산과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수두지맥
능선이 갈라져나가며, 수도산과 가야산 줄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삼도봉 정상에서 내려서면 진달래와 철쭉 군락지를 지나 10여분 내려가면
바위가 있는 곳에서 등산로가 방향을 틀어 서쪽을 향하고, 무덤이 1기 있는 곳에서
시야가 확 트이면서 소사동 일대가 바로 내려다보이며, 삼봉산이 더욱 가깝게 다가선다.
초점산 정상에서 좌로부터 김포 오야지님, 김포대님, 깔끄막님, 범여
수리봉, 덕산2리 가는 길
삼도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수리봉을 거쳐 김천시 덕산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덕산리는 온배미 마을이라고 부른다. 호두가 유명해서 산천생태마을로 김천시에서 지정한 마을이다.
지난해 12월에 수도지맥 1구간을 가면서 들렸던 삼도봉
그때는 일망무제라... 이곳에서 가야산, 지리산, 금원산, 기백산이 다보였는데
오늘은 너무 심한 박무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게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잘 보이지 않는 법보종찰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이 한없이 그립기만 하다.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가야산은 신라시대부터 삼재불입(三災不入)의 영산으로. 우리 나라 12대 명산의 하나다.
해인사가 있어 더욱 유명한데,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다. 절의 웅장한 모습이 주변 솔숲을
비롯한 멋진 경관과 어우러져 찾는 이로 하여금 신비로운 경지에 빠지게 한다.
상왕봉을 주봉으로 하고, 두리봉, 단지봉, 남산, 의상봉 등 1천 m가 넘는 고봉들이 해인사를
한가운데에 감싸안고 있는 산세는 그 당당함과 수려함으로 명산 중의 명산으로 손꼽혀 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 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相大師,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利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 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의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의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 해인사 홈피에서 인용 -
초점산에서의 멋진 조망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소사고개로 향한다.
삼도봉에서 10분만에 수도지맥 분기점봉에 도착한다.
수도지맥 분기봉(09:45)
수도지맥의 개념과 지도
백두대간이 전북 무주군과 경북 김천군과 경남 거창군 등 삼도가 만나는
대덕산(大德山 1,290.9m) 남쪽의 삼도봉(일명 초점산.1,250m)에서
남쪽으로 3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간다.
수도지맥은 도상거리 105.8km로 행정구역은
경북 김천시, 성주군, 고령군과 경남 거창군, 합천군을 지난다.
경상남,북 도계를 따라 봉산(902m), 수도산(1,317m), 단지봉(1,326.7m), 좌일곡령(1,257.6m)을 지나
가야산을 목전에 두고 두리봉(1,133m)에서 도계를 벗어나 남쪽으로 거창군과 합천군경계를 따라
남산(1,113m), 마령(1,006.5m), 우두산(의상봉.1,046.2m), 비계산(1,130m), 88고속도로,
두무산(1,038.4m),오도산(1,120m)등 1,000m이상의 장쾌한 능선이 60여km 이어진다.
오도산에서 거창군과는 작별을하고 온전한 합천땅으로 들어서며 고도를 낮춰 토곡산(644m)를 지나면
다시 경상남,북도계를 만나 고령군과 합천군계를 따라 만대산(688m), 시리봉(408m)을 지나
솜등산(271m)에 올라선 도계능선과는 작별을 하고
마지막 여력으로 필봉(330m), 부수봉(317m),성산(205.7m)을 내려서며 맥을 다한다.
수도지맥 동북쪽으로 흐르는 감천(甘川)은 길이 69km, 유역면적 10만 ㎢로 수도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김천시의 지명을 낳게 하고 김천시일대를 지나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수도지맥 동쪽내지 동남쪽으로 흐르는 회천(會川)은 길이 78km, 유역면적 78000㎢로
수도산 동쪽기슭에서 발원하여 대가천(大伽川)을 이루어 성주호에 들었다가
다시 동으로 흘러 고령읍에서 소가천(小伽川), 안림천(安林川과 합류하고
고령군 덕곡면 율지나루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수도지맥 서쪽으로 흐르는 황강(黃江)은 길이 111km,유역면적 13만 ㎢로
남덕유산(1507m)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합천호(陜川湖)에 들었다가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일대에서 낙동강에 흘러들며 맥을 다한다.
수도지맥 갈림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소사고개로 향한다.
