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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2차 남진(終)

백두대간 남진 제26구간 - 추풍령에서 우두령까지

by 범여(梵如) 2013. 4. 15.

산행일자:  2013년 4 월14일 (무박산행)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가끔 비가 오락가락, 아주 강한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23.9 km / 10시간 20분 소요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30여명과 함께

☞산행코스: 추풍령-경부고속도로-눌의산-663봉-장군봉-가성산-오리실사거리-418봉-괘방령

                여시골산-여시골-운수봉-운수암 사거리-백운봉-황악산-형제봉-신선봉 갈림길-바람재

               여정봉-삼성산-질매재 삼거리-우두령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봉산면, 대항면, 구성면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매곡면, 상촌면

 

너무 정신이 없어 한 주가 어케 지난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다보니  대간길 준비가
소홀한 상태에서 저녁을 먹고 휴식도 없는 상태에서 양재역에 밤11시에 버스를
기다리는데 20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질않고 평소에 이곳에서 항상 동승하던
김포팀들도 보이지 않아 오늘은 하루쯤  집에서 휴식을 푹 취하고 싶은 생각이다.
산행대장과 총무 전화번호도 모르고 해서 예전에 호남정맥에서 총무님 하시던
렌 총무님에게 전화를 했더니만 버스가 오질 않아서 기다리는 중이란다.
에공~~~ 쉬긴 틀렸고... 30분정도 기다려 버스에 올랐는데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인데 버스안 분위기는 잠을 잘 분위기가 아니다.

 

대장님의 안내 멘트가 끝나고 불을 끄야 하는데 불과 TV도 안끄고  거기다가 이야기하는 사람,
전화하는 사람... 너무 피곤한데 잠을 못자니정말 휴게소에서 내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난다.
그래 참자.독립군이 아닌 연합군 산행이니...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나홀로 산행이
편한줄은 예전엔 진정 몰랐었네.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2번째 휴게소인 경부고속도로
죽암 휴게소에서 내려 떡라면 하나 시켜서먹고 차에 오르려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에공 팔자에 없는 雨中山行을 하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산꾼이 언제 비온다고 산에 안가고
눈 온다고 산행을 안 한적이 있었더냐...야심한 새벽 2시 45분에 추풍령 I.C를 빠져나와 들머리인
추풍령 삼거리에도착을 하여 산행을 준비하고 03시에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추풍령 삼거리(03:00)

이곳은 본래 죽령, 조령과 함께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일반적으로 추풍령은 영남과 한양을 잇는 고갯길 중에 가장 작은 고개로 인식되고 있다.

러나 조선후기에 인구 변동에 따른 큰 변화가 시작된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경상도 각 읍의 인구수를

성주-경주-김해-안동-진주-밀양-선산-예천-창원이라 기록 했으나

 18세기 후반의 자료인 '호구총수'의 기록에 따르면

경주-상주-진주-대구-성주-밀양-안동-선산-고성-의령의 순으로 인구서열이 변한다.

전반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읍의 인구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교통체제가 초기에는 죽령-계립령 선에서 서남진하여 추풍령으로 이동한다.

이는 조령의 높이가 약 400m인데 반해 우회로긴 하지만 추풍령은

200m여서 수레교통이 가능하고 충청도의 삼남대로와 연결된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서내륙의 교통이 쇠하고 대구와 김천이 상업도시로써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대한제국 말엽에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고 이후 4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명실상부한 나라의 고갯길이 되었다.

 

고개를 구분하여 말할 때 주로 '영'(嶺), '현'(峴), '치'(峙)로 구분한다.

엄밀하게 나누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영'은 큰 고개를 부를 때 사용하고,

'현'은 '영'보다 작고, '치'는 '현'보다 더 작은 고개를 의미할 때 사용한다.

헌데 추풍령에는 '영'(嶺)자가 붙어 있으니 꽤 큰 고개이다.

그렇게 고개는 크면서 고도는 낮은 탓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금강과 낙동강을 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 상에 있는 추풍령에는 사람 사는

분주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정감어린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야심한 새벽이라 그런지 칠흑같은 어둠속에 하늘의 별빛만 초롱초롱하다.

이곳은 다행이 비는 오지않아 걱정은 들고, 여기서 대간팀과 이벤트님으로

나눠지는데 산조아 감사님께서 이벤트 팀으로 직지사에서 새벽예불을 참석

하려고 가시는데 나도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으면 이벤트 팀으로 붙을낀데

후회스럽다. 예불을 마치고 동대 선배이신 직지사 주지로 주석하고 계시는

성웅 큰스님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가람이나 산책하고 황악산이나 오를껄...

오늘 산행의 들머리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은편리는 충북 최남단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400m

거리에 경북과의 도계가 낮은 능선으로 영남지방과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며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 추풍령우회도로가 마을 앞을 가로 질러 있다.