2012년 12월 셋째주에 걸었던 수도지맥 능선의 모습
묘지1기가 있는 능선에서 바라본 무주군 무풍면의 모습
무주 진안 장수를 일컫는 ‘무진장’ 고을의 맏형인 전북 무주에는 품이 넉넉한 산이 많다.
지리산과 견줄만한 높이와 품을 가진 덕유산이 대표적이고, 무풍의 대덕산(大德山ㆍ1천291m)이 그렇다.
예로부터 덕이 많은 산으로 알려진 대덕산은 거대한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덕산의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대덕산이 자리한 무풍은 ‘무성하고 넉넉하고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다
’는 뜻으로 난세에 몸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로 유명하다. 과거 신라의 땅이었으나 현재는 전북에 속한다.
하지만 언어와 풍습생활은 김천과 거창에 가깝다. 마을 앞으로는 금강 상류가 흐르고 뒤로 대덕산이
우뚝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다. 전란의 시대, 나제통문을 지나 무풍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어머니의 품처럼 후덕한 대덕산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지 않았을까. 대덕산은 예나 지금이나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대덕산은 용솟음치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흘러가는 산으로 덕유산권에 속한다.
육십령부터 시작된 백두대간 마루금은 덕유산 주능선을 지나 신풍령~삼봉산~소사고개~대덕산~덕산재~부항령으로 이어진다.
중간에 국도를 두 곳이나 통과하고, 전북ㆍ경남ㆍ경북이 경계를 이루며 지난다.
대덕산은 그 웅장한 품에 안기는 맛이 일품이다. 정상에서는 지리산과 덕유산을 비롯한 백두대간 조망이 탁월한데,
특히 가야산에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이다.
짙은 박무속에 가야산이 아련히 보인다.
능선을 조금 더 내려오니 뭣하려는지 임도를 포크레인으로 마구 파헤쳐 놓은길을
내려오다가 아주 조그만 더덕 2뿌리를 캐는 횡재를 한다... 소사고개 수퍼에서
소주사서 담갔다가 먹어야지
능선을 내려오니 대덕산 농장가는 길에 안내판이 있고...
조금전에 내려온 길을 뒤돌아 본다.
대덕산 농장에서 소사고개가는 길은 넓은 농로가 있다.
농장길을 가로질러 가다가 절개지 좌측으로 접어든다.
길가에는 농장에서 재배한 곰취가 많이 보인다.
절개지에서 좌측 사과밭이 있는 곳의 능선으로 올라서야 한다.
이곳에서 편하게 가려고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무주 지경내 마을이 나온다.
편백나무 숲이 우거진 힐링의 숲을 지나면...다시 도로를 만나는데...
도로에서 다시 좌측 보리밭을 끼고 능선으로 올라서다 농가로 떨어진다.
농로 좌측에는 가족 묘지가 나타나고...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묘지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아주 귀한 하얀민들레가 많다.
이 귀한 민들레를 아무도 캐는 사람이 없다. 얼른 베낭을 벗어놓고 하얀 민들레를 캔다.
하얀 민들레의 효능
위염을 다스리고 암세포를 죽이며 간은 보호하고 머리카락 은 검게하는 민들레,우리 나라 천지에 깔려
있는것이 민들레이지만 사람들은 민들레가 그리 중요한 약재 인줄을 모르고 지낸다.
민들레는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중국,일본,인도,유럽 아메리카의 인디언들 까지도 중요한 약으로 썼다.
옛 의서를 대강 찾아봐도 민들레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을 만큼 여러 질병에 효과가 뛰어난 약초이다.
민들레는 갖가지 질병에 두루 효과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방암, 유종의 고름을 없애는 힘이 매우 강하다.
또 산모의 젖을 나오게 하는데에도 효과가 크다. 민들레는 맛이 쓰다
민들레는 옛부터 동서양 어디에서나 먹을 거리나 민간약으로 널리 다양하게 써 왔다.
민들레는 세계 도처에 2~4백 종류가 있으나 국내에서 자라는 흰 민들레가 가장 약성이 뛰어난데,
우리나라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는 서양에서 건너온 서양민들레가 대부분이다.
서양민들레보다는 토종민들레, 흰 꽃이 피는 노래가사에도 나오는 "하얀 민들레"가 제일 약효가 좋다.
약성 및 활용법 민들레는 맛이 조금 쓰고 달며 약성은 차다. 독이 없으며 간, 위에 들어간다.
열을 내리고 소변이 잘 나오게 하고, 염증을 없애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독을 풀고 피를 맑게 하는 등의 작용이 있다.
또한 민들레는 맛이 짜다. 그런 까닭에 병충해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고 생명력이 몹시 강하여 도시의 시멘트
벽 틈에서도 잘 자란다. 맛이 짠 식물은 어느 것이나 뛰어난 약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들레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질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변불통에 좋고 호흡기질환 일체, 해열제, 건위제 여성의 유방에 종기 멍울이 생겨 염증이 된 것과 종기가 나서 쓰시고
아픈 것을 치료 산모의 젖을 잘 나오게 하는 데에도 효과가 크다. 종기를 치료하고 열로 인한 독을 풀어 주며 땀을
잘 나게 하고 변비를 치료 흰머리를 검게 하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고 갖가지 눈병에도 효과 각기, 수종, 천식,
기관지염, 임파선염, 늑막염, 위염, 간염, 담낭염, 식도가 좁아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 요로감염, 결핵, 소화불량에도
좋은 효험이 있다
민들레는 생명력이 대단히 강한 식물중 하나이다. 민들레는 겨울에 잎과 줄기는 죽지만
이듬해 다시 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마치 밟아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는
백성과 같다고 하여 민초(民草)로 비유되기도 한다. 지구상 어디든지 사람이 거하는 곳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민들레꽃이 지고나서 흰 솜털이 달린 씨는 여물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마치 비누방울처럼 둥글게
하얀 솜을 뒤집어 쓴 씨앗들이 시집을 보내달라고 바람을 기다린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 사랑의 씨앗을 퍼트려 종족을 번식시킨다.
주로 산비탈 풀밭, 길가, 강 기슭의 모래땅 및 밭이나 들판 등에서 자란다. 봄에 연한 잎을 나물로 먹는다.
우리 토종 민들레와 서양민들레의 구별 방법은 꽃받침이 뒤로 젖혀지지 않고 위로 향한 것이 순수 토종 민들레이다.
서양 민들레는 꽃받침이 뒤로 젖혀져서 아래로 향한 것이 확실히 구별된다.
또한 토종 민들레는 이른 봄에만 꽃이 피는 반면 서양 민들레는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는
겨울에도 꽃이 피며 일년 내내 꽃을 피우며 번식력 또한 대단히 강해서 시골 및 도심지를 가리지
않고 자라며 심지어 시멘트 틈속에서도 자라기도 한다.
하얀 민들레를 전리품으로 챙긴 다음 밀밭이 되어버린 대간길을 따라 소사고개로 향한다.
사과밭 언저리를 따라서 소사고개로 향한다.
소사고개(少沙峙:10:40)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 있는 고개로 1089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모래가 날리는 모래재에서 유래된 이름이며전북 무주군 무풍면을 있는 고개로
그아래 있는 소사마을은 집집마다 마루바닥에 가는(細) 모래가 깔리는데 일년내내
미풍이 불어 쌓여있는 모래가 모두 날아가 기쁜 마음으로 소사현(笑沙縣)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북 무주군과 경남 거창군을 잇는 고개라지만 경남 거창땅이며 고갯마루에서 10여분을 내려가야
도계마을 경계지점으로 전라도 지역에서는 이 고개를 도마재(都麻峙)라고 부른다.
고개너머에 있는 소사마을을 지나면 전북과 경남의 경계에 있다하여 명명된 지경(地境)마을이고
무풍면과 접경을 이루는 생초령을 넘어면 반딧불로 유명한 덕지리가 있다.덕동마을의 ‘德’자와
도계마을의 지경리의 ‘地’자를 따서 만든 덕지리는 매년6~8월에 반딧불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부흥, 북수, 도마의 세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반딧불이의 서식지가 보존되어
있어 이 지역의 천연기념물이 지정될 정도로공해나 각종 오염에 민감한 반딧불이가 남아있을 정도로 청정지역이다.
도로를 따라서 우측으로 50m 정도 내려가면 백두대간 산꾼에게꽤나 유명세를 타고있는 탑선수퍼로 향한다.
소사마을 버스 정류장
탑선수퍼에서 30분동안 산행대장이 사 준 션한 맥주에다가 과일 등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에 삼봉산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민박을 하는데 여름에는 하루 묵는데 20,000원이고 겨울에는
35,000원이란다. 겨울에는 좀 비싸다는 느낌이 든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후에 소사마을에서 소사고개로 향한다.