1945년 해방이전까지 면내에서 가장 빈한한 빈동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는데

70년대 새마을 사업과 동시에 오두막 초가집도 허물고 마을안 길을 넓힘과

동시에 돌담도 없애고 농가소득도 대폭향상되어 면내 굴지의 부촌이 되었으며

마을 뒤쪽에는 느름산이 높이 솟아 거센한풍을 막아주고 겨울에 흰눈이 마치

은가루를 덮은듯하다하여 음변리를 은편으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벤트팀과 헤어져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은편리 방향으로 접어들어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대평지하차도로 들어선다.

경부선 지하차도를 빠져나와 좌측 소래실 마을 표시쪽으로 빠져 나오니...

철도를 관리하는  대전전기사업소 추풍령구분소를 좌측에 두고

콘크리트 포장농로를 따라 대간길을 이어가는데 좌.우에는

포도밭이 즐비하다. 간간히 만나는 농가에는 깊은잠에 빠져있다.

행여 산꾼들 때문에 村老들이 잠에서 깰까봐 조심스럽기만 하다.

경부고속도로 지하차도(03:20)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데 이곳도 포도밭이

즐비하고 충북 영동이 곶감과 함께 유명한 포도가 많이나는 고장임을 실감케 한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좌측으로는 어둠속서도 흐드르지게 피어있는 매화꽃이 산꾼을 유혹한다.

그리고 잘 관리된 묘지의 망자들이 4년만에 대간길을 다시걷는 범여를 반기는듯 하다.

어둠속에서 만난  쇠뜨기(뱀밥)

눌의산 등산 안내도(03:30)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추풍령에서 눌의산까지는 도상거리는

3km밖에 되질 않지만 고도를 520이나 높혀야 하기에 결코 만만하게 볼 곳은 아니다.

간간히 불어오는 春風에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야간산행은 쿨하다.

대간 등로에는 김천시 봉산면에서 설치한 표식 때문에 눈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편한 길이지만 계속해서 고도를 높인다.

 

봉산면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지금의 봉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김산현에 속한 고장으로서 직지사에 봉납하는 산물을 생산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김산군 파며면 또는 파미면(巴彌面)으로 상리. 중리. 상지리. 하지 리. 입석. 천포. 신립 등 7개 마을을 관할하였다. 1914년에 충북 황간군 남면의 신계. 도산. 남전. 복산. 상마전. 하마전. 태평. 봉산. 사점. 하리. 하중리. 상리. 상중리. 금화. 신기. 신촌. 고도암. 가성을 편입하여 봉산면이라 하고 17동을 관장했다.

1973년에는 복전동을 대항면에 편출하였다. 군수 정유번(鄭維藩)의 차자 형승(亨升)이 살 던 곳은 고월천리(古月川里), 노비 전순기(全舜起)의 효자 정려문(旌閭門)이 있는 곳이 효자동(孝子洞)이라 했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시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으로 김천 시내와 어모면, 서로 충북 영동군 매곡면, 남으로 대향면, 북으로 영동군 추풍령면과 인접하고 있다. 경부선 철도, 고속도로, 국도가 면의 중앙으로 지나가고 김천 시내에서부터 7km지점에 위치하여 벼와 포도 재배의 적지로서 403ha의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충북 접경 지점에 추풍령 휴게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육로 교통이 집중되어 있어 군사적 요충지이다. 산지가 전체 면적의 63%이며, 산세는 비교적 험준하여 700m 이상의 준령이 3개소나 되며 낙동강 지류인 직지천이 감천으로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평야를 이루고 있다.

본격적인 급경사가 나타나고 동료 산꾼들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김천시에서 설치한 로프가 있고 아기자기한 암릉구간이 나온다.

눌의산 헬기장(04:10)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급경사를 치고 오른 탓에 이마에 땀이 흐른다.

헬기장에 올라서니 산 아래에는 미풍(微風)에 불과하던 바람이 강풍으로 바뀐다.

이곳에서 뒤쳐진 후미팀을 기다리면서 길빛 아우님이 건네준 더덕주 한잔을 마신다.

야심한 밤에 야생마처럼 내달리던 젊은 우진권 대장님이  오늘은 이상하리 만큼

후미그룹을 배려한다. 오늘은 실세(?)들은 몸사리느라 이벤트 팀으로 빠져 버리고

대간팀을 20여명 채 안되는 단촐한 산행이라 그런가...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어차피 산행은 즐기면서 타야하는데 모 산악회 따라 다닐때 거리와 시간에 목메는

정말 멋대가리 산행은 딱 질색이었는데... 산은 늘 거기에 있는데 왜 그리 목을메고

집착을 하는지?  참으로 어리석은 衆生들 ㅉ ㅉ ㅉ  

눌의산(訥誼山743.3m:04:20)

경북 김천시 봉산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산이지만 그리 알려진 산이 아니라  추풍령 뒤쪽에

자리잡은 산으로 등산인들의 발길이 뜸하여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 산의 이름인 `눌의(訥誼)'는 한자어로 정의가 눌하다 혹은 더디다는 뜻이니 추풍령

영마루를 사이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양쪽 인정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을 뜻한다.

말씨는 친절해도 더듬거린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단어이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조망이 뛰어나다.

또한 옛날에는 요긴한 거점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라에 긴급을 다투거나 외적이 침범했을 때 활활 타는 봉화를 피워올려

 제몫의 역할을 다했을 눌의산의 늠름함이 살아 있다.

 

봉산면 관내에서는 최고봉으로 일본인들이 민족정기 말살을
위하여 박아놓은 쇠말뚝이 발견되어 제거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황간)에 "눌이항산봉수(訥伊項山烽燧)는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 고성산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소이산에 호응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황간)에도 "눌이항봉대는 현 동쪽 25리에 있다."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황간), 『대동여지도』(황간), 『1872년지방지도』(황간) 등의 옛 지도에도

 '눌이항봉대', '눌이항' 혹은 '눌이항산봉대'로 표기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문헌인

『조선지지자료』(황간)에도 '항(項)'이 빠진 '눌이산(訥伊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伊)'가 '의(誼)'로 표기가 바뀌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는

눌의산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이름으로 눌이항산 · 누리산 · 느릅산 · 선개산이 기록되어 있다.

눌의산 2등 삼각점(영동22 1981 재설)

이 시간대이면 감사님께서 직지사 대웅전에서 여법하게 새벽예불을 보시겠지...

갑자기 조례종송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원차종성변법계 願此鍾聲弁法界 - 원컨대 이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철위유암실개명 鐵圍幽暗悉皆明 - 철위산 짙은어둠 모두다 밝아지고

 

삼도이고파도산 三途離苦破刀山 - 삼도는 고통없고 도산은 부서져서

 

일체중생성정각 一切衆生成正覺 - 뭇중생 남김없이 정각을 이루고저.

(중략)

나무 아따 시지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옴 아자나 바바시 지리지리 훔

눌의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부고속도 추풍령 휴게소의 야경

후미팀들과 합류를 한 다음에 어둠속에 고도편차가 그리 크지않은 편한길을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하는데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에다 낙엽이 수북한 길을

걸으니 낙엽속에 먼지 때문에 목이 너무나 아프고 정신이 없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663봉을 그냥 패스하고 다시 편한 길을 걷는데 갑자기

어둠속에 하늘이 더 시커머지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내리막으로 뚝 떨어진 다음에 다시 고도를 조금씩 높이니 밋밋한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에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설치한 표지판에 장군봉이라는 팻말이 나온다.

장군봉(長君峰:625m:05:05)

장군봉은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長君'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신갈나무 무성한 부드러운 육산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이곳의 높이가 각각이라 참으로 헷갈린다. 지도상에는 606m이고

또다른 지도에는 625m 그리고 낙동산악회에서 설치한 표지판에는 627m

이니  정확한 표기의 통일이 있으면 좋겠다.

장군봉에서 다시 뚝 떨어졌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는데 이곳은 오랜 가뭄탓인지

육산의 오름길에 먼지가 풀풀나는데 목이 칼칼하다. 어둠속에 멋있는 암릉구간을

만나고 주위에는 사물이 식별할 정도로 여명이 밝아온다.

잠시후에 가성산에 오르는데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이곳 정상에는 시멘트로

포장된 헬기장이 나타나고 선두에 치고 오르는 김포팀들이 휴식을 취하는데

오늘 처음 오신분이 컨디션 난조로 인하여 많이 쳐진 모양이다.

우 대장이 베낭을 벗어놓고 낙오된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장군봉으로 향하면서

나보고 선두를 보란다... 난 선두 체질이 아니여... 글고 여긴 알바할 때가 전혀없어요

가성산에서 꽤나 오랜 휴식을 취한후에 너무 추워서 서둘러 길을 떠난다.

가성산(枷城山:716m:05:40)

경북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와 충북 영동군 매곡면 공수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독립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동북쪽 경사면에 김천시립공원묘원이 있는데 규모가 꽤 크다.

동쪽 발아래로 고속도로와 철도가 경쾌하게 뻗어 있다.

동쪽의 가성마을과 외가성마을에서 유래하는 봉우리로서 '가성(枷城)'은

화령권의 '작점'이나 '사기점'처럼 소규모의 진지가 있었던 곳이다.

오늘 새벽에 내가 지나온 봉우리들

대한민국 민족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도 새벽잠에서 깨다.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信仰)과도 같은 존재였다. 19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Autoban)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해가며 서둘렀다. 이 때문에 428㎞의 도로는 2년5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밀어붙이기식 공사로 77명이나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1970년 7월 7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됐다.박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1970.7.7. 경부고속도로 완공 테이프를 자르는 박대통령 내외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박대통령의 집념은 조국근대화와 맞물려 직접 챙기고 공사를 독려하였다.

여명이 밝아오는 김천시의 모습

백두대간의 동남부에 위치한 김천은 당초 산간 취락에 불과했으나

조선 초 역마제도가 생긴 후 교역의 요충지로 탈바꿈 되었다.
삼한시대에는 감문국, 주조마국, 문무국, 배산국, 어모국이 감천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신라 조분왕 때 장군 석우로가 감문국을 정벌하고 감문군을 설치했으며, 조선조에 김산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의 김천은 지난 1995년 과거의 금릉군과 통합된 후 시로 운영되고 있다.