소사고개에서 우측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 가다가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측에 사과꽃이 滿開한 사과밭이 나오고 등로에는 나무계단을 만들어 놨다.
배추를 심으려는 밭 가장자리를 따라 삼봉산으로 향한다.
가야할 삼봉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희한하게 생긴 소나무를 지나니...
철조망 안부(11:25)
‘일몰후엔 출입을 금한다’는 철조망 옆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이곳부터 삼봉산을 향한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는데 날씨는 더운데다가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로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은 드는데 다리의 통증은 가중되고 정말 미칠지경이다.
그러나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이 길... 내가 선택했으면 부지런히 가는 수 밖에.
암릉(11:50)
중간에 한번을 쉬면서 물한모금 마시고 빡세게 치고 오르니 멋진 암릉이 나오고
로프를 설치한 암릉을 치고올라 또 한번의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깔끄막님이 시원하게 얼린 얼음물을 나눠 마신다.
흔히 대간 산꾼들에게는 물을 달라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긴 하지만 무겁게
이곳까지 지고온 물을 얻어 마시긴 해도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왜냐하면 산에선 물이 생명줄이기에...
오두재 갈림길(12:20)
다시 베낭을 메긴 했지만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든 구간을 치고 오른다.
그래 내가 선택한 이 고행의 길... 이것도 어쩜 수행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확히 언젠가 기억은 안나지만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라는드라마에서
얼핏들은 대사가 생각이 난다.
‘머리좋은 자가 노력하는 자를 못이기고,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 못이긴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즐기면서 가자꾸나.
힘들게 치고 오르니 오두재 갈림길이 나오고 앞서가던 산행대장님과
수선화님이 휴식을 취한다... 수선화님이 주는 오이와 내가 가지고 온 박카스를 마시고
나니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후에 삼봉산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덕유산의 능선이 시작되는 곳이란다.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되는데 좌측으로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아차하고 방심하면 졸지에 황천길 갈것 같은 기분이라 바짝 긴장을 한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이 한 눈에 보이고...
암릉 안부를 곡예하듯이 걸어간다.
능선 안부 바위틈에서 보라색의 꽃을 피우고 있는 처녀치마를 만나고...
삼봉산으로 가는 암릉지대는 정말 환상적이다.
연속적으로 만나는 멋진 암릉
왜 이곳이 소금강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암릉 안부에서 바라본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의 모습
정작 삼봉산보다 이곳 암릉구간이 훨씬 멋있는 느낌이다.
지석묘처럼 생긴 암릉도 만나고...
덕유 삼봉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금봉암을 품고있는 삼봉산 아래 능선도 시야에 들어오고...
암릉구간에서 살짝 내려서서 내려가는데 이곳이 지대가 높아서인지
이제사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지나온 암릉구간의 모습
삼봉산 이정표가 나오고... 이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우리 일행이 아닌 산꾼을 만난다.
덕유 삼봉산(德裕三峰山:1,254m:13:05)
경남 거창군 고제면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경계에 있는 창의 진산이다.
거창 고읍지 및 조선환여승람 거창군 산천조에도 ‘삼봉산은 거창 북쪽 오십리에 있으며
무주로부터 대덕산 서쪽 가지라 적혀 있다.
해발 1,254m의 거봉으로 봉우리가 셋이라서 삼봉(三峰)이란 이름을 얻었다.
덕유산 향적봉에서 바라 봤을 때 이 봉우리가 뚜렷한 ‘山’자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 가운데 어느 한 봉우리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산세를 지니고 있어
소금강이라 부르기도 하는 삼봉산은, 정상의 주봉을 중심으로 투구봉 노적봉 칠성봉 신선봉
석불바위 장군바위 칼바위 등으로 이름 붙은 자연산경과 금봉암(金鳳庵)이 어우러져,
소금강의 신비경을 연상케 한다. 거창과 무주를 경계 짓는 삼봉산은 이 같은 덕유연봉(德裕連峰)이
시작되는 첫 머리봉.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삼봉산을 ‘덕유원봉’이라 부르며 자긍심을 내보이기도 한다.
금봉암의 바위 샘물과 관련하여 천지인(天地人)을 우러른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인연이 깊다.