금릉이라는 지명은 중국 동진의 수도로서 경관이 빼어났다고 알려진 금릉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지며,

김천(金泉)은 옛날에 이 고장에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김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샘에서 나는 금은

 나라에서 모두 가져가버려 부역이 두려운 이곳 사람들이 샘을 메워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김천을 일컬어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고 한다.

삼산(三山)은 황악산 ·금오산·대덕산이며, 이수(二水)는 감천과 직지천가리킨다.

김천에 수도산은 별로 중요한 산으로 치지 않았던 것 같다.

김천은 삼국 시대부터 교통의 중심, 물류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문화가

교류되어 시장과 내륙장이 발달하면서 술과 음식도 발달하게 되었다.

 Gimcheon-map.png

김천시 행정지도(위키백과사전 인용)

 김천을 대표하는 술은 과하주가 유명하며 물이 좋아 맛도 좋다고 명성이 높다.

 과하주란 무더운 여름을 탈없이 날 수 있는 술이라는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조선 중기부터 양반가에서 많이 마시게 된 술인데 경북 김천과 전북 전주의 과하주가 유명하다.

소주는 독하고 약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서 변질되기 쉬우므로 만들어진 술이지만 

김천의 과하주는 전주의 과하주와는 달리 소주를 넣지 않고 금천 샘물만을 넣어서 만든다고 한다.

가성산 아래 내리막길에는 진달래가 필 생각도 않는다.

짙은 구름사이로 아침해는 어느덧 중천으로 떠올랐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만난 무명 묘지

오리골 사거리(06:25)

새색씨처럼 수줍게 봄소식을 알리는 괘불주머니

418봉(07:00)

418봉을 지나니 우리와 반대편 방향으로 강릉의 산악회 소속 백두대간 북진팀을 만난다.

이 분들은 우두령에서 새벽에 출발했다고 하는데 몇시에 출발을 했는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온 모양이다. 산꾼이 산꾼을 만나니 반갑기만 하다.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

오늘은 우리 대장이 정말 맘에 쏙든다. 이쁘 죽겠다 ㅋㅋㅋ

추풍령에서 출발할 때 우두령에 버스가 대기하기로 하여 아침 식사를

버스에 두고 가볍게  베낭을 메고 이곳까지 왔으니...

마치 5산 종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니... 이렇게 서포트 해주면 부항령까지 가겠다.

괘방령(掛榜嶺:357m:07:15)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을 잇는 906번 지방도로 위에 있는 고갯길로

이곳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괘방령이라 불리고 있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을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거는 '괘방(掛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고개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추측도 후대의 의미 부여이기가 쉽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 표기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掛榜이든 卦方이든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궤방'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오기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비록 이곳이 해발 300m의 낮은 고개이지만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의 정기가 잠시 숨을 고르다 황학산으로 다시 힘차게 뻗어 오르는 곳이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여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괘방령 김천시 방향

추풍령과 괘방령은 옛날 과거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 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추풍령에 비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괘방령 - 충북 영동군쪽의 모습

이곳 괘방령에서 버스에 있는 아침 식사할 준비물을 꺼내서

식사를 준비한다. 오랫만에 오리훈제에다 소주에 막걸리까지

동료 산꾼들과 느긋하게 35분간의 만찬을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난다.

괘방령 산장앞에 있는 매곡면 마을이름표가 있는 돌탑

괘방령의 유래 안내판

괘방령 산장의 모습

여시골산 오름길에서 본 지나온 가성산의 모습

이곳은 날씨가 꽤 추운곳인데 우측에 찢어진 비닐하우스 안쪽에는 관리가

안 된 복분자가 가득하다. 복분자를 비닐하우스로 하는것도 처음봤고

4년전 북진길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땐 백두대간이 뭔지도 모르고 다녔으니...

복분자하면 전북 고창과 부안이 많이 생산되는 곳인데, 이곳 영동에도 있다는 걸 이젠 알았네

이곳에서도 백두대간 북진팀을 만난다. 역쉬 대간이다.

정맥이나 기맥, 지맥을 하면 하루종일 걸어도 사람구경하기 힘든데

평평한 안부가 끝나고 본격적인 오르막길에 접어들고 급격하게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조금전에 아침식사 탓인지 힘이든다.

선두들은 치고 오르는데 늘 그렇듯이 식사가 끝나면 마지막이 된

범여는 자기 페이스대로 걷는다.

장거리 산행은 마라톤과 같아서 남을 따라가기 위해 오버페이스를

하게되면 마지막에 급격하게 체력을 소진하여 엄청 고생을 하게 되기에...

더군더나 차에서 전혀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 컨디션을 조절할 수 밖에 없다.

급경사의 오름길에는 예전에 없었던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너덜겅이 보인다. 나무 계단은 토사유출을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인지는 몰라도 산꾼들의 도가니에는 쥐약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냥 비를 맞고간다.

한번 꺽어진 다음에 안부 능선을 걷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대간 능선에서 또다른 무명의 천년주택을 만난 다음에 치고 오르니 여시골산이 나타난다.

여시골산(620m:08:35)

경북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와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예부터 여우가 많이 살아서 여시골이라 불린 골짜기 배후에 있는 산이어서 붙인 이름으로 여겨진다.

여시는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향천리 묘내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1.5㎞,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윗어둔이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1.7㎞ 떨어진 곳에 있는 백두대간 줄기로  김천시와 영동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능선은 여시골산 일대를 중심으로 추풍령과 괘방령이 있는 북쪽 지역에서는

700~800m 이하의 비교적 낮은 능선을 이루고, 여시골산 남쪽으로 황악산(黃岳山)·형제봉(兄弟峰)

삼도봉(三道峰)을 지나는 지역에서는 1,000m 이상의 고봉과 800~1,000m 높이의 능선을 이룬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오른쪽 가지줄기의 385.4m를 여시골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시골산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어촌천(漁村川)을 만나 초강(草江)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 수계를 이루고, 동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백운천(白雲川)을 만나

직지천(直指川)에 합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강 수계를 이룬다.

경부고속철도가 여시골산 북쪽에서 지하 터널 형식으로 산지 아래를 통과하여 영동군에서 김천시로 이어진다.

인증샷 하나를 남기고...

여시골(08:50)

부지런한 진달래(?)

게으런 진달래(?)

똑같은 지역에 있는 진달래인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

지나온 여시골산의 모습

서서히 오늘의 최고봉인 황악산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운수봉(雲水峰:680m:09:05)

김천시 대항면과 영동군 매곡면 경계 능선에 있는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다.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이 대항면 운수리이므로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어 보이며 황악산 자락에 딸려 있는

조그만 봉우리인데 각종 이름에 차용된 것이 의아스럽다.

산 이름에 '물 수(水)'자를 쓰는 특이한 곳이다. 정상은 암장이다.

운수봉(雲水峰)은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휴식도 많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치 일반 산악회 온 느낌이다.

선두에 선 김포팀들이 빠른 주력(走力)을  자제하고 후미팀들을 많이 배려를 하는게

너무 고맙고 거기다가 우 대장이 평소의 적토마같은 주력은 완전히 접고 유순한 양처럼

천천히 전 대원들을 배려하면서 마음에 쏙 드는데 이런 분위기면 왔다리 갔다리에서

기왕 발 담근것 대간길 끝까지 종주해 버려 ㅋㅋㅋ

운수봉 이정목

운수봉에서 바라본 운수암의 모습

운수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직할에 있는 다섯 암자중에 하나로

황악산 중앙에는 명적암(明寂庵)과 중암(中庵)이 있고 우측엔 백련암(白蓮庵)과

운수암(雲水庵) 그리고 좌측엔 은선암(隱僊庵)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운수암은 와보지 못했지만 10여전엔 중암은 매달 음력 24일(관음재일)에는

중암에서 열리는 관음재일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환희를 맛보곤 했는데...

그땐 중암에 주석하고 계셨던 관응(觀應) 큰스님을 친견하곤 했는데 요즘

범여는 산에 미쳐 불교에 등한시 하는건 아닌지... 산행도 수행이라면 수행이겠지.

붓다께서도 처처불상(處處佛象)  사사불공(事事佛供) 이라 했거늘

능선에서 산불예방 감시탑도 만나고...

운수암 사거리(09:20)

걱정마슈 오늘은 무지하게 잘쉬고 있어요

직지사 갈림길(10:00)

다시 나무 계단을 오른다. 근데 이곳에서 중대한 실수를 한다.

지도를 보지않고 김천시에서 만든 우회로를 따라가다 백운봉을

놓치는 愚를 범하고 말았다.  직진으로 올라서야 하는데...너무 방심한 탓이다

백운봉(白雲峰:770m:10:07)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황악산의 동봉(東峰)이자 직지사 백련암의 배후에 자리한다.

황악산의 일봉이지 독립 봉우리는 아니다.

경승지인 능여계곡이 가장 잘 관찰되는 위치에 있다.

이곳에서의 '백운'은 일반명사에 가까운 고유명사로 특별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직지사 가는 길(10:12)

직지사는 각종 이야기와 전설을 품고 있다. 창건자 아도화상, 사명대사, 왕건 등등...

이 가운데 관심을 끄는 대목은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신라 경애왕 4년, 고려 태조 10년에 후백제왕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하고 경애왕을 살해하자

왕건이 이를 구하러 갔다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한다.

그리고는 황악산 아래 숨어든다. 왜 왕건이 황악산 아래 숨어들었을까?

 

직지사는 희미하게 보이고... 직지사(直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본사이며

 신라 418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선산 도리사(挑利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사찰이라고 한다

 국보와 보물이 수도없이 많으며 사명대사가 득도(得道)한 절로도 유명하며 현재 주지로

계시는 성웅 큰스님은 범여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선배님이시다

직지사 일주문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본사인 직지사는 직지사는 예로부터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직지사 대웅전(보물 제 1576호)

직지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대웅대광명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려

선조 35년(1602)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이후 인조 27년(1649)에 중영(重營)이 있었고

영조 11년(1735)에 다시 중창하였다. 건물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 형식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직지사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짜임새가 있으며, 높은 천장에 화려하면서

절제된 장식은 종교적인 장엄함을 더한다.