덕유 삼봉산 삼각점
삼봉산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서 휴식을 겸한 간식을 먹는다.
캔맥주와 과일과 떡을 나눠 먹은 다음에 다시 산행은 시작되고...
금봉암 갈림길(13:30)
금봉암 전경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 삼봉산(1,254m) 기슭에 있다. 금강은 본디 봉황새만이 깃드는 곳을 일컫는데
절이 황금빛 봉황의 이름을 갖고 자리 한다. 금봉암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절 터에 1905년 주상면
거기리에 살던 불심 깊은 해인사 신도였던 청송 심씨가 세운 절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청송 심씨가 풍수지리가 잡아준 지금의 절 자리에서 원을 세우고 지금은
알 수 없는 가마솥 뚜껑 덮인 장수 샘물을 마셔가며 백일동안 단식기도를 드렸다 한다.
기도가 끝나던 날 이상하게도 어느 곳에서 날아 왔는지 알 수 없는 황금빛 새가 날아와 기도처를
세 번이나 돌고 난 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그 뒤 절을 짓고 금봉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이 절에는 이름난 세 개의 바위, 세 개의 용머리, 세 개의 바위샘이 있다. 요사체 뒤에 용바위,
용굴에서 내려와 얼굴을 쑥 내민 세 개의 용머리가 있는데 맨 윗쪽 용머리가 옛날 거창 부사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금봉암을 나한도량으로 영험 있는 기도처로 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세 개의 샘이 자랑거리로 이름나 있다.
석불바위 뒤에 숨어 있는 샘을 피부병에 좋다 하며, 칼바위 위 바위굴 샘은 기도 샘이고,
용 바위 용굴 샘은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 한다.
금봉암 대웅전
호절곡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거창의 山河
날씨가 좋으면 지리산 주능선이 한 눈에 보일곳이지만 박무 땜에 아쉽기만 하다.
2번째 만난 금봉암 가는길 이정표
호절골재(浩絶谷:13:45)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와 전북 무주군 무풍면 삼거리 독가촌을 넘나드는 고개로
민초들의 인적이 드문 탓인지 뚜렸한 대간길과는 달리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삼봉산과 1090봉(수령봉)이의 움푹 들어간 허리목이다. 삼거리에서 금봉암으로 넘어가는 소로가 교차한다.
남동쪽으로 45°에 가까운 경사면이고, 북서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계곡인데, 채소밭이 펼쳐져 있고
여러 개의 지류가 모여 삼거리 독가촌 마을 앞을 지난다. 고개에는 공터가 조성되어 있다. ‘막힌(絶)
계곡(谷)의 안쪽이 매우 넓다(浩)’는 뜻인데, 오늘날 모두 채소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니
기막힌 예언이 아닐 수 없다(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에서 발췌)
호절곡재에서 다시 1090m봉(수령봉)을 쳐다보니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지는데
다행히 대간길은 수령봉을 향하지 않고 옆사면을 빠져 나간다.
예전에 없었던 나무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숲에 화사(花蛇) 한 넘이 숲으로 도망간다.
산에서 오랫만에 뱀을 만난다. 카메라를 갖다대니 얼마나 빠른지 촬영에 실패한다
수령봉 옆사면을 치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수정봉까지 편안한 안부길이 계속 되는데
다리에 통증도 더해오고 잠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졸지 않으려고 동행한 하늘마음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간다... 늘 열공하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옛날에 생긴 이정표가 있는데 빼재 2km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거리가 맞질않다.
참으로 편한 길을 따라 등로를 이어간다.
등로좌측으로 바라보니 삼봉산 아래 감싸여 있는 금봉암이 보이고...
로프가 있는 암릉을 올라간다.
안부길에 멋진 암릉이 있고... 암릉을 지나 안부길을 걸으니
대간길 양쪽으로 미역줄기 나무들이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다시 동남쪽으로 약간 꺽어지면서 고도를 조금씩 낮춘다.
된새미기재(14:15)
좌측으로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 내려가는 길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이름이기억하기 힘든 된새미기재란다.
이정표(←삼봉산 2.6KM ↑거창 봉산리 1.9KM↓신풍령 1.9KM라는 거창군에서 만든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고개이기는 하지만 허리목은 아니다. 북쪽의 전북 무주는 지대가 높고 남쪽의 경남 거창은 지대가 훨씬 낮은 것이 확연하게 관찰된다.