삼존불을 모신 수미단은 효종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용, 물고기, 개구리

연꽃 등 여러 무늬들을 소박하게 조각하였다.

폭 9m에 이르는 후불벽 뒤에는 활달한 필치로 그린 관음도가 있으며

다름 벽면도 화려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김천은 예로부터 물좋고 산이좋아 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였으며  嶺南의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김천은 아름다운 비경과 청아함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시인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다.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의 손자인데 홍경래(洪景來)난에 조부가 항복하여 가문이 몰락하였다. 

자신이 과거시험에서 할아버지를 모르고 욕한 것을 후회하며, 

벼슬을 단념하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그래서 세상에서 김삿갓이라 부름) 방랑생활을 하면서

풍자와 해학으로 퇴폐하는 사회를 개탄, 저주, 조소하는 기발한 시를 많이 지었다.


아래 시는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직지사의 스님과 글짓기 내기를 하여 진 사람의 이빨을 뽑기로 하고 지었다는데,

결국 김삿갓이 이겨서 직지사 스님의 이빨을 뽑았다고 한다.

 

    拔齒直指僧

金烏橒積烏頭白  금오(검은 까마귀)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黃岳花開鶴頭紅  황악(누른 바위 산)이라 하는데, 꽃이 피어 학 머리가 붉구나
秋風嶺上春花怪  추풍(가을 단풍)이라는데, 고개 위의 봄 꽃은 괴이하고나
直指由中路曲何  직지(곧게 가르침)라 했는데, 산 중 굽은 길은 어찐 것인가?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나타난다.

서서히 황악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황악산 오름길 곳곳에는 벤치 설치작업이 한창이다

황악산(黃岳山)은 백두대간  줄기가 추풍령에 이르러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솟구치기 시작한 곳에 자리잡은 능선이 길고 우람한 산으로 김천시 대항면과

영동군 매곡면·상촌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도 불렸다.

김천 시내에서 서쪽으로 12㎞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주봉인 비로봉(1111m)을 중심으로운수봉(740m)·

백운봉(770m)과 형제봉(1035m)·신선봉(944m) 등이 양쪽으로 말발굽처럼 이어져 있다. 능선이 완만하고

산괴(山塊)가 커서 웅장한 느낌을 준다.산세는 완만해 암봉이나 절벽이 없고 수목으로 울창하며 해발 1100m가

넘는 산 답게 동쪽으로능여계곡 등 깊은 골짜기를 파놓아 계곡마다 비경을 감추고 있는 곳이다.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봉우리들이 ㄷ자 형태로 연이어 있고 ㄷ자의 열린 곳인 동쪽 산자락에 고찰 직지사가 있다.

정상에서 보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봉우리들이 동쪽으로 뻗어가면서 협곡을 이룬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이다.황악산 아래 전망대 바위에서 본 직지사

우리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산을 신성시하고 숭배했다.산 자체가 종교나 다름없었다.

불교가 도입되면서 산에 대한 신앙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다. 즉 불교사상과 산악숭배 관념이 융합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군들이 많은 사찰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많은 사찰들이 명산에 포진하고 있으며, 명산이 가장 많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곧 대간이니,

왜군들의 사찰 파괴에는 대간 파괴를 통한 민족 정기 말살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08년 8월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대웅전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지금 사실 여부를 확인 중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일제가 잔재가 참으로 깊고 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직지사의 直指는 이완용 등 친일세력을 노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직지사의 일주문이 1000년 묵은 싸리나무와 칡나무로 만들어졌다 한다.

싸리나무와 칡나무는 빗자루나 광주리를 만들 때 주로 이용된다. 싸리나무가 비짜루 등의 본체라면

칡나무는 이들을 엮어 ․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양자가 보완관계에 있다는 의미이다.

일주문, 싸리나무, 칡나무 무언인가가 예사롭지 않은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정상 오르는 길은 전부 갈참나무이고 소나무는 전혀없다.

비로봉 정상 직전에  돌탑 하나가 서있고...우측으로 곤천산이 보인다

곤천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황계지, 황간읍지, 동국여지 승람 등 각종 고서를

조사하여 보아도 정확한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곤천산은 건천 계곡에

위치하며 곤천산 아래 건천계곡에 건천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각종 문헌 기록이 남아 있어

발음의 유사성을 확인 할 수 있으나. 이것이 곤천과 건천이라는 지명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황악산 정상 직전 넓은 공터에서 전체가 모여서 막걸리 한사발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 정상에서 마시는 이 막걸리맛 먹어보지 않고는 말하지 마셔요

세찬 바람에 땀이 식어면서 추위가 엄습해와서 다시 베낭을 메고 정상으로 향한다

황악산 정상 아래의 헬기장

황악산 이정목

황악산 정상 삼각점(△영동 23 1981 재설)

황악산(黃岳山:1111m:10:40)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옛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이라고 불렀으나

직지사 일주문 현판이나 택리지에 보면 황악산(黃嶽山)으로 되어있다.