‘큰(된) 새목 고개’이다. ‘된새목이재>된새모기재>된새미기재’로 변화했다고 한다.
된새미기재 이정표
된새미기재에서부터 고도를 서서히 낮추어 가는데 너무 힘들어 지도도 보질않고
힘이들어 무작정 내려오는 바람에 아무런 표식도 없는 수정봉을 놓치는 愚를 범한다
하행길 0.1km라는 이정표를 만나서 좌측으로 90도 꺽어지는데
0.1km라 왜 그리도 긴지... 아픈 다리땜에 1km도 더 되는 느낌이다.
원래는 직진을 해야하는데 빼재 도로를 내면서 대간길이 짤려 버렸다.
이젠 저 아래에 빼재 터널이 생기면 가장 먼저 대간길을 복원해야 할 곳 같다
거창 고제면에서 무주쪽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발이 920m나 되는 이 빼재도 얼마후면 저아래에 터널이 완공되면
백두대간 산꾼 이외는 찾지않는 잊혀진 도로가 되겠지...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서는데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한 구간을 마무리했다는 뿌듯함에 피로는 가시는듯하다.
폐업한 주유소 마당에는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보이고
마지막에 같이 동행한 하늘마음님,깔끄막님과 우측에 있는 빼재 정상으로 간다.
빼재(920m)
경남 거창군 고제면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을 잇는 37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거창쪽으로 이어지는 고개 아래의 도로는 구절양장이다.
빼재의 이름은 수령(秀嶺) 또는 신풍령(新風嶺)이라고도 부르면 거창군에서
등로에 세운 이정목에는 뼈재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참으로 혼란스럽다.
빼재는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이었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많은 민관군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고 임진왜란 시 이곳의 토착민들은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다.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에
널리게 됐다고 해서 “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며
뼈재가 경상도 방언으로 빼재가 되었다고 한다.
험준한 산길을 넘나들던 시절 고개를 넘던 사람들의 재물과 목숨을 빼앗아
죽은 사람의 뼈가 산을 이루어 뼈재요, 이 고개를 넘나들던 주민, 사냥꾼 혹은 산적들이
동물 및 가축들을 잡거나 약탈하곤 하면서 뼈를 버려 둔 곳이라 하여 뼈재
‘빼재’는 ‘추풍령’을 본뜬 ‘신풍령’이라는 휴게소가 고개 아래쪽에 들어서면서 ‘신풍령’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나, 일제강점기에 고개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는
바람에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수령(秀嶺)」즉 빼어난 고개라는 뜻의 표지석이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옛 이름인 ‘빼재’로 불려지기를 원하고 있고 앞으로 이 재 아래로 관통하여 뚫리는
터널 이름 또한 ‘빼재터널’로 불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빼재 정상의 팔각정 옆에는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국가기준 수준점이 있다.
수준점(BM; Bench March)이란 수준원점으로부터 표고를 정밀측정하여 영구적인말뚝을 설치하고,
차후 부근의 수준측량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 표고를 국토지리정보원의 수준측량 성과표에 등록해
놓은 기준점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수준점은 인천만의 평균해수면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 수준원점을 측설하고 그 표고를 정밀하게결정해 놓았는데,
이 수준원점의 표고값은 26.6871m이다. 아울러 주로 국도 주변에 수준점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1등 수준점은 약 4㎞, 2등 수준점은 약 2㎞간격 설치되어 있다.
한 고개를 두고 뼈재, 빼재, 수령, 신풍령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렇게 이름이 여러개인 고개는 드물다. 이래저래 불리나 고개는 하나인데 말이다
빼재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페허가 되다시피한 신풍령 휴게소로 향한다
빼재 정상의 모습신풍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먼저 온 동료 산꾼들과 이벤트 산행을 한 광풍 회장님
일행이 두릅나물에다 소맥(소주+맥주) 파티를 벌이고 있어 연거푸 3잔을 마신
다음에 휴게소 샤워장을 이용하려는데 고약한 휴게소 쥔장이 수도물을 잠가
버린 바람에 씻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도로옆 계곡물에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애마를 몰고온 위 사장님이 끓인 닭백숙에다 정신없이 먹고나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조금 늦게 도착한 노루님과 다영아빠님이 도착하여
서울로 향하는데 차에서 잠깐동안 깊은 잠에 빠진사이 인삼랜드 휴게소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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