정상에서 서면 서쪽으로 민주지산, 남쪽으로 수도산과 가야산, 동으로는

금오산, 북쪽으로는 포성봉이 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전망은 꽝이다.

 

황악산의 黃(황)자는 靑(청), 赤(적), 白(백), 黑(흑)의 다섯 방위의 색 가운데 중앙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황악산 아래 직지사를 東國第一伽藍으로 불리었다고 하니 직지사가 나라의 중심부에 있다는 뜻이다.

나라의 중심 직지사의 뒷산 이름에 황(중앙)자가 포함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岳자는? 사실 황악산은 전혀 岳스럽지 않다. 부드러운 육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岳자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온갖 추측이 난무하다. 그 가운데 추풍령 이후 처음으로 우뚝 솟은

산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백두산에 시작된 대간은 추풍령에서 키를 크게 낮춘다.

전통지리학자 모씨는 이러한 모습을 수도꼭지에 호수를 꽂아 물을 멀리 보내고자 할 때 손가락을

누르는 형국이라고 한다. 즉 추풍령은 龍(산줄기)을 멀리 뻗도록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며,

추풍령에서 터져 나온 氣가 뻗어 가장 먼저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곳이 여기 직지사 뒷산이기

 때문에 ‘岳’자가 포함된 황악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황악산의 정상인 비로봉에서 단체 인증샷을 남기고...

비로봉 정상에는 비람의 세기가 강풍수준이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산 아래의 직지사를 바라보면 가보지 못한 아쉬움에 低頭三拜의 禮를 갖추고 형제봉으로 향한다.

형제봉으로 향하는 동료 산꾼들의 발걸음

가야할 형제봉과 여정봉의 모습

세월앞에 장사없지... 꼬부랑 할머니가 돼버린 갈참나무 노거수

능선 아래로는 충북 영동군의 모습이 보이고...

더 자세히 보이는 바람재와 여정봉

잠시후면 도착할 능선들

황악산의 주능선에는 소나무가 이상하게 한그루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직지천(直指川)의 발원지이다

지나온 황악산의 모습

형제봉(兄弟峰:1,020m:11:04)

조망은 별로 좋지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황악산 비로봉만 겨우 보인다.

두 개의 봉우리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어 형제봉이라 불리는 듯하다.

신선봉 갈림길(11:15)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신선봉이 나오고 대간길은 우측으로 꺽어져 급경사로

내려서야 하는데 선두에서 가던 김포팀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오렌지를 건넨다.

황악산에서 쉰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가자고 하니까 여성산꾼 한 분이 쉬~이가

마려워 앞에가니 잠시후에 오라고 해서 쉰다고 한다. 이곳은 상수도 보호구역인데 ㅋㅋㅋ

3번째 대간길이지만 김포팀들과 같이 어울려 산행해보기는 처음이다.

모두다 준족이라 숏다리인 범여가 범접하기는 어려운 분들인데 오늘은 너무나

많은 배려를 해줘서 고맙기만 하다... 근데 팀의 오야지분은 이벤트팀으로 가셔서 땡땡이 친 모양이다

신선봉 갈림길에서 바람재 내려가는 길

바람재:810m:11:33)

경북 김천시 대항면서 충북 영동군 상촌면을 넘나드는 고개로

바람이 불 때면 사람이 날아갈듯 많이 분다 해서 바람재란다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찾는 곳이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겨우 올라 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그들이었다.

발을 들여놓기 곤란할 만큼 망가진 데다 쓰레기투성이가 된 콘크리트 방카를

유산으로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산을 올라와

몇 시간씩 머물고 돌아간다고 한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쟁이

치러질 때면 봉우리에는 어김없이 미군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때에는 아예 며칠씩 상주하기도 했다.

그들의 성능 좋은 무전기로 유럽까지 교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종주해 본 산꾼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남으로 우두령에서 북으로 괘방령까지 긴 산길에서 유일하게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목장까지 있어 산꾼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돼 온 탓이다.

해발 870m의 21만여 평의 목장은 1994년에 모습을 갖추었다.

지나온 구간의 모습

‘바람재’라 일컫는 곳은 이곳 외에도 전남 장흥에 있는 호남정맥에서

땅끝기맥의 시발점이 바람재이며 무등산의 바람재, 월출산의 바람재,진해 시루봉의

바람재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곳 바람재는 충북 영동군 상촌면에서 경북 김천시 대항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서 과거 목장으로 개발되어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이었으나

지금은 텅빈 벌판에 억새만 우거져 분위기가 스산하다.

경고방송 시스템을 지나 바람재 정상으로 향한다

예전에 없었던 나무 계단이 나오고...

나무 계단이 너무 많이 설치가 되어있다.

예전에 정상에 있던 미군부대 가는길은 산림으로 복원되어 있고

버들강아지가 힘든 산꾼을 반긴다.

폐허가 된듯한 넓은 목장의 모습

신선봉의 모습

예전에 바람재 정상으로 오르던 미군부대 벙커가 있던 길은 부대가 이전하고

백두대간 복원을 한답시고 우회로를 만들어 놨다. 대간 복원 백번 찬성하오

그런데 기왕이면 원 대간길로 복원하지, 우회로는 뭐요. 내가 원 대간길로 가보니

심어논 나무들이 절반이상은 말라 죽었오.남부지방 산림청 나으리들...

당신네들 민초들의 피땀흘린 세금으로 복원했으면관리 좀 제대로 하시길 바라오.

남부지방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무인 감시탑

2009년 10월 31일 백두대간 북진길 때의 모습

바람재 정상(12:15)

예전에 없었던 넓은 공터에 벤치가 4개 있는데 여기저기

대구지방에서 생산되는 빈 술병들이 어지럽게 나뒹군다. 참 보기가 좋질않다.

여정봉(1,030m:12:25)

여정봉 이정목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삼성산으로 향하는데 내가 원 대간길을

갔다오는 사이에 졸지에 꼴찌가 되어 버렸다. 봉우리 정상에 도착하니

이곳도 김천시에서 의자 설치 작업중이고 주위 조망은 별로이다

여정봉에서 600m를 진행하니 전망이 좋은 암릉위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동료산꾼 하늘마음님과 박카스와 두유 하나를

나눠 마시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바람은 자꾸만 더 거세지는 느낌이다.

가야할 오늘의 마지막 구간의 마지막 산이 너무 높게만 다가온다.

그만큼 피곤하다는 이야기다... 하늘마음님도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저 산 넘지 않는거죠  하고 묻는다... 가봐야 알죠. 알면서도 대답을 미룬다.

정확히 대답하면 더 피곤해 할것 같아서... 발아래는 고즈늑한 암자 삼성암이 보인다.

꼴찌로 하늘마음님과 다시 능선 안부를 걷는다.

중간에 북진하는 다른 대간팀을 만나고 조금을 더 가니

우리팀들이 전부 모여서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시간을 갖고 있다.

또다시 휴식을 취한다. 동료산꾼들이 주는 간식을 염치없이 받아 먹으면서...

오늘 산행 분위기 정말 화기애애하다. 오늘처럼 최악의 컨디션에 선두들이

내빼버렸으면 아마 중간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를 컨디션에...

지나온 바람재 정상의 모습능선 사면으로는 멋진 노거수들이 즐비하다.

이곳 역시 황악산 구간과 식물분포도가 비슷하여 소나무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삼성산(三聖山:985m:12:50)

경북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와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영동군 쪽으로 경희대연습림 조림지가 있다.

산 정상에는 3등삼각점(△ 영동 314 1980 복구)이 있으며

동으로 진밭산, 동구지산, 덕대산 등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흥덕리의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

삼성산은  동으로 3개의 산이 조망된다고 해서 삼성산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정상은 조금 넓은 공터가 있긴 하지만 전망은 그리좋질 않은 편이다

삼성산 이정목

이곳에서 꺽어져 우측으로 내려서는데 여태껏 힘든 산행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등로는 완만하게 내리막길이다.

우측으로 억새밭이 즐비하고 잡목 사이의 대간 능선을 빠르게 진행한다

내리막길에 가속도를 붙인다. 활엽수림 사이의 길은 편하기만 하다

질매재 삼거리(870m:13:05)

희미한 길만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호초당산 가는 길이다.

헬기장에서 우회길로 향한다

우두령 헬기장(03:17)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인 우두령(질매재)이 보인다.

우두령 날머리 출구의 모습

우두령(牛頭嶺:720m:13:20)

경북 김천시 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을 연결하는 901번 지방도가 지나는

분수령으로 낙동강과 금강 수계의 발원지이며 우등령(소의 등)이 구전(口傳)되어

변했다고 전해지면 질매재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고개 위에는 우두령을 상징하는 하얀 소의 동상이 있고 동물이동통로가 있으며

고개너머 김천쪽에는 매일유업 김천농장이 자리를 잡고있다.

너무 힘들게 왔기에 우두령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우두령 안내표시석 뒷면

우두령 일대의 고지도

이곳 김천과 김천의 경계지역인 거창 웅양면 지역에도 이곳과 똑같은 지명인 우두령이 있다.

특히 수도지맥 구간인 김천 대덕면과 거창 웅양면 지역엔 산 지명이 소와 관련된 것이 많다.

소의 코를 닮았다는 시코봉, 소의 뿔처럼 생겼다는 양각산, 웅양면에 흰대미산 아래에 있는

소의 불알을 닮았다는 우랑동(牛郞洞) 등이 있다.최악의 컨디션으로 한 구간을 너무 힘들게 마쳤다.

 

우 대장님!  부탁입니다.  출발 멘트가 끝나고 잠 좀자게 해주소.

이곳에서 산행을 마치고 지난구간 식사장소인 추풍령 옥이가든으로 가는

길에 잠깐 사이에 깊은 잠에 빠진다... 도착후에 식당 샤워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산조아 감사님이 사주신 청국장을 맛있게 먹었다.

감사님 고맙습니다... 진정 空의 美德(보시)의 아시는 멋쟁이십니다.

추풍령에서 식사를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조금 늦은 시간

얼마나 피곤했는지 오자마자 잠에 떨어져 일어나니 다음날 새벽 3시다.